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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Arens Of Sheffield 05~06

개구리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0.10.04 22:49:32
조회 372 추천 14 댓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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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아트 고마워1ㅓ1ㅓ1ㅓ어렁럼ㄷ러덤!!! ㅇ말 ㅡ아ㅣㄹ히힣히ㅡㅇㅎ흐헤헤헤 아이고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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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4화













07.


"기분은 어때?"


정오가 막 지난 무렵, 안나는 펑펑 울다 지친 엘리사와 사실 쿠키는 내가 먹었다고 고백한 나머지 감정이 복받쳐 울어버린 멜리사의 손을 잡고 거리를 걷고 있었다. 시끄러운 거리에 한적한 진눈깨비가 녹지 않은 바닥의 눈 위로 새로이 쌓여갔고, 세 사람이 쓴 빵모자에도 설탕처럼 눈송이가 흩뿌려졌다. 도시의 소음 속에서 이질적인 아이들의 훌쩍임이 들렸다. 안나가 걸음을 멈추자, 아이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간 뒤에 멈췄다.


"얘들아? 자, 언니 얼굴 보자."


어그부츠, 두꺼운 털바지, 그리고 검은색과 청색 점퍼를 입고 아이보리색과 초록색 목도리를 한 멜리사와 엘리사가 몸을 낮춘 안나를 향해 몸을 돌렸다. 하지만 두 아이는 안나와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멜리사는 엘리사를 흘끔흘끔 시선을 흘렸다.


"일단 언니가 미안해. 미리 생각을 하고 말했어야 했는데...이제 화 풀어주면 안 될까?"


"으응..."


멜리사는 엘리사의 눈치를 살피면서 안나에게 답했다. 엘리사는 입을 열지 않았다. 안나는 목도리로 가려져 보이지 않는 엘리사의 입이 삐죽 나와 있을거라고 생각했다. 안나는 멜리사의 마음도 이해하면서, 엘리사의 심정에 공감했다. 돌아온 직후의 첫 행사가 망쳐질 위기에 처해있고, 좋아하던 초코칩 쿠키는 멜리사가 다 먹어버렸으니, 엘리사의 입장에서는 하늘이 무너진 기분일 것이었다.


"미안해애..."


벙어리 장갑을 낀 엘리사의 손을 멜리사가 잡으며 말했다. 멜리사의 말에는 물기가 배어있었다. 엘리사는 손을 뿌리치지 않았고, 그저 땅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엘리사, 멜리사가 사과도 했어. 멜리사가 사탕도 준댔잖아. 응? 우리 이쁜이, 화 풀어주면 좋을텐데."


안나가 엘리사의 어깨를 잡았다. 흠칫 놀란 안나의 흰 동생은 천천히 안나에게 안겼다. 엘리사를 안으면서, 안나는 멜리사에게도 손짓했다. 멜리사가 쭈뼛거리며 안나의 팔 안으로 들어왔다. 꿍얼거리며 엘리사가 무어라고 말했다.


"응? 뭐라고?"


엘리사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하지말 멜리사가 엘리사의 말을 들은 모양인 듯, 바둥거리며 엘리사를 꼬옥 안았다.


"진짜 용서해 주는 거지? 정말이지?"


안나가 팔을 풀었고, 두 아이는 안나의 품 너머로 나왔다. 엘리사가 멜리사의 말에 고개를 미세하게 끄덕였고, 다시 안나의 손을 잡았다.


"...어서 가요."


여전히 풀이 죽어있었지만, 아무 말도 없었던 이전까지와는 훨씬 나았다. 안나는 가장 마음의 상처를 입을 두 아이를 데리고 저녁에 돌아오겠다고 가족들에게 얘기해 두었고, 남은 세 아렌은 아쉽지만서도 웃는 얼굴로 세 사람을 배웅했다. 안나는 지갑을 챙긴 것을 다시 한번 기억을 더듬어 확인했다. 어차피 아이들을 위해 지출하고 싶었던 돈들이었다. 안나는 우선 아이들을 데리고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이것이 안나가 아이들에게 말해둔 첫 번째 계획이었다. 그 다음에는 캠핑을 가지 못하게 되었으니, 아이들과 집에 있을 가족들을 위한 간식들을 사오기로 했다. 단, 이번에는 특별히 아이들이 많이 사더라도 눈감아주기로 했다. 결국은 안나의 부주의로 인해 시작된 일이었으니, 적어도 캠핑을 가기로 한 일주일 정도는 아이들의 기분에 맞춰주며 지내기로 했다.


"근데 우리 어디에서 밥 먹어?"


거의 평소대로 돌아온 멜리사가 엘리사의 손을 잡은 채 방방 흔들며 물었다. 엘리사의 기분이 풀어져 기분이 좋아보였고, 엘리사도 쭈뼛거리며 안나를 잡은 손을 바람을 타듯 천천히 흔들었다. 안나는 아이들을 보며 흐붓이 미소를 지었다. 안나와 두 아렌은 현재 글로스터 워크와 혼턴 스트리트가 맞닿은 삼거리에 서 있었다.


'엄마가 추천한 곳으로 가기엔 너무 멀고....출근하는 기분이야.'


안나는 무심코 출근을 생각하며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 블루라운드 본사가 있는 아가르 스트리트는 걸어가기엔 무리가 있었고, 최대한 아이들에게 많은 곳을 보여주려고 대중교통을 이용하지 않으려 했다. 집을 나가기 전, 이두나가 안나에게 처음 추천한 식당으로 가보지 않겠냐고 제안했지만, 아이들의 입맛에 맞을지도 의문이었다. 1주일 남짓한 시간동안 아이들은 오두막에서 이별한 직후 약 1년간 요리연습을 한 안나의 식사를 맛있게 먹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안나가 만든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맛있다고 생각하는 음식들이었다. 처음으로 외식을 하는 것이기에, 나름대로 신중하게 접근해야 했다.



