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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픽] 여름눈송이 epilogue

ASIS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0.10.02 19:2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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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눈송이, epilogue




안나는 뚜벅뚜벅 굳센 걸음을 6인용 병실로 향했다. 익숙한 한기가 내려앉은 복도는 해가 중천에 걸린 것 치고는 확연히 주변에 비해 온도가 낮았다. 온도에 민감한 환자가 있어 상시 낮은 온도를 유지해야 한다는 간호사의 말에 안나는 입술을 씰룩이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복도 전체를 춥게 유지하다니, 뭐 전세라도 냈나.



익숙한 6인실의 명패 앞에 선 그녀는 노크조차 하지 않고 거칠게 병실 문을 열어젖혔다. 그녀의 뒤에는 품바와 라피키가 나란히 호위병처럼 따라오고 있었다.



"잠깐 얘기 좀 할까? 오빠."



설마 동생이 다시 돌아와 면담을 요청하는, 기대조차 하지 않았던 상황에 한스는 부릅뜬 눈을 한층 더 크게 했다. 물론 안나를 다시 만나게 해달라고 저 떡대 간호사에게 몇 번이고 부탁하긴 했었다. 자신의 상태를 살피러 라피키가 방문했을 때, 그는 아예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지며 전화라도 하게 해달라고 애원했었다. 안나의 휴대폰이 고장나 연락이 어렵다는, 의사의 웃기지도 않던 변명을 신호조차 가지 않는 전화가 입증했을 때 한스는 부끄러움조차 잊고 바닥에 꿇고 앉아 목놓아 울었다. 하루하루 영혼을 갉아먹는 죄책감은 나날이 부피를 더하며 소년의 호흡마저 방해하고 있었다.



무릎을 꿇고 앉아 용서를 비는, 몇 번이고 했던 사죄 연습이 그의 머릿속에서 자동적으로 재생되었다. 바닥과 마주하기 직전 엉거주춤 선 소년은 안나 뒤의 두 명이 물러갈 때까지만 기다리기로 스스로와의 타협점을 찾았다.



"저희 개인적으로 이야기 좀 하고 싶어요. 나가주세요."



안나가 우물쭈물하는 소년의 심리를 파악하고는 뒤의 둘에게 말했다.



"그럴 순 없습니다. 환자의 상태를 봤을 때, 단 둘만 두면 당신이 무슨 짓을 당할지 모릅니다."



품바가 당치도 않다는 듯이 응수했다. 그는 공손한 말을 웃기지 말라는 어조에 담아 작은 소녀에게 가차없이 쏘아붙였다.



"한스는 절 다치게 하지 않아요. 설사 다치게 하려고 해도, 이번엔 저도 가만히 안 있을 거니까 괜찮아요. 나가주세요."



그건 그것대로 안된다고 말하려는 간호사를 제지하고 라피키는 품바를 잡아 밖으로 이끌었다. 이미 안나에 대해선 신뢰백배한 노인은 그녀의 목소리에 서린 완고함과 그 근거를 어렴풋이 짐작하고는 몸을 돌려 병실 문을 향했다. 고맙다는 안나의 시선에 조심하라는 듯 고개를 까닥인 그는 간호사와 함께 병실을 나섰다.



"그래서... 날 만나고 싶었다고? 할 말이라도 있어?"



공허하게 인사하는 안나를 앞에 두고 한스는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냉방으로 빙판같이 차가워진 바닥이 그의 무릎을 반겼다. 하지만 바닥의 차가움은 안나의 목소리에 서린 냉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안나... 미안해... 정말로 미안해. 널 때리려고 한 게 아니었어. 정말로 아니었어. 제발... 제발 용서해줘. 두번 다시 이런 일 없게 할게. 제발..."



"뭘 새삼스레... 우리 식대로 하자고".



한 손을 휘저어 소년을 다물게 한 소녀는 성큼성큼 한스의 코앞까지 발을 옮겼다. 그리고, 앉아있는 소년의 얼굴에 전력을 다해 발차기를 날렸다.



