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시인사이드 갤러리

마이너 갤러리 이슈박스, 최근방문 갤러리

갤러리 본문 영역

[💡정보] 고려의 선물경제는 합법적인 제도에서 시작되었다.

lemiel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3.08.13 12:32:12
조회 2481 추천 21 댓글 5



 이전 글을 보시지 않았다면, 먼저 보시고 나서 이 글을 보시는게 이해가 쉽고 더 재미있습니다.


 이전 글에서는 중세 일본의 사법제도가 그 봉건적 주종관계로 인해서 불공정성을 내포할 수밖에 없었던데 반해서, 고려의 사법제도가 중앙집권체제와 상피제도를 통해서 상대적으로 공정한 재판을 실시할 수 있었다는 것을 설명했습니다.


 이러한 사법제도의 발전은 고려가 재지사회의 사회경제적 발전으로 인해 사적 분쟁이 증가하는 상황에서도 중세 일본과 달리 무력분쟁이나 무장봉기와 같은 사태가 발생하지 않도록 만들었습니다. 


 이는 고려의 중앙집권체제의 발전이 중세 일본의 봉건적 지배체제에 비해서 구성원에게 제공하는 정치적, 사회적 안정성을 확인해줍니다.


 이를 통해서 고려와 조선인은 보다 안전한 삶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일상적으로 유력자들이 무장하고 서로 교전을 벌인다거나 옆에 마을과 100년이 넘도록 토지나 농업용수, 나물채취 문제로 살해, 약탈, 방화로 원한을 쌓는 일은 한반도에서는 일어나지 않았으니까요.


 과거제를 비롯한 지방과 중앙간 인적교류, 보다 재지사회 말단까지 확장되는 공정한 사법서비스가 고려의 중앙집권화체제를 뒷받침해서 보다 안전하고 안정적인 사회를 만든 것은 사실입니다만, 이것만으론 부족합니다.


 이 글이 처음 시작되었던 일뽕종자 사상검증에 대한 입장(링크) 에서 찾아보기로 했던 중세 일본의 지방분권이  어떻게 자력구제의 세상을 만들었고, 반대로 고려의 중앙집권이 어떻게 민중의 후생을 증진시켰는지에 대해서 어느 정도 설명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선물경제"가 어떻게 이러한 고려와 조선의 후생에 기여했는지는 아직 소개하지 못했죠. 


 이제 고려, 그리고 이후 조선의 지배연합이 어떤 경제적 이익을 얻음으로서 중앙집권체제를 굳건히 지지하도록 만들었는지 선물경제를 포함해서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선물경제의 미싱링크 : 왜 시작되고, 왜 확대되었나?


 선물경제에 대해서 잘 모르시거나, 기존의 글을 보신적이 없는 분은 고려, 조선의 선물경제는 어떻게 시장경제를 짓눌렀을까?(링크) 를 참조하시길 바랍니다. 


 이 글에서 정의하는 선물경제(膳物經濟, Gift Economy)는 일반적으로 재화를 선물하는 주로 국가형성 이전의 부족사회, 아메리카 원주민이나 남태평양 원주민의 선물교환같은 것을 지칭하는게 아닙니다. 



7ce887776e37dce63c332d41565ddcd5ad471938221b688271e8b7f1dc5cadab163675fbffe0a29e3d0153335175100238eee6c8128b7687d083710f2f

---1571년 2월, 현재의 버지니아에서 세구라 신부를 비롯한 예수회 선교사들이 살해당했다.---


 1571년 2월, 버지니아에 선교를 위해 들어갔던 예수회 신부 후안 세구라(Juan Baptista de Segura)는 버지니아의 원주민들에게 살해당합니다. 그들은 아자칸(Ajacán, 이후 제임스타운)에서 수주의 기간동안 원주민들에게 많은 현물과 노동을 선물로 받았지만 그에 따른 답례를 하지 않았습니다. 


 원래 이에 대한 원주민들의 처벌방식은 추방이었지만, 원주민들은 그들의 호의를 예수회 선교사들이 모욕으로 답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회 사람들은 모두 살해당했죠. 부족사회에서의 선물교환은 항상 동일가치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지만 주어진 선물에 답례할 의무가 있었으며 이것이 이행되지 않으면 처벌당하거나 평판을 잃게 됩니다. 


 이런 형태의 선물경제는 자급자족적 경제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유통경제가 아예 발달하지 못한 사회에서나 찾아볼 수 있습니다.


  교환이 즉각적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원하는 현물을 얻는다는 보장이 없으며, 거래 자체보다 관계에 기반하므로 비효율적이기 때문이죠. 사회가 발전하면 보다 효율적인 거래방식으로 대체되게 됩니다. 왜 상인(商人)이 등장하는지 생각해보시면 될겁니다.


 조선, 고려의 선물경제라는 개념은 국가의 조세제도에 의해서 수취된 현물이 국가의 지방통치 담당자인 지방관에 의해서 현직, 또는 전직관료나 재지유력자에게 선물이라는 명목하에 제공되는 행위입니다.


 이영_훈, 이헌창, 김재호, 조영준 등의 경제사학자들은 때문에 이 선물경제를 국가의 권력에 의해 재화가 재분배되는 "재분배경제"의 일환이라고 정의합니다. 


 누군가 이 선물경제가 모든 경제의 시작이니 그걸 부정하면 모든걸 부정하는거라던가 17세기에 선물경제가 당연하다거나 하는 이야길 한다면, 이건 조선의 선물경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겁니다. 


 선물경제가 시장경제를 지연시켰다는 견해에 반박하기 위해 이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건 조선에 대한 옹호가 아닙니다. 오히려 모욕에 가깝죠. 


 칼 폴라니에 따를 때, 선물교환은 “부족공동체에서 지배적인 역할을 담당했고 고대사회에서는 주로 재분배를 통하여 통합되었고, 근대로 들어오면서는 시장에서의 교환이 지배적인 통합원리”가 된다.

 즉, 칼 폴라니는 “국가를 이룬 문명사회에서는 상호 관계에서 점차 재분배경제가 지배적인 경제 형태가 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선 중기 경제를 선물경제로 규정하게 되면, 조선 중기 경제는 부족공동체의 경제생활 형태에 머물러 있게 되며, 국가재분배 없이 바로 시장경제로 넘어간 독특한 사례가 되고 만다.

