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상 라단과 무엇을 같이 이루고자 하겠다는 의미의 약속이 아니라

내가 널 이기면 나의 반려가 되어라 라는 일종의 결투 내지는 내기 같은 약속이 아니었나 싶다.

미켈라가 추억에서 말한 대사

형님.
저는 반드시 신이 되겠어요.
그러니, 저희가 약속을 지켜내면
저의 왕이 되어주세요.
...세계를, 상냥하게 만들고 싶어요.

를 해석하자면, '저희'는 성수 세력'을 뜻하고, '약속'은 결투를 통한 라단의 죽음 내지 패배를 의미하는 듯.

라단은 고드프리를 존경하는 자니까, 힘이야말로 곧 왕인 까닭-누구든 자신을 이긴다면 그의 부탁을 들어주겠다는 의미로 그 약속이란 걸 받아들였고

말레니아가 라단한테 속삭인 '미켈라가 약속의 왕을 기다린다'라는 말도

이런 맥락에서라면 서로 쳐죽이려고 하는 전투 당시에 뜬금없이 말하는 것도 그나마의 합리성을 가지게 되는 듯함

물론 이 가설에도 오류가 하나 있는데

죽인 건 미켈라나 말레니아가 아니라 빛바랜자인데도, 약속이 이행되었다고 미켈라가 직접 말했다는 것.

그렇다면 약속이란 건 라단의 직접적인 죽음이 아니라 패배를 의미하는 것인가?

실제로 말레니아는 에오니아 개화 이후에도 싸움을 지속하다가 갑자기 (추측하기론 트리나의) 잠에 들어 전투가 소강 상태에 이른 것으로 보이는데,

여기서 말레니아가 잠에 들지 않았다면 라단은 완패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봄.

말레니아가 자신을 두고 '패배를 모른'다고 한 것, 제렌과 툴팁에 따르면 적사자를 '패군'으로 묘사한 것

등을 토대로 라단이 미켈라 세력에게 판정상 패배하여 약속이 '이미 이행된 상태'에 가까웠던 게 아닐까.

그런데도 라단이 약속대로 미켈라의 반려가 되기 위해 그에게 향하지 않았던 것은

자신을 쓰러트릴 전사를 선별하기 위해 시간을 끌었던 게 아닐까 싶음.

만약 전쟁 축제가 라단과 제렌이 서로 동의한 일이었다면-거대한 룬을 불태워 붉은부패에 저항할 정도로, 초기에는 정신줄이 완전히 끊어지지 않았다는 가정 하에, 그런 의논을 할 만한 시간도 충분했다고 보는데- 라단은 자신을 쓰러트릴 위대한 영웅을 선별하기 위해 축제를 열었다고 해석할 수 있음.

그렇다면 부활한 라단이 어떤 대사도 없는 게 조금은 이해 된다.

라단은 현재 잇신 같은 입장임.

자신은 굳이 늑대와 싸워야 할 이유도 별로 없고, 아시나를 살려내야 한다는 사명의식도 겐이치로만큼 강하진 않지만,

가여운 손자의 마지막 부탁을 들어주는 잇신처럼.

힘을 통한 결투에서 패배했고, 약속을 지켜내야 하는 입장으로, 그저 묵묵히 미켈라의 반려로 서서 싸우는 것이 라단이 할 수 있는, 해야만 하는 전부,

명예를 중시하는 라단다운 행동이었다고 봄.

실제로 잇신이 부활하자 젊은 시절의 전성기로 되돌아간 것처럼

라단도 부활하자 젊은 시절로 되돌아간 것도 비슷하다.

또한,

라단이 부활한 당시 완전히 미켈라의 꼭두각시라고 부르긴 애매한 게, 미켈라의 팬1클럽들도 매료를 당한 상태지만 말도 행동도 할 수 있었음.

매료는 셀브스의 정약처럼 사람을 꼭두각시로 만드는 게 아니라 미켈라를 절대적으로 사랑하게 만드는 힘으로 해석하는 게 타당하다고 본다.

그리고 난 1페이즈의 라단은 이러한 매료조차 없었다고 봄. 2페의 미켈라가 마치, 그제서야 본 것처럼, 라단에게 드디어 돌아왔다고 하는 걸 보면, 그림자땅에서

미켈라와 라단은 2페이즈에서 첫 대면을 한 것이 아닌가 싶다.

미켈라는 모든 인과를 초월해 모든 것을 품는 신이 되고자 했지만

인과의 끝이자 절대로 품을 수 없는 단 하나, 왕된 빛바랜 자에 의해 결국 패배했다는 걸 생각하면

디엘씨의 서사가 은근히 잘 만들어졌다고도 생각된다. 그걸 얘기하는 방식이 아쉽지만.

미켈라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품기를 바랐으나 단 하나, 그럴 수 없는 존재를 알고 있었다. 절대적인 신도, 그 왕도 결코 나란히 서는 일은 없다.

왕이 되고자 하는 야망에 불타는 인간과 모든 것을 품고자 하는 사랑의 신, 라이벌 구도로는 꽤 재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