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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 강화, 1955년 5월~10월
빙쑤옌에 대한 공격으로 응오딘지엠의 반공 정적들에 대한 정책이 단호해졌다. 사이공 전투는 종교파 적들에 대한 승리 중 첫 번째였고, 성공을 거둘 때마다 응오딘지엠의 혁명위, 바오다이, 프랑스에 대한 반대 행동이 대담해졌다. 제네바 협약 2주년때, 그는 스스로가 베트남 공화국의 절대적인 지배자임을 알아챘다. 총리는 혁명위의 정치적 동력을 약화시키기 시작했다. 1955년 5월 4~5일, 그는 혁명위보다 좀 덜 급진적인 요구를 할 만한 회의를 개최했다. 모임을 위해 600명의 대표가 전국에서 독립궁으로 모였다. 하지만 다원적인 혁명위와는 달리, 그들 전부가 총리 스스로의 정당인 근로인위혁명당에 속해있는 사람들이었다. 혁명위가 했던 즉각적인 정부 해산 요구와 다르게, 새 회의는 좀 더 온건한 요구, 바오다이가 그의 모든 권력을 새 입법부에게로 넘길 시기인 6개월 내로 바오다이가 응오딘지엠을 권좌에 올리기 위해 총선을 조직할 것을 결의했다. 이 6개월의 여유가 총리가 보통선거 전까지 그의 권력을 강화시킬 시간을 줄 것이다. 5월 10일, 총리는 자기 친지들은 포함하지만 혁명위의 지도자들은 배제한 새 내각을 구성했다. 그의 첫 내각과 마찬가지로, 5월 10일에 성립된 정부는 다원적인 반공주의 연합이 배제되고 대신 그가 선호하는, 그에 대한 충성도는 높지만 정치적으로는 협소한 측근 집단의 대표적 예시였다. 혁명위는 단념하지 않고 그들의 계획을 홍보했다. 총리의 새 의회가 심의될 동안, 혁명위는 바오다이를 반대하는 집회를 사이공 시내의 극장에서 열었고, 나중에는 그들의 정치적 입장을 설명하기 위한 기자회견을 열었다. 흥미롭게도, 바오다이에 대한 대중적인 성토를 이끌어낸 것은 정부보다는 혁명위 쪽이었는데, 이것은 혁명위의 반봉건주의에 대한 기여를 다시금 보여주는 증거였다.
5월 중순에, 총리는 그의 종교파 정적들을 군사행동, 금전 제시, 협상을 포함한 방법으로 제거하는 일에 착수했다. 응오딘지엠은 호아하오의 각 장군들에게 많은 돈을 제시했으나, 이미 그들은 정부에 저항하기로 합의가 된 상태였다. 총리는 그러자 강경책으로 돌아서서 베트남 국민군을 보내 메콩 삼각주에 자리잡은 호아하오군을 공격하라고 했다. 국민군에서 떠오르는 별이자 나중에 응오딘지엠을 엎어버리는 쿠데타의 주모자가 되는 Dương Văn Minh가 1955년 6월 껀터에서 성공적인 공격을 이끌었다. Nguyễn Giác Ngộ와 Lâm Thành Nguyên는 패배하자 정부에 합류했다. 사이공에서, 응오딘지엠은 호아하오교의 장군들이 잔혹하고 탐욕스러운 산적이라고 비난했는데, 이건 또 다른 반봉건주의의 주제였다. 특별히 Năm Lửa와 Ba Cụt을 가리키며, 총리는 주장했다: "여러분, 나의 동포들은 그들이 하우장 강의 주민들을 믿을 수 없을만큼 야만스럽게 약탈하고, 강1간하고, 고문하고, 죽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총리는 호아하오가 자치적으로 다스리던 시기가 착취적이고 부패한 때였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불과 수년만에 백만장자가 되었으며 우리 동포의 피와 뼈 위에 거대한 재산을 쌓았습니다."
