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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REMAKE/ 운전교육 -35-

화로불판구이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0.05.14 15:34:52
조회 204 추천 15 댓글 6



“야! 거기안서?! 너 미쳤냐?”


“..하씨..미치겠네!!”


“..엘,엘사! 앞! 앞 조심해요!!”


‘끼이이익’



타는 듯이 피어오르는 연기와 휠 스핀. 아스팔트 도로위를 불태우듯이 돌아가던 바퀴는 짐승의 도약처럼 우당탕탕 비명을 지르며 앞으로 튀어나갔다. 엔진은 비명을 지르듯 굉음을 지르며 RPM은 레드존을 찍어 올라갔고, 엘사는 두 눈을 부릅뜨고는 핸들을 잡아 뽑듯이 돌리며 눈 앞에 일렁거리는 새빨간 자동차와 그에 맞춰 새빨간 후드티를 입은 여성을 급하게 스쳐 지나갔다. 자칫하면 부딫혀 사고가 날 수도 있을만한 거리. 손을 뻗으면 도어 손잡이를 잡을것만 같이 가까운 곳에 그 여성은 두려움도 없는지 엘사의 검정색 승용차로 몸을 던지듯 달려들었고, 엘사는 뒤를 돌아볼 새도 없이 풀 악셀을 밟으며 그녀와 그녀의 자동차를 지나간 것이었다.


오분 전 즈음. 정신없이 도망치던 와중에 체이싱을 하듯 엘사의 자동차 앞으로 급작스럽게 끼어든 빨간색 차량덕분에 급 브레이크를 밟으며 겨우 서야했고, 씩씩거리며 울긋불긋한 표정을 하고선 운전석을 박차고 나오는 여성을 보았다. 엘사의 순간적인 판단력으로 후진을 한 뒤에 따라올 새도 없이 다시 앞으로 달려나가지 않았다면 분명 붙잡혔을 것이다. 그 동안 안나는 안전장치 없는 놀이기구에 탄 듯 얼굴을 새하얗게 질려선 꺅꺅대며 비명을 지를 뿐. 거의 울어버릴 듯이 눈물이 그렁거리는 초록빛 눈동자로 멀어지는 빨간색 후드티 여성과 빨간색 자동차. 그리고 눈알을 이리저리 빠르게 굴려대는 엘사를 원망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사람 칠뻔했잖아요!!”


“..아, 아냐. 그럴리 없어”



엘사가 머쓱하게 미소지었다. 분명하게 어색하고 부자연스러운 입꼬리. 떨리는 눈동자로 백미러를 통해 점점 멀어지는 그녀를 보았다. 무언가 외치는 듯 팔을 번쩍들어선 하늘에 내지르고 있다. 실루엣만 보아도 가운데 중지손가락을 잔뜩 이 자동차의 뒤꽁무니에 먹여주고 있겠지.



“..그러니까 왜 도망가는 건데요?!!”



전혀 이해할수 없다는 듯이 동그랗게 뜬 눈과 찌그러진 눈썹. 캐묻는 듯이 탁탁 던지는 목소리에도 엘사는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앞만을 보고 운전대를 움직이기만 했다. 뜬금없는 레이싱이 붙어버린것도 아니고, 평소와는 다르게 휙휙 운전대를 돌리며 와인딩을 하듯 굽이굽이 꼬여있는 시골길을 빠르게 지나쳐갔다. 안나의 몸이 시트에 착 달라붙지 않고 엘사를 향해 있었기에 이리저리 휘청거리는 것 조차 신경쓰지 않고는 이마에 땀 한방울을 주륵 흘리며 살짝은 가쁜 숨을 몰아 내쉬고 있었다.



“...쟤는 못믿어.”


쟤, 저 사람. 저 여자. 그건 라푼젤 피츠허버트를 말하는 것이였다.
.
.
.


“엘사아아~ 다음에 또 와요!”


