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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꼭두각시의 칼 07~08

개구리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0.09.21 23: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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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6






15.


"...뚫을 수 있겠어요?"


안나의 등에 업힌, 후드를 쓴 한나가 그녀에게 물었다. 안나는 끙 하고 뒤로 마주잡아 한나의 허벅지를 지탱한 팔을 다시 고쳐 잡았다. 두 사람의 앞에는 안나가 들려야 할, 린든에서 그나마 신선한 식재료를 파는 식료품점이 있었다. 하지만 그 앞의 진흙탕을 만들며 하나라도 더 신선한 채소와 치즈 등을 사려는 인파들이 북적였다. 그들의 일렁이는 머리들은 여전히 쏟아지는 빗방울에 젖어 구린내를 자아냈다. 하수구의 냄새에서 비릿함을 뺀 것과 비슷할 것이라고 한나는 후드를 얼굴로 꽉 잡아당기며 생각했다.


"불가능한 건 아니라고 봐요."


"예?"


안나의 입에서 예상 밖의 대답이 나왔고, 한나는 그에 당연하게 반응했다. 두 손이 제한된 상황에서 안나는 어떻게 저 인파, 아니 짐승의 떼를 뚫고 지날 수 있단 말인가?


"아우, 손 아퍼. 한나, 잠시만 여기 서 있을 수 있어요?"


안나가 발을 동동 구르며 한나에게 물었다.


"잠깐은 가능한데..."


"그 잠깐이면 돼요."


안나는 한나를 조심스럽게 바닥에 내려놓았다. 다친 발목이 찌를 듯이 아파왔지만 스키아보나를 지팡이 삼아 짚고 서 있을 수 있었다. 스키아보나의 날끝은 금세 바닥돌이 빠져 만들어낸 진창에 젖어들었다.


"그러다 다칠 거예요. 아니, 아, 잠깐만!"


한나의 충고를 흘려들은 채, 안나는 인파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한나의 제복 위로 소리없이 스며드는 빗방울처럼 안나는 이내 자신임을 드러낼 수 있는 붉은 머리조차 인파 속에 스며들었다. 한나는 안나가 따로 말을 남기지 않았기에 가까운 벽을 향해 절뚝거리며 몸을 움직였다. 이내 가로등과 맞닿은 벽에 한나는 쥐구멍에 숨어든 쥐처럼 그 사이에 몸을 최대한 집어넣듯이 기댔다. 한나가 봐온 린든 사람의 옷차림은 수수했다. 아니, 수수하단 표현도 후했다. 그들은 모두 거지와 비슷한 넝마 차림이 대부분이었다. 그나마 안나의 기름때 묻은, 해체장 노동자의 복장이 수수함과 평범함에 가까웠다. 반면 한나가 입은 주시자의 제복은 린든이란 물에 어울리지 않는 기름 같았다.



회색과 누런색의 색채로 가득한 린든에서 오직 한나의 제복과 어깨에 달린, 주시자임을 드러내는 자색 보석 장식들과 금빛 술이 이질적인 색채를 자랑했다. 그러기에 더더욱 눈에 띄는 행동을 하지 말아야 하며, 모습을 최대한 감춰야 했다. 안나가 사라진 이상, 아까의 깡패들이 다시 찾아올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녀는 스키아보나를 꼭 쥐었다. 안나가 아닌 다른 사람이 말을 건다면, 최대한 거절할 생각이었다. 깡패를 만난다면, 주저하지 않고 가슴팍에 스키아보나를 밀어 찔러버릴 것이라 생각한 한나였다. 정작 그녀의 의지와는 다르게, 부상을 입은 다리는 애처롭게 후들후들 떨고 있었다.


'대체 왜 내가 여기에 있는 거지...'




한나는 린든 속 자신의 존재 의의에 대해 스스로에게 물어보았다. 한나는 이름만 들었다 하면 왕실에 준하는 대우를 받는 종교 단체의 중하급 주시자에 불과했다. 다른 동급 주시자들은 린든이 아닌, 상식이 존재하는 다른 도시와 시골로 파견해 사람들에게 전도를 하거나, 아웃사이더의 추종자를 잡거나 '말소'하는 일을 맡곤 했다. 하지만 그녀의 상관인, 상급 주시자인 카산드라는 무슨 생각인지 한나를 치안이 최악인 린든에, 그것도 다른 동료들을 붙이지 않고 홀로 투입시켰다.




힌나는 항명할 수도 없었다. 다음 달에 있을 중급 주시자 시험에 윗사람들의 입김이 어느 정도 적용될 테고, 카산드라는 그 윗사람들 중 한 명에 속했다. 시험이 주를 이룰 것이지만, 그것을 감독하는 건 상급 주시자들이었다. 하지만 카산드라는 다른 주시자들과 달리, 한나에게 다른 임무를 맡긴 채 린든 속으로 걷어차듯 투입시켰다. 그것은 한나에게 있어서, 그리고 린든에 배어진 무지함과 빈곤에 있어서 너무 우스꽝스러운 주제를 띄고 있었다.











16.



