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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REMAKE/ 운전교육 -29-

화로불판구이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0.04.11 16:3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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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불꽃을 태우며 하루의 일을 끝마친 태양이 저물어 갈 무렵, 하늘은 조금씩 짙은 군청색의 세상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아직 사라지지 않은 황금색 노을이 수평선 너머 유화처럼 펼쳐져 있고 그 위에 덧칠한 듯 섞인 어둠. 자리를 내어주는 그 묘하고 아름다운 광경이 유리창 너머 펼쳐질 때. 엘사는 꿈나라 속에서 빠져나와 눈을 뜨게 되었다. 코끝에 간질거리는 고소한 빵 내음이 풍기자 고개를 살짝 들어 방안 주위를 슬며시 둘러보았다.


침대 옆 화장대 위에는 고이 접어 올려두었던 청자켓이 그대로 있고, 방안의 바뀐 풍경은 단 하나 빼고 무엇도 손대지 않은 듯 했다. 바로 옆 자리에서 같이 잠들어 있던 안나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만 빼고 말이다. 엘사는 유리창으로 고개를 돌렸다. 쳐져있던 커튼이 어느새 걷어져 노을과 밤이 만나는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아름다운 한 폭의 그림을 보는 듯이 멍하나 창밖을 응시하던 엘사는 슬며시 몸을 일으켜 머리맡에 상체를 기대었다. 따듯한 이불과 은은히 방 안을 감도는 빵 냄새. 아직은 덜 깨어진 정신과 갑자기 바뀌어버린 수면시간 덕에 헤롱거리며 어깨를 은근히 짓누르는 피로감이 감돌았지만 고소한 내음에 몸은 위장이 비어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라도 하는지 작게 꼬르륵 거렸다.


“배고파...”


크로와상, 따듯한 식빵에 우유 한 컵. 빠듯하게 씹히는 바게트에 생크림. 여러 상상들이 스쳐 지나가며 위장을 자극했다. 지금 딱 한입 크게 베어 물 수 있을 빵 한 덩이와 씁쓸한 아메리카노 한잔이 있었다면 참 좋았을 텐데. 라고 생각한 그녀는 비어서 홀쭉해진 배를 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청바지를 입고 잠에 들어서 그런 것인지 바지는 몸에 착 달라붙어 허벅지를 죄여왔다.


갑갑했던 것인지 바지를 벗으려 했던 엘사는 이 객실 안에 혼자가 아니라는 걸 떠올리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근데 어디간거야?”


침실 안에 붙어있는 화장실로 걸음을 옮겼다. 바닥의 타일은 물에 젖어 있었다. 분명 안나가 사용했던 것이겠지. 그리 생각하자 묘한 감정이 살짝 일렁였다.


‘같이 잠들었었지...기분 나쁘진 않았겠지?'


안나를 찾으러 화장실의 불을 끄고, 몸을 돌린 그녀의 눈 안에 화장대 옆 작은 의자위에 올려진 한 벌의 츄리닝을 보았다. 회색과 하얀색이 섞인 상, 하의로 이루어진 편안한 폴리에스터 소재의 가벼운 옷이였다. 고이 접어진 한 쌍의 옷을 펼쳐 보자 자신의 몸에 딱 맞을 사이즈 인 것 같았다. 의아스럽다는 표정을 짓고는 고개를 갸웃거린 엘사는 허니마렌을 떠올렸다.

’입으라고 주는건가?‘


나름 센스있는 사람이구나, 라고 생각했다. 털털해 보이는 외모와는 다르게 섬세하게 자신의 손님들을 케어해주는 모습. 그리고 떠오른 잠들기 전 나누었던 대화, 거침없이 피임도구를 권유하던 것을 되새기자 볼이 빨갛게 물들어 화끈거리고 말았다. 과연 달라고 말했다면 무엇을 건네주었을까? 콘돔?, 젤?. 상상에 상상을 더해 점점 깊고 야한 쪽으로 이어지는 흐름에 홱 고개를 저으며 날려 보내려 노력했다. 거울 속 너머 보이는 붉은 얼굴을 보자 씁쓸한 미소와 함께 자조적인 한숨이 밀려나왔다.


