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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 결혼 계약서(16)

ㅇㅇ(222.110) 2020.07.23 23:54:37
조회 891 추천 71 댓글 20


안나의 갑작스러운 고백에 정적이 흘렀지만 두 사람의 눈은 어느 때보다 빛나고 있었다.

엘사를 바라보는 안나의 눈과 안나를 바라보는 엘사의 눈이 녹아들면서 서로에게 진심이 전해지는 것 같았다. 

엘사는 자신의 볼을 쓰다듬는 안나의 손을 잡았다. 따뜻한 온기에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조금이라도 더 안나의 온기에 가까워지고 싶었다. 엘사는 그 동안 방안에 가두었던 감정들이 문을 열고 나오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엘사.”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안나의 목소리에 엘사는 눈을 뜨고 안나를 바라보았다. 녹색 에메랄드 빛 눈동자가 자신의 앞에 있었다. 

엘사는 아무 말없이 그 눈동자로 다가갔다. 두 사람이 가까워질수록 숨이 조금씩 섞이기 시작했다. 그 순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의 입술을 탐했다.

부드럽고 말캉한 입술과 숨이 얽히고 서로의 살내음과 향기에 취해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머릿속에서 폭죽이 터지듯 모든 것이 황홀했다. 세포 하나하나까지 감각이 깨어나는 것 같았다. 

강제로 하는 것이 아닌 서로의 애정에서 나온 입맞춤은 세상 그 어느 것보다 달았다.

할 수만 있다면 지금 이 순간을 멈추고 싶을 정도였다. 


이제 두 사람은 서로가 서로에게 특별한 감정이 있음을 인정해야 했다. 

그 동안 꾹꾹 눌러왔던 감정들 속에서 자신의 진심을, 상대의 진심을 솔직하게 바라보고 이 감정이 거짓이 아님을 확인했다. 계약서를 썼든, 상대가 애인이 있든 그건 이제 아무래도 좋았다.

지금 서로의 품에서 입술을 맞닿으며 사랑을 속삭이고 있는 것은 엘사와 안나 오직 단 두 사람 뿐이었다.












“네..네, 알겠습니다.”


엘사는 마지못해 대답하며 아쉬운 표정으로 안나를 바라보았다. 안나도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열기가 가시지 않은 채 붉어져 있는 두 사람의 얼굴이 떨어질 수 없다고 말하는 듯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안나와 엘사의 달콤한 키스는 오랫동안 이어졌다. 만일 루나드의 비서가 그들을 찾으러 오지 않았다면 곧장 호텔로 갈 기세였다.

비서는 오자 마자 루나드가 엘사를 찾는 다는 것을 전했고 두 사람은 황급히 떨어지며 어색한 상황이 만들어졌다. 

엘사가 겨우 더듬거리며 알겠다고 하자 그제서야 비서는 한 발 물러서서 엘사를 기다렸다.

엘사는 조심스럽게 안나의 손을 잡곤 작게 속삭였다.


“나중에 집에서 봐요. 차 대기시켜 놓으라고 할게요.”


“응, 다녀와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엘사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억지로 옮기며 비서를 따라 루나드에게 향했다. 

안나 역시 엘사를 보내주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루나드의 말은 절대적이었고 이번에 엘사가 저지른 일을 결코 그냥 넘어갈 사람이 아니었다.


안나는 엘사가 걱정되었지만 아쉽게도 자신이 해 줄 수 있는 일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대신 엘사가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조금이라도 엘사를 더 눈에 담고 싶었다.

검은색 드레스에 살짝 흩날리는 백금발이 점점 흐려지고 있었지만 그에 반해 안나의 감정은 점점또렷해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모든 일에는 그에 상응하는 대가가 있듯, 안나도 자신의 감정에 책임을 져야 했다. 


엘사가 완전히 사라지자 마침내 안나는 핸드폰을 꺼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조금의 떨림도 없었다. 

그저 이젠 거짓없이 솔직해야 했다.














“아주 가관이더구나. 가관이야.”


“…… .”


“손님들 앞에서 그게 할 짓이냐?”


“죄송합니다.”


“너 때문에 뭘 잃었는지 생각도 하기 싫다. 왜 그랬는지 알고 싶지도 않고.”


