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년 전
2:44 P.M. 날씨/맑음

습——후——
습——
후——
습.


위트: 아, 오랜 친구여, 좀 괜찮은가.
위트: 아니, 아니, 자넨 누워있게. 난 그냥 자네를 보러 왔을 뿐이고, 또 곧 가야 하네. 짐승 등에 물건을 싣고선 멈출 수 없고, 하물며 안장을 씌운 건 바로 내 자신이니 말일세.(驮兽可不能停下,何况给我套上鞍具的,正是我自己啊。)
위트: 뭐라고? 아니, 당연하지. 난 여전히 자네가 아는 그 젊은이지 재무장관 같은 게 아니야……
위트: 신분을 차리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나, 우린 다 함께 우르수스의 광대한 대지를 위해, 폐하께서 그렸던 진정으로 영예로운 미래를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을.
위트: 우리는 모두 폐하의 백성들이지. 이 점을 잊고 폭력적이었던 과거에 얽매이는 자들은 조만간 옛 전통의 고아가 될 걸세.
위트: ……미안하네, 정무를 처리하다 보니 화가 좀 쌓인 것 같구만.
위트: 걱정 말게. 나도 동료와 뜻 있는 사람들의 패기 넘치는 모습과 부패한 자들의 썩어들어간 부분이 그들 스스로를 잠식한 모습을 볼 수 있으니. 우리는 승리할 걸세.
위트: 군대에서 제멋대로 설치는 그 귀족들……
위트: 그들과 그 좀벌레들은 머지않아 폐하의 발치에서 먼지가 될 것이고, 우린 폐하의 길에서 그들을 깨끗이 쓸어버릴 거야.
위트: ……그래.
위트: ——제국의회가 변하고 있어.
위트: 우린 그 암담하기 짝이 없는 귀족들의 손에서, 우르수스의 것들, 폐하의 것들을 되찾아와야 하네.
위트: 우린 구시대를 파기하고, 유린하고, 모독해야 하네. 우린 우르수스를 위한 새 항로를 열어줘야 하네, 오랜 친구여——내가 할 것이네. 우리 모두가 할 것이야. 비록 이 일에 우리 일생이 걸릴 지라도.
위트: 우르수스는 반드시 변해야 하네.


켈시: 오늘?

릴리야: 원래 계획은 다음주였지만……오늘이 제일 좋은 기회예요.
릴리야: 방금 간호장의 말을 들었는데, 재무장관이 와서 그 소심한 겁쟁이가 확실히 동요했습니다. 재무장관이 그를 만나려 하진 않았지만, 그는 그래도 자리를 옮기고자 했습니다.
켈시: 두려워하고 있군. 두려움은 그의 약점을 드러나게 할 거야.
릴리야: 호위대가 갑작스러운 만남을 준비할 겨를이 없었는지, 그는 우리 앞에 가장 성급한 모습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릴리야: 우르수스의 또 다른 고위인사가 여기를 방문한 시점에 대공을 암살하는 건 위험천만한 일이긴 하지만, 이곳의 거물이 여기를 떠나는 일은 손에 꼽을 정도입니다.
켈시: 우린 아직 충분히 파악을 못 했어.
일리야: 전 아직 충분히 파악을 못 했습니다.
일리야: 하지만 전 당신을 믿습니다.
일리야: 심지어, 전 당신이 해낼 수 있다고 믿고 싶습니다.
켈시: ……
일리야: 말해주세요. 또 뭘 걱정하시는 건가요?
일리야: 제가 도와 드리겠습니다, 설령 제가——
켈시: 일리야.
켈시: 내 가장 큰 염려는, 바로 네가 내가 원하는 대로 잘 살아갈 수 있을지 하는 것이다.
켈시: 네가 내 다음 말을 어떻게 생각하든 간에, 난 체르노보그의 가장 이상적이고, 열정적이며, 젊은 과학자들이…… 모두 희생되었다는 걸 인정해야 돼.
켈시: 난 그들이 죽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어. 릴리야, 지금의 너에게도 마찬가지야.
릴리야: ……
릴리야: ……전 해내지 못할 거예요, 켈시.
켈시: 이 일이 끝나면 난 시라쿠사로, 그 뒤엔 빅토리아로 갈 거다.
켈시: 네가 나와 함께 간다면…… 체르노보그에서의 계획을 계속하지 않고 나와 함께 간다면, 넌 죽을 필요가 없을 지도 모르지.
