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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메이크/팬픽] Whiskey Bonbon -1

ㅇㅇ(14.32) 2020.08.20 21:02:04
조회 967 추천 54 댓글 29

"초콜릿은 도통 질리지가 않아요."


그녀가 배배꼬인 발음으로 신세한탄을 시작했다. 뭔가 시작됐군. 엘사는 마른 헝겊으로 올드 패션드 글라스를 닦으며 오늘 처음 온 손님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달아서 싫다고 하는 사람도 많지만, 애초에 초콜릿은 쓰다구요!"


단 건 내 입맛에 안 맞지만, 그렇다고 쓴 초콜릿을 돈 주고 사먹긴 뭔가 아까워. 솔직한 심정이 입 안에 맴돌았으나 엘사는 투철한 직업 정신을 발휘하여 적당히 대꾸했다.

  

“맛있죠, 초콜릿.”

 

그렇죠! 다들 이렇게 생각한다니까! 취객은 엘사의 무미건조한 목소리를 눈치 채지 못했는지, 계속해서 초콜릿에 대한 열변을 토했다.


"먹으면 살찐다느니 그런 소리는 다 변명이에요. 봐요, 초콜릿은 채소니까. 먼저 카카오빈을 갈아서 가열하면 카카오리커가 되죠. 이걸 또 가열해서 압착하면 카카오버터랑 카카오매스로 분리되는데 이걸 설탕- 알죠? 설탕은 사탕수수에서 나온 거? 이 셋을 기본으로 만든 게 바로 다크 초콜릿! 여기까지 죄다 식물이잖아!"


초콜릿은 샐러드다~! 먼 옛날 아르키메데스가 유레카를 외치듯, 여자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자신의 대발견을 가게 안 모두에게 들리고도 남을 정도의 목소리로 공표하곤 다시 앉았다. 이 경이로운 설에 흥미가 동한 엘사가 질문을 던졌다.


"그럼 밀크 초콜릿은요? 우유는 동물성 식품이잖아요."

"그건 드레싱이니까 괜찮아요!"


엘사는 저 여자의 주방에선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저는 무엇을 먹느냐보단 얼마나 먹느냐가 좌우한다고 생각해요."

  

벌써 세 번을 비운 베일리스 밀크 잔을 치우며 엘사가 조심스레 의견을 표했다.


"그래, 맞아, 뭘 먹어도 살은 찌는데 그걸 괜히 초콜릿에 누명 씌우는 게 정말로 싫어!"


손님의 말이 끝나고도 한동안은 카카오 카카오 소리가 엘사의 귓전에 메아리쳤다. 초콜릿에 대한 알 수 없는 집착만 빼면 참 괜찮을 텐데. 아니, 손님을 상대로 감히 무슨! 엘사는 실례되는 생각을 떨치려 무례한 자기최면을 시도했다. 저 치는 그냥 시끄러운 예비 진상이다, 진상이다, 진상......

 

“잘 듣고 있죠? 그래서 당신은 어떻게 생각해요?”

“진상이라고 생각해요, 아니 제 말은, 예비란 뜻이었어요. 어......”

 

기습질문에 당황한 나머지 사고를 저지른 엘사는 옆에 있던 동료, 올라프를 간절하게 바라보았으나, 그는 얼음을 다듬는 작업에만 몰두한 척 굴었다. 그래, 네가 어련히 도와주겠니. 다행히 엘사의 발언이 귀에 들어가진 않았지만, 오히려 무시당한 기분이 들었는지 초콜릿 걸이 칭얼댔다.

  

“이거 봐, 내가 열심히 주장하면 뭐해, 정작 사람들은 관심도 없는데! 안 되겠다, 기초부터 차근차근 다져야겠어요. 그럼 초콜릿의 역사 특강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안 돼! 화제전환의 필요성을 강렬히 느낀 엘사는 갓 완성된 얼음덩어리를 올라프에게서 갈취해 잔에 집어넣었다. 내 아기! 칭얼거림은 무시한 채 엘사는 순식간에 칵테일을 조주했다. 온더락에 스카치 위스키 1.5온즈에 드람브이 0.5온즈를 순서대로 빌딩. 엘사가 손님에게 잔을 내밀었다.


"이건 러스티 네일이란 칵테일이에요."

"그래서 19세기 즈음 네덜란드의 반호텐이란 사람이 코코아파우더를…… 네?"