“면목 없습니다.”


엘사는 아무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숨이 막힐 것 같았지만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한 대가를 치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조용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방 안에는 화려한 가구들과 고풍스런 액자들이 가득했다. 루나드는 다리를 꼰 채 못마땅한 듯 엘사를 노려보고 있었다. 

엘사는 그의 옆에서 조용히 서 있을 뿐이었다.


“일을 저질렀으면 책임을 져야지? 설마 모른 척 하진 않겠지.”


“네, 물론입니다.”


“프로젝트 하나 줄 테니 잘 해봐. 보고는 나한테 직접 하고.”


“네?”


뜻밖의 말에 엘사는 고개를 들어 루나드를 바라보았다. 

엘사는 루나드가 그 사람들에게 직접 가서 선물과 함께 다시 사과하거나 다른 일로 책임을 지게 만들거라고 생각했다. 

갑자기 프로젝트를 맡으라는 것은 전혀 생각치 못한 일이었다.


“자세한 것은 네 비서한테 줄 테니 확인해봐라.”


“무슨 프로젝트 말씀이십니까?”


“해밀턴과 같이 하는 일이야, 아렌델 프로젝트라고 들어봤지?”


“아렌델 프로젝트요?”


“너한테도 보고서가 올라간 적이 있을거야. 자세한 건 출근해서 확인하도록 해라.”


“...네.”


“그래도 해밀턴과 같이 하는 일이니 너한테도 나쁘진 않을 거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루나드의 입은 다시 닫혔다. 

엘사는 왠지 모를 꺼림칙한 기분에 목을 쓸었다. 아렌델 프로젝트. 분명 들어본 적이 있다. 

예전에 보고서를 본 적이 있는 것 같지만 자세하게 읽어보진 않았던 탓에 무슨 일인지 전혀 기억이 나질 않았다.


“나가봐. 참, 네 안사람한테 안부 전하고.”


“..네.”


엘사는 간단하게 목례를 하고 방을 빠져나왔다. 루나드는 절대 아무 이유없이 일을 맡기는 사람이 아니었다. 

엘사에게 이 일을 준 것도 책임을 지라는 것은 핑계에 불과했다. 그는 애초에 엘사에게 맡길 생각을 하고 있었을 터였다.

엘사는 복도를 걸어가면서 조심스럽게 움직이는게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가능하면 루나드의 눈을 피해서 정보를 모으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엘사와 헤어진 뒤 안나는 집으로 가지 않고 곧장 크리스토프에게 갔다. 자신의 마음이 확실하게 정해진 만큼 이젠 마침표를 찍어야 했다. 

크리스토프에게 미안했지만 죄책감 때문에 붙잡을수록 서로가 상처받는 것은 자명했다.


안나는 고개를 숙인 채 자신의 앞에 앉아있는 금발머리 남자를 보며 모든 것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엘사와 살면서 감정이 깊어지고 이젠 더 이상 모른 척할 수 없다는 것과 진심으로 미안해하고 있다고 말을 했지만 그는 묵묵부답이었다.


“..미안해, 크리스토프.”


“…….”


“미안하다는 말 밖엔..”


“..싫다고 하면?


“크리스토프..”


“난 너 때문에 여기까지 왔어. 그런데 이제 와서 헤어지자고?”


“…… .”


“어떻게 이렇게 이기적일 수 있니? 나는 대체 그동안 너에게 뭐 였어?”


“..미안해.”


“미안하면 나한테 이렇게 하면 안 되는 거잖아! 대체..그 놈이 너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그런 거 아니야. 단지..”


“안나! 나는 너를 믿고 여기까지 온 거야! 너 하나만 믿고!!”


“…….”


“아무리 생각해도 안 돼.”


“크리스토프, 나는..”


크리스토프는 절대 용납하지 못하겠다는 듯 주먹을 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렇게까지 그가 단호했던 적은 없었다. 

항상 안나를 먼저 배려하고 생각했던 그였다. 그는 화를 주체할 수 없다는 듯 숨을 거칠게 쉬고 있었다. 안나는 처음으로 그가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당장 이곳에서 빠져나가야 할 것 같았다. 

크리스토프가 위협적인 행동을 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그는 자리에 서서 안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난 너랑 못 헤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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