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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조선의 선물경제는 왜 사라졌는가?

lemiel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3.08.27 09:42:45
조회 2920 추천 29 댓글 105
														


조선 전기 선물경제는 어떻게 형성되었나?(링크) 에서 바로 이어집니다. 


조선의 선물경제는 왜 사라졌는가?


 이전 연재글 고려의 선물경제는 합법적인 제도로부터 시작되었다.(링크) 에서 선물경제의 근원은 신라시대부터 이어져온 피지배층에 대한 지배층의 노동력 수취를 통한 현물조달에 있었다고 설명드린바 있습니다. 


 위에서 소개한 선물경제의 재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재지사족이 지방관에게 받은 선물은 공납과 요역을 통해서 피지배층에게서 획득한 다양한 공물과 현물입니다. 이러한 공납과 요역을 면제시켜주는 청탁의 대가로 재지사족이 피지배층에게서 획득한 것도 그들의 노동력을 통해 생산된 다양한 현물들이죠.


 재지사족이 이러한 현물들을 선물이나 청탁의 대가를 통해 수수할 수 있는 것은 조선이라는 국가가 신라시대부터 이어져온 조용조 체계, 즉 공납과 요역을 통해서 피지배층에게 노동력을 수취해 필요한 현물을 조달하는 인두세 기반의 수취구조를 계승해왔기 때문입니다. 


 국가가 공납과 요역을 통해 다양한 현물을 직접 수취하는데, 이는 화폐, 곡물, 포(布)같이 비교적 정량화된 수취구조에 비해서 그 부과과정이 모호하고 중간에 빼먹기도 매우 쉽습니다. 


 17세기 이후 대동법은 이러한 공납을 토지에 부과되는 전세(田稅)에 합쳐버립니다. 이제 약 400두(斗)를 생산한다고 가정된 1결(結)의 토지에 100두(斗)의 조세가 책정됩니다. 이렇게 획득된 재원의 일부인 40~60%를 유치미(留置米)로 해서 지방재정으로 활용하게 됩니다. 


 비공식적이고 복잡다단한 다양한 현물로 구성된 재정이 공식화되고 정량화됩니다.


 이로 인해서 지방관에 의한 지방재정의 유용이나 청탁을 통한 공납과 요역의 면제는 이전에 비해 어려워지게 되죠. 대동법 뿐만 아니라 요역도 점차 면포(布)나 화폐로 납부(金納)하게 되니까요.


 중앙 관청에서 지방의 유치미를 정량화해서 파악할 수 있으므로 관행에 맞겨지던 지방재정에 대한 감찰이 쉬워집니다. 18~19세기가 되면 대동법의 유치미 비중이 감소하기 때문에 조선 전기처럼 지방관이 현물을 재량적으로 사용할 여유도 감소합니다.  


 아마도 이러한 변화에 가장 크게 영향을 받은 것이 재지사족의 선물경제였을 겁니다. 그들은 비공식적이고 간접적인 수단을 통해 선물경제를 영위해왔는데 그럴 여지가 대폭 감소했으니까요.


 또한 대동법 도입 이후 빠르게 발전한 시장경제와 지방시장의 발전도 영향을 미쳤을겁니다. 이전과 달리 시장에서의 거래를 통해 손쉽게 필요한 수요를 충족시킬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하지만 순수히 이런 경제적인 측면만 영향을 미친건 아닙니다.


 기존 연재글에서 소개한 바와 같이 16세기가 되면 향리는 재지유력자로서의 지방에 대한 정치적 영향력을 거의 상실하고 피지배층으로 전락합니다. 신라시대부터 같이 통혼해왔던 재지유력자들이 일부는 재지사족(在地士族)으로 일부는 이족(吏族)으로 아예 혈연과 신분이 구분된 존재가 되는거죠.


 국가가 향리층을 더 이상 견제해야할 필요성이 거의 사라졌다는 의미입니다. 그럼 왜 굳이 향리를 견제할 재지사족이 지방통치에 필요하죠?


