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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고려는 중세 일본보다 공정한 판결을 내렸다.

lemiel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3.08.05 09:49:56
조회 3129 추천 33 댓글 22




 이전 글을 보시지 않았다면, 먼저 보시고 나서 이 글을 보시는게 이해가 쉽고 더 재미있습니다.


 이전 글에서는 중세 일본의 무사들이 통치권을 사적으로 소유한 다양한 권력주체의 문제로 인해서 그들의 경제적 기반이 매우 불안정했기 때문에 그들의 재지성과 폭력성이 강해질 수밖에 없었음을 설명했습니다. 


 반면 고려의 호족들의 경제적 기반은 단일한 권력주체인 국가에 의해 보장됨으로서 훨씬 안정적이었으며 그들이 새롭게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고자 하는 손쉬운 방법이 중앙 관직의 진출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중앙정권으로의 진출을 선망하게 됩니다.


 이는 왜 고려전기의 재지유력자들이 점차 자신들의 지위와 영향력을 지방통치의 강화를 통해 약화시키는 중앙집권에 저항하기보다는 편승하게 되었는지 이해하게 해줍니다. 


 그러나 고려후기로 접어들면서 이러한 여건들은 변화합니다. 



고려후기의 사회적 변화 : 향리의 직역(職役)화


 고려 전기의 향리가 경제적 안정성을 누리고 있었던 기본적인 원인은 그들이 재지사회에 가진 영향력과 백성들의 거주이전을 제한하는 본관제 덕분입니다. 토지에 긴박되어있는 백성들은 고려의 부세수취를 가능하게 할 뿐만 아니라 재지사회에서 향리가 가진 경제적 기반을 안정적으로 만듭니다.


처음에 좌창(左倉)과 우창(右倉)의 말[斗]과 평미레[槩]가 법제에 맞지 않아 쌀[米] 1석(石)을 납부하는데, 더 내는 것이 2두(斗)에 달하였으며, 외리(外吏)들이 이를 이유로 더 많이 거두었으므로 오래도록 민폐가 되었다. 근래에 이를 바로 잡으려고 하여 제서(制書)를 내리기를,

“1석에 손실을 보충하는 쌀[耗米]을 합쳐 17두를 초과하지 못한다.”

라고 하였다. 이에 대해 뭇 소인배들의 불만이 들끓었으므로, 이에 이르러 제서를 내려 예전처럼 그대로 하게 하였다.

고려사 식화지(食貨志), 전제(田制), 조세(租稅) 명종(明宗) 6년(1176) 7월 


 또한 향리는 부세수취 과정에서 비공식적인 수수료를 추가로 걷기 때문에 추가적인 경제적 이익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는 이후 조선시대까지 이어지게 되죠.


 그러나 12세기 들어서 비교적 안정적이던 향리의 경제적 상태가 악화됩니다. 토지에 백성들을 긴박하는 본관제가 점차 약화되기 때문이죠. 무신정권 당시의 혼란과 이어지는 몽골의 침략으로 유민이 증가하고 거주이전을 제한하던 본관제가 흔들리기 시작하는거죠.


 이건 단순히 외침이나 정치적 불안정의 결과라고만 볼 수 없습니다. 농업생산력이 증가하면서 권력자와 향리층 모두에게서 압량위천(壓良爲賤), 즉 대출을 해주고 빚을 갚지 않으면 노비로 만든다거나, 유민을 노비로 끌어들이는 일이 빈번해집니다. 이 시대는 여전히 토지가치가 낮고 노동력 수요가 컸는데, 본관제도의 제한에서 제외되는 노비를 활용해 사적 소유지인 농장(農莊)을 개발하면서 기존의 전시과 제도가 흔들리게 되기 때문이죠.


 기존의 조세수취가 토지(田)와 경작자(人丁)이 결합된 구조에 의존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사적 소유지인 농장(農莊)이 증가하면, 조세징수에 시달리는 농민이 유민이 되어 투탁할 수 있게 되고, 이는 조세의 징수를 어렵게 만듭니다.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한강(韓康)을 충청도(忠淸道)와 교주도(交州道)에 파견하여 군마(軍馬)의 사료를 비축하게 하였다. 그 때 경상도(慶尙道) 전수별감(轉輸別監)이 기한을 정해 놓고 사료를 빨리 수송하라고 심하게 독촉하여 백성들이 모두 도망 가 숨어버렸고, 고구현(高丘縣)의 향리는 기한에 늦자 처벌받을까 두려워하여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

고려사 충렬왕 7년 1281년 1월 5일


 본관제가 해체되면서 향리들의 부세징수는 권한이나 이권이 아니라 부담이 됩니다. 한때 지방의 유력자임을 자랑했던 호족들의 후계자인 향리가 부세수취 부담 때문에 자살하는 일이 벌어질 정도였죠. 


 이는 고려후기 향리가 지배층의 신분에서 점차 국가에 의해 직역(職役)이 강제되고 그것을 세습할 것이 강요되는 피지배층의 신분으로 점차 하락하고 있는 추세를 보여줍니다. 


 그런데 이상하죠? 고려 후기에 재지사회에서 중앙정권과 권력자에 의한 부담이 증가하고 향리들이 경제적 불안정성에 시달리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재지사회에서 중앙정권에 저항하여 반란을 일으키는 사태는 발생하지 않습니다. 


 고려후기의 정치적 불안정은 대부분 중앙정권 내부에서의 항쟁이지 나말여초 시기처럼 재지사회의 도전이나 지배이탈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고려후기의 재지사회는 이전보다 더 중앙정권을 선망하고 합류하고자 노력했으며, 실제로 관직진출도 훨씬 활발해집니다. 


 무신정권의 성립 이후 기존 문신들이 대거 숙청된 가운데 향리 자제들의 관직진출이 증가합니다. 예종~의종대 65년간 실행된 과거횟수가 44회로, 연평균 19.2인이 과거에 급제한 반면, 무신집권기인 명종~고종대 89년간 실행된 과거횟수는 57회였고, 연평균 22.2인으로 합격자가 증가합니다. 


 고려 후기에는 무신정권, 몽골의 침략, 원간섭기등을 거치면서 중앙정권 내에서의 숙청이 빈발했고, 기존에 비해서 기득권층인 재경사족이 아니더라도 향리가 중앙에 진출할 수 있는 여건이 개선됩니다. 이 시기는 향리 뿐만 아니라 천민이나 상인 출신도 중앙관직에 진출하는 사례가 나타날 정도로 신분의 유동성이 큰 시기였죠. 


 이 시기 재지사회에서 관료배출이 증가하는 것은 고려시대 경상남도 지역의 토성층의 관료배출 양상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유월 십일일 황려(黃驪)를 떠나 상주(尙州)로 향하면서 근곡촌(根谷村)에서 자다

산에 들어가니 숲 우거져 처음에는 길 몰랐는데 / 入山蒙密初迷路

마을 사람들 고개 넘어 서로 맞아주네 / 村人過嶺相迎去

밭갈이하는 농부들 원숭이처럼 늘어서 절하고 / 畦丁羅拜似獼猴

재잘거리는 말소리 자못 남만의 억양일레 / 嘍囉頗帶南蠻語

이규보, 동국이상국집 6권

  

 이규보(1169~1241년)는 경상북도에 있는 상주(尙州)를 오랑캐 나라, 만국(蠻國)이라고 묘사한 바 있습니다. 그는 상주 사람들의 사투리를 남만의 억양(南蠻語)이라고 묘사하죠. 고려시대 들어와서 중세 한국어가 경상도가 아닌 황해도나 경기도 중심으로 옮겨간 결과인 거 같습니다. 