릴리야: 전 남편의 메말라버린 핏자국을 배신자가 단 1초라도 밟는 걸 참을 수가 없었어요.
켈시: ……정말 이기적이군.
릴리야: 네, 그러니, 제 제일 이기적인 부탁을 부디 잊지 말아주세요……
릴리야: 제 딸을 돌봐 주시고, 만일 그녀가 원한다면 의학을 가르쳐주세요.
릴리야: 당신은 분명 살아남을 수 있을 거예요, 켈시.
위트: 오랜 친구여.
위트: 올 겨울은 정말 춥지만, 봄은 예전과 같이 따스할 거라 믿고 싶네.
위트: 우리가 처음 만났던 그 날도 초봄이었던 게 기억나는 군. 그 격정적인 연설에서, 너는 환호하지도, 크게 웃지도 않았지.
위트: 우린 한눈에 서로를 발견했고, 물론 다른 사람들도 있었지.
위트: 침략의 성공을 자랑스러워 하는 사람은 없고, 환호하는 자들은 선황들의 영광을 우러러 보면서도 도리어 발 밑의 척박한 대지는 보지 않고, 누구도 그 곳에 생존하는 걸 허락하지 않지.(没有人为一场侵略的成功而感到自豪,欢呼者瞻仰着先皇荣光,却看不见脚下的贫瘠大地,已不允许他人生存。)
위트, 봄이 오고 있나?
위트: 난 모르겠네, 오랜 친구여. 어쩌면.
위트: 올 봄은 조금 일찍 찾아오겠지만 내 재앙의 메신저는 북방의 어떤 강렬한 재앙의 영향 때문에 한동안 더 추울 수도 있다고 했네.
위트: 어쩌면 우린 다시 겨울로 되돌아갈 지도 모르지.
우린 모두 겨울을 좋아하지 않아, 그렇지?
위트: 나도 좋아하지 않는다네, 친구.
위트: 하지만 자넨 내가 오히려 술을 끊어야 할 지도 모른다는 걸 일깨워 줬네…… 겨울을 알코올로 맞서서는 안 돼. 그건 일종의 마비일 뿐이고, 술에 취해도 동상에 걸릴 수 있지.
위트: 하지만 겨울은 오래 가지 않을 거야.
위트: 단지 재앙의 여파일 뿐이지.
릴리야: 이건……
켈시: 한 번으로 영면까지. 가장 안전한 방법으로, 매우 강력하고, 효과가 너무 빠르지 않아 우리가 도망갈 수 있게 해 주지.
켈시: 떠날 준비는 다 했나?
릴리야: 이 곳에 처음 온 날부터 준비는 끝났습니다.
켈시: 아마 우리에게 시간이 많지는 않을 거야.
릴리야: 앞전의 연습대로만 하면, 분명히 시간은 충분할 겁니다.
켈시: 아니.
켈시: 우리가 이 요양원을 너무 쉽게 생각했어.
켈시: 네 계획은 바꿀 필요가 없으니, 이후의 일은 내게 맡겨라.
릴리야: 뭔가를 찾으셨나요?
켈시: ……
켈시: Mon3tr가 휴면 상태에서 적에 대한 단서를 발견했다. 혹시 대공과 우르수스의 다른 권력자가 서로 소통한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 있나?
릴리야: 아뇨, 그는 여기서 줄곧 평화롭게 지냈습니다.
켈시: ……
릴리야: Mon3tr…… 당신의 애완동물인가요? 뭘 볼 수 있는 건가요? 우르수스의 민중 설화?
켈시: 네게 사실대로 말해 줄 수는 없어. 그러면 우리가 살아남을 가능성을 크게 줄일 뿐이다.
릴리야: 음…… 우르수스에게 방법은 아주 많이 있어요……
켈시: 두려움은 미끼가 되지. 이 일을 탐구하면 네 판단만 흔들릴 거야. 날 믿어라.
릴리야: ……네.
켈시: 좋아, 시간이 거의 다 됐어.
켈시: 가방을 든 금발 필라인을 본 적 있나? 그가 대공의 주치의다.
릴리야: 압니다.
위트: 한 대공이 무얼 해낼 수 있을까?
위트: 이 제자리걸음하는 놈들 좀 보게. 물론 그 한쪽 눈이 먼 총독이 폐하 앞에 무릎을 꿇었을 때, 그는 더 이상 위협이 되지 못했지.