 17세기 이후 조선의 향촌지배는 이제 완전히 완성됩니다. 지방관은 완전히 관에 의해 주도되는 통치를 정착시키죠. 과거 호족의 진정한 후예라고 할 수 있는 재지사족은 더 이상 중앙조정을 위협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합니다. 


 18세기에 가면 경향분기(京鄕分岐)라 불리는 현상이 일어납니다. 서울에 거주하는 경화사족(京華士族)과 지방에 거주하는 향족(鄕族)으로 사족이 분기한다는 의미죠.


 조선 중기까지만 해도 재지사족은 유향소를 통해서 지방통치의 자문기관 역할을 하면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향리를 감찰했습니다. 그러나 조선후기가 되면 유향소의 임명권자가 지방관으로 바뀌고 지방관에게 보다 예속적인 관계가 됩니다. 


 유향소는 18세기가 되면 자치기구로서의 성격보다는 수령의 보좌기구로 전락하게 됩니다. 좌수나 별감 등을 담당하는 이들을 향족(鄕族)이라고 해서 사족과 구분해서 부르기도 합니다. 


 이러한 재지사회의 역학구조 변화와 조선의 확고한 지방통치의 완성은 지방관이 재지사족에게 선물이라는 경제적 혜택을 부여하거나, 피지배층이 청탁을 해야할 이유를 감소시켰을 겁니다. 


 더 이상 정치적 안정을 위해서 선물경제라는 비공식적 혜택을 국가가 유지해야 할 필요성이 없어졌다는 거죠.


 피지배층의 노동력을 직접 수취해서 현물을 획득해 재지유력자에게 재분배하는 수취제도는 그 이름이 녹읍이건, 전시과건, 선물경제건 간에 고려시대부터 이어진 정치적 안정성과 중앙집권화를 가능하게 만드는 중요한 원천이었습니다.


 하지만 중앙집권화와 지방통치가 완성되면서 더 이상 그런 혜택을 제공하지 않아도 되게 되버렸습니다. 고려시대부터 천년간 계속된 과거제, 지방교육, 유학의 보급은 재지유력자들의 사고방식 자체를 바꿔버렸거든요.




고려, 조선의 중앙집권화와 선물경제의 의의는 무엇인가?


 전근대 한반도 역사에서, 중앙-지방간에 안정적이고 장기지속이 가능한 통치구조는 고려의 건국을 통해 태동했습니다. 그 이전까지 지역국가에서 시작해서 한반도를 정복해나간 이전의 국가들은 재지사회를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의 통일국가로 포섭하지 못했으니까요.


 10세기 고려의 건국 이후 700년 동안 한반도는 점진적으로 진정한 의미의 통일국가를 발전시켜나갑니다. 이는 무력의 우위를 통해 지방을 일방적으로 제압해나가는 것이 아니라 보다 온건하고 교묘하며 꾸준한 포섭의 과정이었습니다. 


 이 기간동안 중앙권력이 지방을 포섭시켜나가는 과정은 크게 2가지 축으로 이루어집니다.


 첫번째는 과거제를 포함한 재지유력자의 관료로서의 제도적 포섭입니다.


 부족에서 시작해 귀족적 기반이 완전히 해체되지 않은 삼국시대와 통일신라 시대와 달리, 고려는 재지유력자를 전쟁이라는 예외적 상황이 아닌 평화시에도 과거제를 포함한 다양한 수단으로 중앙정권에 합류시키는데 적극적이었습니다. 


 이는 중앙과 지방간 이질성을 감소시키고 그들을 혈연과 학연, 지연으로 얽어매게 만들었습니다. 지방의 향리들은 중앙의 사족과 통혼하였으며, 많은 향리들이 중앙으로 진출하였죠. 이는 재지사회가 중앙을 선망하는 문화적 경향을 만들어 나갑니다. 


