上) https://gall.dcinside.com/m/kamenrider/842363

* 이번에도 다소 뇌피셜이 많습니다. 맨 밑에 사실만 모은 요약 있음.

사실 가면라이더가 어두운 내용을 소재로 삼긴 해도 무조건 절망적인 전개로 나아가진 않는다. 오히려 초반에는 부드러운 편.

언제 괴인의 습격을 당할지 모르는 위험 속에서도, 거기에 맞설 영웅이 있다는 걸 상기시키고, 설령 중간에 반전이 터지면서 분위기가 가라앉더라도, 희망을 붙잡고 나아가는 영웅의 서사를 보여주는게 가면라이더의 묘미다.

가이무도 각본가의 악명 때문에 그렇지, 초반에는 오히려 유쾌했고 중반부에도 종종 개그씬을 넣어서 분위기를 환기하거나, 등장인물들이 헬헤임의 숲이라는 절망에 맞서는 과정을 보여줬음. 희망과 절망을 교차시키되 절망에 좀 치우친 쪽.

(가장 약하고 찌질한 녀석이 스승과 함께 성장해서 '포기하면 안된다'고 아군들과 등을 맞대는 장면. 코우타가 오기 전까지 정말 누구 하나 희생되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키노시타의 초안. 이건 진지하거나 어둡다기보다는 그냥 자극적일 뿐이다. 이런 설정 그대로 바이스는 까불대고 사쿠라는 무적거릴텐데, 이런 리바이스가 진지하다고 볼 수 있을까? 애초에 초안 그대로 간다면 '주인공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는 무력감을 기본으로 깔고 가야 할 것이다.

그 결과, 초반부는 실시간으로 수정이 되었고, 이에 따라 바이스의 행동원리도 위악으로 간주되면서 긴장감이 다소 줄고 강화폼 이벤트도 김이 빠졌다고 봄. 하지만 그럼에도 키노시타가 아길사쿠와 함께 꿋꿋이 유지시킨 전개가 있었는데 바로 '기억상실'.

작품 주제가 '악마와의 계약'이긴 하지만, 사실 리바이스에서 계약은 별 의미가 없었음. 리바이스 세계관에서의 악마는 생물의 악의를 바이스탬프로 실체화시킨 인공생명체니까, 계약이래봤자 그냥 록시드로 인베스를 조종하는 정도거든.

기프와 계약했다는 사람들도 사실 기프가 엄청 봐줘서 그런거지 마음만 먹으면 손절할 수 있는 구두계약에 불과했고.(밋치와 레뒤에 같은 거)

거기다 가면라이더들도 내면의 악마를 통해 변신한다고 하지만, 사실 계약과는 거리가 멀고 후기 가면라이더들은 악마 없이도 변신이 가능해졌음.

-라이브 : 내면의 악마(카게로우)와 싸워서 굴복시킨 뒤 힘을 취함.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 카게로우가 육체의 주도권을 차지해 이블로 변신.

-잔느 : 러브코프가 사쿠라를 잘 따라서 순순히 힘을 빌려줌. 에라이

-베일&데몬즈 : 변신할때마다 드라이버에 봉인된 베일이 본능적으로 장착자의 생명력을 빨아들이지만, 서로 합의된게 아니라 강제적인 리스크임.

-아길레라 : 잔느의 벨트를 양산시킨 드라이버로 변신하기에 마찬가지로 리스크 없음.

그럼에도 왜 유독 잇키만 변신하면 기억을 잃는다는 강제성이 부여되었을까? 혹시 초안들을 다 쳐내고 잇키에게 남은 서사가 없는 상황에서 '이거라도 붙잡아야 할' 근본적인 이유가 있지 않았을까?

그렇게 생각하니 문득 리바이스의 어원이 신경쓰이기 시작했다. 키노시타의 말로는 악을 뜻하는 영어 'Vice'+연결을 뜻하는 히브리어 'Levi'에서 유래되었다고 하지만, 정작 리바이스는 R로 시작한다. 단순히 발음을 신경써서라기에는 Re는 '다시 한번', '되돌리다'을 뜻한다.