위트: 그는 매우 영리해서 적당한 때에 자신을 보전하기로 결정했지. 다른 몇 사람들과는 달리…… 그들은 제 한 몸의 이득을 위해 완강하게 저항하여, 반란의 여파에 대처하는 데 우르수스의 얼마 안 남은 군력을 낭비시켰지.
위트: 정말 가슴이 아파…… 내가 군사나 정치 지도자는 결코 아니지만, 우리 조국의 생산이 정체되고 경제와 민생 산업이 날로 악화되는 걸 볼 때마다 난 깊은 슬픔을 느낀다네.
폐하께서 이런 기회주의자들을 용서하셨나? 한번의 기회만 있으면 그들은 다시 한번 폐하와 우르수스보다 제 자신의 이익을 우선시할 걸세.
위트: 폐하의 자비를 비난하지 말게. 더이상 감당할 수 없는 긴 내적 소모를 계속하는 대신, 당분간은 배신하지 않을 몇 똑똑한 귀족들을 용인하는 거라네.
위트: 온 방법을 다해 잡초와 해충을 뿌리뽑고 씨를 뿌려야만, 봄이 올 때 쯤 이면 새로운 싹을 만날 수 있지.
위트: 이를 위해 오랫동안 노력해 왔지…… 이렇게 말하는 걸 용서하게. 이런 말은 거의 하지 않지만, 폐하께서 계셔서 오늘날의 내 신분이 자랑스럽다네.
위트: 오랜 친구여 안심하게, 희생자들이 이루지 못한 일은 살아남은 자들이 함께 노력할 것이니.
위트: 폐하께선 곧 우르수스에 새로운 미래를 가져다 주실 것이네. 설령 가장 완고한 귀족, 그 비틀린 악신들, 조국의 가장 어두운 곳에 쳐박힌 그 괴물들이라 할 지라도 반드시 두려워해야 할 걸세——반드시, 우리들의 황제를 두려워해야 할 걸세.
위트: 내 소임은 이걸 보장하는 것 밖에는 없네.
켈시: ……
우르수스 장교: 멈춰라.
우르수스 장교: 간호장이 통지하지 않았나? 바냐 대공께선 이곳을 징발해 어떤 사람도 접근하지 못하게 하셨다.
릴리야: 전 오늘 근무중인 의사입니다. 원칙대로라면 전 당연히 대공 각하의 의료 고문이어야 합니다. 여기 제 신분 증명서입니다.
우르수스 장교: ……새로 왔나?
릴리야: 그렇습니다.
우르수스 장교: 바냐 대공의 당직 의사는 그의 주치의가 맡는다, 불문율이지. 다행히도, 오늘 자네들은 휴가를 보낼 수 있다.
우르수스 장교: 처음이니 자네들을 탓하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다시 이 복도에 마음대로 들어왔다간 매우 끔찍하게 죽게 될 것이다.
우르수스 장교: 어서 꺼져라. 이 얻기 힘든 휴가를 보낼 곳을 찾아봐라.
*무전 소리*
우르수스 장교: 네, 접니다. 아무 일도 아닙니다, 그냥 요양원에서 근무하는 의사입니다. 당장 쫓아내겠습니다……
우르수스 장교: 네……? 그 돌팔이가 사라졌다고요……?
우르수스 장교: ……하지만 위험하기도 하고……에……재무장관이 여기 와 있다는 건 저도 알고 있습니다……
*무전 끊기는 소리*
우르수스 장교: 너희 둘, 거기 서라.
릴리야: 네, 분부하신 대로.
릴리야: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우르수스 장교: ……날 따라와라.
우르수스 장교: 잘 들어라, 너희들이 뭘 발견하더라도 그건 대공 각하의 고질병이니 사소한 일을 크게 만들지 마라.
우르수스 장교: 대공 각하를 안전하게 보살피고 해가 진 뒤 신속하게 떠나서 각하의 안정에 폐를 끼치지 말도록 해라.
우르수스 장교: 제대로 처리한다면 포상을 받을 거다, 두둑한 보상을. 너희처럼 가난한 놈들에겐 오랫동안 행복하게 지내기에 충분하겠지.
릴리야: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이런 기회를 가지게 되어 정말로 영광입니다…… 켈시, 감사드려야지?
켈시: 아…… 네,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나리.
우르수스 장교: ……흠, 촌사람 같으니. 망치지 마라.
릴리야: 주의하겠습니다.
우르수스 장교: ……
우르수스 장교: 잠깐.