 그보다 변경에 있는 현재의 경상남도는 고려시대 그야말로 깡촌으로서, 중앙정권에서 관료를 현재의 부산인 동래현의 현령으로 보내는게 처벌수단이었을 정도였습니다. 


 그럼 이 깡촌에서의 관직진출 양상을 한번 봅시다. 


 고려사와 묘지명의 금석문자료를 통해 확인한 고려시대 경상남도 지역의 토성이 배출한 관료는 총 181명인데, 이중 10~11세기에는 겨우 15명만이 등장하며, 12~13세기에는 35명으로, 14세기 이후에는 131명으로 증가합니다. 


 초기 단계에서는 경남지역의 토성 중 단 7개만이 관료를 배출하지만 고려후기에 가서는 추가로 24개 토성이 관직에 진출하죠. 고려사에 기록된 관료가 대부분 고위관료라는걸 생각하면 실제 관직 진출의 규모는 훨씬 더 컸을 겁니다. 


 고려후기는 이전에 지방관을 파견하지 않고 향리에게 지배를 위임했던 속현(屬縣)에 지방관으로서 감무(監務)를 파견하거나 속현을 주현으로 승급시키는 등 중앙정권의 지방통치가 강화되는 경향을 띱니다. 


 경상남도 지역은 원래 8개의 주현과 38개의 속현으로 구성되어 지방관이 파견된 곳이 매우 적었지만, 고려 후기에 11개 현만이 속현으로 남게 되었으며, 나머지는 다른 주현에 병합됩니다. 조선 초기에 가면 주현이 23개, 속현이 9개로 바뀌게 되었으며 과거의 부곡들도 빠르게 해체되어갑니다. 


 즉 중앙의 통치가 강화되고 지방관이 파견되어 향리의 지위가 하락하는 대신, 반대로 재지사회의 유력자들이 중앙으로 진출하거나 관직을 얻는 것도 가속화되고 있음을 이를 통해 알수 있죠.


 고려 후기가 혼란과 모순으로 마치 아포칼립스 상황인 것처럼 묘사되는 일반적인 인식과 달리 고려 조정의 지방통치는 점점 강화되고 있었고, 신라 말기와 달리 재지사회는 중앙정권에 반항하지 않고 거기에 참여하고자 노력하며 실제로 더 많이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전근대 중앙집권의 발전수준을 평가하는데 있어서 중앙권력이 얼마나 지방세력을 아우르고 그를 포섭하면서 지방통치를 강화해 나갔느냐에 주목한다면 고려는 이를 거의 완성해나가고 있었습니다. 조선에 의해 대체되기 직전까지도 말입니다. 


 이게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먼저 고려 지방사회의 역학구조가 고려후기에 들어가서 어떻게 변화하는지 살펴봅시다.




분열시켜 지배하라 : 향리와 재지품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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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잇키(一揆)는 주로 농민들의 봉기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재지무사들도 권력자에 대항해 잇키를 일으키고 자신들의 권리를 지키려 단결합니다.----


 중세 일본에서 외부세력이나 지역의 치안권이나 지배권을 장악하려하는 슈고(守護)에 대항하여 재지세력이 단결하여 일으키는 집단행동을 구니잇키(国一揆)라고 합니다. 한반도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이런 재지유력자들이 동등한 입장에서의 단결하는 결사행위는 중앙정권이나 지역 권력자가 지방에 통치권을 강화하는데 중요한 장애물이었습니다. 


 고려는 이런 재지사회 유력자들의 단결을 방지하고 그들을 분열시킴으로서 중앙정권의 지방통치에 반항하기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고려 전기의 지배층은 개경에 거주하며 중앙정권에서 관료로 일하는 재경사족과 지방의 향리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향리층에서 과거제나 다른 수단을 통해 상경(上京)하여 왕경인으로서 호적을 두게 되면 초기에는 중앙과 지방의 연계가 단단하지만 대를 이어가면서 재지사회와의 연계가 흐릿해지죠.


 기존 연재글의 중세 일본 사례에서 보듯이 중앙과 지방간의 상호 이질성이 커지면 지방통치가 점점 어려워지게 됩니다. 만약 재경사족과 지방의 향리가 완전히 분리된 존재가 된다면 고려의 중앙집권은 외침이라던가 내분등으로 중앙의 권위가 약해지면 지방에 대한 통치력을 상실하게 될겁니다. 


 그러나 고려 후기에는 오히려 재경사족과 향리라는 중앙/지방의 지배층 구분이 흐릿해지는 현상이 나타납니다. 재지사회에 향리 이외의 집단이 출현하기 때문이죠. 이들을 재지품관(在地品官)이라고 학계에서는 부르고 있습니다. 


 먼저 무신정권기에 중앙의 관료가 퇴임하거나 귀양, 또는 파직되어서 지방으로 내려와 정착하는 것이 증가합니다. 고려 전기에도 재경사족이 고향으로 돌아오는 일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 시기만 해도 상경하여 왕경인이 되면 귀향하는 일이 드물어지죠.


 고려 후기 들어와서 전직관료가 지방으로 내려와 정착하는 일이 증가합니다. 


 또한 재지사회에 있으면서 실제 직무를 담당하는 것이 아닌 산직(散職)이라고 하여 향리가 아닌 품관(品官)의 지위를 획득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 품관직은 실질적으로 중앙관직으로의 진출이 보장되지 않음에도 지방무관으로 복무하거나 점차 고되지는 향리의 직역(職役)에서 이탈하기 위해 중앙의 권력가에 결탁하는 등의 방식으로 획득된 것입니다. 


 이렇게 두 부류의 품관(品官)들이 재지사회에서 증가하면서 향리이외에 재지사회에 영향력과 경제력을 갖춘 유력자 집단이 형성됩니다. 1389년 노숭(盧崇)이 전라도 관찰사가 되어 전라도에  득성창(得成倉)과 영산창(榮山倉)을 만들 당시, 다수의 전직관료들에게 명령하여 축성공사를 실시한바 있는데 이는 재지사회에서 재지품관이 지방민들에게 강한 영향력을 확보하고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재지품관이 이런 공사를 감독하고 있다는 것은 이들의 지방에서의 영향력이 강화되어 기존의 재지유력자인 향리층보다 우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사적 영향력이 공적 영역으로 확대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사실 고려후기의 향리층들은 점차 부담이 커지는 직역에서 이탈하기 위해서, 또는 점차 지배층으로서의 신분이 하락하고 있는 가운데 자신의 지배층으로서의 신분을 유지하기 위해 품관직을 획득하기도 합니다.


 고려 말기에 최상위 향리인 호장(戶長)들이 그 직위를 유지하면서 동시에 품관을 획득하는 것은 단순히 직역에서 이탈하려는게 아니라 점차 하락하고 있는 자신의 신분을 되찾기 위한 행동이기도 하죠. 


