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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박,픽]Arens Of Sheffield 01~02

개구리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0.09.13 23:44:12
조회 785 추천 26 댓글 12



9/5일자 엘산나 대가족 픽 도박





Praying prey








https://youtu.be/N_3yqTAMqtc






1.

"캠핑을 한 번 갈까 싶어요."


새해가 지난 다음 1월 2일의 눈오는 아침, 가족식사 자리에서 불현듯 안나가 꺼낸 말이었다. 아무런 예고도 없었던지라 찬물을 끼얹은 듯 간간히 이어졌던 가족들의 대화는 완전히, 그리고 잠시 끊어졌다.


"갑자기?"


옆에서 안나가 새벽에 일어나 만들어낸 클램차우더에 빵의 표면을 찍어 조금씩 씹던 한나가 안나의 옆구리를 푹 찔렀다. 초록색 파자마를 입은 한나의 한쪽 귀에는 검은 블루투스 이어폰이 끼워져 있었고, 안나는 간지러운 옆구리에 대한 작은 복수로 한나의 블루투스 이어폰을 뽑았다. 부드러운 클래식이 희미하게 들려왔다. G선상의 아리아, 간단하게 먹는 아렌가의 특성에 맞지 않는 풍요로운 음색이었다. 안나는 다시 한나의 귀에 이어폰을 꼽아 넣었다. 직후 간지러운듯 한나가 귓바퀴를 긁었다.


"안나, 일이 바쁘면 나중에라도 가도 괜찮지 않겠니?"


식탁의 끝에서 숟가락으로 클램차우더를 떠먹는, 안나의 어머니인 이두나 아렌이 걱정하는 투로 말했다. 안나가 흘끔 옆으로 눈을 돌리자, 그곳에는 빵과 클램차우더 접시를 두고 꾸벅꾸벅 졸고 있는 엘리사와 멜리사, 그리고 두 아이의 사이에서 엘사가 즐거운 듯 두 아이에게 번갈아 아침을 먹여주고 있었다. 아이들은 셰필드에 온 이후 매일 밤 늦게까지 이야기꽃을 피우고, 곁에 있는 아렌들과 같이 놀았다. 그 결과, 아이들은 아침의 부엌에서조차 조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나중에는 고쳐야겠지만, 지금은 있는 그대로가 보기 좋다고 생각한 안나였다. 모든 걸 경험하고 싶어 잠까지 줄이려는 게 눈에 보였기 때문이었다. 구태여 제재하는 것이 더 좋지 않을 것 같았다.


"새해잖아요. 구출 작전도 새해 때문에 잠시 연기됐고, 남아공 상황도 일시적으로 휴전 협정을 맺어서 앞으로 일주일 정도는 시간이 비는데..."


안나가 잠시 말을 멈추고 클램차우더를 한 숟갈 떠먹었다. 안나는 자신의 앞에 있는 수프의 맛이 밍밍하다고 느꼈다. 다른 가족과는 다르게 짜게 먹는 습관이 혀에 배어있던 안나는 식탁의 한가운데에 놓여진 향신료 통들 중에서 소금과 후추통을 가져와 수프 접시에 조금 뿌려 섞었다. 다시 입에 한 스푼 떠넣자, 그제서야 안나의 입맛에 맞는 클램차우더가 되었다.


"엄마도 지금 새해니까 휴가 정도는 낼 수 있지 않아요?"


안나가 이두나에게 물었다. 이두나는 긍정의 의미로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크리스마스의 다음날, 이두나는 회사에 잠시 출근해서 업무를 볼 서류들을 모두 집으로 가지고 와 새해 전날까지 모두 확인하고, 결재를 하는 날을 보냈고, 해의 마지막 날 2시간 전에 모두 끝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만약 스케줄이 있다거나 하면, 한때 아렌을 속이고, 죽이려고 했던 아톤의 한스 웨스터가드 회장의 비서였던 제인이 전화로 미리 연락을 취했을 터였다.


"제인 언니이... 연락이 없어어어.."


졸음을 참지 못해 엘사의 왼팔에 이마를 폭 기대며 멜리사가 실눈으로 안나를 바라봤다.



"음, 멜리사. 제인 씨가 너희들보다 먼저 영국에 살았지만, 그래도 아직 적응하는 단계야. 뭐...우리가 즐겁게 놀며 시간을 보내듯이, 제인 씨도 개인적인 시간을 가지고 있을 거야."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안나가 엘사에게 눈짓을 보내자, 엘사는 살풋이 웃으며 멜리사와 엘리사의 머리를 빗으로 빗어내리듯 쓰다듬었다.


"너무 졸려요..."


엘리사가 두 손을 모아 손바닥만한 눈 결정을 하나 만들었고, 이내 감겨 있는 자신의 눈에 문질렀다. 으츠츠... 차가운 것을 알면서도, 엘리사는 눈 결정을 눈가에 비비는 걸 멈추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본 아렌가의 어른들은 흐뭇하게 지켜보았다. 그 어른들 중 한 명인 한나는 엘리사의 모습이 꿍얼대며 마른 세수를 하는 흰 고양이 같다고 생각했다.


"그러게 어제 내가 자라고 했을 때 잤어야지..."


