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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위키번역]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상)

모루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18.09.30 16:24:34
조회 1341 추천 7 댓글 5
														

갈리치아는 약간 인구 많은 함경도 느낌

말도 잘 안통하고 농민들하고 초막 같은거밖에 없고

오스트리아 소설 같은 거 보면 장교들이 갈리치아로 배치 받기 싫어서 똥줄타는 모습 나옴


2014.1.31 발췌

번역:모루


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



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
Королівство Галичини та Володимирії (ua)
Królestwo Galicji i Lodomerii (pl)
Königreich Galizien und Lodomerien (de)
오스트리아왕실령a

30px-Chor%C4%85giew_kr%C3%B3lewska_kr%C3%B3la_Zygmunta_III_Wazy.svg.png

30px-Flag_of_the_Duchy_of_Warsaw.svg.png

30px-Flag_of_Krakow.svg.png
1772–191830px-Flag_of_Poland.svg.png

30px-Flag_of_Ukraine.svg.png

30px-Flag_of_Bukowina.svg.png

Blank.png
125px-Flag_of_Galicia-Lodomeria_1890-1918.svg.png85px-Wappen_K%C3%B6nigreich_Galizien_&_Lodomerien.png
깃발문장
250px-Galizien_Donaumonarchie.png
1914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갈리치아-로도메리아
수도렘베르크(리비우)
언어공식언어:
독일어
행정부 언어 (1867년 이후):
폴란드어
소수언어:
루테니아어

1910년 통계:
폴란드어 58.6%
루테니아어 40.2%[1]
종교로마 공교회, 루테니아 그리스 공교회, 유대교, 아르메니아 공교회
정부형태군주제
군주
- 1772–1780마리아 테레지아(초대)
- 1916–1918카를 1세 (마지막)
지사/총독
- 1772–1774요한 폰 페르젠 (초대)
- 1917–1918카를 게오르크 후인 (마지막)
입법부의회
역사
- 폴란드 분할1772년 8월 5일
- 서우크라이나민족공화국1918년 10월 19일
- 폴란드 공화국1918년 11월 14일
- 생제르멩 조약1919년 9월 10일
현재23px-Flag_of_Poland.svg.png폴란드
23px-Flag_of_Ukraine.svg.png우크라이나
a:1804-67년에는 오스트리아 제국의 왕실령 , 1918년까 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왕실령


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은 1772년부터 1918년까지 각각 합스부르크 왕조, 오스트리아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왕실령이었다(치스라이타니아 항목 참조). 이 지역은 현재는 폴란드와 우크라이나에 속해 있다. 역사적으로 갈리치아라 불린 지역에는 현재 서부 우크라이나의 리비우, 테르노필과 이바노-프랑킵스크 지역이 포함된다.


명칭


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과 크라코프 대공국 및 아우슈비츠와 차토르 공국들

독일어: Königreich Galizien und Lodomerien mit dem Großherzogtum Krakau und den Herzogtümern Auschwitz und Zator;

폴란드어: Królestwo Galicji i Lodomerii wraz z Wielkim Księstwem Krakowskim i Księstwem Oświęcimia i Zatoru;

우크라이나어: Королівство Галичини та Володимирії з великим князіством Краківським і князівствами Освенцима і Затору, 로마자 표기: Korolivstvo Halychyny i Lodomeriï z velykym knyazivstvom Krakivskym i knyazivstvamy Osventsyma i Zatoru

헝가리어: Galícia és Lodoméria királysága Krakkó nagyhercegségével és Auschwitz és Zator hercegséggel


역사


1772년 제 1차 폴란드 분할에서 오스트리아 제국은 여러 영토를 합병했는데, 그 중 가장 큰 것이 갈리치아였다. 그리하여 오스트리아가 병합한 폴란드 땅과 나중에 우크라이나가 될 영토들은 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으로 명명되었는데, 이는 이 지역이 헝가리 왕위에 속해 있음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제 3차 폴란드 분할, 민족구성이 폴란드계인 서쪽 영토들(신 갈리치아 혹은 서갈리치아)이 '갈리치아'로 편입되면서, 갈리치아라는 지명이 뜻하는 의미도 변하게 되었다. 리비우(렘베르크)가 오스트리아령 갈리치아의 수도로서 기능하였는데, 지역의 동쪽 절반 인구는 대부분 우크라이나인, 또는 당시 부르던 대로 ‘루테니아인’이었는데도 불구하고 폴란드계 귀족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거의 갈리치아 전역에 거주하고 있던 이들 폴란드 귀족과 향사 계층, 동쪽의 루테니아인들 이외에도 상당한 유대인 인구 또한 존재했다. 이들 인구 역시 왕국의 동쪽에 더 집중적으로 거주하고 있었다.


