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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Praying prey 58~59

개구리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0.04.12 23:01:31
조회 428 추천 52 댓글 7


1~57화

https://sulgal.tistory.com/m/2109











151.


"어떻게...이런 일이."


아무도 입을 열지 못한 병실 안에서, 오로라가 탄식을 섞어 말했다. 안나는 침대가 아닌, 창가 밑 구석에서 미동도 하지 않은 엘사를 안은 채 웅크리고 있었다. 한나는 멜리사의 침낭을 내려다보며, 안나에게 다가가려고 하는 작은 여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한나, 오로라, 제인이 메가라가 운전하는 차를 통해 병원에 도착했을 때, 막 응급실로 들어가는 한 무리의 의료진들을 목격했다.





누군가 다치거나 죽는 게 일상인 병원이기에,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수 있는 광경이었지만, 한나는 그 의료진들 속에서 익숙한 두 사람과 낯선 사람을 볼 수 있었다. 안나가 엘사를 안으며 의료진들에게 둘러싸여 응급실로 들어가고 있었다. 뒤에선 한 여인이 맨발로 안나를 뒤따르고 있었다. 마치 안나의 모습을 어렴풋이 섞어 놓은 외모를 가진 그녀를 보았을 때, 한나는 직감적으로 저 사람이 이두나임을 알 수 있었다.




네 사람이 응급실로 들어가자, 텅 빈 침대 사이에 간호사들이 모여있는 붉은 침대 속에서 엘사는 편안한 듯 눈을 감고 있었다. 기나긴 새벽을 지나며 겨우 쪽잠으로 버틴 채 졸린 눈을 비비며 엘사를 만날 생각으로 가득 차 있던 한나는 안나와 닮은 사람이 눈 앞에 있어 당황한 이두나의 앞에서 주저앉아 울고 말았다. 전화 한 통, 스마트폰의 연락처에 임시로 저장되어 있는 안나에게 제인이 말한 실험의 내용을 말했더라면, 어쩌면 엘사는 목숨을 건질 수도 있었다. 시간이 걸리고, 우선순위에 밀릴지라도 이두나를 살릴 수 있을 방법은 존재했다. 대체, 무엇이 엘사를 몰아붙인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잠시 뒤, 메가라가 의료진들을 모아 사태 수습을 주도했고, 한나는 급히 눈물을 훔치고 남은 사람들과 합류해 반쯤 넋이 나간 상태로 안나의 병실에 들어왔다.





"안나..."


이두나가 안나에게 다가갔다. 안나는 말없이 이두나에게 안겼고, 방향을 잃은 눈동자 속 시선은 병실을 배회했다.


"일단 침대에 누워 있는게 어떠니?"


이두나는 최대한 부드럽게 말했다. 안나는 더욱 엘사를 끌어안았다. 아랫입은 벌벌 떨고 있었다. 미쳐버린 사람을 보는 것 같다고 오로라는 생각했다. 한나는 이두나를 내려다 보면서, 이두나의 발이 상처투성이란 것을 알았고, 서랍을 열어 구급상자를 꺼내왔다.


"이두나, 아니 음..."


막상 대면을 하니, 불러보기로 마음먹었던 한 단어가 쉽사리 나오지 않았다. 안나는 한나에게 아렌이라는 성을 가지고, 가족으로 맞이했지만, 대면 없는 음성으로만 대화를 나눴던 이두나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궁금했다.


"발 좀..."


이두나는 한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한나 맞죠...?"


"맞아요, 어쩌다 보니까... 이렇게 만나네요."


한나가 씁쓸하게 혀를 찼고, 이두나는 안나의 옆에 기대어 앉아 한나에게 두 발을 보였다. 피와 진물이 뒤엉켜 있는 발바닥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쓰라림을 느끼게 했다. 한나는 구급 상자를 열어 거즈와 붕대, 알코올 솜, 그리고 생리식염수 통을 꺼냈다. 간호사를 불러올 수도 있지만, 한나는 라푼젤이란 간호사와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다. 엘사를 알고 있는 사람으로써 지금 이 모습을 본다면, 충격을 받을 게 분명했다. 이런 이유로 병실에 들어올 때 엘사가 노출되지 않게 몸으로 가리면서 카운터를 지나와야했다.


"오로라, 나 좀 도와줘요."


한나는 고문을 당하면서, 엘사와 안나와의 악몽같은 기억 말고도 특정할 수 없는 많은 지식들을 주입당했다. 하지만 응급처치는 기억 속에 뚜렷하게 존재하지 않았기에, 오로라의 도움이 필요했다. 오로라도 몸을 숙여 생리식염수 통을 열어 이두나의 발바닥에 식염수를 조금씩 흘려 부었다. 이두나가 신음을 토했지만, 여전히 안나를 안은 팔을 풀지 않았다. 되려 힘을 주어 안나를 안았다.


"조금만 참아주세요, 사장님..."


이두나는 오로라를 바라보며 고통을 털듯 고개를 끄덕였다.


"한나, 사장님은 제가 치료할 테니까, 한나는....이걸로."


오로라는 한나에게 알콜 솜을 한 움큼 집어 넘겼다. 한나는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있었다. 한나는 엘사에게 다가가, 피에 젖은 입을 알콜 솜으로 닦아주었다. 턱 밑을 닦으려 했을 즈음, 안나가 한나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왜,"



"너도 떠날 거야?"


갑작스러운 질문에, 한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너도, 멜리사하고 엘사처럼 말없이 가버릴 거냐고."


손목을 쥔 안나의 손에는 힘이 들어가 있었고, 한나는 손에서 힘을 뺐다. 한나가 마주하고 있는 안나의 눈에는 희망이라곤 조금도 남아있지 않았다. 할 수 있는 거라곤, 그저 숨이 끊어진 엘사를 안은 채로 온기를 유지해야겠다는 정적인 몸부림을 치고 있을 뿐이었다.


"가지마..."


"나 어디 안가. 난 실험 대상에서도 제외됐어."


한나가 CIA의 실험 대상에서 제외된 이유는 간단했다. 개체들은 모두 목 뒤에 숫자가 쓰여 있었지만, 한나는 그것들을 달지 못해 즉석으로 3호 개체라는 명목상 이름만 가지고 있었다. 또한 한나가 부릴수 있는 바람은 실험 대상이 되는 능력에서 제외되었다. 그들이 원하는 건 얼음, 불, 풀, 돌의 능력과 생명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주는 능력이었다. 불확실한 바람을 다루는 한나는 사실상 배제당했던 것이었다.