우르수스 장교: 이전까진 언제나 한 명만 들어갔는데 이번을 예외로 할 순 없다. 그렇지 않으면 대공 각하께서 죄를 물을 수 있다.
우르수스 장교: 이 하인을 들여보내.
릴리야: ——하지만 나리, 제가 의사입니다——
우르수스 장교: 대공 각하께서 복용하시는 약은 우리가 준비할 테니 이곳에서 기다려라. 무슨 일이 생기면 들어가도 좋다.
릴리야: 이건 말이——
우르수스 장교: 다시 말하면, 넌 여기서 3시간을 서서 명령에 대기해야 한다는 말이다.
우르수스 장교: 그리고 난 후, 넌, 들어가 있는 시간이 10분을 초과해선 안 된다.
우르수스 장교: 제한 시간을 넘기면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든 살아서 떠날 수 없다.
우르수스 장교: 몸수색을 하고 이 하인을 먼저 들여보내.
켈시: ……알겠습니다.

켈시: ……
켈시: ……대공 각하.
한 노인이 그늘진 구석에 앉아 있다——누워 있다. 그는 움직이지 않고 숨을 고르며 먼 곳을 바라보고 있다.

바냐 대공: ……의사인가?
켈시: 아닙니다, 전 단지 하인입니다.
바냐 대공: 그래…… 이리로 좀 와 보게.
켈시: ……알겠습니다.
바냐 대공: 우르수스 출신인가?
켈시: 아닙니다.
바냐 대공: 고개를 숙여서 자네 얼굴을 좀 만지게 해 주겠나.
켈시: ……알겠습니다.
바냐 대공: 아…… 불포, 아니면 필라인? 귀여운 종족이야.
켈시: 공…… 공께선 눈이 안 보이십니까?
바냐 대공: 그렇다네, 지난 달 일이지.
바냐 대공: 난 곧 죽는다네. 어쩌면 오늘일 수도 있고, 어쩌면 내일일 수도 있겠지. 그러니 넌 헛걸음 한 거란다, 얘야.
켈시: ……
바냐 대공: 그들은 의사가 들어오는 걸 허락하지 않고, 날 죽이고 있었지.
켈시: 공께선 항의하지 않으셨습니까? 당신은 대공이십니다.
바냐 대공: 그렇기 때문에 난 우르수스에 대항할 수가 없지, 난 이미 받아들였다네.
바냐 대공: 오늘 날씨는 어떤가? 햇빛이 따뜻해지는 게 느껴지네만.
켈시: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입니다, 대공 각하.
바냐 대공: 아……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참으로 오랜만이구만.
켈시: 공께선 절망감을 느끼십니까?
바냐 대공: 절망……? 절망은 단지 처음에 반짝하는 것일 뿐이지. 우리 긴 생 속에는 항상 감정이 가득하다네. 그 때문에 사람들이 절망으로 차지도, 자네의 인생이 행복으로 넘치지도 않지.
바냐 대공: 우리는 모두 타협해가며 살아간다네. 젊은이, 어떤 이들은 이를 무감각하다 말하고, 어떤 이들은 이게 내 자업자득이라 말하지.
바냐 대공: ……그래, 날씨가 풀려서 방금 그 바람이 살을 에는 것처럼 아프진 않는 군.
바냐 대공: 누가 당신을 이곳으로 데려왔지? 젊은이?
켈시: 벌써 눈치채셨군요.
바냐 대공: 자네도 놀라지 않는군. 난 나처럼 이렇게 아무런 일도 이루지 못하고 결국엔 다른 사람 대신 죄를 받아 무대 뒤로 밀려나면 젊은이들의 눈총을 받게 되기 마련이라 생각했네.
켈시: 전 평생 한 사람도 내려다 본 적이 없고, 하물며 당신께선 한 명의 우르수스의 대공이십니다.
바냐 대공: 자넨 당연히 사실대로 말하지 않겠지…… 그렇고 말고. 내가 한 번 추측해 보지.
바냐 대공: 재무장관인가? 아냐, 아냐아냐아냐…… 그는 이런 일들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고, 이런 월권 행위를 할 수완도 갖추지 못했지, 만일 그의 뜻이라면…… 난 차라리 그의 뜻을 받아들일 거야……
바냐 대공: 그렇다면 집단군 내의 그 좀벌레들인가? 겁도 많고 낡아빠진 것들…… 아니야, 아니야, 그들에겐 더 쉬운 방법이 있지……
바냐 대공: 내가 맞춰보겠네, 젊은이, 누가 자넬 여기로 보냈는지 말이야……
바냐 대공: ……
바냐 대공: 아직 거기 있나, 젊은이?
