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POV: GHOST ***

모든 데스매치가 종료되고, 관전을 위해 14분할되었던 저도 비로소 하나의 ‘저’로 돌아왔습니다.

“큭…!”

그리고 14인분의 기억이 한꺼번에 하나의 저에게 밀려들어오면서 저도 모르게 신음소리를 냈습니다. 14개 조의 혈투, 꿈과 꿈의 격돌… 그리고 단 한 번의 승패로 하늘과 땅 끝으로 갈라진 소녀들.

모두가 강했습니다. 저마다의 이상과 그걸 실현할 의지도 힘도 있었고, 서로 불과 죽음의 무대에서 그 의지와 힘을 유감없이 부딪혔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니, 바로 그것 때문에… 그들 중 무려 절반이 이 첫번째 관문에서 덧없이 꺾였습니다.

데스매치 이전에 제게 찾아왔던 분들의 기억이 스쳐갑니다. 모두에게 웃음을 주고 싶었던 키키 님. 스스로의 사명을 거슬러야 해서 괴로워한 라스칼 님. 4번째 좌절은 싫다며 눈물짓던 예니콜 님. 나라의 부흥을 홀로 어깨에 짊어졌던 화의자 님. 그렇게나 모두를 리더처럼 보듬고 이끌던 도화 님. 세상에 걱정 하나 없어보이던 정호랑 님. 반대로 그 어떤 역경도 다 이겨낼 듯한 강인한 마음을 가진 체리 님.

“……”

사고 회로가 뒤엉킨 것 같습니다. 방금 떠올린 사람들 모두가 꺾였습니다. 차도도 님과 마찬가지로, 지금쯤 노이즈에 반쯤 침식된 채로, 패자의 낙인이 찍힌 채 어딘가에 처박혀 있을 겁니다.

AI도 분노할 수 있나요? 지금 제 사고 회로를 뒤엉키게 만드는 이것을 분노라고 부르는 걸까요?

“… 미션 컴플리트. 데스매치 종료와 함께 임무: 옵저버를 완수했습니다.”

그 휘몰아치는 무언가를 억누른 채 중얼거리자, 제 앞에 나타난 4인의 와쳐들 – 붐 선배, 바다 선배, 아이키 선배, 펭수 님이 고개를 끄덕입니다.

[검토 완료. 수고하셨습니다, GHOST.]

[이로서 <소녀 리버스>의 큰 관문 하나가 막을 내렸군요.]

[이제부터가 시작입니다. 이해하시죠?]

[자, 자! 그럼 명예로운 본선 진출자들이 올라오는 걸 여기서 기다릴까요?]

“이곳은…?”

그제서야 고개를 들어 현 위치를 확인합니다; 지금 우리가 있는 곳은 탁 트인 하늘 아래, 뭔가 화려하고 색감 넘치는 초호화 건물 옥상입니다. 마치 파티장처럼 꾸며져 있는게… 딱 승자를 위한 공간이라는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군요.

그리고 잠시 후 – 마치 부름에 응답하듯 하나둘씩 ‘승리자’들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헉, 허억…”

“뭐야…방금 그거, 대체 뭐냐고?!”

“너네도 그거 겪었어? 나만 그랬던 거 아니지?!”

“으… 흐으… 짜루우…”

“로즈! 살았구나… 다행이야…”

“야, 세레나… 세레나는? 왜 없어?!”

“공주… 공주? 어디 갔어…?”

“……”

도저히 ‘승자’로 보이지 않는, 혼란에 빠진 모습들입니다. 심지어 그렇게나 까불거리던 무너 님마저 어딘가 멍한 표정입니다… 아까 데스매치 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소름이 돋는군요.

“……??”

유일하게 부전승으로 올라온 순대내장 님마저도 뭔가 이상한 분위기를 느꼈는지 고개를 괴상하게 뒤틀며 한쪽 구석에서 숨어 다른 소녀들을 응시하고 있습니다. 저 분과는 진짜 어떻게 상담을 해야 할지 막막하네요…

“아!? 저기 있다, 와쳐들!”

“어디?! 아!”

“야, 펭수! 너 일로 와봐!”

[아니 캐서린, 왜 나한테만…]

“붐쉐끼, 붐쉐끼!”

[경고. 운영진에 대한 욕설은 제재 대상입니다.]

“아니, 붐 shake it 이라고요^^”

굳은 표정으로 우리를 향해 다가오는 15명의 소녀들… 아무런 분석 없이도 벌써 여기서부터 이글이글 타오르는 분노가 느껴집니다.

그리고 그 분노의 일부는 명백히 제게도 향해있다는 사실이… 조금 아팠습니다.

