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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픽] 좆같은 이웃 38

EAOA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0.05.22 19:42:39
조회 348 추천 21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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좆같은 이웃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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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녀오겠습니다!"


아침 10시. 잔뜩 들뜬 마음과 가벼운 발걸음으로 캐리어를 끌고 집 밖으로 나오자, 미리 집 앞에 모여있었던 얘들이 나를 반겨주었다. 빨리 가자. 늦겠어. 우린 늦지 않기 위해서 빠르게 택시를 나눠 타고 공항으로 향했다. 늘 공항까지 향하는 길은 설렘이 가득했다. 우리는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분주하게 움직여서 모든 절차를 걸친 다음에야 드디어 비행기에 탑승할 수 있었다. 플로리다까지 5시간.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시간을 보냈다. 메가라는 수면안대를 낀 채로 잠이 들었고, 벨과 엘사는 독서를, 화이트와 제인은 영화를 보고 있었고, 오로라는 내 옆에 앉아서 열심히 장난치기 바빴다.


"너 이따가 공항에서 내리고 보자."


"오, 지금 나한테 협박하는 거야?"


"아니?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그냥 지금 손 보는 게 좋겠어."


"미, 미안해…."


넌 좀 가만히 있으면 덧나냐! 나는 오로라의 양 볼을 꼬집고 이리저리 흔들기 시작했고, 오로라는 다음부턴 장난 안 칠 테니까 제발 얼굴 좀 놓아달라며 나한테 열심히 용서를 구하기 시작했다. 너는 맨날 말로만 안 한다고 하지! 나는 오로라가 괘씸해서 잡고 있는 볼을 괜히 더 강하게 꼬집었고, 오로라는 비행기 안이라서 외마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눈물을 찔끔 흘려가며 제발 놓아달라고 간절히 부탁했다.


"내가 네 장난감이지?"


"아니야! 아니라고! 미안해. 제발 놔줘!"


나는 그제야 손을 놓아주었고, 오로라는 잔뜩 빨갛게 부어오른 볼을 매만지며 앓는 소리를 내었다.


"아주 매를 벌어요."


"맞아 맞아."


벨과 엘사는 이 광경을 언제부터 지켜보고 있었던 걸까. 읽고 있던 책을 덮고 그새 오로라를 손가락질하며 욕을 하고 있었다. 내가 대체 언제부터 보고 있었냐고 묻자, 벨은 오로라가 나한테 장난을 치던 때부터 보고 있었다고 했다. 이 쓰레기들아! 너희들은 내가 그렇게 당하고 있는데 지켜만 본 거야? 오로라는 얼굴을 매만지며 괜한 벨과 엘사에게 화를 냈고, 엘사는 먼저 사람 건드려놓고 뻔뻔하게 그런 소리가 나오냐며 역으로 반박하고 나섰다.


"몰라! 잠이나 잘래."


아무래도 오로라가 단단히 삐쳤나 보다. 그러게 괜히 가만히 있는 나는 왜 건드려서 매를 버는 걸까. 오로라는 빠르게 잠이 들었고, 조용한 평화가 찾아왔다. 나는 이어폰을 끼고 영화를 보기로 했다. 이내 안내 방송이 나오기 시작했고, 비행기는 천천히 플로리다를 향해 이륙하기 시작했다. 드디어 출발하는구나. 나는 영화를 잠시 멈추고 창밖을 내려다보았다. 지상에서 천천히 멀어지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이 순간이야말로 제일 설레고 두근거리는 순간이 아닐 수 없다. 나는 그 풍경에 조금 더 심취해 있다가 다시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느 정도 보다 보니 영화가 너무 재미없어서 중간에 꺼버렸다.


"후…."


그냥 잠이나 자는 게 제일 편할 것 같았다. 어차피 영화라곤 이미 여러 번 봤거나 방금처럼 재미없는 영화가 전부였고, 얘들도 전부 잠들어 있어서 제대로 된 대화 상대마저 없었기 때문에. 그런 관계로 나도 조금만 자고 일어나야겠다. 자고 일어나서 책을 보든가 영화를 보든가 해야겠다. 설마 5시간 내내 잠만 자겠어?