”무슨생각을 하는거야..“


잡념들을 떨쳐낸 엘사는 잠시 츄리닝을 바라보고는 어제 집에서 옷을 고르고 고르다 입을 것이 없어 또 똑같은 패션으로 차려입은 청바지와 하얀 블라우스를 벗었다. 부디 안나가 단벌신사처럼 느끼지 않기를 바랐지만 결국 만날 때마다 바뀌지 않는 패션이 스스로도 한심스럽기는 했다. 언젠가는 날을 잡아 옷장의 의상들을 새로 갈아주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청바지와 블라우스, 하얀 면 티까지 벗자 검은색 브래지어와 팬티차림이 된 엘사는 거울 속 자신의 몸을 훑어보았다. 매일같이 니코틴 카페인 알코올로 살아가는 몸이지만 빠지지 않고 꾸준히 운동을 즐기며 살아온 덕분인지 군살 없이 탄탄한 복근과 이곳저곳에 붙어있는 잔 근육들이 유려한 선을 만들어 내었다. 물론 어제 공연장에서 보았던 안나의 무대의상 겉으로 드러난 잘 관리된 육체와는 당연히 차이가 있겠지만 나름대로 스스로의 모습이 뚱뚱하다고 느낀 적은 단 한 번도 없을 정도로 열심히 가꾸어 온 몸매이다.


간단하게 몸을 스트레칭하며 어깨와 복근, 광배 언저리들을 훑던 그녀는 문득, 등 뒤의 큰 흉터에 눈길을 주었다. 멍하니 거울 너머 보이는 자신의 등에 깊고 길게 자리 잡은 갈색의 상처. 하얀 등 위, 이질적으로 보일정도로 징그럽게 피부위에 군림하고 있는 그것을 보자 순식간에 하얗게 차가워지는 두 볼과 기계적인 무표정으로 바뀌었다. 상처는 왼쪽 승모근 언저리부터 시작해 날갯죽지를 지나 오른쪽 등근까지, 등 뒤를 대각선으로 크게 자르듯 가로질러 있었다.


”,,,,“


여러 기억들이 순식간에 지나쳐갔다. 걷잡을 수 없이 떠오르는 지난날의 과거와 고통들이 쓰릴 듯이 스쳐가고 그것을 엘사는 무덤덤하게 받아들인다. 이미 오랫동안 해 오던 방식이었다. 습관처럼 자리 잡은 일상 중에 하나일 뿐. 목 끝을 치는 여러 단어들과 문장들을 아무렇지 않게 삼켜 내려 보내고 투명한 거울속의 자신에게 자조적인 웃음을 지어 보냈다. 언제나 그렇듯이.


거울 속 스스로에게서 눈길을 돌린 엘사는 마저 펼쳤던 츄리닝을 입었다. 가볍고 부드럽게 감싸오는 것이 잘 때 입더라도 숙면을 취하는데 불편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기분 좋은 콧노래를 부르며 옷의 감촉을 느끼던 그녀는 아차, 하며 청바지를 개어두고 블라우스를 옷걸이에 걸어 두었다. 그리곤 침실의 문 앞으로 걸어갔다. 일어났을 때부터 바깥에서 풍겨와 코끝을 자극하는 고소한 향기. 그 향을 따라가면 안나가 있을 것이다.


살며시 연 문 너머로 거실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빛나는 백열등 아래로 시원한 인테리어들과 파란색 스웨이드 소파, 그리고 소파의 앞의 하얀 테이블. 상상했던 빵들과는 달리 아무것도 없는 테이블과 자리에 있어야 할 안나가 보이지 않자 어리둥절하며 주위를 둘러보던 엘사는 신발장 안에 넣어두었던 안나의 신발마저 없는 것을 보자 하얗게 사색이 되었다.


”설마..나 버리고 간거야?!“


허겁지겁 실내화를 신고 객실의 문손잡이를 뜯듯이 잡아 돌리며 밀치듯 밖으로 달려 나갔다.