"거짓말 하지마."


안나는 한나의 손목을 놓지 않았다. 한나는 묵묵히 남은 손으로 알콜 솜을 집어 엘사의 턱 밑으로 남아있는 피얼룩들을 지워나갔고, 이내 한나의 손가락은 엘사의 피로 붉게 물들었다.


"제발 가지 말라고."


한나는 바람을 만들어 안나의 눈물을 날려보냈다.


"난 갈 곳도 없어, 너하고, 이두나가 날 받아줬잖아. 안심해, 그러니까... 좀 누워 있으면 안 돼?"


말을 마친 한나가 이두나를 흘끗 바라보았다. 이두나는 한나의 발언에 눈을 내리깔았지만, 이내 시선을 한나와 마주쳤다. 슬픈 웃음이 보였다. 한나는 이두나도 혼란스러울 것이라고 느꼈다. 바로 앞에 있는 안나와는 머리색만 제외하면 판박이인 도플갱어로 비춰졌을 것이다.


"안나, 일단 일어나요. 네?"


어느덧 이두나의 발에 붕대를 매어 묶은 오로라가 안쓰럽게 안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싫어."


"고집 부리지 말고, 거기 누워 있는다고 엘사가 돌아오는 건 아니잖아. 차라리 편한 자세로라도 있어. 네 발도 정상은 아니니까."


한나는 안나의 발을 쳐다보았다. 슬리퍼가 신겨있었지만 진득한 핏물이 배어 있었다. 안나는 전형적인 패닉 상태에 빠진 것이 아니었다. 조금 더 깊게 들어가면, 새 인연을 맺으면서 잃고, 잃고, 잃었던 경험들은 일종의 트라우마로 변질되어 있었다. 겨우 사라지나 싶었던 정신적 괴질은, 끝내 엘사의 숨이 끊어지면서 겉잡을 수도 없이 재발하고 말았다.


"안나."


품 안에서 벌벌 떨고 있는 가엾은 늑대개를, 이두나가 타이르듯 안나의 이름을 불렀다.


"잠깐 엄마 좀 바라봐 주겠니?"


아직, 이두나는 안나에게 '엄마'라는 역할을 맡게 된 것이 낯설었다. 응급실에서 메가라 일행과 마주친 이두나는, 경악을 하면서도 침착함을 유지하려 했던 메가라에게서 한 마디의 말을 들었다.



[사장님과 스칼렛은 유전자가 일치해요.]




심증에 머물러 있던 추측이 확신으로 변했지만, 떨어져 있던 기간은 단순히 손가락 길이 정도가 아니었다. 오죽하면, 처음 블루라운드에서 안나를 만났을 때, 알아보지도 못하고 딸의 예명을 누설했고, 어미를 알아보지 못한 딸은 어미를 향해 질책을 날렸을 정도였다.


"어서, 울지 말고."


이두나가 안나의 턱에 손을 밀어넣어 자신을 향해 돌렸다.


"엄마도... 갈 거야?"


"그게 무슨 소리니?"


"가지마, 제발 가지 마요."


안나는 이두나의 말을 듣지도 않은 채, 이두나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이제 더 이상 헤어지고 싶지 않으니까...제발요."


"안나, 이제 엄마는 너랑 떨어지지 않을 거란다. 그러니까, 엄마 얼굴 봐야지?"


애써 웃음을 지어보이며, 이두나는 안나의 턱을 들었다. 붉게 부어오른 애절한 눈이 이두나와 마주쳤다. 이두나는 안나의 어깨를 팔로 들으려고 했지만, 양 발은 각각 붕대로 묶여 있어 쉽게 일어설 수 없었다. 이두나의 손짓에, 오로라가 이두나의 오른 어깨를, 한나가 안나의 왼쪽 어깨를 잡아 일으켰다.


"제인, 잠깐만 비켜주시겠어요?"


오로라의 부탁에, 간이 침대에 앉아 잠자코 그들을 지켜보던 제인은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이 사람은...누구죠?"


"아, 안녕하세요. 저는..그..."


제인은 어떻게 자신을 소개해야 할지 준비하지 않은 상태였다. 아톤에 몸을 담았던 사람이니만큼, 신중하게 말하고 싶었고, 이 사람들의 심기를 최대한 건들고 싶지 않는 선에서 소개하고 싶었다.


"한스의 전 비서였대요."


그런 제인의 부단할 노력을, 오로라가 단칼에 잘라버렸다.


"메가라 씨한테 이것저것 정보들을 제공해 주고 있어요. 오늘 새벽부터 말이예요."


어떻게든 얼버무리는데 성공한 제인은 두 아렌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이두나의 눈에는 의심의 조짐이 있었고, 울프독의 눈에는 슬픔이란 감정 외에는 읽을 정보가 없었다.


"무슨 정보를 제공하고 있죠? 저희도 들어봐야 할 것 같은데."


안절부절하는 안나를 침대에 눕힌 다음, 간이 침대에 걸터 앉은 이두나가 말했다. 부드럽게 포장되었고, 속을 알 수 없는 어투였다.


"아... 정확한 것들은 메가라 씨에게 USB로 전달했는데요. 제가 기억하는 것들 중에는..."


제인은 울프독의 품에 안겨있는 2호 개체를 바라보았다.


"저 아이의 사인을 유추할 수 있는 실험이 있었다고나 할까요...?"


"무슨 실험인데요?"


오로라는 이 대화에 끼어들지 않기로 했다. 여기서부턴 아렌 일가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내용이었고, 메가라와 제인의 대화를 어깨 너머로 들은 오로라는 사실상 관련이 없는 사람이었다.


"제가 목격했던 실험들 중에는, 잠을 재우지 않고 능력을 한계까지 쓰게 하는 실험이 있었어요. 그 중 최악은, 저 아이처럼 피를 흘리고 죽은 경우였는데... 그리고, 당신은 분명히..."


제인은 말끝을 흐렸다. 이미 죽었던 사람이 좀비처럼, 더군다나 멀쩡하게도 제인 앞에 살아서 질문을 하고 있었다. 그녀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연기를 하고 있지 않은 것 같았고, 무엇보다 이두나가 입은 피에 젖은 수의는 그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제인의 머릿속에 각인시켰다.