"안나! 일어나!"


"어?"


설마, 정말로 설마 했던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 나, 진짜로 5시간 동안 자버린 거야? 원래 계획은 2시간 정도 자고 일어난 후에 평소 하지도 않던 독서를 하며 약간의 지식을 쌓은 후에 남은 시간은 소곤거리며 대화를 나누거나 영화를 보거나 해야 했지만, 어째서 5시간내내 눈도 한 번 뜨지 않고 쭉 자버렸단 말인가? 허망한 상태로 창밖을 보니 비행기는 천천히 착륙 준비를 하고 있었다.


"도착이다!"


오후 3시 13분. 비행기가 완전히 착륙하고, 우리는 빠르게 짐을 챙겨 들고 밖으로 나와서 택시를 나눠탔다. 공항에서 리조트까지 가는 길은 조용했다. 전부 자고 있으니 그럴 만도 했지만, 지금 이렇게 자버리면 대체 밤에는 어떻게 자려고 이러는 걸까. 해봤자 리조트까지 20분 거린데 이렇게까지 자고 싶나? 조용함을 뒤로하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창밖으로 보이는 날씨는 매우 화창했다. 1학년 여름 방학에 엘사랑 왔을 때랑 전혀 달라진 게 없는 풍경이었다.


"얘들아, 좀 일어나!"


이내 택시가 리조트 앞에 도착하고 나는 얘들을 열심히 흔들어 깨우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정신을 차린 엘사는 빠르게 계산을 끝낸 다음에 몸을 비틀거리며 택시에서 내렸고, 다른 얘들도 뒤늦게 일어나서 졸린 눈을 비비며 택시에서 내렸다.


"너흰 대체 몇 시에 잤으면 여기까지 오는 내내 자고 있냐?"


"너도 비행기에서 푹 잤잖아."


"맞아. 우리한테만 너무 뭐라 하는 거 아니냐?"


할 말이 없다. 하긴, 5시간동안 푹 자버리긴 했지. 그나저나… 메가라는 택시에 내려서도 그 자리에 서서 자고 있었다. 메가라는 어제 몇 시에 잤길래 서서 자는 거야? 내가 묻자 벨은 한숨을 내쉬며 메가라는 어제 아침까지 들떠서 떠들기 바빴다고 했다. 그 대화를 전부 들어주고 잠이든 시간은 아침 6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면서, 정말 피곤해서 미치는 줄 알았다고 했다.


"고생이 많구나."


"졸려서 미치겠어."


그 사이에 엘사는 체크인을 끝냈는지 이제 들어가자며 우리를 안내했고, 나는 메가라를 깨워서 강제로 끌고 가기 시작했다. 이게 사람이야, 짐이야? 졸지에 캐리어가 하나 더 늘어난 기분이었다. 벨의 도움까지 받아 가며 우리가 머물 객실에 도착하니 온몸의 기운이 쭉 빠져버렸다. 객실에 도착한 메가라는 그제야 눈을 비비며 이곳이 어딘지 묻기 시작했다.


"후…."


아무래도 여행 첫날부터 제대로 망한 것 같았다. 어쩜, 어떻게 이야기가 흘러가는 게 이렇게 엉망일 수가 있을까. 너무 놀라워서 기절할 것 같았다. 이번 여행, 정말 괜찮은 게 맞을까?







객실에 짐을 풀고 1시간이 흘렀다. 이제 겨우 오후 4시가 넘은 시간, 우린 별다른 대화 없이 각자 할 것을 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벨은 피곤하다면서 메가라를 질질 끌고 침실에 들어가더니 그대로 침대 위에 뻗어버렸고, 나는 지금 제인이랑 함께 화이트랑 오로라가 가져온 닌텐도 스위치로 게임을 하고 있다. 처음엔 엘사한테 권했지만, 엘사는 그런 게임은 잘하지 못하니 그냥 구경만 하겠다면서 우리의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안나, 너 처음 하는 거라며?"