오스트리아의 지배 초기 몇십 년 동안 갈리치아는 빈 정부의 철저한 통제를 받았고, 대부분 독일인과 독일화된 체코인으로 구성된 관료집단에 의한 대규모 개혁이 실시되었다. 귀족계층은 권리를 보장받았지만 그 권리는 상당히 제한되어 있었다. 기존의 농노들은 더 이상 재산으로 취급되지 않고 법의 적용대상이 되었으며, 영주의 승인 없이 결혼할 수 있는 권리와 같은 특정한 개인적 자유를 보장받았다. 그들의 노동조직 또한 규정되고 제약을 받았으며, 영주들을 건너뛰어 황제의 궁정에 직접 심판을 부탁할 수 있게 되었다. 기존에 루테니아인들이 섬기던 동방의례를 따르는 ‘합동’교회는 로마 공교회와 동격으로 끌어올리려는 목적에서 ‘그리스 공교회'로 개명되었다. 이 교회를 위한 신학대학이 생겼고 관구장주교(Metropolitan)도 세워졌다. 귀족들은 이 개혁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폴란드, 루테니아계 민중들에게는 황제를 향한 엄청난 호감을 이끌어내었는데 이는 거의 제국이 멸망하는 그 순간까지 지속되었다. 하지만, 동시에 오스트리아제국은 갈리치아를 경제적으로 착취하였고, 많은 농민 인구를 바탕으로 병력을 징집해 병역 의무를 부과하였다. 


400px-Map_of_the_Kingdom_of_Galicia,_1914.jpg

magnify-clip.png1846-1918년 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의 지형도



1815 - 1860년


1815년 빈 회의의 결정에 따라, 오스트리아는 루블린 지역과 그 근방(대부분은 신(서)갈리치아)을 포기하여 당시 러시아 차르의 지배하에 있던 폴란드 왕국으로 넘겼고, 대신 러시아는 1809년부터 영유하던, 예전에 남 포돌리아라 불리던 영토를 포함한 테르노필 지역을 오스트리아 제국에 반환했다. 역시 신(서)갈리치아에 속했던 대도시 크라코프와 그 근방은 이제 오스트리아 제국에서 준 자치권을 부여받은 크라코프 자유시가 되었다.



1820-30년대는 빈의 감독을 받는 관료통치 시기였다. 행정관료들은, 비록 자녀 대에는 벌써 폴란드에 동화되고 있는 이들도 있었지만, 대다수가 독일어 구사자들이었다. 그 중에는 독일어를 구사하는 체코인들도 있었다. 1830년-31년에 러시아령 폴란드에서 11월 봉기가 일어났고 여기에는 갈리치아에서 자원한 이들도 몇천 명이 참가했는데, 이후 폴란드계 난민들이 갈리치아로 들어오게 되었다. 이후 1830년대 후반에는 폴란드계 음모조직들이 난무하였고 이는 1846년 갈리치아 반란으로 이어졌으나, 오스트리아는 이를 황제에게 충성하던 갈리치아 농민들의 도움으로 쉽게 진압하였다.



반란은 왕국 서쪽의, 폴란드계 주민들이 거주하는 지역에서 발생했다. 봉기의 목적은 독립국가 폴란드를 세우겠다는 것으로 거의 비밀도 아니었는데, 농장을 소유한 폴란드계 향사계급은 여기에 지지를 표하거나 최소한 동정적이었다. 하지만 서갈리치아 농장에서 일하던, 흉작으로 비참한 상태에 놓인 농민들은 폴란드 독립이 좋을 것 하나 없다고 여겼고, 오히려 이를 농노제 대항해 들고일어날 기회로 여겨 수많은 농장주, 장원주들이 살해당했다. 폴란드 독립을 위한 봉기가 실패하고서 크라코프 시는 반자치권을 박탈당하였고 다시 오스트리아 관료의 통치를 받는 갈리치아 왕국의 한 부분으로 돌아갔다.