"먹고 싶은 게 있니?"



"사탕!"


"....쇼콜레이트."



당연하다는 듯 아이들은 좋아하는 간식을 얘기했고, 엘리사는 언제나 그랬듯 초콜릿의 발음을 다르게 했다.


"지금은 안 돼. 우리 점심 먹어야 하잖아. 간식은 점심 먹고 난 뒤에 사러 갈 거니까. 어서 다들 의견을 내 주렴."


안나가 두 아이의 등을 손바닥으로 통통 두드렸다.


"나 새우튀김 먹고싶어!"


멜리사가 직접 먹은 적은 없었고, 안나가 보여준 적은 없었다. 분명 다른 아렌들과의 잠자리에서 언급이 되었던 음식이라고 생각했다.


"그래, 새우튀김. 엘리사는?"


엘리사는 으음, 고민하는 신음을 흘렸다. 엘리사는 목도리 때문에 고개가 돌아가지 않아 잠시 몸을 좌우로 뒤뚱거렸다. 그 움직임을 보고 하얀 오리를 떠올린 멜리사, 그리고 새끼펭귄을 떠올린 안나였다.


"전... 아무거나 좋아요."


"왜? 먹고싶은 거 있을 거 아니야."


멜리사가 풀어지려는 목도리를 다시 고쳐 두르며 물었다. 사실 멜리사도 무엇을 먹을지에 대해 생각해 둔 것이 없었다. 그저 안나를 따라 나왔고, 안나가 장소를 계획해두었을 것이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래서 겨우 꺼낸 새우튀김은, 새벽에 엘사와의 잠자리에서 들은 엘사의 좋아하는 음식이었다. 무슨 맛일지 궁금해 물어보았던 멜리사였고, '네 입맛에도 맞을 거야.'라고 멜리사와 한 이불을 덮으며 엘사는 속삭였다.


"새로운 걸 먹어보고 싶어요. 우리가 지금껏 먹지 못했고, 안나 언니가 만들어준 것 이외의 것으로요."


"이외의 것이라..."


생각의 바통은 안나에게 돌아왔다. 때마침 횡단보도의 신호등이 초록색을 뜨었고, 안나를 가운데로 하여 양쪽에 두 아이가 아까보다 기운에 찬 발걸음을 딛었다. 이제 세 사람은 글로스터 워크를 걷게 되었다.


"새우튀김은 나중에 언니가 해줄게, 다들 고기 좋아하지?"


안나가 불현듯 아이들도 먹을 수 있을 만한 레스토랑 하나를 기억했다. 조금만 더 걷는다면 무리하지 않고 아이들과 배불리 식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응! 꼬기, 그 두꺼운 고기. 텔레비전 광고로도 했던데 먹어보고 싶어!"


"그건 언니가 만들어주시지 않으셨어요... 먹고 싶어요,"


기분이 확 좋아진 멜리사와, 기쁨을 은근히 참고 있는 엘리사가 보였다.


"좋아, ffiona's라는 곳이 있는데, 고기 말고도 이것저것 있으니까, 너희들이 먹고 싶어하던 스테이크. 한 번 든든하게 먹어보자. 오케이?"


"오오케이!"


엘리사는 말없이 장갑을 벗고 손을 들어 안나에게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방금 전 일로 인해 캠핑이 무산된 만큼, 이번만큼은 약속을 지켜달라는 무언의 협박이었다. 안나는 그런 엘리사의 순수함이 변함없다는 사실을 음미하며 엘리사의 작은 손가락에 자신의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뭐야! 나도 걸 거야! 자! 이리 줘!"


두 사람의 화목한 약속에 질투라도 나는 듯, 멜리사도 안나의 손을 향해 새끼손가락을 치켜올렸다. 안나는 거절하지 않고 멜리사와도 손가락을 걸어 약속했다.



사랑스러운 소란이 피어나는 오후가, 이제 막 시작되고 있었다.










08.


"언니, 숟가락 좀 챙겨줘."


한나는 긴장하고 있었다. 원래 한나는 요리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요리를 하는 사람이 주체라면 한나는 무조건 객체에 속했다. 그리고 1월 2일의 정오에, 한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주변의 도움 없이 요리의 마지막 단계에 접어들고 있었다.


"한나, 혹시 무서우면..."


"괜찮, 괜찮아 언니, 할 수 있어. 난 할 수 있어..."


엘사가 식탁에 세 개의 숟가락을 놓으며 걱정하는 투로 말했다. 하지만 한나는 강박에 찬 것처럼 엘사의 말을 끊었고, 혼잣말을 섞어 말했다. 갑작스러운 일정 변경으로 안나가 아이들을 데리고 외출하기 전, 한나의 믿음직한 언니는 그녀에게 그라탕 재료들을 꺼내며 조리 방법을 알려주었고, 알려준 대로 그라탕을 오븐에 넣고 돌리는 것까지 성공시켰다. 하지만 바람을 처음 만들어 냈을 때의 설렘, 그리고 통제하지 못하는 불안함에서 나오는 두려움이 섞여 지금의 한나의 손끝에 물들어 있었다.


'안나 언니가 말한대로 했잖아.... 잘 됐을 거야. 잘..."


한나는 심호흡을 하면서 벙어리 장갑을 꼈다. 수술 직전 니트릴 장갑을 낀 의사의 심정을 가진 한나는, 뜬금없이 라푼젤을 떠올렸고, 병원에서 바쁘게 일하는 금발의 간호사에게 자신의 요리가 성공적으로 만들어졌길 기도해달라고 속으로 중얼거리며 오븐을 열었다. 노릇하게 구워진 치즈의 내음이 한나의 바람 없이도 코끝을 적셨다.