상황은 사흘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나는 카산드라의 집무실 책상 앞에서 패어지기 위해 세워진 나뭇기둥처럼 꼿꼿히 서 있었다. 그녀의 주시자 가면은 제복의 보석 장식에 끈이 걸려진 채 오른쪽 팔에 흘러내려 있었다. 한나의 눈에 깨끗하게 마감 처리된, 끝부분이 말려 올려진 짧은 머리를 한 자신의 상급 주시자의 책상에 올려진, 어지럽혀지듯 올려진 종이 조각들을 흘끔거리며 내려다보았다. 모의, 반란, 주동자. 카산드라의 눈빛을 가까스로 피해 읽은 단어들이었다. 교화, 평화, 전도자. 주시자로 입회한 이후 한나의 머릿속에 각인처럼 새겨졌던 세 단어들과는 거의 정반대의 뜻이 적힌 종이들을, 왜 그녀가 가지고 있는지 그녀로썬 의문을 자아냈다.


"일단 앉아."


카산드라가 매서운 눈매로 한나의 옆에 놓여진, 특색이라곤 전혀 없는, 대신 검소함만이 뚜렷한 의자에 턱짓을 했다. 한나는 그녀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바람같이 의자에 앉았다.


"들어."


카산드라의 책상 한쪽 모서리에는 네모난 도금 접시 위로 뒤집혀진 투명한 유리잔, 그리고 브랜디가 들어있는 진홍색 유리병을 가운데에 가져와 잔 중 하나에 병을 기울였다. 한나는 고개를 꾸벅 숙이면서, 한편으로는 매섭게 쳐다보는 그녀의 눈빛을 가까스로 피해내며 조심조심 브랜디를 마셨다. 금욕적인 신도 생활에 달콤하고 쌉싸름한 욕구가 끼얹어진 기분을 한나는 잠시 동안 느낄 수 있었다.


"저... 카산드라 님, 절 왜 부르신 건지..."


한나는 쭈뼛거리며 상관에게 결례를 무릅쓰고 질문했다. 그도 그럴 것이, 한나는 주변 주시자들에게서 '매뉴얼'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주시자의 생활을 충실히 보내고 있었다. 물론 주시자가 적대하는 두 세력 중 하나, 그 중 1순위인 아웃사이더의 추종자를 '소멸'시키는 데엔 아주 미숙할 뿐, 그녀는 거의 깨끗한 교본이나 다름이 없었다.


"한 번 맞춰봐. 여기 서류를 읽어본 것 같은데."


카산드라가 서류 들 중 하나에 손가락을 올려 톡톡 두드렸다. 모의, 반란, 주동자.  정답은 멀리 있지 않았다. 아렌델의 굳건한 왕실에 반기를 드는 자는 흔히 '암살자'라고 불리는, 자유라는 명목의 살인을 저지르고 다니는 자들이 정답의 1순위였고, 그리고 전국으로 차별없이 퍼져나간, 쥐를 매개로 한 역병에 대해 지역 단위의 격리로 조치를 내린 왕실에 대해 불만을 품은 일부 백성들, 이들이 2순위이고, 그 이상의 정답은 없었다. 


"역병의 조치에 불만을 품어서, 이 때다 싶어 반란을 일으킬 백성들이 있나 보네요."


한나는 2순위를 택했다. 암살단은 모의, 반란, 주동자를 내세우지 않았다. 바다 건너 차토의 쿠데타 때에도 그들은 세력의 뒤에 있었고, 모래성 밑의 모래를 조금씩 훔치듯이 영원이 굳건할 줄 알았던 차토 왕실의 권력을 서서히, 그리고 종국에는 빠르게 무너뜨렸다. 그리고 그들의 암살 실력이라면, 아마 카산드라는 이곳에 앉아 한나에게 브랜디를 권하지도 못한 채 목에 칼이 찔려 죽어 있었을 것이고, 이는 한나도 마찬가지일 것이었다.


"확실한 건 아냐. '그런 움직임'이 보였다는 보고를 받을 뿐이었지."


"근데 그걸 국교 단체인 우리가 직접 조사하는 건가요? 왕실의 정보부가 하는 게 아니라?"


한나는 그것을 의문으로 삼았다. 국교이긴 하지만, 정보부가 해야 할 정보 수집을 종교 단체가 하는 것은 자칫하면 월권 행위이자, 공과 사의 경계를 흐려지게 하는 일이었다.


"우리 중에도 정보부 사람이 있어. 어쩌면 네가 기숙사에서 기상한 직후 아침 예배를 드릴 때, 혹은 식사를 할 때, 아니면 기도원의 숲 속의 어딘가, 그리고 여기까지 오면서 마주쳤던 사람들 중에, 정보부의 끄나풀이 있다고."


카산드라는 자신의 잔에도 브랜디 병을 기울였다. 둘 사이에 이어진 묘한 침묵 사이에 유리잔에 브랜디가 춤추는 소리만이 울릴 뿐이었다.


"정보부는 암살단을 두려워 하고 있어, 이 움직임에 아직까지 그들의 동향이 나타나지 않았지만, 직접 움직이긴 싫은 모양이야."


"우리들도 암살단은 싫은데..."


한나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답했다. 만약 누군가 판돈을 걸고 암살자 한 명과 한나와 서로 칼을 들어 죽이라고 도박을 건다면, 후하게 말하면 한나는 암살자를 부상에 그치게 할 순 있을 것이지만, 한나는 상상할 수도 없는 죽음에 이를 확률이 절대적으로 높았다. 결과를 모르는 죽음은 떠올리기 싫었고, 이를 반증하듯 그녀의 몸은 미세하게 떨렸다.


