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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선사시대 한반도 농업이 느리게 발전한 이유

lemiel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3.09.29 09:58:56
조회 3965 추천 35 댓글 16
														




농업사회는 본질적으로 자급자족적이지 않다.


 전근대 한반도의 경제에 대한 묘사에서 굉장히 많이 사용되는 표현은 "자급자족적 농업사회"라는 표현입니다. 역사학자들은 고려나 조선을 포함한 중근세 한반도 경제를 묘사하는데 있어서 자급자족적 농업사회를 추구했다는 표현을 많이 사용합니다.


 이는 경제사학자들조차 마찬가지입니다. 이영_훈 역시 조선후기까지 소농사회가 자급자족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고 설명하죠. 이헌창도 마찬가지입니다. 


 문제는 이 자급자족적 농업사회란 표현이 어느정도를 의미하는가입니다.


 유통경제와 교역, 분업화가 충분히 활성화되지 못하고 도시화나 농촌공업이 발달하지 못해 자급자족적 성격이 강했다라는 일종의 상대적 의미인건지, 아니면 자급자족적 성격이 강해서 실질적으로 상업이나 공업은 의미가 없었다는 수준인건지 대중으로서는 혼란스럽죠.


 그래서일까요?


 충분한 배경지식을 갖추지 않은 경우 고려나 조선의 자급자족적 농업사회에서, 상업이나 수공업, 유통경제나 농업 이외의 산업이 크게 중요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단지 농업생산력이 충분히 발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상업과 수공업이 발달하지 못한 것일 뿐이라고 말입니다. 


 저는 역사학자들이나 경제사학자들이 이런 관점에서 "자급자족적 농업사회"라는 표현을 사용했다고 생각치 않습니다.


 그들이 이야기한 자급자족적이다란 표현은 보다 유통경제가 발전한 다른 국가나 현대적인 시장경제와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자급자족적이라는 이야기지 진짜로 농업사회가 자급자족적이어서 상업이나 수공업이 중요하지 않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본질적으로 농업사회는 자급자족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전근대 한반도의 농업사회는 자급자족적이어서는 성립될 수가 없었습니다.


 한반도 역사에서 농업사회라는 표현은 해당 사회를 구성하는 생계경제의 핵심이 농경을 통한 곡물의 생산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채집과 수렵이 주가 되면 채집수렵경제일거고, 농경의 비중이 어느 정도 증가하면 복합경제라고도 부릅니다. 


 농업사회라고 부를 수 있다면 간단히 말해 주식이 곡물이 된다는 겁니다. 주식이 곡물이 되면 무슨 문제가 생길까요?



농업사회에서 소금을 못 구하면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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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석기 시대의 인류 상상도----


 농경이 시작되기 이전인 구석기 시대(기원전 12000년에서 250만년 사이의 시기) 인류가 섭취한 소금의 추정치는 침팬지와 유사할 것으로 추정되어 매일 나트륨 768mg를 섭취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인류학 연구는 구석기 시대와 유사한 수준의 생계경제를 가진 남미의 야노마미족이나 뉴기니의 아사로족이 거의 소금을 섭취하지 않음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땀을 많이 흘리지만 않는다면 수렵을 통해 고기나 해산물을 먹을으로서 필요한 염분을 섭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농경이 주가 된 사회에서는 별도로 소금을 조달하기 시작합니다.


 인류학 연구는 다양한 수렵부족에서는 소금의 제조와 거래를 확인하지 못한 경우가 많지만 농경부족의 경우는 소금을 만들거나 거래한다는 것을 확인해 왔습니다. 


 인류가 소금의 부족이 사망을 초래한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겁니다.


 염분의 결핍은 두통과 쇠약, 그리고 현기증이나 메스꺼움을 유발하며 이것이 지속되면 사망을 초래합니다. 하지만 그 이유가 소금의 부족이란 건 확인이 처음엔 어려웠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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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을 핱고 있는 소들, 소금의 공급없이는 목축도 쟁기질도 불가능하다.---


 인류는 다른 동물들과 유사하게 소금의 맛을 즐기는 방향으로 진화했고 사육된 말은 사람의 5배, 소는 사람의 10배에 달하는 소금을 섭취해야 하기 때문에 이를 얼마 안되어 학습했을 지도 모릅니다. 소금은 맛있고, 안먹으면 가축이 죽으니 시간이 지나며 그 인과관계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겠죠. 