"어머, 맛있어 보이는데?"


컵과 물병을 식탁 위에 놓은 엘사가 한나의 옆으로 다가와 몸을 숙여 오븐 속을 들여다봤다. 잠시 숨을 크게 들이마신 엘사는, 으음. 하고 기분 좋은 신음을 흘렸다.


"가서 엄마 좀 데리고 와 줘. 이거 식으면 맛 없을 테니까."


한나가 바로 옆에서 자신과 자세를 같이하는 엘사를 흘끔 바라보았다. 내음은 합격이지만, 맛도 확인하고 싶었고, 가족들이 먹기 전에 체크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엄만 잠깐 통화하러 가셨는데... 알았어. 아, 이것 좀 데워 주겠니?"


엘사의 손에는 진홍색 액체가 든 유리 티포트가 들려있었다. 한나는 티포트를 받아들고 엘사의 등을 툭툭 밀었다.


"자, 알았으니까아... 어서 엄마한테 그라탕 드시라고 전해줘. 빨리이."


"얘는, 알았어. 포트 데울 때 조심하렴."


엘사가 싱긋 웃으며 가벼운 발걸음으로 부엌을 나섰다. 한나는 엘사가 보이지 않음을 확인하고 재빨리 식탁 위의 숟가락 중 하나를 집어들어 세 개의 접시 중 오른쪽의 접시 속 그라탕을 숟가락으로 조금 떴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그라탕을 손가락에 걸린 바람으로 열기를 식힌 다음, 입으로 두어 번 후후 불면서 그라탕을 텁 하고 먹었다. 잠시 뒤, 한나는 짜지도, 쓰지도, 느끼하지도 않는 성공적인 그라탕을 맛있게 먹을 엘사와 이두나의 모습을 떠올리며 행복에 젖은 채로 인덕션 위에서 조금씩 따뜻해지기 시작하는 티포트 속 잔거품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티포트 감상을 마친 안나는 그라탕의 소스에 찍어먹을 바게트 빵을 꺼내기 위해 냉장고에서 꺼내면서, 자신이 먹을 초코우유 팩도 같이 꺼냈다. 가벼운 우유팩을 가늠하며, 한나는 안나에게 전화를 걸어 올 때 초코우유를 좀 사다달라고 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초콜릿을 좋아하는 아렌의 특성상, 초코우유 또한 없을래야 없을 수 없는 아렌들의 공통적인 선호점이었다. 푸른 머그컵에 남은 초코우유를 모두 따르자 컵의 절반 정도에 채워졌고, 한나는 그라탕이 식지 않게 한 손으로 따뜻한 바람을 만들어 세 사람의 그라탕 접시에 묶듯이 흘려보냈고, 남은 한 손은 머그컵을 들어 와인 마시듯 홀짝였다. 한나의 마음 한 켠에는 캠핑을 가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이 남아 있었다. 안나와 엘사네 조가 무엇을 생각하였든, 최고의 시간을 보낼 수 있었을 것 같았다. 한나는 아이들이 집에 돌아와도 침울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캠핑을 가지 못하면 캠핑을 간 듯한 느낌을 선사해주면 되지 않을까? 한나는 문득 VR기기를 떠올렸다. 아직 사지는 못했지만, 만약 산다면 아이들이 상당히 좋아할 것 같았다. 물론 능력이 튀어나오지 않게 기기 속 장면이 현실이 아님을 상기시켜줘야겠지만. 한나는 두 사람이 돌아올 동안 머그컵을 잠시 식탁 위에 올려놓고, 검색창에 VR기기들을 입력해 정보를 찾기 시작했다. 여행을 못가는 이상, 가상현실로 대리만족을 시켜주고 싶은 1살짜리 어른의 솜털어린 배려였다.




09.


제인의 집안은 검소함이란 곤충을 해부한 것처럼 건조하고 밋밋한 분위기였다. 하얀 벽지에 고정된 벽걸이 TV, 푸른색의 두꺼운 이불과 베개, 그리고 그것들은 침대를 감싸고 밋밋한 나뭇결의 바닥에 조금 흘려 있었다. 반쯤 풀어헤친 머리를 한 제인은 어수선한 이불의 위에 앉아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크리스마스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온 제인은 태연함의 가면을 벗어던지자마자 화장실로 뛰어들어 변기에 모든 음식물을 쏟아냈다. 아렌의 사람들에게 스며들기 위해서 감추어지고, 잊었던 비밀을 이두나는 알고 있었다.


당시엔 마음이 남아있던 한스의 지시로 킬러들을 고용해 이두나를 납치하고, 종국엔 죽음에까지 이르게 한 관계자의 자리에서 죄책감과 후회를 품은 채 내려오자, 한스는 곧바로 제인을 죽이려 들었고, 제인의 대역들을 차례차례 죽여나갔다. 한참을 도망치던 끝에 제인이 향한 곳은 이두나를 납치했던 셰필드 테라스였고, 가까스로 CIA 수석 그룹 팀장인 메가라와 탄생을 지켜본 한나, 그리고 타겟인 안나의 도주에 휘말린 민간인 오로라의 틈에 숨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이후 제인은 안나의 의심을 받으면서도, 이들은 순전히 피해자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결심했다. 이두나가 다시 살았음에도, 자신은 여전히 아렌가의 사람들에게 여죄를 남겨 있었으니, 아직 한참 남은 여생을 아렌가의 사람들을 위해 살면서, 느껴지는 부끄러운 죄책감을 덜어내기로.


