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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REMAKE/ 운전교육 -22-

화로불판구이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0.03.31 22: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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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연 보러 오실래요? 이번 주말 시립 음악홀에서 작은 페스티벌이 있어요.’



 해가 조금씩 기울어 가는 토요일 오후, 엘사는 자신의 집 안 소파에 앉아서 멍하니 창밖을 응시했다. 테이블 위 두 장의 콘서트 티켓. 지난번 두 번째 운전교육 날 모든 일정을 끝내며 안나를 태웠던 정류장에 다시 내려주며 인사를 했고, 안나는 주머니에서 고이 접혀있는 티켓 두 장을 엘사에게 건넸었다. 꼭 와달라는 말과 함께 얼떨결에 자신의 손에 쥐여져버린 티켓을 착잡한 마음으로 보았다. 오늘 날짜로 오후 6시에 열리는 팝 페스티벌의 메인 헤드라이너로 적혀져 있는 안나의 이름을 한 글자씩 읽으며 중얼거렸다.



 “진짜 연예인은 연예인이구나..”



 잠시 지나갔던 그때의 일을 회상했다. 얼떨결에 말해버린 자신의 속마음 과 핸드폰에 저장된 안나의 개인번호. 유진의 묘지를 떠나오던 중 운전석 밑에 처박혀 있던 엘사의 핸드폰을 발견하고는 너무도 쉽게 잠금을 풀어 안나 자신의 핸드폰 번호를 추가했다. 집에 와서야 그 사실을 알아차렸지만 이미 액정 안에는 잘 들어갔냐는 부재중 메시지 알람이 띄워진 후였다. 하루아침에 남들과는 다른 사이가 되어버린 안나를 생각하니 그제서야 현실의 부담감이 스멀스멀 느껴지고 있었다.


 

 “미쳤어..어쩌자고 저질러 버린거야..”



 담배를 입에 물어 불을 붙힌 뒤, 한모금 깊게 빨아들인 후 고개를 푹 숙였다. 몽실몽실 피어나는 담배연기가 볼을 타고 머릿결 사이로 흘러들어갔다. 오늘따라 쓰게 느껴지는 담배 맛에 잔뜩 얼굴을 찡그렸다. 몇 번을 더 빨아들인 뒤 아직 많이 남은 담배를 거칠게 비벼 끄고는 소파에 몸을 잔뜩 기대어서는 천장을 바라봤다. 하얀 벽지만이 그녀를 반겨줄 뿐이였다.



 “이러다 인생 종 치는거 아냐?”



 섬뜩한 상상이 엘사의 머릿속을 뒤덮었다. 안나는 가요차트 순위권에 매일 거론되는 아이돌이다. 그런 아이돌과 사랑을 약속했다고? 팬들이 과연 가만히 있을까?, 상상만으로도 눈앞이 깜깜해지자 마른세수를 하며 얼굴을 쓸어내리던 엘사는 눈을 감고 작게 칭얼거리며 신음성을 내뱉었다. 사생팬 이라는 것들도 분명 있을텐데.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안나 인데 없을 리가 없었다. 그 사람들에게 들키면 길가다 돌을 맞아도 어색하지가 않을거다. 나중에는 분명 집까지 찾아와서 문을 두드리겠지.


 

 머릿속에 굉장히 큰 교회의 종소리가 울리고, 초로한 맹지의 땅 위에 세워진 자신의 비석이 스쳐지나가는 듯 했다. 엘사 아렌델, 안나와 사귀다 극성의 팬들에게 맞아죽은 불쌍한 영혼, 이곳에 잠들다.



 “내 청춘이 그렇게 끝날 수는 없지.”



 제발. 부디 안나가 자신과의 관계를 세상에 알리지 말았으면 했다. 설마 그럴 리는 없겠지, 안나도 생각이 있다면 둘만의 조용한 관계로서 유지하길 원할 거다. 온 세상이 알아야 할 때는 모든 것을 버릴 수 있을 때, 안나와 자신이 입을 맞추고 도망쳐도 아무도 잡지 않을 때여야 한다.