"무섭지? 당연히 무서워 해야지. 그게 너니까."


카산드라는 은유적으로가 아닌, 직접적으로 한나를 비난했다. 아웃사이더의 추종자도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그녀로썬 카산드라의 얕은 비난은 깊게 마음 속에 파고들었다. 이미 위로 내려간 브랜디가 다시 식도 위로 올라올 것 같은 거북함이 느껴졌다. 한나는 토할 수 있다면, 카산드라의 면전에 토해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소멸이라고 포장하지만, 결국엔 명백한 살인이었다. 한나는 어릴적부터 생각해둔 고고한 종교인, 항상 깨끗한 손과 칼을 가지며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는 성인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은 진흙탕이었다. 종교적 명분은 면죄부가 되었고, 그것으로 살인을 정당화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카산드라와 한나의 차이점은 이 일에 익숙해졌냐, 익숙해지지 않았느냐의 차이였다.


"그래서 당분간은 너에게 다른 일을 맡겨볼까 해."


카산드라는 종이들을 모아 끝 부분을 책상 위로 탁탁 내려 정리했다. 한나는 책상위의 종이보다 카산드라가 브랜디를 마시지 않은 것에 주목했다. 한나는 술에 약한지라 겨우 반 잔의 브랜디로 몸이 후끈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이마 부근이 간지러운  것으로 이미 땀이 나고 있으리라 그녀는 추측했다. 많은 것에 의미를 담지 않기로 마음먹은 그녀였지만, 상대는 카산드라였다. 모든 행동에 어떤 의미가 담겨져 있을지 그 누구도 알지 못할 것이리라.


"일은 간단한데, 할 거니?"


제안은 짧았다. 하지만 깊었다. 한나는 조금 취해 있었고 논리보단 감정이 우세한 심리가 몸과 마음에 걸쳐져 있었다. 다음 달의 승급시험, 채점자는 상급 주시자, 카산드라는 상급.


"하겠...읍니다."


달리 거절한다는 선택지는 애초에 없었다. 어떻게든 핑계를 대서 추종자 소멸 작업을 비껴나간 그녀였지만, 더 이상 유보하다간 주시자의 자격을 박탈당해 아무것도 없이 쫓겨나거나, 주시자들이 무기를 연구하는 '금고'에 타원될지도 모를 운명이었다. 차라리 지금 제안을 받고 승급을 해 소멸작업을 안하는 쪽으로 발버둥치는게 더 나았다.


"좋아. 바로 본론으로 들어갈게. 너는 오늘 저녁부터 수도 아렌에 위치한 린든으로 가서 반란 모의가 의심되는 곳을 정탐한 뒤 우리에게 보고하면 돼."


"린든, 린든이라고 지금..."


히끅, 소리가 샌 딸꾹질이 나왔다. 다른 주시자들도 극히 꺼려한다는 지역, 왕립 군대조차 학을 떼고, 치안조차 불안한 아렌델의 수도의 귀퉁이이자, 치욕적인 약점을, 카산드라는 한나에게 출장지라고 말해주고 있었다. 뜨거운 술기운은 얼음물을 끼얹은 것처럼 순식간에 가라앉았고, 정신은 거의 멀쩡해졌다.


"거긴 엄청 위험하잖..."


"그러니까, 그 위험하고, 공권이 미치지 않는 그곳에서 반란의 움직임이 보였다니까, 하기 싫어? 싫으면 안 해도 돼. 난 강요 안 한다?"


카산드라가 어깨를 으쓱하며 한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눈빛의 수신자는 그 눈빛을 마주하지 못하고 흘려보냈다. 실체 없는 강요이자, 협박이었다. 주시자에서 쫓겨나면, 별 재주도 없는 한나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너무나도 척박했다. 주시자의 무리에서 태어나고 자란 그녀였고, 낯선 세상과의 합일은 형언할 수 없는 무서움 그 자체였다. 한나는 카산드라의 눈빛을 읽었다. '죽기 싫으면 하겠다고 말해.'


"할게요. 하겠습니다. 기한은 언제까지죠?"


한나는 자포자기의 심정, 도축장에 끌려가는, 이미 몸과 분리되어 나뒹구는 동료들의 머리를 지켜보는 돼지의 처지를 생각하며 말했다. 카산드라는 한나의 반응을 예상한 듯 한 차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의미에는 무엇이 담겨있을지, 한나는 이해하지 못했다. 카산드라는 브랜디 병의 마개를 열고 다시 한나의 잔에 브랜디를 부어주었다. 이번에는 절반이 아닌, 잔이 넘칠 정도로 병을 기울였다.


"언제까지인지는 중요하지 않아. 린든 속에 머물면서, 내가 말하게 될 의심 포인트를 염탐해서 정기적으로 보고하면 돼. 네 전서구로 말이야."


"지원 인력은 없나요?"


한나는 궁금했다. 언급이 되었다 하면 무법지대라 인식될 정도로, 린든은 다른 구역, 다른 지역보다 위험했다. 린든에서 어느 정도 머무를 수 있게 주시자 측에서 지원을 해줬으면, 아니 해야 한다고 한나는 생각했다.