 향리는 재지품관과 재지사회에서 영향력 다툼을 벌이는 존재이면서 동시에 재지품관으로 유입되는 동질적 존재이기도 했습니다. 


가을에 정승공이 과거에 급제하고 다음 해에 사관(史官)이 되니, 공이 말하기를, “조정에 벼슬하는 아들이 있고, 나는 늙었으니 다시 벼슬하고 싶지 않다.” 하고, 고을의 부로(父老)들과 함께 금강사(金剛社)라는 모임을 만들어서 한가히 노닐면서 세월을 보내었다.

동문선(東文選) 진양부원군 하윤린 신도비명


 여말선초의 인물인 하륜(河崙)의 아버지 하윤린(河允潾)은 아들이 관직에 들자 사직하고 고향인 진주로 하향한 전직관료입니다. 그는 재지품관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그가 부로들과 만든 모임은 단순한 친목 모임이었을까요?


 고려 말기에 언제인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이러한 재지품관들의 지방 자치기구인 유향소(留鄕所)가 생겨납니다. 재지품관들은 향리와 달리 국가의 공적 권력체계 안에 있지는 않지만 재지사회에서 향리 못지 않은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고 이들은 하윤린이 만든 모임처럼 유향소를 만들어 자신들의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이들은 지방관의 통치에 방해가 되는 부분도 존재하지만, 대체로 하윤린처럼 향리에 비해 중앙조정, 그리고 그를 이루는 재경사족과 보다 강하게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재지사회에 중앙조정과 긴밀히 연결되고 인적교류가 있는 유력자들이 생겨나 상대적으로 박한 대우를 받는 향리층과 상호 견제하게 되는 역학구조가 성립하게 되는거죠.


 이런 구조에서는 향리층이 중앙조정에 의해 경제적으로 압박을 받고 지배층으로서의 신분을 위협받는다 할지라도 중앙정권에 도전하기 어려워집니다. 이해관계가 다르며 중앙정계에 연계가 보다 강한 재지품관층이 존재할 뿐만 아니라 향리 역시 재지품관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여전히 열려 있기 때문이죠. 


 고려의 과거제를 비롯한 재지유력자를 포섭하는 관직제도는 재지사회를 단일한 이해관계를 가진 결집력있는 집단이 되지 못하도록 교묘하게 분열시킵니다. 


 분열시켜 지배하라(Divide and rule)가 고려후기 지방통치의 의도였다고는 볼 수 없지만 고려후기의 재지사회의 품관과 향리의 분화는 고려후기의 정치적 불안정과 왜구의 침입에도 불구하고 중앙집권화와 지방통치의 강화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는게 가능한 여건을 만들어줍니다.


 이렇게만 보면 고려의 중앙집권화는 일방적으로 재지사회를 분열시켜 지배하려 획책하는 모략의 결과처럼만 보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고려의 지방통치 강화는 재지사회를 단순히 일방적으로 압박하는 것이 아니라 재지사회의 발전과 변화에 따라 요구되는 공적 서비스를 제공하면서 이루어졌기 때문이죠. 


 이 공적 서비스는 고려와 조선의 중앙집권화가 한반도의 구성원들의 삶을 보다 안정적이고 안전하게 만들어주는 역할도 수행하였습니다. 




중세 일본과 비교한 고려 사법제도 발전의 역사


 이전 연재글 가마쿠라 막부는 왜 자력구제를 타파하지 못했을까?(링크) 에서 중세 일본에서 자신의 권리를 지키려고 실력행사를 하는 자력구제의 사회가 일어나게 되는 주요 요인으로서 속연주의(属縁主義)에 대해서 설명한바 있습니다.


 중세 일본의 재지사회는 막부와 조정의 지방관, 중앙의 권력을 가진 가문들인 장원영주등 다양한 권력주체가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이들은 각자 자신의 명목상 소유지나 주종관계를 맺은 사람들에 대한 독자적 재판권을 가지고 있죠. 


 중세 일본의 재판권자, 즉 판사는 특수관계에 있는 사람의 재판에서 제척, 기피, 회피되는 현대 사법의 원칙 따윈 씹어먹습니다. 그들은 피고나 원고와 사적 주종관계가 있기 때문에 재판권을 가지는 거니까요. 


 이들과 주종관계를 맺은 재지무사들이나 촌락들은 공정한 중재자 따위는 원치 않습니다.


  자기와 "인연(縁)"으로 이어진 권력자가 자신의 호소를 일방적이고 신속하게 받아들여서 문제를 해결해주리라 기대합니다. 그래서 주종관계를 맺고 그들에게 조세를 바치는 겁니다.


 권력자들의 사고방식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공정한 지배자가 아니라 자신의 가문의 사적 이익을 추구합니다. 당연히 자기와 "인연(縁)"을 가진 이들에게 유리하게 판결을 내리는 것은 가신들의 봉공(奉公)을 유지시키기 위해 필수적입니다. 


 이는 불공정한 행위가 아니라 중세 일본의 가치관으로는 도덕적 행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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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도 사법불신이 존재하지만, 중세 일본처럼 원고나 피고와 연줄이 있기 때문에 담당 판사가 되는게 당연할 정도는 아니죠.---


 이는 개개의 주종관계의 유지에 유리하지만 재지사회 전체에서는 신뢰할 수 없고, 공정하지 못한 판결로 이어집니다. 가마쿠라 막부나 무로마치 막부는 어떻게든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은 해보지만 본인들도 무사들과 사적 주종관계에 의존하다보니 모순에 빠집니다. 공권력으로서의 역할을 해야 하지만 본인의 권력도 사적 주종관계 없이는 유지될 수 없거든요. 


 16세기 들어서 이런 복잡한 재지사회의 지배구조를 타파한 센고쿠 다이묘에 의해 일원적 지배, 즉 하나의 단일한 공권력이 형성되어야 해소되기 시작합니다. 


 이 땅 안에선 A도 내 가신이고 B도 내 가신이니까 공정하게 판결해야지!!! 라면 쉽게 이해하실 수 있겠죠?


 혹시 그 내용이 기억안나시면 전국시대 센고쿠 다이묘, 법에 의한 통치를 시작하다.(링크) 를 다시 읽어보시길 추천합니다. 


 중세 일본의 사례를 통해 지방에서 공정한 재판을 통해 안정적인 사회질서를 수립하는건 중앙집권화에 필수적이란 걸 이해하실 수 있습니다. 


 고려왕조는 어떻게 재지사회에 사법권을 행사했을까요?


 임용한과 채웅석의 논문을 발췌, 참조하여 소개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전 연재글에서 소개해온 바와 같이 고려는 인구밀도가 낮아서 토지의 가치가 낮고 노동력의 가치가 높았습니다. 국가가 노동력을 토지에 긴박해서 관리하였기 때문에 광대한 대토지를 개간하거나 점유하는 일도 어려웠습니다. 


 지방에 시장이 아직 등장하지 못했으며, 때문에 지방에 도시나 교역거점이 발전하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또한 고려 전기의 재지사회는 비교적 엄격한 신분질서하에 계층화되어 있고, 종교결사인 향도(香徒)의 오랜 전통으로 결속되어 있습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재지사회에서 경제적 요인때문에 분쟁이 일어나기 어렵습니다. 남의 것을 빼앗기도 어렵고, 굳이 빼앗을 필요도 어렵기 때문이죠. 