 

 진짜 같은 망상들이 순식간에 지나가자 또다시 허탈함이 비워진 공간을 메웠다. 그건 머나먼 미래의 일들이다. 지금 눈앞에 있는 두 장의 티켓 만이 현재 고민의 중심이여야 했다. 천정을 바라보고 감았던 눈을 떠서는 다시 테이블위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티켓 두 장을 보았다. 가기 싫은 것은 절대 아니였다. 안나의 공연하는 모습은 분명 예쁠 것이고, 좋아하는 사람을 보러가는 것인데 싫을 리가 없지 않은가.



 “누구랑 가야되니..”



 떠오르는 얼굴들 중 가장 확실한 한명이 있긴 했지만, 전혀 같이 가고 싶은 마음이 드는 인물이 아니였다. 애써 외면하려고 했지만 결국 엘사 자신의 인맥을 탓해야 했을 뿐. 싱글벙글 비웃는 듯이 기분 나쁜 웃음을 하며 엘사의 얼굴 주위를 빙글빙글 도는 갈색과 금발이 섞인 단발머리의 친구. 아니, 친구이자 반 원수지간이라고 해도 믿을 여자.


 

 “아 진짜 얘는 아닌데”



 아무리 허공에 한탄을 내뱉어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오히려 그 정적이 그녀와 같이 공연을 보러가라고 부추기는 것 같았다. 엘사는 긴 한숨을 내쉬고 자신의 핸드폰을 들어 전화번호부를 열었다. 저장된 연락처 8명. 정말 없어도 없구나 라고 새삼스레 깨닫게 되는 순간 이였다. 한눈에 들어오는 씁쓸한 전화번호부 속에 자주 연락하는 번호로 저장되어 있는 그녀의 이름을 눌렀다. 라푼젤 피츠허버트.



 두어번의 헛기침 후에 통화 화면으로 바뀐 액정과 들려오는 컬러링에 집중했다. 배경음악도 이상한 힙합음악으로 장식되어있는 것이 라푼젤의 정신세계를 보여주는 것만 같았다.



 “제발 받지마라. 그냥 혼자가도 되니까”



 혼자가면 안나가 서운해 할게 뻔했지만, 그 정도야 충분히 감수할 수 있는 일이였다.


 엘사가 중얼거릴 때. 들려오던 컬러링이 멈췄다.


 

 “..예아 시스터. 내가 보고 싶었어?”


 “씨발.”


 “첫마디가 화끈하네. 왜 전화했어?”
.
.
.
 간단하게 자초지종을 들은 라푼젤은 엘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가겠다고 대답했다. 그리곤 환호를 내지르며 신나했다. 어찌나 기뻤던 것인지 수화기 너머로 갈라지는 고음을 질러대는 바람에 엘사의 쌍욕을 한번 더 듣기는 했지만 말이다. 시끄럽게 노래를 흥얼거리고 자신의 공장 앞으로 오라고 일방적으로 통보해버리고는 뚝 전화를 끊어버린 덕분에 엘사의 이마에 핏줄을 내비치게 만들었지만 그녀는 그리 신경쓰지 않는 듯 했다. 어차피 전화기 너머로 보이지도 않았을 테지만.



 자신과 안나 사이에 있던 일들은 이야기하지 않았다. 가장 친한 친구라지만 라푼젤의 입은 날아가는 깃털보다 가볍다는게 지금까지 친구로서 얻은 교훈이였기 때문에 그녀에게는 적당히 다른 이유를 둘러대었다. 어차피 그런 것에 깊게 생각할 성격도 아니여서 걱정할 필요도 없었지만 만약이라는 가정이 있기 때문에 공연장에 도착하더라도 안나에 대해 자신의 감정을 철저히 숨길 생각 이였다.



 아마도 지난번 맡겨놓았던 자신의 애마, 포르쉐 930이 모든 수리가 완료되었을 것이다. 겸사겸사 출고해서 오랜만에 시동을 걸 상상을 떠오르니 금세 기분이 좋아지는 스스로에게 실소를 내뱉었다.


 

 익숙하게 길을 찾아 운전을 하고 몇 개의 가로수를 지나쳐 교외의 한산한 지역으로 들어섰다. 언제 보아도 휑하니 비어있어 숭숭 바람이 불어오는 마을로 들어서자 익숙한 파란 지붕을 가진 라푼젤의 정비공장이 눈에 띄었다. 전혀 어울리지 않는 현대적인 공장양식을 가진 구조와 자동차 브랜드들의 엠블럼이 차례차례 박혀있는 간판을 보자 확실히 근처 허름한 저택들과는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분명 땅값이 싼 곳을 찾아보다 결정된 것일 것이다.