비명을 지르며 나가떨어지는 소년을 안나는 덤덤하게 시야에 담았다. 불식간에 자취를 감춘 잠깐의 만족감을 제외하면 그녀의 표정엔 어떠한 변화도 없었다.



"오빠가 예전에 나한테 그랬었지? 얕보이지 말라고. 당하면 똑같이 되갚아주라고."



뺨을 그러쥔 채 그렁그렁 눈물이 맺혀가는 소년 앞에 대천사는 노기어린 날개를 펼쳤다. 분노로 팽팽해진 공기가 진동하며 무자비하게 소년을 후려쳤다. 한스는 아론 앞에서도 이와 같은 두려움은 느껴본 적이 없었다. 



"방금 껀 내 몫이고,"



손가락 관절을 우두둑 푸는 안나의 모습에 한스는 반쯤 졸도할 것 같았다.



'' "이건 고생한 삼촌 몫이고!" 



명치에 꽂힌 정권에 한스는 일어서려다 말고 벽에 부딪혀 나자빠졌다. 강렬한 충격이 가슴을 타고 올라 잠시 소년의 기도를 틀어막았다.



'' "이건 오빠가 협박한 엘사 몫이야!!"



유난히 힘이 실린 막타에 한스는 맞은 배를 그러쥐고 기어이 바닥을 굴렀다. 자신이 쇠약해진 탓인지 안나가 운동이라도 했는지 예사롭지 않은 일격에 그는 전혀 힘을 줄 수 없었다. 첫 발차기에 미세하게 고개를 들었던 분노가 사라지고 이내 절절한 공포와 죄책감이 대신 소년의 마음에 들어찼다. 얻어맞은 육체의 통증은 안나가 자신을 때렸다는 정신의 충격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동생을 이리도 폭력적으로 내몬 사람이 다름 아닌 자신이라는 생각에 한스는 죄악감에 젖어 연신 눈물을 흘렸다.



"좋아. 분풀이는 끝났으니,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자구."



나도 마침 오빠랑 할 얘기가 있었거든. 속이 후련한 듯 안나가 기지개를 키고 손을 내밀어오자 한스는 손을 잡는 대신 엉덩이를 끌어 널찍히 거리를 벌렸다. 안나에 대한 두려움과, 그런 안나를 해할지도 모르는 자신에 대한 두려움이 동생으로부터 거리를 벌리라고 아우성치고 있었다.



안나는 개의치 않는다는 듯 빈손을 거두고 침대 옆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여전히 서슬퍼런 안나의 표정에 한스는 감히 똑바로 얼굴을 마주하지 못하고 주저앉은 채 고개를 아래로 늘어뜨렸다.



"좀 묻자. 엘사를 왜 이렇게 싫어해? 제대로 된 변명 같은 거라도 있으면 좀 들어보게."



다시 튀어나온 금발 소녀의 이름에 소년은 짐짓 얼굴을 구겼다.



"너는... 너는 그년이 너에 대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몰라."


"그러는 오빠는 알고? 하, 뭐 그래. 예를 들자면?"


"네가 시설에서 날 방문하는 동안, 그년은 널 몰래 보면서 온갖 이상한 그림을 그렸다고! 차마 말하기도 더러운 그림들을 잔뜩..."


"그래? 이런 거?"



안나가 주머니에서 테이프로 범벅이 된 그림을 꺼내자, 한스는 화등짝만하게 커진 눈을 종이에 향했다. 있을 리가 없는, 있어서는 안 되는 불결함이 동생의 손에 보란듯이 쥐어져 있었다.



"그걸... 너... 그걸 어디서 구한 거야?"


"오빠가 무슨 생각으로 그런 짓을 한 건진 알겠는데, 이건 도가 지나쳤어."



냉담한 말에 분노가 되살아나자 한스는 하얗게 질린 표정을 안나에게 향했다. 끊어져 몇 가닥 남지 않은 이성이 그 그림을 빼앗아 가루로 만드려는 독심을 아슬아슬하게 제어하고 있었다.



"다 너를 지키려고 그런 거였어!! 그년이 너한테 무슨 짓을 할지 내가 어떻게 알아?"