"없어!"


뜻밖에도, 카산드라는 단칼에 부정했다. 차라리 적당히 취기가 올랐으니, 여태껏 꼬박꼬박 모아둔 주시자 활동비를 가지고 남부 시골로 도망칠까도 생각했지만, 여태껏 지내온 주시자 생활이 너무 아까웠다. 지원도 없는 일과 주시자 생활을 비교한다. 한나는 자기 스스로도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었다. 카산드라는 한나가 적당히 취해 기분이 아리송해서 웃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대신 네가 싫어하는 소멸 작업은 일체 없어. 그리고 네가 이 일을 열성적으로 하게 될 동기를 하나 알려줄게."


"무엇을요?"



절망의 밭 중 희망의 새싹이 겨우 모습을 내밀었다. 한나는 카산드라가 말한 동기가 '지원' 이상의 장점을 가지고 있기를 마음 속으로 간절히 바랬다.



"다음 달에 있을 주시자 승급 시험 때, 나를 포함해서 한 다섯 명 정도... 너에게 가산점을 주도록 노력해 볼게."


다섯 명, 겨우 열다섯 명에 해당하는 상급 주시자의 33%가 한나에게 부가 점수를 준다는 것은 한나에게 중급 주시자의 자격을 거저 주는 것이나 다를 게 없었다. 같은 시험을 치르게 될 다른 주시자들이 몇 명의 연줄을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나, 상급 주시자인 카산드라가 직접 한나에게 말을 하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공신력이 발효된 거나 다름 없었다.


"이 정도면 할만 하지?"


한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린든이 위험하다는 것은 여전하지만, 최대한 빨리 들어갔다, 빨리 조사한 다음, 빨리 나오는 방향으로 계획을 잡으면 되는 일이었다. 린든에서 일어난 일은 직접 시간과 돈을 투자해 조사하지 않는 이상 정확히 알아내지 못할 것이고, 한나의 경우도 마찬가지일 것이었다.


"좋아, 얘기 끝. 지금부터 넌 장비실로 가서 린든에 투입되기 위해 갖춰야 할 장비들을 챙겨, 거기서 추가적인 활동비랑 약들을 줄 거야. 아, 영약도 줄 테니까 마시는 거 잊지 말고."


"제복은 계속 입고 있어야 하나요?"


분명 한나가 외워 두었던, 하급 주시자 시험 때 나온 주시자의 덕목 중 하나인 '주시자는 언제나 제복과 검을 정갈히 할 것.'을 기억해 말했다. 물론 린든에 들어서는 순간, 제복은 자연스럽게 넝마가 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은 그녀였다. 카산드라도 한나와 같은 생각이었는지, 그녀의 눈빛이 잠깐 흔들렸다.



"꼭 그러지 않아도 돼. 염탐이 주 목적이니까. 네가 거기서 전도를 하고 싶다, 사람들과 친해지고 싶다 싶으면 계속 입고 있어도 돼."




카산드라가 말했고, 한나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한나는 잔에 가득 채워진 브랜디 잔을 들어 절반을 마셨다. 이제 한나는 곧 거나하게 취하게 될 터였다. 장비실은 잠깐 눈을 붙여 술기운을 뺀 다음 가도 상관없을 터였다. 오늘 내일 중으로 린든에 들어가기만 하면 그만이니, 이 정도는 상급 주시자들도 눈감아 주리라고 한나는 생각했다.


그녀는 또 다른 생각도 가지고 있었는데, 린든에는 퇴역한 왕실 장교가 운영하는 고아원이 있고, 그곳이 일종의 성지라고 인식된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었다. 만약 염탐을 하되 상황이 여의치 않는다면, 고아원 내지 근처에 자리를 잡고 포교를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만약 일이 잘 풀린다면, 한나는 반란을 사전에 알아채고 잡아낸 최초의 주시자가 되고, 그 누구도 접근하기 꺼려한 린든을 교화시킨 최초의 주시자로 이름이 남겨질 게 분명했다. 이렇게 되면 나중에 중상급 주시자, 더 나아가 상급 주시자가 될 때도 뒷배경으로써 도움이 될 것이라 한나는 생각했다.




"궁금한 거 있으면 지금 말해. 어차피 가기 전에 다시 설명해 줄 거지만."



카산드라가 슬슬 지루한듯 종이 뭉치를 서랍에 넣기위해 몸을 조금 굽혔다. 한나는 알코올이 밴 머릿속을 뒤져 겨우 질문 하나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


"반란을 모의하는 장소로 의심된다는 곳이 대체 어디예요?"



발음이 꼬이지 않고 제대로 카산드라에게 말한 한나는 내심 주량이 늘어났다는 착각에 빠지려 했다. 카산드라는 눈을 홉뜨며 반쯤 풀어진 한나의 눈을 마주보았다.
잠시 뒤, 카산드라는 입을 열었다.










17.



"...나? 한나?"


