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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 나는 대역물의 지향점으로 '역사를 사랑하되 역사에 기대지만 않는 글'을 바랐다. 그 예로는 코수양, 저 글을 쓴 이후로 접한 내독나없 등이 있다.

두 작품의 특징은 시대정신과 당대인들의 사고(개개인의 사고, 당대인들의 '시대정신' 등)를 우선 깊이 이해해보려 했다는데 있다. 그리고나서 하나의 전환점이 올 때 그들은 자신들의 사고방식에 따라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할지를 시뮬레이션을 돌린 후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 (각 작품이 어떤 식으로 이야기를 만들어갔는지에 대해서는 리뷰 카테고리의 내 글들에서 정리했으니 여기선 생략하겠다.)

반면 블랙기업이나 응79 같은 작품들은 첫번째 과정이 결여되어있다. 작가 본인이 역사에 대한 편견이나 경도된 사고에 물들어 있거나, 그것을 갖고 있는 독자들의 입맛에 맞추어서 글을 쓴다. 역사에 대한 사랑이 없다. 돈을 위해, 또는 자신의 그릇된 신념을 위해 글을 쓴다고 밖에는 볼 수 없다.

글을 쓸때든 영화를 만들때든 창작물을 만들때 가장 기본된 자세는 자신이 다루는 소재를 사랑하거나 최소한 존중이라도 하는 것이다. 글은 절대 그자체로는 가치 있는 것이 될 수 없다. 글은 근본적으로 가치를 담아내는 그릇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가치 있는 수많은 일들이 있다. 가령 바둑이 가치 있고, 숯을 굽는 일이 가치 있고, 판소리와 창도 가치 있고, 그저 강이 아래로 흐르는 일도 가치 있으며, 대역물에서 소재로 쓰는 역사의 과정 하나하나가 모두 가치 있다. 다만 이런 것들의 가치를 제대로 아는 이들은 그 가치를 몸소 체험하는 당사자들 뿐이다.

각각의 가치를 외부인들이 느끼는 방법은 그들도 직접체험하거나 아니면 여러 매체로 간접체험하는 것이다. 하지만 간접체험의 과정에서, 또는 미욱한 이들은 직접체험의 과정에서조차 그 가치를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소재들의 가치의 당사자가 되지 않는 이상, 가치들은 그것이 전달되는 과정에서 손상될 수 밖에 없다.

'글'이 지향해야할 바가 여기에 있다. 글은 가치 있는 것들을 가장 덜 망가지게 담아내는 그릇이어야만 한다. 자신이 다루는 소재가 망가지든 말든 상관없이 그릇의 모양만 예쁘게 만들려하는 것은 글의 존재 의미 자체를 호도하려는 행위에 불과하다.

내가 코수양과 내독나없을 좋아하고 블랙기업조선 같은 작품에 싫증을 느끼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가치 있는 것을 자기 그릇에 담아내려하는가, 아니면 그릇의 모양만 이쁘면 된다는 오만함에 빠졌는가. 대역물은 역사라는 소재를 다루기에, 대역물이 제대로 된 글이 되기 위해서는 역사 속 가치있는 것들을 우선 애정어린 시선으로 바라봐야한다.

그저 역사에 대한 기존의 편견, 또는 자신의 편협한 사고에 경도되어 상상으로 만든 역사관을 담아낸 글을 과연 글이라고 할 수 있는지부터 의문이다. 역사라는 소재가 살아있는 생물이라면, 그런 글들은 생물의 건강과는 관계없이 그 생물이 만들어낸 가치-양분을 빨아먹는 것으로 자신의 배부름을 도모하는 존재에 불과하다.

한마디로 기생충 같은 놈들이다. 그들은 어떤 가치도 생산할 수 없다. 가치를 최대한 애정어리게 담아내지도 않는다. 그저 타인이 만들어준 양분을 쪽쪽 빨아먹을 뿐이다.






* 상기한 블기 등의 작품을 즐겁게 읽던 독자들에게 모욕이 될까 첨언하자면, 독자들이 나쁘거나 어리석다고 한 것은 아니다. 재벌물의 문법에서 받아들일때 그 장르의 특성이 취향에 맞는 독자들이 블기를 즐겁게 읽는건 당연한거고 그것은 선악의 구분에 해당될 수 없다. 내가 비판하는 것은 작가의 태도이다. 역사물(의 탈을 쓴 재벌물)을 쓰면서 역사란 소재의 가치를 무시하는걸 넘어서, 편견을 재생산하기까지 하며 가치를 손상시키는 태도 말이다. 블기가 가진 재벌물/막 나가는 작품의 테이스트를 즐기는 독자에게 화살을 돌린 것은 결단코 아니며, 그렇게 받아들인 분들께는 내가 충분히 오해살 수 있는 글을 썼다는 점을 사과드린다.






* 내가 마치 트랜스포머 같은 영화에도 시대정신 들먹이며 비난 퍼불을거라고 생각하는 댓글 있어서 좀 보충 설명하겠음. 트랜스포머가 언급된 김에 그걸 예로 설명하자면, 난 트랜스포머 싫어하긴 함. 근데 그게 시대정신이고 뭐고가 없어서 그런게 아님. 시대정신 같은건 어디까지나 역사가 주 소재고 배경이고 인물의 출처인 대역물들에서 고려해야할거니까 트랜스포머에 그 잣대 들이밀면 안되지. 내가 트랜스포머 영화 싫어한건 그게 원작+로봇들이 나와서 시밤쾅 와장창 퍽퍽 푸러덕푸드덕해야하는 장르에 대한 존중이 (시리즈 진행할수록) 사라져서임. 그나마 초기작은 (메간폭스 몸자랑 거슬리긴 하지만 걍 레이싱걸 같은 느낌으로 자동차 강조한거라 치고) 인간이 조력자 느낌 정도였다면... 아니 이거 메카물 아님? 메카물이란 소재 어디가고 왠 인간들 시시덕이 서사의 중심이야? 로봇들은 왤케 간지가 안 나? 리얼스틸의 격투로봇들이 훨씬 간지난다. 로봇을 멋있게 만들거나 서사의 중심에 넣거나 그러려는 노력이 안 보임. 그냥 로봇은 블록버스터 연출의 도구 정도로밖에는 안 쓰는게 눈에 보인다는거. 그게 너무 거슬린단 말야. 좀 말이 길었는데, 요는 소재에 대한 애정이 담겨있는지, 소재의 가치를 작가가 심미하였는지 라는거. 그저 자신의 작품진행의 도구 정도로 쓴다? 이걸 과연 "(트랜스포머의 경우엔) 메카물로서", "(블기의 경우엔) 역사물로서" 제대로 된 작품이라 볼 수 있냐는거지.



* 몇시간 이런저런 논의를 한 결과 블조 같은 작품이 판을 키운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이라고 생각을 수정했다. 작품 내적으로 역사를 다루는 작품으로서의 완성도는 커녕 역사란 소재에 기생할 뿐이라는 생각은 변치 않지만, 작품 외적으로는 긍정적으로 평가해본다. 대역장르에 유입독자가 늘어서 내가 긍정적으로 평하는 작품들도 수혜를 입을 수 있단 점은 인정하는게 맞겠다.

https://m.dcinside.com/board/alternative_history/243485?recommend=1

작품 외적인 측면에서 블조의 가치가 언급된 글이다. 좋은 글이니 많이들 읽어보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