”..안나야!“


이름을 소리치듯 부르며 달려 나간 엘사의 눈앞에는 테라스의 하얀색 테이블 위 빵들과 커피 두잔, 그리고 파란색 철제의자에 앉아 사라지는 석양이 담긴 수평선을 바라보던 안나가 있었다. 엘사의 외침에 살며시 고개를 돌린 안나는 엘사와 눈이 마주치자 싱긋 웃으며 부드러운 눈길을 보내주었다.


”일어났어요?“


”아..음..빵 냄새가 여기서 나는거였네..“


”허니마렌씨가 가져다 주셨어요. 이 커피두요, 돈 지불한다고 했는데도 극구 사양하시던데요. 굉장히 좋은 분 같아요.“


자신이 생각했던 크로와상과 바게트, 그리고 안나를 보자 머쓱하게 뒤통수를 긁적거리던 엘사는 주춤거리며 그녀의 옆자리에 천천히 앉았다. 그러자 안나는 미소를 지우지 않고 따듯하게 김이 올라오는 아메리카노 한잔을 건네주었다.


”고마워“


”저 말고 허니마렌씨에게 하세요. 이건 에피타이저래요, 지금 저녁 만들고 있는 것 같던데요?“


대단한 솜씨구나 싶었다. 아침에 보았던 주방에 빵 굽는 기계도 있었던 것인지 크로와상 하나를 집자 따듯한 열기가 느껴졌다. 베이커리의 능숙한 제빵사가 방금 갓 만든 것처럼 먹음직스럽게 구워진 갈색의 표면을 보자 비어있는 뱃속이 아우성치듯 진동했다. 한 입 크게 베어물자 고소한 바삭함 뒤로 폭신하고 촉촉한 크로와상의 살짝 달달한 맛이 혀를 자극했다.


급하게 우걱우걱 빵 하나를 들이밀다 목이 막혔는지 커피를 들고는 호호 불어 한 모금 홀짝이는 엘사를 흐뭇하게 바라보던 안나는 고개를 돌려 점점 사라지는 붉은 빛들을 응시했다. 안나와 같이 앉아있게 되자 빨갛게 달아오르는 엘사의 두 볼처럼 석양 역시도 오늘의 마지막을 화려하게 장식하려는 듯 더욱 붉게 타오르며 자리를 내어주고 있었다. 그럴수록 테라스의 구석구석에 달린 작은 전등의 빛이 조금씩 밝아졌다.


”풍경 진짜 예뻐요. 어디서 이런 곳을 찾은거에요?“


”그런 나도 신기해..“


차올랐던 배고픔을 우선 잠재운 엘사는 그제야 자산의 두근거리는 심장과 얼굴의 열기를 느꼈는지 어색하게 커피를 한, 두 번 더 홀짝거리고는 테이블위에 올려두었다. 무의식적으로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더니 아차, 하며 아쉬운 듯 다시 담뱃갑 안에 집어넣었다. 그런 엘사의 모습을 보자 피식 웃던 안나는 테이블 한쪽으로 치워두었던 재떨이를 엘사의 앞으로 밀어주었다.


”괜찮아?“


”뭐 담배피는 모습이 싫지는 않아서요.“


”..으,음..그래주면 고맙지..“


입에 담배를 문 채로 고개를 갸웃거리며 볼을 긁적이던 엘사는 능숙하게 담배에 불을 붙여 한 두 모금 빨아들였다. 다행이 바람은 엘사의 오른쪽으로 살랑여 담배연기가 안나에게 닿지 않았다. 멍하니 검게 물든 하늘을 처다보는 엘사와 턱을 괴고 엘사를 바라보는 안나.


무시하려 해도 무시할 수 없는 눈빛을 느끼자 엘사는 부자연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안나의 눈동자를 흘깃 스쳐보았다.


”..왜 그렇게 봐?“


”혹시 자다가 뭐 이상하지 않았어요?“


”...너 잠꼬대 하던데.“


”아니 그거 말구요.“


눈동자를 돌리며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딱히 무언가 걸리는 점은 없었던 엘사는 작게 고개를 저었다. 손가락 사이에 달린 담배의 끝에서 매혹적인 연기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혹시 나 잠꼬대 했어?“


”으음..아니요. 모르면 됐어요, 다행이네~“


”뭐야..알려줘“


”알면 재미없잖아요~“


혼자만이 아는 비밀이라도 되는 듯. 입을 가리곤 작게 키득거리며 웃는 안나를 보자 왠지 모를 부끄러움이 일었다. 혹시 자면서 자신도 모를 작은 해프닝이 있었던 걸까. 혹시 놓친 것이라도 있을지 다시 기억을 되새기던 엘사는 도저히 안나가 웃는 이유를 찾지 못하겠다고 생각하자 작게 신음성을 뱉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자 키득거리며 좋아하던 안나는 더더욱 부드러운 눈길로 엘사를 바라봤다.