 조선시대에는 기근의 구황에 소금을 매우 중시했는데 이는 식량의 부족보다도 소금이 더 큰 사망 요인일 가능성을 추측하게 합니다.


 기근으로 인해 곡물이 부족하게 되면 해당 지역에서 생계 유지를 초과하는 곡물의 잉여가 감소하여 필요한 소금을 구매하기 어렵게 됩니다. 곡물보다 먼저 소금의 공급이 먼저 끊길 가능성이 높아지죠. 이러한 상황에서 사람들은 굶주림보다 먼저 염분섭취가 부족해 사망했을 수 있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농경을 생계유지의 핵심수단으로 삼는 농업사회는 반드시 외부에서 소금을 조달해야 하며, 대량의 소금을 전문적으로 생산하는 수공업자와 이러한 소금을 내륙의 농업 촌락으로 운송하고 판매할 상인을 필요로 합니다. 


 이를 "자급자족적"으로 해결하려 한다면 농업사회는 발전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채집수렵의 생계경제에서의 비중을 늘리거나, 해변가에만 정착해서 직접 소금을 생산해야만 하기 때문이죠.


 이는 애덤 스미스가 말한 사회적 분업, 그리고 이 분업을 가능하게 만드는 교환(Exchange)이 농업사회를 존재 가능하게 해주며, 그 생산성을 향상시키는 아주 기초적인 요소임을 이해하게 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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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5000~4000년 사이 유럽 지역의 소금생산의 고고학적 증거들---


 때문에 이미 신석기시대에 세계 각지에서는 소금생산의 흔적들이 유적으로 발견됩니다. 본격적인 농업사회로 이전하기 전에도 세계 각지에서 소금생산의 흔적들이 나타나며 일본의 경우에도 신석기시대인 조몬시대 후기에 함수를 끓인 흔적이 토기에서 발견됩니다.


 개별적으로 필요한 소금 이상을 생산하는 유적의 존재는 이를 다른 집단과 교환하는 교역이 존재함을 알려줍니다. 교환이 존재해야 소금생산이라는 분업화가 가능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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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도 남포 원읍의 소금생산 유적, 연합뉴스 참조----


 아쉽게도 한반도에서는 선사시대에 소금생산의 흔적을 아직까지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한반도에서 발견된 가장 빠른 소금생산유적은 평안도 남포시에서 발견된 1~5세기 추정 유적들입니다.


 몇가지 요인이 영향을 줄 수 있는데, 한반도의 경우 청동기시대까지 채집, 수렵, 어로의 비중이 매우 높았고, 해안에 위치한 취락이 많았기에 소금생산과 교환의 필요성이 적었을 수 있습니다. 유럽처럼 대륙에 위치하고 소금의 공급이 먼 해안이나 특정지역의 암염에 의존하는 경우와는 여건이 다릅니다. 


 유적 자체는 원삼국시대가 최초라고 하겠지만, 사실 그 이전에 소금생산이 시작되었을 것이라고 봅니다. 농경이나 목축이 소금의 필요성을 촉진했을테니까요.


 을불은 고난을 이기지 못하고 1년 만에 그 집을 떠나, 동촌(東村) 사람 재모(再牟)와 함께 소금 장사를 하였다. 배를 타고 압록(鴨渌)에 이르러 소금을 내려놓고 강 동쪽 사수촌(思收村) 사람의 집에 머물렀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300년 8월, 미천왕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도망해 곤궁하게 지내다.


  한반도에서 소금유통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고구려의 미천왕에 대한 기록입니다. 3세기 후반에 소금을 유통하는 상인이 존재했고 수운으로 소금을 실어날랐음을 알 수 있습니다. 농업이 두드러지게 발전하면서 소금의 필요성이 증가하고 당연히 민간유통망이 발전한 상태임을 알 수 있습니다. 


 소금은 아주 본질적인 문제입니다. 생존의 문제니까요. 다만 소금생산의 분업화와 교환이 필요했다고 해서 농업사회의 생계경제에서 그 비중이 절대적이란 의미는 아닙니다.


 여전히 그 경제의 자급자족적 성격이 충분히 강하다고 이야기할 수 있죠. 생존에 필수적이긴 하지만 필요량이 곡물처럼 많은건 아니잖아요?