제네바 협약에 따르면, 남북 베트남의 정권들은 재통일 준비를 위한 총선거를 1955년 7월 20일 이전에 실시하도록 되어 있었는데, 그들이 협약에 서명한 지 정확히 1년 뒤였다. 대신, 응오딘지엠은 베트남 민주 공화국이 너무 비민주적이라서 자유 선거를 치를 수 없다고 주장했고 바로 그 날 공산주의 고발 캠페인을 시작했다. 3달 전, 처음으로 그는 공개적으로 '세 적 공식'을 혁명위를 타겟으로 공표했었다. 이 캠페인은 혁명위가 하고 있던 공산주의 비판 및 바오다이 축출과는 같은 일이었으나 또한 경쟁적이었다. 반공주의자들이 제네바 협약을 공산주의자들의 배신의 결과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이 캠페인은 협약에 대한 비판으로 시작했고 국제 통제 위원회(ICC)에 반대하는 시위를 전개했으며, 이것을 감독하기 위한 위원회도 들어섰다.
혁명위 역시 마제스틱 호텔과 갈리에니 호텔에서 ICC 위원들과 같이 머물던 ICC에 파견된 북베트남 대표들을 추방할 것을 요구했다. 캠페인 첫날, 20만명의 사람들이 사이공 시청 앞에 모여 반 제네바 협약 연설을 하고 ICC의 본부였던 갈리에니 호텔, 그리고 독립궁으로 행진하려 했다. 시위는 반공주의 폭도들이 갈리에니 호텔과 마제스틱 호텔을 털면서 과격해졌다. 서구권 취재원들은 이 공격에 정부가 관여하고 있다고 제기했고, ICC 지도부는 지역 경찰이 개입하는 데 실패했다고 주장했으나, 응오딘지엠은 나중에 유감을 표하고 참여자들 수십을 잡아들였다.
여전히 이 시위와 폭동을 누가 주도했는지 명확하지 않다. 혁명위와 정보부가 경쟁적으로 시위를 통제하에 두려고 했으나, 증거에 따르면 전자 쪽이 폭력사태에 더 책임이 있는 걸로 보인다. 혁명위의 장관이자 찐민테의 세력이었던 국민 저항운동의 지휘관 Nhị Lang은 나중에 혁명위가 시위와 폭동 양쪽 모두의 배후였다고 믿었다. 그는 혁명위가 학생들을 모아 호텔에 있던 ICC의 북베트남 대표들을 생포하라고 지시했다고 주장했다. 이 설명은 양쪽 호텔에서 폭도들이 대부분 월남민 학생들이었으며 따르던 사람들 상당수가 죽은 찐민테의 추종자들이었다는 목격담으로 신빙성이 강화된다. 사실, 폭동의 무질서함은 혁명위 개회식 때 이들의 야단법석인 행동을 떠올리게 한다. 더욱이, 응오딘지엠은 즉시 폭동과 그의 행정부 사이에 거리를 뒀다. 그의 정당 근로인위혁명당의 어용신문이던 Cách mạng quốc gia(국가혁명)은 이 시위를 광범위하게 다뤘으나 폭동에 대한 언급은 피했다. 정부는 또한 공동 성명을 발표해서 폭력사태의 책임을 공산주의자 첩자들에게 돌리고 시위가 ICC를 상대로 한 것이 아닌 반공 시위였다고 주장했다. 이런 반응을 보아 정부는 시위 자체에는 손길을 뻗었지만 폭동을 주도하진 않은 것 같다. 혁명회가 폭동을 주도할 역량이 있었다는 사실은 이들이 여전히 정부와 따로 행동할 수 있는 강력한 경쟁자였음을 시사한다.
1955년 여름과 가을 초 동안, 응오딘지엠과 그의 정부는 바오다이에 대한 중상모략 캠페인을 지휘했다. 혁명위의 이 반봉건 소요사태에서의 역할은 분불명하나, 이들이 바오다이를 강하게 규탄한 것을 보아 참여는 했을 가능성이 높다. 마침내, 10월 초에, 내무부 장관 Bùi Văn Thinh는 10월 23일에 국민 투표가 시행될 것을 발표한다. 그는 베트남국의 설립 이래로 나라가 7년 동안 민중의 지지를 받는 어떤 대표자도 없는 "불분명한 정치체제" 아래에 있었다고 설명했다. Bùi Văn Thinh는 그러나 "반항적인 봉건주의 군대가 공공연하게 무력을 쓰고 사람들의 공익을 배반한 이래로" 사람들이 현행 체제의 종식을 요구하기 시작했다고 주장했다. 장관이 "봉건주의 군대"라고 했을 때 누구를 의미했던 것인지는 불분명하나, Nguyễn Văn Hinh나, Nguyễn Văn Vỹ, 빙쑤옌, 호아하오, 또는, 바오다이를 의미할 수도 있었다. 혁명위는 바오다이를 몰아내자는 국민투표를 지지했으나, 그들이 이 투표에 미친 영향은 아무것도 알려져 있지 않다.