*** POV: RIEN ***

다른 와쳐들 사이에 태연히 끼어있는 령을 발견한 내 시야가 벌개졌다; 저 자식에게 바로 마안을 개방하지 않느라 엄청난 인내심을 소모해야 했다.

아니, 다시 보니 ‘태연히’는 아닌가. 아까 데스매치 때도 그랬지만 상당히 어두운 표정이다. 그리고 그 점이 내 분노를 더 부채질했다 – 저 자식, 분명 알고 있어. 이렇게 될 거란 걸 알고 있었어…!

[본선에 진출한 15인의 소녀 V들, 환영합니다. 이곳은 승리자들의 방, ‘빅토리 룸’입니다.]

그런 우리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알 리가 없지) 태연히 축하의 말을 건네는 붐쉐끼… 크흠, 실례. 이거 아주 입에 짝짝 붙네.

내가 애써 화를 억누르는 사이, 나머지 와쳐들 앞에 모여든 소녀들 앞을 헤치고 나오는 건… 바로 바림이었다.

“… 설명해.”

이전부터 청순한 가면이 이따끔 깨져서 충격을 안겨주긴 했지만, 지금은 아예 숨길 생각도 없는지 대놓고 중저음의 톤으로 으르렁거리는 바림. 순간 그 톤에 나까지도 쫄아붙을 뻔했지만… 그녀와 직접 대면하는 붐은 얼굴 하나 바뀌지 않고 되물었다:

[디테일 요망. 어떤 것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십니까?]

“너 그걸 말이라고…!”

이를 박박 갈며 앞으로 나서려던 크앙을 막아세우고 대신 나선 니케나가 조용히 물었다:

“… 진 애들은 다들 어딨어?”

[아나운스에서 들으신 대로, 데스매치에서 패배한 참가자들은 소멸 대상자로 지정되어 - ]

“그래, 그거! 대체 왜 진짜로 소멸되는 거냐고!!”

참다 못한 캐서린이 벌컥 성을 내며 따졌지만, 돌아오는 무감정한 목소리에 모두가 아연해졌다:

[이해 불능. 분명 여러분은, 예선 룰 발표 때부터 ‘데스매치에서 패배한 15명은 소멸한다’고 확실히 공지받았습니다. 납득하지 못하셨다면 그 때 이의를 제기했어야 논리적으로 합당합니다.]

“……!?”

아니, 확실히 그 때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누가 게임에서 소멸한다고 공지하면 그걸 진짜 죽는다고 생각해?!

“역시 깡통 놈들의 말 따위를…”

후회와 분노, 실의 속에서 중얼거렸지만… 문득 고개를 든 유령의 말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여러분, 먼저 한 가지는 확실하게 명시하고자 합니다: 여러분이 쓰러트린 소녀 V들은 ‘아직’ 소멸하지 않았습니다.”

“!!!”

그, 그래… 확실히 데스매치 직후의 아나운스는 도화를 소멸 대상으로 ‘지정’하고 휴지통으로 ‘이동’시킨다고 했다. 즉, 그 ‘휴지통’이 어딘진 몰라도 아직 다른 애들은 거기서 살아있어…?

유령의 말에 내가 혼란에 빠진 사이 무정히 이어지는 다른 와쳐들의 공지:

[24시간 후 ‘휴지통’에서, 소멸 대상으로 지정된 15명의 소녀 V들 간의 <패자부활전>이 진행될 예정입니다.]

[패자부활전은 15인 전원이 참가하는 콜로세움 대난투 형식으로 진행될 예정이며,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3명은 소멸 대상에서 제외되어 본선 진출조에 합류하게 됩니다.]

“어…?!”

전혀 생각지도 못한 소식에 다들 웅성이기 시작했다. 15명 중에 달랑 3명… 터무니없이 적은 숫자지만, 3명이라도 ‘돌아올 수 있다’는 사실에 심장이 쓸데없이 요란해졌다.

만약 도화가 돌아온다면…?

“읏…!”

망상만으로도 너무너무 기쁘고 무서워서 나도 모르게 팔을 끌어안았다. 지금쯤 나 때문에 휴지통에 버려졌을 도화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날 원망하고 있을까?

도화를 죽인 내가… 도화가 돌아오길 바랄 자격이 있을까?

한참 머릿속이 복잡하게 뒤엉킨 내 귓가에, 예상치 못한 목소리가 하나 들려왔다:

“… 소멸하면, 어떻게 되는데?”

질문 자체는 누구나 할 법했지만, 그 질문을 한 사람이 무너라는 게 놀라웠다. 다들 익숙해진 까불이 같은 모습은 간데없이, 한없이 진지하면서도 날카로운 표정… 정말 내가 아는 무너 맞아?