고려의 정사(政事)는 간편한 것을 숭상한다. 소송문서(訟牒)는 생략하여 글로 기록하지 않는다.

서긍(徐兢)의 선화봉사고려도경, 풍속(雜俗) 치사(治事)


고려[夷政]에서는 조부(租賦, 세금의 수취)를 제외하면 소송은 일어나지 않는다. 

서긍(徐兢)의 선화봉사고려도경, 성읍(城邑) 군읍(郡邑)


 1123년 송나라 사신 서긍(徐兢)의 기록을 보면, 고려는 소송이 잘 일어나지 않는다고 설명합니다. 이는 이러한 고려 전기의 사회경제적 양상이 사적 분쟁의 여지가 적었기 때문에 소송의 필요성이 크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동시기 송나라는 소송이 매우 자주 일어났는데 이는 인구밀도가 높아지고 민간경제가 발달할 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서긍은 송나라와 비교했을때 고려의 소송이 많지 않고 단순하게 처리되는게 인상적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려는 중앙정권이 지방통치를 구축하는데 있어서 재판권을 행사하는 것이 중요할 뿐만 아니라 국가가 구성원에게 제공해야할 기본적인 서비스임을 초기부터 인지하고 있었습니다. 

 

 고려 초기에는 지방관을 파견하지 않고 호족들에게 지방통치를 위임한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지방에서의 소송처리를 국가가 방관하고 있던건 아닙니다. 


“제도(諸道)의 전운사(轉運使) 및 외관(外官)이 무릇 백성의 고소를 듣고도 처리하지 않아, 모두 경관(京官)에게 가서 판결을 받게 하고 있는데, 지금부터는 단계를 뛰어넘어 고소한 사람과 주현(州縣)의 장리로 〈사건을〉 처결하지 않은 경우에는 죄를 주도록 할 것이다.”

고려사 형법지(刑法志)  성종(成宗) 7년(988년)


 여기서 전운사(轉運使)는 금유(今有)·조장(租藏)과 같이 고려 건국 초기에 지방에 파견되는 관리(使者)였는데 명칭상 조세수송을 담당하는 이들로 보입니다. 금유, 조장은 성종 2년(983년), 전운사는 현종 20년(1029년)에 혁파되는데 지방관 파견이 확대되는 과정에서 없어집니다.


 고려는 조세의 수취와 수송을 위해 파견되는 관료들이 지방에서의 소송을 처리할 권한과 의무를 부여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서 단계를 뛰어넘어 고소한자(越告人)라는 의미는 고소할 때 일단 지방의 향리나 파견된 관리들에게 먼저 고소한 후에, 아마도 2심제 형태로 처결을 받아들이지 못한 경우 개경에 와서 중앙조정에 호소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던 것 같습니다.


 성종 2년(983년)에 12개 계수관에 지방관을 파견하기 이전까지는 지방의 호족들에게 사법권을 위임하되, 지방에 파견된 관료들이 동시에 사법 서비스를 제공하여 호족들의 사법권의 남용을 견제한 것으로 보입니다. 


 재지사회의 장리(長吏), 즉 지배권을 위임받은 호족은 중세 일본의 재판권자들처럼 해당 지역의 이해관계자입니다. 사적인 이유로 사법권을 남용할 가능성이 존재하죠.


 중앙에서 파견한 관료들은 이런 이해관계가 없으므로 지방민들은 파견된 관료에게 호소할 수 있어서 보다 공정한 재판을 기대할 수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일시적으로 파견되는 이들은 한계가 있죠. 고려는 모든 군현에 지방관을 파견하진 않지만 983년 12개 주요 계수관에 지방관을 최초로 상주하도록 파견함으로서 이러한 지방의 사법체계를 보완해 나갑니다. 


 고려는 점차 지방관을 파견함으로서 지방의 사법행정을 강화해 나가지만 현종때까지만 해도 전국 500여개의 군현 중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은 속현(屬縣)의 수가 35개로 2/3정도였습니다. 위에서 소개한 경상도 남부같이 변경지방은 더 비율이 높았죠.


 때문에 고려는 지방관들에게 향리들을 감찰하도록 합니다.


모든 주(州)와 부(府)의 관원이 봉행(奉行)하여야 할 6개 조항을 새로 정하였다. 첫째는 백성[民庶]들의 고통을 살피는 것, 둘째는 검은 인끈을 맨 향리[黑綏長吏]들의 능력을 살피는 것, 셋째는 도적과 간교한 자들[姦猾]을 살피는 것, 넷째는 백성들의 범법[犯禁]을 살피는 것, 다섯째는 백성들이 효도·우애·청렴·결백한지를 살피는 것, 여섯째는 리(吏)들이 전곡(錢穀)을 흩어버렸는지를 살피는 것이다.

고려사 선거지(選擧志) 전주(銓注), 현종(顯宗) 9년(1018년) 2월

 

 고려 전기의 지방관은 자기 임지의 재판업무를 담당하고 동시에 속현의 향리들의 사법행정을 감찰하는 임무를 담당하게 됩니다. 이러한 감찰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보다 상세하게 알 수 있는 기록이 있습니다.


“외방(外方)의 죄수에 대해, 서경(西京)은 분사어사대(分司御史臺)가, 동서주진(東西州鎭)은 각 계(界)의 병마사(兵馬使)가, 관내(關內)와 서도(西道)는 안찰사(按察使)가, 동남해(東南海)는 도부서(都府署)가, 그 나머지의 계수관(界首官)과 판관(判官) 이상은 수시로 살펴보러 다니면서 심문할 것이며, 가벼운 죄는 정상을 헤아려 판결할 것이며, 중죄인은 옥에 갇힌 연월에 따라 기록을 갖추어 아뢸 것이다. 만약 옥사를 지체하는 관리는 죄를 주도록 의논하여 아뢰도록 할 것이다.”

고려사 형법지(刑法志)  직제(職制)


 지방의 계수관의 판관(判官) 이상의 지방관들이 자신의 임지에 가만히 있는게 아니라 조선시대 관찰사들처럼 관활지역의 속현들을 순시하면서 일종의 순회재판관 같이 감찰과 함께 사법업무를 수행해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중국의 시골 순회재판관들은 아직도 말을 타거나 걸어서 오지를 돌아다니며 재판을 합니다.-----


 계수관에 해당하는 도호부나 목(牧)에는 총 7명의 관인이 배치되었는데 그 중에 사법행정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이들이 6품 판관(判官), 7품 사록(司錄), 8품 법조(法曹)로서, 수장인 사(使)나 부사(副使), 그리고 9품 실무직인 의사(醫師)와 문사(文師)를 제외하면 모두 사법 관련으로 보이는 직책입니다.


 이는 고려가 사법행정을 지방관 임무중에서 매우 중시했음을 알 수 있죠. 고려시대 기록을 보면 판관이나 사록같은 경우 주로 과거급제자 출신들이 많이 등장하는데, 사법행정 수행에 있어서 엘리트를 많이 투입했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 뒤 5년 후에 전주막부(全州幕府)로 나가 2년 동안에 무릇 유력(遊歷)한 바가 자못 많았다. 그러나 매양 강산(江山)ㆍ풍월(風月)을 만나 휘_파람이 겨우 입에서 나올 듯하면 부서(簿書)와 옥송(獄訟)이 번갈아 시끄럽게 침노하여 겨우 1연(聯) 1구(句)를 얻고 그마저 다 이루지 못한 것이 많았으므로 전편을 얻은 것은 불과 60여 수뿐이었다.