 두번째는 재지유력자에 대한 경제적 혜택의 부여입니다.


 고려는 전시과 제도를 통해 피지배층의 노동력을 통해 현물을 수취하고 이를 지배층에게 재분배합니다. 이는 재지유력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신라의 녹읍, 고려의 전시과에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피지배층의 노동력에 대한 수취구조는 고려 후기로 가면 수조권자에게서 박탈되어 국가의 공납과 요역 체계로 흡수되죠. 그러나 이러한 노동력수취에 기반한 현물의 조달이 아예 사라진건 아니었습니다.


 향리는 공납과 요역을 직접적으로 관할하면서 피지배층의 노동력에 의해 조달된 현물을 중간과정에서 가져갑니다.


 재지사족은 국가가 수취한 현물을 지방관에게 선물을 통해서 획득하거나 이 노동력 수취체제인 공납과 요역을 "조정"하는 대가로 피지배층으로부터 선물을 수수하죠.


 이러한 경제적 혜택의 보장은 재지사회가 굳이 중앙정권에 도전해야  이유를 사전에 차단할 수 있었습니다. 


 고려와 조선은 이러한 교묘한 정치적, 경제적 수단을 통해서 한반도 전역에 자신의 통치권을 점진적이고 단계적으로 확립해나갔습니다. 1000년에 달하는 긴 역사동안 고도로 안정적인 사회를 만드는데 성공하죠.


 동시기 일본과 비교하면 재미있습니다. 


 기존 교토에 있는 일본 중앙조정을 관동지방을 중심으로 한 가마쿠라막부가 설립되어 그 지배권을 상당부분 박탈합니다. 가마쿠라 막부는 재지사회의 악당이 일으킨 반란을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몰락하죠. 이를 대체한 아시카가 막부는 지방을 장악한 슈고 다이묘들을 제대로 제어하는데 실패하고 전국시대가 개막됩니다. 


 중세 일본 사회에서는 중앙정권이 재지사회를 제대로 통제하고 포섭하는데 실패했습니다. 재지사회는 때로 누군가를 옹립해 중앙정권을 전복시키는데 커다란 기여를 했죠. 하나의 국가로서 중앙정권이 전국을 지배하는건 강력한 무력으로 다른 영주들을 압도한 도요_토미 히데요시나 도쿠가와 이에야스조차 불가능했습니다. 


 때문에 율령제의 해체 이후 중세 일본은 수백년동안 자신의 권리를 자신의 힘으로 지키고 동시에 타인의 권리를 힘으로 침해하는 자력구제의 사회에서 살아남아야 했습니다.


 반면 고려와 조선은 중앙정권 내부의 권력투쟁은 지속적으로 존재했지만, 지방세력이 중앙정권을 전복시키고 체제를 파괴하는 파멸적인 상황을 단 한번도 경험하지 않았습니다.


 1000년간 이런 안정성을 유지할 수 있다는 건 인류 역사상 찾아보기 어려운 사례라고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낮은 수준의 행정력과 작은 정부와 재정규모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수준의 사법행정이 재지사회에 제공되었으며, 구성원이 자력구제가 아닌 소송을 통해 자기 권리를 보호하게 만들었죠.


이러한 고려의 업적은 조선에 의해 계승됩니다. 이를 대표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것은 바로 추노(推奴)입니다. 




 드라마 속에서 묘사되는 도망노비의 추쇄(推刷)는 조선시대를 마치 무장한 현금사냥꾼들이 마구 날뛰는 조선판 서부극처럼 묘사됩니다. 이거야말로 자력구제라고 할 수 있겠죠. 하지만 현실은 다릅니다. 

 

 안호(安瑚, 1437∼1503)는 조선 전기의 관료였습니다. 경기도 광주 일대의 농장을 관리하던 노비 몰개(毛乙介) 일가족이 세종 18년(1436년)에 전라도 영광까지 도망갑니다. 안씨 가문은  24년이 지난 1460년에 추쇄를 시작했습니다.