 소금을 저렴하고 안정적으로 공급한다면 농업생산은 보다 안정적이고 효율적으로 노동력을 투입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건 간접적입니다. 필수적이긴 하지만 직접적으로 농업의 발전을 밀어붙이는 강력한 추진력은 아닙니다.


 하지만 분업과 교환은 한반도 농업에 있어서 이런 간접적 역할만 하지 않습니다. 아주 직접적이고 강력한 추진력으로 작동했습니다. 


 농업사회, 특히 적어도 전근대 한반도의 농업사회가 결코 자급자족적일 수 없는 이유는 한반도가 철제 농기구의 도입 없이는 실질적인 농업사회로 발전하는게 불가능했기 때문입니다.




왜 한반도는 농업사회에 도달하는게 오래 걸렸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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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탑리 유적에서 출토된 돌보습----


 전근대 한반도에서 농경은 신석기 시대에 시작되었다고 추정됩니다. 황해도 봉산군 지탑리 신석기 유적에서 탄화된 곡물과 석제 농기구가 발견되었으며 기원전 3000~3500년 이전에 최초로 시작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석기 시대 농경이 시작되었다고 해서 농업사회가 성립된건 아닙니다. 한반도의 신석기 시대에 대한 고고학 연구는 당시 생업경제가 농업보다는 어로, 채집, 수렵의 비중이 훨씬 높았고, 농경의 비중이 매우 제한적이었음을 알려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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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청동기시대 취락에서 출토된 어망추---


 이는 청동기 시대로 진전한 이후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신석기 시대에 비해 농업의 비중은 상당히 증가하였으나, 청동기 시대의 한반도인은 농경만으로는 생계를 유지할 수 없었습니다. 


 여전히 식물과 조개류의 채집, 수렵, 가축의 사육, 어로활동의 비중이 컸고, 심지어 청동기 후기부터 초기 철기시대에 한반도 남부에서의 농경은 상당히 쇠퇴하고 채집, 수렵, 어로활동의 비중이 더 커지는 현상까지 나타납니다.


 농경의 발전을 통해서 청동기시대 영남의 인구가 전기에 비해 후기에 대폭 증가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초기 철기시대로 넘어가면서 이렇게 발전한 취락은 급격히 붕괴합니다. 한반도 남부에서 농업사회가 본격적으로 발전하는 것은 원삼국시대에 들어서야 가능해졌습니다. ( 이러한 주장에 대해서 근거가 부족하다는 비판도 있습니다. )


 저는 이런 측면에서 원삼국시대와 삼국시대의 철제 농기구 보급이야 말로 한반도에 농업사회가 정말 제대로 정착하고 발전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요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왜 철제 농기구의 보급이 한반도에서의 농업사회 발전의 핵심 요인일까요?


 농경이 최초 시작된 신석기시대부터 초기철기시대에 이르기까지 농기구는 목제나 석제였습니다. 그 이후에도 꾸준히 사용됩니다. 


  사실 이것은 일명 4대문명이라고 불리는 황하, 나일강,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 인더스강 유역에서 발전한 문명들도 큰 차이가 없습니다. 


 이들이 청동기 사회에 진입했어도 농경에 사용되는 도구들은 석제거나 목제였습니다. 청동은 철기와 달리 구하기 어려운 도구이기 때문에 농경에 사용되더라도 낫과 같은 제한적인 도구에 한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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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1200년경 이집트 벽화, 목제 쟁기와 소를 사용하여 경작을 하고 있다. 한반도에서는 적어도 3~4세기 들어서야 시작된다.----


 그렇지만 이들은 한반도의 우리 조상들보다 엄청나게 빠르게 농업사회를 발전시켰습니다. 위의 벽화와 같이 축력을 사용해 쟁기로 경작을 할 수 있었고, 대량의 곡물을 생산하고 많은 인구를 부양하며 도시를 건설하는데까지 이릅니다. 


 툭히 근동지방의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철제농기구 없이도 농업사회를 정착시키고 인구를 부양하여 이미 기원전 3000년이 되면 도시와 국가가 만들어졌으며 분업과 교환이 이루어져 지중해 일대의 광범위한 교역망이 형성됩니다. 