“그래 그래 다음에 또 오자”



안나와의 키스. 그리고 남은 시간동안 정말 즐거운 데이트를 보냈다. 그 누구도 방해하지 않고 마치 둘만의 다른 세상을 걸어가는 듯 했다. 엘사도, 안나도. 심장을 간지럽히는 두근거리는 감정들에 휩싸여 눈을 맞추고 기쁜 미소를 잔뜩 얼굴에 담아 서로를 바라봤다. 이미 녹아 약간의 얼음과 물만이 찰랑거리는 플라스틱 커피잔을 들고서 남은 팔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팔짱을 끼어 착 달라붙었었다. 간 곳을 또 가보기도 하고, 지나가는 고양이를 보며 꺄르륵거리는 안나를 보고 있자니 이 세상이 분홍빛깔 바람에 살랑살랑 머릿결이 흩날리는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웬수같은 베스트 프렌드의 메시지를 핸드폰으로 보기 전까지 말이다.



‘우웅’


“...뭐야.”


‘너 어디야’ –라푼젤


‘...흐음..’



엘사는 안나가 불 수 없을 각도에서 핸드폰을 열어 메시지를 보았다. 자신을 찾는 라푼젤의 메시지를 보자 고개를 갸웃거렸다. 얘가 왜 나를 찾지?. 평소에는 연락도 잘 주고받지 않을 정도로 서로의 인생사에 별 관심이 없는 타입의 두 여자였다. 엘사는 라푼젤과 굉장한 절친이였지만 그렇기에 별 다른 이야기를 주고받지 않는다. 어차피 시덥잖은 것들은 이미 다 알고있는 것들이니까. 오래전부터 만나온 사이였기에 굳이 말하지 않고 눈만 감아도 어떤 상황일지 다 상상이 되는 경지에 오른 것이다. 술마시자고 하면 분명 남자한테 차였거나 평소에 즐겨하던 게임이 안풀리는 날이다. 공장에 놀러오라고 하는거라면 분명 돈도 안주고 부려먹을 심산이 가득한 인사말일뿐. 너무도 간단한 그녀의 생활패턴을 이미 몇 번이나 경험한 엘사였다. 그리고 그건 라푼젤이 보는 엘사역시도 마찬가지. 라푼젤의 시선에서는 똑같은 절친으로 틈만나면 집에서 맥주나 홀짝거리고 고독이나 씹으며 세상을 다 산것처럼 달관하는 태도로 집밖을 잘 나서지 않는 여자. 라푼젤이 엘사를 찾는 방법은 참 쉬웠다. 엘사의 집 아니면 자주가는 와인딩 코스에 이십분정도 갓길에 차를 대어놓고 기다리고 있으면 한번즘은 만날 수 있었다.


그렇게나 서로를 잘 알았기에, 엘사는 라푼젤이 보낸 어디냐는 메시지가 오히려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그냥 전화로 몇 마디 나누면 될 것을 굳이 메시지를 보낸다는 것은, 무언가 메시지 속에 숨긴 뜻이 있다는 것이다.



‘나? 집.’ -엘사


“우선 집이라고 해야지.”


“네? 뭐가요?”


“응? 아무것도 아니야”



토독토독, 능숙하게 거짓말을 치는 엘사와 그녀의 혼잣말을 들은 안나는 끼던 팔짱을 더욱 가까이 해서는 고개를 돌려 엘사를 바라보았다. 팔뚝과 팔꿈치에 닿는 안나의 봉긋한 속옷이 느껴졌지만 애써 외면한 채 고개를 살랑살랑 젓고는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내주었다. 지금 이렇게나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라푼젤같은 친구에게 이 소중한 추억을 빼앗기고 싶지는 않았다. 어색한 미소와 눈을 맞춘뒤 슬쩍 뒷 주머니에 핸드폰을 넣으려 하던 그때, 또 다시 진동이 울렸다.



‘진동 꺼야겠다.’



떨리는 손바닥 안의 휴대폰, 방해받지 않기 위해 무음으로 돌려놓으려던 엘사의 눈에 비친 액정 안의 사진. 그건 방금 찍어 올린듯한 검은색 승용차의 사진과 그 뒷 배경으로 보이는 아토할란의 바닷가 풍경이였다. 번호판도 맞다. 얼핏 멀리서 보이는 건물들은 엘사와 안나가 오늘 시내를 돌아다니며 보았던 가게들 중 하나였다.



‘너 차 도둑맞았냐?’ -라푼젤


“...조졌네..”