그렇게 아렌가의 사람들과 사건의 당사자라는 관련성에서 출발해 점점 친해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앞으로 힘들어질 것 같았다. 한스만큼은 아니어도 납치, 더 나아가 죽음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한 사람이 바로 자신의 비서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 제인이 안심하고 서 있게 된 발판은 바람을 맞는 모래언덕 위에 놓인 것이나 다름없게 되었다. 머지않아 제인은 이두나에게 그랬던 것처럼, 납치를 당하고, 인적 드문 어딘가에서 32구경 총알을 먹인 PPK로 후두부가 관통된 다음 템즈 강에 내던져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예정될 죽음을 생각하니 식욕은 느껴지지 않았고, 오히려 편안했다. 차라리 그런 죽음을 받아들여서 이두나의 화가 풀린다면 그것으로도 족했다. 일주일이 지나고, 새해가 밝았음에도, 겨우 물 몇 모금이 제인 먹은 전부였다. 오늘이 지나면 아흐레째가 된다. 제인은 죄책감에 사무쳐 죽이려는 이두나의 계획 속에서 떠내려가고 있지 않을까 하는, 느려지고 단순해진 사고 속 생각을 끄집어냈다. 그 때, 그동안 문자만 왔던 제인의 휴대폰이 요란스럽게 울기 시작했다. 문자는 무시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전화는 그러지 못했다. 문자음은 잠깐이지만, 수신음은 잠시동안 지속되기 때문이고, 이는 제인의 닳아진 신경을 찢어버릴지도 모르는 잡음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저 전화를 받고 싶었다. 누구에게라도 털어내 죄책감을 덜고싶은 얄팍한 이기심이 다시금 제인의 마음에 붉은 싹을 틔웠댜. 제인은 근 일주일간 먹지 못해 덜덜 떨리는 손을 뻗어 윙윙대는 휴대폰을 집어들었다. 엘사 아렌, 한스가 자신을 방치하고 그의 마음을 본의 아니게 돌리게 된 여자이자, 그럼에도 제인이 챙겨준 여자, 그리고 현재 이두나의 장녀였다. 엘사가 아톤의 프로젝트에 아주 깊이 연관은 되어 있어도, 사무적인 정보를 인지하지 못하고 있을 터였다. 그 말은 즉, 엘사는 제인의 만행을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되었다.



제인은 천천히 화면 하단에 띄워진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엘사에게 무어라고 말하며 대화를 해야할지 제인은 예정하지 않았다. 그저 물기가 배어진 감정이 행동으로 도출되었을 뿐이었다. 휴대폰 너머로는 아무런 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마치 벽에 귀를 대고 있는 듯한 이질감을 맛본 제인은 먼저 엘사에게 말을 걸기로 했다.


"...여, 여봇..세요."


메말라진 입과 혀는 발음을 답답하게 꼬아냈다. 제인은 잠시 입을 다물고 억지로 입안을 침으로 문질렀다.


[여보세요.]


그러다 그만, 예상치 못한 상대방의 말에 놀라 혀를 깨물고 말았다. 아주 일부였지만, 제인의 입안은 흘러나오는 약간의 피로 가까스로 얘기를 할 수 있을 정도의 물기를 되찾았다. 목소리의 주인은 다름아닌 이두나였다.


[...여보세요? 제인?]


무계획에 예상치 못한 상황이 벌어지자, 제인의 말문은 막히고 말았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제인의 단차원적인 사고는 이제 차원의 개념마저 잃어버렸다.한참 동안 두 사람을 오가는 대화는 한줄기도 없었다. 공유한 사실의 애매함은 두 사람을 무안하게 만들었다. 제인은 이두나의 목소리가 그리 화가 나지 않았음을 알면서도 전화를 끊으려 스크린의 빨간 전화기 거튼을 누르려했다.


[제발 끊지 말아주겠어요?]


그 순간, 제인의 생각을 읽었다는 듯 이두나가 지친, 어쩌면 제인의 기분을 대변하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제인의 손가락은 겨우 몇mm 차이로 스크린 위 허공에 멈췄다.


[미안해요. 차라리 묻어뒀어야 했는데, 제가 너무 주책맞아서 그만...]


아니예요. 한스 그새끼 잘못이자, 제 잘못이예요. 왜  사장님이 미안해하시는 건데요? 제인은 달싹거리는 혀와 숨의 흐름을 움직이려고 했다. 하지만 마취를 당해 경직된 것처럼 그녀의 발성기관은 어떠한 움직임도 취하지 않았다. 그저 쇠맛나는 침이 이따금 삼켜졌을 뿐이었다.


[그냥, 더 미루고 싶지 않았어요. 비밀을 더 간직하고 있으면... 좋은 마음도 좋게 보지 못할 것 같아서... 제인, 듣고 있어요?]



제인은 대답 대신 기침소리로 이두나의 심경 고백을 듣고있음을 알렸다. 언젠가 드러날 비밀이었기에, 비밀이 의심으로 변질되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던, 어쩌면 제인에게도 극약 처방이 되는 수를 이두나는 두었던 것이었다.


[사실 엘사에게도 방금 전에 이 얘길 좀 나눴어요. 그리고... 지금 제 옆에서 이 통화를 듣고 있는데, 당신하고 통화를 좀 하고 싶어해요. 그래줄 수 있어요?]


"네, 네...언제든지요."


제인은 겨우 울먹거리는 목을 가다듬으며 수락의 표시를 알렸다.


[고마워요, 제인. 엘사랑 얘기하기 전에, 이 말은 꼭 해주고 싶어요. 당신은 이제 아톤의 제인이 아니고, 블루라운드의 제인이예요.]