한나의 손가락에서 삐져나온 바람 한 줄기가 물기 어린 엘리사의 눈가를 말려주었다. 어제는 한나와 엘리사가 같은 침대에서 잤기에 말할 수 있는 경험이었다. 새로운 두 아렌들이 모두 모이고 난 이후에, 그들은 예전부터 만들어왔고, 실행에 옮기지 않았던 새로운 가족 전통을 맞이했다. 매일 매일 두 명씩 짝을 지어서 잠을 같이 자는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같은 것을 보고 느끼는 동일한 하루를 지낼지라도, 서로가 가지고 있는 사견과 마음은 다르기에, 잠을 잘 때 하룻동안 있었던 얘기를 해 서로를 향한 유대를 끈끈히 하기 위함이었다. 처음엔 늘어난 가족 수에 이 전통이 길게 이어지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 안나였지만, 의외로 그녀를 포함한 가족들은 매일 바뀌는 잠자리 파트너에 대해 좋아했고,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것 같았다.


'애들이 학교 갈 때까지 이어지겠지?'


엘리사와 멜리사를 보며 안나는 생각했다. 여전히 CIA의 정기적인 검사를 받아야 하지만, 두 아이는 이제 해체가 된 러시아의 제약기업 아톤의 비밀 프로젝트의 핵심 개체가 아니었다. 공식적으로 CIA 내에선 사망 처리가 된 안나와 비슷하게, 두 아이와 엘사, 그리고 한나는 자유인 신분이 되었다. 엘사는 작년 여름부터  [아이스캣]이라는 가명으로 인터넷에 자연을 다룬 그림들을 태블릿으로 그려 올리기 시작하다, 안나가 계약을 맺은 출판사와 정식으로 계약을 맺어 일러스트집을 내기까지에 이르렀다. 안나의 기억에 따르면 엘사가 만든 일러스트집에는 밥 로스의 기법만큼 미술의 난이도를 낮추는 엘사만의 기법이 적혀 있어 타국의 언어로도 번역되어 해외 출판도 계획중이라고 안나의 편집자인 유진이 말한 적이 있었다.


한나도 엘사처럼 정규 교육은 받지 못했지만, 탄생 과정에서 신체 성장을 재촉하는 촉진제와 다양한 분야의 지식을 주입당했다. 안나는 그런 한나의 1년을 안쓰럽게 여겼다. 탄생하자마자 끔찍한 기억, 끔찍한 일, 슬픈 기억, 슬픈 일을 겪어야 했던, 어쩌면 엘리사와 멜리사보다 더 잔인한 삶이었다. 또한 엘리사와 멜리사는 유치원, 더 나아가 학교를 다닐 수도 있을 신체  여건이 되었지만, 한나는 그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한나는 3개월 전 걱정하는 엘사와 안나를 향해 이렇게 말했다.


'어쩔 수 없어. 촉진제를 상쇄시키는 약이 있는 것도 아니잖아. 그리고 난 아기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난 이 상태에서 언니, 그리고 엄마. 또 나중에 올 두 꼬맹이들하고 있는게 더 좋거든!'



긍정적으로 말한 한나였지만, 나머지 아렌들의 생각은 그러지 못했다. 그러다 문득, 이두나가 다양한 방안을 제시했다. 블루라운드에는 퇴역군인, 특수부대, 혹은 뒷세계의 킬러들만이 오는 것이 아니었다. 아렌가와는 다른 이야기지만, 브렉시트가 심화됨에 따라 물가와 실업률은 조금씩 체감되기 시작했고, 이내 연금과 각종 보조금의 규모가 줄어들었다. 그에 따라 일반인들도 민간군사기업의 문을 두드리는 빈도가 늘었고, 블루라운드는 이전보다 더욱 기업의 규모를 키우기 위해 일반인들을 교육할 교관이 필요했다. 한나는 아톤 사태 이후 조금 민감해진 안나에게서 직접 훈련들을 받았기에, 교관의 자격으로도 충분했다.



하지만 이두나의 제안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블루라운드 컴뱃스쿨의 교관에 이어 안나가 속하는 EML의 일, 혹은 오로라의 카페에서 잠깐 일을 해 보는 것도 권하였다. 한나는 아직 후자에 속하는 두 가지 일을 맡진 않았다. 반올림 하여 1년의 삶을 살고 있는 한나에게 있어 세상은 지식만으로 채울 수 없는 경험들로 가득했다. 한나는 한꺼번에 많은 일이 아닌, 한 번에 한 가지씩의 일을 하고 싶었고, 안나와 엘사, 그리고 이두나도 한나의 의견을 지지했다. 현재, 한나는 교관의 일에 충분히 만족하고 있었다.



이제는 사회인이 된 엘사와 한나였지만, 엘리사와 멜리사는 손길이 필요한 아이들이었다. 이틀 뒤에 MI5에서 아이들의 새로운 신분이 담긴 서류와 신분증이 도착하겠으나, 아이들은 기껏해야 초등학교 저학년 수준으로 입학할 모습이었다. 비슷한 또래를 키워본 경험이 있던 벨이 추후에 자신의 양육 경험을 알려준다고 하니, 지금 당장은 아이들의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 일은 거의 없다고 해도 무방했다.


"애들 얼굴에 뭐 묻었어?"


안나가 잠깐 생각에 잠겨 있던 사이에, 캠핑과 스케줄에 대한 이야기가 잠시 방향을 잃었다. 어느새 가장 먼저 자신의 몫의 클램차우더와 빵을 먹은 한나는 자연스럽게 웃으며 맞은편의 세 사람을 보는 안나에게 시선이 돌렸다. 무슨 생각이지? 엘사가 두 아이의 아침을 먹여주고, 이두나는 잠시 휴대폰을 꺼내 스크린을 조작하고 있었다. 먼저 일어나기 싫었던 한나는 안나의 볼을 손가락으로 쿡 찌르며 물었다.