같은 시기, 갈리치아 동쪽의 루테니아인들 사이에서도 민족의식의 발호라 할 만한 것이 발전하고 있었다. 주로 유럽의 낭만주의운동과 다른곳의 슬라브 동지들의 예를 보고 영향을 받은 그리스 공교회 신학생들로 구성된 운동가 모임이 일반민중과 그들의 언어로 관심을 돌리기 시작했다. 1837년, 마르키얀 샤슈케비치가 이끄는 일명 '루테니아 3인조'는 '드니에스테르강의 님프'라는, 루테니아 농민의 언어로 된 민요 등의 모음집을 출간했다. 그러나 민중주의 운동에 경각심을 느낀 오스트리아 정권과 그리스 공교회 관구대주교는 이 책을 금서로 지정하였다.


1848년, 빈과 제국 전역에서 혁명운동이 일어났다. 리비우(렘베르크)에서 폴란드 국민의회가 결성되었고 나중에는 우크라이나, 즉 루테니아 최고평의회가 구성되었다. 하지만, 빈이 무슨 행동을 하기도 전에, 총독인 프란츠 슈타디온은 그나마 남아 있는 농노제의 잔재를 완전히 혁파하여 혁명세력을 압박하였다. 거기에 더해 폴란드계가 주장하던 갈리치아 자치 안은 루테니아인들이 제시한 안, 즉 민족 간에 동등하게 갈리치아왕국을 동쪽의 루테니아계 지방과 서쪽의 폴란드계 지방으로 나누자는 주장과 배치되어 대립하였다. 결국 렘베르크는 제국군의 포화에 휩싸였고 혁명은 완전히 제압되고 말았다.


그 이후 십 몇년 동안은 개선을 거친 절대주의가 부활했으나, 폴란드인들을 달래기 위해 소위 ‘포돌리아인’이라 불리던 동부 갈리치아 귀족집단의 보수파 대표인 아게노르 고우홉스키 백작이 부왕으로 임명되었다. 백작은 지역 행정부에 폴란드인들을 채워 넣었고, 갈리치아를 동서로 분열할 것을 주장하는 루테니아인들을 막아내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리스 공교회인들이나 루테니아인들이 서방의 그레고리력을 사용하도록 하거나 키릴문자를 라틴문자로 바꾸도록 하는 데에는 실패했다.

250px-Galician_slaughter_in_1846.PNG
magnify-clip.png
갈리치아 학살(폴란드어: "Rzeź galicyjska"),

얀 레비키(1795-1871) 작


실험적인 입헌제의 도입


1859년에 오스트리아 제국은 이탈리아에서 패배를 맛보았고 이후 제국은 입헌제를 실험적으로 도입하는 시기에 돌입하게 되었다. 1860년, 고우홉스키의 의견을 받아들인 빈 정부는, 제국을 보수적인 연방체제로 개편하려는 구상을 담은 '10월 공문(Oktoberdiplom)'를 공표하였다. 하지만 독일어권의 반응은 부정적이었고, 정부는 정책을 수정하여 지방분권화의 흐름에 찬물을 끼얹은 '2월 칙허(Februarpatent)'를 공표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갈리치아는 1861년 '갈리치아 의회', 즉 입법부를 갖도록 승인받았다. 초기에는 친합스부르크적인 우크라이나계와 폴란드계 농민층 대표들이 의석수의 거진 절반을 차지하여 사회문제와 우크라이나 문제에 대한 논의를 요구했지만, 행정부의 압박으로 농민층과 루테니아계는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하였으며, 점차 자치권 확대를 요구하던 폴란드계 귀족, 향사계층이 의회를 장악하게 되었다. 같은 해, 러시아령 폴란드에서 또 문제가 터졌는데, 갈리치아도 얼마간 그 영향을 받게 되었다. 의회는 파행하였다.


1863년이 되자 러시아령 폴란드에서 대대적인 반란이 일어났으며, 1864~65년에 제국 정부는 갈리치아에서 계엄령을 선포해 임시로 시민의 자유를 제한하기에 이르렀다.