한나는 술에 취한듯 먹먹해진 귓가에 들려오는 한 사람의 말을 들었다. 잠시 긴장이 풀려 벽과 가로등의 틈새에서 잔 모양이었다. 그런 그녀가 힘겹게 눈을 뜨자, 눈앞에는 무언가 담겨 있는 듯한 커다란 종이 상자를 들고 있는, 얼굴과 옷이 진흙으로 얼룩진 안나가 서 있었다. 안나는 상자의 끝으로 한나의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안나의 눈에는 한나가 벌린턱에게 잘못 걸려 죽었고, 그들의 위험을 증명하듯 벽에 처박아둔 시체처럼 자고 있다고 생각했다.


"안나?"


"아주 잠깐 비웠더니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거예요. 감기라도 걸리면 큰일날 텐데. 이곳에는 병원도 없단 말이예요."


안나가 종이 상자에서 마른 천을 하나 꺼내 한나의 목에 둘러 주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한나의 목을 중심으로 똬리를 튼 간이 목도리를 보며 안나는 내심 만족한다는 듯 웃어보였다.


"당분간 식료품점이 문을 안 연다고 해서 이것저것 많이 사느라 상자가 좀 커졌어요."


"다 먹을 수 있는 것들이죠?"


한나는 상자 속을 잠깐 들여다보며 그녀에게 말했다. 그녀의 코는 이미 린든의 썩은내에 절여져 냄새의 분간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얼핏 겉으로 보기에는 흙이 묻어있긴 하지만 채소들은 멀쩡한 것처럼 보였고, 햄과 고기들은 주시자 본거지에서 먹는 것만큼은 아니어도 나름 먹을 만한 수준의 신선함을 가지고 있다고 추측했다.


"걱정하지 마요. 난 여기서 태어났고, 여기서 자라면서, 여기서 나는 것들을 먹고 자랐어요. 그 동안 한 번도 탈이 난 적은 없었으니까. 그리고 식비 청구는 안 할 거고요."


병의 유무를 음식으로 함축시켜 한나의 의심을 잠재운 안나는, 그녀가 입은 주시자의 제복을 눈여겨 보고 있었다. 단순한 목적으로 주시자가 이곳에 모습을 드러낼 리는 없었다. 안나가 룬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이곳에 오는 것은 수지타산에 맞지 않았다. 안나는 주시자들이 가질 다른 목적들을 식료품점에서 음식과 도구들을 구입하며 곰곰히 생각했지만, 고아원의 도서관에서 알게 된 내용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전도, 혹은 포교. 하지만 겨우 한 명 뿐이었기에, 한나에 대한 안나의 의심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저희 측에서 따로 보상을 해줄 거예요."


목검도 포함해서요, 한나는 말하면서 슬그머니 안나에 대한 시선을 피해 눈을 돌렸다. 시선이 미친 곳은 여전히 북적거리는 식료품점, 그리고 주변을 지나며 한나의 제복과 가면, 그리고 안나가 들고 있는 종이 상자를 눈여겨 보는 린든의 짐승들이 있었다. 자칫하다간 또 다시 싸움에 휘말리지 않을까 걱정한 한나였다.


"어차피 매티어스 아저씨가 새로 만들어 주실텐데 뭘 그렇게까지야..."


매티어스, 한나가 린든에 투입되기 직전 카산드라에게 들었던 이름이었다. 고아원을 운영하는, 린든에 남아있는 최소한의 양심이라고 불리우는 자를 안나는 친한 사람을 부르듯 거리낌없이 이름을 언급했다.


"그 사람을 아세요?"


"제가 아저씨 밑에서 자랐거든요. 병이 돌기 직전에 고아원을 졸업했고."


그제서야 한나는 안나를 만나고부터 계속 품고 있었던 작은 의문점을 하나 풀어낼 수 있었다.
어째서 인두겁을 쓴 짐승들이 가득한 린든에서 안나라는 사람이 돌아다니는지.
그 이유가 매티어스의 아이들 중 하나였기 때문이란 것을.









18.


"도대체 어떻게 그 사람들을 헤쳐 지나간 거예요?"


한나와 안나는 거리를 천천히 걷고 있었다. 비는 잠시 그쳤고, 구름에 번진 노을의 붉은 빛으로 감싸여진 거리는 세상의 끝이요, 죽음의 시작을 알리는 듯 무서움을 가져다 주었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비명소리, 그리고 무언가 부서지거나 깨지는 소리는 이제 한나에게 두려움을 심어주지 못했다. 그녀의 옆에는 든든한 안나가 있었으니까.


'별 거 아니네!'


정작 자신이 한 건 거의 없지만, 한나는 린든이 그렇게까지 혼란스러운 곳은 아니라고 생각을 바꿨다. 경찰이 오지 않았고, 일반 시민인지 벌린턱의 깡패들인지, 아니면 우는 자들인지를 분간하기 힘들고, 좀 더럽다는 것만 빼면 살만한 구역이라고 체감했다.


"제 작은 몸을 이용했죠. 최대한 몸을 허리 부근까지 구부린 다음 사람들 틈을 후다다닥!"


안나가 당시의 모습을 재현하려는 듯 몸을 구부리고 고개를 좌우로 기울였다. 그 모습이 퍽 웃겨서, 한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안나는 한나의 상태가 진정된 것 같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울면서 벌벌 떠는 것보다, 차라리 웃는 게 린든에서 살아가는 데 나았다.


'벨 아주머니한테 어떻게 설명하지?'