높아진 한스의 목소리에 안나는 의자를 뒤로 내팽개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접어두었던 격분의 기운이 한층 더 기세를 더해 그녀의 어깨죽지에서 맹렬하게 불타올랐다.



"그래!! 모르잖아!! 이걸 오빠 눈앞에 들이대면서 약올린 것도 아니고, 방에 꽁꽁 숨겨둔 걸 찾아내서 그걸 볼모로 협박하는 게 제정신이라고 생각해?"



자비없이 들이박히는 사실의 연쇄에 소년의 양심이 미약하게 흔들렸다. 불같이 쏘아붙이는 여동생의 말은 도리어 소년의 마음에 한 덩이 큰 빙산을 남겼다.



"날 생각해서 그랬다는 건 알아. 하지만 지금 상황을 봐. 우리가 어떻게 됐는지."



차분하게 호소해오는 목소리에 한스는 조금은 마음을 누그러뜨렸다. 안나는 진심으로 자신을 위하고 있었다. 망가져가는 자신을 안타까워하면서 대신 눈물을 흘려주고 있었다. 감히 외면할 수 없을 만큼 절절하게 다가오는 슬픔에 소년은 스스로가 적잖이 동요하고 있음을 알았다.



"나는... 나는 널 지켜야 해. 그걸 위해서라면 뭐든지 다 할 수 있어."



그렇게 약속했어. 잠시 내려앉은 침묵에 대꾸하려던 소녀는 아직 한스의 말이 끝나지 않음을 눈치채고 잠자코 소년이 말을 이어가길 기다렸다. 길어지려던 찰나의 적막을 깨고 한스가 담담하게 말문을 열었다.

 


"아론 자식이... 아니... 삼촌이 전화했어. 나 내일 재판 받아. 변호사 같은 거야 있지만... 아마 형을 받게 될 거야."



아론 그 새끼가 반드시 그렇게 만들겠다고 했으니. 묵묵부답인 동생을 앞에 두고 한스는 호소하듯 계속 말을 이었다. 자신에 대한 연민인지, 걱정인지 모를 무언가가 공기 중에 그득해 조금은 안나의 얼음장 같던 표정이 누그러져 보였다.



"나는... 나는 그런 거 용납 못해. 네 옆에는 내가 있어야 해. 내가 보호해줘야 해. 나...  나 말고는... 너는 그 어느 누구도 필요 없어."



"알아."



순순히 인정하는 대답에 한스는 숙인 고개를 들었다. 무엇을 긍정하는 대답인지 몰라 재차 말을 유도하는 시선에도 불구하고 안나는 굳이 응해 답하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어떻게 해줄까. 오빠 감옥 가면, 시설에서 그랬던 것처럼 일주일에 한 번씩 면회라도 가줄까?"



차갑게 던진 비아냥에 소년은 들었던 고개를 다시 내렸다. 모든 게 다 자신 탓이라고 은연중에 압박해오는 언사 속에서도, 한스는 안나가 미처 숨기지 못한 자신에 대한 심려와 걱정을 읽을 수 있었다.



"...오빠. 날 봐봐."



못 들은 척 움직이지 않던 소년은 재차 요구해오는 말에 티끌만끔 고개를 들었다. 차마 시선을 마주할 용기까지는 내지 못한 소년은 안나의 턱까지만 가까스로 눈높이를 올렸다.



"나는 누구야? 대답해봐."



이상한 질문이라 생각하면서도, 소년은 충실히 소녀에게 답한다.



"...내 동생이야."



"그럼 오빠는 누구야."



"...네 오빠야."



"정답. 잘 아네. 나는 오빠 동생이고, 오빠는 내 오빠야. 그러니까 나는 언제까지나 오빠를 기다릴 거야."



충실히 2개의 질문에 대답한 자신을 향해 한 줌 미소가 살짝 번지고 사라진 것을 소년은 눈치채지 못한다.



"오빠 말이 맞아. 나는 오빠가 필요해."



