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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 결혼 계약서(1)

ㅇㅇ(222.110) 2020.06.18 22:55:16
조회 1429 추천 78 댓글 20


<결혼 계약서>


안나 해밀턴과 엘사 블랙우드는 동등한 위치의 파트너이자 부부로써 아래 사항을 준수할 것을 약속한다.


1. 서로의 사생활에 관여하지 않는다.

2. 일주일에 두 번 이상 밥을 같이 먹는다. (특별한 사정이 있을 경우는 예외)

3. 일주일 중에 하루는 집에 머문다. (특별한 사정이 있을 경우는 예외)

4. 대외적인 부부의 의무는 이행한다. (집안, 사업 행사 등등)


위 사항을 어길 시 상대에게 이혼을 요구할 수 있고, 이혼으로 인해 발생하는 모든 책임은 계약서를 위반한 상대에게 있다.







결혼 계약서.

사실 말이 좋아 결혼 계약서지 사업 파트너 간의 계약서에 더 가까웠다. 붉은 머리의 여인이 내민 계약서를 받아 든 백금발의 여인은 조용히 적혀 있는 것을 읽고 있었다. 이 종이에 적힌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서로 잘 알고 있었다. 


“하나만 더 덧붙여도 될까요?”


마침내 계약서를 다 읽은 백금발의 여인이 물었다. 붉은 머리의 여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펜이 사각거리며 움직이는 소리가 두 사람 사이를 가득 채웠다. 잠시 후, 백금발의 여인이 계약서를 보여주며 말했다.


“여기요, 안나.”


“..좋아요, 이 정도는 괜찮을 것 같네요. 엘사.”


안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다시 펜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그 어떠한 불만도, 질문도 없었다. 

마치 원래 이래야 하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조용히 펜이 움직이고 있었다. 

엘사는 자신의 서명을 적고 계약서를 안나에게 돌려주었다. 안나는 고맙다는 말과 함께 계약서를 자신의 서류 가방에 넣었다. 

이것으로 두 사람 사이에는 다소 불편하면서도 어쩔 수 없는 다리가 생긴 것 같았다.


“그럼 나 먼저 올라가볼게요.”


“그래요.”


안나는 가방을 챙겨 2층으로 향했다. 아주 조금의 여지도 없다는 듯이 단호한 발걸음이었다. 

엘사는 그런 안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안나 해밀턴과 엘사 블랙우드는 오늘 결혼한 신혼부부였다. 커다란 정원이 있는 2층 단독주택이 그들이 같이 살 집이었고 동시에 같이 살지 않는 곳이기도 했다. 1층은 엘사가 사는 곳이었고 2층은 안나가 사는 곳이었다. 서로의 출입을 금한 것은 아니었지만 엄연히 분리된 공간이라는 것에 동의했다. 

무엇보다 그들의 결혼은 사업적인 이유로 집안에서 정해준 정략 결혼이었다. 파티나 사업가 모임에서 서로 몇 번 본 적은 있었지만 말은 섞어본 적이 없었다. 

그들이 처음 말을 섞은 것은 결혼 두 달 전이었다. 


엘사는 결혼이 반갑진 않았지만 굳이 거절할 이유도 없었다. 그에게 결혼은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었다. 상대가 누구든 상관없었다. 

집안과 회사에 이득이 된다면 그것으로 족했다.


안나 역시 상황은 비슷했다. 단지 안나에게는 결혼 전부터 사귀던 사람이 있었다. 때문에 안나는 결혼을 반대했지만 부모의 뜻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부모를 설득시키지 못한 안나는 엘사를 찾아가 사실대로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자신은 이미 사귀는 사람이 있으며 결혼을 하더라도 당신을 사랑할 일은 없을 거라고 했다. 사실 안나는 잃을 것이 없었다. 자신의 부모님은 무조건 이 결혼을 밀어 붙일테니 차라리 엘사가 화를 내며 파혼을 선언해주길 바라는게 더 가능성이 있어 보였다. 하지만 엘사는 안나의 예상과는 반대로 아주 침착했다. 

그 어떠한 감정의 동요도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럼 결혼을 하더라도 서로의 사생활엔 간섭하지 않는게 어떠냐고 물었다.


“네?”


“일종의 계약이라고 생각하는게 어때요? 결혼을 해도 당신이 뭘 하든 신경 쓰지 않을게요.”


엘사의 역제안에 당황한 것은 안나였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안나에게도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엘사는 결혼을 깰 생각이 없어 보였고 만약 결혼을 한다 해도 서로에게 간섭하지 않는다면 지금 생활과 크게 달라질 것이 없을 것 같았다. 

게다가 자신의 부모님을 설득하는 것보다는 현재 자신의 애인을 설득하는게 더 쉬워 보였다.


“좋아요, 그럼 계약서를 써요.”


그것이 계약서의 발단이었다. 오랜 시간 고민하던 안나는 조금은 불안한 심정으로 오늘 계약서를 들이밀었다. 

서로에게 적당한 거리를 두면서 동시에 공식적인 부부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고심해서 작성한 계약서였다. 

하지만 동시에 서로의 사생활에 간섭하지 않길 원했다. 무엇보다 안나에겐 지금 따로 사귀는 사람이 있으니까. 지금까지 생활해온 것을 포기할 수 없었다.

때문에 엘사가 원한다면 몇 가지 사항을 수정할 의향도 있었다. 의외로 엘사는 안나의 염려와는 반대로 별말없이 순순히 응해주었다. 

엘사가 무슨 생각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안나는 엘사에게도 나쁘지 않은 조건이라고 생각했다.


2층으로 올라온 안나는 가방에서 계약서를 꺼내 다시 한번 살펴봤다.

맨 마지막, 엘사가 덧붙인 조항이 마음에 걸렸지만 받아들이지 못할 사항은 아니었다.

그렇게 두 사람의 동거가 시작되었다.






<결혼 계약서>


안나 해밀턴과 엘사 블랙우드는 동등한 위치의 파트너이자 부부로써 아래 사항을 준수할 것을 약속한다.


1. 서로의 사생활에 관여하지 않는다.

2. 일주일에 두 번 이상 밥을 같이 먹는다. (특별한 사정이 있을 경우는 예외)

3. 일주일 중에 하루는 집에 머문다. (특별한 사정이 있을 경우는 예외)

4. 대외적인 부부의 의무는 이행한다. (집안, 사업 행사 등등)

5. 그 어떠한 경우라도 바깥 일을 집안으로 끌고 들어오지 않는다.


위 사항을 어길 시 상대에게 이혼을 요구할 수 있고, 이혼으로 인해 발생하는 모든 책임은 계약서를 위반한 상대에게 있다.


안나 해밀턴 (인) / 엘사 블랙우드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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