"아니, 잠깐 옛날 생각 좀 했어."


안나가 살짝 고개를 돌려 한나를 보더니, 이내 하나의 입가에 손가락을 가져갔다.


"오히려 묻은 건 네 쪽이야."


안나가 한나의 오른쪽 입가에 묻은 빵가루를 손가락으로 훔쳐 빈 한나의 접시 위로 떨어뜨렸다.


"아직 하루는 길어, 그렇게 빨리 먹다가 체할 지도 몰라. 아니면, 한 접시 더 먹을래?"


안나가 묻자, 한나는 고개를 저었다. 연말과 연초의 시기이다 보니 스쿨의 교육생들은 한산했고, 바쁜 일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요 근래 부쩍 늘은 식탐과 알 수 없는 흥분은 한나의 식사 속도를 완전히 바꿔 놓았다. 사실대로 말을 하고 싶어도, 워낙 터무니없는 증상이라고 한나 스스로가 규정했다. 하지만 그녀의 의지와는 다르게, 배에선 여전히 꼬르륵 소리가 새어나왔다. 순간, 가족들의 시선이 한나에게 집중했다. 엘리사와 멜리사도 그 때만큼은 고개를 한나에게 돌려 바라보았다.


"...조금만 더 먹을게."



한나가 속삭이듯 조용한 어조로 안나에게 말했다. 안나는 제 몫의 빵의 절반을 떼 내 한나에게 쥐어주었고, 이내 한나의 접시를 들고 부엌으로 향했다.



"우리 한나, 많이 배고팠나 보구나."


어느새 휴대폰을 잠옷 주머니에 집어넣고 흐붓이 웃으며 한나를 바라보는 이두나가 있었다. 한나는 부끄러운 듯 고개를 조금 숙이며 빵을 뜯어먹었다. 이두나의 눈에는 그런 한나가 사랑스러울 뿐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무미건조한 삶은 1년 전 안나가 회사에 죽은 친구이자, 핸들러였던 그녀의 작업 요원이었던 뮬란의 배지를 들고 나타났고, 이후 거의 두 달동안 순식간에 바뀌었다. 소음이라고는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부족했던 집은, 이내 여섯 명의 아렌들로 조용할 날이 없었다. 하지만 이두나는 이 소음을 사랑했다. 매일매일, 딸들과 함께하는 아침과 저녁, 그리고 휴일이 있었다. 아그나르의 사별과 두 딸과의 이별로 만들어졌던 아픔은 조금씩, 그리고 따뜻하게 아물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방금 전, 크리스마스 이후로 연락이 없는 비서, 제인에게 [잘 지내고 있어요?]라는 문자를 보냈다. 다른 가능성이 없잖아 있었지만, 이두나는 크리스마스 이브에 주었던 선물 때문에 제인의 마음이 복잡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제인에게 너무 이른, 그리고 가혹한 선물이지 않았나 싶은 이두나였다. 제인은 잠시 뒤 안나가 새로운 빵과 즉석으로 만든 샐러드, 그리고 한나를 위한 클램차우더 접시를 가져올 때까지 답장을 하지 않았다. 단순한 우려였던 것일까, 이두나는 하루 정도 더 기다려 보기로 했고, 눈 앞에 있는 가족들에게 집중했다.


"그래서... 캠핑 가는거, 어떻게 생각해요?"


안나가 가족들을 천천히 고개를 돌려 가족들을 보며 물었다. 눈송이를 눈에 문질러 겨우 깬 엘리사는 안나의 말에 두 눈을 반짝였다. 약 1년 전, 안나는 연구소에서 엘리사를 CIA의 독헌트를 피할 기회를 놓치며 만난 멜리사를 데리고 살기 위한 캠핑을 며칠간 한 적이 있었다. 그 중 마지막 캠핑은 비극적인 상황 속에서도, 즐거웠다는 감정이 제일 많이 어려 있었다. 같은 경험을 해 보았기에, 엘리사와 멜리사, 그리고 안나에게는 캠핑이란 활동은 단순한 가족 행사를 넘어서 그 때의 순간을 다시금 기억하는 연결고리와도 같은 역할을 했다. 안나는 사랑으로 아이들을 지키려 했고, 아이들도 그러했다. 일의 결과는 비극이었지만, 그것이 전환점이 되어 지금의 아렌이 만들어졌다. 


"전 좋아요!"


엘리사가 당연한 것처럼 명랑하게 외쳤다. 좋아, 일단 한 표. 안나는 이내 마음 속으로 자신의 의사까지 합쳐 찬성 2표를 계산했다. 안나는 문득 엘사를 향해 눈을 돌리다가, 엘사의 팔에 기대어 잠에 든 멜리사를 보았다. 별 일이 없다면, 멜리사도 분명 찬성을 할 것이었다.


"언니는 어때?"


안나가 다시 엘사를 향해 고개를 돌려 물었다. 크리스마스 이브의 눈 오는 밤, 엘사는 처음 만난 두 아이에게서 세상이라는 선물을 받았다. 앞이 보이기 시작한 이후로, 엘사는 능력을 통제하는 것에 상당한 진전을 보였고, 틈날 때마다 컴퓨터, 아니면 휴대폰으로 자연의 풍경을 보는 것으로 시간을 보내곤 했다. 사흘 전, 안나는 엘사와 같이 침대에 누워 잠이 들기 전까지, 그녀가 도시의 풍경을 거의 1주일 만에 질렸다는 말을 들었다. 안나가 그 이유를 묻자, 엘사는 이렇게 말했다.