"거짓말이었어? 어쩐지 실력이 예사롭지 않더라니!"


"아니야, 진짜 처음 하는 거라고!"


그냥 너희들이 존나게 못 하는 거야! 나는 맹세코 처음 해보는 게임이었지만, 서로 간의 실력 차이가 심하긴 했다. 그래도 나보다 적어도 수십 판은 더 해봤을 얘들이 완전 초보자한테 게임을 잘하느니 어쩌니 하면서 떠드는 모습을 보니 괜히 헛웃음이 나왔다. 어이가 없지. 안 해! 안 해! 항복! 결국, 내 앞에서 무릎 꿇은 3인방은 더는 못 해 먹겠다며 컨트롤러를 내팽개쳤다.


"안나, 너 이거 정말 처음 해보는 게임 맞아?"


"맞다고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을래? 난 집에 스위치도 없다고!"


정말 양심에 손을 얹고 말했다고 해도 도저히 믿지를 않았다. 이 상황을 보다 못한 엘사까지 가세해서 열심히 나를 도와주었지만, 별다른 효과는 없었다. 되려 항의만 거세질 뿐이었다. 여기서 깔끔하게 처음이 아니라고 거짓 진술을 해버리면 그것도 그거대로 결과가 좋지 않을 것 같고, 그렇다고 쟤네들이 끝까지 처음 해보는 것이라 말을 해도 도저히 믿지를 않으니 이것도 이것대로 문제였다. 나는 엘사를 슬쩍 쳐다보았고, 엘사는 자신도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는 듯, 입가에 쓴 미소를 머금었다.


"후…."


"자, 이제 슬슬 인정 하시지!"


"그래…."


"오, 드디어 인정하는 건가?"


"나 이 게임 처음 해본다고 쌍년들아! 대체 몇 번을 말해야 알아 처 들을래!"


역시 얘네들은 화를 내야 말을 듣는 건가? 나를 제일 많이 의심했던 화이트는 그제야 미안하다며 벌벌거리기 시작했고, 오로라와 제인도 눈치를 보다가 뒤늦게 미안하다며 사과했다. 사태가 어느 정도 정리된 후, 그 게임은 완전히 꺼버렸다. 다음부터 저 게임만 보면 오늘 있었던 일이 기억날 것 같았다. 다른 게임을 하자고 권했지만, 나는 잘하면 아까처럼 의심할 게 뻔하니 안 하겠다고 확실하게 선을 그었다. 대신 엘사가 하겠다고 나섰다. 한 번쯤은 꼭 해보고 싶었던 게임이라면서, 대신 처음 하는 게임이니까 살살해달라 부탁하며 컨트롤러를 집어 들었다.


과감하게 게임을 시작한 엘사는 그야말로 뉴비의 표본을 제대로 보여주었다. 게임을 진행하는 내내 허우적거리는 것은 물론, 컨트롤러를 다루는 것조차 익숙지 않아 보였다. 화이트는 그런 엘사를 집요하게 괴롭히기 시작했고, 엘사는 어려워서 도저히 못하겠다며 컨트롤러를 내팽개쳤다. 엘사는 자신의 실력과 화이트의 짓궂은 장난 때문에 화가 나고 답답했는지 소리를 지르다가 그대로 내 품에 안겨서 씩씩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엘사를 열심히 달래주었고, 엘사는 뒤늦게 화이트를 원망 서린 눈초리로 노려보기 시작했다. 따가운 시선 때문에 화이트는 고개를 쉽게 엘사 쪽으로 돌리지 못했다. 자칫 실수로 눈이라도 마주쳤다간 아마 화이트는 그대로 산송장이 되어버리고 말 것이다.


"그러게 왜 장난을 쳐!"


"미안해…."