마셔 봐요. 엘사의 은근한 재촉에 넘어간 손님이 멋모르고 호박색 잔을 쭈욱 들이켰다. 아악! 손에서 잔을 팽개치고 괴성을 내지른 그녀를 보며 엘사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음, 한 입에 털어 넣으란 뜻은 아니었는데. 괴로워하는 여인에게 이번엔 물이 든 잔을 건네며 엘사가 말했다.

  

"어때요, 몸이 후끈하죠? 제법 달달하지만 그래도 위스키라 도수가 꽤 높거든요."

"아 싫어 싫어, 속이 타는 것 같아!"

"녹슨 못 색깔이라서, 아니면 영국 속어로 고풍스럽다는 뜻이라서 그런지 이 칵테일의 이름은 러스티 네일이에요."


엘사의 설명을 들은 건지 만 건지 손님은 카운터에 엎드려 끙끙 앓았다.


"속이 뒤집어질 것 같아요…"

"이미 꽤 많이 드신 데다 도수 높은 술을 통째로 들이부었으니 당연하겠죠."

"그럼 대체 왜 줬어요!"

"서비스예요."


드디어 이 인간이 잠시나마 입을 다물었다. 공짜라고 하니 뭐라 따질 수 없던 모양이었다. 이대로 조용해지겠지? 그러나 뭐가 그렇게 서러웠던 건지, 그녀는 곧 말 그대로 난동을 부리기 시작했다.


"아파! 술이 들어올 때마다 아파!"

"…조금 있으면 괜찮아질 거니까 제발 가만히 좀 있어봐요."

"좋은 사람인 줄 알았어, 내 투정도 별 말 없이 들어주니까 상냥하구나 생각했던 내가 바보였어!"


독한 술을 마시고 취해 손님이 잠자코 돌아갈 줄로만 알았던 엘사는 어느새 저 여자의 신세한탄 2부의 막이 올랐음을 깨달았다. 내 무덤을 내가 팠구나.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다들 그래, 날 무시하고! 요즘 시대에 초콜리티어가 그렇게 얕보일 만한 직업이 아닌데! 나도 발렌타인데이랑 부활절에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단 말야! 단지 평소에 손님이 좀 없을 뿐이야… 사실 많이 없을지도 몰라, 그치만 장사도 대목이란 게 있잖아요. 어쩔 수 없다고! 그런데 대체 '초콜릿은 애들이나 먹는 거지' 이따위 소리나 해대는 멍청이들은 뭐야! 잘도 쿨해보이겠다! 하다못해 좀 떨어진 데서 지껄이든가 가게 앞에서 대놓고 말하는 심보는 무슨 심보야! 윌리 웡카가 너희들을 봤으면 다 초콜릿 강에 빠뜨릴 거라고!"

"저, 손님? 그런다고 일체 상관없는 여기서 이러시면……"

"망했어 망했어 완전 망했어 다음 대목까지는 한참 남았는데 손님이 늘 기미가 안 보여… 이제 내 가게는 망한다구!"


주정뱅이 아가씨가 속사포같이 말을 쏟아내더니 이번엔 와앙 울기 시작했다. 오늘 장사 공쳤군. 골칫덩이에서 눈을 떼 가게를 둘러보던 엘사와 눈이 마주친 손님들이 슬금슬금 바를 떠나기 시작했다.


"…덕분에 저희 가게도 망할 듯 싶네요."

"망한다는 말 함부로 하지 마요!"

"당신이 다섯 번은 말했어요."


어떡하지, 지금이라도 쫓아낼까? 아니야 날도 추운데 그럴 수는… 아니, 술 마셔서 몸도 달아올랐으니까 괜찮을 거야. 근데 술 먹고 추운데서 잠들면 죽지 않나? 그래도 일단 정신은 있는 모양이니까 집은 찾아가겠지. 엘사는 이제 더 이상 그녀를 귀여운, 아니 진상, 아니 손님으로 보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어서 빨리 여기서 나가요! 그래, 이거야. 조촐한 시뮬레이션을 마친 엘사가 실전에 나서려던 차에 진상 새싹이 그녀의 셔츠 소매를 붙잡고 늘어졌다. 이거 왜 이래. 엘사는 그녀의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그 순간 눈이 마주쳐버렸다. 벌겋게 충혈된 여자의 눈에는 눈물이 주렁주렁 맺혀 있었다.