오창현, 조선 중기 선물 관행에 관한 경제인류학적 시론 


 조선의 선물경제를 재분배경제가 아니라 상호호혜적 선물의 교환에 기반한 경제이고 이를 통해 경제적 수요를 달성하는게 조선의 17세기에는 굉장히 당연했던 것이라고 규정하는 건, 조선이 선사시대 부족사회의 경제발전 수준에서 정체되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한마디로 일제 식민사관보다도 조선을 평가절하하는 황당무계한 해석이 되겠죠.


 일제시대 식민사관에 기반한 정체성론은 최소한 한국의 경제발전 수준을 10세기에서 정체되었다고 했지 부족사회 수준이라고까지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건 상식적으로 말이 안되니까요.


 선물경제를 재분배경제라고 보는 이러한 해석은 경제사학자들 이외에 선물경제를 연구한 오창현에게서도 여전히 입증은 필요하지만 비교적 설득력있는 해석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또한 최초로 일기를 통해 선물경제를 발견한 이성임 역시 선물을 단순히 호혜적 거래가 아닌 국가의 재분배체제의 일환으로 정의하며, 그 경제적 성격을 분석한 최주희 역시 선물경제가 공적 재원을 양반사족층에게 재분배하는 개념이었다고 평가합니다.


 적어도 16세기 조선의 일기자료 조사를 통해 발견된 선물경제가 상호호혜적 선물교환의 성격보다는 국가권력에 의한 자원의 재분배 성격이 강하다는 것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연구자는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링크의 연재글을 보셨다면 아시겠지만, 이 선물경제의 최초 등장은 13세기 고려의 문신인 이규보(李奎報, 1168~1241)의 기록을 통해서 최초로 확인되고, 보다 상세한 선물경제의 내역에 대해서는 16~17세기의 조선 양반들의 일기자료를 통해 확인되어 연구가 이루어졌습니다. 


 경제사학자인 김재호는 "조선왕조 장기지속의 경제적 기원"에서 이 선물경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조선왕조의 양반들은 생활에 필요한 재화를 주고받고 있었는데 주 원천이 지방재정이었다....

 지방관은 가족의 생활과 족보 편찬과 같은 사적인 목적을 위해서도 재정수입을 사용하였으며, 자신과 친분이 있는 관료들에게 지방재원으로부터 각종 생활물자를 선물하는 한편, 비공식적인 상납분을 추가하여 부세를 납부하였다.....

 지방재정을 원천으로 양반들 사이에 이루어지는 비공식적인 거래 행위는 법적인 근거나 규정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니며 ‘자연국가’의 ‘인격적’인 관계에 기초하여 행해지는 것이었다.

양반 간의 관계는 혼인과 같은 혈연적 결합뿐만 아니라 이러한 경제적 호혜관계를 통해서 유지되었던 것이며, 이러한 ‘선물경제’의 관계망에서 탈락되었을 때 더 이상 양반, 즉 지배연합의 일원임을 주장할 수 없게 되었을 것이다. 


 17세기까지 조선왕조에서 선물경제는 단순히 관료들 뿐만 아니라 재지사족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확장되어 있었으며, 그들이 필요로 하는 식료품이나 기호품뿐만 아니라 농기구와 같은 수공업제품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수요를 충족시키고 있었습니다. 


 선물경제를 통해서 조선은 사족(士族)이라는 지배층들에게 경제적 혜택을 제공하고 이는 사족들이 조선의 중앙정권이 안정적으로 지속되는 것을 지지하도록 만듭니다. 조선은 중앙권력자들 말고도 재지사회의 지배층까지 경제적 이익을 제공함으로서 광범위한 지배연합 내에 포섭한거죠. 


 바로 결론으로 들어가버려 허무하겠다고 느끼시겠지만 이 결론만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선물경제가 조선의 정치적 안정에 기여했으리라는 김재호의 해석 자체에는 동의하지만 선물경제의 역할과 본질을 충분히 설명했다고는 보지 않습니다. 


 선물경제에 대한 가장 상세한 기록이 남은 16세기 중후반의 일기 자료들은 조선의 중앙집권이 거의 완성된 이후의 일입니다. 게다가 18세기 일기자료들을 검토한 결과에 따르면 지방관에 의해 지방재정이 유용되는 방식의 선물경제는 더 이상 적용되지 않고 거래에 의한 시장경제로 대체됩니다. 


 아마도 17세기경 선물경제의 소멸이 시작되어서 18세기경에는 찾아보기 어렵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후 조선에서 선물은 호혜적 상호부조의 성격으로 남게 되죠. 


 선물경제가 조선왕조의 정치적 안정의 중요한 축이라고 가정한다면 18세기에 사족의 선물경제 혜택이 사라지면서 정치적 안정이 훼손되어야 마땅합니다. 하지만 사족들의 두드러지는 저항이나 반발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즉 16세기 조선의 선물경제는 끝물 상황이었다는 겁니다. 이게 조선의 중앙집권화를 가능하게 하고 장기적 안정을 가능하게 하던 중이라기보다는 거의 그 역할을 완수하고 사라지기 직전의 기록이 남아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선물경제가 고려와 조선의 중앙집권을 강화하고, 보다 안정적인 사회를 만들게 한 이유와 과정, 그리고 고려와 조선의 경제에 미친 영향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3가지 질문의 답변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첫째, 선물경제는 언제, 대체 왜 생겨났는가?


 둘째, 선물경제는 어쩌다가 관료가 아닌 재지유력자층에게까지 확대되었는가?


 셋째, 선물경제는 무엇에 의해 유지되고 왜 소멸했는가?


 그래야 선물경제가 어떤 역할을 수행했으며, 왜 이 비공식적이고 일종의 부패행위로까지 보이는 거래관계가 고려와 조선 사회에서 장기간 유지되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죠.




선물경제는 언제부터, 왜 시작되었는가?


 선물경제가 왜, 어떻게 시작되었는가가 왜 중요할까요? 아마도 많은 분들은 선물경제를 단순하게 불법적으로 지배층이 지방재정을 전용하는 부패로만 이해하실 겁니다. 심지어 선물경제를 언급하는 것을 비난하고 일뽕종자로 모는 사람들조차 말입니다.


 근데 사실 한국이던, 중국이던, 일본이던 간에 전근대 사회에서 지배층은 피지배층으로부터 어떤 방식이던 생산물을 가져갑니다. 그게 합법적이건 비합법적이건간에 말입니다. 방법이 다를 뿐이에요.