이두나의 말 끝에 물기가 배어 있었다. 사건의 당사자인 만큼, 감정의 고요를 다스리기 힘든 건 당연했다. 제인 또한 겨우 감정을 다스리고 있었으니까. 휴대폰 너머로 잠깐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전해졌다. 이두나의 손에서 엘사의 손으로 옮겨가는 소리라고 제인은 생각했다.


[아, 어...음, 음음. 제인 씨, 저 엘사예요. 잘 들리죠?]


침울한 목소리의 이두나에 비해 밝은 투로 엘사가 전화를 받았다. 엘사 또한 이두나와 제인 사이의 사건을 알고 있었지만, 슬프지도, 화가 들어있지도 않은 감정이 목소리에 배어져 있었다.


"...잘 들려요."


[엄마한테 얘기 다 들었어요. 그 자식 때문에 일을 떠맡으셨다고...]


엘사도 잠시 말을 멈췄다. 민감한 얘기인 만큼, 단어 선정을 신중히 해야 했다. 그리고 엘사는 제인의 기분을 상하게 만들어주고 싶지 않았다. 어떤 면으로 보면, 제인도 피해자임이 분명했다. 모두가 아픔을 가지고 있는 만큼, 지금 이 순간 상처들을 모두 치료할 순 없었다. 적어도 상처를 감싼 고름은 모두 긁어내야 했다. 엘사는 생각한 끝에, 제인이 가장 듣고 싶어할 한 마디를 생각했다.


[많이 힘들었죠?]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눈물의 주인은 제인이었다. 누가 울어보라고 한 것이 아님에도 그녀의 차가운 볼을 타고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어, 저기, 혹시 울고 있어요? 미안해요...]


잘잘못을 따지지 않아도, 엘사를 포함한 아렌가의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잘못으로 돌리는 성향이 있었다. 그 점이 제인은 싫지 않았다. 오히려 구원을 받는 것 같았다.


"아니예요. 눈썹이 눈에 들어가서...안 힘들어요. 엘사 씨야말로, 그동안 힘들지 않았어요?"


[제가 힘들게 뭐가 있겠어요. 제인 씨 없었으면 전 그 좁은 벙커에서 이미 죽었을 거예요. 또...어찌 되었건 가족들, 그리고 당신이 절 새장에서 꺼내주었고, 제가 여기까지 올 수 있는 것도 다...제인씨랑 가족들 덕분이예요. 하루하루가 행복하고, 기쁨에 벅차고 있어요. 그러니까 제인 씨.]


엘사의 말에서, 내용대로 그녀의 목소리는 행복을 토핑한 나긋함이 풀려 있었다. 마치 어린아이를 어르는 듯한 어조도 느껴졌다.


[저흰 더 이상 아톤의 일로 힘들어하지 않는 제인 씨가 보고 싶어요. 엄마, 그렇죠?]


직후에 [당연히 보고싶지 않겠니?]라고, 이두나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제인은 전화를 받기 직전까지 생각해둔 죽음을 잠시 놔두기로 했다. 아니, 완전히 놓기로 했다. 같은 상처를 가지지 않더라도, 모두 품어줄 사람들, 모두가 미쳐가는 세상 속에서 홀로이 순수한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가까이 둔 제인은 비로소 그것이 축복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매듭이 풀리듯,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죄책감 조각들이 사라지자, 여지껀 미뤄뒀던 허기가 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전화를 받고있는 백금발의 상대방도 제인의 배 속 투정을 선명히 들을 수 있었다.


[밥도 안 먹은 거 아니죠? 음...안 먹으시면 멜리사가 제일 슬퍼할 거예요. 어쩌면 울면서 화를 낼 수도 있겠네요. 아...멜리사한테 말해둬야겠다! 제인 언니가 밥도 안먹고 쫄쫄 굶는...]


"알았어요. 금방 먹을게요. 그 아이한텐 그냥 잘 있다고만 해주세요."


[못 믿겠어요. 지금 저희랑 같이 있는 게 아니잖아요? 거짓말일 수도 있으니까... 그러니까아...]


엘사가 끙끙대며 생각에 잠겼다. 이두나의 편지 한통으로 시작된 제인의 무소식 속에는 어느정도 단식이 들어있다고 생각했고, 확실히 식사를 했다는 것을 알고 싶었다. 한 손으로 머리를 감싸 몸을 웅크리며 끙끙대는 엘사를 본 이두나는, 살며시 딸의 손에서 휴대폰을 천천히 빼내 전화를 이어받았다.


[지금 안나랑 아이들이 밖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어요. 안나랑 같이 식사라도 하는 게 어떨까요? 그러는 편이 더 낫다고 생각해요.]


이두나의 말은 엘사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장애물을 넘어서, 모두가 안심할 수 있는 대안을 내놓았다. 엘사는 생각했다. 안나의 귀에 들어간다면, 어떻게든 제인을 데리러 갔을 것이고, 제인 또한 쉽사리 거절하지 못할 것이란 사실을. 제인은 안나, 그리고 엘리사와 멜리사가 자신을 걱정하는 모습을 상상했다. 은퇴했을지라도, 아직은 감각이 죽지 않은 킬러와 얌전한, 그리고 장난꾸러기인 이전 개체들은 절대 제인을 가만히 두지 않을 게 분명했다. 안 먹든, 먹든 간에 무조건 세 사람은 만나게 되어 있었다.


[아, 그리고 아이들을 좀 위로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갑자기? 제인은 이두나의 말에 의문을 가졌다. 불화라고는 전혀 일어날 것 같지 않은 보드라운 아렌가에 무슨 일이 생겼나? 제인은 크리스마스 당시의 기억을 머릿속에서 끄집어냈다. 하지만 지금 통화의 주제가 되는 '납치 사주 사건'은 아이들의 위로와는 전혀 관계가 없었다. 한나랑 아이들이랑 싸웠던 것일까?