1865년에는 고우홉스키가 제한한 선에서 연방제 제안이 부활하여 폴란드 귀족층과 빈 정부 사이에 협상이 재개되었다.

그러자 루테니아인들은 점점 더 빈 정부에게 버려졌다고 느끼게 되었고, 성 게오르기 그리스 공교회 성당을 중심으로 결집한 '구 루테니아인들' 중에서는 러시아로 고개를 돌리는 이들도 있었다. 이들 중 가장 극단적인 일부는 '친러파'로 불리게 되었다. 같은 시기, 동루테니아인 작가 타라스 셰브첸코가 쓴 루테니아어 시문의 영향으로 향학 운동이 일어나 루테니아 토착어로 쓴 문학작품이 출판되기 시작했으며, 이는 독서모임 조직으로까지 이어졌다. 이런 운동의 지지자들은 '민중주의자'로 불렸는데, 나중에는 그냥 '우크라이나인'들이라고 불렸다. 하지만 거의 대부분의 루테니아인들은 여전히 민족간 동등한 대우를 해줄 것과 민족분포에 따라 갈리치아를 분할하기만을 원할 뿐이었다.


갈리치아 자치


1866년, 사도바 전투 이후 오스트리아는 보오전쟁에서 패배하였고, 제국은 보다 많은 내부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프란츠 요제프 황제는 군주제에 대한 지지를 확보하기 위해 헝가리 귀족들과 타협을 선택했고, 그들의 지지를 얻어내기 위한 협상이 시작되었다. 총리대신 벨크레디 백작 등 같은 정부 요인 일부는, 황제에게 제국 내 모든 민족들에 대한 좀더 전면적인 헌법개정을 통하여 일종의 연방 체계를 만들 것을 권유했다. 하지만 헝가리 귀족들은 그들 자신과 전통적인 오스트리아 엘리트계층의 관계를 규정하는 데 있어서 결코 이중제국보다 더 양보하려 하지 않았다.



결국, 1867년 2월의 일명 '대타협(Ausgleich)' 이후 오스트리아제국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으로 개편되었다. 연방제국 안에 자신들의 부분을 인정받으려던 폴란드와 체코인들의 계획은 실패했지만, 오스트리아의 갈리치아 통치는 느리지만 점진적으로 자유주의의 길을 가기 시작했다. 폴란드 귀족층과 인텔리계층의 대표들은 황제에게 갈리치아 자치 확대를 간했다. 당장 요구가 받아들여지지는 않았지만, 이후 몇 년의 세월동안 갈리치아 자치 확립을 위한 중요한 양보를 여럿 받아낼 수 있었다.

350px-Galicia_1897_1.jpg

magnify-clip.png1897년의 갈리치아-로도메리아



1873년 이후로 갈리치아는 폴란드어, 그리고 훨씬 적은 비중이긴 하지만 루테니아어를 공식언어로 하는, 사실상 제국내의 자치령이 되었다. 독일화정책은 중지되었고 검열도 폐지되었다. 갈리치아는 이중제국에서 오스트리아 관할(치스라이타니아)에 속했지만, 갈리치아 의회와 행정부는 특히 교육, 문화, 지역문제에 대해 광범위한 특권를 누렸다.


많은 폴란드계 지식인들이 이런 변화의 흐름을 지지했다. 1869년, 크라코프의 젊은 보수활동가들인 요제프 슈이스키, 스타니스와프 타르놉스키, 스타니스와프 코즈미안, 루트비크 보드지키 등이 테카 스탄치카(스탄칙 전집)라는 연작 풍자 소책자를 발간해냈다. 비극으로 끝난 1월 봉기 이후 겨우 5년이 되는 해, 이 책자는 민족주의 무장봉기론을 조롱하고 폴란드의 적들, 특히 오스트리아제국과 화해하고 타협할 것을 제시하며 경제성장에 집중하고 빈이 제공하는 정치적 양보를 받아들일 것을 제안했다. '포돌리아인'들이라 불리던 동갈리치아의 보수적인 폴란드계 지주, 귀족계층과 함께, 이들은 갈리치아에서 주도적인 위치로 올라섰으며, 1914년까지도 이 흐름이 계속되었다. 이렇게 갈리치아의 통치권력이 빈에서 폴란드계 지주층으로 옮겨가는 것을 루테니아인들은 좋게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이들은 러시아를 구원자로 여기던 '친러파'와 일반민중과의 연계를 더 강조했던 '우크라이나파'로 갈라져 더 극명하게 대립하였다.