안나는 한나를 내일 날이 밝을 때까지 벨의 사무소에 머무르게 하려고 했다. 하지만 벨이 과연 안나의 부탁을 들어줄 수 있을지, 사무소가 가까워질수록 슬슬 불안해졌다. 바깥에 계속 머무르다 혹시 모를 역병에라도 걸리면 우는 자가 되어 마치 좀비처럼 거리를 배회하다 죽어버릴 것이기 때문이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고 있어요?"


안나의 얼굴을 읽었는지, 이제 막 켜지기 시작한 누런 가로등 속에서 한나의 푸른 눈빛이 안나를 향했다.


"음, 아뇨. 돈 생각 하고 있었어요. 돈."


"돈이요?"



"그 망할 역병과...여기에 사는 깡패들의 오해 때문에 유급 휴가를 받았거든요. 근데 그 돈의 대부분을 오늘 가게에서 써버리고 말았죠. 며칠 뒤면 거리의 돌바닥 위에 번질거리는 기름이라도 긁어서 끓여먹어야 할지도요."


반은 거짓이고, 반은 진실이었다. 안나는 해체장에서의 싸움 직후 유급 휴가를 받았지만, 식료품점에서 대부분을 쓰진 않았다. 외부에서 린든으로 들어오는, 입고 상품이 들어있는 마차들은 때때로 거리에서 튀어나오는 약탈꾼들에게 상품이 들어있는 상자들을 털리곤 했다. 그래서 가게로 들어오는 상품은 장부에 기록된 것보다 거의 항상 적었으며, 역병이 나돌기 시작한 직후 그 정도는 더 심해졌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구입할 수 있는 상품의 양도 한정되어 있었고, 안나는 가게 주인에게 [먹고 재워줘야 할 사람이 하나 더 늘었다.]고 빌고 빌어 다른 이들보다 조금 더 많이 구입할 수 있었을 뿐이었다.


"제가 도와드릴까요?"


문득, 한나가 안나에게 제안했다. 안나는 미심쩍은 표정을 지으며 한나를 돌아보았다. 안나는 한나가 주시자들 중에서도 아랫 지위에 속하는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매티어스가 안나에게 해주었던 말이 이럴 때 떠올려졌다.


[높으신 분들은 그 밑의 사람들에게 아주 활동적이고, 때로는 위험한 일을 맡긴단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분들이 놀고 있는 건 아니란다. 그분들에겐, 그분들만의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에, 그분들도 각자의 위험이 존재하지.]


출입에 엄두도 내지 않던 주시자들이 들어왔다는 것은, 기억에 근거하면 말단이라는 것이 되었다. 한나에게는 높은 자라고 생각되는 초췌함, 그리고 속내를 알 수 없는 눈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얼이 빠진 듯한 순수함이 어렴풋이 은발 소녀의 눈에 비쳐있는 것 같았다.


"제가 사실 여기에 일 때문에 좀 머물러야 하거든요. 저희 측에서 지원을 해줄 수도 있어요. 먹을 거라든지, 돈이라든지... 또..."


동시에 간헐적인 통증이 발목에 일었고, 한나는 생각을 잠시 멈추고 끙끙대며 신음을 흘렸다.


"그런 건 내일 한번 곰곰히 생각해 보게요. 오늘은 너무 늦어서 밥먹고 응급처치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피곤할 거 같아요."


"그러겠죠...그럼 내..."



한나의 말은 끝을 맺지 못했다. 갑자기 그녀의 손을 잡아 끄는 안나의 돌발행동에 엉거주춤 가로등이 만들어낸 이름 모를 건물의 어둠 속에 숨어야 했다. 쉿- 안나가 손가락을 치켜들며 말했다. 한나는 안나의 시선이 미치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쥐 떼라도 나타난 건가? 한나는 가로등의 불빛들로 만들어진 빛의 저 너머를 미간을 찌푸리며 응시했다. 곧 비틀거리는, 한나는 그것이 주정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의 주변에 맴돌며 날아다니는 날벌레들의 안개와 바닥을 기는 몇 마리의 쥐들이 눈에 띄었다. 두 사람은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우는 자들. 한나는 린든이 살기 좋을 거라는 환상을 저버리기로 했다. 다른 지역과 도시들에서도 역병을 옮겨대는 우는 자들은 적어도 거리를 활보하는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하수구의 밑창, 혹은 거리의 아주 외진 골목에서 쥐를 통해 역병을 전파하는 매개체가, 린든에서는 마치 시민과도 같다는 듯 자연스럽게 배회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어느 집에서 창문을 열고, 그 우는 자를 향해 무언가를 던졌다. 그것은 우는 자의 머리에 직격해 둔탁한, 혹은 무언가 부러지는 소리를 내었고, 우는 자는 거리 위로 픽 쓰러졌다. 그가 울었다. 아니, 그녀가 울었다. 이따금 신경이 겨우 이어진 팔다리가 부들대며 포장된 거리에 피를 비볐다.


<돌아서 가야겠어요.>


소름끼치는 광경이 벌어졌음에도, 열려있는 단 한 창문을 제외하곤 일체의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이마저도 얼마 지나지 않아, 희미하게 침 뱉는 소리가 들렸고, 몇 초 뒤 탁 소리와 함께 침은 어딘가의 어둠 속으로 떨어졌다.


