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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지/티저] +Minor Monday 56: 독일의 민주정당

Саблин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3.11.14 16: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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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Lehmannmo와 Augenis입니다. 4번째 마이너 먼데이에 오심을 환영합니다. 오늘 우리는 민주연합 경로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할 국가의회의 3개의 주도적인 중도/진보 정당에 대해 살펴볼 것입니다. 사회민주당, 자유인민당, 그리고 중앙당입니다.


사회민주당: 거부 받는 대중정당?


개혁과 혁명 사이 그 어딘가


사민당은 제국의 존속기간 대부분 동안 반 사회주의적인 결집정책(Sammlungspolitik)의 표적이었지만 1914년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는 대중정당이라고 할 만한 그 무언가가 되었습니다. 특히 남부와 튀링겐 등에서 사민당은 선거 개혁이나 여러 현안 등에서 다른 진보적인 부르주아 정당들과 협력했습니다. 이 기간 동안 정당 간 동맹의 기초가 닦였고 1917년 중반부터 독일의 의회정치는 이전과는 다르게 재편성됩니다. 테오발트 폰 베트만홀베크 총리의 지원 하에 국가의회의 세 주요 정당인 사민당, 진보인민당, 중앙당의 정당 간 위원회(Interfraktioneller Ausschuss)가 결성되어 의회주의로의 길을 닦은 것입니다. (마이너 먼데이 1편 참조)


그러나 이곳으로 가는 길은 길고 험난했죠, 1890년대와 1900년대에 사민당은 소위 수정주의 논쟁(Revisionismusstreit)에 묶인 영원한 야당이었으며 1903년 드레스덴 전당 대회에서 이는 더욱 격화됩니다. 당대 수정주의자들의 수장인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은 노동계급의 발전은 현존하는 정치 체제 내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상정했습니다. 혁명이 아닌 개혁을 자본주의를 극복할 수단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당시에 베른슈타인의 사상은 1880년대의 억압적인 반사회주의법을 기억하고 있고 계급투쟁이라는 명제를 고수하던 당의 대부분에게 거부되었습니다.


그러나 이후 몇 년 동안 카를 카우츠키와 로자 룩셈부르크 등 '정통 마르크스주의자'로 구성된 이 강력한 그룹은 점점 더 소외되었습니다. '총파업 논쟁'은 결국 정치적 도구로서의 총파업을 반대하는 당 내부의 노동조합파의 승리로 끝났고, 이들은 총파업이 어렵게 얻은 노동계급의 독일 사회로의 통합을 파괴하게 될 가능성을 우려했습니다. 처음에는 양비론적 태도를 보였던 아우구스트 베벨을 중심으로 한 당 지도부는 이후 여러 측면에서 베른슈타인의 개량주의 사상과 동의어인 현실정치 중심의 의제를 채택했습니다. 특히 1909년 베트만홀베크 총리가 취임하면서 사민당은 일상적인 정부 업무에 점점 더 많이 관여하게 되었고, 정부에 대한 이들의 지지는 사민당의 생존에 절대적으로 중요해졌으며, 1913년 베벨이 사망하고 프리드리히 에베르트와 필리프 샤이데만이 당 지도부에 오르면서 더욱 공고해졌습니다. 두 사람 모두 수정주의자나 극좌파에 속하지 않았으며, 전반적으로 사민당의 주류 정치로의 통합 노선을 강화하면서 당 내부의 균형을 유지하려는 목적으로 매우 실용적인 정치 노선을 추구했습니다. 그러나 전쟁은 이러한 취약한 당내 균형에 갑작스러운 종지부를 찍었습니다.


