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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메이크/팬픽] Whiskey Bonbon -16

ㅇㅇ(14.32) 2020.11.03 22:05:08
조회 376 추천 26 댓글 7




“저번에는 미안했어.”


이른 오전부터, 크리스토프가 가게에 모습을 비췄다. 도어벨 소리에 손님을 기대했던 안나는 대놓고 실망한 기색을 드러냈다.


“하마터면 폐차될 뻔했지 뭐야.”
“불법개조차량의 운명이란 게 그렇지.”
“그런데 어째 망하진 않았나봐?”
“그게 네 유언이니?”


내가 직접 너를 폐차시켜버리겠다는 눈빛을 마주하고서, 크리스토프가 재빨리 말을 주워 담았다.


“내 말은, 용케도 영업한다는 뜻이었어! 아, 이것도 아닌데!”
“아침댓바람부터 악담이나 퍼부을 거면 나가, 안 나가?”
“자, 잠깐만. 그럼 계속 장사하기로 마음을 돌린 거야?”


“아니면, 이미 라이언에게 넘어간 건가?” 그의 물음에 ‘신경 끄고 네 앞가림이나 해’라는 대꾸를 돌려주려던 안나였으나, 문득 머릿속에 의문 하나가 스쳤다. 그나저나 얘는 엘사의 이름을 어떻게 아는 거지? 그러고 보니 마켓홀에서도! 안나는 살벌한 표정을 풀고, 그를 회유하기 위해 달콤한 목소리를 동원했다. “친구야, 그냥 궁금해서 묻는 건데.” 크리스토프는 본능적으로 흠칫, 몸을 떨었다.


“혹시 넌 그 바텐더에 대해 전부터 알고 있었니?”
“......갑자기 그건 왜?”


하, 부정은 안 하시겠다? 너무도 괘씸한 나머지, 안나는 빗자루를 집어 들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몽땅 불지 못해!”
“나, 나도 그냥 듣기만 해서 자세히는 몰라!”
“그게 아는 거지, 모른다는 건 내가 할 말이야!”
“잠깐 유명했던 거야, 아주 잠깐!”

 

빗자루 타작을 요리조리 피하며 크리스토프가 목 놓아 외쳤다.


“그러니까 그게 뭐냐니까, 뜸들이지 말고 어서 말해!”
“직접 당해봤으니 대충은 알 거 아냐?”


‘직접 당한’ 사건이 꽤나 많았던 탓에 안나의 사고는 애먼 곳을 맴돌았다.


“겉만 멀쩡, 막말논란, 사기죄, 이 중 어떤 걸 말하는 거야?”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 널 하룻밤 상대로 가지고 놀았었다며!”


그새 잊었어? 크리스토프가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을 흘렸다.


“그 일은 내 착각...... 그런데, 뭐?”
“상대방 주장이 앞뒤가 안 맞아서 결국 헛소문으로 끝났다고 들었는데, 네 경우를 보니 다시 생각해봐야 할 것 같네.”
“나 말고도, 아니, 이미 놀아난 전력이 있었다고?”


바로 그때,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이 가게 안에 울려 퍼졌다.


“이게 뭐지?”
“내 핸드폰 벨소리야.”
“설마 너네 어머니 전화벨을 이걸로 등록했어?”
“당연히 아니지, 우리 엄마는 죠스 ost야.”


불꽃 효녀가 앞치마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냈다. 모르는 번호였다.


“잠시만, 통화 좀 할게....... 여보세요?”


전화를 받자, 안나의 태도는 곧 이두나를 대할 때와 마찬가지로 사근사근하게 바뀌었다.


“아, 네네...... 네! 아, 정말요. 네네, 두 시 말이죠. 네, 그럼요......  네. 알겠습니다.”


친구의 굽신 모드를 빤히 관찰하던 크리스토프는 통화가 끝나자마자 걱정스럽다는 듯이 물었다.


“은행에서 압류하러 온대?”
“자꾸 초치는 소리만 할래?”


주문 전화거든, 그것도 대량! 이게 얼마 만이람! 안나는 기쁨에 겨워 노래라도 한 곡(태어나서 처음으로~) 뽑고 싶은 심정이었다. 허나 그런 자신을 지켜보는 떨떠름한 표정에, 안나는 조금 전 일이 떠올랐다. 맞아, 내가 좋아하고 있을 때가 아닌데......