”나중에 말해줄게요.“


”그러면 너무 궁금해지는데“


”궁금하라고 일부러 그러는거에요“


서로 미소를 머금은 채 한 차례 눈빛을 맞추던 안나와 엘사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보이지 않는 저 먼 바다의 어딘가를 응시했다. 아마도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흩날리는 파도의 소리만이 감싸오는 펜션의 테라스 위, 어색하지만 싫지 않은 묘한 기류에 두 사람 모두 편안히 의자에 몸을 기대어 한동안 아무 말 없이 그대로 있었다.


엘사는 담배를 피우고, 안나는 커피를 홀짝였다.


그녀들의 침묵이 깨진 것은 허니마렌이 저녁음식들을 쟁반에 담아 조심조심 계단을 타고 올라올 때였다. 까르보나라 파스타와 봉골레 파스타 두 그릇과 칵테일 두 잔이 올려 진 쟁반을 테이블에 내려놓자 안나와 엘사는 동시에 감탄사를 내뱉으며 멍하니 쟁반 위 음식들을 쳐다봤다.


”우와..이것도 직접 하신거에요?“


”대단하시네..“


”원래는 여러분들한테 로브스터에 스테이크를 대접하려고 했는데 재료가 다 떨어져서요“


”아뇨 아뇨! 이것만으로 너무 감사한걸요!“


아침의 옷차림에서 간편한 트레이닝복으로 바뀐 허니마렌은 환한 바다사람의 넉살좋은 미소를 지어보이며 쟁반에서 그릇을 하나씩 테이블로 옮겼다. 안나는 허니마렌의 말을 듣자 손사래를 치며 연신 괜찮다는 제스쳐를 취했다. 까르보나라는 제대로 된 조리법으로 완성된 것인지 면 표면에 달걀의 코팅이 잘 입혀져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돌았고 봉골레 파스타는 조개 외에도 잘 익은 새우가 같이 얹어져 있었다. 바닷가의 풍경 앞이라 그런지 꽤나 어울리는 비주얼이었다.


”맛있게 드셔주시면 제가 더 감사할 것 같네요.“


음식을 바라보던 안나와 엘사를 무언가 섞인 듯이 묘한 눈길을 보내며 번갈아 바라보는 허니마렌과 그 의미를 아는지 모르는지 안나는 포크를 들어 자신 앞에 놓인 접시에 까르보나라를 옮겨 담기 바빴다.

”엘사씨는 아직인가요?“


”..네?!“


”아직 인가보네요. 후훗“


말에 담긴 속뜻을 알아들은 엘사는 화들짝 놀라며 달아오른 볼을 한 채로 허니마렌을 바라봤다. 전등의 빛 사이로 마주친 눈동자 안에 들어있는 풋풋한 사랑을 하는 연인에게 보내는 무언의 응원. 엘사는 화끈거리는 열기에 푹, 고개를 숙여 힐긋 옆자리의 안나를 훔쳐봤다. 안나는 파스타에 정신이 팔려 포크로 면을 돌돌 말아 입안에 넣기 바빠 보였다.


”우음, 마시서여!“


”천천히 드세요, 아 이건 제가 요새 취미로 하는 칵테일인데요...“


허니마렌이 수줍게 웃으며 초록색과 갈색의 술이 들어있는 두 잔의 술잔을 그녀들 앞으로 각각 하나씩 가까이 밀어주었다.