내 품에 안겨있다가 이제 완전히 화가 풀린 듯한 엘사는 몸을 일으키더니, 화이트를 보며 차분한 어조로 다음부터 그런 장난을 한 번 더 쳤다간 이곳에서 영원히 잠들게 해주겠다는 차분한 어조와 대조되는 굉장히 살벌한 경고장을 남겼다. 엘사가 원래 이렇게 무서운 얘였나? 적어도 내가 알던 엘사와는 거리가 완전히 멀어 보였다. 나랑 사이가 나빴을 때도 이정도 까진 아니었던 것 같은데. 아무튼 화이트는 오늘 이후로 엘사에게 다신 장난을 치진 못할 것 같았다.


이제 안 해! 제인이랑 오로라까지 컨트롤러를 내려놓고 나서야 매우 정신없고 매우 소란스러웠던 게임 시간이 완전히 막을 내릴 수 있었다. 그다지 썩 유쾌하지도 못했고 정작 남은 것이라곤 엘사가 화이트에게 남긴 살벌한 경고장이 전부였지만, 그래도 나름 시간 보내기엔 최고였다. 1시간이 넘는 시간을 순식간에 보냈으니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은 것 같았다.


"지금 저녁 먹기엔 시간이 애매한데."


"다시 게임을 하긴 귀찮아."


"그렇다고 지금 당장 딱히 할만한 것도 없고…."


엘사랑 나름대로 짜놨던 일정표는 거의 쓸모없는 종이짝에 불과했고, 애당초 일정표대로 스케줄이 흘러가지도 않았다. 메가라 저 멍청이가 벨을 붙들고 아침까지 떠들지만 않았어도 지금보다 할만한 것은 더 많았을 것이다. 그냥 영화나 볼까? 솔직히 우리가 보는 영화가 거기서 거기겠지만, 적어도 저녁 먹기 전까진 시간을 보내야 하니 아무거나 눈에 보이는 대로 틀기로 했다. 화이트는 고의로 고른 건지, 정말 랜덤으로 고른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 많은 영화 중에서 하필 골라도 저런 공포영화를 고르는 것일까.


"다른 거 틀자…."


엘사는 벌써 겁을 집어먹고 내 뒤에 숨어서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화이트는 여름인데 가장 제격인 영화가 아니냐며 시시덕댔다. 아까 엘사한테 원망을 사놓고도 금방 저렇게 사람이 태평해질 수 있다고? 아무래도 더위를 먹어서 돌아버린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런 짓을 할 리가 없으니 말이다. 결국, 엘사가 화이트 손에 있던 리모컨을 강제로 낚아챘다. 악! 얄미우니까 꿀밤은 덤으로. 엘사는 모두가 즐겁게 볼만한 영화를 찾아 틀었고, 우리는 그제야 편안하게 앉아서 영화를 볼 수 있었다. 화이트가 처음부터 저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긴, 화이트가 처음부터 그랬으면 말이 안 되지.


나름 재밌었던 영화 한 편을 보고 나니 어느덧 7시가 넘었다. 제인은 벨과 메가라를 깨우러 갔고, 우린 슬슬 밑으로 내려갈 준비를 했다. 곧이어 제인 손에 이끌려 나온 벨과 메가라는 더 이상 피곤하지 않은지 눈이 정말 초롱초롱해 보였다. 하긴, 비행기부터 시작해서 여기까지 오는 내내 잠만 자면서 왔는데 당연히 초롱초롱해야지. 아무래도 저 둘 때문에 오늘 밤에 일찍 자긴 그른 것 같았다. 분명 자려고 하면 조금만 더 놀자면서 꼬실 게 분명할 테니. 저녁 메뉴는 해산물 요리와 스테이크로 의견이 나뉘었는데, 우리는 고민할 필요 없이 바로 스테이크로 의견을 모았다.