켈시: 그렇습니다.
바냐 대공: ……폐하의 뜻인가? 폐하께서 내 이…… 어리석고 우둔한 행동에 대가를 치르게 하시는가?
바냐 대공: 오, 그날 밤 일이 끔찍한 꿈이 아니었던 것인가……
바냐 대공: 자넨 양 눈이 실명될 때의 느낌을 아는가? 오래 전부터 익숙해진 어두운 시야 속에서 뭔가 더 뒤틀린 것이 꿈틀거리는 게 느껴지지…… 이상한 공포스러운 느낌이야.
켈시: 공께선 눈이 멀어도 가릴 방도가 없는 두려움을 말씀하시는군요.
바냐 대공: ……그건 내위(内卫)의 뜻이라네, 젊은이. 그날 밤 황제의 칼날은 내 목구멍의 지척에 있었지……
위트: 뭐? 과도? 내가 하지.
위트: 빡빡한 일정이지만 옛 친구를 위해 사과를 깎아 줄 시간조차 없다면 너무 한심스럽지 않은가.
내가 어찌 재무장관에게 이런 잡일을 시키겠는가.
위트: 날 비꼬는 겐가?
어쩌면 재무 대신은 칼을 쓰지 않고, 대신 다른 해야 하는 일에 집중해야 했을 지도 모르지.
위트: 웃기지 마, 오랜 친구. 그저 사과를 깎을 뿐인데 그런 미신적인 얘기를 해야 되겠는가?
위트: 봐, 요양원의 과일은 참 신선하다네. 이것도 자네 몸에 좋겠지.
아니, 위트, 내 친구여, 칼 좀 줘 보게. 내가 녹슬지 않도록 적당히 한 번 움직여야 할 것 같네.
위트: 자네는 너무 약해서 자기 손을 베게 될 게야.
설마 자네 우르수스의 장교가 과도를 쓸 힘조차 없다고 생각하는가?
위트: 아니, 그렇게 생각하진 않았네.
위트: 아, 좋아 친구, 칼을 줄 테니 제발 조심하게.
*자르는 소리*
위트: ——
위트: 자네 이 무슨——의사! ——이게 뭐하는 짓이야!?
위트: 자네 대체 왜 중요한 자기——자기 손가락을 칼로——의사!
쉿——위트! 흥분하지 마, 생각만큼 아프진 않아…… 평상시의 고통으로 난 이미 익숙해져 있다네…… 조급해하지 말고 우선 내 얘기를 들어보게.
보게, 위트. 내 오른손은 포화 소리 때문에 손톱이 떨어졌어…… 카시미어인은 내 오른손 엄지손가락을 잘랐고 동국의 자객은 내 검지손가락의 절반을 앗아갔지.
난 언제나 내 오른손이 가치가 없다고 느낀다네, 위트. 단지 내 오른손이 칼을 잡는 손이기 때문에 이런 일들을 당했지.
이제 난 내 왼손 검지손가락을 잘라 냈다네. 이제 내 양 손은 모두 온전치 않고, 공평하지.
위트: 자네 대체 왜 이런 짓을 하는 건가……!
내게 말해 보게 위트, 우르수스의 전쟁, 이 내가 평생동안 영광으로 생각했던 상처들이, 정말로 명예로운 것이라 할 수 있을까?
아니, 자네가 대답해 줄 필요는 없어. 이런 건 다 중요하지 않아. 하지만 이 피가 뚝뚝 떨어지는 새 상처는 내가 내 스스로의 의지로 만들어 낸 것이고, 내가 병마에서 정신을 차리게 해 주고, 지금 내가 자네와 다시 얘기를 나눌 수 있게 해 주지.
위트, 자넨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가겠지, 조만간 그 위대한 도시로 돌아가게 될 거야.
내 몸의 일부를 가져가주게. 내 육체는 전투에서 뿔뿔이 흩어져 온갖 상처를 입었지만 오직 이 한 토막 피와 살은 내 의지로 분리되었지.
난 자식이 없지만, 이 손가락만은, 내가 어리석다 비웃을지라도 이 손가락만은 내가 낳은 유일한 혈과 육인 것이네.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가지고 가서 자네의 정원이나 길가의 화분에 묻어서 나를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흙 속에 살게 해 주게.