”이건 ‘미도리샤워’ 라고 해요. 안나씨는 술을 잘 못하신다고 하셔서 만들어봤어요 멜론이니까 드시는데 어렵지 않을거에요“


안나에게는 초록빛깔의 은은하고 달콤한 향이 올라오는 긴 칵테일 전용 잔이 놓여졌다. 그리고 엘사의 앞에는 클래식한 크리스탈 형식으로 세공된 술잔 안에 갈색의 술이 얼음과 함께 가득 담겨있는 것이 놓여졌다. 잔의 한쪽에는 잘 썰린 라임 한 조각이 끼워져 있었다.


”엘사씨는 술을 잘 드실 것 같으니까..“


”잭콕이군요.“


”아..? 아세요?“


”..예전에 바텐더 일을 좀..“


엘사가 능숙하게 라임을 짜 넣고는 잔을 살짝 흔들며 휘휘 젓는 것을 보자 허니마렌과 안나 모두 신기하듯이 엘사를 바라보았다. 엘사는 부담스러운 두 사람의 눈빛에 머쓱하니 잭콕을 한잔 들이켜 목을 축이곤 눈을 피하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맛있네요.“


두 사람의 눈빛이 바뀌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듯, 엘사의 능숙한 손길과 칵테일을 한잔 입에 머금어 세세하게 맛을 보는 것 처럼 혀를 살짝 굴리거나 술잔 안의 향취를 맡는 그 모습들에 허니마렌은 신기한 표정을 하고선 말없이 지켜보았다.


”엘사 바텐더였어요? 몰랐는데“


안나는 자신 앞에 놓인 술잔에 꽃혀있는 빨대를 잡아 쪽쪽 나누어 마셨다. 달달하면서도 새콤한 칵테일의 맛이 좋았던 것인지 아니면 차가운 술의 냉기에 머리가 지끈거렸는지 눈을 질끈 감고는 기분좋은 미소를 지어대었다.


”잠깐 일 년 정도..어쩌다 보니 일한 것 뿐이야“


”사람들 많이 안 왔겠다..“


”...놀리는거야?..“


”헤헤 설마요~“


미세하게 올라오는 알코올에 벌써 취기가 조금씩 도는 듯 안나의 표정이 편안하게 늘어졌다. 허니마렌은 안나와 엘사의 잡담이 듣기 좋았던 것인지 어느새 테이블 건너편 하나 남은 의자에 걸터앉아 다리를 꼬았다.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자 엘사는 자신 앞에 놓여있던 재떨이를 살며시 밀어주었다. 입 꼬리를 올리며 고개를 까딱거린 뒤 불을 붙여 길게 한 모금 빨아들였다. 그 모습에 안나와 엘사는 불어오는 바닷바람과 편안히 몸속을 감도는 따듯함이 섞여 포근한 얼굴로 눈웃음을 지으며 잠시 동안 서로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좋네, 살면서 이런 것들을 잊고 살았었는데.“


”어떤 것들인데요?“


”...있어, 그런게.“


엘사는 열었던 입을 다시 닫아야만했다. 목 끝에서 넘쳐 올라왔던 ‘사랑하는 사람과 편안한 밤을 보내는 것’ 이라는 말 때문이었다. 자신의 부모님과 여러 여행을 떠나가며 느꼈던 자극 없는 보드라운 이불속의 편안함 같은 행복한 기억속의 감정들 말이다. 지금 엘사는 어릴 적의 묘한 흥분감과 닮은 저릿한 간지러움이 심장 속에 되새겨지고 있었다. 가족의 사랑, 그 넘은 범위 안에는 연인과의 은은하고 작은 떨림이 있는 사랑 또한 들어가 있을 것이다.


무의식적으로 말을 뱉을 뻔 했던 스스로에게 속으로 작은 안도의 한숨을 쉰 엘사는 아무렇지 않은 척 포크를 들어 봉골레 파스타의 면을 돌돌 말아 한입 먹어보았다.


”최고네요. 너무 좋은걸요“


허니마렌은 엘사의 만족스러운 표정을 보자 환한 미소를 띄웠다. 끝까지 타들어간 담배를 재떨이에 조심스럽게 비벼 끄고는 끙차, 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돌려 바람이 불어오는 어두운 바닷가를 응시했다.


