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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보인70년사] 보인고는 왜 학교를 이전했을까?

ㅇㅇ(192.42) 2023.02.25 21:2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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輔仁七十年史 (보인70년사)

第5篇 跳躍期 (제5편 도약기)

第1章 雄飛의 꿈은 實現되다 (제1장 웅비의 꿈은 실현되다)


① 學校(학교) 移轉(이전)의 動機(동기)

왜, 학교를 이전시키려 했을까. 內需洞(내수동) 住民(주민)들의 그처럼의 熱(열)과 誠(성)으로 이루어진, 그리고 오늘에 이르도록 그처럼 끈질기게 끌고 온 輔仁(보인)을, 왜 內需古巢(내수고소)로부터 他處(타처)로 옮기려 했을까. 야주개(夜珠峴) 住民(주민)들을 뒤에 두고 다른 곳으로 옮기려 했을까. 그것은 한 마디로 말해서 "發展(발전)을 위한 不得已(부득이)한 移轉(이전)"이라 하겠다.

사실 內需洞(내수동) 주민들이 開校(개교) 當時(당시), 輔仁(보인)을 통하여 바랬던 것은 開化(개화)요, 祖國獨立(조국독립)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開化(개화)도 되고 獨立(독립)도 되었다. 앞으로의 課題(과제)는 輔仁(보인)의 大躍進(대약진)뿐이다. 이것은 建學理念(건학이념)을 구현하는 目標(목표)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사정으로 1960년대로 접어들면서부터 學校移轉問題(학교이전문제)가 論議(논의)되기 시작하였다. 內需洞(내수동)은 立地條件(입지조건)으로 보아 發展(발전)을 기약할 수 없는 宿命(숙명)의 땅이므로 移轉(이전)을 논의하게 된 것은 自然(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하였다.

그뿐아니라, 1960년대로 접어들면서 國民(국민)들의 사고방법은 매우 달라졌다. 實業系(실업계) 학교보다는 人文系(인문계) 학교를 선택하여 大學校(대학교)에 가겠다는 것이 대다수 사람들의 생각이었다. 實業系(실업계) 학교에 다니면 大學入學(대학입학) 試驗科目(시험과목)을 반밖에 배우지 못하고, 實業科目(실업과목)을 배우게 되어 人文系(인문계) 高等學校(고등학교) 출신보다 實力差(실력차)가 생기게 되므로 人文系(인문계) 학과를 찾게 된 것이다. 歲月(세월)이 흐름에 따라 국민들의 생각이 功利的(공리적)인 면에 치우치게 된 것이라고나 할까. 이것은 1908년대 輔仁(보인) 開校時節(개교시절)과는 너무도 다른 功利的(공리적) 敎育觀(교육관)이기도 하다. 日本(일본)의 前(전) 首相(수상) 岸 信介(기시 노부스케)는 "한국의 1차·2차·3차·4차 5개년경제계획은 무섭지 않다. 그러나 한국의 敎育熱(교육열)은 무섭다."라고 하였다. 하바드大學의 라이샤와 敎授(교수)는 "한국민의 敎育熱(교육열)은 世界(세계)에 冠絕(관절)한다. 南北(남북) 美洲 (미주)든, 유우럽이든, 亞細亞(아세아)든, 아프리카든, 濠洲(호주)든 세계 어느 곳에서도 한국인과 같은 강한 敎育熱(교육열)을 가진 국민은 찾아 볼 수 없다. 한국의 가장 큰 武器(무기)는 국민들의 敎育熱(교육열)이다."라고 말하였듯이 국민들은 子女(자녀)들의 교육을 위해서는 祖上(조상) 傳來(전래)의 田畓(전답)도 아낌없이 팔아 공부를 시키고 있는 실정이니, 무서운 교육열이라 하겠다. 그러나 開化期(개화기)의 순수한 교육열에 비하면 너무도 利己的(이기적) 경향을 가진 교육열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傾向(경향) 속에서 괴로움을 겪은 것은 輔仁(보인)만은 아니었다. 어떤 實業學校(실업학교)는 人文系(인문계) 학교로 둔갑하였고, 어떤 학교는 門(문)을 닫기도 하였다. 志願者(지원자)가 적고 또한 中途(중도) 離脫(이탈)하는 학생들이 늘어나서 학교를 운영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李鍾國(이종국) 理事長(이사장)은 "國民(국민)들이 이처럼 人文系(인문계) 학교를 갈망하고 實業學校(실업학교)를 마다할진대 깨끗이 輔仁(보인)을 國家(국가)에 바치는 수 밖에 없다."고까지 말하였다. 李鍾國(이종국) 理事長(이사장)은 그처럼 애써서 만든 實業學校(실업학교) 輔仁(보인)을 人文系(인문계) 학교로 탈바꿈을 할 수는 없었기에 國家(국가)에 바치겠다고까지 말한 것이다. 國民(국민)들의 일반적인 思考方法(사고방법)은 商業學校(상업학교)를 나와 봤댔자 會社(회사) 社員(사원)밖에 더 되겠는가, 人文系(인문계) 학교를 거쳐서 大學(대학)을 나오면 장차 官界(관계)·政界(정계)에 나아가 一躍(일약) 名士(명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 국민들의 通念(통념)이었으니, 實業系(실업계) 학교의 운영은 실로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國民感情(국민감정)이 이와 같이 되었다 하더라도 輔仁(보인)만은 創學精神(창학정신)을 否定(부정)하면서까지 變身(변신)할 수는 없었다. 萬難(만난)을 뚫고 이겨내려는 것이 輔仁(보인)의 傳統精神(전통정신)이며 庶民教育(서민교육)을 바탕으로 하는 大衆敎育(대중교육)이 創學精神(창학정신)이었기에 校地(교지)를 옮겨서라도 輔仁(보인)을 再建(재건)하려 하였다. 李鍾國(이종국) 理事長(이사장)은 國定敎科書株式會社(국정교과서주식회사) 常任(상임) 重役(중역)으로 있었기 때문에 직접 校地踏査(교지답사)에 나서지는 못하고, 대신 韓百鎬(한백호) 교장에게 校地物色(교지물색)을 의뢰하였다. 1960년 3월 西大門區(서대문구) 峴底洞(현저동) 李載元(이재원)의 소개로 仁旺山(인왕산) 밑 아카시아 밭을 踏査(답사)한 것이 그 첫번째 校地物色(교지물색)이었다. 李鍾國(이종국) 理事長(이사장)에게 地形(지형)을 설명하였더니 약간 경사진 것이 흠이나 그런대로 괜찮겠다는 이야기였으나, 1960년 學生義擧(학생의거)가 나고 政權(정권)이 바뀌게 되자 學校(학교) 移轉問題(이전문제)도 주춤하게 되었다.