"혹시 이유를 물어봐도 괜찮을까요?"


통제가 가능한 수준까지 도달해도, 여전히 개체들에게는 통제불가의 가능성이 남아있었다. 혹시 어딘가에서 능력을 너무 심하게 다뤄 곤란에 빠진 게 아닐까 싶은, 다소 불길한 상상이 불안한 심리 사이를 비집고 흘러내렸다.


[사실 오늘 안나가 캠핑을 가자고 계획을 세웠는데, 메가라 국장이 거절했나 봐요. 특히 엘리사가 많이 울면서 나갔는데, 만나면 같이 식사도 하면서, 서로 간에 위로도 좀 해주셨으면 좋겠네요. 아, 이건 비서로써의 일이 아니예요. 그러니까...]


이두나는 무슨 단어를 골라야 할지, 방금 전의 엘사와 비슷한 이유로 잠시 말을 끊었다. 이번엔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엘사가 퍼뜩 휴대폰에 입을 가까이 댔다.


[친구로써.]


이번에는, 제인의 눈에서 웃음이 왈칵 튀어나왔다. 친구, 친구. 쉽사리 부를 수 없는 호칭을 거리낌 없이 내어주는 아렌들의 마음씨에, 제인의 웃음은 입까지 스며들었다. 제인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았다. 헝클어진 머리카락과  안으로 조금 움푹 들어간 볼 사이에는 퉁퉁 부어 흐리멍텅한 눈이 창밖의 눈에 섞여 비쳤다. 아무래도 선글라스라도 끼고가야 하지 않을까, 진지하게 생각한 제인이었다.





10.


안나와 아이들은 레스토랑 '피오나'(Ffiona's)에 들어가 밖을 볼 수 있는 창가 쪽에 자리를 잡았다. 안나는 인파와 차량 속에서 피오나의 간판이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했을 즈음, 제인에게서 온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내용은 간단했다. 이두나와 작은 마찰 비슷한 게 있었고, 화해함과 동시에 자신과 같이 식사를 하면서 캠핑을 가지 못한 것에 대해 위로를 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는 내용이었다. 안나는 흔쾌히 수락했고, 식사를 할 피오나의 주소를 메세지로 제인에게 보냈다.



그리고 지금, 안나는 각각 한 쪽씩 메뉴판을 잡고 있는 두 아이를 보면서 컵에 따뜻한 물이 든 주전자를 따르고 있었다. 으음... 아이들은 마치 숨은그림 찾기, 혹은 월리를 찾아라를 하는 것처럼 아주 천천히 메뉴들을 하나하나 작은 손가락으로 훑어보고 있었다.



"으, 버섯. 난 버섯 엄청 싫은데. 이건 안 먹을래."



"코코넛 요거트...는 후식?"



버섯을 싫어해 얼굴을 잔뜩 찡그린 멜리사와, 고개를 갸웃거리며 음식들의 의미가 무엇인지 고민하는 엘리사가 메뉴판 사이로 간간히 보였다. 안나는 두 사람을 보면서, 처음 런던에 왔을 때 먹었던 모잠 랩을 떠올렸다. 그 때는 시리아에서 막 입국한 참이었고, 뮬란의 유품인 배지로 낙하산처럼 블루라운드에 합격한 때였다.



그 당시, 안나는 홀로이 식당에서 밥을 먹으며, 그때와 비슷한 바깥 풍경을 보고 있었다. 그 때는 슬픔 속에서 나른함을 느꼈다면, 지금은 행복 속에서 나른함을 느끼고 있었다. 가족 걱정이 없으며, 돈 걱정도, 그리고 위협의 존재도 없었다. 1년 전만 해도 사나웠던 숨소리는 이제 다른 일반인과 비슷한 정도로 부드러워졌다. 안나는 컵을 들어 물을 마셨다. 따뜻한 물이 입안을 한 바퀴 휘돌더니, 곧이어 꿀꺽 소리와 함께 식도로 넘어갔다.


"나 정했어! 영국식 아침 풀세트에 계란까지 먹을래."


어느새 다 정한 아이들이 메뉴판을 테이블 위에 다시 올렸다. 멜리사가 의기양양한 듯 '영국식 아침 풀세트'에 당당히 손가락을 올렸다.


"저는... 스테이크하고 계란 정식하고 또..."


엘리사는 말 대신, 손가락을 천천히 들어 코코넛 요거트에 올렸다. 먹고 싶은 게 많았지만, 그래도 안나의 눈치가 보인 모양이었다.


"먹어도 돼요...?"


부정할 이유는 하나도 없었다. 물론 아이들의 체격 상 음식이 남겨지는 것은 불가피하다. 하지만 안나는 그런 사사로운 것까지 아이들에게 제약을 주고 싶지 않았다. 아직 아이들은 어리고, 세상을 더욱 깊숙히 접해야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엄. 오늘 언니 때문에 기분 안 좋아진 것도 있고, 먹고 싶은 것들 다 주문해도 돼. 부담 가지지 마."


안나는 엘리사를 시작으로 멜리사를 향해 천천히 눈을 돌렸다. 멜리사는 안나의 말을 듣고, 두 손을 입가에 가져가 고민하더니, 이내 다른 메뉴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멜리사의 손가락 끝에는 사이다 한 잔이 쓰여져 있었다.


"엘사 언니가 알려줬는데, 이거 먹으면.. 으으으! 하고 입안에서 타다닥 하고 뭔가 터진댔어!"