레스토랑 안은 사람들이 꽤 많아서 소란스러웠다.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나무 바닥과 빨간 의자의 조합이 매우 매력적인 레스토랑이었다. 우린 여럿이서 앉을 수 있는 자리에 앉아서 메뉴를 고르기 시작했다. 나는 양갈비 스테이크를 시켰다. 양고기는 먹어본 적이 없어서 기대가 많이 되었다. 각자 먹고 싶은 것을 고른 후에 주문까지 끝마치고 우린 당장 내일부터 무엇을 할지에 관한 대화를 나누었다. 사람이 많아서 그런지 의견이 쉽게 모이진 않았다. 먹는 건 잘만 고르던데. 제인은 한숨을 내쉬더니 앞으로의 모든 여행 일정은 자신이 도맡겠다고 했다. 대체 무슨 자신감이 나와서 저런 말을 하나 했지만, 제인은 자신이 플로리다 출생이니까 이번 여행은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뭐야. 네가 플로리다에서 태어났다고? 왜 여태껏 말 안 했어?"


"맞아. 일찍 말했으면 오늘 하루를 이렇게 심심하게 보내진 않았을 거 아냐!"


"너희가 왜 나한테 화를 내? 그리고 벨이랑 메가라가 잠만 자고 있는데 하긴 뭘 해!"


"그래서 종일 심심했던 게 벨이랑 내 탓이라고?"


"아니? 거기서 벨이 왜 나와? 메가라, 너 혼자만 잘못했지!"


"그래. 종일 잠만 자서 미안하다!"


"네가 왜 역으로 화를 내는 거야? 벨 붙들고 아침까지 떠든 게 누군데!"


아, 미치겠다. 분위기가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서로에게 잘못을 떠넘기기 바쁜 모습들이 매우 한심해 보였다. 어디 가서 얘네들을 '제 친구들이에요.' 하면서 소개하기가 부끄러울 정도였다. 정말 어디에 내놔도 부끄러운 친구들이다. 한참 싸우는 것을 구경하다 보니 우리가 시킨 음식들이 하나둘씩 테이블 위에 올라오기 시작했다. 이내 음식이 전부 테이블 위에 올라오자, 조금 전까지 서로를 죽일 기세로 싸우던 분위기도 자연스럽게 사그라들었다. 양갈비 스테이크는 굉장히 맛있었다. 혹시나 입에 맞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했지만, 그런 걱정 따윈 처음부터 할 필요가 없었던 맛이었다. 만족스러운 저녁 식사를 끝내고 우린 다시 객실로 돌아와서 다시 각자만의 시간을 가지기로 했다. 제인, 화이트, 메가라는 잠시 멈췄던 싸움을 다시 하기 시작했고, 엘사랑 나는 그 광경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벨은 누가 봐도 메가라만 잘못했는데 서로 싸우는 꼴을 보니 도저히 한심해서 못 봐주겠다며 랩톱을 들고 홀로 침실로 들어가 버렸다.


애당초 싸우는 이유를 모르겠다. 화이트랑 오로라는 제인이 플로리다 출생이란 것을 일찍 밝히지 않은 것이 잘못이라며 화를 냈고, 제인은 괜히 죄 없는 벨을 아침까지 물고 늘어진 메가라를 지적했다. 메가라는 종일 잠만 자서 미안하다며 되려 역으로 화를 내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대로 가만히 내버려 뒀다간 다음 날 아침까지 싸울 것 같았다. 나는 지금 내 눈앞에서 벌어지는 광경을 더는 못 봐줄 것 같아서 직접 싸움을 중재하고 나섰다. 혹시라도 중재가 안 되면 어쩌나 싶었지만, 걱정했던 것보다 싸움은 훨씬 빠르게 중단되었다. 이제 다들 제인한테 사과 해. 내 말에 잠시 머뭇거리던 메가라는 뻔뻔하게 굴어서 미안하다며 사과했고, 화이트와 오로라 역시 별것도 아닌 걸로 화를 내서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제인은 괜찮으니까 다음부턴 그러지 말라며 그녀들의 사과를 쿨하게 받아주었다.


여기에 온 지 아직 하루도 지나지 않았건만, 벌써 이렇게 사람을 피곤하게 만들면 앞으로 남은 날들은 대체 어쩌자는 걸까. 이미 수십번도 더 해본 생각이지만, 이번 여행은 정말 괜찮은 게 맞을까?