 안호는 전라도 관찰사에게 민원을 제기하여 도망간 노비 4명이 영광지방에 있는데 그들이 구체적으로 어디있는지 파악하는 것과 그동안 수취하지 못한 신공을 계산해 납부하도록 도와달라고 요청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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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0년대 노비추쇄를 요청하는 소지(奴婢推刷所志), 한국국학진흥원 유교문화관 자료---


 전라도 관찰사는 영광군수에게 안씨 가문의 노비 호적문서(賤籍)를 참고하여 노비의 추쇄에 협조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이처럼 사노비의 추쇄 과정은 노비사냥꾼이 아니라 국가권력에게 노비의 소유권을 문서로 증빙하고 합법적 절차를 거쳐 민원을 제기함으로서 이루어졌습니다.


 이는 양면적인 현실을 알려줍니다. 조선이 법에 의한 통치가 이루어지고 이것이 노비의 소유권을 보장하였기 때문에 조선 전기의 안정적인 노비 인구의 증가가 가능했습니다. 동시에 노비의 소유주라고 할지라도 국가에 의해 법적 공증을 받지 않고서 임의로 사적인 자력구제를 통해 인신을 구속하지 않았다는거죠.


 한때 신라를 멸망시키는데 참여하고 고려가 요나라에 침공당했을 때 현종에게 야유를 퍼붓고 위협하던 재지유력자들은 증빙문서를 챙기고 지방관 앞에 나가서 자신의 권리를 보호해달라고 소송을 거는 사람들로 바뀌어 나갔습니다.


 현대에도 재지사회에서 자신의 권리를 지킨다고 공권력 무시하고 총기와 폭탄으로 무장하고 서로 유혈투쟁을 벌이는 일이 전세계 곳곳에 빈번하다는 걸 생각하면 이건 놀라운 일입니다. 


 무엇이 이를 가능하게 했다고 보시나요? 절묘한 갈라치기와 토사구팽?


 그렇게만 볼 수 없습니다. 이제 경제적 혜택마저 빼앗긴 조선 후기의 향족(鄕族)들의 사고방식과 생활을 살펴본다면 고려와 조선이 구축한 이 안정적 구조가 단순히 정치제도와 경제적 혜택을 넘어선 소프트 파워(Soft power), 상대가 스스로 그렇게 하여금 만드는 수준에 이르렀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조선의 소프트파워(Soft power), 향족들을 세뇌시키다.


 위의 설명들을 보셨다면 조선 후기 향족들이 왜 반란분자가 되지 않았는지 이해하기 어려울지도 모릅니다. 이건 완전히 이용당하다가 버려진 셈 아닙니까?


 게다가 조선 후기가 되면 관직은 대부분 경화사족들이 독점하고 향족들의 관직 진출은 거의 없다시피 하게 됩니다. 경제적 혜택도 사라지고 재지사회에서 과거의 유향소는 자치기구의 의미가 사라져서 유향소의 좌수나 별감은 향리취급받게 되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향족들이 조선의 지배체제를 전복시키려는 대규모 행동은 발생하지 않습니다. 이인좌의 난이나 홍경래의 난에 호응한 향족이 일부 존재하긴 하지만 일반적이지 않았습니다. 


 왜 일까요? 고려와 조선이 1000년간 안정적인 지배구조를 구축해온 과정에서 고도의 문화적인 경로의존성을 형성해나가기 때문입니다. 


 조선 후기의 향촌사회의 양반들은 거의 합격할 가능성이 없어졌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문과와 생원진사시에 합격하기 위해 골몰했습니다. 그들은 잡과를 천시했고, 무과에 응시하기는 했지만 항상 주된 관심은 문과에 있었습니다. 


 조선후기 대구지방의 향반(鄕班) 서찬규(1825~1905)는 이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입니다. 서찬규는 대구 서씨로 5~9대조는 계보도 확인이 불가능하며 고조 이하로는 문과나 생원진사시, 무과급제자 한명 없었습니다. 