<어서, 얼른.>


안나는 여전히 상자를 두 손으로 들고 있었다. 그녀의 상자가 한나의 옆구리를 팍 찔렀고, 한나를 둘러싸던 공포는 풍선처럼 터졌다. 그녀의 옆에는 안나가 있었다. 안나의 말을 따라야 살 수 있다. 한나는 본능에 따르기로 했다. 안나가 가로등이 없는 골목으로 사라졌을 때, 그녀의 뒤를 따르는 한나는 한 치의 앞도 볼 수 없었다. 눈을 감은 듯 시각은 완전히 차단되었고, 소리는 더욱 또렷해졌다. 우는 자들의 비명, 그리고 울음이 가까이서 들리는 것 같았다. 썩은 살을 문대는 둔탁한 발걸음들 속에서 오롯이 안나의 구두만이 이끼묻은 돌바닥을 두드리고 있었다. 한나는 최대한 안나의 발소리를 이정표 삼아 그녀를 뒤따랐다. 안나는 친절하게도 가끔 걸음을 멈춰 한나가 잘 따라오고 있는지 확인하다, 이내 그녀에게 되돌아왔다.


"왜, 왜 그러세요?"


"다리 다쳤다는 사실을 잊어버렸어요. 자, 어깨 올려요. 조금 빨리 걸을 거니까 단단히 잡아줘요."


안나가 한나의 어깨를 자신의 어깨로 툭 쳤고, 한나는 더듬거리며 안나의 목에 자신의 왼쪽 팔을 감았다. 그리고 최대한 팔을 굽혀 안나의 조끼를 움켜쥐었다.


"꽉 잡아요."


안나는 그 뒤로 거의, 다친 한나의 기준으로 멀리뛰기를 하듯 골목을 질주했다. 이따금 한나는 다친 다리에서 울리는 통증을 체감했지만, 여기서 목숨만 부지할 수 있다면 당장의 고통은 귀족들이 평소처럼 생각하는 평민의 무게처럼 가볍고, 아주 적었다.







19.


"왜이리 늦나 싶었는데..."

벨은 방금 쓴 천 마스크를 다시 풀으며 말했다. 그녀의 눈 앞에 서 있는 안나, 그리고 주시자의 제복을 입은 은발의 여자는 기진맥진한 채로 다리를 후들거리며 서 있었다. 벨이 안나에게서 상자를 받아들었다. 생각보다 나가는 상자의 무게에 벨은 무심코 안나의 옷에 가려진 근육들을 가늠할 수 있었다.


"돈은 어디서 났길래...혹시 훔친거니? 그리고 저... 주시자는 누구고?"


"당연히 정당하게 샀어요. 난 매티어스 아저씨한테서 키워졌으니까. 해체장이 잠시 문을 닫게 되서 일종의 위로금 비슷한 돈을 좀 받았어요. 그걸로 산 거니까 의심하지 마요."


벨은 의심하지 않았다. 그저 돈의 출처를 알고 싶기 때문이었다. 거의 모든 생활을 멈추게 할 역병에도 불구하고 멀쩡히 잘 운영하던 해체장이 폐쇄된다는 말은 그다지 좋지 않은 소리였다. 그리고 그 원인들 중에는 벌린턱 갱단이 분명 존재할 터였다. 어느 순간 린든의 텃새로 자란 갱단은 린든 이곳저곳을 들쑤시면서 사람들에게 보호세를 걷거나, 고리대금업도 겸하면서 죽어가던 린든의 힘줄을 하나씩 끊어내고 있었다. 역병 이전 마지막으로 들어온 정보에 따르면, 갱단은 이미 다른 소도시에도 진출했다는, 다소 비극적인 정보였다.


제국이 한낱 갱단을 처리하지 못하는 것은 절대 아니겠지만, 지금은 역병이 창궐하고 있었다. 역병을 낫는 이보다, 걸려 우는 이가 몇 곱절은 더 많은 시기에, 다른 도시들도 제대로 된 치안은 기대하기 힘들 것이었다.


"옆의 분은 주시자시고...어쩌다가 여기까지 오게 되신 건지 모르겠지만...환영해요. 전 린든에서 흥신소를 운영하는 벨이예요."


"하, 한나 윈저입니다."


한나는 마른 입에 침을 겨우 적셔낸 다음 대답했다. 안나는 잠시 한나를 의자에 앉혀놓은 뒤, 탁자에 봉투를 내려놓았다.


"여기서 선교 활동을 하다가 깡패들한테 덮쳐질 뻔해서 구해줬어요. 아줌마, 기름 진통제 아직 남아 있죠?"


"아직 남아있긴 한데, 값을 받아야하지 않겠어?"


벨이 상냥하면서도 정서상 무거운 말을 꺼냈다. 한나는 벨을 바라보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안나는 한나가 벨의 의중을 읽었고, 지금은 가진 게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지 않아도 아까 오면서 얘기를 좀 나눴어요. 당분간 머물 거처를 찾고 있었다는데, 여기서 머물게 하면 주시자 측에서 적당한 보상을 해줄 건가봐요."