 그래서 고려와 조선의 선물경제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그게 어떤 사회경제적 배경하에서 시작된 것인지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고민과 이해가 없으면 선물경제를 역시 미개한 조선, 부패에 찌들었구만.. 이라고 치부하거나 선물경제 때문에 근대화 못했다는 일뽕새끼가 여기있네 같은 이야기를 하게 되지요.


 고려시대의 유통경제를 주로 연구한 정용범은 최초로 선물의 수수에 대해 확인할 수 있는 이규보의 사례를 통해서 선물경제의 등장원인을 추측합니다.


 이규보의 녹봉은 1237년에 350석 정도였으며, 사적소유지로 추정되는 소규모 농장을 가지고 있었고 8명 이상의 노비가 있었습니다. 조선시대 대비 꽤나 많은 녹봉을 받음에도 그는 그의 시에서 궁핍한 삶의 경험을 언급하면서, 이를 보충해주는 선물의 수수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정용범은 이규보의 선물수수가 여몽전쟁으로 1232년 강화도로 천도한 것과 관련이 있으리라 추측합니다. 개경과 달리 시장인 시전(市廛)이 발달하지 않아 필요한 물품을 구하기 어려웠고, 현물납 위주의 조세체계에서 중앙과 지방관청에 비축된 현물을 선물로 보내서 그 부족함을 메꾸어주는 과정에서 선물경제가 최초로 등장한게 아닌가 추측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 해석이 불충분하다고 봅니다. 


 만약 선물경제의 등장이 전란에 의한 일시적 현상이었다면 선물경제가 그렇게 장기간 지속적으로 유지되며 수도의 권력자 뿐만 아니라 재지사회의 전직관료나 재지사족에 이르기까지 확대될 수가 없죠. 


 저는 보다 본질적인 고려사회의 경제구조가 선물경제를 만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조선시대 농업사 연구자인 김건태는 "결부제의 사적 추이"라는 논문을 통해서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토지제도와 결부제에 대해 새로운 관점에서 고찰한바 있습니다. 


 좀 어렵겠지만 가능한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보겠습니다. 천천히 읽어주세요.


 김건태는 고려 전기 전시과에 대해서 굉장히 흥미로운 해석을 제기합니다. 바로 고려의 전시과를 통해 피지배층에게서 조세를 수취할 수 있는 권한인 수조권을 받은 지배층이 수확의 일부인 곡물(租)만을 수취한게 아니라 노동력(役)과 공물(賦)로서 현물을 수취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고려, 조선의 결부제가 조세의 수취량을 1결의 단위로 한 것임을 다양한 사료들을 근거로 추론해냈고, 이를 통해서 고려시대 농민들이 불안정한 농업생산의 결과물인 곡물(租) 만이 아니라 임산물 채취, 사냥, 어로등을 통해 생계를 유지했고 이 일부가 조세로 수취되었다고 주장했습니다. 


 또한 그는 고려 전기의 전시과 체제에서 이러한 곡물 이외의 현물수취가 국가가 조세를 수취하는 공전(公田)만이 아니라 수조권자에게 분급된 사전(私田)에 대한 수조권에도 적용된다고 봅니다. 


홍수와 가뭄, 병충해와 서리로 재해를 입어 밭[田]이 40%[4분(分)] 이상 손상되었을 때에는 조(租)를 면제하고, 60%[6분] 이상 〈손상되었을 때에는〉 조(租)와 포(布)를 면제하고, 70%[7분] 이상 〈손상되었을 때에는〉 조와 포와 역(役)을 모두 면제한다.

고려사 식화지(食貨) 진휼, 재해를 입었을 때 감면규정. 성종(成宗) 7년(988) 12월


 여기서 농업 수확인 조(租)는 가장 불안정하므로 먼저 면제되고, 현물인 삼베(布)는 그 다음으로, 그 이외의 현물수취대상인 역(役)은 최종적으로 면제됩니다. 불안정하고 생명유지에 필수적일수록 먼저 면제대상이 된다는 걸 알 수 있죠.


 김건태는 고려 전기 전시과 시기에 공전과 사전의 지목전환, 즉 국가가 공전을 사전으로 대체하거나 사전을 공전으로 돌리는 것이 매우 빈번하게 일어난다는 점에서 양자의 수취구조가 동일하다고 봤습니다. 


 때문에 전시과로 수조권이 분급된 사람은 곡물만 조세로 받는게 아니라 다양한 현물들을 수조지에 긴박된 농민들의 노동력에 기반해서 수취합니다. 전시과는 농지(田)에 한정짓는게 아니라 농지에 결박되어 있는 농민(人丁)의 노동력에 기반한 수취제도이기 때문이죠.


 이 시기에는 토지는 많고 사람은 적었습니다. 고려는 토지에 사람을 긴박시키고 그 노동력을 중심으로 조세를 수취하며, 이는 수조권자에게 곡물 이외의 다양한 현물로서 제공되는거죠.


 고려의 토지제도는 기본적으로 율령제, 즉 당나라의 영향을 꽤나 받았습니다만, 당나라는 관료에게 토지는 지급하지만 관료가 일종의 소작으로 경작자들을 통해서 곡물인 조(租)를 수취하는 것이지 이러한 노동력에 의한 현물수취를 강제하지는 않았습니다.


 왜 이런 차이가 나는 걸까요?


 김건태는 고려의 민간 유통경제가 발전하지 못했음을 지적합니다. 1123년에 고려를 방문한 송나라의 사신 서긍은 개경의 상설시장이 발전하지 못했고 지방에는 정기적으로 열리는 시장이 없음을 소개한바 있습니다. 


  州郡의 토산물[土産]은 모두 관아[公上]에 들어가므로, 상인[商賈]들은 멀리 돌아다니지 않는다. 다만 대낮에 시장[都市]에 가서 각각 자기에게 있는 것으로서 없는 것을 서로 바꾸는 정도에 만족한다.

선화봉사 고려도경,  民庶, 庶民


 국가주도의 유통구조는 민간시장의 발달을 늦추기 때문에 전시과의 수조권자인 고려의 지배층들은 필요로 하는 토산물을 국가가 제공한 수조권에 의해 직접적으로 수취할 수밖에 없었다는 겁니다. 


