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당신과 제대로 마주 보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사실은 그저 당신에게 막연한 기대를 품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니, 기대라는 단어보단 경애하고 있었다는 말이 좀 더 맞는 표현이리라. 당신이 방황하고, 화내고, 어찌할 바를 몰라 비이성적인 행동을 하는 걸 옆에서 지켜봤음에도 불구하고, 내게 당신은 여전히 우리를 앞에서 이끌어주는 동경의 대상이었다.
마치 한 차원 위의 존재처럼.
당신의 차분한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처음 만났던 라이브하우스의 광경이 떠오른다. 처음으로 서로를 마주했던 순간의 모습이.
평소보다 더 달아오른 관중들과 그에 호응해 높아지는 밴드 사운드도 당신의 목소리 앞에선 찻잔 속의 태풍에 불과했었다.
하지만 품 안에 들어온 당신은 무척 작았다. 늘 앞만 바라보던 호박빛 눈동자는 어색하게 날 올려다보고 있었고, 푸른 장미가 어울리는 곧은 머리카락은 부드럽게 찰랑거리며 내 손가락 사이를 스치고 흘러내린다.
당신도 그저 나와 같은 또래의 여자아이일 뿐이라는 걸 깨달은 지금, 내 안에 떠오르는 이 감정의 이름은 실망일까? 아니면 안도? 아니면…….
납골함을 바라보며 가만히 서 있는 당신의 뒷모습은 오늘따라 무척 가녀려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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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부터 잔뜩 찌푸린 하늘에선 소나기라고 부르기엔 너무 짙고 장마라고 부르기엔 약간 옅은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곧 있으면 장마라고 떠들어대는 일기예보 소리를 반쯤 흘려들으며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사이, 옆에서 가볍게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린 날 맞이하는 건 어머니의 웃는 얼굴. 히나처럼 밝지만 차분한 분위기가 가미된 그 미소에 정신을 차린 난 자리에 일어나 어머니를 돕기 시작했다.
오늘의 아침은 평소처럼 평범한 일식. 상차림을 마치고 난 후 자리에 앉아 된장국을 마셨다. 큼직한 두부가 마음에 들었다.
“사요쨩, 주말인데도 일찍 일어났구나.”
“네.”
아직 비어있는 옆자리를 흘깃 바라보며 대답했다.
“오늘은 밴드 연습이 없는 날이라 아침 일찍 악기샵에 갈 생각이에요.”
“별일이네. 사요쨩이 밴드연습을 쉬다니.”
“미나토씨가, 아니, 리더가 사정이 있다고 해서요.”
“후훗.”
“왜 그러세요?”
“아니, 아무것도.”
그렇게 말하는 어머니의 표정은 자애로운 미소로 가득해 있었다.
“정말 열심이구나.”
“네. 히나와 약속했으니까요.”
어느새 낯간지러운 소리도 자연스럽게 하게 됐다고 스스로 감탄하며 젓가락을 놀렸다. 확실히, 요 1년간 히나와의 관계는 정말 많은 진전이 있었다. 예전에는 말조차 섞기 싫어했었지만, 지금은 서로를 이해하고 버팀목으로 서로를 지탱하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히나는요?”
“어제 늦게까지 촬영이 있었잖니? 피곤할 거 같아서 계속 자게 놔뒀단다.”
덕분에 히나와의 관계는 무척 순탄, 아니 순탄한 것을 넘어 어떤 일이든 다시 예전처럼 웃으며 이야기 할 수 있게 되었다. 분명 작년 이맘때 즈음의 난 상상조차 못했겠지. 그러고 보니 히나와 화해하는데도 로젤리아 멤버들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었다. 특히 도망치지 말고 마주보라며 용기를 북돋아준 리더의 말은 내게 큰 구원이 되었었다.
‘히나에게 우산을 주기도 했었지. 다음에 만나면 다시 한 번 고맙다고 인사를 해야겠네.’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한 번 된장국을 들어 마시는 사이, 뒤에서 잔뜩 늘어진 동생의 목소리가 들렸다.
“흐아아암~. 아, 언니다! 좋은 아침~!”
“히나, 하품하면서 인사하지 말렴.”
“네에~.”
“그리고 껴안지도 말고.”
“으, 왜 다 안되는건뎅.”
내 어깨에 손을 짚은 채 흐느적거리던 히나는 자리에 앉자마자 다시 불평을 내뱉었다.
“에엑, 또 두부?! 최악이야…….”
“편식은 몸에 좋지 않단다. 많이 먹어야 언니처럼 키 커지지.”