안그래도 하얀 얼굴이다. 점점 더 하얗게 질려선 오히려 파래지는것만 같이 핏기가 싹 사라지는 엘사의 얼굴. 그녀의 중얼거림에 짹짹거리며 나뭇가지 위 서로 노는 참새들을 바라보던 안나의 고개가 돌아갔다. 오랜만에 들어보는 엘사의 욕지거리에 놀라면서도 무슨 재밌는 일이 있는걸까 하는 기대감이 잔뜩 섞인 표정으로 엘사와 엘사의 핸드폰을 올려다 보았다.



‘뭐지. 왜? 왜 얘가 여기있지?’



이 사진은 진짜일까. 정말로 라푼젤이 아토할란에 있는걸까. 그렇다면 도대체 왜 여기있는걸까. 이곳은 세시간이나 떨어져있는 먼 해변가인데... 설마 이년이 날 쫒아왔나?.



그렇다면 말이된다. 공연당일. 라푼젤과 헤어진 뒤에 자신은 따로 떨어져 안나를 만났다. 사람들은 점점 줄어드는 광장속에서 홀로 담배를 피우다 차로 걸어가 그대로 스탭전용 주차장으로 들어갔다. 만약 라푼젤이 자신이 어디론가 떠나가는것에 대해 의심을 했다면 충분히 따라올 방법은 많았다. 안나를 태우고 아토할란으로 떠나는 검은색 승용차와 그 뒤를 조용히 따라가는 택시, 그리고 그 안에 타고있는 라푼젤. 엘사의 상상은 더 없이 커져갔다. 그게 잘못된 억측이라는 것도 인지하지 못한 채.



그리고 그 상상은 여러갈래로 뻗어나갔다. 펜션 올라프에서 밥을 먹는 안나와 자신. 그리고 멀리서 그걸 지켜보는 라푼젤. 허니마렌과 안나와 자신. 그리고 멀리서 그걸 지켜보는 라푼젤.

안나와 하룻밤을 보내는 자신. 그리고 그걸 지켜보는 라푼젤.



“미친.”



설마, 엘사는 홱홱 고개를 저어 더러운 잡념을 날려보냈다. 영화에서나 볼법한 닌자도 아니고. 이건 순전히 자신의 야한 상상중에 하나일 뿐이다. 처음으로 스스로가 역겨웠다. 소름돋을 정도로 구체적인 상상을 해버린 탓에 식은땀이 주륵, 흘러내리던 엘사는 멈췄던 생각들을 다시 떠올렸다. 그리고 금세 내려진 결론에 핫, 하며 흔들리는 눈동자로 먼 발치의 허공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지금 이 모습을 라푼젤이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안나야! 이쪽으로 가자!”


“..아얏!..어, 어디가요?!”



엘사는 본능적인 힘으로 안나의 팔짱을 풀고는 손목을 턱, 잡아끌었다. 이름도 겨우 외울 여러 상점들의 사이. 어디로 통할지도 모를 골목길로 비집어 들어갔다. 영문도 모른채 끌려와버린 안나는 갑자기 손목을 잡아 채는 엘사의 모습에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는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이윽고 생각보다 좁은 통로에 밀착하듯이 서로 딱 붙어버린 광경에 살짝 얼굴을 붉히고는 희미한 미소를 내비쳤다.


“..아이 이런데는..”



어둡고 은밀한 공간. 하지만 뜨거운 햇살에 축축하지는 않다. 건조하면서도 그늘덕에 충분히 시원한 골목의 공기와 서로 떨리는 눈동자로 바라본다. 갑자기 볼을 붉히며 몸을 배배꼬는 안나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엘사는 자신의 허리를 감싸안는 안나의 모습에 떨떠름하게 침을 삼켰다. 지금은 이럴 시간이 없다.



“지금 이게 중요한게 아니야.”


“...네?..읍”



짧은 입맞춤. 쪽, 하고 달라붙은 입술이 금세 떨어진다. 갑작스러운 엘사의 행동에 폭, 하고 더욱 빨갛게 달아오른 안나의 두 볼을 보자니 엘사 역시도 은근히 떨리는 심장에 아랫입술을 깨물고는 귓등에 느껴지는 미약한 열기에 헛기침을 했다. 하지만 지금은 이럴 상황이 아니다.


“큰일났어.”


안나의 양 어깨를 잡아서는 결연한 표정으로 얼굴을 들이미는 엘사. 안나는 끝나버린 스킨십에 아쉬우면서도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일인데요..?”


