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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청혼하러 가는 길(21)

ㅇㅇ(125.129) 2020.03.29 14:13:45
조회 551 추천 50 댓글 14


서던의 정원 여전히 해바라기가 가득했다. 햇살은 따뜻했지만 여름의 끝자락이라는 것을 알리기라도 하는 듯 바람에는 찬 기운이 서려 있었다. 한스는 공주에게 묻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말을 꺼내진 않았다. 자신보다는 공주가 더 생각이 많을 테니까.


방금 전의 응접실에서의 대화는 별 다른 성과가 없었다. 크리스토프는 안나의 의견에 전적으로 따르기로 했고 안나는 결정을 내리기 전 한스와 단 둘이 대화하고 싶어했다. 엘사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는 것 같기도 했지만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보였다.


안나는 해바라기 옆에 있는 벤치에 앉았고 한스에게도 앉길 권했다. 한스가 자리에 앉자 안나는 해바라기를 보며 말을 꺼냈다.


“여기는 왕궁에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곳이에요. 저는 해바라기를 좋아하거든요. 그리고..”


“..?..”


“엘사를 처음 만난 곳이기도 해요.”


약간은 뜸을 들인 안나의 말은 행복하면서도 슬프기도 했다. 안나는 웃고 있었지만 우는 것 같아 보이기도 했다. 한스는 아무 말 않고 안나를 바라보았다.

안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해바라기에 손을 뻗었다. 해바라기와 안나는 정말 잘 어울렸다.


“..엘사는 어떻게 지내요?”


안나의 질문에 한스는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사실대로 말했다. 근신 처분을 받은 이후 어쩌다 한번씩 보긴 했지만 정확히 어떻게 지내는지 알 길이 없었다. 

안나는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실망한듯 한 표정은 숨길 수 없었다.


“한스.”


“네, 공주님.”


“저는 아렌델에 갈 거에요.”


“진심이신가요?”


“네.”


안나의 대답은 아주 단호했다. 안나는 해바라기 옆에서 한스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한스는 그런 공주의 모습에 놀라울 따름이었다. 

마치 뭔가를 결심한 사람처럼 안나는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미안하지만 난 당신을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어요.”


“…… .”


“나는 엘사를 사랑해요.”


안나의 말에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한스는 그런 안나의 모습에 자기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럴 거라고 예상한 것과 직접 확인하는 것은 달랐다. 아무리 한스라도 마음이 쓰린 건 어쩔 수 없었다.

서로를 향해 바라보는 시선을 먼저 피한 것은 한스였다. 도저히 안나의 얼굴을 바로 볼 수 없었다.


“막상 공주님께 그 말씀을 들으니 속이 쓰린 건 어쩔 수 없네요.”


한스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안나는 다른 사람은 몰라도 한스는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스가 진심이라고 했기 때문에 안나는 확실하게 그에게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마음을. 


“생각해보니..아직 제대로 거절하지 못한 것 같아서요. 미안해요.”


“조금의 여지도 없으십니까?”


“네.”


안나의 대답은 아주 담백했다. 조금의 틈도 없는 단호한 대답이었다. 그 순간 한스는 깨달았다. 설령 안나가 엘사에게 가지 않더라도 자신에게는 기회가 없을 것이란 것을. 모든 상황은 자신에게 유리했지만 단 하나. 가장 중요한 사실.


안나는 한스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 사실은 아마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한스는 한숨을 쉬며 씁쓸하게 웃었다. 안나를 데려가기 위해 온 것이었는데 오히려 안나를 두고 가는게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그럼 아렌델에 가는 건..엘사 때문이신가요?”


“..할 말이 있어요.”


“네?..”


“엘사에게 꼭 해야 할 말이 있어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안나의 입은 굳게 닫혔다. 한스 역시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안나의 거절 의사에도 불구하고 그는 좀 더 밀어붙일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 정도로 예의를 모르는 사람은 아니었다.

안나와 엘사가 만나든 만나지 않든 이제는 상관없었다. 두 사람 사이에 자신이 끼어들 틈은 없었다. 한스는 항상 물러날 때를 알고 있었다. 

비록 이번엔 좀 더 욕심을 부렸고 그 결과는 좋지 않았지만.

한스는 더 이상 나쁜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렇게 해 봤자 안나의 마음을 얻지 못하면 아무 소용없었으니까. 


한스는 안나를 바라보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마음처럼 어느새 날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곧 여름의 끝이었다.











엘사의 근신처분은 풀렸지만 어지간해선 방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가끔 왕실 서재에 갈 때를 제외하곤.