국가의회에서 전쟁채 발행에 찬성해야할지를 놓고 논쟁이 터져 나온 것입니다. 사민당의 의원들은 거의 만장일치로 찬성표를 던졌지만, 에베르트와 샤이데만의 비전에 대해 내부 반발이 커졌습니다. 당내 극좌파의 유명한 논객인 카를 리프크네히트와 로자 룩셈부르크는 최종적으로 당외 조직인 "인터내셔널 그룹" (후에 스파르타쿠스 연맹으로 개명)을 창설했습니다. 이들은 처음에는 당내 주도권을 잡고자 했으나 나중에는 "망가져버린 제국주의 체제"에 대항하는 폭력혁명을 공개적으로 주장했습니다. 에베르트와 샤이데만에 대한 다른 반대자는 좀 더 절묘했습니다. 후고 하제, 게오르크 레데보우어, 빌헬름 디트만과 같은 당내 고위급 마르크스주의 노장파는 1916년 초 사민당과 별개로 국가의회 내에 "사회민주노동자 그룹"을 창설했습니다. 사민당 지도부와 사회민주노동자 그룹 사이의 갈등은 계속 커져갔고 1917년 4월 사회민주노동자 그룹은 공식적으로 분당해 새로운 정당인 독립사회민주당을 창당했습니다. 에베르트와 샤이데만의 사민당은 이후 다수사민당으로 지칭됩니다.


정당 간 위원회와 흑적금 연정


국내에 임박한 혁명을 두려워한 다수사민당은 장기적으로 극좌파 분파들보다 우위를 유지하고자 한다면 소극적으로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1917년 여름 동안 당은 중앙당과 사회자유주의자들과 더 밀접한 관계가 되었고 에르츠베르거의 그 유명한 국가의회 평화 결의안을 무조건적으로 지지했으며 최종적으로는 이전에 언급했던 정당 간 위원회의 결성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이후 다수사민당은 1918년 1월 파업 이후 노동계급 사이의 불만을 완화시켰고 1918년 9월 스파르타쿠스 연맹의 실패한 반란시도는 극렬하게 반대했습니다. (독립사민당 지도부 대다수 역시 이를 반대했고 곧 그들과 다수사민당간의 차이가 그들과 스파르타쿠스 연맹간의 차이보다는 작다는 것을 인지하게 되었습니다.)


정당 간 위원회는 다가오는 최고사령부 독재에 점점 더 강력한 균형추 역할을 하며 1917년부터 1920년까지 정부 정책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고, 수상의 정치적 운명을 결정할 수 있을 정도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이러한 느리고 간접적인 입헌과정 덕분에 제국 행정부는 제국의회의 과반수가 자신들에게 등을 돌릴 위험을 감수하지 않기 위해 정당 간 위원회와 개혁을 조율해야 했습니다. 다수사민당은 브로크도르프(1918-1920), 졸프(1920-1922), 에르츠베르거(1922)의 임기 동안 주도적인 역할을 했고 노동청에 구스타프 바우어, 농업국에 로베르트 슈미트 등 고위직들을 내각에 배치했습니다. 전쟁 후, 다수사민당은 거의 모든 독일 연방의 구성국의 지방 정부에서 주요한 세력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3월 개혁에 미친 영향은 엄청났습니다.


1922년 가을, 다수사민당은 1893년의 에르푸르트 강령을 대체하는 "리그니츠 강령"으로 역사에 기록될 새로운 정당 강령을 통과시켰는데, 이는 본질적으로 OTL 괴를리츠 강령과 하이델베르크 강령을 혼합한 것이었습니다. 이 강령은 다수사민당이 졸프 내각과 에르츠베르거 내각에서 2차적인 연정 파트너에 불과했고, 그들보다 좌익에는 고전 중인 독립사민당을 제외하고는 강력한 정당이 없었기 때문에 완전한 수정주의 의제를 채택하지는 않았지만, 사민당의 마르크스주의적, 프롤레타리아적 기초를 유지해서 계급투쟁의 원칙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3월 개혁의 방어와 확대가 단기적, 중기적 우선순위라고 명시했습니다. 민주적 체제를 통해 노동자들은 자신의 이익을 표현하고 권리를 옹호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계급의식이 성장할 것입니다. 국제 협력을 강조하고, 정치에 대한 군부의 영향력이 비판하며, 직접세와 자원 산업 국유화 등의 요구를 강조해 사민당이 유연성을 발휘하고 중산층 정당과의 유익한 협력을 가능하게 하는 동시에 자신의 뿌리에 충실하면서 대중정당과 노동정당 사이에서 대담하면서도 균형 잡힌 행동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영원한 야당으로