 그는 2번의 생원시에 낙방하고 1846년에 3번째로 치른 생원시 초시에 합격하였습니다. 그 이후 회시(會試)를 치르기 위해 고향인 대구에서 서울까지 10일 후에 도착했을 때 서울의 광경에 매료되었습니다. 


 얼음 위를 걸어 강을 건넜는데 강산과 백성들 물산이 이미 번화하고 웅걸한 모습이 있었다. 10리를 가서 남문(南門)을 통해 성(城)안에 들어가니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모든 것이 크고 아름다워 필설로 다할 수가 없었다.

임재일기(臨齋日記)


 생원시 회시(會試)에 합격한 서울구경을 마치고 고향에 내려갈 때 길을 즐겁게 해줄 광대와 예인을 정해둘 정도로 기뻐하고 시험삼아 문과에도 도전해보고, 합격자를 위한 잔치에도 참여해 궁궐에서 왕의 얼굴도 목격합니다.


  侍臣이 나에게 말하기를 “職과 성명을 크게 아뢰어 올려라”라고 하여 나는 곧바로 “생원 臣 서찬규이옵니다”라고 아뢰었다. 그때 白牌를 난삼의 앞섶에 꽂고 있었는데 상께서 侍臣에게 명하시어 백패를 올리게 하시곤 아주 자세히 보셨다. 이에 나는 일어나 종종걸음으로 물러 나와 다시 계단의 아래쪽에서 曲拜를 마치고 뜰로 내려왔다. 咫尺에서 天顔을 뵈니 엄숙하여 감히 시선을 돌릴 수가 없었다.

임재일기(臨齋日記)


  서찬규는 고향에 돌아가서 놀이패들과 함께 돌아왔습니다. 그의 부모들은 강을 건너는 서찬규를 한참 전부터 기다려 맞이했고 관아에서는 악사를 보내 음악을 연주하며 놀이패들이 노래와 춤을 추는 동안 말을 타고 행진하면서 구경하고 축하하는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감격에 찬 기록을 남겼죠.


  관직을 얻지 못하고 다만 생원에 오른 것에 불과했지만, 재지사회에서는 열광적으로 반응합니다. 서찬규는 더 큰 성공을 위해 문과시험을 위해 공부했지만 철종 12년(1861년)까지 15년동안 일기에 기록된 것만 25회의 과거를 보았지만 문과 합격에는 실패합니다. 


 사실, 이건 당연한 결과입니다. 향족이 문과에 급제하는게 어려웠거든요.


 조선 전기부터 문과급제자는 제한된 본관성씨에서 다수의 급제자가 배출되었습니다. 소수 성관에서 급제자를 독점하는 경향은 고려후기에 비해 조선 중앙지배층의 배타성이 강해지는 경향을 보여줍니다.


 이런 경향은 조선 후기로 갈수록 심화됩니다. 50명 이상의 급제자를 배출한 성관이 56개로 조선 후기 급제자를 배출한 성관의 10%에 불과하지만 급제자의 68%에 해당하는 7,055명의 급제자를 배출했습니다.


 조선 후기에 벌열화가 심해지고 이들의 혈연적 유대와 가문 계승의식은 강화됩니다. 벌열 가문이 권세를 유지하기 위해 급제자 배출에 힘쓰면서 유력하지 않은 재지사회의 향족들이 급제할 가능성은 낮아질 수 밖에 없었죠.


 17세기 이후로 조선은 기존의 유력 가문 안에서 관료가 재생산되는 경향이 심해져 관료제는 고려시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정도로 폐쇄적이 됩니다. 