"...죽었다고 들었어요."


"이름이 뭐죠?"


이두나가 제인에게 물었다.


"제인 캠벨이예요."


"제인, 지금은 제 생사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저 아이를 살릴 방법이예요. 유용하다 할 만한 정보는 없어요?"


이두나는 지금 내뱉는 말이 터무니 없는 비상식이란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비상식적인 일을 직접 겪었으니, 적어도 이두나 자신에게는 상식적인 일이 되었다.


"...없어요. USB에 들어있는 것들 중에 있을지도 모르지만... 제가 아는 선에선 개체들이 사람을 살렸다는 건 들어보지도 못했어요. 개체들의 소생 방법도 못 들어봤어요."


제인이 고개를 저었다. 그 때, 문을 열고 메가라가 안으로 들어왔다. 일 순간 병실 안의 모든 사람의 시선이 메가라에게 꽂혔고, 메가라는 방사능처럼 박히는 시선들에 밀려 잠깐 주춤했다.


"응급실 사람들과 조율을 해서, 아침에 있었던 일들을 모두 없는 걸로 처리했어요."


메가라가 이두나에게 말했다. 이 사태와 가장 가까이 있었던 안나에게 말하는 것이 정상이겠지만, 안나의 상태는 정상이라고 말하기엔 부족함이 있었다.


"그리고 이게 기쁜 일이어야 할지, 나쁜 일이어야 할지 모르겠지만."


메가라가 윗잇빨로 아랫입술을 힘없이 깨물었다. 안나가 모든 것을 잃은 표정으로 메가라를 올려다 보았지만, 메가라는 그 눈빛을 외면했다.


"연구팀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어요, 그리고 그쪽에선 우선순위를 바꾸기로 했고요. 항바이러스제가 아니라.... 죽은 사람을 살리는 시약으로 말이예요."


"그럼...멜리사, 엘사, 살릴 수 있어?"


안나가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살릴 수 있냐고."


"안나, 메가라 씨도 많이 힘들어 할 거란다."


이두나가 안나를 다독였다. 이두나는 안나가 저 두 아이와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 턱이 없었다. 하지만 하나 알 수 있는 사실은, 안나는 두 아이를 동생 이상으로 아끼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었다. 마치 아이들의 언니라도 되는 것처럼 각 팔에 한 명씩 끌어안고 있었고, 당장 계산해 보아도 두 사람간의 공백 기간 동안 가장 가까이 있었던 두 아이일 것이기에, 안나의 슬픔과 방황하는 분노는 정당했다.


"당장은 두고봐야지. 얼마나 걸릴지는 나도 몰라. 하지만 이두나 사장님이 완전하게 살아나셨잖아. 그렇다면 '살릴 수 있다'는 전제는 깔고 들어가야지."


엘사의 피에는 죽은 세포도 살려내는 재생 성분이 들어 있었고, 이것은 단순하게 안나가 남겼던 자료들에 남아있는 이론들을 사실로 이끌었다. 연구팀에서도 확실한 증거를 대라고 했으며, 그 증거에는 이두나, 그리고 엘사가 있었다. 증거가 확립되었으니, 이젠 실험 착수만 남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조건이 좀 있어."



"무슨 조건인데. 누구 죽이면 돼? 몇 명?"



안나는 어느새 바지에 끼워 두었던 MEU를 한 손에 쥐어 엘사의 팔 위에 놓고 있었다. 방아쇠울에 놓여있지 않았지만, 안나의 손은 사시나무처럼 떨고 있어 금방이라도 검지가 방아쇠로 미끌어질 것 같았다.



"그런 조건이 아니야. 이 실험을 하려면....엘사의 피가 필요해. 아주 많이."




"엘사는 이미.. 아니야. 아니라고."



안나는 메가라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눈치챘다. 엘사의 피가 필요하단 뜻은, 연구팀이란 자들이 엘사의 피가 굳기 전에 체내에 있는 피를 최대한 뽑아놓겠다는 뜻이 되었다.



"안나, 지금은 이 방법밖에 없어."



"씨발, 왜. 안 데려가겠다며, 근데 왜 이제와서 데려가려고 해?"


안나의 숨소리가 찢어질 듯 쌕쌕거렸다.



"시체팔이라도 하게?  왜, 그쪽들 종특이잖아."



"안나, 말이 좀 심한 거 아니야?"



보다못한 한나가 안나에게 말했다. 안나가 정신이 없는 사이에 지켜본 메가라의 일상은 자신을 위한 삶이 아닌, 안나를 위해 쪽잠으로 버티며 살아온 21일이었다. 물론, 한나 또한 엘사의 피가 생각해둔 것보다 더 많이 뽑아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다른 사람, 특히 제인이 그런 말을 꺼냈다면 입에 스마트폰을 쑤셔넣고 주먹이 부서질 때까지 내질렀을 것이었다. 그러나 메가라가 말해서, 한나는 속으로 안나에게 사과하며 메가라의 편을 들었다.





"얘네들이 뭔 짓을 할 지 몰라, 어쩌면 너도 리스트에 다시 올릴지도 모른다고."



안나는 부릅뜬 눈으로 메가라를 노려보았다. 메가라는 여유없는 얼굴을 하며 밤새 입어둔 재킷의 구김새를 손가락으로 눌러 풀었다.



"안나, 이건 선택지가 없어. 엘사가 살아있었더라면 기존 유화책을 썼을 텐데, 저런 상태라면 언제 피가 굳을지도 몰라. 응고 방지제도 한계가 있어. 너도 알잖아. 질질 끌어봤자 해결 될 일은 하나도 없는 거."


"듣기 싫어."


"지금 이 상황에선 내 말을 듣는게 가장.."


"듣기 싫다니까!"



안나는 권총을 벽에 던졌다. 주인의 손을 떠난 불행한 커피색 권총은 벽에 잔 상처를 남기고 바닥에 떨어졌다. 한나는 권총을 집어들어 탄창을 뺐고, 슬라이드를 쭉 잡아 빼 약실의 탄환을 추출했다.