멜리사가 말하면서, 안나에게 구체적인 설명을 해주려는 듯 두 팔을 크게 벌려 원을 만들었다. 그러다 콩 하는 소리와 함께 멜리사의 팔이 엘리사의 머리와 가볍게 부딪혔다. 그러자 엘리사의 머리카락에 사르륵 소리와 함께 눈가루가 새어나왔다.


"어, 어어..."


사과하려는 멜리사가 엘리사의 눈가루를 보며 당황했지만, 안나는 잽싸게 테이블 옆의 냅킨을 가져와 엘리사의 눈가루를 닦아주었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엘리사가 무의식적으로 놀란 탓이었다.


"쉬, 쉬쉬...."


엘리사의 눈가루를 닦은 안나는, 멜리사를 보며 손가락을 입으로 가져갔다. 멜리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안나의 동작을 따라했다. 엘리사는 눈가루가 생겨난 머리를 손바닥으로 슥슥 문질렀다. 다행스럽게도, 양이 적었고, 본 사람은 없었다.


"하마터면 큰일날 뻔 했어."


안나가 녹은 눈가루에 젖은 냅킨을 돌돌 뭉쳐 테이블 위에 올려 놓았다. 멜리사가 엘리사의 머리에 얼굴을 가져가 유심히 살펴보면서, 한편으로는 엘리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으.. 엘리사, 미안해.."


혹시나 무슨 변화가 생겨나지 않을까 싶어 불안한 멜리사를 보며, 안나는 그래도 아이들이 서로를 끔찍이도 아낀다는 것을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보통은 나이를 먹으면 조금씩 가족간의 거리가 벌어진다고 하지만, 안나는 두 아이가 그러한 일반화에서 벗어나 있다고 생각했다. 서로 껌딱지처럼 붙어다니며, 공통적인 비극을 겪었으니, 아마 안나가 살아있는 한 아이들의 관계가 틀어지지 않을 것 같았다. 엘리사는 멜리사의 손길을 싫지만은 않은 듯 흐흥거리며 받아들였다.


"언니는 뭐 드실 거예요?"


엘리사가 안나에게 물었다. 두 아이에게 있어서 안나가 선택할 메뉴가 무엇일지는 최고의 관심사일 것이었다. 안나는 메뉴판을 돌려 눈으로 메뉴들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버틀러 밀크 팬케이크와 프렌치 토스트, 그리고 애플 모히토가 눈에 들어왔다. 차를 끌고 나오지 않았기에, 칵테일 한 잔 정도는 괜찮을 것 같았다. 그리고 안나는 제인의 것도 미리 시켜두기로 했다. 속이 좋지 않아 굶었다는 제인을 고려한 안나는, 부담없이 담백하고 깔끔한 것으로 시키기로 했다.



과일, 꿀 그리고 썰어낸 아몬드가 들어간 유기농 죽을 한 그릇 추가로 시키기로 마음먹은 안나는 손을 들었다. 이내 웨이터가 세 사람의 테이블 앞에 섰으며, 안나는 아이들의 것, 그리고 자신과 제인의 것을 주문했다. 주문 확인까지 마친 웨이터가 주방 쪽으로 사라지자, 안나는 메뉴판을 덮고 테이블 한쪽 창가에 비스듬이 세워 놓았다.


"언니, 그렇게 많이 먹으면 나중에 돼지처럼 돼. 꿀꿀."


멜리사가 안나가 시킨 메뉴들을 떠올리며 손가락으로 코끝을 올려 돼지 흉내를 냈다. 그 모습을 본 엘리사는 퍽이나 웃겼는지, 프흡 하고 새어나오는 웃음을 손으로 겨우 가려냈다.


"음, 하지만 언니는 돼지가 되고 싶지 않은걸? 매일 저녁마다 내가 운동하는 걸 잊어버렸구나?"


안나가 스웨터의 소매를 걷어냈고, 팔을 구부리며 힘을 주었다. 이어 굴곡이 두드러지는 근육들이 모습을 드러냈고, 아이들은 자신들의 말랑말랑한 팔과 다르게 로봇처럼 울퉁불퉁한 안나의 팔근육에 눈을 떼지 못했다.


"그리고 먹을 수 있을 때 많이 먹어 둬야지. 편식 같은 건 하기 싫어."


"하지만 언니는 민트초코..."


엘리사가 조심스럽게 안나의 혐오 음식을 꺼냈다. 1년 전 연구소에서 오로라와 같이 탈출할 때, 안나는 두 사람의 위조 신분증의 필요성을 체감했고, 카자흐스탄 국경에서 인포카르텔을 운영하고 있는 에리얼을 찾아간 적이 있었다. 그 때, 에리얼의 수행원이었던 랩터에게 음료를 대접받은 안나는 얼음물 트라우마를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싫어했던 민트초코를 본의 아니게 흡입해 버렸다. 그 때의 기억이 엘리사의 뇌리에 박힌 듯 했다.


"으, 아니야 엘리사. 그건...너무 치약같아."


안나의 보조개가 파르르 떨렸다. 아무것도 모르는 멜리사는 민트초코라는 음식이 누구보다도 듬직한 안나를 주눅들게 하는 아주 강력한 음식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본질은 그게 아니야. 언니 말은, 있을 때 많이 먹어두란 거지. 언제 또 굶을지 모르거든..."


"굶으신 적이 있었어요?"


호기심 반, 그리고 미안함 반이 들어있는 표정을 하며 엘리사가 물어보았고, 안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CIA에 있었을 적엔 사보타주 작업, 암살 저격 작업을 하면서 식사를 건너뛴 일이 비일비재했고, 심지어는 작업을 하다 궁지에 몰려 강제로 먹지 못했던 일도 존재했다. 안나는 그 중에서 가장 최악이었던 일을 기억했다.