혹시 나만 몰랐지, 실제론 지금도 속고 있는 게 아닐까? 하지만 소문이란 것도 마냥 믿을 수 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 아직 쥐고 있는 단서가 부족해. “크리스!” 개를 훈련시키는 음성으로 안나가 그를 불렀다.


“명령이 있어.”
“이젠 부탁이라고도 안 하네.”
“엘사에 대한 정보가 필요해.”


얘는 나를 무슨 검색 엔진으로 보고 있나? 허나 감히 불만을 제기할 용기가 없는 관계로, 그는 에둘러 난색을 표했다.


“난 그 사람과 친하지도 않은 걸.”
“누가 직접 물어보래? 처음에 소문을 접한 다른 경로가 있을 거 아냐?”
“그건 좀, 자신이 없는데......”
“군소리 말고 알아오라면 알아 와!”
“넵.”


대답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멀뚱멀뚱 서있는 그에게 안나가 또 한 번 노성을 터뜨렸다. 지금 당장! 그제야 허둥지둥 밖을 나서는 그의 등에 대고 안나가 외쳤다.


“하나도 거르지 말고 그대로 나한테 보고해!”


크리스토프는 등 너머로 ‘오케이 사인’을 지어보였다. 영 못미더운 구석이 있는 그였기에, 사실은 스스로 탐문하고 싶었으나 현재로썬 주문이 우선이었다. 먼저 청소부터 해야 하나? 한동안 방치 상태였던 기구를 보며 안나가 생각했다. 갈 길이 멀구나. 입에선 한숨이 절로 새어나왔다.



*



정말이지 갈 길은 문자 그대로 멀었다. 하필이면 마을 끝에 있을 건 또 뭐람! 배달은 해본 적도 없거니와, 별다른 교통수단도 없이 모르는 곳을 찾아가는 과정은 예상보다 험난했다. 이젠 시간마저 촉박했다. 하마터면 늦겠다 싶어 안나는 가나슈 타르트가 든 상자를 두 팔로 애지중지 껴안고, 윗부분을 턱으로 고정한 채 냅다 뛰기 시작했다.


좋아, 저기만 돌면 금방이다! 모퉁이를 앞에 두고 천천히 속도를 줄이던 중, 반대편에서 횡단보도 신호를 기다리고 있는 여자에게 눈이 갔다. 거리가 꽤 멀었지만 누구인지 하나는 분명했다.


“엘사?”


아무리 동네가 좁다지만 이건 너무한 거 아냐? 게다가 아직 의심을 거두지 못한 지라 반가운 만남이라곤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대론 모퉁이 앞에서 마주칠 게 뻔했다. 배달은 가야겠고, 어떡하지? 안나는 제자리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잔머리를 쥐어짰다. 그냥 직선거리로 돌파할까? 남의 집 정원 울타리를 뛰어넘는 상상과 함께 사유지침입죄에 대해 고민하고 있자, 그새 신호가 바뀌었는지 엘사가 맞은편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안 돼!


제발 못 본 척 지나가라, 제발! 그러나 엘사는 이미 전부터 보고 있었다는 듯 자연스럽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그리고선 웃음과 함께 덧붙였다.


“바빠 보이네요.”
“......그러는 그 쪽은 한가해 보이네요.”


다소 퉁명스러운 인사가 돌아왔으나, 엘사는 계속해서 입을 놀렸다.


“자기 몸보다 큰 식량을 개미가 옮기고 있는 걸 보면, 가던 길도 잠시 멈추게 되잖아요.”
“혹시 그 앞에서 알짱거리다 쏘였다는 말은 아직 못 들어보셨어요?”


일개미가 짜증을 냈다. 차츰 드리워진 위협에도 베짱이는 가벼이 응수했다.


“저는 앞이 아니라 옆에서 걷고 있으니 안전하겠네요.”
“한 발자국이라도 내 앞에 오기만 해봐, 진짜 가만 안 둔다.”
“그러면 타르트가 흐트러질 것 같은데 괜찮겠어요?”
“......”