오, 내 피와 살을 우르수스에 녹아들게 해 주게…… 우리가 수 세대동안 지켜온 우르수스의 중심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날 데려다 주게!
——위트!
우르수스 장교: ……
릴리야: ……
우르수스 장교: 오늘따라 왜 이리 사람들이 뛰어 다니는지…… 쯧쯧, 버릇없는 것들.
우르수스 장교: 여기서 꼼짝 말고 있어라, 내가 가 볼 테니.
릴리야: 알겠습니다, 나리.
릴리야: (켈시께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모르겠어……)
릴리야: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
우르수스 장교: 이봐, 빨리 116호 숙소로 가 봐.
릴리야: 네? 하지만 제 하인이 아직 여기에——
우르수스 장교: 어쨌든 여긴 하인 한 명이면 충분할 테니 의사는 필요 없어.
우르수스 장교: 재무장관의 요구다. 이렇게 높은 사람의 심기를 건드리면 우린 감당할 수가 없어.
우르수스 장교: 어서 가! 교수대에 올라가고 싶나?
릴리야: 알, 알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바로 가겠습니다……
릴리야: (켈시……! 서둘러주세요!)
바냐 대공: 젊은이, 자, 여기 앉아 보게. 자네 이름은 뭔가?
켈시: 켈시.
바냐 대공: ……이건 자네 코드네임도 가명도 아닌 게 맞나?
바냐 대공: 난 알아들을 수 있어…… 자네가 자기를 소개하는 태도에서, 난 알아들을 수 있지. 자넨 그 이름을 사랑하나, 켈시?
켈시: 글쎄요.
켈시: 저희의 시간이 거의 다 되었습니다, 대공 각하. 잠시 후면 당신의 호위대가 이 곳으로 쳐들어 올 겁니다.
바냐 대공: 오…… 아무래도 날 죽이러 온 자객을 위한 공간을 남겨놔야 할 것 같군……
바냐 대공: 음. 통신기가 내 옆에 있을텐데……
켈시: 여기 있습니다.
바냐 대공: 하, 신중한 꼬마 자객아, 언제 가져간 겐가?
바냐 대공: 내게 주게.
켈시: ……
바냐 대공: 믿어 줘서 고맙네, 젊은이. 자넨 정말 여유가 넘치는군…… 자네를 누가 보냈든 간에 난 자네가 큰 인물이 될 거라 믿네.
*무전 소리*
바냐 대공: 호위대장, 이 요양원의 하인이…… 내 고향에서 왔다네. 그녀와 더 많이 얘기하고 싶으니, 내가 명령을 내리기 전까진 우릴 방해하지 말게.
바냐 대공: 무단으로 침입하는 자는 군사 명령에 불복종하는 걸로 알겠네. 이해하겠나?
바냐 대공: ……좋아.
*무전 끊기는 소리*
켈시: ……공의 고향은 어디십니까?
바냐 대공: 송심(松心) 산골짜기의 맞은 편에 있네.
바냐 대공: 자네가 날 믿는 건 이미 모든 수단과 방법을 준비해 뒀기 때문인가? 설령 저들이 당장 이 방으로 들이친다 하더라도 온전하게 빠져나갈 수 있겠지?
켈시: 대답해 드릴 수 없습니다.
바냐 대공: 어쩌면 자넨 내위의 사람이 전혀 아닐 수도 있겠군. 자넨 뒤틀려 있지도, 두렵지도 않아. 그래, 내위가 어떻게 남의 사람에게 자기들 일을 맡길 수 있겠나?
바냐 대공: 그들은 우르수스의 가장 사사로움이 없는 감시 요원들로, 천칭에 올려놓을 수 있을 만한 인물들이야 말로 내위를 한 번 높게 볼 만 하지.(他们是乌萨斯最无私的监控者,只有足够被放在天平上的人物,才值得内卫去高看一眼。)
바냐 대공: 좋아, 내가 졌네, 젊은이. 난 정말 자네의 속마음을 알아맞힐 수가 없구만.
바냐 대공: 자넨 무엇 때문에 여기에 온 건가?
켈시: ……그저 제 책무일 뿐입니다.
바냐 대공: 켈시, 내가 고통스럽게 죽게 될까?
켈시: 아니오, 약은 천천히 당신의 신경계를 침식할 겁니다. 마치 의식을 잃으신 것처럼 잠에 드시고 영원히 깨어나지 않으실 겁니다.