“내 친구가..여기 왔대.”



엘사는 어두운 골목덕에 환하게 비추는 핸드폰의 액정을 들어 안나에게 보여주었다. 화면 안에는 방금 엘사가 보았던 검은색 자동차와 아토할란의 배경이 보이는 사진. 차를 도둑맞았냐는 라푼젤의 메시지. 그리고 또 하나가 더 있었다.



‘아토할란 아니야? 시내야? 거기로 갈게. 술이나 마시자’ -라푼젤



라푼젤, 안나는 그녀를 몰랐다. 플린 라이더의 묘지는 가보았지만. 라푼젤과 엘사. 그리고 플린 라이더가 절친했던 사이라는 것도 알지 못했다. 엘사가 알려준 적이 없었으니 말이다. 엘사는 아직 그 누구도 안나에게 소개시켜주지 않았다. 그렇기에 고개를 갸우뚱거리고는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이 멍하니 입을 벌리고 화면을 바라보는 안나였다. 그런 그녀를 보니 아직 라푼젤의 또라이같은 성격도 모를것이라고 판단한 엘사는 누군가 듣는 것을 신경이라도 쓰는 듯이 조용히 중얼거리는 목소리로 안나에게 속삭였다.



“공연장에서..내 옆에 앉았던 금발의 미친년..얘가 걔야.”


“..아..”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공연장에서 엘사의 옆에 앉았던 그 사람이 맞다면 안나의 기억속에도 라푼젤의 모습이 각인되어 있었던 것이였다. 안나는 그 날 보았다. 저 멀리서 VIP 좌석에 앉은 하얀 머릿결의 엘사. 그리고 그 옆에서 광적인 눈으로 미친 듯이 소리치고 팔을 휘적거리던 금발의 여자. 처음에는 엘사와는 다른 일행의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누군가의 사생팬이거나 자신의 팬들 중 한명이겠지. 안나의 팬들 중에는 여자도 많았으니까. 하지만 무대의 마지막 즈음에 엘사에게 날린 손짓과 윙크. 그리고 무대에서 내려가기전에 보았던 당황하던 엘사의 모습과 그녀에게 붙들려 발버둥치던 금발의 그녀를 얼핏 보고서야 엘사의 친구인 것을 깨달았다.


라푼젤은 공연장 안에서 참 잘 뛰놀았다. 안나는 셋리스트 중간 중간 라푼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정적인 모습으로 자신을 뚫어져라 보는 엘사와는 다르게 쉬지않고 흔들거리는 라푼젤의 금빛 머리와 무대위까지 들릴것만 같은 고함소리. 공포와도 비스무리한 광적인 눈빛과 사악한 미소는 열심히 춤을 추던 안나에게 오랜만에 살떨리는 긴장감을 주기에 충분한 얼굴이었다. 그리고 그런 미친듯한 열정을 가진 이의 이름이 라푼젤 피츠허버트이고 그녀가 엘사와 자신. 둘만의 공간에 들어오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안나는 라푼젤의 자세한 전과를 알지 못했다. 들은 것은 모조리 퍼트리는 역병과도 같은 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몰랐다.



“...셋이서 만나면 되는거 아니에요?”



안나 역시도 한 열정 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슈퍼스타 아이돌을 직업으로 삼고 있던 것이겠지. 아마도 잘 맞는 사이가 될지도 몰랐다. 친구의 친구는 자신의 친구이기도 하다고들 말하지 않는가. 그냥 친구도 아닌 엘사, 라는 연인의 절친한 친구라면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친해져야 하고, 친해지고 싶으면 싶었지.



“아니, 안 돼. 절대 안 돼.”



벌써부터 눈 앞에 일렁거린다. 안나와 손을 잡은 엘사.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 광경을 목도하고는 도망치는 라푼젤. 그리고 자신과 라푼젤 사이에 섞여있는 모든 지인에게 핸드폰을 들어 그 가벼운 주둥이로 나불대며 깔깔거리는 금발 미친년의 모습이. 놀림거리로 끝나면 정말 다행이고 고마울 것이다. 뉴스에 대대적으로 보도되고 세상 온갖욕들을 들어먹을지도 모른다. 라푼젤은 일류 언론사에 돈을 받고 그런 사실들을 충분히 나불댈만한 객기가 있는 여자였다.