1922년 말 에르츠베르거가 실각하며 다수사민당은 다시 야당이 되었고 1924년과 1925년 2차 브로크도르프 내각에는 참여하지 못했습니다. 현실적인 논의 끝에 다수사민당과 (종전 이후 지속적으로 쇠퇴하고 있던) 독립사민당은 최종적으로 1923년 합당을 결의했고 사민당은 스스로를 온건하지만 리그니츠 강령에 따른 프롤레타리아 노동자의 정당으로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독립사민당의 귀환과 프리드리히 에베르트의 사망으로 사민당 지도부에 변화가 생겼습니다. 당의 중도파의 대표자이자 고 아우구스트 베벨의 동료였던 헤르만 뮐러가 에르츠베르거 내각의 실패와 1923년 선거의 패배로 좌절한 당내 풀뿌리 당원들의 좌절에 힘입어 당 대표에 당선되었습니다. 그는 전략적으로 당의 좌익과 결탁했고 독립사민당 출신의 아르투어 크리스피엔이 당의 갈등을 봉합하기 위해 부대표로 당선되었습니다. 뮐러는 부르주아 정당 및 중앙당과 동맹을 거부하지는 않았지만 기회주의 전략을 배격해서 사민당이 정부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맡아야만 하며 이것이 달성되지 않는다면 연정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공언했습니다. 독일은 사회민주주의자 총리에 대한 준비가 충분히 되어있었고 독일에서 가장 거대한 정당이 통치 기회를 얻는 것은 시간문제였습니다.


이 전략은 졸프 내각과 에르츠베르거 내각의 약속에 다소 배신감을 느낀 당원들에게 동기를 부여했지만, 당내 우파에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었습니다. 동시에 뮐러의 수동성에 불만을 품은 새롭고 젊은 파벌들이 반대편에서 그에게 도전합니다. 사민당만큼 큰 정당이 완전히 통합되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이유 있는 군주주의자": 중도파


사민당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두 사람은 헤르만 뮐러 대표와 오토 벨스입니다. 뮐러 대표는 의정 활동에 더 능숙한 인물로 사민당 원내 집단을 지휘하며 사민당의 총리 후보로 예상되는 반면, 벨스는 당 집행부를 지휘하고 당 내부 문제를 관리합니다. 뮐러와 공동 대표인 크리스피엔은 거의 권한이 없습니다. 중도파는 일반적으로 루돌프 힐퍼딩이 제시한 오스트로마르크스주의의 영향을 받은 경제 이론을 따르고 있으며, 여전히 자본주의가 사회주의로 진화할 수밖에 없다고 믿지만, 노동자들이 효율성 중심의 독점 기업을 통제하고 사회화할 수 있는 민주적 다원주의 국가를 건설하고 유지하는 것이 사회주의를 달성하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인식합니다.


따라서 중도파는 모든 민주적 연정의 필요성을 인정하지만, 노동계급이 그 연정에서 주도적 역할을 맡을 경우에만 이를 인정합니다.


차세대: 호프가이스마어파와 하노버파


1890년대 또는 그 이후에 태어난 사민당의 지도자와 활동가들 사이의 젊은 피들은 전임자들과는 완전히 다른 시각으로 정치를 바라봅니다. 사민당은 반사회주의법에서 살아남았지만 당의 정신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러한 탄압이 언제든 재발할 수 있다는 두려움을 통해 권리와 자유를 위한 평화로운 투쟁, 특히 법 외적인 수단을 통한 권력 장악을 시도조차 하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전면 세대"의 사민당 정치인들은 그러한 요소가 없습니다. 그들의 관점에서 볼 때 당은 수동적이 되었고 의회라는 경기장 외에서는 어떤 수단으로도 당의 이익을 위해 싸울 수 없게 되었습니다.