[그 벙커 안에서, 너의 모습을 그리며 앞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날 감싸고 있는 건 콘크리트 벽뿐이었어. 벽에는 잠망경처럼 지상을 볼 수 있는 장치가 있었지만, 언제나 황량한 돌무더기, 그리고 눈밖에 없었고. 언제가 되었든, 맑은 곳으로 여행을 가고 싶었어. 황량한 곳이 아니고, 콘크리트가 거의 없는 곳으로. 그때는 너랑 엄마, 그리고...아빠였지만, 지금은 너랑, 엄마랑...한나랑.. 아이들과 같이 편히 쉴 수 있는 곳, 그런 곳에서 그림을 그리고 싶어. 자연과, 우리를 담은 그림을.]


어쩌면 이 중에서 가장 캠핑을 가고 싶어하는 사람은 엘사일 수도 있었다. 아렌마다의 아픈 과거가 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엘사의 과거는 너무 비참하기 그지없었다. 안나는 엘사의 과거를 알게 되면서, 만약 자신이 10년 동안 겨우 몇 평짜리 방 한칸에 갇혀 산다고 한다면 단단히 미쳐버리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만큼, 엘사는 안나와 비슷하게, 혹은 더 강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어디든 말해줘. 숲도 좋고, 해변도 좋아. 산도 좋지만...우리 중에서 멀쩡히 오를 수 있는 사람은 두 명밖에 없네."


그 두명은 바로 한나와 안나였다. 하지만 안나의 DNA로 만들어진 한나도 안나만큼 체력이 충분한 것은 아니었다. 스쿨의 교관으로 교육생들을 가르치면서 어찌저찌 체력을 기르고 있는 것만으로도 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충분할 정도였다.


"난 뭐가 되었든 네 의견을 따를게, 안나."


"내 의견?"


엘사는 잠시 안나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곤히 잠에 든 멜리사의 입에서 흐르는 침을 물을 머금은 손가락으로 닦았다.


"난 한적한 곳이 좋던데, 숲이라거나, 어디 시골 같은데라거나. 아, 엄마, 엄마는 어떻게 생각해요?"


안나가 이두나를 향해 물었다. 이두나의 표정에서 잠깐의 긴장이 스쳐지나갔고, 이내 안나를 향해 웃어보였다. 안나는 잠깐 생각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캠핑, 다르게 말하면 여행이고, 풀어서 말하면 다른 곳으로의 일시적인 이동을 뜻했다. 안나는 이두나의 긴장이 혹시 10년 전 시리아에서 있었던 비극을 떠올려서 드러난 게 아닐까 생각했다.


"엄마, 괜찮...괜찮으세요?"


"으응, 엄만 괜찮아. 잠깐 생각해야 할 일이 있어서. 엄마도 찬성이야. 우리 딸들이 다 모였는데, 새로운 가족 행사도 만들어야 하지 않겠니?"


이두나의 말에는 정기적인 이벤트를 하자는 의견이 담겨 있었다. 안나 또한 그럴 의향이었고, 다른 이들도 찬성할 것이 분명했다. 모두들 잃어버린 과거를 가져본 적이 있었기에, 곁에 있는 가족의 소중함을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하물며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아도, 서로 눈이 마주치면 웃음꽃이 피는 것이 가족이었다.


"좋아요. 캠핑도 좋고, 나들이도 좋고... 뭐든 함께하면 즐거우니까. 혹시 다른 의견 없어요? 언니, 잠깐 멜리사 좀 깨워줘."


"잠은 어디서 잘 거야? 난 캠핑카에서 자보고 싶어."



한나가 안나에게 의견을 냈다. 캠핑카, 안나는 자신 포함 6명의 아렌들을 감당할 캠핑카의 규모를 계산했다. 단순한 승합차형은 2인 내지 3인 정도만 누워서 잘 수 있고, 나머지 사람들은 앉아서 자야할지도 몰랐다. 이내 안나는 버스 규모의 캠핑카, 아니 캠핑 버스를 렌트하기로 마음먹었다. 따로 돈을 받아 보태지 않아도, 안나의 통장에는 CIA와 샐리맨더에서 이룬 작업들로 얻은 보수, 그리고 이따금 업계에서 의뢰하는 사적인 작업들의 보수들이 쌓여 있었다. 못해도 평생을 먹고 살 수 있을만큼 충분한 돈이 있었기에, 안나는 캠핑 버스의 지출에 부담을 가지지 않기로 했다. 만약 가족들이 부담스러워한다면, 운전 면허가 있는 안나와 이두나가 각각 캠핑카를 운전해 떠날 수도 있었다.


"캠핑카가 뭐예요?"


가만히 듣고 있던 엘리사가 한나에게 말했다. 한나는 호기심어린 표정으로 올려다보는 엘리사에게 과장된 몸짓을 섞어가며 설명하는 동안, 멜리사가 볼을 간지럽히는 엘사의 손길에 얼굴을 찡그리며 일어났다.


"멜리사, 잘 잤어? 갑작스럽게 물어봐서 미안한데, 캠핑에 대해 의견 낼 게 있니?"