안나의 말을 들은 벨은 눈을 돌려 식탁 위의 봉투를 흘겨봤다. 역병의 기세는 잦아들지 않고, 가면 갈수록 심각해져만 갔다. 역병이 처음 보고된 이후로 외출 횟수를 줄이던 벨이었지만, 머지않아 사무실 안에서만 생활하게 될 가능성이 컸다. 미로처럼 복잡한 린든에선 바깥 사람이 생각하기엔 힘든 일들은 비일비재했고, 일상을 뺏기지 않으려면 정보가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역병이 나도는 지금, 사무소를 움직일 정보는 이미 굳어버린 피딱지처럼 흐르지 못했고, 안나가 가져온 음식물에만 버텨야 할 상황일지도 몰랐다.


"확실히 보답해 줄 수 있나요? 윈저 양?"


벨이 한나에게 말했다. 단순한 구두로 맺은 약속은 언제든 깨어지기 쉬웠다. 바깥 세상이라면 구두약속은 효력이 있을지언정, 린든 내에서의 효력은 전혀 없었다. 보상의 일부를 지급받고, 분할하여 급여처럼 받아낸다면 거처를 마련해 줄 의향도 충분했다.


"선, 선급금 말하시는 거죠...?"


"맞아요. 하지만 우린 돈이 아니라 물건을 뭔해요. 조만간 린든으로 들어오는 식료품들이 모두 끊길 거예요. 돈은 충분히 가지고 있지만, 가지고 있는 게 소용없을 만큼 값도 오를 건데. 주시자들이라면 그 정도 지원은 해줄 수 있으리라고 믿어요."


안나는 한나가 추위를 타는 것처럼 벌벌 떨고 있는 걸 확인했다. 안나는 코코아라도 한 잔 타서 들려줘야겠다고 생각하며 부엌으로 걸음을 옮겼다. 결과적으로 한나를 데리고 있으면 먹을 것 걱정은 안해도 될 것 같았고, 한나의 신변을 최우선으로 해야 할 같았기 때문이었다.


"언제쯤 당신네 주시자들하고 연락할 수 있죠?"


"옥상으로 나갈 수 있으면... 제 까마귀를 불러서 연락할 수 있긴 한데..."


그러자 벨은 고개를 저었다. 흘끔거리며 벨을 올려다보던 한나는, 무의식중에 매서워진 눈을 한 벨을 보고 다시 고개를 숙였다.



"이런 말 해서 미안하지만, 옥상으로 가는 문은 없어요, 대신 다락방 창문을 통해 지붕으로 올라갈 수 있는데... 안나랑 같이 올라갔으면 좋겠네요."



벨이 부엌에서 코코아 가루가 든 유리병을 컵에 기울이는 안나를 향헤 고갯짓을 했다. 한나의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판단할 명백한 증인이 필요했고, 벽을 탈 줄 아는 안나가 그 역할에 제격이었다. 벨은 다리를 굽혀 한나보다 더 낮은 위치에서, 한나를 올려다 보았다.


"할 수 있겠죠?"


"네, 네...."


힘없는 대답을 하며 연신 시선을 회피하는 한나를 보고, 벨은 손을 뻗어 부츠의 지퍼를 내렸다. 빗물의 습한 냄새와 약간의 피 냄새가 간이 부목을 한 발목에 배어져 있었다.


"일단 당신을 믿어볼게요. 이 상태에서 거짓말을 하진 않을 테고. 혹시 열이 난다거나, 코피가 나진 않았지요?"


벨이 한나에게 역병의 초기 증상을 물어보았다. 한나는 발목에 타고 전해지는 얕은 통증을 참으며 고개를 저었다.


"여기에 오면서 마스크를 착용했었는데, 안나 씨 말대로 깡패들을 만나느라..."


"만약에 그런 증상이 있다면 바로 알려주셔야 해요. 한나 씨도 아시다시피, 코피가 날 즈음에 감염자의 정신이 붕괴되고, 타액으로 역병이 감염되니까요. 뭐... 정말로 상황이 심각해진다면."



벨은 손가락으로 부어오른 발목을 톡 톡 두드렸다. 그럴 때마다 한나의 다리는 조건반사를 하듯 움찔거렸다.




"그 땐 당신이 약속한 보상으로 끝나지 않을 거예요."









20.



한나는 자신에게 벌어진 일들이 모두 허상이길 바랬다. 카산드라에게서 반란을 모의하는 곳을 염탐하며 정보를 모아 주기적으로 까마귀를 통해 수신하려 했고, 린든의 바다와 맞닿은 숲에서 주기적으로 생존 물자를 보급받으며 숨어지내려고 했다.


하지만 깡패들을 만나고부터 일은 틀어지기 시작했다. 아니, 안나를 만나는 것까진 좋았다. 아무리 덤벙거리는 한나일지라도, 안나의 행동에는 다른 속셈을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안나에게서 거처를 제안받을 때, 한나는 안나의 거처, 그리고 안나의 동거인 되는 사람이 반란과는 거리가 먼 소시민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안나를 통해 만나게 된 사람은, 린든으로 들어오기 전 카산드라에게서 들었던 반란 모의자 중 하나의 이름, 그리고 인상착의와 똑같았다.




벨.


카산드라가 말한 반란 모의자가 한나의 눈앞에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일련의 불행들이 뭉친 끝에 반란 모의지의 한 가운데에서 오도가도 못한 상황에 처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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