벨트크리크 이후 사민당의 '전면 세대' 내에서 두 개의 영향력 있는 '파벌'이 생겨났고, 이 두 파벌은 사민당의 방향성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호프가이스마어 그룹은 1920년대 초에 처음 모인 마을의 이름을 딴 그룹으로, 에른스트 니키슈테오도어 하우바흐가 영향력 있는 지도자로 활동하며, 이들은 유럽을 아우르는 독일의 새로운 입지와 사회민주주의와 급진사회주의 사이의 급격한 단절에 영향을 받아 독일 국가라는 틀 내에서의 사회주의를 고민했습니다. 이들의 활동은 짧게 끝났지만 카를로 미렌도르프쿠르트 슈마허 같은 젊은 인재를 중심으로 한 사민당 내 신수정주의 세력의 시초가 되었습니다. 신수정주의는 활동가들 사이에서 사회민주주의와 (경우에 따라) 민족볼셰비즘 사이의 넓은 스펙트럼을 포괄하지만, 이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카를 카우츠키의 마르크스주의적 경제 결정론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지 않고 사람들의 정치적 행동 동기에 대한 새로운 아이디어에 개방적이라는 점입니다. 이들은 이론가가 아닌 실천가이며, 당의 수구 세력에 대한 가장 큰 비판은 그들이 너무 이론적이 되어 대중의 즉각적인 요구에 응답하지 않아 대중이 극우의 선전에 취약해졌다는 것입니다. 루마니아와 러시아는 사회 개혁을 통해 번영하지 못한 대중이 결국 민족주의적 독재자에게 넘어가버린 몇 가지 예에 불과합니다.


호프가이스마어파는 거의 즉시 그들에 비하면 정통적인 마르크스주의자로 구성된 하노버 그룹에 의해 도전을 받았습니다. 이들은 노동계급을 길들이기 위한 시도인 '국가주의적 사회주의'라는 개념을 거부하고 대신 '유럽 합중국'의 창설을 최초로 제안한 사람들 중 하나였습니다. 하노버파는 사민당 청년층 내에서는 그들의 반대파를 능가하며 성장하는 사민당 내 좌파 기류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청년 활동가, 전 독립사민당 당원, 다양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이질적으로 섞여 있으며, 그중 가장 주목할 만한 지도자는 쿠르트 로젠펠트, 막스 자이데비츠, 오토 그로테볼 등이었습니다. 지크프리트 아우프호이저는 사민당 좌파에 속하는 드문 노동조합 지도자이며, 당 기관지 포르베르츠의 편집장 프리드리히 슈탐퍼는 당 중앙임에도 불구하고 이들에게 공감하고 있습니다.


속칭으로 두 그룹은 반항적 성격 때문에 "영턱스"(융튀르켄, 청년 튀르크)라고 불립니다. 두 그룹은 정반대의 성향을 가지고 있지만, 사민당이 더욱 적극적으로 나서서 보수 세력의 반발에 맞서 싸우고 사회주의를 향한 적극적인 개혁으로 국민에게 자신을 증명하기를 원한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의제 먼저, 사회주의는 두 번째: 주 정치인과 노조 인사


당 중앙의 오른쪽에는 신수정주의자, 베테랑 정치가, '국가 사회주의자', 노동조합 지도자 등 구어체로 사민당 '우파'로 표현되는 다채로운 인물들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들을 하나로 묶는 것은 사회주의 운동의 역할에 대한 접근 방식입니다. 머나먼 혁명적 꿈이나 국가의 장악에는 거의 관심이 없지만 점진적인 개혁을 추진하고 노동자들의 조건을 개선하기 위해서라면 다른 민주 정당, 경우에 따라서는 우파와도 실용적으로 협력합니다.