멜리사의 미간이 잠시 찌푸려졌다, 이내 눈과 함께 펴졌다.


"우리 캠핑 가? 언제? 어디로?"



엘리사만큼은 아니었지만, 졸음에 섞인 것 치고는 활발한 목소리였다. 엘리사가 한나에게 '캠핑카'에 대한 설명을 들으며 들떠 있다면, 멜리사는 활발히 움직일 일이 생각에 들떠 있는 것 같았다.


"아직 확실하게 정한 건 아니야. 빠르면 내일이라도 갈 수 있어. 하지만 그 전에 모두 의견을 다 들어본 다음에 추합해서 결정하고 싶어."



"난 아직 잘 모르겠는데... 이글루 만들고 싶은 곳이면 어디든 좋아."



멜리사는 찬성 의사를 내비치면서, 직접적인 의견은 드러내지 않았다. 가족들이 안나의 의견을 따른다면 곧바로 계획을 세울 수 있을 테니 시간적으로 가장 좋을 테지만, 안나는 자신만의 색이 아닌, 가족들의 색도 섞어가고 싶었다. 최악의 경우에는 안나만 즐거운 캠핑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안나, 그럼 이렇게 하는 게 어떨까? 두 명씩 짝을 짓고 아이디어를 찾아서 오후, 아니면 저녁식사 이후에 의견을 모아서 내 보는 거야. 어떠니?"


"그것도 좋네. 시간이 부족한 것도 아니고, 최대 일주일 정도로 잡고 있으니까 캠핑할 시간은 충분해."


"난 언니랑 할래요!"


안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엘리사가 안나에게 말했다.



"아, 내가 먼저 말하려고 했는데!"



멜리사가 한 발 늦었다는 듯 칭얼대었다. 그러자 인위적인 바람 한 줄기가 날아가 멜리사의 귀를 간질였다.


"멜리사, 안나 언니 대신 난 어때?"


"좋아! 그럼 지금부터 생각할래!"


잠깐 시무룩해졌던 멜리사는 이내 다시 활기를 되찾았다. 그리고선 곧바로 의자에서 내려왔다.


"멜리사, 밥은 다 먹어야지."


엘사가 멜리사의 접시를 들어 보여주며 말했다. 하지만 멜리사는 "지금은 배부르단 말이야!"라고 말하며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리고 멜리사는 한나의 손을 잡고 방으로 들어가려 했다.



"잠깐, 잠깐...."


멜리사의 손에 끌려나가는 중에도 한나는 가족들에게 멋쩍이 웃으며, 남은 한 손에 묻어있는 바람으로 자신과 멜리사의 수프 접시와 빵을 띄워 방으로 데려갔다. 한나가 만든 선선한 바람은 약 3초 정도 식탁 위에 머무르다 사라졌다.


"엄마, 엄마는 저랑 같이 있어요."


엘사가 이두나에게 말했다. 안나는 어느 정도 이 세 개의 조가 나름대로 활발함과 소심함에 적절한 균형을 맞추고 있다고 생각했다. 아주 활발한 멜리사와 한나, 적당히 활발한 엘리사와 안나, 그리고 조용한 성격인 엘사와 이두나. 안나는 어떤 의견이 다음 가족회의에 나오게 될지 내심 궁금해했다. 마치 좋아하는 작가의 신작 소설을 살 때의 기분이었다.


"그럴까? 우리가 의견을 가장 적게 내지 않을까 걱정이네."


"엄마, 작던 크건 중요하지 않아요. 얼마나 각자의 의견이 잘 반영이 되는 게 더 중요하거든요."


안나가 접시에 남은 클램차우더를 숟가락으로 긁듯이 떠먹으며 말했다. 엘리사는 이제 엘사의 도움 없이 빵을 조금씩 뜯어 클램차우더에 적셔 먹기 시작했다.


"난 우리 가족의 의견을 모두 반영하고 싶어요. 모두가 즐길 수 있는 첫 캠핑을...만들어야죠."


안나가 남은 클램차우더에 겨우 손가락만한 크기로 남은 빵을 접시로 훑어 입안에 넣었다.




그리고, 웃어보였다.
전혀 아프지 않은 웃음을.






2.

"아까 배부르다고 하지 않았어?"


와작와작, 그리고 오독오독, 사탕과 과자를 씹는 소리가 방안을 가득 채웠다. 한나는 의자에 앉아 컴퓨터를 부팅하면서 침대에 드러누운 멜리사의 모습을 바라봤다. 한나가 바람을 조종해 가져온 클램차우더 접시와 빵 덩어리는 모니터 앞에서 한나의 따뜻한 바람에 겨우 식감을 유지하고 있었다. 멜리사는 어제 안나와 엘사가 잠시 외출해 사왔던 엘리사의 초코칩 쿠키 봉지와 자신의 사탕 통에 부산스럽게 손을 집어넣고 있었다.


"간식 먹을 배는 충분하거드은..."


한나는 몇 시간 뒤 자신의 간식이 사라졌다는 것을 알게 된 엘리사의 모습을 상상했다. 소리내지 못하고 끅끅 울면서 멜리사를 눈사람으로 만들지 않을까 싶었다. 한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멜리사의 머리에 가벼운 꿀밤을 먹였다. 하지만 되돌아오는건 손끝에 전해지는 얼얼함이었다. 한나의 주먹이 멜리사의 머리에 닿는 순간, 멜리사의 머리칼에 서리와 얼음의 중간 단계의 무언가가 보호막처럼 생겼기 때문이었다. 히히, 멜리사가 한나를 보며 약올리듯 웃었다. 한나는 대신 멜리사의 양 볼을 죽 늘어뜨렸다. 여기까지 예상하지 못한듯 버둥거리는 멜리사였지만, 능력을 쓰진 않았다.