"예전에...아주 나쁜 약을 파는 사람들을 잡으러 간 적이 있었어. 그 사람들 중 가장 높은 사람을 잡아서, 그 단체를 무너뜨려야 했었지."


안나의 이야기가 시작되자, 아이들은 침을 꿀꺽 삼키며 안나의 이야기에 집중했다. 나중에라도 들을 수 있지만, 자신들의 듬직한 버팀목이자 우상인 언니가 얘기해주는, 첫 번째 이야기였기 때문이었다.



"처음엔 순조로웠어. 그런데... 먼저 단체에 들어가 있던 다른 기관 팀원 한 명이 붙잡히면서 언니의 존재를 발설한 거야. 그래서 언니가 잡혀버렸어. 막 맞고, 물에 빠지고... 지금 생각하면 소름이 끼친다. 아유..."


안나가 알수 없는 오한을 느끼며 팔짱을 낀 채로 팔뚝을 손으로 살살 문질렀다. 하지만 피오나 내부의 히터는 활발히 가동중에 있었다.



"어느날, 그 높은 사람이 직접 나에게 심문을 하러 왔었어. 나 말고 다른 팀이 있냐고 말이야. 난 아니라고 했어. 투입된 인원이 정말로 나하고 그 팀원 밖에 없었거든. 그런데 그 사람은 날 믿지 않았고, 결국...언니한테 나쁜 약을 주사기로 주입시켰어."


다시 돌아봐도, 그렇게 좋지 않은 경험이었다. 나쁜 집단은 마약 카르텔이었고, 나쁜 약은 마약이었으니까. 아주 극미량이라고 생각해도, 그것으로 일관되었던 생활이 무너지는 건 한 순간이었고, 안나는 실제로 후유증을 겪기도 했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르겠어. 어느 순간, 난 약에 취해 있다가 또 다른 나쁜 집단이 벌인... 작은 전쟁을 틈타서 겨우 탈출할 수 있었어."


"지금은 괜찮은 거지? 그런거지?"


멜리사가 걱정하듯 안나에게로 몸을 쭉 빼며 말했다. 안나는 그런 멜리사의 머리를 부산스럽게 쓰다듬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지금은... 괜찮아. 아, 그리고 탈출하기 전에, 그 높은 사람을 죽이고 나올 수 있었어. 우연에, 우연이 겹쳐서 그 사람과 측근들을 죽일 수 있었지. 하지만... 그 집단이 와해되진 못했고, 언니는 간신히 우리쪽 사람들과 접촉해 치료를 받을 수 있었어. 그 중 하나가 얼음물에 몸을 담구는 거였는데, 혈관을 수축시켜서 약의 이동을 최대한 늦춰야 했거든. 그걸 한두 번이 아니라 수십 번 겪고 나니까... 얼음물을 입에도 대기 싫더라."


안나가 미지근해진 컵 안의 물을 다시 한 번 마시며 마른 혀에 물을 적셨다. 두어 번 혀를 짧게 내민 안나는 숨을 한 번 크게 내쉰다음, 내뱉었다.


"언니가 못 마셨던 이유를 알게 되서...다행이예요."


"그래서 그 때 호수에서 못 움직였던 거였구나아...."


엘리사와 멜리사는 그 안나의 얼음물 트라우마와 관련된 저마다의 경험에 쌓인 의문을 풀어낼 수 있었다. 그런 좋지 않은 몸을 이끌면서도, 안나는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몸을 아끼지 않았던 것이었다. 본의 아니게, 안나의 이야기로 테이블 위에는 얕은 슬픔이 깔렸다. 안나는 또 다시 아이들이 울까봐 걱정했다.


"하지만 너희들이 만든 얼음하고 눈사탕은 먹을 수 있잖아? 크게 걱정하지 마. 물론 아이스크림을 먹지 못하는 건 좀 슬프지만..."


"아이스크림? 아, 나 아이스크림도 먹고 싶어! 이따가 하나 먹으면 안 돼? 정말로 먹고싶단 말이야."


불현듯 아이스크림을 떠올린 멜리사가  안나에게 매달리듯 애원했고, 테이블이 멜리사의 움직임에 미세하게 기울어졌다.


"저, 저도 하나...먹을래요."


엘리사가 엉거주춤 손을 올리며 멜리사의 주장에 재청했다. 안나는 이 두 꼬마들이 아이스크림 이전에 주문한 음식들을 다 먹지 못할 거라 생각했다. 아니면 아이스크림 재료와 기기를 사서 집에서 직접 만드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아렌의 시계가 다시 돌아가려면 아직 일주일은 남아있었고, 아이스크림을 만드는 데 일주일은 걸리지 않을 터였다.


"그래 그럼...대신 언니 볼에 크림 묻히면 당분간 너희들이랑 같이 안자고 한나랑 같이 잘 거야. 알았지?"


안나는 크리스마스 당시에 있었던, 한때는 블루라운드 회계부서 직원이자 안나의 컷아웃이었고, 지금은 카나리아 카페의 사장이자 점장인 오로라가 가져온 케이크의 크림을 두 꼬마아이가 손가락으로 훑어 안나의 볼에 우스꽝스러운 광대 보조개를 만들었던 순간을 떠올렸다. 기분이 나쁘지 않았지만, 외출한 상태에서 비슷한 일을 겪으면 닦기가 난감해지기 때문이었다. 두 아이들도 그 때의 일을 기억하였는지 두 손으로 입을 막고, 엘리사는 쿡쿡, 멜리사는 푸픕 하고 간지러운 웃음을 참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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