이규보, 동국이상국전집, 남행월일기(南行月日記)

 

 이규보(1168~1241)는 전주에 사록(司錄)으로 일하면서 사법행정의 업무가 끊이지 않아 힘들었다는 기록을 남깁니다. 시로 매일 곤장소리를 들으며 죄수를 다루니 창자가 끊어지는 거 같다고 투덜거린 시도 쓰죠.


 이렇게 파견된 지방관들은 하급 실무직부터 상급직까지 다들 바빴습니다. 이는 고려 전기에 비해 후기로 갈수록 전시과 토지제도와 본관제가 점차 해체되면서 농업생산력이 증대되고 인구밀도가 증가해 재지사회에서의 사법서비스의 수요가 증가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또한 고려의 향촌사회가 본관제 하에서 향리라는 단일하면서 계층화된 동질적 집단을 형성했던 고려 전기와 달리 재지품관과 향리 등 보다 다양한 집단으로 복잡해진 것도 재지사회의 소송거리, 즉 분쟁을 증가시켰을 겁니다. 


 중세 일본의 악당(悪党)이 13세기 들어서 빠르게 증가했던 것도 비슷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농업생산력이 증대하고 인구밀도가 증가하면 조금씩 토지가치가 증가하게 되고 이는 재지사회에서의 재산권분쟁의 가능성을 증가시켰기 때문이죠. 


 이러한 사태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면 사적 분쟁이 에스컬레이션 되고 이는 무력분쟁과 지방통치의 붕괴로 이어질 우려가 있습니다. 중세 일본이 경험했던 사태처럼 말입니다. 


 고려는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사법제도와 지방통치를 강화해나가면서 이에 대처합니다.


  재판권이 1인의 담당자에 의해 행사될 경우 담당자가 청탁을 받는다거나 공정한 판결이 이루어지지 않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판결의 경우 혼자 심문하지 않고 반드시 3인 이상이 모여서 심문하는 제도가 문종 16년(1062년)에 도입됩니다. 


 임용한(그 토크멘터리 전쟁사의 임용한 맞습니다.)은 이를 합심제(合審制)라고 정의합니다. 


 “죽으면 다시 살 수 없는 것이니 인명(人命)은 지극히 중한 것이다. 지금 방외(方外)의 중형(重刑)은 계원(界員)들이 예(例)에 의거하여 친히 심문하지 않고 외리(外吏)를 시켜서 일이 많은 가운데 번잡스럽게 치죄(治罪)하고 있으니 심히 옳지 못하다.

 지금부터는 목(牧)과 도호부(都護府)에서 추옥(推獄)하는 경우, 사(使) 이하의 관원이 일제히 모이도록 하고, 지주(知州)와 현령(縣令)이 추옥(推獄)하는 경우, 계수관(界首官)의 관원 1명이 친히 나아가 다시 조사하게 할 것이며, 어긋나고 잘못된 것이 없으면, 그 후에 직함(職銜)과 이름을 연서(連署)하고 〈심문에〉 임하였던 관원은 매 7월 초하루까지 직접 〈판결문을〉 가지고 〈서울로〉 올라오도록 한다.”

고려사 형법지(刑法志)  직제(職制)


 이러한 제도는 지방으로도 확대되는데, 상대적으로 군현의 지방관은 1명에 불과하다보니, 해당 군현의 계수관에서 관원을 파견하여 이 원칙을 지키도록 합니다. 임용한은 이규보가 사록으로 일하면서 힘들었던 이유가 아마도 하급 군현의 소송에까지 출장을 다녀야 했기 때문이 아닐까 추측하기도 합니다. 


 임용한은 고려의 지방통치가 미완성인 상태에서 파견된 지방관이 사법행정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존재했고, 때문에 계수관의 보다 전문지식과 능력을 갖춘 이들을 파견하여 이러한 단점을 완화시켰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중세 일본의 사법행정과 비교했을 때 고려가 가능한 공정성과 실효성을 갖춘 사법서비스를 재지사회에 제공하기 위해서 부족하나마 상당히 노력했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순회관제는 고려 후기로 접어들수록 점점 한계에 봉착합니다.


고려후기는 기존의 비교적 안정적인 전시과 기반의 수조권과 본관제에 의한 피지배층의 거주이전 제한이 형해화되면서 빠르게 성장합니다. 


 사적 소유권, 농장(農莊)이 노비의 증가와 함께 재지사회의 농업생산력을 증가시키고 과거에는 개간되지 않았던 하천변의 습지대가 빠르게 개간됩니다. 몽골의 침공과 왜구의 침략으로 아포칼립스적인 위기에 처했다는 인식과 달리 이 시기는 농업생산력의 증가와 그로 인한 인구증가가 두드러진 시기였습니다. 


 고려 말기는 토지와 노비에 대한 소송이 왜구 못지 않게 재지사회의 화두였던 시기였습니다. 재산권 분쟁이 이전과 달리 극렬해졌다는 것은 단순히 이 시기의 고려사회의 모순이 극대화되었다기보다는 경제적 발전이 고려 전기에 비해 두드러졌다는걸 알려줍니다. 


 종[奴]의 일로 다투는 일이 있어 관청에 송사하면, 이긴 사람에게는 종 하나에 무명 한 필씩을 받아들이는데, 우리 부사가 판결을 잘하므로 들어오는 것이 더욱 많아져서 총합 무명 6백 50필을 얻었습니다.

동문선, 이색(李穡)의 남원부에 새로 둔 제용재기[南原府新置濟用財記]

 

 고려말기 이제현(李齊賢)의 손자 이보림(李寶林, ?~1385)은 사법행정에 능해서 고려사에 이웃의 소 혀를 자른 범인을 찾거나, 남의 보리를 뜯어먹은 말 주인과 보리밭 주인과의 분쟁에 대한 명판결을 고려사 열전에 남긴 인물입니다. 


 이 기록은 이보림이 남원부사로 재직하던 중에 처리한 노비 관련 재판에서 처리한 노비의 수가 650명에 달한다는 것입니다. 이 시기 지방관들은 하루 종일 소송만 처리하기 때문에 다른 업무를 볼 수 없다고 할 정도로 소송이 증가하던 시기였습니다. 


 이런 여건하에서 기존의 계수관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순회관이나 합심제도는 증가하는 소송을 감당하기 어렵게 됩니다. 때문에 고려는 계수관의 직제를 개편해서, 기존의 사록, 부사등의 관원의 수를 줄이고, 군현에 파견되는 지방관, 즉 수령(守令)의 수를 늘리고 그들의 재판권한을 확대해서 소송의 증대에 대응하고자 하게 됩니다. 


 임용한은 이러한 고려말기의 사법제도 개혁이 목표를 달성하는데 실패했다고 보고 고려 말기 개혁파에 의해 수령의 사법권한 강화로 이어져 조선시대로 계승된다고 봤습니다. 