"대체 어디까지 날 피말리게 할 거야. 애초에 너희 지휘부가 병신같은 맨헌트만 안 내렸어도, 시발 당텍의 신원을 제때 파악했으면 이런 일은 없었어. 엄마는 이런 일도 안 겪었을 거고, 멜리사, 엘사는 안 죽었을 거야. 시발 병신같은 농부새끼들, 다 뒈져버렸으면 좋겠네."



참아왔던 본심이 안나의 입에서 기관총처럼 튀어나왔다. 안나는 그중에서, 접선 지역에서 안나에게 총을 쏜 CIA 파견팀인 트리플 2를 제일 증오했다. 그들이 판단을 잘했더라면, 적어도 멜리사가 개입을 했어도 두 동생을 데리고 안전하게 복귀해서, 안나는 엘사와 멜리사, 그리고 이두나를 가까이서 지켜볼 수 있을 미래가 있었다. 그러다 문득, 한나를 바라보았을 때, 한나는 씁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안나는 그만 말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분노는 구멍뚫린 풍선처럼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정말 그랬다면, 난 여기 없었을 거야."


간단명료하게 말한 한나였지만, 그 안에는 슬픔이 있었다.


"한나, 널 만났던 게 싫다는 뜻은 아니야."


"알아, 안다고. 애초에 내가 태어난 이유가 한스가 구상한 비극의 장치였으니까.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해."


한나는 겉으로는 안나의 발언을 두둔했다. 하지만 몸 속 가득 퍼진 쌉싸름한 맛의 이기적인 슬픔은 안나의 시선을 피하게끔 만들었다.



"나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올게."


한나는 몸을 돌려 문을 향해 발을 떼었다.


"어디 가면 안돼. 꼭 돌아와."


"누가 들으면 죽으러 가는 줄 알겠어?"


문을 열던 중, 한나가 고개를 돌려 안나를 향해 담담히 말했다. 안심하란 듯 표정에서 씁쓸함을 게워낸 한나는 병실을 나섰다. 문이 닫히자, 안나는 다시 메가라를 노려보았다. 명백한 증오가 담겨있는 그 눈빛을 메가라는 읽을 수 없는 평이한 시선으로 답했다.



"안나, 내가 장담할게. 엘사를 훼손하는 일은 없을거야. 내가 장담할게."


"무슨 수로?"


"네가 가지고 있다는 인사 파일이라면 충분한 조커가 되고도 남는다는거, 잊었어?"


메가라는 안나가 가진 카드패를 직접 알려주었다.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되었고, 안나도 잊고 있었다. 메가라가 상황을 통제할 수 있는 절대적인 상황이었다. 하지만 메가라는 다른 선택지를 향했다.



"적절히 우릴 협박하면, 엘사에게 위해가 가는 일은 없을거야."



메가라의 위치가 흔들릴 수도 있는 제안이었다. 하지만 상부는 단순히 메가라의 협상 능력 부재로 판단하지 않을 것이었다. 안나의 주변에는 지금은 숨이 멎었지만, 엘사가 있었고, 밖으로 잠시 나간 한나가 있었다. 또한 정신이 붕괴되었을지라도, 안나는 아렌이기 이전에 스칼렛, 그리고 울프독이었다.


"날 믿어."


메가라는 진심을 다해 말했다.


"아니면 네가 수락할 수밖에 없는 조건들을 제시할게."


"협박이지?"


안나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고, 안나의 이빨 끝에는 피가 맺혔다.


"협박이 아니야, 회유지. 제인?"


메가라의 호출에 멀뚱히 서있던 제인은 짐짓 놀란듯 잠깐 몸을 떨었다.


"아, 네, 네... 혹시, 한스에게 복수하고 싶지 않으세요?"


"복수? 그 새끼, 어디있는지 알아?"


"알긴 하는데...일단 제 신변부터 보장해주신다면 한스의 일거수 일투족을 모두 말해드릴 수 있어요."


제인은 나름 용기있게 안나에게 말했다. 새벽의 심문이 있었을 때, 제인은 메가라에게 신변 보호를 요청했지만, 메가라는 거절했다. 경호를 붙일 수도 있었지만, 다르게 접근해 보면, 제인의 카케무샤들이 모두 살해되었다. 이는 한스가 생각 이상의 정보력을 과시하고 있다는 암시를 주었다. 아톤의 야수부대, 그리고 정보 부서는 러시아를 중심으로 다른 나라들의 방첩 기관과 특수부대원들을 스카우트해 운영되고 있었다. 개중에는 메가라가 알지 못하는 CIA, 협력 관계인 MI5의 전직 요원들도 있을 게 분명했다. 거의 대등한 정보력에서는 적과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수가 거의 동일하다고 보아야 했다.



또한 아톤에서 역으로 CIA에 스파이를 심어 놓을 수도 있었다. 안나의 신뢰를 잃기보단, 차라리 안나에게 보호를 요청하는게 이로울 것 같았다. 물론 메가라가 믿을 만한 사람들을 아렌의 주변에 심어 두었지만 오히려 메가라의 신변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었다. 그래서 메가라는 샐리맨더로 잠시 몸을 숨기며 실험을 지켜볼 생각이었다. 이미 필립스와 사전에 말을 맞추었고, 지식 탐구에 미친 인도주의적 커피중독자는 '밤새 토론을 나눌 사람이 생겼다'면서 흔쾌히 수락했다.



"메가라한테 부탁해."


"이쪽에서 운용 가능한 인원도 제한이 있어. 그리고 이미 너희들 주변에 알게 모르게 경호를 붙여 놓았고. 대놓고 보호하면 오히려 더 표적이 되기 쉬워. 차라리 지금 네 주변에 묶여 있는게 가장 나은 선택지일 수도 있지, 안 그래? 전 리트리버씨?"


"그건 어디서 들었어."


"우리 전산망에 잠깐 업데이트 되었던데?"


안나는 에리얼을 탓할 생각도 들지 않았다. 지금 와서 무어라 말한들 달라지는 건 없었고, 안나의 앞날에 걸림돌이 되는 것도 아니었다. 정보 누설을 막으려고 불필요한 살생까지 저지른 사람에게 안나는 질책을 할 자격이 없었다.


"알았어. 그 새끼를 잡는다면... 그리고 너희 쪽이 엘사에게 최대한 간섭하지 않는다면... 뭔들 못하겠어."