 한반도에서는 서기 3~4세기에 가서야 축력으로 쟁기질을 하는게 가능해집니다. 왜 이런 차이가 나타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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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의 나일강 유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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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나일강 유역의 토양---


 4대 문명이라 불리는 곳들은 대부분 거대한 강변에 위치한 충적평야지대입니다. 거대한 강을 통해 상류에서 흘러내린 토양들이 오랜 시간을 거쳐서 쌓인 충적토(alluvial soil)로 이루어져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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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대 이집트 벽화에 묘사된 진흙 벽돌---


 이렇게 형성된 충적토에는 돌이 별로 섞여있지 않습니다. 4대 문명의 거점지역에는 대부분 석재가 부족하며, 이는 그들의 건축양상에도 영향을 줍니다. 충적평야지대는 건축에서 충적토를 사용하여 벽돌을 만듭니다. 그들이 석재를 사용하는 경우(피라미드?)는 보다 먼 거리에서 운송해와야 합니다. 


 이런 토양환경은 목제 농기구로도 쉽게 경작이 가능합니다. 고랑과 이랑을 만들고 땅을 깊숙하게 팔 수 있으며 심지어 축력을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우리 조상들도 이런 간단한 원리를 모르지 않았습니다. 목제나 석제 농기구를 사용한다면 충적토 지대를 경작하는게 합리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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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연약지반 분포----


 기본적으로 한반도는 산지와 구릉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산지지형의 비율이 49%이며, 구릉지의 비율이 32%, 평야 비율은 19%에 불과합니다. 위의 지도는 한반도의 연약지반, 즉 사질토와 같은 충적평야 지대의 분포를 보여줍니다. 


 빨간색으로 표현된 지역이 주로 하천변 충적토가 많은 지형일겁니다. 


 기본적으로 한반도에는 4대 문명의 발상지들처럼 광대한 충적평야가 발달되어있지 않습니다. 반면 한반도에 일반적인 지형은 산지와 구릉지, 계곡들 사이사이에 존재합니다. 


 이런 지형들은 산악지형의 암석들이 오랜 변형과정을 거쳐서 형성되는 경우가 일반적입니다. 다수의 대형암석, 깨진 돌과 암석 부스러기들이 존재하고 표토층의 깊이는 얕을 가능성이 높겠죠. 이런 지형을 목제 농기구로 경작한다고 하면 애로사항이 꽃피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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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3세기, 대전출토 추정 농경문 청동기에 묘사된 목제 농기구 따비와 괭이----


 청동기시대 후기에서 초기 철기시대의 한반도 농경문화를 상징하는 농경문 청동기에는 한반도의 전통적인 농기구인 따비와 괭이가 보입니다. 목제로 된 이런 농기구로는 충적토 지대가 아닌 지형은 경작하기 어렵습니다. 훨씬 더 많은 노동력을 요구하겠죠. 


 물론 한반도에 충적토 지대가 없는건 결코 아닙니다. 강변에 충적토지대가 존재하며 하천 곳곳에 범람원들이 존재합니다. 신석기 및 청동기 시대의 낮은 인구밀도를 고려할 때 충적토 지대는 농경을 발전시키기에 그렇게까지 부족한 넓이는 아니었을 수 있습니다. 


 실제로 청동기 시대 한반도에서 농경이 발전한 것으로 추정되는 유적지들은 강변 충적지를 중심으로 발달한 경우가 많습니다. 구릉지에도 경작유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규모가 작았던 반면에, 강변 충적지에 입지한 밭의 경우는 대규모로 조성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는 기본적으로 안정적인 경작지, 아니 안정적인 정착지라고도 할 수 없었습니다. 청동기 시대 중기 이후에 농경이 쇠퇴할 이유가 있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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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와 세계 강들의 하상계수 비교----


 한반도의 하상계수는 세계의 다른 강들과 비교했을때 끔찍할 만큼 차이가 심합니다. 최소유량과 최대유량의 차이가 300배에서 700배에 달하는데, 나일강이 30배라는걸 생각하면 엄청난 차이죠.


 즉 갑자기 비가 내려서 범람하기 시작하면 대책이 없다는 겁니다.


 청동기시대의 강변 충적지대에 위치한 환호취락, 특히 남강유역의 대평리취락이나 다른 취락에서는 강물의 범람으로 파괴되고 재건된 흔적이 남아있으며 이런 취락이 버려진 이유로는 자연재해로 인한 홍수피해가 원인이었으리라 추측되기도 합니다. 