왕궁이 불탄 이후 모든 것을 다시 복원했지만 엘사의 기억은 항상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엘사에게 이곳은 더 이상 책을 읽는 곳이 아니었다. 책을 읽고 싶으면 항상 책을 가져와 방에서 읽었다. 서재에서 책을 읽는 대신 엘사는 구석에 있는 의자에 앉아 몇 시간이고 머물러 있었다.


서재의 열린 창문 사이로 바람이 불어왔다. 서던과는 다르게 찬 바람이었다. 엘사는 백금발을 쓸어 올리며 턱을 괴었다. 생각이 많아 머리가 어지러웠다.


루나드의 말, 안나와 한스, 부모님. 그리고 앞으로의 일들까지.

이 중에서 엘사가 선택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있는 일이 있는지 구분하려 했으나 의미는 없었다. 그저 그 자리에서 발버둥 칠 뿐이었다.


“..안나..”


엘사가 내뱉은 말은 연기처럼 허공에서 사라졌다. 안나를 보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아마 안나도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알게 될 것 같았다. 

그리고 안나라면 분명 그러지 말라고 하겠지.

한스가 떠난 지 시간이 꽤 흘렀으니 곧 아렌델에 도착할테고, 안나가 곧 도착한다는 말은 루나드에게도 대답을 줘야 한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루나드에게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자신이 안나를 좋아한다는 사실 만으로는 그는 절대 납득하지 않을 사람이었다.


엘사는 질끈 눈을 감았다.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기분이었다. 만일 이때 안나가 옆에 있었더라면.

그랬더라면 조금 다른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자신을 향해 미소 짓는 안나의 모습이 보고싶었다.

안나가 너무 보고싶었다.








덜컹거리는 마차 안은 조용했다. 한스와 안나는 서로를 마주보고 앉아있었지만 딱히 눈을 마주치거나 하진 않았다. 

아니, 한스는 안나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안나는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고보니 그 동안 어떻게 지냈어요?”


“...이제라도 물어봐 주시니 감사하네요.”


“..미안해요.”


“저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몇 가지 사소한 일을 빼면..”


정적을 깬 공주의 말에 한스가 대답했다.

이미 공주와 많은 대화를 한 그였다. 사실 공주가 자신을 피하지 않을까 하는 노파심이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안나는 한스를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을 마주하며 바라보고 있었다.


서던을 떠날 때 크리스토프는 만일 자신의 동생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전쟁이라도 불사하겠다고 압박을 주었다. 한스는 그 정도로 생각이 없진 않으니 걱정말라고 그를 안심시켜야 했다.

크리스토프는 안나가 무슨 심정으로 아렌델로 가는지 모르는 것 같았다. 사실 한스도 짐작만 할 뿐 안나의 속을 알 수 없었다.


“..엘사는..”


“엘사 스스로 선택한거에요. 공주님 탓이 아닙니다.”


한스는 공주의 말을 자르며 대답했다. 그는 공주가 스스로를 책망하지 않길 바랐다. 어디까지나 엘사의 선택이었고 그에 따른 책임 역시 엘사가 져야 할 문제였다. 

안나는 아무 말 않고 고개를 숙였다. 아무리 한스의 말이 옳다고 하더라도 죄책감이 고개를 들고 있었다. 

자신 때문에 엘사가 왕위를 포기하는건 원치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아렌델로 가는 이 길도 안나에게 편치만은 않았다. 엘사는 볼 수 있다는 기쁨과 동시에 확실하게 자신의 결심을 전해야 한다는 걱정이 안나를 아프게 하고 있었다.


“...전 엘사가 저 때문에 왕위를 포기하지 않길 바라요.”


“…… .”


“그 말을 하러 가는 것 뿐이에요.”


“...엘사가 납득할 진 모르겠네요.”


“…… .”


한스의 말에 안나가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미 안나가 마음을 먹은 시점에서 엘사가 납득하든 하지 않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안나는 어쩌면 엘사를 다시 만나면 결심한 자신의 마음이 쉽게 무너질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엘사를 위해서 모든 걸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엘사를 좋아하니까.

한스는 그런 안나를 보며 이 일의 열쇠는 루나드가 아닌 안나가 갖고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솔직히 모르겠습니다. 저도..”


“…… .”


“폐하도, 엘사도...이제는 공주님도 모르겠네요. 다들 무슨 생각을 하는지..”


“..한스..”


그 말을 마지막으로 한스는 창문 너머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이제는 전부 될 대로 되라 싶은 심정이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과 서로 엇갈리기만 하는 사람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상황이 한스를 힘겹게 만들고 있었다.

캄캄한 암흑 속을 더듬거리며 나아가는 느낌이었다.

안나도, 한스도 아렌델로 가는 이 길에 끝나지 않길 바라며 하염없이 창 밖만 바라보았다.

아렌델에 가까워질수록 점점 공기가 차가워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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