대답 대신 안나는 폭신하게 쌓인 눈더미 위에 박스를 올려두고, 자유를 되찾은 손으로 야무지게 눈을 뭉쳤다. 엘사는 뒤이을 상황을 직감하고서 부리나케 도망쳤으나, 어디서 짱돌 좀 던져 본 제구력으로 안나가 목표물(그것도 뒷덜미에 정확히)에 눈덩이를 명중시켰다.


“앗, 차가워!”


깜짝 놀라 걸음을 멈추자 이때다 하고 다른 탄환이 쏟아졌다. 그렇게 속수무책으로 당하던 중, 어느새 곁에 다가온 안나가 마지막 일격으로 꽁꽁 언 손을 목덜미에 가져다 댔다. 맨살에 파고드는 냉기와 간지러움에 엘사는 곧장 백기를 들었다. 미안, 미안, 항복할게요! 그러자 응징이 멈췄고, 거친 숨을 고르던 엘사는 문득 억울한 마음에 항변했다.


“그런데 미안할 일인가? 저는 그냥 인사했을 뿐이잖아요.”
“인사만 했냐고요.”
“만난 김에 얘기도 좀 나눌 수 있는 거 아닌가요?”
“바쁘니까 그렇죠! 맞아, 이럴 때가 아닌데!”


놀아줬으니까, 이젠 따라오지 마세요! 허나 앙칼진 경고에도 불구하고 엘사가 안나의 뒤를 졸졸 쫓아왔다. 따라오지 말라니까! 안나가 캬악 소리를 내며 위협했다.


“신고한다!”
“......친절한 인사법이란 걸 제 동물의 숲 주민들에게 배워보지 않겠어요? 그나저나, 무슨 명목으로요?”
“아니, 맨날 가지고 놀더니 이젠 대놓고 게임 캐릭터 취급하네. 신경 끄고 갈 길 가시라구요, 업무방해로 고소당하고 싶지 않으면!”
“마침 저도 이 쪽에 볼 일이 있답니다, 미스 자의식 과잉.”


그냥 말을 말자고 생각했는지 안나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러자 빨라진 속도에 상자 더미가 위태로이 흔들렸다. 쓰러지지 않게 손을 뻗으며 엘사가 물었다.


“도와드릴까요?”


어딜! 더 이상 다가오면 물어버리겠단 기세로 안나가 이를 딱딱거렸다. 엘사는 내밀었던 손을 머쓱하게 거뒀다.


“얼마나 중요한 물건인데!”
“제가 도와준댔지, 훔쳐간다고 했었나요?”
“우리 고객님 말고는 아무도 못 만져!”
“그러다 엎어지면 우리 고객님께서 슬퍼하실 것 같은데요. 그러니 나눠 들어요.”
“하! 여기에 뭐가 들었는지 알아요? 그 쪽이 보기만 해도 까무러치는 초콜릿이거든요!”


이만큼이나 있으니 무섭지, 응? 에비, 겁을 주려는지 웬통 들이대는 탓에, 불쌍한 엘사의 콧대가 박스와 부딪히고 말았다. 그래요, 무서워 죽겠다. 엘사가 코를 잡은 채 투덜거렸다. 빨간 망토는 늑대에게서 지켜낸 초콜릿을 뽐내듯 의기양양하게 앞으로 나아갔다.


허나 목적지에 도착하자 새로운 난관에 봉착했다. 손이 없는데 초인종을 어떻게 누르지? 안나는 급한 대로 이마를 버튼에 들이댔다. 엘사는 ‘몸이 안 되면 머리를 쓰자’를 실천 중인 안나를 구경하다, 애처로워 더는 못 봐주겠는지 현관문을 열어주었다.


“들어오세요.”


응? 아직도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그녀를 위해, 엘사는 조금 더 코맹맹이 힌트를 주기로 했다.


“초콜릿 타르트, 두 시까지 배달해주실 수 있나요?”


뭐? 안나는 충격에 휩싸였다. 티타임 디저트에 뛰어난 안목을 가진 우리 고객님이, 디저트 철자는 아는지도 모르겠는 이 인간이었다고? 안나는 배트맨의 정체가 브루스 웨인이란 사실을 목격한 고담 시티 시민이 된 기분이었다. 아냐, 말도 안 돼, 혹시 그건가? 맞아! 안나가 펄쩍 뛰어올랐다.