“고등학생부턴 키 안 크지 않아?”
“후훗.”
“봐봐, 언니도 웃잖아!”
불과 작년까지만 해도 상상조차 못하던 일상적인 풍경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히나의 칭얼거림에 마지못해 두부를 건져내는 어머니의 모습을 바라보다 문득 창가를 내다보았다. 창가에선 빗방울이 조심스럽게 창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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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잔잔해질 때까지 기다리려 했지만, 그칠 기미는 없어보였기에 포기하고 집을 나섰다. 도중에 히나가 파스파레 연습을 빠지고 따라오려 했기에 제지했다. 그 결과 히나가 볼을 부풀리며 항의했지만, 개인의 변덕으로 타인에게 민폐를 끼치는 일은 지양해야한다는 내말에 히나는 볼을 부풀린 채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 이후 발생한 만남은 순전히 그런 개인의 변덕 덕분이었다. 언제나 들르는 가게에서 스트링을 고른 후, 계산대로 향하던 도중 진열대에 놓여있는 이펙트가 눈에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히나와 이펙터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기도 했었다는 걸 떠올린 난 나도 모르게 이펙터를 들어 올렸다. 다음에 히나와 들를 때를 대비해 이것저것 둘러보는 사이, 주변이 밝아진 듯 한 느낌에 고개를 돌렸다. 여전히 구름이 끼어있는 하늘이었지만, 그친 빗방울 사이로 햇빛이 내리쬐고 있었다.
내 마음 속까지 맑아지는 그 광경에 불현 듯 좋은 멜로디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가방에서 수첩을 뒤적거렸지만 가벼운 차림으로 나오다 보니 핸드폰과 지갑 뿐 이었다. 일순 허밍으로 녹음이라도 할까 고민했었지만, 밖에서 그러기엔 역시 눈치가 보였기에 그냥 발걸음을 재촉했다.
너무 허둥댄 벌이었을까? 가게 문을 나오자마자 기세 좋게 자그마한 체구의 여성과 부딪혀버리고 말았다. 다행히 바닥이 그다지 미끄럽지 않았기에 반사적으로 휘청이는 그녀의 허리에 손을 뻗어 지탱할 수 있었다.
“죄, 죄송합니다. 서두르다보니…….”
“아뇨, 저도 주변을 제대로 보지 않았습니다.”
상대방에게선 익숙한 목소리와 향기가 났다.
“어라, 미나토씨?”
“사요, 우연이네. 그것보다 이제 괜찮으니 놓아주겠어?”
“아, 네. 죄송합니다.”
내 품 안에서 빛나는 호박빛 눈동자에 사과를 건냈다. 평소 히나를 제외하면 타인과 이렇게 가까운 거리를 취한 적이 없었기에 당황해버리고 말았지만, 되도록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하며 슬며시 곁에서 떨어졌다.
언제나처럼 품위 있어 보이는 차림의 미나토씨는 가슴에 작은 화분을 소중하게 꼭 껴안고 있었다. 그렇지만 새로운 오브젝트가 늘었음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허전하게 느껴졌다. 평소와는 달리 배색이 흑백 톤 일색이라 그런걸까, 아니면…….
문득 떠오른 생각에 나도 모르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요?”
“네?”
“……리사라면 오늘은 부모님과 영화를 보러 간다 그랬어.”
“아, 아뇨 딱히 이마이씨를 찾은 건…….”
“…….”
“죄송합니다.”
살짝 불만스러워 보이던 미나토씨는, 아무런 말없이 바닥에 떨어진 검은 레이스가 달린 우산을 집어 들곤 톡톡 가볍게 바닥에 두드렸다.
그 시간 동안 헛기침을 하며 생각을 정리한 난 말문을 돌렸다.
“국화꽃인가요?”
“그래. 조화긴 하지만.”
화분을 들고 이상은 없는지 확인하던 미나토씨가 가볍게 툭 내뱉었다.
“소중한 친구의 기일이라서 말이야.”
“그, 저…….”
“그런 표정 지을 필요 없어. 어렸을 때 일이니까.”
아무리 어렸을 때라지만, 둘도 없는 친구가 사라진 게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 되는 걸까?
문득 작년 일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리고 말았다.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 없어.”
“아, 네.”
“깊게 생각할 때마다 인상을 찌푸리는 버릇, 졸업하기 전까지 고치는 게 좋을 거야.”
아까와 똑같은 거리에서 미나토씨가 부드럽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나도 잘난 것 하나 없는 입장이지만 말이지.”