"이따 나가서 엘리사 과자 사와야 하잖아, 이 바보야."


"아 바버 아이거더...해히, 해히얘이느 어제해?"


부자연스러운 발음으로 얘기하는 멜리사의 볼을 푼 한나는 이내 자신의 반 토막 짜리 꼬마를 번쩍 들어 책상 앞 의자에 앉혔다. 그리고 한나는 책상위의 스마트폰을 들었다.


"나는 휴대폰으로 찾을거야. 너는 휴대폰이 없으니까 일단 컴퓨터를 써서 찾는 걸로 하자. 중간중간에 떠오르는 생각들도 말해주면서, 어때?"


지난 일주일 동안, 엘리사와 멜리사는 셰필드에서의 즐거운 일상들을 누리면서, 여태껏 느끼지 못했던 세상에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다. 마치 아이가 말을 떼고 부모에게 많은 질문을 하는 것처럼, 부모의 역할인 안나, 엘사, 한나와 이두나는 쉴새없이 질문을 하는 아이들의 호기심을 충족시켰다. 그러던 중, 아이들이 가장 관심을 가졌던 것은 초콜릿과 사탕같은 간식이 아닌 휴대폰과 컴퓨터였다.




한나가 게임을 하는 걸 본 것을 시작으로 엘사가 컴퓨터와 태블릿을 이용해 만든 그림, 안나의 빠른 타자로 작성해나가는 EML의 지원 계획 보고서의 초안과 소설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백지 상태의 아이들에겐 요술상자와도 같았다. 두 아이는 얼마 지나지 않아 컴퓨터를 조금씩 다루는 데에 흥미를 보였다.


[공학 계열에 눈이 밝은 것 같아.]


엘사가 아이들을 보며 한나에게 넌지시 건넸던 말이었다. 한나는 아직 아이들의 미래를 정하기엔 너무 앞서 나간다고 생각했다. 그 이유는 바로...


"나 타자 어엄청 느려."


단순한 흥미를 가지고 접근하는 것일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이는 엘리사도 마찬가지였다. 문득 한나는 안나와 엘리사 일행이 어떻게 아이디어를 짜낼지 궁금해했다. 두 아이 모두 컴퓨터에 관심은 있지만, 아직 완벽히 다루는 건 기대하기 힘들었다.


"...언니한테 와봐. 내 휴대폰으로 찾아보게."


한나의 말이 끝나자마자 멜리사는 쿠키봉지와 사탕 통을 책상 위에 둔 채 용수철처럼 의자에서 튕겨나와 침대 위로 뛰어들었다. 별안간 이불이 들썩였다. 한나는 그 때를 노려 멜리사의 손에서 군것질거리를 모두 낚아채는 데 성공했다.


"아, 아! 더 먹고 싶은데!"


멜리사가 하늘로 쭉 뻗은 한나의 손에 자신의 손을 뻗었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신체적인 차이가 명확했다. 한나는 실실 웃으며 멜리사가 곤경에 빠진 모습을 지켜봤다.


"아까 엘사 언니가 밥 먹여줄 때 더 먹었어야지. 배고파?"


"아침엔 밥이 안 들어가는데 어떡해..."


"속이 안 좋아?"


한나가 짐짓 걱정스러운 투로 묻자, 멜리사는 고개를 저었다. 단순한 투정에 불과한 것이라고 한나는 확신했다.


"그럼 이따 얘기 끝나고 밥 먹자. 계속 그렇게 군것질만 하면... 한스 처럼 된다?"


"그건 싫어!"


군것질거리를 향해 뻗은 멜리사의 손이 슬며시 내려갔다. 한스, 단순한 사욕으로 한나를 만든 장본인이자, 지금은 땅 속 깊이 묻혀있을 그 악마에 대한 비유는 효과적이었다. 아렌의 사람들은 모두 그의 악행을 직접적으로 겪어보았기에, 행동에 조심해야 했다.


"자, 빨리 끝나고 싶으면 의견을 아주 활발히 얘기하는 게 좋을거야. 만약에 멜리사가 아주 적극적으로 말해준다면, 이따 같이 나가서 다른 간식도 사올 수도 있어."


팔이 저린 한나가 군것질거리를 쥔 손에 바람을 불어넣었고, 이내 바람은 멜리사의 손이 닿지 않는 책상의 끝으로 두 먹을거리를 조심스레 갖다놓았다. 이내 한나는 안나에게서 배운 것처럼 멜리사를 이불로 둘둘 말았다. 과자와 사탕을 압수하고, 한스에 빗대어 말한 게 속이 상해서였을까, 멜리사의 귓불이 붉어져 있었다.


"삐졌니?"


"안 삐졌어. 나, 넓은 곳으로 가고 싶어."


"넓은 곳?"


한나는 멜리사가 짝을 짓고나서 처음으로 말한 의견에, 휴대폰을 켜 구글의 검색창에 <넓은 휴양지>를 검색했다. 이내 와이드로카 베이 리조트라는 장소의 이미지가 화면에 띄워졌다.


"이런 곳 말이야?"