“그럼 장난 전화였어요?”
“설마요, 이번 다과 담당이 저였거든요.”


분명 ‘다과? 담당? 네가?’ 따위의 생각을 하고 있을 게 뻔한 안나를 보며, 엘사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무슨 배짱으로 장난 전화를 하겠어......


“잠깐만, 그럼 여기가 당신 집이에요?”
“아뇨, 아는 분 댁이에요. 저희 모임 장소고요.”
“모임?”
“북클럽이요, 당신 아버지도 오시는.”


이젠 충격의 소용돌이에서 영영 헤어나지 못할 것 같은 안나였다. 타르트 상자를 가리키며, 엘사가 조금 뒤끝이 담긴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이젠 만져도 될까요?”
“에헴, 에헴!”


수상한 타이밍에 북클럽 회장이 안 쪽에서 등장하자, 켕기는 구석이 전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서둘러 몸을 떼어놓았다. 이럼 곤란하다는 듯 덥수룩한 턱수염을 매만지며 회장이 우물쭈물 입을 열었다.


“음, 저기, 두 사람의 촉감놀이를? 방해해서 미안하지만, 슬슬 토론을 시작할 시간이에요.”
“아니, 잘못 생각하셨어요, 박스! 박스 말이에요! 아까부터 만져보지 않곤 못 배기겠나 봐요!”
“네? 그렇게 말하면 제가 무슨 박스 페티시가 있다고 생각할 거 아니에요!”
“뭐? 아무도 그런 단어를 만들어서까지 생각 안 하거든요! 니가 무슨 고양이야?”
“하, 고양이는 너겠죠! 나만 보면 깨물고 때리고 할퀴고!”
“할퀸 적은 없거든요! 어디 그럼, 말이 나왔으니 이 참에 당해보시든가!”


저, 다들 기다리고 있는데...... 도무지 두 사람의 사랑싸움에? 끼어들 수 없어 쩔쩔 매고 있는 턱수염 아저씨의 뒤로 콧수염 아저씨가 나타났다. 어디서 많이 들어봄직한 목소리인걸? 앞 사람의 덩치에 가려 생난리통을 볼 수 없었던 아그나르가 그에게 물었다.


“거기 무슨 일 있나요?”
“라이언 양이 야생 고양이에게 공격받고 있는 것 같아요.”
“저는 야생도 아니고 고양이도 아니에요!”
“도와주세요, 베르나르!”


지금이다! 엘사는 잽싸게 원조 고양이 집사의 뒤로 몸을 숨겼다.


“라이언 양, 이젠 제 이름을 외워주실 때도...... 잠깐, 안나?”
“아그나르, 아니, 아빠?”


이건 무슨 일이지? 난데없는 가족 상봉 시퀀스의 냄새를 맡고 다른 회원들도 우루루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마침 오늘의 모임 주제도 역시 ‘막장 이야기’였기에 몰입감은 배가 되었다.


“우리 딸, 여긴 어쩐 일이야? 게다가 또 라이언 양과...... (어울리고 있다니)”
“맞아요, 또 저를...... (쥐어패고 있어요)”
“저, 저는 그냥 배달하러 온 거예요!”


그러고 보니 배달부랑 이런 저런 연이 생기는 이야기가 많지 않나요? 맞아요, 맞아. 관객석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맞기는 뭐가 맞아! 안나의 눈에서 노기가 뿜어져 나왔다. 하지만 해명에도 불구하고 아그나르는 여전히 납득할 수 없었다.


“배달? 네가 직접?”
“뭐, 겸사겸사......”
“그동안 가게는 어쩌고? 다른 사람이라도 구한 거니?”
“음......”


안나는 가게가 망하기 일보 직전이라, 그런 걱정은 할 필요조차 없다는 진실을 밝혀 괜한 심려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 뜸을 들이는 사이 그녀가 서둘러 변명을 생각했다. 1. 시대에 맞춰 무인 경영 시스템을 도입했어요, 2. 사실 지금 보고 계신 건 제 잔상이랍니다. 아, 안 돼, 당분이 모자라서 머리가 안 돌아가! 하지만 문제 속에 답이 있다고 했던가? 조금 전 아그나르의 질문과, 그의 뒤에 얄밉게 숨어있는 엘사를 보자 그럴싸한 구실이 떠올랐다.