 이를 증명할 근거가 있을까요?



a67a38ad0a3678f5e3470e39f211a8ca510ca703c8b08d2610c02ce68e6b9b8a057b54d7b72cee0f0dbd39f07e2c7b529925e395e4982e2f2d02362e854eab

----태안 마도3호선에서 발견된 목간과 화물들----


 태안 마도 3호선은 발견된 목간을 통해 침몰연대가 1264~1268년 사이임이 확인됩니다. 침몰했던 여러 마도선에서 발견된 목간에는 전출(田出)이라는 단어로 주로 곡물 앞에 표기된 용어가 등장하며 발송대상은 주로 개경의 관직자입니다. 


 즉 개경 관직자의 수조지인 사전(私田)에서 수취한 화물들이 운송되었다는결 추측할 수 있습니다. 



a67a38ad0a366b2b96675a51d691aff74de4559f431bb9bf6cc662ae11ef0d1ff0dcae80b9eeda797f8272

---마도 3호선에서 발견된 젓갈 운송 관련 목간---


이 목간의 앞면 둘째줄에는 전출(田出)이란 단어가 나오는데, 누군가의 집으로 전복(生鮑)을 보낸다는 내용입니다. 



a67a38ad0a366b2b96675a51d691aff74de4559f431bb9bf6cc662a08b3ec371895befe47d7eb4d6d4e29efc2c4248

---마도 3호선에서 발견된 꿩과 젓갈 운송 관련 목간---

 

 다른 목간에서는 누군가의 집으로 꿩 3마리(雉三)와 전복(生鮑)을 보내는데, 답출(畓出), 즉 논에서 나온 것이라고 쓰여져 있습니다. 김건태는 이를 통해서 전시과 체제에서 노동력 수취로서 현물을 수조권자에게 보내고 있음을 입증합니다.


 수취단위로서의 밭(田)과 논(畓)은 토지이지만 실질적으로는 토지와 결합된 노동력(人丁)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에 현물수취가 이루어지는겁니다. 


 이는 다른 마도선 출토 목간에서도 나타납니다.


 마도1호선에서는 전출(田出)이라는 용어와 함께 백미나 조, 콩등의 곡물이 주류지만 메주(末醬)가 등장합니다. 이외에도 목간에 대나무(竹)가 적혀있고 마도선들이 도자기를 비롯한 수공업 제품이나 견과류, 과실류, 빗, 대바구니등이 다양하게 실려있었다는 것이 확인됩니다.


 사실 김건태는 고려 전기 지배층의 공물 수취 자체보다는 토지제도로서의 결부제에 초점을 두고 있기 때문에 여기서 더 파고들지는 않습니다.


 이 부분에 관심을 가지고 더 파고든 것은 이제 막 최초의 석사논문을 작성한 연구자 송기원입니다. 송기원의 석사논문 지도교수가 김건태이기 때문인지 그의 논문은 김건태의 논문과 상당부분 비슷한 흐름으로 이 대목을 분석해나갑니다.


 이후 새로 연구하신게 있으면 꼭 보고 싶어서 기대가 되는 연구자입니다. 고려 사회경제사에 관심있다면 반드시 송기원의 논문을 읽어보시길 추천드립니다.


 송기원은 그의 석사논문 "고려 전시과 수취의 성격"에서 고려 전기 전시과에서의 곡물 이외의 현물 수취와 지배층의 현물수요 충족에 대한 내용을 파고들어갑니다.


 그는 먼저 김건태와 마찬가지로 채웅석의 견해를 인용해서, 이러한 현물수취의 원인을 분석합니다. 


 국가가 재화의 생산과 유통을 직접적으로 통제하는 고려 전기에는 국가가 수취제도를 통해서 생산물을 중앙에 집중하여 분배하는 관(官) 주도의 유통경제가 작동함으로서 민간 유통경제가 억제됩니다. 

 

 때문에 민간 유통경제가 발전하지 못했기 때문에 지배층이 시장에서의 거래를 통해 필요한 재화를 획득하기 어려웠다는 겁니다. 때문에 국가는 전시과체제를 통해서 이러한 지배층의 수요를 보다 직접적으로 충족시켜줘야할 필요성이 있었다는 거죠.


 송기원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그의 논문의 중심 논리인 당시 농업의 특징에 주목하죠.


삼한(三韓)의 땅은 사방에서 배와 수레가 모여드는 곳이 아니므로, 물산(物産)의 풍족함이나 식화(殖貨)의 이익이 없으니 민생(民生)이 쳐다보는 바는 다만 땅의 힘에 있을 뿐이다. 그러나 압록강(鴨綠江) 이남은 대저 모두가 산이므로 해마다 작물을 심을 수 있는 기름진 토지[不易之田]가 전혀 없고 겨우 조금 있으니, 경계를 정함이 만약 소홀하다면 그 이해(利害)는 중국에 비하여 그 차이가 만 배는 될 것이다.

고려사 경종(景宗)에 대한 이제현의 찬(李齊賢贊)


 송기원은 위에서 소개한 고려사 식화지의 재해 발생시의 조세감면에 대한 기록과 이제현이 말한 기록을 통해서 고려시대의 농업이 해마다 이어서 농사가 가능하지 않다는 점과 다양한 재해로 인해 곡물 수취가 안정적이지 않았다는 점에 주목합니다.


 이 자료들을 종합해보면, 고려의 농업은 생산성이 낮고, 풍흉이 일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손실 수준이 40%인 경우 곡물수취인 조(租)를 면제하고 있습니다. 이 시기 농민들은 불안정한 농업으로 인해 재생산 기반이 매우 취약하기 때문에 곡물수취의 면제가 매우 일반적으로 이루어집니다. 


 즉 수조권자인 고려 지배층이 곡물수취에 의존할 경우 매우 불안정한 수입구조가 이루어진다는거죠. 상대적으로 농업에 비해서 안정적이고 면제조건이 까다로운 현물수취인 삼베(布)나 다른 종류의 노동력 수취로서의 현물(役)이 고려 지배층에게 곡물 못지 않게 중요한 수입원이었으리라 추측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고려 전시과의 현물수취구조는 사실 고려 건국 이전부터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통일신라 시기인 872년에 건설된 대안사 적인선사탑지(大安寺 寂忍禪師塔碑)의 비문에는 사찰의 수조지(田畓柴)에 시지(柴)가 143결, 소금가마(鹽盆)가 43결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현물인 땔감(柴, 또는 삼림에서 획득하는 현물)과 소금가마가 토지수취단위인 결부법으로 표기되고 있죠. 



a15610ad180eb47282342b689d1dfcb1917fec5d8ba8e13d6bc9debbdd7491912be1

----신라촌락문서----


 일본에 보관중인 신라촌락문서에는 7~9세기경으로 연도가 추정되고 있는데 여기에도 삼밭(麻田)이라는 지목의 토지단위가 있습니다. 이건 실제 삼베를 재배하던 밭이 그 넓이에 해당한다기 보다는 신라가 각 촌에 1결~1결10부 정도의 가치에 상응하는 삼베를 공물로 할당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박찬흥의 "신라 녹읍의 수취"에서는 관료에게 지급된 녹읍이 단순히 곡물만 수취한게 아니라 공물과 노동력(役)을 모두 수취하는 것이었다고 주장한바 있습니다.