 청동기시대의 밭들은 주로 강변의 자연제방에 조성되고 강이 범람하여 폐기되고 다시 그 윗면을 밭으로 조성하는 경작양상을 보입니다. 이집트의 나일강처럼 범람이 매우 정기적이고 하상계수가 낮을 때는 별도의 시비가 필요없니 새로 퇴적된 충적토를 활용할 수 있기 때문에 효과적이지만 한반도의 하천에서는 지나치게 불안정한 경작방식입니다. 


 언제 범람하는지, 범람의 정도가 아예 경작지를 파괴할 정도인지 확실하지 않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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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천과 범람원, 배후습지의 양상---


 한반도에서 하천변 유역의 범람원이나 배후습지에 안정적인 농지를 형성하는 것은 제방을 비롯한 수리시설을 설치하고, 습지를 배수하는 대대적인 노력과 투자가 필요했습니다.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 같은 경우 충적지가 넓게 분포되어 일단 먼저 다수의 농경취락이 발전하고 인구가 증가한 다음 이 저습지에 대한 관개 및 개척에 들어갔습니다. 막대한 노동력과 자본투자가 필요한 이 과정을 거치며 도시와 국가가 발전합니다.


 반면에 한반도의 신석기 사회나 청동기 사회에서는 이런 인구증가가 어려우니 이런 대규모 노동력과 자본투자가 불가능합니다. 게다가 나일강보다 10배 이상 하상계수가 큰 하천의 저습지를 당시에 배수하고 제방을 쌓고 관개하는게 가능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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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전남 구례의 홍수, 댐이 있어도 홍수조절이 쉽지 않은 한반도입니다.---


 걸핏하면 범람하고 무너지지 않을까요?


 백제가 등장한 이후에야 전라도 일대에서 충적평야지대의 개간이 시작되지만 저습지로 한반도의 조상들이 본격적으로 개발을 시작한건 고려후기 들어서였습니다. 한반도에 청동기시대에 농경이 제대로 정착하기 어려울만한 이유가 있었던거죠. 


 한반도에서 충적평야라고 할만큼 대규모 하천 유역의 경우는 일제시대 가서야 본격적으로 개발이 가능해질 정도였습니다. 해방 이후에도 서울 강남이 걸핏하면 범람해 물바다가 된 걸 생각해보세요.


 심지어 조선후기 모내기를 위한 수전(水田)의 발달도 상당수는 평야지대로 내려가는게 아니라 오히려 계곡 상류로 올라가기도 합니다. 대규모 하천의 수리가 까다로우니까 보다 수리가 용이하고 편한 높은 지형으로 가는거죠. 


 즉 한반도의 지리 및 기후환경에서 농업사회를 본격적으로 개막하기 위한 필수조건은 충적평야의 개발이 아니라 표토층에 잔돌과 암석이 많은 산이 가깝고 큰 하천이 아닌 쫄쫄 흐르는 개천이 계곡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배산임수의 지형에 농지를 개척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었습니다.


 이러한 지형을 개발할 수 있어야 한반도에서 채집, 수렵, 어로행위가 농경과 함께 이루어지는 복합경제체제에서 농업중심의 경제로 나아갈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신석기 시대에 이렇게 목제 농기구로 경작이 까다로운 지형에서는 고랑이나 이랑을 만드는게 아니라, 불을 질러서 경작지를 확보한 다음 종자를 파종할 구멍만 파고 대충 흙으로 덮는 방법을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추측되고 있습니다.


 아마도 도구의 차이가 별로 없는 청동기 시대에도 마찬가지가 아니었을까요? 당연히 수확이 시원치 않았을겁니다. 


 이러한 요인은 한반도에서는 신석기-청동기 시대에 채집과 수렵, 어로행위가 오히려 농업보다 더 노동생산성이 높은 경제활동이었을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이런 상황을 바꾸기 위해서는 철제 농기구의 도입과 보급이 필수적이었습니다. 돌과 자갈, 암석이 많은 토양을 경작하려면 목제나 석제 농기구로는 너무 많은 노동력이 필요합니다.


 근데 문제가 있습니다.


 철제 농기구를 농민이 자급자족해서 구할 수 있습니까?




한반도에선 분업과 교환 없이는 농업사회도 없다.


 20세기초의 대표적인 고고학자 고든 차일드(Gordon Childe)는 인류사에 최초로 등장한 전업적 수공업자(Full-Time Craftsmen)가 청동 대장장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는 여성 토기제작자(Potter, 선사시대 토기 제작자가 여성들의 가내수공업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합니다.)에 비해서 대장장이들의 작업이 훨씬 복잡하고 까다로우며 전문적인 지식이 필요했다고 추정합니다.