한 마디로 이 세상 또라이들중에서도 상 또라이였다.

‘우웅...우웅..’



핸드폰 액정 안의 메시지를 보며 라푼젤에 대한 여러 생각들이 오가던 중. 전화기가 울렸다. 라푼젤의 전화였다. 엘사는 잔뜩 놀래서는 눈을 동그랗게 치켜뜨고는 안나와 핸드폰을 번갈아 보았다. 그런 긴장하는 엘사의 모습을 처음 본 안나는 신기한 눈빛으로 전화를 받아보라는 듯이 살짝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여보세요..”



손가락을 들어 입술에 대어 안나에게 침묵의 표시를 낸 엘사는 통화버튼을 누르고는 잠깐동안 정적을 지켰다. 그리고는 잔뜩 낮게 깔려선 그렁거리는 목소리가 되어서 입술을 우물거렸다. 엘사는 지금 술에 뻗어 자다 일어난 사람을 연기하고 있다. 그 모습을 보자니 웃음이 튀어나올뻔한 안나는 두 손으로 입을 잔뜩 막고는 작게 키득거렸다.



“야 어디야?”


“..나...집..”



나름 일품의 연기다. 최대한 상상속의 술에 취해있는 자신을 기억하며 끄집어 내던 엘사는 어느샌가 표정마저도 어딘가 아프다는 듯이 일그러져서는 고개를 떨구고 눈을 감았다. 메소드 연기를 위해서는 온몸을 사용해야 한다. 그 철칙을 지키는 엘사를 보자니 안나는 터져버릴 것 같은 호흡에 잠깐동안 엘사에게서 떨어져 있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두 세걸음 정도를 지나쳐 골목 밖으로 향했다.


“...어?”


그리고 보았다. 두 채 정도의 상점 너머로 걸어오는 금발의 여자, 라푼젤을.


“..히이이익!”



꼬리를 밟혀버린 고양이처럼. 안나는 팔짝 뛰며 다시 골목으로 후다닥 뛰어 들어갔다. 화들짝 놀래서는 손끝을 파르르 떠는 안나를 보자 멋진 연기를 선사하던 엘사는 안나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 저기..”



그리고 좁은 골목 사이, 빛이 비집고 들어오는 두 사람이 겨우 밀착되어 들어올 공간 너머로 보이는 시내의 큰길. 안나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에 빨간색 후드티와 금색과 갈색의 머릿결을 사자처럼 헝크러트린 그녀. 라푼젤이 지나가고있었다.



라푼젤은 엘사와 전화를 하기 전부터 아토할란의 시내를 터벅터벅 걸어다니고 있었다. 검은색 승용차를 본 직후부터 엘사를 찾거나, 자동차 도둑을 찾기위해서 이리저리 쏘다녔을 것이다.



“..으음..”


“너 집 맞냐? 너 차 어디다 뒀어.”



터져버릴 듯이 쿵쾅거리는 심장을 겨우 진정시키던 엘사는 가라앉지 않는 호흡덕분에 잘 쌓아 올라가던 늦잠꾸리기의 연기를 실패하고말았다. 짧은 탄식을 내뱉은 엘사는 자신의 허리를 잡고는 품 속에 담겨있던 안나의 손을 잡았다.



“집 맞아 이년아!. 전화 하지마 나 잘 거야!.”


“..야 그러면 저 차는!..”



될대로 되라지. 뚝 하고 전화를 끊어버린 엘사는 안나의 손을 잡은 채로 냅다 골목을 빠져나갔다. 들어온 방향이 아닌 반대방향으로 뛰어가면 주차장과 연결되어 있을 것이다. 그리 생각한 엘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허벅지에 잔뜩 힘을 주어 발돋음질 했다. 멀리서 라푼젤이 수화기에 대고 고함을 치는듯한 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집으로 가자!!”


“네?, 네!”


어차피 데이트는 오늘로 끝나는 계획이었다. 세시간, 지금 당장 출발해서 도시로 돌아간다. 그리곤 안나를 내려주고는 자신은 집으로 돌아간다. 그러면 라푼젤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겠지. 들키지만 않으면 된다. 안나를 내려준 뒤 나중에 라푼젤을 만나더라도 그냥 드라이브 한번 갔다가 왔다고 대충 둘러대면 어찌저찌 넘어갈만한 일인 것이다.