 이를 통해서 고려가 지배층에게 부여하는 수조권이 곡물수취외에 다양한 현물을 공물과 노동력수취의 명목으로 수취하는것은 신라시대부터 이어진 오래된 전통이었음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송기원은 지배층이 수조권을 통해서 마도선 목간에서 나온 것처럼 고기, 수산물, 채소, 과일과 같은 다양한 품목과 함께 고려시대 기본적인 교환수단인 삼베(布)를 수취하여 필요한 수요를 충족시켰다고 봅니다.


 하지만 수조지에 한정된 생산물은 입지에 따라 제한적일 수밖에 없죠. 수조지가 내륙에 있는데 생전복을 수취할수는 없는거잖아요?


 그는 13세기 이규보에 의해 기록된 다양한 선물이 이러한 제약을 완화시켜주는 수단이라고 해석했습니다. 지배층간의 선물교환을 통해서 조달가능한 특산물의 저변을 넓힐 수 있었다는거죠.  


 자 어렵고 복잡한 내용을 잘 보셨을 겁니다. 정리해 봅시다.


 송기원의 선물경제의 등장에 대한 견해는 정용범과 달리 선물경제가 전란에 의해 갑작스럽게 등장한게 아니었을 가능성을 시사합니다.  물론 송기원은 선물경제에 주목한게 아닙니다. 그가 본 고려 중기 관료들의 선물수수는 수조권에 기반한 현물수요의 충족이라는 기본 토대를 보충하는 보조적 수단입니다.


 선물경제는 13세기 이전부터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송기원의 견해를 받아들인다면, 수조권에 따른 현물수취를 보완하는 비공식적인 수단으로서 작동했을 수 있으니까요.


 이자겸은 풍채[風貌]가 단정하고 거동이 온화하며 어진 이를 좋아하고 선(善)을 즐겁게 여겼다.(생략) 사방에서 선물[饋遺]하여 썩는 고기가 늘 수만 근이었는데, 다른 것도 모두 이와 같았다.

선화봉사고려도경, 인물(人物) 1123년경 기록


윤종양은 약속을 중히 여기고 베풀기를 좋아했으나, 전원(田園)을 넓게 차지하고 선물[饋遺]을 많이 받아서 세상의 비난을 받았다.

고려사 열전, 윤인첨(尹鱗瞻, 1110~1176)


 이규보보다 100여년 앞선 시대에 등장하는 이런 기록은 전시과에 의한 수조권을 통한 현물의 수취를 기반으로 선물경제가 보조적인 역할을 수행했을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송기원의 해석처럼 말이죠.


 하지만 저는 수조권에 기반한 현물수취와 선물경제가 보다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고려 전기의 전시과에 의한 수조권적 지배질서는 중앙관료 뿐만이 아니라 재지사회의 향리층까지 포함되어 있습니다. 즉 고려의 지배층들은 피지배층을 토지에 긴박시켜 지배하며, 그들에게서 농업 수확 뿐만 아니라 노동력에 기반해서 다양한 현물을 수취합니다. 


 16세기 조선의 선물경제가 피지배층에게서 수취한 공물이나 부역에 의한 생산물, 즉 지방재정을 지방관이 선물이라는 행위를 통해 지배층인 관료와 사족들에게 분배하는 것임은 이미 알고 계실겁니다.


 여기서 이 "선물", 김재호의 표현에 따르면 법적 근거를 가지지 않은 비공식적 거래행위를 합법적이고 공식적인 제도로 교체해봅시다.


 신라의 녹읍, 고려의 전시과와 이 선물경제와의 차이는 2가지입니다.


 법적근거에 따른 공식적 제도인가? 법적근거 없는 비공식적인 관행인가?

 개인에게 분급된 수조권에 의해 제공되는가? 지방관청에 의한 국가적 수취로 제공되는가?


 이 차이를 제외하면 본질적으로 양자는 유사합니다. 피지배층의 노동력에 기반해서 수취된 현물을 지배층에게 분배해서 그들의 수요를 충족시킨다는건 완전히 동일한 개념이니까요.


 김재호가 언급한 바와 같이 조선의 선물경제가 지배연합에게 혜택을 부여하여 조선을 지지하도록 포섭하는 역할을 했다면, 선물경제의 전신으로서 신라시대의 녹읍과 고려전기의 전시과는 합법적이고 공식적인 현물의 수취를 통해 지배층에게 혜택을 부여합니다.


 즉 재지사회를 포함하여 고려의 지배층에게 이익을 제공함으로서 그들이 고려의 중앙권력에 포섭되고 중앙집권화를 지지하도록 만드는 경제적 역할을 이 수취제도가 수행한 겁니다.


 선물경제는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악습이나 부패행위가 아니라 수백년의 역사를 가진 한반도 지배층의 피지배층에 대한 수취구조의 연장선상에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합법적이고 공식적인 수취제도가 언제, 그리고 어떻게 비공식적이고 법적 근거가 없는 조선의 선물경제로 전환된 것일까요?




고려 후기의 수취구조 변화


 이전 연재글 고려의 중앙집권이 공정한 사법제도를 꽃피우다.(링크) 에서 고려 후기 발생한 사회적 변화에 대해서 소개한바 있습니다.


 토지에 농민을 긴박시키는 본관제도가 약화된다는거죠. 무신정권기와 몽골의 침략이 유민을 증가시켰을 뿐만 아니라, 농업생산력의 증가로 인해서 유민들을 흡수할 사적 소유지인 농장(農莊)이 발전한 결과입니다.


 이 시기에 기존의 수취구조에는 중대한 변화가 생깁니다.