주 정치인 진영의 이데올로그는 벨트크리크 이전부터 그들의 비전을 확립했던 알베르트 쥐데쿰입니다. 그는 사민당을 독일의 주류 정치에 빠르게 융화시키기 위해 제국에 대한 변함없는 충성을 바쳤으며 (후고 하제가 사민당의 전쟁 채권에 찬성하도록 만든 것이 바로 그였습니다.) 민주적인 개혁을 추진할 수만 있다면 개혁적인 성향의 부르주아 정당들과의 동맹해 꼭 사민당이 아니어도 개혁적인 총리를 올리려고 합니다. 이는 뮐러와 당 중앙의 입장과 직접적으로 충돌하며 갈등을 유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주 정치인들은 당내 우파가 주도하는 각 주 차원에서의 범민주적 협력의 과실의 예시들을 지적합니다. 작센 왕국 총리인 로베르트 비르트는 서열상 제국 내에서 가장 높은 정치적 위치에 올라간 사민당 당원이며 오토 브라운카를 제베링은 프로이센 하원에서 다른 민주적 정당들과의 협업을 통해 결실을 맺고 있습니다.


실용주의 진영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들은 자유노조로 사민당과 연한 노조들의 거대한 체계이며 벨트크리크 이후로는 테오도어 라이파르트가 이끄는 일반독일노동조합동맹으로 통일되었습니다. 독일의 사회주의 노조의 역사는 프랑스와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독일에서 모든 노조는 언제나 사민당과 긴밀히 연결되어있었으며 정치적 결실을 위한 노동자들의 파업의 사용 가능성을 오랫동안 배제해왔습니다. 앞서 언급한 반사회주의법에 대한 기억이 오래 지속되는 이유 중 하나는 사회주의 운동이 공격적이었다가는 손쉽게 파괴되어 버릴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이기도 했지만, 노조의 관료화가 심해졌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일반독일노동조합동맹은 단순한 교섭단체가 아니라 보험, 커뮤니티, 교육까지 제공하는 노동자의 사회적 환경이 되고자 했습니다. 이는 계급의식을 유지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했지만, 독일 극좌파가 프랑스에서처럼 '노조를 통한 혁명'을 이루겠다는 생각을 포기한 지 오래되었고, 노조가 절망적으로 개량주의만을 추구하면서 많은 노동자들에게 안일함을 심어주고 있다는 사실을 반영하기도 합니다.


"우파"의 일부 구성원은 쿠르트 폰 슐라이허를 총리로 지지하며 당 중앙의 실망을 사기도 했습니다, 이 계획의 가장 유명한 인물로는 아우구스트 비니히, 구스타프 노스케, 라이파르트 자신이 있습니다. 그들의 관점에서 볼 때 빌헬름 2세와 그의 아들이 살아있는 한 사민당이 제국의 총리를 맡을 가능성은 희박하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진보적인 총리의 밑으로 사민당이 참여해 노동자들에게 약간의 이익이라도 가져다주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들의 사회민주주의 이념에 대한 충성심이 부침을 겪고 있다는 점도 언급해야 합니다. 생디칼리슴 혁명과 독일의 벨트크리크 승리는 사민당 우파와 노동조합 내 많은 정치인들의 잠재된 민족주의 감정을 일깨워 관점을 뒤흔들었습니다. 슐라이허를 지지하는 또 다른 영향력 있는 노조운동가 로타어 에르트만은 "노동조합이 역사적으로 대표해오던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한다고 해도, 민족혁명이 사회주의의 의제를 사회주의적 행동으로 따른다면 '사회주의를 통해 민족에게'라는 모토를 바꿀 필요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자유주의자: 정치적 키메라?


분열된 집안


독일에서 자유주의의 통일을 향한 여정은 고단했습니다. 게임 시작 불과 수십 년 전만 해도 통일된 자유주의 정당은 불가능한 일로 여겨졌습니다. 하지만 시대가 변했고 그 사이 타협이 이루어졌습니다.