“마, 맞아요. 같이 일하는 사람이 있어요.”

“정말? 처음 듣는 얘긴데.”
“그러게요, 언제부터?”


눈치라곤 무거워서 집에 두고 다니는 것처럼 구는 엘사를 째려보며 안나가 말을 이어나갔다. 제발 알아들어라, 좀!


“며칠 전에 계약서... 비슷한 것도 썼어요.”


순진무구하기 짝이 없는 딸의 입에서 계약서라는 말이 나오자 아그나르의 수심은 더욱 짙어졌다. 웬 한량 같은 놈한테 속고 있는 건 아니겠지? 허나 어느 정도는 사실이란 점이 이 비극을 더욱 강조했다.


“엄마랑 먼저 얘기는 해 봤니? 아직 못 했으면 내가 대신......”
“아니에요, 그러실 필요 없어요!”


안나가 다급히 손사래를 쳤다.


“그냥 말을 잘 못 알아들어서 조금 답답할 뿐이에요. 네, 당장 힘든 거라곤 그거예요.”
“아하, 혹시 외국인?”
“저런, 가급적 천천히 말하는 편이 좋지 않을까요?”
“그-것-참-좋-은-생-각-이-네-요.”


느릿느릿 말해봤자, 정작 당사자는 이해하지 못한 듯 제 귓가만 긁적일 따름이었다. 이젠 알아들으리란 기대는 포기하고 속으로 욕이나 퍼붓고 있으려니, 아그나르가 상냥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그래도 사람이 늘었다니 다행이구나, 혼자서 꾸려나가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
“그렇죠, 아니, 그랬죠.”
“그동안은 바빠서 집에 얼굴도 잘 안 보여 줬잖아, 안부도 가끔 전하고.”
“하하......”


갑자기 독서회에서 가족의 도리 청문회로 변모한 분위기에 안나는 숨이 턱턱 막혔다. 몽땅 거짓말은 아니니까 괜찮아, 그럼.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여 볼 요량이었으나, 이어진 아버지의 부탁에 죄책감은 더더욱 불어났다.  


“언제 집에 데려와서 소개해주지 않겠니?”


안나는 비명이 터져 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았다.


“누구요, 설마 같이 일한다는 사람은 아니죠?”
“왜 아니겠어. 그렇지, 크리스마스는 어때?”


‘그렇지’보다, ‘하필이면’이란 단어가 더욱 와 닿았던 안나가 길길이 날뛰었다.


“지금 그 사람을 초대하란 말씀이세요? 그것도 크리스마스에?”
“한 번 물어봐 줄래?
“물어보고 말고 할 것도 없어요! 일단, 음, 많은 걸 건너뛰고서라도, 그래, 부담스럽잖아요!”


뒤에서 회원들의 토론이 벌어졌다. “맞아, 좀 그렇지”. “들어보니까 같이 일한 지도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나라면 물어본 다음날부터 서서히 그만둔다는 복선을 깔겠어.”. 허나 반대에도 굴하지 않고 아그나르는 꿋꿋이 본인의 의견을 펼쳤다.


“하지만 외국인이잖니. 많이 외로울 거야.”


그의 말에 오셀로를 두는 것마냥 판도가 뒤집히기 시작했다. “그런가?”, “외국인이면 어쩔 수 없나?”, “그것도 사람 나름 아닐까요?”. 주장에 힘을 얻은 아그나르는 가만히 있던 엘사에게도 불쑥 동의를 구했다.


“라이언 양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저요? 음, 저라면......”


그녀의 머릿속에선 ‘차일드 가와 보내는 하루’라는 제목의 호러영화가 상영되었다.


“밖엔 좀비가 돌아다닌다고 여기면서 한동안 집에만 있을 거예요.”
“그래요? 이게 바로 세대 차이인가?”
“경험의 유무 차이라고 해두죠.”
“다 필요 없어요, 아니, 아빠! 갑자기 이렇게 말씀드려서 정말 죄송하지만, 무엇보다 사실 제가 어려울 것 같아요. 그 날은 좀......”
   