"음…."


"일어났어?"


"어, 어…."


"이제 점심 먹으러 가자."


"그래… 점심…."


잠깐, 점심이라고? 윽…. 자리에서 황급히 일어나니 머리는 무겁고, 몸은 피곤하고, 눈앞은 흐릿했다. 어제 뭐 하다 잤는지 기억도 제대로 나지 않았다. 분명 어제 싸움을 말린 후에 다들 언제 싸웠냐는 듯이 금방 친하게 떠들고 놀며 시간을 보냈었다. 문제는 그 이후의 일이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엘사에게 어제 뭐 하다 잠들었는지 물었고, 엘사는 밤새워 놀다가 기절하듯이 잠든 게 기억나지 않냐고 했다. 정말 그랬다고? 나는 전혀 기억나지 않는데? 엘사의 말에 따르면 우리는 잠이 오지 않는다는 벨과 메가라에게 붙잡혀서 졸지에 밤을 새웠다고 했다. 드디어 걔네들이 미쳤구나.


"다른 얘들은?"

"아직 자고 있어."


다른 침실을 돌아다녀 보니 우리와 같은 희생양이었던 화이트, 오로라, 제인도 기절한 사람처럼 뻗어있었고, 우릴 이 꼴로 만든 벨과 메가라도 태평하게 침대 위에 뻗어있었다. 후… 정말 한숨이 절로 나오는 상황이다. 그만 자고 일어나라며 몸을 흔들어 깨우자 앓는 소리가 곳곳에서 들려왔다. 대체 여기가 병실인지 객실인지 모르겠다. 으… 시간이 흐르자 슬슬 피곤함에 찌든 환자들이 하나둘씩 일어나기 시작했다. 오늘은 밖에서 놀겸 점심도 나가서 먹기로 했다. 깨끗하게 씻고 나와서 바깥바람을 쐬니 정신이 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제인은 쇼핑몰 안에 레스토랑이 있으니 거기서 점심을 먹자고 권했다. 우린 마음대로 하라고 했다. 우리는 이곳에 뭐가 있는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무엇보다 어제저녁에 앞으로 모든 일정을 혼자 도맡겠다고 자신 있게 말했으니 얌전히 제인의 뒤를 따르기로 했다.


제인을 따라 도착한 곳은 쇼핑몰 2층에 있는 어느 레스토랑이었다. 우리 앞의 줄이 생각보다 길어 보였다. 제인은 원래 사람이 매우 많은 곳인데 오늘은 생각보다 손님이 적은 편이라고 했다. 분명 손님이 적은 편이라고 했지만, 우리는 15분 정도 줄을 서고 나서야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이제 겨우 오후 2시가 넘은 시간이어서 그런지 레스토랑 안은 손님들로 가득 차 있었다. 자고 일어나서 처음 먹는 식사니까 최대한 맛있는 걸 먹기로 했고, 나는 로티세리 치킨을 주문했다. 곧 음식이 나오고, 우린 조용히 식사를 시작했다. 치킨은 굉장히 맛있었다.


만족스러웠던 식사를 끝내고, 우린 쇼핑몰에 들어온 김에 쇼핑하기로 했다. 하지만, 이곳에 있는 샵들이 대부분 명품점이라서 쇼핑은 깔끔하게 포기하기로 했다. 우린 분주하게 제인의 뒤를 따랐다. 그러면서 맛있는 디저트도 사 먹었고, 1학년 때 엘사랑 머물렀던 호텔이 이곳에서 겨우 도보 20분 거리에 있다는 쓸모없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나름대로 열심히 돌아다니긴 했지만, 딱히 살만한 것도 없고 더 갈만한 곳도 없어서 그냥 객실 안으로 다시 돌아왔다. 객실에 오자마자 다른 얘들은 수영복을 입고 곧장 수영하러 나갔고, 나는 엘사랑 같이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꼭 이렇게 둘만 있을 때면,


"안나. 모처럼 우리 둘만 있네."