안나는 적대적인 태도를 누그러뜨렸다. 모든 일을 망친 원흉, 그 사람을 카드로 꺼냈다면, 안나가 더 고집을 필 이유는 없었다. 메가라의 속셈에 휘말릴지라도, 한스를 죽이거나, 잡아야 한다는 목적은 여전했다.


"근데, 대의적인 명분이 있어야 가능하지 않겠어? 개인의 사적 제재로 움직일 너희들이 아닐텐데."


집단에서의 개인, 특히 국가의 안보를 다루는 비밀 기관에서는 사심은 철저히 배제되었다. 국가에 귀속되는 만큼, 자신의 권리 또한 배제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안나 또한 기관에 몸 담아 일한 적이 있었기에, CIA의 풍토를 잘 알고 있었다.


"밤새도록 제인의 USB를 뒤져본 보람이 있었어. 블루라운드에서 처음 만날때, 황금 초승달 건 얘기했지? MI5쪽에서 바쁘게 처리하고 있다던 그 마약 건 말이야."


"그게 뭐 어쨌는데?"


"제인의 USB에서 아톤이 그쪽 마약 제조에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는 정보가 나왔어. 파견된 MI5 요원들을 매수했다는 정황도 나왔고, 마약에 관련된 거라면 얼마나 죄가 큰지 알고 있지? 너라면 잘 알고 있을 거라고 믿어."


"난 그 때 자발적으로 핀 게 아니야, 쑤셔먹힌거야."


"아직도 얼음물 못마시지?"


"당연한 걸 왜 물어."


안나가 서랍 위에 놓여진 물컵을 집어 목을 축였다. 엘사에게 컵을 내밀었지만, 안나는 엘사가 죽었다는 사실을 잠시 망각하고 있었다. 깊은 한숨을 내쉬며 안나가 컵을 서랍 위에 내려놓았고, 한 팔은 엘사의 허리를 감싸 안았고, 멜리사의 침낭 위에 남은 손을 얹었다.




"전 세계 마약의 85%가 그곳에서 생산되고 있고, 다른 기업도 아닌 제약 기업이 그곳에 발을 대고 있지. 또한 현지 카르텔의 마약 수출 경로 중에는...미국도 포함하고 말이야. 이걸잘 엮을 수 있다면 못해도 ADX 플로렌스, 잘 하면 사살 권한이 부여될 수도 있어. 현 정부가 마약으로 얼마나 골머리를 썩히는지 너도 잘 알 거 아니야."




"정보를 엮어 여론을 펼치는 데 얼마나 걸려?"


"5일에서 6일 정도, 엘사를 데리러 올 연구팀은 이틀 뒤에 도착할 예정이야."


안나는 엘사를 내려다보았다. 기약 없는 이별까지 이틀이 남았단 남았단 소리와 다를게 없었다.


"네가 화 내는건 이해해. 내가 최대한 지켜볼 거야. 걱정...은 하지 말아줘."


"바디백에 넣지마."


안나는 엘사가 떠날지라도 최소한 죽은 사람이 아닌 살아있는 사람으로 메가라의 연구팀이 대우해주길 바랬다. 생명을 다루는 일에, 생명을 경시할 것이라는 아이러니가 발생하진 않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인큐베이더에 넣을 거야. 시간이 있을 때마다 사진하고 진전도 보내면 되잖아. 네가 원하는거 이거 맞지?"


"멜리사는 안 데려갈거지?"


"데려갈 필요성은 없는데 그건 왜 물어?"


"데려가."


뜻밖의 말이 메가라의 귀를 뚫고 지나갔다. 아이들과 관련되어 있는 일이라면 방금 전까지 죽일듯이 노려보던 스칼렛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메가라의 입장에서는 스스로 가시를 거두고 응하는 안나가 있었다.


"이유를 물어봐도 될까?"


안나는 말없이 이두나를 응시했다. 이두나는 딸의 슬픔을 덜어내고 싶기에 슬피 웃어보였다.


"수류탄 파편 추출 안했잖아."


"자칫 뽑으면 일어날 수 있는 부작용 때문에 그래."


"엘사에 대한 실험을 하면서, 그 있을지도 모르는 부작용도 같이 해결해봐. 그러면 되잖아?"


안나는 손을 멜리사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내가...쓸데없는 고집을 부린 것 같아."


안나는 의술을 집도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더욱이 엘사와 멜리사를 살릴 수 있는 초능력을 가진 것도 아니었다. 가진 것이라곤 살인면허증과 살인 방법들이였을 뿐이었다. 메가라의 보증 하에서 진행된다면, 잠시 아이들을 놔주는 것이 논리적이며, 안정적이었다. 안나는 잠시 감성에 취해 메가라에게 거친 말들을 내뱉은 것을 후회했다. 그녀 또한 나름대로 열심히 안나를 위해 부단히 노력했을 것이었다.


"미안해."


"미안하면 나중에 모두 모였을 때, 집에 초대해주든가."


메가라가 안나를 향해 싱긋 웃었다. 상황에 맞지 않는 웃음이지만, 쓰라린 상처를 보듬기엔 웃음만한 대체재가 없었다.


"한나는 어쩔거야?"


"넌 아예 믿는 사람이 없어진 모양이구나... 한나는 애초에 논외였다니까. 그 아이는 스스로 선택할 권리가 있고, 너랑 이두나 사장님 곁에 남아 있을거야."



메가라가 허리를 손으로 짚으며 말했다.


"아직 조건 하나 더 있어. 이건 네가 한스를 사로잡았다는 전제 하에서 이뤄질 요건이자, 행동이야."


"뭔데 그래. 그거 하나로도 움직여야 하는데."


"메가라 요원, 무슨 조건이길래 한스가 전제로 깔려 있어야 하는 거죠?"


이두나가 안나의 말을 거들었다. 메가라는 이두나의 시선을 회피했다. 안나의 핫라인에서 본 자극적인 영상이 눈에 어른거렸기 때문이었다. 고도의 딥페이크 기술로 만들어진 영상이라 따로 팀을 꾸려 놓았던 영상 분석가들 대부분이 진짜라고 믿을 정도로 정교했다. 결국 섹스 영상은 거짓이었지만, 계속 머릿속에서 어른거렸다. 특히 이두나와 얼굴을 마주칠수록 뚜렷해져 갔다.