 만약 고려 말기의 폭증하는 소송에 완벽히 대응하지 못했다거나, 권세가의 침탈을 100% 차단하지 못했다고 한다면 고려 말기의 사법개혁은 실패한 것이 맞습니다. 조선의 건국집단은 사송의 범람이 올바르지 못한 것이며 고려가 멸망한 원인으로서 인식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좀 더 넓게 시야를 벌려서 중세 일본의 사법제도와 그 결과를 장기적으로 비교해보면 고려 후기 사송의 범람을 재평가할 수 있습니다. 


 이 연재글이 추적하고자하는 중앙집권화의 관점에서 고려의 사법제도 발전을 살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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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필리핀 민다나오의 라이벌 가문간 총격전, 가문간의 원한은 주로 농지분쟁에서 시작됩니다.---


 고려의 사법제도 발전은 사회경제적 변화로 인해 재지사회에서 증가하는 경제적 분쟁이 재지사회 내부에서 무력투쟁을 야기하는 걸 저지하는데 실패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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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일본의 시골뜨기 관동 무사들은 자기 소유권을 침해하는 교토의 중앙권력을 대체할 막부를 탄생시킵니다.-----


 고려는 중앙정권의 타락한 권세가의 침탈을 제한하지 못하여 재지사회가 더 이상 참지 못하겠다고 분노하여 중앙의 통치로부터 이탈하거나, 재지유력자들이 결집해 반란을 일으키게 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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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마쿠라 시대 악당들은 자기 권리를 지기키 위해서 기꺼이 살육과 약탈을 저지릅니다.----


 고려는 재지사회의 유력자들이 국가의 사법처리를 믿지 못하고 무장하고 실력행사를 통해 자신의 권리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고 행동하도록 만들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고려의 사법제도는 완벽하지 않지만 고려 사회의 변화에 따라서 단계적으로 발전해서 재지사회가 필요로 하는 사법서비스를 제공해 파국을 막아냈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저는 고려의 사법제도가 멸망 직전까지 성공적으로 작동했다고 생각합니다. 


 중세 일본의 사법제도와 전혀 다른 결과를 초래한 고려 사법제도의 차이점은 대체 무엇일까요?




어떻게 판결의 공정성을 확보할 것인가?


 중세 일본의 불공정한 재판제도에 대해서 한쪽 편을 들지 않는 공정한 판결의 필요성과 그 제도적 개선이 시작된건 16세기의 일입니다.


 인연이 있는 자(縁者)나 친척(親類)의 소송을 다룰 때에,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는 것은 친한 이나 가신에게 믿음직하다고 생각되고 싶은 것이 아닌가? 또한 죽일 생각도 없으면서 칼을 땅에 꽃아 넣고 위협하기도 한다. 같은 편끼리 이러한 싸움을 해서는 안된다. 이를 막기 위해서 법도를 만들었다.

유키씨신법도(結城氏新法度)


 기본적으로 중세 일본의 재판권 행사는 고려의 향리가 속현의 재판권을 행사하는 것처럼 필연적으로 이해관계자가 판결을 하는 것을 피할 수 없었으며, 자신과 인연이 있는자에게 유리하게 판결을 내리는 것은 잘못된 행동이라고 인식되지 않았습니다. 


 16세기 센고쿠 다이묘들의 등장 이전까지는 이해관계자이기 때문에 재판권을 가진다는 모순적 상황을 회피할 수 없었고, 센고쿠 다이묘가 지배권을 장악한 이후에도 이해관계자가 재판권을 행사하는걸 배제하긴 어려웠습니다. 다만 이제는 "같은 편"이니 공정한 법이 필요하다고 인식하게 되죠. 


 중앙집권화된 국가를 발전시켜나간 고려는 일본이 이제 막 재판의 공정성 확보를 위한 노력을 경주하기 시작한 시점보다 500년이나 빠른 선종 9년(1092년)에 고려와 조선의 사법제도 공정성의 가장 기본이 되는 원칙을 세웁니다.


 바로 상피(相避) 제도입니다.


 고려는 친가와 외가, 처가의 친족이 같은 관청에서 근무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상피(相避) 제도를 실시합니다. 이 제도는 소송을 담당하는 관리가 친족이나 인적관계를 가진 이의 재판을 담당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또한 고려는 소송의 당사자들이 상대의 사건에 대한 재판을 담당하지도 못하게 했습니다.


 염흥방이 조반이 거짓 자복하게 하려고 혹독한 고문으로 다스렸으나 조반은 꾸짖고 욕하며 조금도 굴하지 않고 말하기를, “나는 너희들 나라의 도적을 처단하고자 하였고 너와 나는 서로 소송이 붙은 관계인데 어찌 나를 국문하느냐?”라고 하였다. 염흥방의 노기가 더욱 더해져 사람을 시켜 그 입을 마구 치게 하니 왕복해(王福海)는 조는 체하며 못 들은 척 하였고 나머지 사람들도 감히 어찌하지 못하였으나 유독 좌사의대부(左司義大夫) 김약채(金若采)가 불가하다고 하여 고문을 중지하였다.

고려사 임견미 열전


 고려말기에 염흥방과 조반이 토지와 관련하여 분쟁이 발생해 조반이 염흥방의 노비를 살해하여 붙잡혀와서 염흥방이 그에 대한 재판권을 행사하고자 할 때, 조반은 자신과 염흥방은 소송당사자(相訟者)이므로 염흥방의 재판권 행사가 부당하다고 주장합니다. 


 염흥방은 당시 최고위 권력자임에도 불구하고 이 재판권의 행사는 반대에 직면했으며, 결국 당시 최고권력자인 임견미와 염흥방이 몰락하는 결과를 초래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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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관의 제척사유, 한국의 판사는 이해관계자의 재판을 담당하지 못하게 되어있습니다. 법무부 공식 블로그 참조----


 기존의 고려 사법제도 발전과정에서 드러나듯이, 중앙정권이 파견한 지방관은 재지사회의 향리와 달리 재지사회의 이해관계자가 아닙니다. 상피제도는 지방관이 부임지에서의 이해관계를 더욱 차단할 수 있도록 함으로서 재판과정에서의 객관성을 보강시켜 주었을 것입니다.


 중세 일본이 사적 주종관계에 의거해서, 이해관계자인 주군의 권리에 따라 가신의 재판을 담당한다면, 고려의 지방관은 이해관계자가 아니어야만 합법적으로 재판권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 


 중세 일본의 속연주의(属縁主義)와 고려의 상피(相避)제도는 그야말로 서로 상극에 가깝게 반대쪽에 서 있습니다. 이는 양자의 재판에서의 공정성 격차를 극대화하겠죠.


 물론 고려의 사법제도도 완벽히 공정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사심관(事審官)을 설치한 것은 본래 인민(人民)의 종주(宗主)가 되어 유품(流品)을 뚜렷이 분별하며, 부역(賦役)을 고르게 하고 풍속을 바로잡기 위함이었다. 지금은 그렇지 못해서 공전(公田)을 널리 점거하고 민호(民戶)를 많이 숨겨두고 있으며, 만약 조금이라도 역(役)을 부과하거나 예(例)에 따라 녹전미(祿轉米)를 거두면 향리(鄕吏)로서 상경(上京)해 있는 자를 감히 자기 집[私門]에서 장형(杖刑)을 가하거나 구리[銅]를 징수하며 녹전미를 되돌려 받는 등 함부로 행패[威福]를 부리고 있도다. 