발언 강도는 투표가 다가올 수록 강해졌다. 대중 언론은 바오다이가 식민주의의 방탕한 허수아비라는 이미지가 널리 퍼지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두 일반적인 용어가 이 논의를 지배했는데, '무지몽매한 왕'이라는 뜻의 hôn quân와 인형이라는 뜻의 bù nhìn이 그것들이었다. 10월 17일, Thời Cuộc(현 정치)라는 신문에 실린 논평 하나가 바오다이를 제네바 협약 이래로 프랑스를 섬길 뜻이 있다는 혐의로 비판했다: "바오다이는 아직도 스스로 이전과 같은 허수아비 역할을 하려 하며, 산적 장군들 Vỹ와 Hinh의 쿠데타 같은 반란군을 이용한 반란을 획책한다." 비슷하게, 주간지 Ý Dân(인민의 의지)의 사설은 바오다이를 "무지몽매한 왕이자 대반역자, 썩고 한물 간 체제의 상징이자, 식민주의자들을 이용해서 인민의 공익을 배반하려는 반동적 봉건주의 패거리들의 대변자"라고 묘사했다. 다른 비평들은 전 황제의 도덕성을 다뤘다. 저널 Đường Sống(삶의 길)은 한 글을 급보로 실었는데, "Cần phải truất phế"(폐위는 불가피하다)라는 제목이었는데, 바오다이의 방탕한 행각은 베트남의 전통 도덕성과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바오다이는 타락한 습속과 퇴폐적인 습관들로 가득찬 체제를 유지했는데, 이는 베트남 사회의 기둥인 삼강오행을 거부하는 체제다." '삼강'과 '오행'은 조화로운 사회를 위한 유교적 이상을 뜻했다. 그러므로, 바오다이의 건재는 계속되는 부패를 의미했다: "바오다이가 남아있는 한, 모든 계층에서 뇌물들이 계속 오고갈 것이고, 베트남의 수도를 거대한 매춘굴로 바꿀 수치스러운 신호가 있을 것이다." 다양한 비판들이 바오다이가 프랑스인들과 베트남의 장군들과 유착되어 있으며 도덕적인 방탕을 불러왔다는 생각을 강화시켜줬는데, 이것들은 나중에 반봉건주의 글들에 지배적으로 나타나 있다.
1955년 10월 23일에 있던 부정1선거는 정부의 굉장한 승리였다. 10월 26일, 응오딘지엠은 베트남 공화국의 건국을 선포했으며 지지자들이 독립궁에서부터 환영 행진을 했다. 그는 스스로를 대통령으로 선언했으며, 정부는 10월 26일을 국경일 공화국의 날로 지정했다. 응오딘지엠은 마침내 바오다이, 빙쑤옌, 호아하오의 반대를 물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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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찮아도 걍 번역해서 올린다. 내가 시작한거니 어쩌겠어.
요약
1. 응오딘지엠의 권력 집중 시작과 반공적, 반 제네바 협약적 여론의 성립
2. 사이공에서의 반공 시위, 그 와중에 일부가 폭동을 일으킴
3. 바오다이는 계속해서 프로파간다로 온갖 나쁜 이미지를 뒤집어쓰고 퇴출당함.
찐민테의 조직이 폭동의 배후였다는 걸 보면, 카리스마 있는 리더가 죽고 나서 이들이 좀 과격해진 걸 알 수 있음.
물론 반공적인 여론이 강하기야 했지만, 호텔을 습격해서 북베트남 쪽 대표자들을 공격하려고 든 건 좀 많이 과격했지. 정치적으로도 미흡한 행동이었고.
글 앞부분을 대충 훑어보니까, 이제부터 내가 이 번역글을 썼던 진짜 이유인 응오딘지엠의 진짜 트롤짓이 시작될 거 같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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