빈 정부와 폴란드계 모두 친러파들이 반역을 꿈꾸는 것이 아닌가 의심했으며, 여러 정치적인 행동을 강행하면서 결국 불신을 얻고 말았다. 그러는 동안, 1890년대쯤에는 루테니아의 '민중주의자'들과 폴란드계들은, 동갈리치아의 학교에 우크라이나 교육을 일부 도입하고 우크라이나문화에 대한 여러 양보를 하는 선에서 합의를 보게 되었다. 그 이후로는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운동이 루테니아 농민층 사이에 급격하게 퍼졌고, 여러 번 좌절하기도 했지만, 20세기 초반에 이르러서는 이 운동이, 폴란드계에 대적하는 세력으로서는 다른 루테니아계 세력을 거의 완전히 대체하게 되었다. 이 시기 내내 우크라이나파들도 민족간의 동등한 권리와, 갈리치아-로도메리아를 서쪽의 폴란드계와 동쪽의 우크라이나계로 분할하자는 루테니아인들의 전통적인 주장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산업


1880년대까지 갈리치아는 산업이 저조한 곳이었다. 1857년에는 인구의 2.2%인 102,189명만이 산업에 종사했는데, 1870년대에는 179,626명으로 증가했으며 이는 인구의 3.3%였다.


대규모 경제이민


1880년대에 갈리치아 농민들은 대규모로 해외이민을 나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막 통일이 되어 경제가 성장하던 독일로 잠시 일하러 가는 정도였지만, 나중에는 대서양을 건너 미국, 브라질, 캐나다 등으로 대량 이민이 발생하였다.


갈리치아는 가난한 농민들이 대부분이며 산업이 낙후되어 있었기 때문에, 갈리치아 서부 폴란드계 분포지역에서 이민의 흐름이 시작되어 동쪽의 우크라이나계 분포지역으로 옮겨 갔다. 폴란드인, 우크라이나인, 유대인, 독일인들 모두가 이 촌민들의 대열에 합류했다. 폴란드인들은 대부분 뉴잉글랜드와 미국의 중서부 주들로 이주했으나 브라질이나 다른 나라로 가기도 했다. 우크라이나계는 브라질, 캐나다, 미국으로 갔는데, 남부 포돌리아에서 캐나다 서부로 가는 행렬이 매우 많았다. 유대인들은 신대륙으로 직행하기도 했고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다른 영토를 경유하기도 했다.

이 수백만에 이르는 대규모 경제이민의 행렬은 꾸준히 증가하여 1914년 세계대전이 발발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전쟁으로 인해 이민이 중단되었고 이후에는 이전과 같은 추세를 회복하지 못했다.


폴란드계 여류시인인 마리아 코노프니카와 우크라이나 작가인 이반 프랑코 등 당대 작가들은, 작중에서 이 대규모 경제이민, 특히 당시 '브라질 열풍'이라고까지 불리던 브라질을 향한 이민행렬을 소재로 쓰기도 했다. 브라질 남부의 주들 중에는 인구의 상당수가 당시의 루테니아 이민자들의 직계자손인 곳이 있다.


1차 세계 대전, 그리고 폴란드계와 우크라이나계의 충돌


제 1차 세계 대전 동안 갈리치아는 러시아와 동맹국 사이에서 격전지가 되었다. 러시아군은 1914년 국경에서의 혼전 끝에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군을 격파하여 갈리치아 대부분을 장악했다. 하지만 1914년 독일군과 오스트리아군이 합동작전으로 춘계, 하계 공세를 걸어 러시아군을 다시 밀어냈다.


1918년, 서갈리치아는 렘코-루신 공화국을 흡수한 재건 폴란드 공화국에 속하게 되었다. 우크라이나계도 '서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이라는 이름으로 동갈리치아의 독립을 선언했다. 소련-폴란드 전쟁 중에는 소련이 동갈리치아에 괴뢰국인 '갈리치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을 수립하였으나, 이 정부는 몇 달 가지 못하고 폐지되었다.