한 눈에 봐도 리조트의 기후는 더울 것 같았다. 한나는 휴대폰을 기울여 멜리사에게 이미지를 잠시 보여준 다음, 와이드로카 베이 리조트가 어디에 있는지 검색해 보았다. 잠시 뒤,  뉴질랜드의 북단이자 호주의 동단에 위치한 피지라는 정보가 나타났다. 한나는 생각했다. 너무 멀지 않을까? 그리고 덥지 않을까? 한나는 영국 내에서 캠핑을 갔으면 싶었다. 캠핑을 간 사이에 스쿨이 문을 열리는 일은 없겠지만, EML과 블루라운드의 대표이자 사장을 임하는 안나와 이두나의 경우엔 자유로울지라도, 제약은 분명 존재했다. 하다못해 사회적 인프라를 임시적으로라도 갖춘, 어느 정도 가까운 곳으로 가야할 것 같았다.


"아니, 아니, 난 여기 말고, 들판 같은 곳으로 가고 싶어. 아니면 숲이 많은 곳으로 갈래!"


"숲? 눈이 온 숲을 말하는 거지?"


한나가 재차 물었고, 멜리사는 언제 삐졌냐는듯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에 엘리사랑, 안나 언니랑 같이 일일 캠프 했었어. 막 숲이 우거져 있었고, 우린 숲 한가운데에 나있는 작은 호수에 이글루를 만들어서 잠을 잤고, 일어나서는 안나 언니가 잡은 토끼를 구워서 먹었어. 아, 또 먹고 싶어졌어."



멜리사의 발을 뒷받침하듯, 작은 몸에 어울리지 않는 큰 허기가 울렸다. 한나는 조심스럽게 바람을 하나 만들어 멜리사 몫의 빵을 클램차우더에 천천히 적신 다음, 꼭두각시의 실을 조종하듯 바람을 움직여 멜리사의 입에 가져갔다. 이불에 말려진 멜리사는 한나의 빵을 피하려고 몸을 꼬물대었으나, 이내 체념하고 한나가 내민 빵을 크게 베어 물었다. 


"그리고 또 있어. 숲에서 내가 만든 커다란 이글루에서 다 같이 잠을 자는 거야. 투명한 얼음으로 천장을 만들어서, 밤하늘의 별을 누워서 보고 싶어. 물론 사탕과 같이!"


"별, 좋지. 망원경으로 더 가까이 볼 수도 있고,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난 거기서 바비큐 파티 같은 것도 해보고 싶어. 소시지라거나, 폭립이라거나... 코코아도 끓여서 먹고..."


상상만 해도 행복한 계획이었다. 불과 1년 전에는, 그저 이두나와 방문을 사이에 두고 이름도 없는 자신의 정체성에 혼란을 겪던 시기였고, 그 별장이 사실 풍경이 좋은 곳이었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한나는 안나가 말한 캠핑 버스하고 별장에 대해 고민해보기로 했다. 캠핑 버스는 화려한 침구를 갖추고 있찌 않을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별장의 생활은 아주 잠깐뿐이고, 별장을 타고 집에 올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캠핑 버스냐... 별장이냐... 그게 문제네."


또한 숙소를 정하는 것도 아렌들에겐 무거운 주제였다. 한나는 별장에서 자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1년 전, 안나와 멜리사, 엘리사를 처음 만난 곳이자, 자신에게 아렌이라는 자리를 내어준 이두나, 그리고 멜리사가 한 번 죽었던 곳이 바로 별장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한나는 별장에서 가축이 아닌, 처음으로 사람을 죽였고, 그에 대한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었다. 그 당시의 일만 생각해도 식은땀이 흐를 정도였다.


"언니, 언니언니. 왜 그래?"


멜리사가 불안한 표정으로 말이 없어진 한나를 올려다봤다. 멜리사의 어깨에 올려져 있는 한나의 손에서 부자연스러운 떨림이 느껴졌다. 멜리사는 뭔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했고 그 의심은 이내 사실로 치환되었다. 한나의 입이 잔뜩 경직되어 있었고, 약간은 서늘한 방안의 온도임에도 한나의 볼에는 선명하게 땀이 맺혀 있었다.


"아, 아니야. 숙소 때문에. 멜리사는 캠핑 버스가 좋아, 별장이 좋아?"


멜리사의 대답은 없었다. 멜리사는 대답 대신 몸을 한번 크게 구부렸다 펴서 고개를 한나에게 돌렸고, 이내 한나의 입을 향해 손을 뻗었다. 입술에 충분히 닿을 수 있는 거리에서, 멜리사는 뻗은 손의 끝에서 작은 얼음결정을 하나 만들었다. 엘리사가 만들 수 있는 눈가루와 눈 결정이 아닌, 다이아몬드를 연상케 하는 손톱만한 얼음이었다.


"난 텐트가 더 좋아. 음... 지금은 겨울이라 힘드려나. 아니면 내가 이글루 만들어 줄게!"


멜리사는 한나가 자신이 만든 얼음을 입에 넣어주길 바랬다. 원래는 아무런 효능도 없었던 얼음이었지만, 안나를 만나고, 엘리사를 만나 도망치는 과정에서 멜리사의 능력은 한 차례 변이를 일으켰다. 엘리사의 눈가루에 부상을 치료하는 요소가 들어있듯, 멜리사도 그에 준하는 요소를 가진 얼음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아직까지 한 번도 같은 개체가 먹은 적은 없었다. 실험실에서 크리스마스의 셰필드까지 엘리사와 자신을 데려다 준 '벨'이라는 선생님도 아이들에게 개체 간의 능력 적용에 효과가 있을지 모르겠다고 말한 바 있었다.