그후 民主黨(민주당) 政權(정권)이 들어서면서 勉(면) 博士(박사)가 國務總理(국무총리)에 취임하였는데, 張(장) 博士(박사)는 李鍾國(이종국) 理事長(이사장)과는 知己之友(지기지우). 張(장) 博士(박사)의 힘을 빌어 보다 나은 校地(교지)를 物色(물색)해 보려고 했던 것도 仁旺山(인왕산) 밑 아카시아 밭을 포기하게 된 이유의 하나였다.

그러나 民主黨(민주당) 政權(정권)이 9개월만에 무너지고, 5·16革命(혁명)으로 情勢(정세)가 변화되니 校地物色(교지물색) 방법은 白紙化(백지화)되어 輔仁(보인) 스스로의 校地(교지)를 찾아다니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1962년 3월 弘濟3洞(홍제3동)에 1만3千坪(1만3천평)의 땅을 서울特別市(서울특별시)로부터 賃貸(임대)하여 1년간 賃貸料(임대료) 100만원을 낸 일이 있는데, 워낙 값이 비싸서 拂下申請(불하신청)을 하지도 못한 채 손을 떼고 말았다. 그후 俞元根(유원근) 교장, 尹起泰(윤기태) 2部교감(2부교감), 韓百春(한백춘) 서무주임 등 세 분이 西大門區(서대문구) 龜山洞(구산동) 所在(소재)의 林野(임야) 및 垈地(대지) 8천평을 踏査(답사)한 적이 있었는데, 그 때 踏査(답사)한 분들이 李鍾國(이종국) 理事長(이사장)께 "地形(지형)이 너무 가파라서 校地(교지)로 쓸모가 적다."고 報告(보고)하여, 이것도 踏査(답사)로 끝나고 말았다.

이처럼 校地物色(교지물색)의 노력은 오래 전부터 시작되었으나 이렇다할 성과없이 끌어 오다가 1967년에 李奭熙(이석희) 선생이 庶務課長(서무과장)에 就任(취임)하여 校地物色(교지물색)과 學校(학교) 移轉關係(이전관계) 業務(업무)에 補佐的(보좌적) 역할을 하였다.

皇甫仁淑(황보인숙) 理事長(이사장)도 前任者(전임자)의 뜻을 이어 輔仁(보인) 發展(발전)의 꿈을 안고 禾谷洞(화곡동)·巨餘洞(거여동)·可樂洞(가락동) 등 江南地區(강남지구) 여러 곳을 踏査(답사)하면서 새 校地物色(교지물색)에 힘썼다.

飛躍(비약)의 꿈은 마침내 李慶淑(이경숙) 理事長代(이사장대)에 이루어지게 되었다. 새 校地(교지)가 결정되기까지에는 이렇듯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었다.


③ 校地物色(교지물색)

政府(정부)에서는 서울의 人口(인구)가 7백만이 넘게 되자, 人口分散策(인구분산책)으로, 漢江(한강) 남쪽을 衛星都市(위성도시)로 만들기 위하여 江南地域(강남지역) 開發(개발)에 중점을 두게 되었다. 江北(강북)에 있는 學校(학교)를 江南(강남)·永東地區(영동지구)로 移轉(이전)시키려는 것은 人口分散策(인구분산책)의 基幹方針(기간방침)이었다. 江北(강북)에 있는 16개 中·高等學校(중·고등학교)를 江南地區(강남지구)로 移轉(이전)시키려는 案(안)은 江北(강북)의 人口(인구) 50만명을 分散(분산)시키는 효과가 있으리라고 假定(가정)하고 立案(입안)한 政策(정책)이라고 한다.

1977년 4월 18일 서울의 6大新聞(6대신문)은 輔仁中·高等學校(보인중·고등학교)가 江南地區(강남지구) 千戶洞(천호동)으로 이전하게 되었다고 일제히 보도하였다. 땅값은 치솟기 시작하였다.