 왕이 드디어 재추(宰樞)와 3품(品) 이상 관리들에게 의논하라고 명령하였더니 모두 말하기를, “상하(上下)를 불문하고 모두 처간(處干)을 없애고 부역(賦役)을 부과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처간이란 다른 사람의 밭을 경작하여 주인에게는 조(租)를 주고 관청에는 용(庸)과 조(調)를 바치는 자들로 바로 전호(佃戶)를 말한다. 당시에 권세가들이 백성들을 많이 끌어모아서 처간이라고 이름붙이고는 3세(稅)를 포탈(逋脫)하여서 그 폐단이 특히 심하였다. 

고려사, 충렬왕 4년(1278년) 7월


 1278년의 사료는 고려 전기의 수조권에 의한 노동력에 대한 수취권이 언제부터인가 수조권자에게서 박탈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여기서 수조권자인 전주(田主)는 다만 곡물의 수확의 일부인 조(租)를 받을 뿐, 노동력(庸)과 현물(調)은 관청에서 수취한다는 원칙이 세워져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김건태, 송기원의 견해와 같이 고려 전기의 수조권이 조용조, 3세(三稅)를 포함한다는 해석이 나오기 이전에는 이 대목에 대해서 권세가들이 조세수취대상인 공전(公田)의 민호를 은닉하고 조세를 포탈하고 있다고만 해석되었습니다.


 그러나 13세기 초만 해도 수조권자가 노동력(庸)과 현물(調) 수취를 했었다는 전제 하에서 이 사료를 검토한다면 13세기 중후반에 수조권자에게서 국가가 현물 수취권한을 박탈하였고, 동시에 수조권자들은 이를 회피하려고 노력했음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왜 고려조정은 수조권자에게서 농민에 대한 노동력 징발, 즉 현물의 수취권한을 박탈했을까요?


 생각해 볼만한 것은 본관제 약화로 인한 소 수공업 체제의 해체입니다. 고려 전기에는 소(所)라는 특별 행정구역을 두고 수공업자와 그에 필요한 노동력을 제공하는 농민들의 거주이전을 박탈하고 노동력(役)을 징발해서 필요한 공물들을 수취했습니다. 


 본관제의 약화로 12세기 이후에 소 수공업이 점차 해체되게 되는데, 고려 조정은 아마도 이를 만회하기 위해서인지 1226년 상요(常徭)와 잡공(雜貢)이라는 현물수취 항목을 신설합니다. 이는 소(所)에 속하지 않는 일반적인 군현들에서 다양한 특산물을 할당받아서 바치도록 하는 제도였습니다. 


 고려는 토지에서 떠나 유망하는 농민들을 본관으로 되돌리지 않고 공호(貢戶)로 현재 주거지에 등록하여 공물을 생산해 납입하게 하거나, 아예 전세(田稅)를 곡물이 아닌 삼베, 면포, 꿀, 기름등으로 납부시키는 전세공물(田稅貢物) 제도 등이 고려후기에 확대됩니다.


 국가의 재정에 있어서 현물의 비중이 증가하는 과정에서 수조권자에게 제공되었던 현물수취 권한을 국가가 점유하고 수조권자에게는 곡물인 조(租)의 수취권만을 남겨주는거죠.


 아마도 점차 과거 수조권 중심의 경제구조가 사적 소유지인 농장(農莊)으로 대체된 것도 원인일 수 있습니다. 국가는 사적 소유지의 성격이 강해진 농장에서 지배층이 조(租)를 수취하는 것은 허락하지만 피지배층의 인신을 지배하는 노동력에 대해서는 수취권을 박탈했을런지도 모릅니다.


 이건 정치적 측면에서 보면, 고려의 중앙정권이 개인에게 나뉘어져 있던 피지배층에 대한 지배권을 국가의 것으로 가져온, 중앙집권화의 과정이라고도 해석할 수 있을 겁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건 간에, 고려 전기에 대부분의 지배층, 수도에 거주하는 사족이던 지방에 거주하는 향리던간에 수조권에 의해 수요를 충족하던 지배층들은 고려후기에는 합법적으로 피지배층에게서 현물을 수취할 수 없게 됩니다. 


 반면 지방관청에 의해 수취되는 공물의 비중은 증가하게 되죠. 


 이제 고려 후기의 지배층들은 대체 어떻게 자신의 현물 수요를 충족해야 할까요?




고려 후기의 선물경제 발전


 고려의 선물경제에 대한 연구는 주로 이규보(李奎報)와 이색(李穡)의 기록에 의존합니다. 


 13세기 초의 이규보(1168~1241)의 경우에 선물의 수수는 인적관계를 가진 친구나 승려, 그리고 지방관등으로 구성됩니다. 이규보가 수령한 선물 기록은 총 53건입니다.


 이규보에게 선물을 보낸 증여자는 관료가 23명, 승려가 10명, 기타 8명으로 관료에 의한 선물 비중이 컸음을 보여줍니다. 

 품목들은 술, 과일, 미곡, 수산물, 육류, 채소, 다과, 얼음, 의약품, 숯, 의복, 기타 잡화인데, 이중 가장 많은 비율이 술과 과일로 합해서 42%에 해당합니다. 이외의 식료품은 30%로 합하면 72%에 달하며, 이외의 잡화는 28%입니다. 


이규보가 빈궁한 상황일 때 선물이 도움이 되긴 했지만, 주 품목인 술과 과일로 기호품의 비중이 큰 편입니다. 송기원은 이런 측면에서 이규보의 선물수수가 보조적 수단이었으리라고 추측했죠.


 14세기 후반에 해당하는 이색(李穡, 1328~1396)의 경우는 이규보에 비해서 기록된 선물의 횟수가 대폭 증가합니다. 목은집(牧隱集)에는 총 210건의 선물 수수가 기록되어있어서 이규보에 비해서 4배로 많습니다.


 다만 이것만 가지고 13세기에 비해 14세기에 선물수수가 증가했다고 보기는 어려운게 일기자료가 아니라 시(詩)에 기록된 경우가 많아서 저자의 성향에 따라서 언제든 달라질 수 있는 부분이기 때문이죠.