"저기, 당신도 그렇게 생각해요? 내 초콜릿이 그렇게 형편없나요? 부탁이니 제발 알려주세요, 전 잘 모르겠으니까……"


안 돼. 눈물만은 제발! 또 내가 가게에서 여자를 울렸다는 소문이 나면 나는 이제 평생 짝을 찾을 수 없을 거야! 엘사는 당장이라도 내쫓으려 했던 태도를 거둬들이고 평화의 깃발을 살랑거렸다.


"…그렇게 물어봐도 전 안 먹어봐서 몰라요."

"그럼 팁이라고 생각하고 받아주세요. 그리고 내일 다시 올 테니까 평가해줘요."

"내일도 온다고, …가 아니라 평가라뇨?"

"부탁이에요. 제 초콜릿… 부디 맛봐주셨으면 해요."


그리곤 품에서 부스럭거리는 종이봉투를 꺼내 엘사에게 떠넘겼다. 왜 저런데서 나오는 거지. 얼떨결에 봉투를 받아 안을 들여다보니 체온 때문인지 조금 녹은 초콜릿 덩어리들이 비닐에 개별포장된 채 가득 들어있었다.


"제가 직접 만든 프랄린이에요. 여러 가지 맛이 있으니까 다 먹어보고 감상을 말해주세요."

"…이걸 다요?"

"혼자 먹기에 딱 적당하죠?"

"다른 사람하고 나눠 먹어도 되나요?"

"혼자 먹기에 적당하다고 제가 말하지 않았나요?"


은근한 압박이 서린 목소리에 엘사는 깊은 좌절감을 느꼈다.


"…옆에 저 친구도 오늘 고생했는데 정말 안 될까요?"

"안 돼, 다른 사람은 안 돼요. 죄다 초콜릿을 모르는 바보들이야. 하지만 당신이 말해줬잖아요, 초콜릿이 맛있다고. 당신이라면 믿고 부탁할 수 있어요."


…내가 언제 그랬어! 당사자는 기억 못하지만 분명 말하긴 했었다. 그러나 이제 와서 부정하면 저 여자가 매일 찾아와 행패 부릴까봐 두려워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가게의 존속이냐, 트라우마가 담긴 초콜릿을 먹느냐. 고민할 것도 없었지만 이렇게나 많은 초콜릿을 혼자서 먹어치워야 한다니 생각만 해도 벌써부터 혀가 아려왔다. 잠깐, 이거 혹시 아까 준 칵테일에 대한 복수가 아닐까.


"…해 줄 거죠?"


애절한 목소리가 엘사를 생각의 바다에서 건져냈다. 엘사는 체념한 듯이 한숨을 쉬었다. 그래, 이미 잔뜩 취한 것 같은데 기억이나 하겠어? 엘사의 마음은 좋게 이야기해 빨랑 돌려보내자는 쪽으로 기울었다.


"그렇게까지 원한다면 안 해줄 수가 없네요."

"감사해요!"


엘사가 받아들이자 곧장 표정이 밝아졌다. 아직도 내키진 않았지만, 저런 얼굴을 보고나니 마음이 좀 누그러지나 싶었다. 이런 엘사의 심경을 알 수 없던 여자는 헤실헤실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이렇게 술이 친절하고 바텐더분이 맛있는 가게를 알게 되어서 기뻐요!”

 

뭐라고? 귀를 의심하던 찰나, 주정뱅이가 곧 균형을 잃고 바닥에 엎어졌다. 엘사가 놀라 외쳤다.


"괜찮아요?"

"네네, 좀 어지러운데 괜찮아요… 바닥 짚고 일어나면, 어?"


다시 한 번 쿵, 소리가 울려 퍼졌다. 저 여자, 저러다간 내일 몸이 남아나질 않을 텐데. 계속해서 발을 헛딛는 그녀(와 떨고 있는 가게 기물들)가 어찌나 걱정되던지. 엘사는 얼마 남아있지 않던 서비스업 정신을 쥐어짜내 그녀에게 물었다.


"혼자 갈 수 있겠어요?"

"넵! 그럼 저는 이만 가볼게요. 이제부터 당신에게 줄 초콜릿을 더 만들어 볼 테니까 내일 봐요! 아니, 어쩌면 매일!"


말을 마치고 위태롭게 바를 나서는 주근깨 아가씨의 마지막 문제 발언을 떠올리며 엘사는 생각했다. …가게보다 목숨이 더 중요하지 않나? 자가혈당측정기는 어디서 살 수 있을까 진지하게 고민하는 그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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ㅎㅎ... 좀비픽... 완결 보여드리겠습니다... 눈물의 할복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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