 이러한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서찬규가 한국의 고시생들보다 오히려 더 오랜 기간 문과에 계속해 그가 도전했던 이유는 그의 부모들이 그것을 절실히 원했고 자신도 그 영광을 원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재지사회의 유력자인 향족들은 거의 불가능함에도 불구하고 관료가 되는 것을 꿈꿨습니다. 고려 건국 이후 1000년간의 과정을 거쳐서 관료가 되기보다 재지사회에서 가산경영하는 것을 희망하던 호족들은 과거에 합격하겠다고 평생 공부하는 고시생으로 변화한 겁니다.


 이전처럼 문호가 개방된 상태가 아님에도 말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조선후기 재지사회의 향족들은 단순히 과거를 통해서만 서울을 선망한게 아닙니다. 조선후기의 편지와 야담은 지방의 향족들이 얼마나 서울의 재경사족과 교류하고자 하는 욕망이 강렬했는지 알려줍니다.


 조선후기의 이야기를 묶은 19세기의 청구야담(靑丘野談)에는 경상도의 한 부유한 향족 집안이 서울에 아무런 인척도 친지도 없어서 항상 유력한 재경사족과 관계를 맺고 싶어했는데 이를 이용하려 한 도적떼한테 낭패를 당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단순히 이는 야담에나 묘사될 일은 아닙니다. 야잠의 사례와 같이 지방의 향족들은 재경사족이 수령이나 관찰사로 부임하면 어떻게든 관계를 맺고자 노력했습니다. 또한 유배를 당해 온 재경사족이 있으면 경제적으로 후원하면서 친분을 쌓으려고 노력했죠. 


유배죄인인 저는 예전과 같이 그럭저럭 지내니 다른 것은 어찌 족히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보내주신 나락과 쌀은 성대한 은혜를 생각해서 받습니다만, 전후로 살펴 주시는 마음은 이에 이르러 극에 달합니다.

황자(黃梓, 1689~1756)가 1724년 부안의 향족 김수종(金守宗, 1671~1736)에게 보낸 편지


 향족 김수종은 재경사족이자 전통적인 대가문인 반남박씨로 문과급제자를 가장 많이 배출한 가계에 속하는 박태관(朴泰觀, 1678~1719)과 선물을 서로 주고받으며 교류하는데, 재미있는 것은 김수종은 다양한 곡물, 해산물, 청동과 같은 금속, 화폐(錢)를 보내는 반면 박태관은 주로 문방사우나 약, 달력등을 보냈습니다. 


 박태관이 경제적 어려움을 지방의 김수종을 통해서 해결한 반면 김수종이 받은 선물은 예물에 가까웠죠. 박태관은 김수종의 경제적 후원에 대해서 자신의 아내도 감사한다고 편지를 보낼 정도였습니다. 


 청구야담의 강도단 에피소드에서 도적떼의 우두머리는 경상도의 향족에게 다시는 경화사족과 교류하고자 하는 헛된 생각을 하지 말라고 조언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습니다. 


 경제적으로 나름 부유한 재지사회의 향족들이라 하더라도 재경사족과의 교류가 단절된다면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는 인정받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관료가 되는 출세가 거의 불가능하더라도 향족들은 그 불합리한 사회구조에 분노하고 도전하기 보다는 재경사족과 네트워크를 만들거나 문과를 통해 합격하여 관료가 되는 것을 꿈꾸었습니다. 


 고려에서 조선까지 이어진 중앙집권화와 지방통치강화의 과정은 매우 교묘한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혜택을 제공하면서 점진적으로 발전하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형성된 소프트파워는 반항적이고 폭력적이던 재지유력자들을 정치적, 경제적 혜택을 박탈한 이후에도 중앙정권에 복종하고 협력하며 선망하는 존재로 탈바꿈시켰습니다. 


 이러한 소프트파워는 1000년 동안 고려, 그리고 그를 계승한 조선이라는 중앙집권체제가 인류 역사상 유례없는 정치적 안정성을 유지할 수 있도록 만들었죠. 이를 통해서 전근대 한반도의 구성원들은 보다 안전하고, 평화로운 삶을 영위하는 후생이익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수백년간 이어져온 선물경제는 이러한 소프트파워를 구축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었고, 그 목적을 달성한 이후 소멸하게 된 것입니다.