 다만 주목해볼만한 차이가 있습니다. 이규보는 고부(古阜, 전북정읍), 제주나 춘천, 황려현의 지방관으로부터 귤이나 숯, 꿩등을 선물로 수령했습니다. 관료로부터의 선물이 많긴 하지만 지방관으로부터의 선물 비중이 크거나 일반적인건 아닙니다.



a15b3caa260eb34c9aff5a48c25dc7d4747617fae58de2b40c3d470c3f3ee2b44a17d82220fce52d19f9aa6a431924abe02ca88d2c96cd5bebbf67ea140ca0d63c61eb0a27d632cc

----한국역사에서 소주는 이색이 관료인 조운흘(趙云仡)에게서 받은 선물에서 처음 등장합니다. 아랄길(阿剌吉)이라고 하죠.-----


 반면 이색의 경우에는 지방관으로부터의 선물 사례가 굉장히 많습니다. 이색은 경상도, 전라도, 강원도, 충청도, 교주도, 동북면, 서북면등 각지에서 지방관에 의해 제공된 선물을 받았습니다. 


 목은집에 기록된 사례만 57건입니다. 지방관에 의한 선물 57건 대부분이 식품류였는데 그중 가장 많은 것은 20건의 수산물입니다. 이색이 받은 수산물 선물들 중 74%가 지방관에 의해서 선물로 제공되었습니다. 


 마도선 출토 목간에서 나온 생전복(生鮑)도 경상도 안렴사에 의해서 이색에게 선물로 보내진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전에는 수조권자에게 수취담당자인 향리가 공적 절차로 보냈던 전복은 이제 사적 선물로 조운선이나 역참로를 사용해 전달되었을 겁니다. 


 단순히 이색 개인의 사례에서만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게 아닙니다. 사료로도 남아있죠.


전라도안찰사(全羅道按察使) 노경륜(盧景綸)이 역에서 내선(內膳, 왕의 식사용 특산물)을 도성까지 수송하는 양이 상당히 많았는데, 사선(私膳)이 거의 반이었다. 

고려사절요, 충렬왕 1년, 1275년 11월


각 도의 안렴사가 별함과 함께 백성을 침어(侵漁)하고 사사로이 선물[私膳]이라 하여 역(驛)에 전달하여 실어 나르고 있으니 그 폐단이 심히 크다.

고려사, 형법1, 충렬왕 24년, 1298년 1월


 13세기 후반에 지방관들이 공물을 수취해서 수송하는 과정에서 이를 사적으로 유용하여 역참로를 통해서 운송했다는 기록이 나타납니다.


 13세기에 수조권자가 현물을 수취하는 권리가 박탈된 이후에 본격적으로 선물의 폐단이 나타난다는건 무엇을 의미할까요?


 고려 전기에 수조권을 기반으로 피지배층의 노동력을 수취함으로서 현물을 조달했던 고려의 지배층들은 이러한 현물수취의 권한을 빼앗기면서 수요충족이 어려워집니다. 


 국가에 의한 현물수취가 지방관에 의해 통제되는 상황에서 지배층들은 지방관과의 인적관계망과 선물이라는 수단을 통해서 필요한 수요를 충족하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하지만 이색(李穡)의 사례를 16세기 조선의 선물경제와 1:1 비교하긴 어렵습니다. 이색은 고려 말기 유학자의 대부격인 인물이며 이 시기 유학자들은 대부분 그와 학맥으로 얽혀있었습니다. 


 전국적으로 다수의 지방관의 선물을 받을 수 있었던건 그가 매우 고위관료이자 강한 영향력을 가진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16세기 선물경제의 주요 사례인 유희춘(柳希春 1513~1577)같은 경우도 중앙정계의 나름 거물이었죠.


 여기서 미싱링크가 발생합니다. 사료들을 통해 지방관과 중앙관료간의 선물경제는 납득할 수 있습니다.


 근데 16세기 재지사족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적용되던 선물경제는 현직관료뿐만 아니라 어떻게 재지유력자들에게까지 확대되었을까요? 


 다음편에서 자료가 거의 없는 이 미지의 영역에 도전해보겠습니다. 


 

참고자료

김재호, "조선왕조 장기적 지속의 경제적 기원"

정용범, "고려 무신집권기 유통경제의 성격"

오창현, "조선 중기 선물관행에 관한 경제인류학적 시론"

최주희, "16세기 양반관료의 선물관행과 경제적 성격"

이성임, "16세기 양반사회의 “膳物經濟”"

김건태, "결부제의 사적 추이"

송기원, "고려 전시과 수취의 성격"

박찬흥 "신라 녹읍의 수취"

국사편찬위원회, "신편 한국사 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소순규, "고려 말 조선 초 재정 구조의 연속성과 공납제 운영"

오치훈, "이규보를 통해 본 고려 관인의 경제생활"

변성아, "고려말 李穡이 받은 선물의 특징"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2012 태안 마도3호선 수중발굴보고서"

임경희, 최연식, "태안 마도 수중 출토 목간 판독과 내용"