바냐 대공: ……중병에 걸린 노인에겐 일종의 축복이라 할 수 있지.
바냐 대공: 고맙네.
켈시: ……
바냐 대공: 그건 그렇고…… 자넨 의사인가? 아니면 과학자?
바냐 대공: 밝은 양쪽 눈을 가지고 있나? 손가락에 약품의 냄새가 남아 있나?
바냐 대공: 자넨——
바냐 대공: ——가만, 가만, 자네 혹시…… 혹시 체르노보그의 일 때문에 왔나?
바냐 대공: 켈시…… 켈시…… 그 날 화재로 사망한 소장의 이름도 그것 아닌가?
켈시: 만일 당신이 정말로 모든 희생자들을 기억한다면, 전 아마 우르수스 법의 눈을 피할 수 없을 겁니다.
바냐 대공: 아…… 자네, 자네였군, 맞아 켈시……
바냐 대공: 정말 신기하군…… 비밀 경찰을 속였다니, 그 뿐 아니라 이름도 바꾸지 않은 채 이곳에 섞여 들어왔다니……?
바냐 대공: 자네 대체 어떻게 했나?
켈시: 많은 방법이 있습니다, 대공 각하.
바냐 대공: 어떤 사람들은 내가 죽길 원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지. 난 다만 원래 과학자라면 자네가 이렇게 행동해선 안 된다고 생각했는데…… 쉽게 속았구만.
바냐 대공: 아…… 아니면 누군가 자네를 매수한 건가? 누군가 자네의 복수를 이용해 날 죽이려 한 건가?
켈시: 말씀드릴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각하.
켈시: 이제 약을 주사해 드리겠습니다.
바냐 대공: 아, 사형선고를 내리는 군, 좋아. 아마 이런 종류의 고통보단 쉬울 지도 모르겠군……
바냐 대공: 음……
바냐 대공: ……
켈시: 끝났습니다, 각하.
바냐 대공: ……내게 시간이 얼마나 남았지?
켈시: 15분입니다, 각하.
바냐 대공: ……말해 보게, 젊은이. 내 앞의 풍경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켈시: 대지가 움트기 시작하면, 햇빛은 그들을 배불리 하고 희망을 가지게 할 겁니다.
바냐 대공: 아름다운가?
켈시: 웅장하고 아름다운 경치이지만, 이런 웅장함은 평소의 우르수스에겐 평범한 수준입니다.
바냐 대공: ……허, 젊은이들은 언제나 재치있게 말하더군…… 얼마나 많은 우르수스의 사람들이…… 이 풍경을 볼 수 있을까?
바냐 대공: 참…… 꽃, 내 꽃, 내가 씨앗을 뿌렸어…… 그것들에 싹이 났나? 그것들에 꽃봉우리가 피었나? 끔찍하게 고통받은 내 눈은, 그것들에 꽃이 핀 걸 볼 때까지 조차도 버티지 못했어……
켈시: 지금으로썬 보아하니…… 불행히도.
켈시: 제국의 겨울은 이런 관상식물의 생장에는 좋지 않은 것 같습니다.
바냐 대공: 아…… 그것들은 이 곳에선 피어날 수 없는 것인가……
켈시: 공께선 이 긴 겨울에 무엇을 심으셨습니까?
바냐 대공: 내가 젊었을 때, 난 카시미르와의 전쟁에 참전했었지. 자넨 혹시 싸운 적 있나?
켈시: ……
바냐 대공: 전장은 어수선했었고, 첫번째 포성이 울린 지 십분 만에 대열과 전장은 그 의미를 잃었지.
바냐 대공: 난 몇 기사들에게 다리를 다쳤고, 머리 위에도 한 대 맞았지. 난 투구를 잡아 던져 버리곤, 죽을 힘을 다해…… 꽃밭으로 기어 올라갔어.
바냐 대공: 난 그 곳에서 쓰러졌고 이후에 지원군에게 구조를 받았지. 정신이 없는 상황에서도 난 그 꽃의 모습을 기억했어.
켈시: ……송심(松心)백합이군요.
바냐 대공: 그래…… 전쟁이 끝난 후 난 변방에서 씨앗을 가져왔는데, 카시미르의 학명이 싫어서 새로운 이름으로 그걸 불렀지.
바냐 대공: 난 이 꽃을 좋아한다네. 우리 도시에서 이 꽃은 도시의 상징으로 여겨지지. 우르수스의 땅은…… 카시미르의 땅보다 그걸 기르기에 더 적합하다네.