"이글루라, 좋아. 난 그럼 멜리사의 이글루 호텔 1호점의 첫 손님으로 예약할게."


한나는 거부하지 않고, 멜리사가 만든 얼음 캡슐을 손으로 집어 입에 넣었다. 차가웠지만, 따뜻한 무언가가 한나의 혀를 타고 느껴졌다. 여전히 한나의 피부로 멜리사의 시선이 느껴졌다. 한나는 멜리사에게 심리를 읽혔다고 생각했다.


"1호 손님이니까 요금은 사탕 두 개만 받을래."


어린애다운 발상이었다. 크리스마스의 재회 이후, 외출을 종종 하며 아렌가의 어른들은 두 아이에게 돈의 개념을 알려주었지만, 아이들은 돈보다도 물건이 더 가치있다고 생각했다. 생각을 많이 하는 듯하는 엘리사도 돈을 직접 쓰는 것보다는, 초콜릿으로 선물을 받는 것을 더 좋아했다.


"생각보다 싸네. 음, 음음. 이제 괜찮아졌어. 네 얼음 덕분인가봐."


완벽한 거짓말은 아니었다. 한나의 수전 증상은 멜리사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약해졌지만, 마음 속에 남아있는 불안함은 여전히 심장을 두드렸다. 한나는 멜리사가 알아채지 못하게 최대한 천천히 마른 침을 삼켰다. 멜리사는 여전히 의심을 거두지 않은 눈초리를 보였지만, 이내 몸을 다시 돌려 한나의 휴대폰에 집중했다. 멜리사는 화면에 띄워진 리조트라는 곳도 나쁘지 않다고 느꼈다. 여름이란 계절을 겪어보지 않았고, 설령 덥다고 하여도 가지고 있는 능력으로 언제든지 시원하게 더위를 떨쳐낼 수 있기 때문이었다.


"거짓말."


마음의 한 켠에는 리조트에 대한 생각, 그리고 다른 한 켠에는 진정되지 않은 듯한 떨림을 가진 한나에 대한 생각이 있었다. 멜리사는 문득 안나가 아파했던 모습과 한나의 현재 상태를 겹쳐보았다. 떠올리기 싫었지만, 좋지 않은 쪽으로 증상이 비슷해 보였다.


"진짜야."


당연하게도, 한나는 멜리사에게 거짓말을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멜리사가 한나의 말을 반박할 증거는 없었다.


"아무튼 거짓말이야."


멜리사의 머리는 한나의 가슴에 기대어 있었다. 귀가 닿지 않았음에도 멜리사는 한나의 박동이 느껴졌다. 멜리사가 가지고 있는 박동보다 더 빠르게 뛰고 있는 언니의 심장 소리에, 멜리사는 사뭇 진지하게 말했다.


"별장 때문인 거지?"


정곡을 찔린 듯, 멜리사가 느끼는 심장 박동이 더욱 빨라졌다. 괜히 말했다! 멜리사는 속으로 후회를 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한나의 어설픈 미소가 보였다. 미소 속에서 눈물이 방울져 있었다.


"으, 으아아...미안해 언니, 미안..."


여전히 멜리사의 몸은 이불에 말려져 있었고, '멜리사 경단'을 안고 있는 한나의 팔에는 힘이 들어가 있었다. 한나의 어깨가 부자연스럽게 들썩였다. 멜리사는 자신의 말실수 때문인 것을 알면서도, 한나를 위해 만들어준 얼음 결정이 잘못 된 게 아닐까 싶은 불안함을 가졌다.


"아픈 거 아니지? 응? 내가 잘못했어. 울지마아..."


어느덧 한나의 눈물에 멜리사도 감염되고 말았다. 어버버 하던 멜리사도 새어나오는 눈물을 멈추지 못했다.


"괜찮아, 나 괜찮아."


한나가 멜리사를 끌어안았다. 울음으로 가득찬 풍선을 바늘로 찌르듯, 한나의 입에서 울음섞인 숨이 새어나왔다. 아이들을 만났고, 이젠 과거기 되었음에도, 한나는 여전히 별장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별장이 담겨진 생각의 수렁은 순식간에 정신을 휘감아버리며, 그 때, 그 장소로 돌아가 있는 듯한 느낌을 안겨 주었다. 그날의 일을 겪은 다른 가족들은 암묵적으로 그 날의 일을 언급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멜리사는 아직 어렸고, 한편으로는 한나를 걱정하며 별장을 언급했다.


"네 잘못 아니야."



한나가 한 손으로 멜리사의 스파이키 컷 머리를 상냥하게 쓰다듬어 주었다. 멜리사는 슬픈 눈을 하며 코를 훌쩍이고 있었다. 안나는 일전에 멜리사가 겉모습처럼 드센 면이 있다고 말했던 적이 있었다. 그리고 재회한지 1주일이 지난 지금, 안나가 말했던 드센 면은 지금 멜리사에겐 비쳐지지 않았다. 멜리사도 별장에서의 일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 자신의 눈물, 그리고 멜리사의 눈물을 닦은 한나는, 어딜 가든 별장과 비슷한 곳에는 발도 붙이지 말자는 의견을 가족들에게 제시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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