사실 輔仁(보인)은 1965년부터 學校移轉計劃(학교이전계획)을 세우고 多方面(다방면)으로 校地(교지)를 物色(물색)하고 있었는데 이 校地物色(교지물색)은 李鍾國(이종국) 理事長(이사장)이 國定敎科書株式會社(국정교과서주식회사) 監事(감사)로 있을 때부터 構想中(구상중)이던 것이었다. 輔仁商高(보인상고) 2部(2부)(夜間部(야간부))의 尹起泰(윤기태) 校監(교감)이 李鍾國(이종국) 理事長(이사장)의 분부에 따라 1966년 5월에 水色(수색)·禾谷洞(화곡동)·上溪洞(상계동)·鹽田洞(염전동(?))·千戶洞(천호동) 등 여러 곳을 답사한 적이 있다.

그 후부터는 1967년 1월 16일에 부임한 李奭熙(이석희) 庶務課長(서무과장)이 校地(교지)의 物色(물색)을 계속하게 되었다.

그러나 校地物色(교지물색)은 그리 쉬운 것은 아니었다. 마음에 드는 校地(교지)가 物色(물색)되었어도 買收資金(매수자금)이 없었으므로, 부득이 內需洞(내수동) 校舍(교사)와 校地(교지)를 팔아야만 새로운 校地(교지)를 마련하고 建物(건물)을 세울 수 있었는데, 이것이 잘되지 않아서 時日(시일)만 흘러간 것이다.

다행히 1969년 8월 11일, 城北區(성북구) 上溪洞(상계동) 山(산) 105의 14번지 林野(임야) 6,000坪(평)을 買收(매수)하였다.

그러나 校地(교지)로는 적합하지 않았다. 人口密度(인구밀도)가 한산한데다가 傾斜(경사)가 가파른 山(산)이어서 立地條件(입지조건)이 좋지않아 그대로 山林(산림) 綠化地(녹화지)로 쓰는 수 밖에 없었다.

이와 같은 사정으로 校地(교지)를 마련하지 못하고 있는 동안 서울특별시 교육위원회로부터는 누차 學校(학교)를 移轉(이전)하라는 通報(통보)를 해왔다. 그러던 중 1976년 12월엔 교육위원회로부터 1978년말까지 江南地域(강남지역)으로 學校(학교)를 移轉(이전)하라는 期限付(기한부) 지시가 내려와 校地物色(교지물색)에 拍車(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校地(교지) 후보지로는 馬川洞(마천동)·巨餘洞(거여동)·梧琴洞(오금동)·遁村洞(둔촌동)·道谷洞(도곡동)·開浦洞(개포동)·文井洞(문정동)·可樂洞(가락동)·禾谷洞(화곡동) 등이 지목되어 답사해본 결과 永東地區(영동지구)의 開浦洞(개포동)이 한 때 유망지로 나타났었다.

이러한 校地問題(교지문제)로 하여 金容九(김용구) 理事(이사)가 鄭光謨(정광모) 선생과 같이 郭厚燮(곽후섭) 서울특별시 제2副市長(제2부시장)을 만난 자리에서 제2副市長(제2부시장)은 開浦洞(개포동)에 難色(난색)을 표명하고 巨餘洞(거여동)을 勸(권)하였다. 開浦洞(개포동)은 地價(지가)가 높아서 좀처럼 들어가기가 힘들었던 것이 사실이다. 이리하여 巨餘洞(거여동) 山(산) 23의 6번지 외 15 筆地(필지)의 땅 1만 1백평을 學校敷地(학교부지)로 사용하겠다고 具滋春(구자춘) 서울특별시장에게 신청서를 낸 것이 1977년 4월 15일의 일. — 이 校地(교지) 申請地番(신청지번)이 서울특별시 公示(공시) 제105호로 허가되어 校地(교지)로 채택하게 되었다.

땅값은 坪當(평당) 5천 5백원에서 6천원까지 주고 샀는데 일부 땅은 地主(지주)가 賣渡拒否(매도거부)를 함으로써 買收(매수)하지 못하고 7,343평만 매수하였는데, 이 校地(교지) 買收費(매수비)와 建坪(건평) 1,500평의 건축비는 大一興業(대일흥업) 代表理事(대표이사) 李祥烘(이상홍)이 부담키로하고 輔仁(보인)은 그 代價(대가)로 內需洞(내수동) 本校舍(본교사) 建坪(건평) 1,700평과 垈地(대지) 1,300평을 大一興業(대일흥업)에 넘기기로 한 것이다.


⑤ 巨餘洞(거여동)을 選擇(선택)하기까지

서울特別市(서울특별시)에서는 江北(강북)의 人口(인구)를 疏開(소개)하기 위하여 江北(강북)의 16個(16개) 中·高等學校(중·고등학교)를 江南(강남)으로 移轉(이전)시킬 것을 內定(내정)하고, 이들 학교에 移轉(이전)을 종용하였다. 輔仁(보인)도 移轉對象(이전대상)의 학교였음은 말할 것도 없다.