뭐라 대꾸해야 좋을지 몰라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지만, 미나토씨의 표정은 평소처럼 차분한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보이지 않게 슬쩍 시계를 바라보았다. 시간은 10시 23분. 히나는 제대로 연습을 하고 있을려나? 저번처럼 시라사기씨를 억지로 끌고 카페에 놀러가지 않는다면 다행일텐데.
“-요. 사요?”
“아, 네. 죄송합니다. 잠시 다른 생각을 하느라.”
다른 사람을 앞에 세워둔 채 딴 생각에 빠지고 말다니,
속으로 자신의 허술한 태도를 책망하는 내 귀에 미나토씨의 차분한 말이 와 닿았다.
“……사요. 혹시 이 뒤에 약속이라도 있어?”
“아뇨. 오늘은 집에서 연습할 생각이었습니다.”
“그래. 그럼 나와 같이 가주지 않겠어?”
“네?”
성묘에? 내가?
“저보단 이마이씨가 더 적임일거라 생각하는데 말이죠.”
“리사는 금방 울어버리니까. 늘 내 몫까지 울어준다면서 말이지.”
“네…….”
“이렇게 말하면 좀 이상하지만, 사요는 조용하니까.”
차분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는 그녀에게 난 조용히 고개를 끄덕일 수 밖 에 없었다. ‘고마워’라는 말이 귓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언제나처럼 앞을 걸어가는, 하지만 평소보다 다소 작아 보이는 등에 왠지 모를 이상한 감정이 고개를 들었다. 문득 방금 전까지 미나토씨를 껴안고 있던 손을 들었다.
희미한 꽃향기가 내 품 안에 머물다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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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를 타고 몇 정거장을 지났을까? 작은 동행인을 따라 내린 곳은 인적 드문 한산한 교외지역이었다. 또다시 내리기 시작한 작은 소나기에 우산을 펼치고 걸어가길 잠시, 우리의 눈 앞에 작은 공원이 펼쳐졌다.
“여기야.”
시선을 돌려 명패를 찾아보았다. 도쿄 XX동물묘지. 예전에 기사에도 났던 곳이었다. 확실히 이곳은 납골당처럼 운영되는…….
“애완동물 묘지, 인가요?”
“그래.”
나무 사이로 가지런히 정리된 길이 쭉 뻗어 있는, 아름다운 공원이었다. 다른 공원들과 다른 점은 각양각색의 표정을 한 방문객들이 스치고 지나가는 길 한복판에는 에마가 걸려 있다는 것. 주변에 서서 무언가 이야기하는 어른들 사이로 어린 아이들이 색연필로 무언가를 그리고 있었다.
아무 말 없이 그 광경 속으로 걸어가던 미나토씨는 고양이가 그려진 에마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곤 입을 열었다.
“기껏해야 애완동물이 죽은 걸 가지고 친구가 죽었다니, 좀 유치하지?”
“아니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이 그다지 길진 않았지만, 그래도 이 질문에 한해선 올바른 대답을 알고 있다 자부할 수 있었다.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대답했다.
“다른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건, 정말 대단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니까요. 그건 대상이 사람이 아닌 동물이라도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마워.”
미소 지은 그녀의 어깨 너머로 독특한 모양의 탑이 보였다. 심미적……이라고 하기엔 다소 밋밋한, 도심의 콘크리트 빌딩을 연상하게 하는 그 탑엔 조촐한 사당이 마련되어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작게 목례를 하며 도달한 사당엔 방금 전 스쳐지나간 사람들이 피워놓은 향이 조용히 연기를 내며 타들어가고 있었다.
사뿐사뿐 걸어간 그녀를 따라 기도를 올렸다. 그녀는 도대체 무엇을 빌고 있는 걸까? 늘 진지한 성격대로 지난 1년간의 근황을 신께 보고하는 걸까? 아니면 잠든 자신의 친구를 위한 기도?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기도가 끝났다. 우리는 여행의 목적지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납골당으로 들어선 우리를 맞이하는 건 다소 좁은 통로를 따라 바닥부터 천장까지 가득 들어서있는 새하얀 납골함이었다. 도서관과 비슷하면서도 백색의 항아리로 가득 찬 이곳은 서글픔과 엄숙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살짝 굳어진 몸을 풀고자 짧게 숨을 내쉬었다. 향과 꽃, 그리고 오래된 종이의 퀴퀴한 냄새가 났다.
“이런 곳에 온 건 처음이라, 다소 긴장되네요.”
“그렇네.”
미나토씨가 앞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도 자주 오다보니 익숙해졌네..”
“…….”
“가자.”