"엘사, 저기 작은 엘사 말고 큰 엘사... 사장님의 큰딸이자, 너의 진짜 언니 되는 사람의 위치를 특정해줄게."


"언니가 어디 있는지 알아?"


안나가 제인을 돌아보며 말했다.


"네, 한스는 극히 소수의 사람들을 어느 장소에 데리고 가서 엘사란 사람과 대면한 적이 종종 있었어요."


"극소수의 사람에 당신도 포함되겠네."


"이전 비서들의 전철을 따라가고 있는 거였죠. 근데...지금 말해주긴 조금 힘들어요."


"왜?"


안나가 의문을 표하자, 제인은 팔을 감쌌다.


"한스의 이전 비서들은, 모두 암살당했어요. 그이는 항상 엘사란 사람의 정보가 누설되지 않게 입단속을 시켰는데...지금 그 사람이 보낸 암살자들이 절 노리고 있고요. 지금 여기 어딘가에서도 절 저격하고있을지도 몰라요."


"당신 기준 500M 반경에 우리 요원들이 감시중이니까 안심해. 또 런던은 CCTV가 많아서 수상한 자들을 금방 추려낼 수 있거든."


"스코틀랜드 야드(런던 경찰국의 애칭)와 협력 중이야?"


"우방국의 특혜지. 가급적이면 가까이서 경호해주고 싶은데, 되려 '나 표적이야'라고 암살자들에게 드러낼 순 없잖아? 일단 얼굴만 가려도 암살 가능성은 절반으로 줄일 수 있어."


메가라는 턱을 한 번 까딱였고, 그걸 신호로 받아들인 제인은 다시 말을 이어가려는 듯 헛기침을 했다.


"저도 보험 하난 들어놔야 하잖아요. 당신들이 정보만 쏙 빼먹고 내칠 수도 있으니까요. 그리고... CIA 쪽은 믿음직하지 않달까나...."


"나도 한 때 몸 담았는데?"


안나가 엘사의 옷을 물끄럼이 내려다 보며 말했다. 두 아이가 떠나기 전에, 말끔한 옷이라도 사 입혀야 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최소한의 존엄이자, 안나의 첫 번째 선물들을 아이들에게 남겨주고 싶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눈덩이처럼 불어났던 후회가 걷잡을 수 없이 커져 마음을 찢어버릴 것 같았다.


"당신은 민간인이잖아요. 그래서 부탁하는 거예요. 당신이 한스를 죽인다면, 전 엘사의 위치를 알려드릴게요."


"한스가 언니의 위치를 바꿀 가능성은?"


"아마...그이는 절대 안 바꿀 거예요. 애초에 자기능력에 취한 사람이라서, 지금도 당신들을 비웃으면서 와인에 절여 살고 있을 거예요. 또... 저 2호 개체만큼 엘사를 많이 아꼈거든요. 엘사는 여지껏 거처를 한 번도 옮긴 적이 없어요. 한스도 그걸 용인했고요."


듣던 중 그나마 유용한 정보였다. 자충수, 기생충같은 이름이었다. 겉으로는 작업을 하는데 필요한 것 같지만, 자만이라는 이름으로 뇌를 파먹어 정상적인 사고를 방해한다. 안나 또한 그 벌레를 먹어본 적이 있은 경험이 존재했기에, 이번만큼은 자충수가 한스의 두뇌와 불알을 모두 갉아먹었길 바랬다.


"한스 자식이 엘사가 어떤 상태인지 알고 있을까?"


확답의 가능성이 없는 질문을 안나가 말했다.


"아직은 아니겠지만, 들키는건 시간 문제라고 봐요. 3일이면 한스도 알아챌 것 같아요."


"못할 거야 없지. 근데... 만약 그 여론전도 안 먹히면 어떻게 할 거야?"


안나가 걱정하는 것은, 한스를 잡을 기회를 놓치게 될 가능성이었다. 제인은 안나, 그리고 한나가 신변을 보호해 주겠지마는, 메가라가 주도하는 여론전은 누가 더 자극적이고, 진실하되, 극적인 거짓을 섞어서 적을 찔러야 했다. 한스를 마약으로 엮지 못하면, 한스를 사로잡거나 암살할 명분은 사라지고 만다.


"명분은 어떻게든 만들면 돼. 어차피 그 사람, 얼굴 아는 사람도 적잖아? 그렇죠 제인?"


"한스는 인간관계가 그렇게 넓지도 않고, 그나마 있는 사람들도 돈으로 엮여 있어요. 만약 사살당한다 하더라도 관계인들을 돈으로 매수한다면 다른 사람을 앉혀 놓거나 기업 자체를 해산시킬 수도 있어요."


"우리 쪽은 기업 자체를 해산시키는 쪽으로 진행하는걸 검토하고 있어. 아톤 기술 중에 유용한게 있을지 모르니 페이퍼 컴퍼니 하나 위장시켜서 추가적인 기술들을 윤리에 맞게 진행하면 될 거라고 생각해."


"그래도 명분이 있는 공격이 가장 안전하잖아."


명분이 있다면 무리하게 잠입을 추구하지 않아도 되고, 합법적인 지원을 바랄 수도 있었다. 연구소 작업은 아톤의 기술을 빼내려고 안나를 밀입국 시킨 사실상 불법 행위였지만, 지금은 마약이라는 좋은 소재가 있었다.


"명분 없는 작업을 택하지 않길 바래야지. 작전 지역 주변이 민간이면 수습하는 것도 돈 엄청 깨지거든."


메가라가 손가락으로 계산기 두드리는 시늉을 했다. 불필요한 지출을 하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다.


"안나, 이제 기분은 어떠니?"


이두나가 불쑥 안나에게 물었다. 안나는 그 말이 무엇인지 해석하려다가, 문득 마음에서 아이들에 대한 슬픔이 누그러졌다고 착각했다. 하지만 다시 한번 생각하자, 슬픔이 한스를 향해 방향을 튼 분노에 눌려버렸음을 알았다.


"여전해요. 아이들은 제 힘으론 어쩔 도리가 없고, 한스는 잡아야겠고, 착잡해요."


안나는 그 짧은 시간 동안, 자신이 점점 미쳐가고 있는 느낌을 받았다. 체념을 가장한 냉정함이 안나에게 돌아왔다. 안나는 아이들을 잃은 슬픔을 자신도 모르게 배제했다. 다르게 접근해 보면 미치지 않을 수가 없는 사건들의 바다 한가운데에 안나는 가라앉고 있었다.