이러한 與件(여건) 밑에서 輔仁(보인)은, 1977년 4월 5일 具滋春(구자춘) 서울特別市長(서울특별시장)에게 內需洞(내수동) 本舍(본사) 및 校地(교지) 賣渡(매도) 알선과 新本舍(신교사) 建立地(건립지) 주선을 의뢰하였다. 그러나 都市整備局(도시정비국) 洪鍚哲(홍양철) 局長(국장)으로부터 內需洞(내수동) 本校舍(본교사) 校地(교지)가 不過(불과) 1,356坪(평) 밖에 되지 않는데다가 都市計劃(도시계획)에 의하여 道路(도로)로 사용될 面積(면적)을 빼면 약 900坪(평) 밖에 되지 못하므로 大企業體(대기업체)에서는 별다른 關心(관심)을 갖고 있지 않다는 뜻을 전해 왔다.

그러던 차에 동년 10월 초에 現代建設株式會社(현대건설주식회사)로부터 1억 8천만원에 팔 의향이 있느냐고 물어 왔다. 그러나, 그 정도의 금액으로는 校地(교지)와 校舍(교사)를 마련할 수가 없어서 拒絶(거절)하였다. 그 후 동년 12월 말경에 大一興產株式會社(대일흥산주식회사)로부터 校舍(교사) 賣買(매매) 교섭이 왔다.

때마침 1977년 新年(신년) 區廳(구청) 巡視(순시)를 하던 具滋春(구자춘) 서울특별시장이 千戶出張所(천호출장소)에 들렸을 때, 千戶地區(천호지구) 交通對策委員會(교통대책위원회)에서는 巨餘洞(거여동)·馬川洞(마천동)에 거주하는 학생들이 交通難(교통난)으로 고통을 받고 있으니 巨餘(거여)·馬川(마천) 地域(지역)에 버스를 增車(증차)해주기 바란다고 具市長(구시장)에게 建議(건의)하였다. 이 때까지만 하여도 巨餘地區(거여지구) 주민들과 千戶出張所(천호출장소)에서는 학교 유치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하고 있지 않았다.

이러한 建議(건의)를 받은 具市長(구시장)은 "學校(학교)를 유치하면 交通難(교통난)은 자연 해소되지 않겠느냐"고 反問(반문)하였다고 한다.具市長(구시장) 말에 힌트를 얻은 千戶出張所(천호출장소) 李淳鎔(이순용) 所長(소장)은 巨餘(거여)·馬川(마천)·可樂(가락)·長旨(장지) 등 各洞(각동)의 中央要地(중앙요지)로 볼 수 있는 巨餘洞(거여동) 山(산) 23의 6번지 外(외) 15筆地(필지) 1만 1백평의 林野(임야)를 校地(교지) 垈地(대지)로 區劃(구획)하고, 서울特別市(서울특별시)에 提出(제출)하였다.

이런 일이 있은 후, 移轉入(이전입) 希望校(희망교)를 選定(선정)하게되자, 다른 여러 학교의 理事長(이사장)들이 이 곳을 踏査(답사)하였다고 한다. 輔仁(보인)도 李慶淑(이경숙) 理事長(이사장), 金光熙(김광희) 學校長(학교장), 崔秉七(최병칠) 中校長(중교장), 李奭熙(이석희) 庶務課長(서무과장)이 踏査(답사)하였다. 다른 학교 理事長(이사장)들은 南漢山城(남한산성) 밑이라느니 山(산)으로 막힌 곳이라느니 하면서 주저하였다.

그러나 輔仁(보인)의 立場(입장)에서 보면 南漢山城(남한산성) 밑이라든지 山(산)으로 막힌 곳이라는 것이 問題(문제)가 아니었다. 이 곳은 故(고) 皇甫仁淑(황보인숙) 理事長(이사장)이 生前(생전)에 校地(교지)를 物色(물색)하면서 수차 踏査(답사)한 일이 있었던 곳으로, 수차 답사한 이유는 巨餘洞(거여동)과 같은 脆弱地區(취약지구)로 학교를 옮기는 것이 더욱 敎育的(교육적) 意義(의의)가 있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실 이 地域(지역)에는 10만이 넘는 사람이 살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男子中·高等敎育機關(남자중·고등교육기관)이 하나도 없어서 住民(주민)들의 不滿(불만)과 젊은이들의 意慾喪失(의욕상실) 현상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더욱 巨餘洞(거여동)·馬川洞(마천동) 一帶(일대)는 江北(강북)에서 撤去(철거)해 온 난민들이 數千世帶(수천세대)나 되기 때문에 사람들은 흔히 虞犯地帶(우범지대)라고도 한다. 江北(강북)에서 無許可建物(무허가건물)에 살다가 집이 헐리어져 서울특별시로부터 一世帶當(일세대당) 15坪(평)의 垈地(대지)를 分讓(분양) 받아서 오막살이 집을 짓고 사는 사람들이다. 이러한 사람들이 사는 여기에 輔仁(보인)이 들어가 敎育的(교육적) 空白(공백)을 메운다는 것은 그 意義(의의)가 자못 큰 것이라고 본 것이다. 輔仁(보인)은 기꺼이 逆境(역경)을 찾아 이 곳에 學校(학교)를 세우기로 작정하였다.

이것은 마치 70년 전 仁達坊(인달방)에 輔仁學會(보인학회)가 일어나 輔仁學校(보인학교)를 세웠던 것처럼, 敎育(교육) 不毛地帶(불모지대)에 學校(학교)를 세우려는 것이니, 輔仁(보인)의 建學精神(건학정신)에는 예와 지금의 差(차)가 있을 수 없다. 輔仁(보인)의 建學精神(건학정신)은 이제 巨餘洞(거여동) 새 터전에서 새 出發(출발)을 함으로써 70년의 빛나는 배움의 횃불을 새로이 꽂으려는 것이다.