그러자 후두둑 눈물을 쏟아내며 ‘상대는 누구냐’를 외칠 것만 같은 주책 아버지와 눈이 마주치고서, 안나가 서둘러 해명을 덧붙였다.


“일 때문이에요, 일! 빠져나오지 못할 일의 늪에 누가 저를 강제로 집어넣었어요, 내 말 맞죠, 엘사?”
“그냥 예정에 없던 일이 생겼다고 말하면 어디가 덧나나요?”
“빨리 말해!”
“마, 맞아요. 따님께서 그 주에 워낙 바쁘시거든요.”


아직 충격의 여파에서 벗어나지 못한 아그나르를 제외하고서, 모임 회원들은 사뭇 의문을 가졌다. 애초에 엘사는 그걸 어떻게 알고 있지? 그렇지만 구태여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조금 뒤 눈에 띄게 기운이 죽은 아그나르가 웅얼웅얼 말했다.


“우리 딸이 일하느라 바쁘다는데 어쩔 수 없지, 그럼.”
“죄송해요, 신년 때는 꼭......”
“그럼 이제 우리 가족은 내년이 되어서야 볼 수 있는 건가?”
“대신 더 자주 연락할게요.”
“저기...... 두 사람의 면회시간을? 방해해서 죄송합니다만......”


이제는 정말 시작해야 하거든요. 모임 회장은 애타는 눈빛으로 부녀를 바라봤다. 저, 저는 그럼 이제 가볼게요. 그렇게 회원들의 배웅을 받으며 떠나려던 찰나, 엘사가 그녀를 불러 세웠다. 안나, 잠깐만요.


“뒤에 시간 있어요?”


이미 비슷한 수법에 당한 적이 있는 안나였으나, 진지한 표정의 엘사만 마주하면 그렇게 많던 경계심은 솜사탕처럼 녹아내리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저 뒤에서 아버지가 보고 있을 거란 사실이 그녀를 정신차리게 했다. 안나는 애써 침착을 유지하며 대답을 돌려주었다.


“......아마 그럴걸요, 왜요?”
“그렇구나, 저는 끝나고 일하러 갈 건데.”
“왜 물어봤냐고, 그럼!”


‘시간 있어? 그럼 아껴 써!’라는 말이 순간적으로 떠오른 안나가 폭발했다. 부디 말을 끝까지 들어주세요...... 예기치 못한 소음폭탄에 먹먹해진 귀를 주무르며 엘사가 말을 이었다.


“혹시 괜찮으면, 바에 잠깐 들러주실래요?”


메뉴도 그렇고 이것저것 정해야 할 게 많은데, 문자보다는 직접 얘기하는 게 편할 것 같아서요. 엘사가 설명을 덧붙였다. 안나는 ‘맞는 말이지만 니가 말하니 영 찜찜하다’라는 표정으로 느릿느릿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엘사도 역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또 봐요.”


그렇게 평화로운 마무리가 찾아오나 싶었지만,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듯 엘사의 뒤로 아그나르가 스윽 접근했다. 막장 이야기 2부가 시작될 조짐에 관중들이 또다시 몰려들었다. 허나 그들이 기대한, ‘이 돈 받고 우리 딸은 그만 잊게!’ 역할을 수행하기엔 아그나르는 너무도 여렸다. 그는 파들파들 떨리는 입술로 애써 눈을 돌리려 했던 현실과 맞섰다. “전부터 신경 쓰였지만 제 딸과는......”


“대체 무슨 관계이신 거죠?”


그러자 회원들은 숨을 삼키며 다음 장면을 기대했다. 이 동네에 7대 불가사의가 있다면, 혼자서 5대 불가사의까지 차지할 저 엘사의 반응이란 무엇일까? ‘저희 그냥, 사랑하게 놔두세요!’ 그것도 아니면, ‘궁금하신가요, 아.버.님?’. 허나 여전히 미소를 머금은 채로, 엘사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 어떤 것도 아니었다.


“제 새로운 파트너예요.”


새파랗게 질린 아그나르의 안색이 눈에 들어와도, 엘사는 자신이 ‘비즈니스’를 생략했다는 사실을 눈치 채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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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화에서 메뉴만 얼른 정하고...... 18화부터 진짜... 마켓편 쓸 거다......진짜로.........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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