고려사 선거지(選擧志) 전주(銓注), 사심관(事審官) 충숙왕 5년(1318년) 5월


인물추변도감(人物推辨都監)에서 글을 올리기를,

 무릇 관(官)에 고소해서 노비를 소송하는 자는 모두 도감(都監)에서 대기하며 소송 내용을 진술하게 하고 개인 집[私門]에서는 다투고 소송하지 못하게 하며, 위반하는 자는 처벌하십시오.

고려사 형법지(刑法志)  금령(禁令) 공양왕(恭讓王) 4년(1392) 2월


 사심관 제도는 고려 말기에 혁파되지만 재지사회와 연계된 중앙관료가 향리에 대해 임의로 사법권을 행사하는 문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또한 개인 집에서 소송이 일어났다는 기록은 권세가가 사적으로 사법권을 행사했을 가능성을 제시합니다. 


 임용한은 이 사문쟁송(私門爭訟)을 중앙의 권세가가 사적인 사법권을 행사하는 것으로 보고 있는데, 반면 채웅석의 경우에는 고위관료가 관청에서 하층민과 송사를 벌이는 것을 수치로 여기기 때문에 자기 집에 재판관을 불러서 쟁송하는 것이었다고 해석합니다. 


 즉 고려의 재판제도가 상당한 수준의 공정성을 추구했던 것은 사실이나, 현실적으로 신분이나 권력관계에 의해 어느 정도 영향을 받았음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비교대상을 중세 일본으로 본다면 적어도 재지사회에서 고려의 지방관들의 사법행정은 객관적일 뿐만 아니라 성공적이었습니다.


 한 때 지역자위공동체를 구성하고 혼란기에 다른 촌락과 무력항쟁을 벌일정도로 거칠었던 고려의 재지유력자들의 면모는 고려 후기가 되면 사라져버립니다. 


 중세 일본의 재지무사들이나 촌락들이 자기 권리를 지키기 위해 창과 칼, 활로 무장하고 방화와 살인, 약탈을 벌였던 것과 달리 고려의 재지유력자들은 증빙문서(文記)를 제출하고 증인심문을 통해 지방관 앞에서 말과 붓을 사용해 싸웠습니다. 


  이것이 단순히 재판의 공정성 하나로 달성 가능한 일이었을까요? 


 이전 연재글 가마쿠라 막부는 왜 자력구제를 타파하지 못했을까?(링크) 에서 가마쿠라막부도 51개조의 어성패식목(御成敗式目)이란 법령을 제정하고, 나름의 정교한 재판제도를 만들었다는 내용을 소개한 바 있습니다.


 하지만 판결을 내린다고 할지라도 이를 집행하기 위해 사자를 파견하는 사절준행(使節遵行)은 재지사회에서 악당(悪党)의 무력대응에 의해 실패하곤 했습니다.


 고려는 어떻게 판결을 집행하였기에 재지유력자들이 무력보다는 소송전에 주력하도록 만들었을까요?


 가마쿠라 막부의 판결의 집행과정에서의 재지사회의 반응을 살펴보면, 마치 가마쿠라 막부가 재지사회의 악당들을 굴복시킬 무력의 부족 때문에 집행이 어려운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건 집행을 할 수 있는 무력의 유무가 아닙니다. 막부의 사절이 악당을 진압하는데 어려움을 겪는 근본적 이유는 악당을 포함한 재지사회가 판결의 집행에 동의하고 협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고려 조정이 파견하는 지방관은 군현에 1명에 불과하고 그마저도 속현에는 파견할 수 없습니다. 이 지방관이 사법 및 부세행정을 위해 동원가능한 무력은 중앙에서 파견된 군대가 아닙니다. 재지사회에서 지방군으로 군역에 종사하는 향리와 지방민이죠.


 즉 재지사회가 지방관의 사법, 부세행정에 동의하고 협력하지 않는다면 1명에 불과한 지방관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는 봉건적 지배구조를 가진 가마쿠라 막부의 판결을 집행하는 사절들과도 큰 차이가 없습니다. 사절로 파견된 무사들은 독자적인 무력이나마 가지고 있다는 면에서 오히려 지방관들이 더 불리합니다. 


 하지만 고려의 지방관들은 더 강력한 무기가 있습니다. 바로 재지사회의 동의와 협력이죠. 


 고려의 지방관들이 밀려드는 사법업무에 바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재지사회가 그들의 판결을 존중하고, 필요로 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재지사회가 그들의 판결집행에 동의하고 협력할 수 있어야만 성립가능합니다. 


 위에서 소개한 고려 후기 사회경제적 특징에 다시 주목해 봅시다.


 비교적 안정적인 경제기반을 가능하게 했던 전시과의 수조권적 지배와 피지배층인 농민을 토지에 긴박하는 본관제 시스템이 무너지고 사적 소유지인 농장과 노비가 증가하면서 농업생산력 증가와 인구밀도의 증가가 발생합니다. 


 또한 향리 중심의 전통적인 공동체 구조가 향리와 재지품관으로 분열된 결과 경제적 이유와 사회적 이유가 얽혀져 재지사회의 토지와 경작자(田民)와 관련된 분쟁의 빈도가 증가하죠.


 과거에는 결속되고 신분질서가 엄격했던 지방의 공동체 내부에서 싸바싸바 해결이 용이했지만 재지사회의 인적구성이 복잡다단해지면서 이전과 상황이 달라집니다. 한마디로 최상위 지배자인 호장(戶長)이 자기 권위로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조율하기 어려워진다는거죠.


 이런 재지사회의 상황이 보다 공정하고, 이해관계가 없는 중재자를 필요로 하게 됩니다.


 고려후기 지방관의 재지사회에서의 통치권 확대는 일방적인 지방장악의 결과가 아니라 이러한 공권력에 의한 중재자로서 고려라는 지배체제의 필요성을 받아들인 재지사회의 동의와 협력의 결과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13세기에 경상도 안찰부사로서 지방에 파견된 손변(孫抃, ?~1251년)은 남매간 소송처리는 이런 측면을 잘 보여줍니다. 


 이 사건에서 사망한 부친은 딸에게 모든 재산을 주고, 아들에게는 검은 비단옷 한벌, 검은 비단 모자, 미투리 한결레, 종이 한묶음만을 주라고 증빙서류(文契)를 남겼습니다. 남동생은 장성한 다음 억울해서 소송을 제기하죠.


송사가 있은 지 여러 해가 지났는데도 해결되지 않자 손변이 두 사람을 불러 앞에 이르게 하고는 물어 말하기를, “부친이 임종할 때 모친은 어디 있었느냐?”라고 하니, 말하기를 “먼저 돌아가셨습니다.”라고 하였다.