서울특별시에서는 4월 14일 서울특별시 告示(고시) 제105호로 都市計劃(도시계획) 施設決定(시설결정) 및 地籍承認(지적승인)을 告示(고시)하였다.

學校法人(학교법인) 輔仁學園(보인학원)은 理事會(이사회)를 열고 大一側(대일측)이 提示(제시)한 條件(조건)을 檢討(검토)하고 原則的(원칙적) 贊成(찬성)을 보아 李慶淑(이경숙) 理事長(이사장)에게 交渉(교섭)과 妥結(타결)의 裁量(재량)을 委任(위임)하였다. 李慶淑(이경숙) 理事長(이사장)은 高·中校長(고·중교장) 및 庶務課長(서무과장)의 補弼(보필(?))을 받으며 大一興產株式會社(대일흥산주식회사) 代表(대표) 李祥烘(이상홍)을 相對(상대)로 校地買收(교지매수) 및 校舍建築(교사건축)에 관한 교섭을 가졌다.

交渉(교섭)한 결과 合意(합의)된 內容(내용)의 骨子(골자)는 大一側(대일측)이 垈地(대지) 1만1백평을 6천만원을 超過(초과)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사서, 建坪(건평) 1,500평의 校舍(교사)를 지어 주는 대신 輔仁側(보인측)은 內需洞(내수동) 本校舍(본교사) 2,020평의 建物(건물)과 垈地(대지) 1,356평을 大一側(대일측)에 讓渡(양도)한다는 것이었다.

한편, 서울특별시에서는 學校移轉(학교이전)에 따른 補助費條(보조비조)로 6학급분 3천 6백만원을 보조해 주기로 하였다. 그러나 막상 영달된 금액은 1천만원 밖에 되지 않았다.

실제로 學生(학생)을 收容(수용)하려면 최소한도 1,700평의 建物(건물)이 必要(필요)하다. 그것도 1979學年度(학년도)까지의 일이고, 1980學年度(학년도)부터는 中學校(중학교) 3학년 24學級(학급)과 高等學校(고등학교) 3학년 晝間部(주간부) 18學級(학급)(1978學年度(학년도)부터 高等學校(고등학교) 晝間部(주간부)는 2學級(학급)이 增設(증설)되어 1學年(학년)은 6學級(학급)임), 夜間部(야간부) 12學級(학급)을 收容(수용)하려면 敎室(교실) 絶對數(절대수)가 不足(부족)하다. 이런 관계로 輔仁(보인)은 우선 建物(건물) 2백평을 더 增築(증축)키로 결정하고 大一側(대일측)과 增築契約(증축계약)을 맺었다. 坪當(평당) 建築費(건축비)는 17만원으로 하였다. 그러므로 新校舍(신교사) 總建坪(총건평)은 1,700평이 된다. 이렇게 合意契約(합의계약)이 이루어진 다음 大一側(대일측)은 校舍(교사) 建築(건축)을 一洋開發株式會社(일양개발주식회사)에 下請(하청)시켜서 建物(건물)을 짓게 하였다.

그리고 巨餘洞(거여동)으로 학교가 轉移(전이)될 때까지의 서울특별시의 告示內容(고시내용)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1977년 7월 29일, 서울특별시 告示(고시) 제251호로 都市計劃事業(도시계획사업)(학교)施行許可(시행허가)를 하는 한편, 土地收用法(토지수용법) 準用(준용)을 併行(병행)하였다.

1977년 8월 19일, 서울특별시 告示(고시) 제284호로 都市計劃事業(도시계획사업)(학교)施行法(시행법) 認可(인가)를 하였는데, 이것에도 土地收用法(토지수용법) 準用(준용)을 併行(병행)케 하였다.

그리고 1977년 8월 26일에는 서울특별시 敎育委員會(교육위원회)로부터 內需洞(내수동) 舊校舍(구교사)에 대한 基本財產(기본재산) 用途變更(용도변경) 및 處分許可(처분허가)가 나왔다.

이러한 경위를 거쳐서 巨餘(거여) 新校舍(신교사)는 1977년 9월 1일부터 新築校地(신축교지) 整地(정지) 및 校舍建築(교사건축)이 始工(시공)되어, 1978년 5월 31일 竣工(준공)된 것이다.

그리고 서울특별시에서는 市豫算(시예산)으로 本校(본교) 進入路(진입로) 幅(폭) 8m·길이 200m의 시멘트 舖裝工事(포장공사)를 하여주었고, 上·下水道工事(상·하수도공사)도 하여주었는데 工事(공사)는 1978년 5월 31일에 完工(완공)되었다.


⑥ 巨餘洞(거여동) 新校舍(신교사) 建築(건축) 起工式(기공식)

1977년 7월 25일 오전 10시.

이 날은 輔仁(보인) 中興(중흥)의 歷史的(역사적)인 날이었다. 서울특별시 江南區(강남구) 巨餘洞(거여동) 山(산) 23의 6번지. 祝福(축복)된 땅, 7,346평 대지 위에 建坪(건평) 1,700평의 新校舍(신교사)를 지으려는 起工式(기공식)이 거행되었다.