순순히 인정해오는 말에 한스는 비로소 완전히 고개를 든다. 조금은 인자해진 안나의 표정에 한스는 그제서야 안나가 여태껏 안타까움을 분노인 척 위장해서 내비쳤음을 깨닫는다. 소리만 매서웠을 뿐, 심려가 그득했던 안나의 목소리를 자신은 내내 알아채지 못했다. 16년, 태어날 때부터 동생과 함께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한 길 안나의 속을 모르는 자신에게 소년은 끝모를 자책을 느낀다.



"하지만 오빠는, 내가 아니라 시간이 필요해. 머리를 식히고, 제정신을 차릴 시간이."



차갑게 내려앉은 시선 속에 안타까움을 갈무리한 안나가 단호히 말한다. 그녀의 목소리는 감히 거역할 수 없는 무게를 담고 다가와 소년의 영혼을 절절히 울린다.



"...내가 미쳤다고 말하는 거야?"



억울한 듯 가까스로 쥐어짠 말에 소녀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린다. 미리 예상해 각오를 했다 한들 감내해야 할 충격은 전혀 기세를 누그러뜨리지 않았다. 하지만 이마저도 그녀는 대비한 채였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놀랍도록 빠르게 당당한 어른으로 성장해가고 있었다.



"나는 오빠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소중하게 생각해. 하지만, 신뢰하진 않아."



알고보니, 그 둘은 꽤 다르더라고. 안나는 창틀 너머로 스며드는 햇살에 무릎을 꿇고 호소하던 어느 아버지의 얼굴을 떠올렸다. 딸을 위해 10년을 기다려온 신사의 얼굴을 되새기며, 그녀는 비로소 자신이 기다릴 차례가 왔음을 실감했다.



"날 사랑해?"



뻔히 알면서도 물어오는 질문에 소년은 굳이 대답하지 않는다. 이미 예상했다는 듯, 소녀는 기다리지 않고 담담히 말을 이어간다.



"그러면 날 위해서, 예전의 자상했던 모습으로 돌아와줘. 화목했던 우리 가족을 되찾게 도와줘.”


“부모님은 이제 없어. 정말 우리 둘 뿐이야. 오빠가 제정신으로 돌아올 때까지, 나는 엘사랑 같이 기다리고 있을게.”



"그년은...”



분노로 열리려는 입을 소녀가 손을 저어 제지한다. 나올 차례를 빼앗긴 분노는 이어질 동생의 말에 대한 호기심에 억눌려 굳게 쥔 주먹 속에 깃들어 맴돈다.



"엘사는 나에게는 오빠만큼이나 소중한 사람이야. 엘사가 오빠에게서 날 뺏어갔다고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아줘. 지금 그렇게 생각하는 걸 아니까 오빠가 이상하다고 말하는 거야."


"엘사는 이미 오빠를 용서했어. 그 애는 너무 착해서, 더는 오빠를 미워하지 않아.”



계속 대꾸하려 벙긋거리는 입을 무시한 채 안나는 병실에 들어와 처음으로, 진심을 담아 분노를 내비친다. 조금씩 모습을 보이던 자비도, 용서도 어느덧 모습을 감추고 한 쌍의 눈동자에는 오로지 핏발 선 심판의 기운만이 깃든다. 마치 자신의 것을 건든다면 어떻게 되는지 경고하려는 듯이. 



"하지만 나는 아직이야. 엘사를 공격한 거, 나는 아직 용서 안 했어. 오빠는 나한테 그랬듯이, 엘사에게도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어야 해."



"내가... 내가...”



그년한테 꿇고 앉아 용서를 구하라고? 생각만으로도 숨이 턱 막히는 말을 한스는 끝내 목 밖으로 내뱉지 못한다. 갑갑함에 기세를 더해 전신을 가득 채우는 울분에 소년은 가까스로 제동을 건다.



"지금 당장 그럴 거라고 기대하진 않아. 말했잖아. 오빠를 사랑하지만 신뢰하진 않는다고. 하지만 계속 기다릴 거야. 오빠는 내 소중한 가족이니까. ...피로 이어지진 않았지만."



"...뭐?"



바위처럼 쿵 떨어진 말에 한스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듯한 충격에 휩싸인다. 절대 알아서는 안 되는 자신의 비밀을 안나가 알고 있다는 사실에 소년은 숨쉬는 것마저 잠시 잊고 부릅뜬 눈을 동생에게 향한다.