 “당시 너희들의 나이는 각기 몇 살이었는가?”라고 하니 “누이는 이미 혼인을 하였었고, 동생은 어린 아이였습니다.”라 하였다. 손변이 〈이 말로〉 인하여 그들을 깨우쳐 말하기를,


 “부모의 마음은 자식에 대해 같은 것인데, 어찌 자라서 혼인한 딸에게는 후하고 어미도 없는 아직 어린 아이에게는 박하겠는가? 돌아보건대 아이가 의지할 데라곤 누이뿐인데 만일 유산을 누이와 똑같이 한다면 그를 아끼는 것이 혹시 지극하지 않고 양육하는 것이 한결같지 않을까 걱정한 것일 따름이다.


 아이가 장성하게 되면 이 종이를 써서 소장(訴狀)을 작성한 후, 치의와 치관을 입고 미투리를 신고서 관에 고하면, 장차 능히 판결해 줄 사람이 있으리라 생각한 것이다. 오직 네 가지 물건만을 남겨준 뜻은 대개 이와 같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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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5700 일반 ㅍㅍㅁ) 빈니차 시스템의 도전과제는 재료? 3891141742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7:18 33 0
1225698 일반 ㄷㅇㅅㅂ)몰트케가 진짜 똥게이였음? [2] 아카데미싫다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5:05 115 1
1225697 일반 ㄱㅇㄷ) 옛날 대체역사갤 글들 보는데 나치탈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4:45 65 0
1225696 일반 성순 영국, 인도 상황 어떰? ㅇㅇ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4:37 24 0
1225695 일반 ㄸㄱ) 상익이 자기 목숨을 바쳐 독립을 지키는구나.. [4] 양지양지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3:02 147 1
1225694 일반 ㄸㄱ) 재슥이 각성 장면 ㅈㄴ 카리스마 있고 살벌하네. [14] 00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2:34 257 12
1225693 일반 띵)3부 시작시점 지도 있음? [1] 마작의악마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2:01 49 0
1225692 일반 대역물 제목이 기억 안나는데 [3] ㅇㅇ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1:15 138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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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5689 일반 ㄱㅇㄷ) 대한제국 황족들은 키가 작은게 아쉬움 [3] 나치탈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0:52 261 4
1225688 ✒️창 17세기 스페인에서 귀농합니다. -27- [5] 굳건실장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0:18 186 7
1225687 일반 띵군 대아대전각이랑 순비탕게이트각은 살아있음? ㅇㅇ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0:14 76 1
1225686 일반 고려치트 하차한 이유 [1] ㅇㅇ(58.233) 00:11 197 1
1225685 일반 대역 세계관 짜주고 소설 각 파트 그때그때 뽑는 느낌으로 [1] ㅇㅇ(112.168) 00:07 93 0
1225683 일반 띵군 3부 지도 모음집 없음? [5] 마작의악마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2.17 134 0
1225682 일반 대영선비 다시보는데 주재승 행보도 나름 납득되더라 [10] 대붕이(59.14) 02.17 207 1
1225681 일반 그런데 해외뵐떡 여기서 막는 이유가 뭐임? [14] Ladislao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2.17 282 0
1225680 일반 ㄱㅁㅁ외전) 역시 바다 위 강철들의 난타전은 [1] SLM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2.17 240 2
1225679 일반 시열압사 권상하 나만 불안함? [1] ㅇㅇ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2.17 121 0
1225678 일반 ㄱㅇㄷ) 근데 대 몰트케 진짜 빡세보이긴 함 [2] HK885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2.17 247 3
1225677 일반 대역써볼까 하는데 플랫폼 어디가 젤 좋음? [13] 대붕이(222.110) 02.17 152 0
1225676 일반 ㄸㄱ) 띵군이라도 볼까 생각중인데 [8] 연탄2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2.17 125 0
1225675 일반 시열압사 거의다봤는데 이거 거의 스릴러네 [1] ㅇㅇ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2.17 139 2
1225674 💡정보 대 몰트케 원수의 워게임 1번 문제 해답 [20] HK885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2.17 226 4
1225673 일반 ㄱㅇㄷ) 히로히토 진짜 이거처럼 생겼네 [5] ㅇㅇ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2.17 234 5
1225672 일반 ㄱㅇㄷ)동남아 정치 체계랑 태국이 강대국이었던 이유 [30] ㅇㅇ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2.17 784 20
1225671 일반 합스괴이) 독일이 핑크화되면 영프가 멘탈 터지기는 하겠다 [5] 헤트라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2.17 144 0
1225670 일반 ㄱㅇㄷ) 현대 공화정-왕정 동군 연합 가능한 경우 하나 더 있음 신스로마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2.17 81 0
1225669 일반 으악 갤 했갈렸다 [3] 대붕이(220.123) 02.17 120 0
1225668 일반 ㅎㅅㄱㅇ) 슬슬 레닌도 독일혁명이 먼저 아닐까 하고 좀 흔들릴걸ㅋㅋㅋ [4] 대붕이(218.48) 02.17 406 13
1225667 일반 캄보디아가 암흑기 이후로 다시 크메르 제국의 영광을 찾을 수 있었을까? [10] Ladislao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2.17 206 0
1225666 일반 ㄱㅇㄷ) 왕정 - 공화국 동군연합 안도라 있잖음 ㅇㅇ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2.17 66 0
1225665 일반 합스괴이) 요한이 슬슬 히틀러 견제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 보면 [5] 헤트라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2.17 168 0
1225664 일반 합스괴이) 제국 내부 공산주의자들 반응 궁금하네 [3] 헤트라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2.17 135 1
1225663 일반 마다가스카르 근대화 대역이면 영토확장은 어디로 해야하지 [6] ㅇㅇ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2.17 126 2
1225662 일반 살려만달라했다가 사망하는 [6] ㅇㅇ(222.100) 02.17 308 1
1225660 일반 ㅅㅅ) 생각해보니 북양군은 딱히 숫적으로도 우세는 아니네 [2] ㅇㅇ(175.207) 02.17 189 2
1225659 일반 대역물 갑자기 노잼이 되는 구간이 있긴 하네 [4] ㅇㅇ(222.112) 02.17 277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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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5656 일반 대역 입헌군주제 엔딩 후 좆박으면 국민들이 재정복고 요구할까 [5] ㅇㅇ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2.17 190 0
1225655 일반 저 개새끼는 아까부터 존나게 투명하네 [3] 줴줴이야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2.17 1087 22
1225654 일반 백정영어) 고종을 구워삶기라도 한건가?? [1] january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2.17 121 3
1225653 💡정보 ??? : 몸뚱이는 어디 가고 어찌하여 목만 오셨소... [7] zbv1945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2.17 226 4
1225652 일반 ㅅㅅ)갑자기 생각났는데 홈플릿까지 가면 보급문제터질것같은데? [1] ㅇㅇ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2.17 146 0
1225650 일반 유비쟁패) 유봉 박은 게 진짜 극한의 티배깅이었지 [2] 심심해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2.17 138 5
1225648 일반 합스괴이) 세르비아는 섭정군이 독일-황제군 격파하는 것 보고 [5] 헤트라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2.17 130 0
1225647 일반 카리브해 국가 배경 대역물 있나 [1] ㅇㅇ(118.235) 02.17 78 0
1225646 일반 매일 올라오던 갤산 동롬 대역 어디감 대붕이(120.143) 02.17 54 0
1225644 일반 ㄸㄱ) 준이는 코끼리 엄청 좋아하네ㅋㅋ [6] 양지양지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2.17 155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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