매번 이런 식으로 나온다. 웬일로 조용하나 했다. 나는 제발 부탁이니 이상한 짓은 사양해달라 부탁했고, 엘사는 상관없지 않냐고 했다. 나는 다른 객실에 사람들도 있을 텐데 굳이 그런 짓을 나와서까진 하지 말자고 확실하게 선을 그었다. 엘사는 입술을 쭉 내밀며 아쉬워했지만, 나는 그 입술에 짧게 입맞춤만 해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쯤 다들 잘 놀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테라스로 나가서 수영장 쪽을 내려다보니 물장난을 하며 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잘 놀고 있는 건가 싶었지만, 메가라가 4명한테 일방적으로 물을 맞고 있었다. 여럿이서 한 명만 때리다니, 정말 비겁하고 정말 무서운 얘들이다. 분명 엘사랑 같이 갔으면 나 혼자 6명한테 일방적으로 맞았을 것이다.


아래에서 즐거운 물장난을 치는 동안, 나는 엘사와 오붓하게 소파에 앉아서 나초 치즈를 먹으며 영화를 보았다. 바삭거리는 나초 소리와 함께 무르익어가는 영화의 스토리가 끝을 보일 때쯤, 화이트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객실 안으로 들어왔다. 엘사가 재밌게 놀았냐고 묻자 다들 만족스럽게 놀았다고 했다. 비록 메가라가 많이 지쳐 보이긴 했지만, 본인이 괜찮다고 했으니 크게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저녁은 어제 갔던 레스토랑에서 어제 앉았던 자리에 앉아서 어제 먹었던 메뉴를 주문했다. 잠시 떠들다 보니 주문했던 음식이 나오기 시작했고, 우리는 조용히 식사를 시작했다. 포크와 나이프가 접시에 부딪히는 소리만 요란하게 들리던 중에 나는 식사를 끝내고 무엇을 할 것인지 물어보았고, 오로라는 수영을 할 계획이라고 했다.


"또?"


"너랑 엘사도 나와. 같이 좀 놀자."


"맞아. 온 김에 다 같이 놀자."


나는 엘사를 슬쩍 쳐다봤고, 엘사는 그게 좋겠다며 손뼉을 쳤다. 식사를 끝내고 우리는 바로 객실에서 옷을 갈아입은 다음에 수영장으로 내려갔다. 우리를 제외하면 수영장에는 사람이 없어서 굉장히 정신없이 놀기 시작했다. 서로에게 물을 뿌려가며 즐겁게 놀다 보니 시간도 금방금방 지나갔다. 신나게 놀고 객실로 돌아온 시간은 밤 10시가 넘은 때였다. 우린 지친 몸을 이끌고 샤워를 끝낸 다음에 곧장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그나저나 엘사의 몸 상태가 걱정되었다. 분명, 1학년 때 내게 말했었지. 예전부터 몸이 약했다고, 여름이 되면 특히 더 그렇다고. 괜히 밖에 나가서 논 것 때문에 탈이 생기진 않을까 걱정되었다.


그리고 걱정했던 대로 엘사는 다음 날, 바로 감기에 걸렸다. 엘사는 그냥 가벼운 감기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라며 안심시켜 주었지만, 나는 쉽게 그러지 못했다. 어제 엘사에게 가장 많은 물을 뿌렸던 오로라는 황급히 약을 사 오며 미안하다 사과했고, 엘사는 괜찮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라며 오로라를 진정시켜주었다. 한여름에 감기라니,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지금 상황을 가만히 보고 있다 보니 전부터 수십 번도 더 해봤던 '이번 여행은 정말 괜찮은가?'에 대한 답이 드디어 나온 것 같았다.


답은 '안 괜찮다'였다. 정말 안 괜찮았다. 괜히 엘사만 감기에 걸리고…. 오늘은 정말 걱정 가득한 하루가 될 것 같았다.




─────



다들 비행기 안에선 장난치지 않기로 해요. 물장난도 적당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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