바냐 대공: ……내 아내는…… 그것들을 재배해 아주 잘 가꾸었지.
바냐 대공: 하지만 이것들은…… 땅을 깨고 나오지 못했어.
켈시: 봄철이 오기까진 아직 나무 이릅니다, 각하.
바냐 대공: 아…… 난 우르수스의 땅을 사랑한다네. 그것은 많은 종류의 희망을 품을 수 있지.
켈시: 그것은 빈자와 감염자들의 몸으로 물을 대고 있습니다.
바냐 대공: 그것이 저질렀을 지도 모르는 갖가지 악행들에 대해 부정하진 않겠네. 그래도 땅은 모든 것을 포용한다네…… 아, 피곤하군……
켈시: 설득력 있는 변명은 아닌 것 같군요.
바냐 대공: 변명? 아니, 젊은이…… 난 용서받기를 바라지도 않았고 필요하지도 않네……
바냐 대공: 다만, 생명의 마지막 잠깐 동안 난…… 비로소 깨닫게 되는 거지…… 의미…… 사실은 다……
바냐 대공: 송심 백합……
바냐 대공: 그걸…… 다시 한번만 보고 싶군……
바냐 대공: ……자넨 가게, 젊은이.
바냐 대공: 느껴지는군…… 햇볕이 정말 따뜻한 게 내가 마치…… 다시…… 볼 수……
바냐 대공: 후……
켈시: 어쩌면 당신은 삶의 마지막 순간에 스스로를 용서할 자격이 없는지도 모릅니다.
켈시: (우르수스어) 우르수스가 당신을 잊기를, 대공 각하.
바냐 대공: (우르수스어) ……우르수스…… 나의……
바냐 대공: ……조국이여……
켈시: ……나리, 대공 각하께서 주무셨습니다.
우르수스 장교: ……네가 말해 줄 필요는 없다. 우린 30분 뒤에 들어갈 수 있다는 명령을 받았다.
우르수스 장교: 아, 대공 각하와 동향이라고, 응?
우르수스 장교: 내가 듣기론 너희 같은 젊은 여자들이 이 요양원에서 일하려고 애쓰는 이유가 지위가 높은 관리들과 만나기 위해서라던데, 맞나?
우르수스 장교: 이제 만족하나? 왜 아직도 여기 멍청히 서 있는 거지? 혹시 내 신발이라도 닦아 주려고?
켈시: 아뇨, 제가 어떻게 감히…… 정말 죄송합니다! 나리, 화내지 마십시오, 바로 가겠습니다.
우르수스 장교: 쳇, 서민이……
릴리야: ……과도에 녹이 쉽게 남아 감염을 일으킬 수 있으니, 저희가 가까이에서 상황을 지켜볼 테니 마음 놓으세요.
위트: ……네, 수고하셨습니다.
위트: 보아하니 제 친구의 피 끓는 열정에 시간이 꽤 많이 지났나 보군요.
위트: 그가 의무실을 떠날 때, 그가 저희의 마음 속에 불을 붙였다고 전해 주십시오. 그에게 믿어 달라고, 친구 이슬람·위트를 믿어 달라고 부탁해 주십시오.
위트: 하지만 전 이제 제 메신저와 함께 길을 떠나야 합니다.
릴리야: 안녕히 다녀오십시오.
켈시: ……
위트: ……
릴리야: (켈시——!)
켈시: (우린 즉시 떠나야 한다.)
켈시: (재무장관이 속국의 관료들을 주눅들게 한 것이 우리들에겐 최선의 엄호다.)
릴리야: (그……그는 죽었나요?)
켈시: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발현 시간이 짧아, 그의 몸은 오래가지 못했다.)
릴리야: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이용하려 할 텐데, 그들의 암투가 저희에게 기회를 열어 줄 지도 모릅니다.)
켈시: (출발하지.)
릴리야: 켈시——
릴리야: 감사해요.
릴리야: 당신이 절 도와…… 당신이 저희를 도와 이 모든 일을 손수 끝마쳤어요.
켈시: 아직 끝나지 않았어.
켈시: 그것이 어떤 모습으로 변하든…… 아마 우린 조만간 다시 제국을 마주하게 되겠지.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실제론 圣骏堡(성준보)라 언급되지만 정황상 러시아 제국의 수도였던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추정되어 이렇게 번역했음.
진짜 미친듯이 길다 근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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