 

 공장 부지 안으로 차를 움직였다. 이, 삼십대는 족히 세울 수 있을만한 크기의 주차장을 지나자 한편에 마련된 직원 전용 주차장에 빨간 스바루 임프레쟈가 주차되어있었다. 그 옆에 허벅지가 맹수에게 뜯겨나간 듯 가로로 깊게 파인 청바지와 하얀 포인트가 들어간 빨간 후드티를 걸치고 길게 하품하는 라푼젤이 서있었다. 고개를 저으며 혀를 찬 엘사는 라푼젤 옆 빈 공간에 천천히 차를 주차했다.


 

 “야 어차피 니차타고 갈 건데 뭐 하러 주차 하냐? 문이나 열어줘”



 시동을 끄고 운전석을 나서는 엘사에게 틱틱대는 라푼젤을 애써 무시했다. 다행이 머리를 다듬고 꾸미고 귀걸이를 찬 꾸민 모습을 보니 안도감이 들었다. 평소처럼 뒷산의 들개마냥 산발이 된 헤어스타일에 화장조차 하지 않았다면 바로 다시 타에 탑승해 혼자 도망치려는 상상을 했던 엘사는 그녀의 시선을 받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내차 타고 갈꺼니까 내린거지.”


 “...어?”


 “.....?”



 둘 사이에 잠깐의 정적이 일고, 라푼젤은 어색하게 웃으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헤실헤실 웃는 입 꼬리를 보니 주먹이 잠시 부들부들 떨렸지만 이내 그럼 그렇지 라며 작게 중얼거린 뒤 다시 운전석으로 몸을 돌렸다.



 “야 내가 바빠서 그랬어 바빠서~”


 “공짜로 해주는 거니까 아무 말도 안하는 거다.”


 엘사가 어금니를 꽉 깨물고 대답했다.



 “그럼, 그럼~ 공짜인데 좀 기다려야 할 수도 있는거지~”



 능청스럽게 검은색 BMW의 조수석에 탄 라푼젤은 당연하다는 듯이 안전벨트를 맸다. 라푼젤의 공장 차단문을 노려보던 엘사는 버튼을 눌러 시동을 걸었다. 저 안에 자신의 애마가 아직도 상처 입은 채로 주인을 기다리고 있을텐데. 애석하게 발걸음을 돌려야 한다는 것이 너무 싫었다. 라푼젤은 그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헤실헤실 웃으며 삑삑 네비게이션에 주소를 써 넣었다.



 “야야 빨리 가자 늦겠다.”



 차 안의 시계는 5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왜 이렇게 급해, 아직 한 시간이나 남았는데”


 “와..너 진짜 아무것도 모르는 거야? 이 페스티벌이 그냥 페스티벌인줄 알아? 올해 가요대상 후보들이 다 나오는 페스티벌이야 완전 우리 땡잡은 거라고”



 입을 떡 벌리며 미간을 찌푸리며 닦달하는 라푼젤을 흘겨본 엘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 평소에 관심있게 지켜본 세상도 아니지만 이정도로 호들갑 떨 정도인가 라고 중얼거렸다. 핸드폰을 들어 무언가를 검색하던 라푼젤이 보여준 액정 안에는 안나가 꼬깃꼬깃 접힌 채로 주었던 티켓의 가격이 쓰여 있었다. 일반석 15만원이라는 거금 이였다.



 “..설마”



 신나서 어쩔 줄을 몰라하는 라푼젤을 옆에 두고 엘사는 입술을 깨물었다. 사람 많은곳은 질색이였기 때문이다.


 

 ‘안나 말로는 작은 페스티벌이랬는데..’



 “야 빨리가자 빨리! 아 오늘 목좀 나가겠는데?”



 발을 동동 구르는 라푼젤을 한 대 쥐어박아주고 싶은 마음을 애써 참으며 기어봉을 잡았다. 조금은 거친 느낌으로 엘사는 내비게이션의 길을 따라 빠르게 운전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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