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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 결혼 계약서(26)

ㅇㅇ(222.110) 2020.08.23 22:41:42
조회 576 추천 54 댓글 12



“말해주세요. 전 알아야겠어요.”


침묵 끝에 나온 대답에 약간의 망설임이 묻어났다. 루나드의 말이 무슨 뜻인지 엘사도 잘 알고 있었다. 

책임을 진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지금이 아니면 언제 기회가 있을지 몰랐다. 그렇기에 두려웠지만 마주해야 했다. 

안나를 위해서라도.


“아렌델 프로젝트의 목적이 뭔지, 무슨 거래를 하셨는지 알려주세요.”


루나드는 무표정으로 엘사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이렇게 자신을 찾아온 엘사가 한편으로는 기특하기도 했다. 

결혼 전의 엘사 같으면 절대 자신을 찾아오지 않았겠지만 지금 엘사는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 혹은 무언가를 알기 위해 자신의 의지로 여기에 온 것이었다.

그리고 이 점은 루나드가 원하던 후계자의 자질 중 하나이기도 했다. 갖고 싶은 것이 있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모든 방법을 시도해보는 것.


“좋아, 준비가 된 것 같으니 말해주마. 아렌델 프로젝트는 단순히 해밀턴과 협력하는 사업이 아니다. 블랙우드가 더 큰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발판이지.”


“...... .”


“아마 너도 이미 알고 있겠지? 말도 안 되는 내용이 계약서에 있었다는 걸. 대부분이 수익 분배에 있어 우리가 이득을 보는 구조다. 하지만 이건 중요한 게 아니지.”


“네?..”


“이 프로젝트를 계기로 해밀턴의 기술과 자본을 빼낼거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빼내다니…”


“벌어들인 수익으로 해밀턴의 주식을 매입하고 시장을 장악할거다.”


“..네?..”


“프로젝트가 끝날 때쯤엔 우리가 해밀턴의 새 대주주가 되어 있을테고, 우리의 지분을 갖고 해밀턴을 흔든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연습 게임이고..”


“...지금 무슨..”


“그 후에 합병을 발표할 예정이다. 이게 본 게임이지. 이걸 위해서 많은 준비를 해 왔고 앞으로도 그럴거야.”


“..!..”


엘사는 자신의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루나드가 하는 말들은 전부 거짓말처럼 들렸다. 

그가 내뱉는 말들은 순식간에 엘사를 지나쳐 사라지는 것 같았다. 엘사는 자신도 모르게 인상을 쓰며 무슨 소리인지 재차 물을 수밖에 없었다. 

해밀턴과의 합병?


“블랙우드와 해밀턴이 합병되면 새로운 사장이 필요할테고 그때 우리의 친구에게 도움을 좀 줄수 있겠지.”


“결국...해밀턴이 아니라..위즐..튼과의 거래셨군요.”


“그래.”


엘사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루나드의 모습에 숨이 턱턱 막혀왔다. 

대체 어디서부터 이 일을 풀어야 하는 거야?  도저히 그를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다. 

이 엄청난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아무 생각도 나질 않았다. 


루나드는 이미 다 예상한 일이라는 듯 콧수염을 만지며 엘사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건 기회였다. 엘사가 자신의 뜻대로 따라준다면 이 계획에 좀 더 가속도를 붙일 수 있었고 만약 아니라고 해도 그가 손해 볼 일은 없었다. 

이미 계약서에 서명까지 한 상황에서 뚜렷한 증거 없이 의심만으로 판을 뒤집을 수는 없었다. 물론 단 한가지 예외가 있기는 했다.

엘사와 안나가 이혼하는 것.


하지만 이혼이라는 것이 쉬운 일도 아닐 뿐더러 루나드는 엘사는 절대 안나와 이혼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불행히도 엘사는 안나를 사랑하고 있으니까. 아이러니하게도 그 점이 루나드에겐 일종의 보험이었다.

자신의 계획을 실행시키기 위한 안전장치.


“대체..언제부터..”


“준비는 꽤 오래했지. 네 결혼 전부터 계획했던 일이다. 너와 그 아이의 결혼은 그저 과정에 지나지 않아. 아마 해밀턴에서도 우리의 친구가 아니었다면 이 결혼은 성사되지 못했을거다.”


“..뭐..라구요?..”


“하하핫, 엘사. 순진하게 굴지 말아라. 어차피 정략결혼 아니었니? 이용할 수 있는 것은 최대한 이용해야지. 본래 적은 가까이 두는 법이다.”


루나드는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에게 엘사와 안나의 결혼은 이 모든 것을 위한 눈속임이었고 해밀턴을 무너뜨리기 위한 토대 작업에 불과했다.


엘사는 후들거리는 다리에 억지로 힘을 주며 힘겹게 서 있었다. 루나드의 말을 듣는 순간 눈앞이 깜깜해지는 것 같았다. 

지금 뭐라고 한 거야? 안나와의 결혼이 전부 계획된 것이었다고?

정략 결혼을 떠나서 애초에 루나드와 위즐튼이 전부 계획한 일이었다고? 


엘사는 떨려오는 몸을 도저히 주체할 수 없었다. 마치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았다. 

다른것보다 자신의 결혼이 그저 계획의 일부였다는 사실이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럼 안나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지금 엘사는 안나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가까이서 서서히 안나를 고통속에 몰아넣고 죽음으로 인도하고 있었다.

엘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할 수만 있다면 자신의 심장에 칼이라도 꽂고 싶은 심정이었다. 

가슴에서부터 올라오는 고통에 신음소리조차 내지 못했다. 엘사는 안나를 벼랑으로 내몰고 있었다.


“그러니 너도 이 참에 확실히 배워라. 너를 프로젝트 책임자로 임명한 것도, 지금 이 이야기를 하는 것도 앞으로 네가 이끌어갈 블랙우드를 위해 해주는 말이니.”


“…….”


“한때의 사사로운 정에 마음 쓰지 마라. 그런 감정은 필요치 않아. 게다가 어차피 그 애도 결혼 전부터 따로 만나는 사람이 있었다면서?”


“..그걸..대체..”


“내가 모르는 게 있을거라고 생각했니? 물론, 네가 그 아이를 좋아한다는 건 안다. 하지만...”


엘사는 마치 모든 것을 잃은 것 같은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루나드는 이미 안나의 전 애인까지도 알고 있었다.

그걸 알면서도 지금까지 묵인했다는 것은 자신의 계획에는 방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놔둔 것이 분명했다. 

아니, 어쩌면 그것마저도 계획의 일부였을지도 모른다.


엘사는 이 모든 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그저 루나드가 이 모든 것이 거짓말이라고 말해주길 바라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절망스러웠다.

엘사는 이 모든 것이 참을 수 없을 만큼 역겨웠고 화가 났다. 루나드에게, 자신에게 화가 났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것 같았지만 차마 울 수도 없었다.


안나에게 뭐라고 말을 해야 하지?


이 모든 것을 안나에게 말하는 순간 엘사는 블랙우드를 저버리는 꼴이 된다.

결국 회사와 안나 사이에서 엘사는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엘사는 그 자리에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둘 다 놓쳐서는 안 될 것들이었다.


“네가 생각할 것은 하나다, 엘사. 블랙우드, 회사의 미래만 생각해.”



루나드의 마지막 말과 함께 엘사의 세계가 무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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