”전 이만 내려가 볼게요. 행복한 밤 되시길 바라요.“


”벌써 가시게요?“


거의 다 비워진 까르보나라 파스타의 그릇을 싹싹 긁던 안나가 고개를 들어 허니마렌의 등 뒤를 멍하니 바라봤다. 언제 다 마셔버렸는지 술잔의 안에는 얼음만이 남아 천천히 녹아내리고 있었고 알코올에 푹 취한 듯 두 볼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두 분이서 즐기시는 시간을 뺏을 수는 없지요“


마지막 말을 남기고 계단을 내려가는 허니마렌을 말없이 떠나보낸 두 사람은 슬며시 다가오는 정적을 그대로 두었다. 안나가 헤죽거리며 엘사의 앞에 놓여있는 술잔과 봉골레 파스타를 보며 입맛을 다시자 피식, 웃은 그녀는 안나의 앞, 비어있는 그릇과 봉골레 파스타를 바꾸어 옮겨주었다.


”맛있어?“


”네에에..“


평소에는 잘 먹지 못하겠지. 공연과 방송 출연하며 주기적으로 카메라 앞에 서있어야 하는 안나는 분명 식단 관리도 철저하게 받고 있을 것이었다. 오랜만의 작은 만찬에 고개를 숙여 우걱우걱 위장 속으로 파스타면을 집어넣는 것을 보며 애잔한 눈빛으로 그것을 바라보다 살며시 눈을 감아 선선한 바람을 쐬었다.


”팔자 좋구만~“


”..우음..엘사를 보고있으면 가끔 아저씨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우으음“


”차라리 욕을 하지 그래“


엘사 특유의 씁쓸한 미소, 문득, 무언가 짚이는 것이 있는지 안나는 봉골레파스타를 씹는것도 멈춘 채 흐릿한 눈동자로 엘사의 얼굴 이곳저곳을 멍하니 관망했다.


”웃는 모습이 예뻐요“


”..갑, 갑자기?“


안나의 말에 화들짝 놀라하며 고개를 돌려 안나의 흔들리는 동공에 눈을 맞춘 엘사는 들리지 않게 침을 꿀꺽 삼켰다. 안나는 엘사의 시선에도 눈을 피하지 않았다. 엘사의 입, 코, 눈, 살랑이는 하얀 백금발 머릿결을 차례대로 훑으며 잘 만들어진 예술작품을 관람하는 것처럼 고개를 갸웃거리기도 하고 눈을 가늘게 뜨며 몽롱한 정신에도 미세한 부분까지 알아보려 노력하는 듯 했다.


”처음..보다 자주 웃어서 내 기부니가.. 좋아요~“


”...밥 먹어 밥.“


부담스러운 눈길에 헛기침을 한 뒤 담배를 입에 문 엘사는 봉골레 파스타의 그릇을 턱으로 가리키며 불을 붙였다. 점점 올라오는 취기에 이미 신호등의 빨간불처럼 달아오른 두 볼을 가진 안나는 힘없이 흐느적거리며 엘사가 가리키는 턱의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 또 다시 파스타 그릇에 고개를 숙이고 포크를 들어 뒤적거렸다.


”미도리샤워 도수는 높지 않을 텐데..“


”..우으음..“


담배 한 모금, 그리고 잭콕 한 모금을 번갈아 즐겼다. 얕게 몸을 타고 일렁이는 알코올과 뱃속의 따스한 열기. 바닷바람이 가져다주는 포근한 향취에 몸에 힘을 쭉 빼고 철제의자의 등받이에 뉘이듯 기대었다. 그에 반해 안나는 봉골레 파스타를 한 입 가득 집어넣고는 반쯤 엎드린 자세로 흔들리며 입 안의 면들을 기계적으로 씹어 넘기기에 바빴다.


”괜찮아? 너무 많이 마신거 아니야?“


”..우으음 갠차나여..“


엘사가 걱정스러운 듯 팔자눈썹을 늘어트리고 안나의 어깨를 작게 두드리자 안나는 힘없이 바람에 쓸리는 갈대처럼 흔들거리며 손을 휘적거릴 뿐 이였다. 이미 풀려버린 혓바닥에 뭉글거리는 단어들을 듣자 씁, 하며 혀를 찬 엘사는 빈 그릇을 멀리 치워버렸다. 그리곤 미도리샤워가 담겨있던 술잔을 들어 코를 대고 숨을 들이마셔 보았다.