만약 이것대로 한다면 리바이스는 Re-Vice(악을 다시 한번)이라는 의미로 해석될 수도 있다. 비약이겠지만, 어떻게 다시 한번 하는걸까...

악을 다시 저지르다?

악을 되새기다?

악(=죄)를 다시 돌아본다...

기억을 되돌리다?

왜 이런 불길한 암시가 보이는걸까? 어쩌면 이건 초기 설정의 잔재였을지도 모른다.

3. 정장 잇키의 초안 (下)

사실 25화의 오디오 코멘터리에서 행복탕 화재사건은 원래 잇키가 학창시절에 저지른 일로 구상했었다고 밝혀진 바 있다. 오프닝에서 찍은 저 썩소는 잇키 배우가 말하길 '다이지를 죽인 상황이라 생각하고 웃으라'는 지시에 따라 촬영한 것.

물론 전개 상 진짜 죽였을리는 없겠지만, 아무튼 가족을 공격할 정도로 막나가는 상황을 상정했다는 소리.

한마디로 원래 키노시타가 구상했던 리바이스의 배경은 잇키가 모종의 이유로 폭주해서 행복탕에 화재가 발생했지만, 현재는 잇키는 물론 아무도 이를 기억하지 못한채 거짓된 평화가 유지된 상태였던거임.

주인공이 불을 질렀다는 초기 설정...

주인공 쩌리 만드는 와중에도 이상하게 유지되는 기억상실...

그리고 그 사이에 낀 건 화재사건 당시 잇키의 기억을 지워준 바이스...

그렇게 생각하니 이 훈훈한 장면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바이스가 잇키의 기억을 대가로 계약을 맺는 이 장면이....

분명 베일을 막기 위해 기억을 대가로 바이스의 힘을 빌리는 장면이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상황이 작위적이다. 저렇게 어린데 악마의 힘을 온전히 쓸 수 있을까? 하다못해 그때의 충격으로 흉터가 남았다는 설정을 복선으로 삼는다면 좋을련만..

어쩌면 가면라이더 베일은 잇키의 초기 설정을 토대로 급조한 라이더가 아닐까 생각된다.

4. 이게 영웅인가

분명 난 잇키가 부각될 요소를 찾기 위해 1년 전에 정장 잇키에 대한 글들을 검색했지만, 하필이면 발견한게 저 초기 설정이었고 이걸 어떻게 소개해야 할지 난감했다. 이 초기 설정만으로 떠오르는 시나리오가 하나같이 악마적이니까.

대체 잇키가 불을 질렀는데도 왜 가족들의 평화는 유지되었을까? 잇키야 바이스와의 계약으로 기억을 날렸다쳐도, 왜 아무도 이 사건을 모를까? 여기에 대해서 2가지를 유추했다.

1) 잇키가 우발적으로 행복탕에 방화를 저질렀으며, 이 과정에서 폭주한 악의로 탄생한 바이스와의 계약으로 기억을 포함한 모든 증거를 인멸했다.

2) 가족에 대한 불만을 참고 있었지만, 그게 바이스로 표출되면서 바이스가 행복탕에 불을 질렀다. 하지만 가까스로 이성을 되찾은 잇키는 간신히 바이스를 통제해 상황을 수습했지만 기억을 잃었다.

@) 날뛰는 과정에서 바이스의 폭주를 막기 위해 몸을 던진 아버지가 희생되자 심장이 사라진 아버지를 살려달라는 조건으로 계약을 맺음.

왜 하나같이 거지 같은 유추인가 싶겠는데, 잇키가 불을 질렀다고 한 시점에서 이미 떠올릴게 이거 뿐이다. 그나마 2번이 잇키의 선한 면이 남아있는 시나리오가 아닐까..