"오빠가 삼촌 말을 엿들었던 그날, 깨어나있던 게 오빠 뿐이었을 거라고 생각해?"



담담하게 털어놓는 말에 한스는 비로소 자신이 바닥에 무릎으로 서있는 것을 깨닫는다. 아직 제대로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뇌가 짓쳐오는 진실을 맹렬히 거부하며 몸부림친다.



"나도 알고 있었어. ...그리고, 오빠가 얼마나 나를 위해 노력해왔는지도 알아.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도 아주 잘. ...삼촌이야 내가 모르는 줄 알지만."



천천히 내려앉는 진실에 한스는 입만 벙긋거릴 뿐 차마 소리를 내어 말을 하지 못한다. 휘몰아치는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오로지 그의 귀만이 제 기능을 유지한다.



"나는 오빠를 사랑해. 진심으로. 그래서 오빠가 진심으로 뉘우치고 엘사에게 사죄하길 바래. 나는 그게 나와 엘사, 그리고 오빠 스스로에게도 올바른 길이라고 믿어."



소녀는 천천히 발걸음을 소년에게 향한다. 오지 말라고, 위험하다고 소리치려는 목소리는 그녀의 눈에 담긴 신실함에 그 울림을 잃어버린다. 어느덧 코앞으로 다가온 소녀에게 소년은 흔들리는 눈빛을 조심스레 향한다.



"오빠가 병원이든 감옥이든 어디에 있든 간에, 나는 그곳에 쫓아가서 기다릴 거야. 그게 가족이니까."



잔잔히 울려오는 진심에 소년은 아버지의 말을 떠올린다. 자신은 안나의 오빠라고, 소중한 가족이라고 똑같은 울림으로 똑같이 전해오는 목소리에 그는 흐르기 시작한 눈물을 미처 눈치채지 못한다.



"나를 위해서라도 엘사를 미워하지 말아줘. 나를 빼앗겼다고도 생각하지 말아줘. 나는 그 누구의 것도 아니야. 마냥 어린애처럼 항상 보호받아야 하는 그런 사람도 아니야."



소년의 뺨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며 소녀는 자상하게 미소를 짓는다. 활짝 미소가 만개하는 그녀의 얼굴에는 오빠에 대한 애정이 그득하다.



"한스. 내가 오빠를 다시 믿을 수 있게끔, 옛날의 자상한 모습으로 돌아와줘. 언제까지라도 기다릴게."





*****





“괜찮았어?”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연신 손가락을 꼬물거리던 엘사가 안나에게 조심스레 묻는다.



"응, 잘 있더라고. 내가 몇 번 벽에 처박아버리긴 했지만.”



새파랗게 변하는 엘사의 안색에 안나는 큭큭대며 가볍게 웃는다.



“농담이야. 그냥 얼굴이랑 배를 주먹으로 날려버렸을 뿐이야. 괜찮아.”



전혀 괜찮지 않다는 엘사의 표정에 그녀는 한층 더 크게 웃음을 터트린다. 



“오빠에게는 너 건들지 말라고 얘기해뒀어.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언젠가는 네 앞에 무릎을 꿇고 사과해올 거야. 똥고집이 있긴 해도, 결국에는 옳은 걸 선택하니까.”



엉거주춤 미소가 내려앉는 입술에 천사는 재빨리 제 입술을 얹는다. 순식간에 달아오르는 붉은 얼굴은 매번 그녀를 새로이 사랑으로 설레게 한다.



“자, 그럼 이제 휴대폰 사러 가자구, 우리 여왕님. 이젠 커플이니까 똑같은 걸로!”



새록새록 자리를 잡은 여름날의 녹음 속에 두 소녀의 웃음소리가 청아하게 울린다. 한 줄기 축복하듯 비추는 태양 아래 둘은 맞잡은 손만큼 가벼워진 발걸음을 옮긴다.



여름같이 화사한 미소를, 눈송이같이 은은한 미소를 은연 중에 서로에게 힐끗거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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