南漢山城(남한산성) 밑 陽地(양지) 바른 언덕 위에서 學校法人(학교법인) 輔仁學園(보인학원) 理事長(이사장) 李慶淑(이경숙) 女史(여사)는 起工式(기공식) 인사말을 다음과 같이 하였다.

"서울특별시, 서울특별시 교육위원회, 巨餘洞(거여동) 地域社會(지역사회)의 有志(유지) 여러분, 大一興產株式會社(대일흥산주식회사) 代表(대표), 그리고 輔仁家族(보인가족) 여러분, 오늘 이 자리는 참으로 뜻 깊은 자리입니다. 이 순간은 輔仁(보인) 歷史上(역사상) 가장 감격적이고 歷史的(역사적)인 순간입니다. 내년, 1978년 6월 8일은 輔仁(보인)이 70돌을 맞이하는 날입니다. 이 날을 내다보면서 우리들은 새로이 敎育(교육)의 횃불을 이 巨餘地域(거여지역)에 꽂으려 하는 것입니다. 더욱, 이처럼 아름다운 南漢山城(남한산성) 기슭에, 輔仁(보인)이 새 터전을 마련하여 우리의 젊은이들을 교육하는 새 出發點(출발점)을 갖게된 것을 진심으로 감사하고 기뻐하는 바입니다. 바로 이 자리에 地域社會(지역사회) 有志(유지)와 諸機關(제기관)의 代表(대표)를 한 자리에 모시고 여러분의 祝福(축복)을 이 감격적인 起工式(기공식)을 갖게된 것을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오늘날 國家的(국가적)으로 그 중요성이 새삼 인식되고 있는 實業敎育(실업교육)에, 輔仁(보인)은 일찍부터 힘을 기울여 先驅者的(선구자적) 역할을 하여 왔음은 여러분이 다 잘 알고 계실줄 믿습니다. 특히 이러한 巨歩(거보)를 내딛임에 있어서 大一興業(대일흥업)의 李祥烘(이상홍) 代表理事(대표이사)님과 石義慶(석의경) 副社長(부사장)님의 至大(지대)한 협조가 있음을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竣工(준공)을 보는 날까지 여러분의 아낌없는 후원과 협력이 있을 것을 확신하는 바입니다. 감사합니다."

이와 같은 李慶淑(이경숙) 理事長(이사장)의 인사말이 있은 다음, 施工者(시공자)를 대표하여 一洋開發株式會社(일양개발주식회사) 副社長(부사장) 成鎭鉉(성진현) 선생은 인사말을 통하여,

"建設業者(건설업자)라는 직업 의식을 떠나서, 子孫萬代(자손만대) 子息(자식)들이 살 집이라는 생각으로 建物(건물)을 짓겠다."

고 다짐하였다.

그리고 巨餘地域(거여지역) 有志(유지)를 代表(대표)하여 統一主體國民會議代議員(통일주체국민회의대의원) 이운선 선생이

"서울특별시 10萬(만) 撤去民(철거민) 定着地(정착지)인 이 곳은, 여러가지 사정으로 中等敎育機關(중등교육기관)이 아직 設立(설립)되지 못하였는데, 名門(명문) 輔仁中·商業高等學校(보인중·상업고등학교)가 오게 된 것을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輔仁(보인)은 國力(국력) 발전의 기틀이 되고, 이 地域社會(지역사회) 발전의 礎石(초석)이되어 주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고 祝辭(축사)를 하였다.

이 起工式(기공식)에 참석하였던 人士(인사)들은 다음과 같다.

(생략)

이 외에도 施工者側(시공자측) 關係職員(관계직원), 住民(주민) 50여명이 式(식)에 참석하였다. 특히 財團側(재단측)의 一滄(일창) 俞致雄(유치웅) 선생이 80老軀(노구)를 이끌고 式(식)에 참석한 熱(열)과 誠(성)에 대하여 모두 感銘(감명)하였다. 이어서 開土行事(개토행사)가 있었다. 理事長(이사장) 내외분의 開土(개토)가 있은 다음, 一滄(일창) 선생 中·高校(중·고교) 校長(교장), 庶務課長(서무과장), 施工者側(시공자측) 社長(사장)·副社長(부사장)의 순으로 開土式(개토식)을 마쳤는데 이 開土式(개토식)이야말로 1908년 6월 8일, 私立(사립) 輔仁學校(보인학교)가 開校(개교)했던 것과 같이 歷史的(역사적) 意義(의의)를 가지는 一大壯擧(일대장거)라 하겠다.


⑧ 建築(건축)이 遲延(지연)된 이유

7월 25일에 起工式(기공식)을 하고도 실지로 着工(착공)을 한 것은 9월 1일이었다. 그 이유는

첫째, 安東(안동) 金氏(김씨) 憤基(분기) 5基(기)의 糆禮問題(면례문제)

둘째, 17世帶(세대)가 居住(거주)하는 11棟(동)의 家屋(가옥) 撤去問題(철거문제)

이러한 문제로 工事(공사)가 지연되게 되었다.

憤墓問題(분묘문제)는 宗中會議(종중회의)로 인한 시간 지연과, 移葬費用(이장비용)에 대한 異見(이견)으로 상호 절중하는데 소비한 시간의 지연으로 야기된 문제다.