미치지 않으려고, 두 아이를 한껏 끌어안았다.

두 아이의 몸에서 하얀 비린내, 검은 단내가 났다.




















152.




메가라는 아렌 일행에게 개괄적인 계획을 알려주고, 잠시 숨을 돌릴 겸 병실 문을 나섰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복도 한 켠에 비치된 벤치에 혼자 앉아있는 한나였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음에도, 한나는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듯 시선은 허벅지 사이에 올려 놓은 두 손에 꽂혀 있었다. 무슨 고민인가, 메가라는 말없이 다가가 한나의 옆에 앉았다. 그제서야, 한나는 메가라의 존재를 눈치채고 화들짝 놀랐다.


"깜, 깜짝이야..."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한나는 입술을 오물거렸다.


"무슨 생각 하고 있어요?"


"뭐...이것저것..."


한나는 메가라의 눈을 피하며 복도를 환히 비추는 전등을 올려다 보았다.


"제가 맞춰 볼까요? 안나가 했던 말들 때문이죠?"


"어떻게 아셨어요?"


"그야 한나 당신이 돌발 행동을 했던 전후상황을 비추어 보면, 원인이 안나밖에 더 있겠어요?"


 메가라가 어깨를 으쓱였고, 한나는 허를 찔린 것처럼 혀를 찼다.


"아무래도 전 반쪽 아렌인가 봐요."


"안나가 언급을 안해준 것 때문에 그런거죠?"


"그것도 있지만... 안나의 말들을 들어보면 전 있지 말아야 할 사건들의 결과로 만들어진 거잖아요?"


한나는 고심한 끝에 알게 된 것들이 있었다. 자신은 단순히 한스의 연극에 쓰일 장치 중의 부품일 뿐이었고, 안나가 말한 트리플 2의 실책만 아니었으면 후에 이어질, 그리고 지금 겪은 일련의 비극들은 존재하지 않을 수 있었다. 한나는 비극을 위해 만들어진 것일 뿐이었다. 그래서 안나의 말을 흘려 듣는다지만, 깊게 베인 마음 속 상처는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나도...이럴 줄은 몰랐다고요."


그래서였을까, 한나는 엘사의 죽음 이후로 참아왔던 서러움을 참지 못했다.


"이두나한테 엄마라고 불러보고 싶은데..."


숨죽여 우는 한나의 등을 메가라가 토닥였다. 생후 3주가 겨우 지났고, 겉모습만 어른인 갓난아기에게는 너무 가혹한 시간들이었다. 내쳐질 거라는 불안함은 한나로 하여금 가면을 쓰게 했고, 그 가면은 너무 쉽게 벗겨졌다.


"한나, 안나는 한나를 싫어하지 않아요. 증오하지도 않고요."


"그래도 전...."


"죄책감 가질 필요 없어요. 한나가 이두나 사장님을 죽인 것도, 멜리사를 죽인 것도, 엘사를 죽인 것도 아니예요. 한나는 아무런 죄가 없어요."


메가라는 자신이 아주 오랜만에, 남에게 부드러운 위로를 전해줬다는 것을 깨달았다. 서툴지 않을까 싶었지만, 한나는 메가라의 위로에 코를 훌쩍이며 고개를 들었다. 메가라의 위로는 나름 선방했다.


"진짜요...?"


울상을 짓고 있는 한나의 볼에 흐르는 눈물을 손가락으로 닦아준 메가라는, 한나의 볼을 죽 잡아당겼다.


"우왜에그래아으.."


"다시 봐도, 안나랑 똑같단 말이예요."


"느아아요..."


한나는 놔달라고 메가라의 팔을 붙잡았고, 메가라는 한나의 볼에서 손을 떼었다.


"한나, 내가 볼 때 당신들 아렌 사람들은 자존감을 좀 키워야 할 것 같다고 생각해요."


"그게 왜요..."


양 볼을 만지며 한나가 말했다.


"너무 타인을 위해 살아가는 성격이 강해요. 멜리사는 정황상 안나를 구하려고 수류탄을 몸으로 받았고, 엘사는 이두나 사장님을 구하려고 밤새 능력을 쓴 것 같아요. 그리고 당신은 뜻하지 않게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것 때문에 제 앞에서 울고 있고요. 맞죠?"


인정하기 싫었지만 맞는 말이었고, 한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간단하네요. 타인의 행복을 챙기되, 한나의 행복 먼저 챙겨봐요."


"제 행복이요?"


"생후 3주차니까 당연한 거라고 말하면 너무 코미디같고, 일단 한나도 안나가 인정해준 아렌이잖아요. 그러니까, 이기적인 행복을 추구해도 좋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이거예요."


"이기적인 행복..."


좋지 않은 단어와 좋은 단어가 서로 맞물려 있는, 한나가 곧바로 이해할 수 없는 문장이었다.


"이두나 사장님도, 안나도 한나를 탓하지 않을 거예요. 당신을 가족이라 생각할 테니까요. 이두나 사장님에게 엄마라고 불러도 되고, 안나가 말실수를 해도 그냥 넘어가 버려요."


"엄마, 말실수."


두려움이 앞섰다. 과연 두 사람 앞에서 당당하게 행동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한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난 자신있게, 아렌 속에서 이기적인 행복을 추구할 수 있을까?


"또 엘사와 멜리사가 아렌 곁을 잠시 떠날 거예요. 한나는 듣지 못했겠지만... 방침이 조금 바뀌었고, 안나가 그걸 희망했거든요. 이제 두 사람에게 남을 아렌은 현재까지 한나 당신이예요. 안나는 며칠 뒤에 작업하러 잠깐 헤어지겠지만, 두 사람은 한나를 의지할 거예요. 한나도 두 사람에게 의지하고 싶죠?"


"그야 전 생후 3주차니까요."


어느덧 울음을 그친 한나는 메가라가 말했던 농담을 받아쳤다. 그런 한나를 보면서, 출생원인이 달라도 유전적으로 안나의 분신이 맞다고 메가라는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안나 특유의 유머 코드가 이리 똑같을 수가 없었다.


"기분은 어때요, 좀 나아졌죠?"


"한결 낫네요, 고마워요."