스쳐지나가는 납골함에는 모두 저마다의 글씨체로 다양한 이름이 써져 있었다. 타마, 왕코, 네로 등등…… 지나가는 모든 장소마다 가족들이 남기고 간 흔적이 남아 있었다. 사진과 우편이 붙은 엽서가 눈에 들어왔다. 문득 페르세포네와 데메테르의 이야기가 생각났다.
“여기야.”
미나토씨가 발걸음을 멈춘 곳. 그곳엔 ‘미케’라는 이름이 적힌 납골함이 놓여 있었다. 지나치며 본 곳들처럼 맑게 정돈되어 있는 느낌의 자리에는 각종 조화와 액자가 놓여 있었다. 상단에 어린애의 삐뚤삐뚤한 글씨로 ‘미케와 유키나’ 라고 적혀있는 작은 액자엔 갈색 장모종 고양이를 껴안은 어린 미나토씨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천수를 누리다 갔다고 해.”
“…….”
그녀가 조화를 단상 위에 올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그 당시에는 이해하질 못했었어. 어렸을 때부터 같이 지내온 소중한 친구 중 한 명이 갑자기 사라져 버린 거였으니까. 리사는 그대로 내 옆에 있는데 미케는 어째서? 하는 생각 뿐이었어.”
뭐라고 말을 꺼내야할지 몰라 버벅거리는 날 못 본 체 하며, 그녀가 묵묵히 말을 이었다.
“리사가 고생이 많았지. 그때는 리사의 머리카락을 볼 때마다 울먹였으니까.”
미나토씨가 두 손을 마주대고 눈을 감았다. 바람 한 점 없는 실내였지만, 마치 누가 건들고 지나가기라도 한 것처럼 그녀의 연보랏빛 머리카락이 찰랑거렸다. 모처럼만에 방문한 친구를 반기는 손길일려나? 그녀와 오랜 친구의 교류를 방해하지 않고자 나도 눈을 감았다.
몇 분이 지났을까. 기도를 마친 그녀가 깊게 숨을 내쉬었다.
“이 아이 덕에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말자고 마음먹게 되었어. 물론, 당시에는 아버지의 일도 겹쳐 그럴 생각을 할 정신도 없었지만.”
“……네.”
“그래도 이 아이 덕분에 내가 있다는 걸 사요 너에게 알려주고 싶었어. 그냥 그것 뿐 이야. 오늘은 내 변덕에 어울려줘서 고마워.”
“아뇨. 저는 아무것도…….”
고개를 숙이는 그녀에게 당황해 헛기침하며 말을 끊었다.
“……오히려 아무 준비 없이 따라와버려 죄송합니다.”
“됐어. 내가 권유한 거니.”
아까보다 한결 가벼워진 표정으로 미나토씨가 포근하게 웃었다.
“그건 그렇고 이제 곧 점심시간이네. 근처에 메밀국수와 오코노미야끼 가게가 있는데, 어디가 좋아?”
“후훗. 오코노미야끼라니. 후후훗.”
“……사요?”
“아, 아뇨. 그냥 저도 모르게…….”
그래, 미나토씨도 나와 같은 고등학생일 뿐이었다. 누구보다 파란 장미가 어울리는 그녀였지만, 그녀도 나와 같이 두 발로 지상을 딛으며 살아가는 사람. 그렇게 생각한 순간 가슴 속에서 차오르기 시작한 영문 모를 감정의 격류에 놀라면서도, 간지러운 파도를 즐기며 다시 한 번 웃음을 내뱉었다. 파스타가 어울리는 사람의 입에서 오코노미야끼라니.
“내가 이상한 말이라도 한 걸까시라.”
“아뇨, 잠깐 다른 생각을 하느라……. 후훗. 이제 괜찮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오코노미야끼로 하죠.”
무언가 말하고 싶은 듯 호박색 눈동자가 잠시 날 바라보았지만, 이내 내 곁을 스쳐 지나갔다. 부드럽게 찰랑이는 머리카락에 절로 뻗어지는 손을 만류하며 나도 따라 나섰다. 밖은 어느새 다시 비가 내리고 있었다. 아침의 그것보다 본격적으로 내리기 시작한 소나기. 가방에서 접이식 우산을 꺼내는 날 기다리던 그녀가 가만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잠깐 사이에 비가 내리기 시작했네.”
“그러게요.”
우산을 펼치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빗방울이 부셔지는 검은 우산 아래에서, 부드럽게 찰랑이는 연보랏빛 머리카락의 아가씨.
“근사한 풍경이네요.”
서늘한 바람 사이로 라벤더 향기가 물씬 풍겼다. 여름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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