“허억..허억..”


“으아아아..힘들어요..”



골목을 지나 햇빛이 내리쬐는 해변가로 나갔다. 소나무와 넓게 펼쳐진 모래사장. 그리고 풀밭들 사이로 깔린 나무로 만들어진 길을 따라 전력질주 했다. 처음에 엘사는 안나의 손을 잡고 달렸고, 주차장에 점점 더 가까워질수록 서로 지쳐가더니 결국 잡았던 손도 놓아버리고는 각자 달리기 경주를 하듯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당탕탕 뜀박질 하기 바빴다. 멀리서 삑삑 키를 눌러 잠금을 풀었다. 잔뜩 붉어진 볼로 숨을 몰아쉬던 그녀들은 자동차의 반짝거리는 불빛과 펴지는 사이드미러를 보자 조금씩 걸음을 늦추며 헥헥대며 터벅터벅 문 앞까지 걸어갔다.



“아아..더워...”


“..허억..허억..그래도..안걸려서 다행이네..쿨럭!..허억..”



잔뜩 땀을 쏟아내고는 둘 다 쓰러지듯이 시트에 몸을 기대었다. 여름빛을 잔뜩 받아서 뜨거워진 실내에 짜증낼법한도 하지만 이미 모든 힘을 다 써버린 탓에 화 낼 힘도 없어 보였다. 시동을 걸고는 에어컨을 최대치로 튼다. 다행이 열을 밭아있던 엔진덕에 금방 시원한 바람이 송송 불어왔다. 엘사와 안나는 헤드레스트에 머리를 힘없이 기대어서는 미약한 숨소리로 남은 호흡을 골라내고 있었다.



‘우웅..우웅..’



그리고 라푼젤의 전화는 미친 듯이 울려대었다. 아마도 방금 뚝, 하고 끊었을 때부터 다시 울렸을 거다. 축 처진 눈썹으로 시원한 바람을 맞던 엘사는 액정 화면을 보고는 단칼에 거절 버튼을 눌렀다.



“하..좀 눈치좀 챙겨라 친구야..하아..하아..”


‘우웅..우웅..’


“..헤에..그냥 받는건 어때요..헤엑..후우..”


“받으면 그 날로 소문 퍼지는 날일걸..”



또 다시 거절버튼을 눌렀다. 화면이 꺼지는 휴대폰을 본 엘사는 네비게이션에 안나의 숙소 주소를 써 넣고는 기어봉을 움직였다. 이제 미친 듯이 달려 도시로 돌아가면 된다. 그럼 아무도 모르는 일이 될테지. 라푼젤에게는 미안하지만 어쩔수 없는 선택이었다.



“이제 간다”


“네에에..”



아토할란의 풍경들에 아쉬움도 느낄 새도 없이 떠나는 것이 마음에 걸렸던 안나였다. 호흡과 얼굴에 피어난 열기를 조금씩 진정시키던 그녀는 엘사의 말에 그제야 주위의 풍경들을 눈에 잔뜩 담기 시작했다.


‘부우웅’



“..엘,엘사..”


기어를 넣고 주차장을 빠져나와 신호등 앞에 섰다. 그때까지도 주위를 둘러보던 안나는 주차장 앞에서 신호등을 보며 언제 바뀔지 초조하게 바라보던 엘사의 팔을 턱, 하고 붙잡았다. 땀에 촉촉이 젖어 신호등의 빨간불만을 응시하던 엘사. 떨리는 목소리와 눈동자로 자신에게 속삭이는 안나를 보니 무언가 싶었던 그녀는 안나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으로 상체를 기울였다.



그곳에는 갓길에 세워진 빨간 자동차, 스바루 임프레자와 내려진 창문 너머로 보이는 빨간 후드티와 금발. 그리고 선글라스를 쓴 라푼젤이 있었다.


“..하아아..”



라푼젤은 운전석에 앉아서는 창문을 내리고 팔을 기댄채로 자신들이 탄 검은색 승용차를 보고있었다. 그리고는 선글라스를 이마 위로 걸쳐 올리고는 보란 듯이 소리쳤다.



“니들은 뒤졌다 자동차 도둑새끼들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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