지난 시대에는 사회 자유주의 성향의 진보인민당과 우익 자유주의 성향의 국민자유당, 두 자유주의 정당이 서로 경쟁했습니다. 1910년대에 두 진영 간의 신중한 협력 시도가 시작되었지만 전쟁으로 인해 중단되었고, 그 동안 두 정당은 다시 서로 멀어졌습니다. 진보인민당이 일반적으로 베트만홀베크 총리를 지지하고 나중에 정당간 위원회의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며 사민당의 작은 부속 정당이라는 명성을 얻은 반면, 일반적으로 고액 금융 및 중공업 인사들의 이익을 대표하는 정당으로 인식되는 국민자유당은 중도 좌파가 지배하는 국가의회에서 큰 영향력을 갖지 못했으며 점점 더 우익 야당으로 밀려났습니다.


국가의회 평화결의안과 광범위한 영토 합병에는 적대적이었지만 국내 개혁에는 기꺼이 찬성했던 국민자유당은 이데올로기적 균열로 인해 분열될 위기에 처했습니다. 많은 국민자유당 우파가 1917년 조국당의 토대가 되면서, 당의 좌파는 국민자유당의 고립에 불만을 품었습니다. 결국 당은 구스타프 슈트레제만의 능숙한 지도 덕분에 단결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실용적이고 영리한 계략가였던 그는 양쪽 진영의 대다수와 타협점을 찾아냈고, 당시보다 더 단합된 모습을 외부에 보여줄 수 있었으며, 전쟁이 끝난 후 일부 당원들이 국민자유당을 떠났지만 당의 핵심은 굳건히 유지될 수 있었습니다.


한편 진보인민당은 전쟁 및 그 이후 시대에 국민자유당보다 전반적으로 더 나은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1917년부터 1922년까지 대부분의 정부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한 진보인민당은 연립정부 내 흑적금 세 정당 중 가장 작은 정당이었음에도 불구하고 3월 헌법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대표 정치인 프리드리히 나우만은 미텔오이로파의 초기 토대를 마련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슈트레제만의 국민자유당은 전쟁 중 범게르만주의 세력이 득세하고 사민당과 협력하기를 꺼려하며 일반 국민들 사이에서 '합병주의자, 제국주의 전쟁 연장자'라는 악평을 얻으면서도 야당에 머물렀습니다. 따라서 슈트레제만은 새로운 정치적 개념을 개발하려고 노력했으며, 최종 목표는 모든 잠재적인 연정의 구성을 가능하게하기 위해 좌파와 우파 모두를 향한 실용적인 노선을 가진 국민민주주의 기반 위에 강력한 중산층 블록 정당을 형성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은 단지 희망적인 생각에 불과했습니다. 국민자유당은 엘리트주의적 우익의 상아탑을 완전히 떠나지 못했고 대신 보수주의자들과 중공업의 위성정당으로 서서히 변모했습니다.


이미 20년대 초반에 두 자유주의 정당의 의원들은 잠재적 통합에 대한 논의를 시작했습니다. 진보인민당 우파는 사민당과의 오랜 협력에 회의적이었고, 중앙당, 보수당과 연립정부를 구성할 수 있는 대규모 자유주의 블록 정당 설립을 선호했으며, 이는 슈트레제만의 승인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1922년부터 1923년 에르츠베르거 정권의 비참한 붕괴 이후 협상은 결렬되었고, 그 결과 진보인민당과 국민자유당의 역할이 역전되었습니다. 사회자유주의자들은 야당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고, 포사도프스키가 총리 밑에서 슈트레제만이 외무장관이 되면서 국민자유당이 참여하는 정부를 구성하기로 결정하면서 국민자유당이 빛을 발할 시기가 왔습니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우익의 영역으로 확고하게 이동하면서 중도 성향의 강력한 정당이라는 자신들의 개념이 산산조각이 났고, 좌익에 기울어가는 진보인민당과의 협력은 점점 더 어려워졌습니다. 심지어 에리히 코흐와 같은 저명한 인사들을 포함한 국민자유당의 좌파 의원들 중 상당수가 노골적으로 국민자유당을 탈당하고 진보인민당으로 옮기기로 결정하기도 했습니다.