 농업과 겸업이 가능했던 토기제작과 달리, 청동을 다루는 수공업자는 전업적(Full-Time job)이었으리라고 추정하며, 이를 최초의 전문화(Specialization of Labor)의 상징이라고 묘사합니다. 


 게다가 사회적 분업도 심각하게 요구합니다. 구리와 주석은 지구상에서 철에 비해 훨씬 구하기 어려운 금속입니다. 청동기의 사용은 높은 수준의 사회적 분업을 요구하며 광대한 유통망을 필요로 합니다. 


 하지만 청동기는 분명 전문화(Specialization)을 통한 분업의 강화를 요구함에도 불구하고, 농업생산성에는 그다지 기여하지 않습니다. 워낙 귀한 물건이라 농기구로는 잘 사용되지 않거든요. 주로 무기나 사치품(고고학에서는 주로 위세품이라 부릅니다.)의 성격이 강합니다. 


 즉 철기의 등장과 보급이야 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전문화(Specialization of Labor)를 통한 생산성의 증가를 견인할 수 있었습니다. 


 철기 제작은 청동보다 훨씬 고도의 기술을 요구합니다. 구리의 녹는점이 1,085°C인 반면, 철의 녹는점은 1,538°C로 훨씬 높습니다. 주철로 녹여내는 정도가 아니라 불순물 많은 괴련철을 만들려고만 할 경우 1000°C 의 온도가 필요하며 풀무같은 보다 효과적인 산소의 공급 수단과 숯의 사용이 요구됩니다. 


 철광석을 제련하고, 여기서 얻은 철을 사용할 수 있는 수준만큼 불순물을 제거하고 정련하는 작업은 청동의 가공에 비해서 훨씬 더 어렵습니다. 요구하는 노동력도 크고, 필요한 장비, 즉 자본도 더 많습니다. 


 또한 철광석의 확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철은 구리나 주석에 비해 훨씬 흔하지만 그렇다고 아무데나 있는건 아닙니다. 


 난이도 있는 기술을 다루는 전문적인 대장장이집단이 필요합니다. 또한 그가 필요로하는 원재료를 생산하고 유통시켜 공급해야만 합니다. 연료인 숯의 생산은 철광석보다 3배나 많이 필요하며 전문화가 요구됩니다. 


 즉 분업과 교환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철제 농기구는 한반도에 출현할 수 없습니다. 또한 분업과 교환이 발달하지 않는다면 철제 농기구는 한반도에 충분한 만큼 공급될 수가 없습니다.


 취락민들이 채집, 수렵, 농경을 하던 도중 겸업으로, 또는 반전업적으로도 어느 정도는 제작할 수도 있었던 석제, 목제 농기구와는 상황이 완전히 다릅니다. 


 철제 농기구의 출현과 이를 통한 한반도에서의 농업사회 발전이야말로, 농업사회가 본질적으로 자급자족적이지 않으며, 자급자족해서는 결코 농업사회가 발전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이야깁니다. 


 그럼 어떻게 한반도에 철기가 보급되어 나갔는지 그로 인해 농업양상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한번 살펴봅시다. 



 

참고자료

SB, Eaton 외 2명, "Paleolithic nutrition revisited: A twelve-year retrospective on its

nature and implications"

Mark Kur_lansky, "Salt : A World History"

Olivier Weller, First salt making in Europe: an overview from Neolithic times

V. Gordon Childe. "Man Makes Himself"

국사편찬위원회, "농업과 농민, 천하대본의 길"

양인호, "소금 생산 유적으로 본 1~5세기 초 평안도 지역의 소금생산"

윤정국, "석기조성으로 본 신석기 시대 생업경제의 변동과 의미"

김동일, "청동기시대 동북아시아의 생업경제(상) - 한반도와 요령, 길림지역을 중심으로"

안승모, "동아시아 정주취락과 농경출현의 상관관계 - 한반도 남부지방을 중심으로-"

김성욱, "청동기시대의 어로활동"

윤호필, "한국 청동기시대 농경의 개시 및 전개"

배덕환, "대평리 방어취락의 성립과 해체"

김도헌, 고대의 목제 기경구 연구"

김동진, "농지개간 : 천방과 화전" http://www.koreanhistory.org/1808

https://chriskresser.com/shaking-up-the-salt-myth-history-of-sal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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