자동등록방지

추천 비추천

21

고정닉 15

2

댓글 영역

전체 댓글 0
본문 보기

하단 갤러리 리스트 영역

왼쪽 컨텐츠 영역

갤러리 리스트 영역

갤러리 리스트
번호 말머리 제목 글쓴이 작성일 조회 추천
- 설문 시대를 잘 타고나서 뜬 것 같은 스타는? 운영자 26/02/16 - -
- AD 올해는 더 건강하기 프로젝트 운영자 26/02/12 - -
- AD 거침없는 그녀들의 방송 엿보기! 운영자 25/10/24 - -
1216942 공지 신문고 [9] G8KR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6.01.09 4720 1
1172385 공지 대체역사 갤러리 공지 G8KR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5.08.22 5622 7
1172403 공지 갱차리스트 [5] G8KR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5.08.22 4563 1
1075231 공지 갤러리를 편하게 관리 하기위한 완장용 관리툴 ㅇㅇ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4.10.27 3998 5
1171371 공지 플랫폼 별 구매내역 인증방법(날짜 나오게) [6] 알룰로스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5.08.20 4274 9
1225711 일반 ㄸㄱ)대하 드라마 大帝 장조 예고편 (211.60) 10:40 66 5
1225710 일반 성군순종)어떻게 본다면 상해를 대신 되찾아준거네요 [2] 노스아스터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0:37 79 2
1225709 일반 ㅅㅅ)이거 완전 폴란드… [1] 리안온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0:30 164 3
1225708 일반 ㅅㅅ)한간증명서 발급 땅땅땅 [2] ㅇㅇ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0:18 165 3
1225707 일반 ㄱㅇㄷ) 솔직히 캄보디아는 ㅇㅇ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0:00 153 2
1225706 일반 크아아아아악 대역, 대역이 부족해... [4] SLM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9:53 128 1
1225705 일반 내마속도그렇고 조조의아들을죽이다도그렇고 [10] 길가행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9:46 155 4
1225704 일반 대영선비 1달동안 묵힌거 다봤는데 여전히 재밌네 아카데미싫다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9:15 59 0
1225703 일반 ㅅㅅㄴㅇ 는 웹툰화에 좋아보이지 않음? [2] aha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8:44 171 2
1225702 일반 ㄱㅇㄷ)사실 무기 생산 비용은 차이가 별 없음 [1] ㅇㅇ(39.125) 08:27 190 1
1225701 일반 유목민 약점이 산악이랑 정글지대라던데 [7] ㅇㅇ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8:00 218 1
1225700 일반 ㅍㅍㅁ) 빈니차 시스템의 도전과제는 재료? 3891141742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7:18 142 0
1225698 일반 ㄷㅇㅅㅂ)몰트케가 진짜 똥게이였음? [2] 아카데미싫다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5:05 284 2
1225697 일반 ㄱㅇㄷ) 옛날 대체역사갤 글들 보는데 [2] 나치탈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4:45 180 1
1225696 일반 성순 영국, 인도 상황 어떰? [2] ㅇㅇ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4:37 88 0
1225695 일반 ㄸㄱ) 상익이 자기 목숨을 바쳐 독립을 지키는구나.. [7] 양지양지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3:02 276 4
1225694 일반 ㄸㄱ) 재슥이 각성 장면 ㅈㄴ 카리스마 있고 살벌하네. [17] 00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2:34 679 16
1225693 일반 띵)3부 시작시점 지도 있음? [1] 마작의악마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2:01 90 0
1225692 일반 대역물 제목이 기억 안나는데 [3] ㅇㅇ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1:15 194 0
1225691 💡정보 최근에 올라온 스페인 농업기술 영상모음 [3] HK885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1:05 369 9
1225689 일반 ㄱㅇㄷ) 대한제국 황족들은 키가 작은게 아쉬움 [6] 나치탈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0:52 423 9
1225688 ✒️창 17세기 스페인에서 귀농합니다. -27- [6] 굳건실장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0:18 311 9
1225687 일반 띵군 대아대전각이랑 순비탕게이트각은 살아있음? [1] ㅇㅇ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0:14 121 1
1225686 일반 고려치트 하차한 이유 [1] ㅇㅇ(58.233) 00:11 294 1
1225685 일반 대역 세계관 짜주고 소설 각 파트 그때그때 뽑는 느낌으로 [1] ㅇㅇ(112.168) 00:07 125 0
1225683 일반 띵군 3부 지도 모음집 없음? [5] 마작의악마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2.17 168 0
1225682 일반 대영선비 다시보는데 주재승 행보도 나름 납득되더라 [10] 대붕이(59.14) 02.17 273 1
1225681 일반 그런데 해외뵐떡 여기서 막는 이유가 뭐임? [15] Ladislao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2.17 360 1
1225680 일반 ㄱㅁㅁ외전) 역시 바다 위 강철들의 난타전은 [2] SLM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2.17 315 2
1225679 일반 시열압사 권상하 나만 불안함? [1] ㅇㅇ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2.17 155 0
1225678 일반 ㄱㅇㄷ) 근데 대 몰트케 진짜 빡세보이긴 함 [4] HK885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2.17 302 4
1225677 일반 대역써볼까 하는데 플랫폼 어디가 젤 좋음? [13] 대붕이(222.110) 02.17 179 0
1225676 일반 ㄸㄱ) 띵군이라도 볼까 생각중인데 [9] 연탄2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2.17 149 2
1225675 일반 시열압사 거의다봤는데 이거 거의 스릴러네 [1] ㅇㅇ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2.17 162 3
1225674 💡정보 대 몰트케 원수의 워게임 1번 문제 해답 [22] HK885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2.17 271 4
1225673 일반 ㄱㅇㄷ) 히로히토 진짜 이거처럼 생겼네 [6] ㅇㅇ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2.17 303 6
1225672 일반 ㄱㅇㄷ)동남아 정치 체계랑 태국이 강대국이었던 이유 [30] ㅇㅇ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2.17 1038 29
1225671 일반 합스괴이) 독일이 핑크화되면 영프가 멘탈 터지기는 하겠다 [5] 헤트라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2.17 174 0
1225670 일반 ㄱㅇㄷ) 현대 공화정-왕정 동군 연합 가능한 경우 하나 더 있음 신스로마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2.17 92 0
1225669 일반 으악 갤 했갈렸다 [3] 대붕이(220.123) 02.17 132 1
1225668 일반 ㅎㅅㄱㅇ) 슬슬 레닌도 독일혁명이 먼저 아닐까 하고 좀 흔들릴걸ㅋㅋㅋ [4] 대붕이(218.48) 02.17 530 15
1225667 일반 캄보디아가 암흑기 이후로 다시 크메르 제국의 영광을 찾을 수 있었을까? [10] Ladislao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2.17 248 0
1225666 일반 ㄱㅇㄷ) 왕정 - 공화국 동군연합 안도라 있잖음 ㅇㅇ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2.17 76 0
1225665 일반 합스괴이) 요한이 슬슬 히틀러 견제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 보면 [5] 헤트라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2.17 196 0
1225664 일반 합스괴이) 제국 내부 공산주의자들 반응 궁금하네 [3] 헤트라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2.17 146 1
1225663 일반 마다가스카르 근대화 대역이면 영토확장은 어디로 해야하지 [6] ㅇㅇ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2.17 140 2
1225662 일반 살려만달라했다가 사망하는 [6] ㅇㅇ(222.100) 02.17 351 1
1225660 일반 ㅅㅅ) 생각해보니 북양군은 딱히 숫적으로도 우세는 아니네 [2] ㅇㅇ(175.207) 02.17 220 2
1225659 일반 대역물 갑자기 노잼이 되는 구간이 있긴 하네 [4] ㅇㅇ(222.112) 02.17 311 4
1225658 일반 이 판도가 17세기라면 어느쪽이 더 우세함? [5] ㅇㅇ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2.17 256 0
갤러리 내부 검색
제목+내용게시물 정렬 옵션

오른쪽 컨텐츠 영역

실시간 베스트

1/8

디시미디어

디시이슈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