한나가 옅은 미소를 띄었고, 메가라는 만족한 듯 웃었다.


"전 밑으로 잠깐 내려갔다 와야겠어요. 새로 추가된 계획과 기존 계획을 조합해야 하니까... 일단 안나를 퇴원시켜야죠."


"두 사람의 몸이 다 낫진 않았을 것 같은데요."


"제인까지 추가되었으니, 조금 더 경호 수위를 높여야겠죠. 한나도 알다시피, 안나는 거의 멀쩡한 상태니까요. 이제  더 이상, 아니 당분간은 안나를 무너뜨릴 감정적인 원인도 없을 테고요. 연구팀에 의료진을 추가해 검진도 실시할 예정이니 한나는 아무런 걱정하지 말아요."


감정적인 원인은 생전의 멜리사와 엘사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한나는 말의 의미를 금방 이해했다. 지켜야 한다는 감정이 일시적으로 물러났으니, 안나가 불안은 크게 줄었을 것이었다. 확정지을 순 없지만, 그것이 좋은 방향으로 작용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한나였다.


"전 당분간 샐리맨더란 회사에 있을 거예요."


"샐리..뭐요?"


"그런 회사가 있어요. 안나의 이전 직장이자, 저를 보호해주겠다고 한 사람이 있는 곳이죠. 더운 곳이긴 하지만, 아톤의 위협에서 충분히 벗어난 곳이라서 그곳에서 실험을 지켜보려고요."


메가라가 벤치에서 일어났다. 무언가 떠나보낸 듯 홀가분한 움직임이 한나의 눈에 밟혔다.


"사람이 많아지면 그만큼 복잡하고, 원래 생각했던 조사 작업으론 제인이 말한 것들을 처리하려면 좀 더 전문적인 곳으로 가야 하거든요."


새벽에 제인은 메가라에게 한스를 잡을 일련의 방법들을 알려주었고, 현관에 죽치고 앉아 있던 한나는 일부 내용을 엿들을 수 있었다. 마약과 한스를 엮어 국제수배범으로 만들어, 암살 혹은 체포해 감옥에 넣어버리자는 방법이었고, 그것은 USB가 아니면 불가능한, 고차원적인 작업이라고 제인은 덧붙여 설명했다.



[어쩌면 카니보어(FBI가 1999년 개발한 이메일 감시 시스템)를 이용해야 할 수도 있어요. 미국 내로 피신한다면 마약단속국과 FBI의 협조도 받아야 할 테고요.]



"본사로는 안 가실 거예요?"


"아, 거긴 당분간 가고 싶지 않아요. 국장하고 핫라인은 이미 따로 구축해 놓았고, 한나도 알잖아요. 그 곳은 너무, 너무 차가워요."


메가라가 벤치에서 홀가분하게 몸을 일으켰다.


"물론 샐리맨더로 가기 전에 짐 때문에 잠깐 들르긴 해야 하겠죠."

메가라의 말을 들으며 한나도 벤치에서 일어섰다.


"한나, 다시 한 번 얘기하는데, 행복을 가진다는건 나쁜 짓이 아니예요."


"알았어요. 엄마, 그리고 말실수."


한나는 두가지 요점을 기억했다. 안나가 언제 말실수를 할지 알 수 없지만, 이두나를 '엄마'라고 불러보는 일은 언제든지 할 수 있었고, 머지않아 해볼 심산이었다.


"전 먼저 일어날게요. 안나의 퇴원 수속 절차를 진행해야 하니까요."


"메가라는 안 속상해요?"


문득,  한나는 메가라가 안나에게 불쾌한 말들을 듣게 된 것을 떠올렸다. 간접적으로 마음의 상처를 입은 한나와는 달리, 메가라는 직접 악담의 폭심지에 서 있었다. 그럼에도 메가라는 한결같이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했다.


"속상하죠. 친구를 위한 일인데 욕을 먹는게 속상하지 않는다면 미친년이죠. 아, 이바닥에선 다들 미쳐있네요."


메가라가 피식 웃었고, 한나는 웃지 않았다. 아니, 웃지 못했다. 어떻게 웃을 수 있을까, 메가라와 그녀가 속한 조직은 단순한 정신력을 가지고 임하기엔 심리적 부담이 큰 일들을 안보라는 대의로 포장해 처리하고 있다. 메가라의 말은 농담이 아니었다. 농담을 가장한 사실이었다.


"그래도, 누군가는 쓰레기통이 되어야죠. 남의 울분을 대신 담아가는, 감정 쓰레기통 말이예요."


메가라는 웃으면서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메가라가 만든 작은 바람엔 회한이 가득해 보였다. 한나는 복도의 끝 열려있는 창가에서 꽃향기를 머금은 바람 한줄기를 끌어와 메가라의 목에 목도리처럼 감아 주었다. 갑자기 바뀐 공기의 향이었지만 메가라는 놀라지 않았고, 오히려 그 향을 음미했다.


"고마워요."


한나가 메가라에게 말했고, 메가라는 한나의 손을 잡아 일으키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제가 고마우시다면,  아렌의 곁에 머무르며, 진짜 아렌이 되어 줘요."


맞잡은 손은 이내 악수가 되었고, 한나도 슬픔을 누그러뜨리려 메가라와의 악수를 풀지 않았다.


"이따 저한테 연락이 오면, 그때 지하주차장으로 내려오세요. 지상은 보는 눈이 많으니까 조심스럽게 이동할 필요가 있어요."


메가라는 악수를 풀고 엘리베이터로 향해 몸을 돌렸다. 또각또각, 고요한 복도 위로 힐과 바닥의 박수 소리가 청명히 들렸다.






어떤 이유에서였을까, 한나가 바라본 메가라의 등은 슬픔과 회한으로 짓뭉개져 있었고, 이와 반대로 들어왔던 악담을 쌓아놓은 것처럼 어깨는 인위적으로 펴져 있는 모습이었다. 복도의 조명들에 휩싸여 일렁이는 메가라의 그림자는 사람의 그림자가 아닌, 마치 거대한 벌레의 알을 등에 박은 무언가를 연상케 했다.



한나는 그런 메가라의 뒷모습에서 기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안쓰럽다는 느낌을 받았다.



벌레의 알 속에서, 그녀가 떼내지 못해 키워낸 울분이라는 감정이 씰룩거렸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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