家屋撤去問題(가옥철거문제)는 17世帶(세대)가 거주하는 11棟(동) 건물 가운데, 金樂道(김악도)·朴忠植(박충식) 두 분이 撤去(철거)를 거부하는데서 생긴 일인데, 憤墓問題(분묘문제)는 1977년 8월 말경에 해결되었고, 家屋撤去問題(가옥철거문제)는 1978년 1월 20일에 해결되었다.

이러한 사정으로 校舍(교사) 建築(건축)은 지연되어 1978년 3월 3일 新校舍(신교사)에서의 中學校(중학교) 入學式(입학식)은 未完成(미완성)된 校舍(교사)에서 가지게 되었다.


⑨ 輔仁(보인) 告別式(고별식)

輔仁(보인)을 떠나 中東中學校(중동중학교)로 가게된 2학년 555명과 3학년 559명은 1978년 2월 25일 하오 4시 30분 校庭(교정)에서 "輔仁(보인) 告別式(고별식)"을 가졌다.

金?慶(김?경) 교장은 告別辭(고별사)에서

"中東中學校(중동중학교)로 轉學(전학)시키는 나의 마음은 이루 형언할 수 없는 것이 있읍니다. 나는 諸君(제군)들이 中東(중동)에 가서 빠른 시일 안에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를 바라는 바이나 그러나, 輔仁(보인)을 잊지 말아주기를 부탁하는 바입니다."

라는, 간곡한 고별인사를 하였다.

이어서 校旗(교기)에 대한 告別(고별)의 擧手敬禮(거수경례)가 있었는데, 이 때 1,111명의 학생들은 울음을 터뜨렸다. 그처럼 발랄했던 얼굴과 얼굴에 이처럼 비통한 울음이 터져나올 수 있단 말인가? 어떤 학생은 해가 저물어 가는줄도 모르고 구석구석을 맴돌면서 벽돌 한장한장을 매만지기도하고, 어떤 학생은 흙을 한줌 파서 책가방 속에 넣어 가기도 했다.


⑩ 16學級(학급) 學生(학생) 轉籍問題(전적문제)

輔仁(보인)이 江南地區(강남지구)로 移轉(이전)하는 데 있어서 제일 큰 문제로 대두된 것은 2학년, 3학년의 16학급 학생들을 어떻게 하느냐하는 문제였다. 都心地(도심지)에서 16km나 떨어진

巨餘洞(거여동) 新校舍(신교사)로 데리고 갈 수도 없는 형편에다, 建物(건물)은 한창 工事中(공사중)이어서, 이들 16학급 학생들을 收容(수용)할 수도 없는 형편이었으므로 이들 학생 처리문제가 가장 큰 문제로 된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中東中學校(중동중학교)·北部敎育區廳(북부교육구청)·서울특별시 敎育委員會(교육위원회)와 여러번 절중한 끝에 1978년 2월 18일, 最終合意約定書(최종합의약정서)에 署名(서명)함으로써 풀어졌다.

中東中學校(중동중학교) 財團理事長(재단이사장) 최성악

中東中學校(중동중학교) 校長(교장) 韓百孝(한백효)

輔仁中學校(보인중학교) 財團理事長(재단이사장) 李慶淑(이경숙)

輔仁中學校(보인중학교) 校長(교장) 金?慶(김?경)

立會者(입회자) 北部敎育區廳長(북부교육구청장) 具典會(구전회)

이들 學校(학교) 代表(대표)과 行政官廳(행정관청)의 責任者(책임자) 5명이 署名捺印(서명날인)하여 合意約定書(합의약정서)를 만들었는데, 그 內容(내용)의 골자는 다음과 같다.

1. 학생

2학년생 555명, 3학년생 559명, 도합 1,111명을 1978년 3월 1일부터 中東中學校(중동중학교)가 맡아 교육시킴

2. 선생

輔仁中學校(보인중학교) 敎師(교사) 16명을 中東中學校(중동중학교)에 파견하여 派遣勤務(파견근무)케 하고, 1979년 2월말에 8명, 1980년 2월말에 8명을 각각 輔仁(보인)에 復歸(복귀)케 함

3. 책걸상

책걸상 700組(조)를 2년간 中東(중동)에 貸與(대여)함


⑫ 校地(교지) 整地上(정지상)의 隘路(애로) 打開(타개)

校地(교지) 가운데 운동장으로 쓰인 곳에 17世帶(세대)가 살고 있는 9棟(동)의 撒去民(살거민)(撤去民(철거민)의 오자로 보임) 집들이 있었다. 이들 撤去民(철거민)은 서울 江北(강북)에서 江南(강남)으로 철거되어 온 난민들이다. 1977년 9월 1일, 新校舍(신교사) 건축작업이 시작되자 9棟(동)에 分散(분산)되어 살고 있는 17世帶(세대) 중 4世帶(세대)는 순순히 철거해 나갔고, 나머지 13世帶(세대) 가운데 9世帶(세대)는 11월까지 철거하였다. 그러나 4世帶(세대)는 보상금을 올려 달라고 하면서 철거를 거부해 오다가 1977년 12월 20일에 곽순연이, 12월 26일에는 김창회가 철거해 나갔으나, 김낙도·박춘식 두 世帶(세대)는 1978년 1월로 접어들면서도 철거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工事進行(공사진행)에 애로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던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이러한 딱한 사정을 본 學校側(학교측)에서는 이웃돕기운동의 對象(대상)을 이 撤去民村(철거민촌)으로 정하고, 秋夕節(추석절)과 歲暮(세모)에는 同情(동정)과 떡쌀 등을 전달하여 温情(온정)을 베풀었다. 人情(인정)어린 學校側(학교측)의 노력이 주효하여 김낙도는 1월 11일에, 박춘식은 1월 25일에 철거해 나갔다.