”..내가 아는 레시피 그대로인거 같은데..“


”..엘사는 바텐더래요..바텐더..우읍!!“


”야! 괜찮아?!“


열심히 파스타를 씹어 삼키던 안나의 동공이 갑자기 커졌다. 손을 뻗어 자신의 가슴을 두드리는 안나를 보자 화들짝 놀란 엘사는 그녀를 일으켜 세우려 했다. 하지만 안나는 엘사의 손을 뿌리치더니 손을 뻗어 엘사 앞에 놓여있던 잭콕이 담긴 술잔을 잡아채고는 쭈욱 들이키고 말았다.


”그거 먹으면 안 돼!!“


”우음..우음..크으으..!!“


꿀꺽 꿀꺽 원 샷으로 담겨있던 술을 모두 마셔버린 안나와 자신의 술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광경을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볼 수밖에 없었다. 엘사는 의미없는 손을 뻗어 안나의 입에서 술잔을 때어낼 뿐. 이미 얼음만이 덩그러니 남은 차가운 술잔에 하얗게 질린 표정으로 볼을 긁적이며 안나의 상태를 확인했다.

”야 이거 다 마셔버리면..“


”우와아아..기분 조아아...“


분명 확 올라오는 취기에 정신 차리지 못할 것이다. 갑자기 몸을 타고 올라오는 열기와 알코올의 몽롱함에 입을 헤 벌리고 두 눈이 풀려 어두운 하늘 어딘가를 응시하던 안나는 잔뜩 늘어진 표정으로 환하게 웃으며 엘사의 흔들리는 눈빛을 맞추기 위해 노력했다.


”이쁘어어어어~“


”들어가서 누워있어야겠다. 자. 가자“


그릇은 허니마렌이 치워 줄 것이다. 그게 아니더라도 자신이 안나를 침실로 옮긴뒤 가져다 두어도 되겠지. 그리 생각한 엘사는 안나의 양 어깨를 잡아 힘을 주어 일으켰다. 풀린 두 다리로 몸을 간신히 지탱하던 안나는 엘사의 이끌림에 파도를 따라 흐르는 오크통처럼 반쯤 기대어 한걸음 씩 천천히 몸을 옮겼다.


”우으음..에르사 향 조아아아아..“


자신의 목덜미에 코를 처박고는 크게 들이쉬자 엘사는 딱딱하게 굳어 팔을 버둥대며 객실의 문고리를 더듬거렸다.


”담, 담배냄새야..자, 침대로 가자“


”우웅..시러여어어 한잔만 더어어..“


”더 마시면 쓰러진다..“


안나가 이렇게나 술에 약할지는 몰랐던 엘사는 미도리샤워를 들이키던 안나를 막지 않았던 자신에게 살짝 원망스러움이 일었다.


어기적 어기적 안나를 반쯤 업은 부축한 상태에서 방 안으로 들어온 엘사는 어둑한 실내에 불을 밝히려 스위치를 찾기 위해 더듬거렸다.


”여기 어디 있었던 거 같은데..“


”...우으음..“


바깥에서 비추어 오는 전등과 달빛으로도 찾을 수 없이 맨 벽만 더듬던 엘사는 소파의 실루엣을 보자 잠시 안나를 내려놓으려 스웨이드 소파 쪽으로 걸어갔다.


”안나야 잠깐 여기 있..우읍..!!“



그때였다. 엘사에게 몸을 반쯤 기대어 휘청거리던 안나는 두 팔을 뻗어 엘사의 목덜미를 감싸고는 소파에 주저앉으며 그대로 자신에게 잡아당겼다.


그리곤 거침없이 입술을 맞대어 키스했다.


버둥거리는 엘사의 팔과 커진 동공을 신경 쓰지 않은 채 잠시 엘사의 입술에 키스하던 안나는 살며시 얼굴을 떼어내고는 미소를 머금고 흔들리는 엘사의 두 눈을 맞추었다.



흔들림 없는 분명하고 초롱거리는 눈동자로.


”가지 말아요.“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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