결론 : 10세기 일본과 한국의 대분기


 비교적 유사한 당나라의 율령제를 받아들인 고대 일본과 통일신라는 9~10세기에 비슷하게 위기에 직면합니다. 지방에서 폐쇄적이고 자신의 권익을 침해하는 중앙정권에 도전이 발생했죠. 


 헤이안시대의 일본은 이러한 도전과정에서 율령제를 포기하게 됩니다. 그들은 완전한 파국에 직면하지 않고 나름의 연착륙에 성공했지만, 결국 중세로 접어들면서 중앙조정은 무가정권에 의해 대체되어 봉건적 사회로의 길로 나아갑니다.


 반면 통일신라는 일본처럼 연착륙에 실패했습니다. 신라는 지방세력의 도전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고 멸망하였으며, 고려가 혼란을 극복하고 새로운 나라를 엽니다. 고려는 일본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 구조적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폐쇄적인 혈연을 극복하지 못하고 멸망한 신라나 마찬가지로 혈연에 얽매여 재지유력자를 포섭하는데 실패하고 실권을 상실해간 일본의 천황이나 조정과 달리 고려는 재지유력자들에게 문호를 개방하고 그들을 중앙정권에 포섭시키는 길로 나아갑니다.


 그 지난한 과정에서 피지배층의 노동력을 수취하여 지배층에게 재분배하는 전시과 제도와 선물경제는 아직 고려의 소프트파워에 의해 완전히 넘어오지 않은 재지유력자들을 중앙정권의 지지자로 남아있게 만드는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10세기 일본과 한국의 대분기 과정에서의 변화는 일본에게 시장경제의 급격한 발달이라는 혜택을 부여한 동시에 자력구제와 내전의 반복이라는 수백년간의 비참한 불안정성을 동시에 제공했습니다. 


 고려와 조선은 고대의 조용조 체계를 고수하는 유일한 동북아시아 국가가 되어 동시기 중국이나 일본에 비해 시장경제의 발달이 지연되는 대신 고도로 안정적이고 평화로운 내부 정치, 사회적 구조를 발전시켜나갔습니다. 


 양자가 나아간 전혀 다른 길은 수백년간 상이한 결과를 초래했고, 각자가 장점과 단점을 동시에 가집니다. 우리는 양자를 비교하는 과정에서 우리 역사를 좀 더 잘 이해하고, 그 차이가 우리 조상들에게 제공했던 긍정적 효과와 부정적 효과를 모두 직시할 수 있을 겁니다.


장기간 꾸준히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참고자료

국사편찬위원회, "신편하국사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국사편찬위원회, "신편한국사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국사편찬위원회, "신편한국사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송기원, "고려 전시과 수취의 성격"

이세영, "조선전기 농장적 지주제"

전경목, "양반가에서의 노비 역할"

김건태, "결부제의 사적 추이"

송기원, "고려 전시과 수취의 성격"

정은정, "고려중기 경기지역의 공한지 개발"

정용범, "고려시대 경상도지역의 유통경제"

김창석, "고려 전기 ‘허시(虛市)’의 성립과 그 성격"

이성임, "16세기 지방 군현의 공물분정(貢物分定)과 수취"

신동원, "조선후기 의약생활의 변화: 선물경제에서 시장경제로"

이훈상, "어느 지방 이서의 임진왜란 증언과 전승-경상도 인동의 향리 劉席珍과 그의 임진왜란 일기"

송만오, "성공을 위한 서찬규의 집념과 노력-조선 후기 어느 한 향촌 양반의 과거 도전기"

이선철, "명, 청의 사례를 통해 본 조선 과거제도의 실상"

전경목, "간찰과 야담을 통해 본 지방양반과 재경사족의 교류양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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