이와 같이 輔仁(보인)은 誠意(성의)를 다하여 이들을 대하였기 때문에 撤去民(철거민)들은 輔仁(보인)의 情誼(정의)를 감사한다고 하였다. 실로 人情(인정)은 鋼鐵(강철)도 녹일 수 있는 絕倫(절륜)의 힘을 가진 것이었다. 運動場(운동장)은 불도저로 시원스럽게 밀어 제껴졌다.


⑬ 內需洞(내수동) 떠나는 날

由緖(유서)깊은 內需洞(내수동) 校舍(교사)가 70週年(주년)을 맞아 금년 7월에 江南區(강남구)로 옮기어졌다.

긴 세월을 선생은 선생대로, 학생은 학생대로 "언제나 넓은 校舍(교사)와 넓은 운동장에서 마음껏 공부를 가르치고 뛰놀게 할 수 있을까"하는 소원은 가졌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마당만 조금 넓은 집을 보아도 부럽기 그지 없어했고, 큰 건물을 보아도 우리는 언제나 저런 곳에서 마음껏 교육을 授受(수수)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은 떠나지 않았다.

이렇게 사무치게 바라던 일이 1978년 7월 21일 巨餘洞(거여동) 新築校舍(신축교사)로 移轉(이전)을 하게 되었다. 이미 中學校(중학교)는 新學期(신학기)에 完工(완공)되지 않은채 新入生(신입생)을 巨餘地區(거여지구)에서 學生配定(학생배정)받았다.

高等學校(고등학교)는 오랜동안 협소했던 교실과 운동장에 抱恨(포한)이 된데다가 2學級(학급)이 增設(증설)되어 교실수와 敎務室(교무실)이 좁아 과거 中學校(중학교)에서 사용하던 교무실로 옮겼고 학생의 교실도 여건이 좋지않아 中學校(중학교) 교실로 옮겨 移轉(이전) 6개월을 앞둔 期間(기간)을 그 곳에서 授業(수업)을 했다.

6개월 동안 高等學校(고등학교)에서 全館(전관)을 사용하게 되니 500평 남짓한 운동장에서 中·高 모두 3,000명이 생활했던 분위기와는 너무도 익숙치 못했던 학생들은 마치 어미 잃은 병아리처럼 웅기중기 모여 있을 뿐이었다.

新築校舍(신축교사)에서 공부를 고대하던 학생들은 부푼가슴으로 하루하루를 지내는 동안 종업식과 함께 마지막 운동장 모임을 갖고 저마다 정든 교실과 校庭(교정)을 들러보고 방학책을 손에 들고 헤어졌다. 마지막 職員會(직원회)인 7월 22일 아침 거의 移徒(이사(?))짐은 옮겼고 운동장엔 무질서하게 나뒹구는 책걸상 부러진 것이며, 70년동안 손때가 묻은 敎具(교구)들이며, 텅빈 교무실 바닥에 몇개 안되는 학생의자에 걸터 앉아 洪起德(홍기덕) 교감의 회고의 말이 있을 때 모두들 숙연해졌다. 書耕夜讀(주(?)경야독)을 하는 夜間部(야간부) 學生(학생)은 대개 낮에는 職場(직장)에 다니기 때문에 勤務地(근무지)가 멀다느니, 通學(통학)거리가 너무 멀어서 다닐 수 없다고 하여 몇명의 학생은 移轉(이전)을 거부하는 일까지 있었다.


⑭ 新校舍(신교사)에서의 첫 授業(수업)

1978년 3월 4일 토요일

新校舍(신교사)로 옮긴 후, 첫 授業時間(수업시간)이 되었다. 9시 35분, 첫 授業(수업)에 들어가는 선생님들의 모습이 상기된 듯하였다. 敎室(교실)마다 愛國歌(애국가)가 울려 퍼졌다.

1학년 8학급, 총원 559명은 새 터전에서 제1회 졸업생이될 학생들이라서 그런지 모두 정중하게 授業(수업)하였다. 新入生(신입생)들의 出身學校(출신학교)를 보면 巨餘國民學校(거여국민학교) 출신이 456명, 경기도 西部國民學校(서부국민학교) 졸업생이 63명이다.

1978년 봄 신학기부터 巨餘洞(거여동) 新校舍(신교사)에서 근무하게된 선생님들은 다음과 같다.

(생략)

中學校(중학교)가 商高(상고)보다 먼저 제1진으로 巨餘(거여)에 오게된 것은 校舍(교사)가 竣工(준공)되지 못한데도 있고 또 하나의 이유는 中學校(중학교)의 경우 東部敎育區廳(동부교육구청)으로부터 學生配定(학생배정)을 받아야 되겠기 때문이었다.

이런 이유로 先着(선착)한 中學校(중학교)는 新校舍(신교사)에서 첫 授業(수업)을 갖는 榮光(영광)을 갖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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