이렇게보니 오프닝 마지막에 절규하는 잇키, 그리고 후반부에도 계속 유지되는 기억상실 전개는 사실 이런 식으로 전개하려던게 아닐까 싶음.

대충 이런 식으로 잇키의 기억상실은 사실 업보였고, 리바이스는 잇키가 바이스와 함께 자신의 죄를 돌아보면서 청산해나가는 그런 이야기가 아니였을까 싶더라. 그리고 마지막화에서 바이스는 잇키와의 싸움으로 인간성을 깨달았기에, 자신의 죽음을 통해 잇키를 계약에서 해방시켜주고자 잇키한테 싸움을 건거고.

자아성찰과 반성. 리바이스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주제일테고, 툭하면 클리셰 파괴를 하려드는데 주인공이 죄인이었다? 이 정도면 꽤 괜찮은 드리프트일 것 같은데, 왜 본편에서는 신파극으로 바뀐걸까.

왜긴 왜야. 시리즈랑 부적절하니까 그렇지. 영웅인 주인공이 어머니의 복수를 위해 싸우는 전개가 영웅심이 없다고 빠꾸먹은 판에 주인공이 가족들 죽일 뻔해놓고 지금은 다 잊은채 뻔뻔하게 살아간다?

여기서 키노시타의 죄가 또 하나 추가된다. 자기가 시리즈에 부적절한 소재 써서 빠꾸 먹어놓고 반성하지 않고 배짱부리는 거. 1호를 여성 라이더로 하려다, 안되니까 남주를 방화범으로 만들려 하다니...

하지만 생각해보면 키노시타도 말로는 타협 안한다면서 꽤 많이 타협했던 것 같아. 1호 여성 라이더는 안된다니까 3호를 밀어주는 정도에 그치고,

그렇게 바꾼 1호 라이더의 스토리가 어두우니 기왕 짠거 외전인 베일로나마 각색하고 기억상실 파트는 어떻게든 후반부까지 끌고 가고 말이야..

....그리고 최대한 타협한게 이 모양이란거고.

5. 요약

이번 글은 여러모로 개인적인 잡담이 많았지만, 정장 잇키에 대해서 팩트만 체크하자면 이렇다.

-리바이스는 페닉스의 실험으로 폐인이 된 아길레라의 부모, 잇키 엄마의 생사 등 방영 초기에는 여러 자극적인 설정이 중도변경된 흔적이 많았음.

-리바이스는 오프닝에 여러 불길한 떡밥이 많았지만, 잭 리바이스를 제외하고 본편에 제대로 반영된게 없다.

-리바이스의 오프닝에 나온 불길 속에서 검은 옷을 입고 웃는 잇키, 일명 '정장 잇키'는 본편과 관련 없는 영상이라고 했지만 사실 초기 설정의 잔재다.

-정장 잇키는 팬들이 임의로 지은 명칭이고, 오프닝에서 잇키가 입은 건 '교복'이라고 한다.

-25화 오디오 코멘터리에서 원래 행복탕 화재사건은 '학창시절의 잇키가 벌인 일'이었지만 수정되었다고 언급된다.

-오프닝에서 나온 정장 잇키는 당시 설정을 토대로 촬영된 것. 잇키의 썩소는 '다이지를 죽인 느낌'이라는 지시를 받은 연기다.

정리하자면 정장 잇키는 초기 설정의 잔재로, 원래는 과격한 내용으로 구상되었으나 빠꾸를 먹으면서 지금의 밋밋한 캐릭터가 된거라고 생각된다. 이 과정에서 과격한 내용은 '가면라이더 베일'로 재활용된거고.

바이스와의 계약으로 인한 기억상실은 초안대로 진행했을 경우 '행복탕에 그런 사건이 있었는데 왜 아무도 내색하지 않을까'에 대한 답인 동시에, 악마의 힘으로 증거를 인멸한 죄에 대한 업보로 구상한게 아니었을까 함.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