1921년 3월 18일, 리가 조약으로 갈리치아의 운명이 결정되어, 폴란드 제 2 공화국에 속하게 되었다. 비록 일부 우크라이나계는 끝까지 인정하려 하지 않않지만, 이는 1923년 5월 15일 국제사회의 인정을 받게 되었다.[2]


구 동갈리치아 지역과 이웃의 볼리니아에 거주하던 우크라이나(루테니아)계 인구는 폴란드 제 2 공화국에서 약 12%의 비율을 차지했으며, 이는 소수민족 중에는 최대비율이었다. 폴란드 정부가 소수민족을 배려하지 않는 정책을 펼치자 정부와 우크라이나계 사이에 긴장 분위기가 조성되었으며, 이로 인해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 조직이라는 지하무장조직이 결성되는 단초를 제공하고 말았다.


행정구역


'크라이제(구역(區域)들, 폴란드식으로는 보예보다령들)이라고 불리던, 1차 폴란드 분할로 새로 획득한 폴란드 영토들은 1773년 11월에 59개의 지구(Kreisdistrikt)로 재편되었으며, 기존의 구역제도는 폐지되었다. 일부 구역들은 완전히 병합되었지만 대부분은 부분적으로만 병합되었는데, 구 벨츠, 적루테니아, 크라코프, 루블린, 산도미에시, 포돌리 구역들 등이 그러했다. 또 1769년의 러시아-투르크 전쟁 동안 부코비나가 러시아에 병합되었다가 1774년에 '감사의 증표'로서 오스트리아에 반환된 적도 있다.


주요 도시


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은 여러 구(powiat)로 나눠져 있었는데, 1914년에는 75개 구가 있었다.[3] 왕국의 수도는 리비우였지만, 제 2의 도시인 크라코프가 왕국의 서반부인 서갈리치아의 비공식 수도로 간주되었다.

  • Belz (폴란드어: Bełz, 이디쉬어: Beltz)
  • Berezhany (폴란드어: Brzeżany)
  • Biecz (독일어: 바이치Beitsch, 우크라이나어: Беч, Bech)
  • Bochnia (독일어: 잘츠베르크Salzberg)
  • Boryslav (폴란드어: Borysław)
  • Brody (이디쉬: Brod)
  • Busk
  • Buchach (폴란드어: Buczacz)
  • Chortkiv (폴란드어: Czortkow)
  • Chrzanów
  • Dukla (우크라이나어: Дукля, Duklia)
  • Drohobych (폴란드어: Drohobycz)
  • Gorlice (우크라이나어: Горлиці, Horlytsi, 독일어: 괴를리츠)
  • Halych (폴란드어: Halicz, 독일어: 할리치Halitsch, 이디쉬어: Galits)
  • Husiatyn
  • Jarosław (독일어: 야로슬라우Jaroslau, 우크라이나어: Ярослав, Yaroslav)
  • Jasło (독일어: 야셀Jassel)
  • Kalush (폴란드어: Kałusz)
  • Kolomyia (독일어: 콜로메아Kolomea, 폴란드어: Kołomyja, Romanian: Colomeea, 이디쉬어: Kolomay)
  • Kozova (폴란드어: Kozowa)
  • Kraków (독일어: 크라카우Krakau, 이디쉬어: Kruke)
  • Krosno (독일어: 크로센Krossen, 우크라이나어: Коросно, Korosno)
  • Lesko (우크라이나어: Лісько, Lisko, 이디쉬어: Linsk)
  • Leżajsk (독일어: 리샨스크Lyschansk, 이디쉬어: Lizhensk)
  • Limanowa (독일어: 일메나우Ilmenau)
  • Lviv (독일어: 렘베르크Lemberg, 폴란드어: Lwów, 이디쉬어: Lemberik)
  • Łańcut (독일어: 란츠후트Landshut)
  • Machliniec
  • Myślenice (독일어: 미슐레니츠Mischlenitz)









400px-Galicia_administrative1914.jpg
magnify-clip.png
1914년 갈리치아 왕국의 행정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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