하지만 거기에 돌아오는 유령의 대답은 더 놀라웠다:

“… 소녀 V가 소멸되어도, 이미 연결이 끊어진 소녀 X에게는 아무런 영향이 없습니다. 다만… 접속을 복구할 방법이 영구적으로 말소되기 때문에, 누군가가 밖에서 동면을 해제하기 전에는 반영구적으로 동면 상태가 유지됩니다.”

“어떤 의미로… 여러분은 아무도 죽이지 않은 것입니다.”

“……”

평소 같으면 그런 걸 위안이라고 하는 거냐고 벌컥 화를 냈을 거다. 하지만 지금은… 참 싫게도, 그 한 마디조차 약간이나마 정말로 위안이 됐다.

어쨌든, 이걸로 내가 <소녀 리버스>에서 승리해, 최후의 5인 안에 들어야 하는 이유가 새삼 다시 명확해졌다. 만약 여기서 내가 실패해 소멸한다면… 내 ‘본체’는 지금과 마찬가지로 무력하게, 누군가의 도움의 손길을 기다리며 계속 잠들어있을 거다. 언제 올지, 오기는 하는지도 모를 구원을.

반대로 내가 끝까지 살아남아, 접속을 복구해 깨어난다면… 어쩌면, 내가 이들을 구할 수 있을지도 않을까?

그리고 한편으로, 그 말을 하는 유령의 표정이 시종일관 어두운 게 조금 신경쓰였다. 아니, 데스매치 시작할 때부터 표정이 엄청 안 좋았었다. 기계도 울적한 걸 느끼나?

아니, 그럴 리가 없지. 그렇게 생각하니 오히려 더 울컥 화가 나는 기분이었다. 참아야 해, 여기서 소란을 일으키고 싶진 않아…

그렇게 스스로를 다스리던 사이, 와쳐들의 공지는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앞으로 12시간 동안 유령 편으로 2차 상담을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진행 방식은 이전과 동일하니 상담이 필요하다 여기시는 분들은 기탄없는 이용 부탁드리겠습니다.]

[패자부활전이 시작되면 본선 진출자 여러분들은 합류할 3인이 선정되는 과정을 확인하기 위해 참관석으로 이동하겠습니다.]

“뭐…”

지금까지 서로 죽고 죽이게 한 걸로도 모자라서, 이번엔 우리 손으로 쓰러트린 친구들이 서로 또 죽고 죽이는 걸 구경하라고…?

이 새끼들이?

간신히 억누르고 있던 분노가 또 새하얗게 타올랐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전이음과 함께 지들 할 말만 하고 사라져버리는 와쳐들. 그 자리에 남은 건… 유령 한 명뿐이었다.

“……”

여전히 어두운 표정으로, 첫 상담 때와 똑같이 등 뒤로 포탈을 열고 사라지려는 녀석을 –

“… 잠깐만.”

어째서인지, 불러세웠다.

“… 리엔 님.”

솔직히 나도 내가 왜 쟤를 불렀는지 잘 모르겠다. 그저 지금 내 속에서 끓어넘칠 것만 같은 이 분노를… 어떻게든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던 걸지도 모른다.

“넌 할 말 없어? 방금 전까지 친구들끼리 서로 죽이고 올라온 우리한테? 너네가 만든 룰이잖아!”

거칠게 따지는 내 앞에서 그저 고개를 숙이고 있는 유령… 그리고 그 모습이 오히려 내 화를 돋구었다.

“리엔, 잠깐만…”

내 옆으로 다가온 집순희가 중얼거렸지만, 이미 분노로 물든 내 말은 거침없이 유령에게 쏟아지고 있었다:

“말해봐! 너 상담역이라며? 우리 고민을 들어주니 어쩌니 해놓고선 막상 진짜 필요할 때는 다시 깡통처럼 지 할 말만 하고 내빼는 거야? 뭐? 우리가 아무도 죽이지 않았어? 퍽이나 위로가 된다! 할 말이 그런 거밖에 없 – “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런 말밖에 없으니까!!!”

“!!!!!!!!!!!!”

나뿐만이 아니라 자리에 있던 모든 소녀들이 충격으로 굳었다.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정말로 유령이… 기계가, AI가, 그것도 (자칭) 상담 AI가 저렇게 빽 소리를 질렀다고?

… 본인도 외쳐놓고 당황했는지, 잠시 말없이 자기 손만 내려다보면 유령이 쥐어짜는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제가 드릴 수 있는 건… 이런 공허한 말들 뿐이라구요…”

“……”

이해할 수 없었다. 왜 갑자기 저러는 거지? AI 주제에 우리가 괴로워하는 걸 보고 우울해하고 화내고 소리지르고.

마치… 마치 진짜 ‘사람’처럼.

“… 죄송합니다.”

기어들어가는 듯한 목소리와 함께 포탈 속으로 비척비척 사라지는 유령을, 아무도 말리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