짧지만 다사다난했던 포사도프스키 시대 동안 국민자유당은 1923년 말 리프 전쟁에 깜짝 개입하는 등 독일의 대외 정치 변화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원래는 사회자유주의 이념에 따랐지만 지금은 보수주의와 국민자유주의 이념으로 크게 변질된 미텔오이로파 블록을 완성하는 데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러나 1924년 가을, 영국에서 막 시작된 혁명에 대한 신속한 개입을 지지한다는 발언을 한 외무장관 슈트레제만이 직접 나서서 일으킨 굴욕적인 슈트레제만 위기 이후, 국민자유당의 겁 없는 비행은 끝이 났습니다. 포사도프스키의 우파 연립정부는 선거에서 상당한 손실을 입은 후 브로크도르프의 대연정으로 대체되었습니다. 국민자유당은 이제 진보인민당도 포함된 정부의 일부로 남았지만, 슈트레제만은 당 대표직은 유지했지만 엄청난 불신을 받아 일선에서 물러났습니다. 국민자유당의 약화된 상황으로 인해 많은 국민자유당 당원들은 브로크도르프의 3월 연정 내에서 진보인민당이 다시 지배적인 자유주의 정당이 되면서 당의 미래에 대해 걱정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많은 사람들이 다시 자유주의 간 협력이라는 개념에 대해 개방적인 태도를 취하게 되었습니다.


슈트레제만의 속죄


이미 1924년에 자유주의자 간 교류를 위한 느슨한 조직인 "자유주의 연합"이 경제학자 오이겐 쉬퍼와 저명한 역사학자 프리드리히 마이네케 등 국민자유당과 자유인민당 소속 인사들이 공동으로 설립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두 자유주의 정당의 지도부가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지만, 1925년 봄 독일 자유주의의 아이콘이었던 빌헬름 칼이 자유주의 연합 회의에 참석하여 향후 자유주의 정당 통합에 대한 공식 지침의 초안을 작성하고 자유주의 성향의 모든 공인들을 위한 실무 그룹을 구성하면서 그 수용도가 높아졌습니다.


놀랍게도 슈트레제만은 이후 몇 달 만에 이 프로젝트에 대한 공식적인 지지를 발표했는데, 이는 대부분 전략적 고려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24년 말 슈트레제만이 굴욕을 당한 후, 그는 여전히 대표직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내부 반대자들에 의해 점점 더 많은 논쟁과 공격을 받았습니다. 베스트팔렌의 중공업에 기반한 대규모 파벌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불명예스러운 대표를 제거하려고 시도했고, 이는 슈트레제만의 건강이 점차 악화되면서 더욱 힘을 얻었습니다. 심지어 국민자유당의 국가의회 내 파벌조차도 슈트레제만에게 반대 입장을 취했고, 슈트레제만은 20년대 중반에 노골적으로 사임이나 정계 은퇴를 고려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고, 슈트레제만은 어떤 경우에도 당내 갈등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을 변호하고 적어도 온건 자유주의 계 내에서 자신의 명성을 회복하기 위해 자유주의의 통합을 계속 지지했습니다. 비당파적 자유주의자였던 울리히 폰 브로크도르프-란차우 총리도 자유주의 연합의 노력을 간접적으로 지원했습니다.


이후 몇 년 동안 브로크도르프와 마르크스 연립정부 내에서의 지속적인 협력으로 두 당의 관계는 더욱 긴밀해졌지만, 통일을 향한 마지막 단계는 양당의 잠재적 저항으로 인해 몇 번이고 연기되었습니다. 이는 광범위한 정치적 사건이 독일 정치를 뒤흔든 20년대 후반에 바뀌게 됩니다. 1929년 선거를 몇 달 앞두고 보수당과 자유보수주의자들이 통합하면서 보수 운동의 새로운 시대가 열렸습니다. 1929년 중반 보수혁명론의 울리히 폰 하셀이 등장하면서 조국당 내에서도 비슷한, 어쩌면 더 광범위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자유주의자들은 그 어느 때보다 신속하고 복잡한 통합과 당 개혁이 시급하다는 것을 깨달았고, 1929년 늦여름에 두 당의 역사상 최초의 통합을 위한 진지한 노력이 시작되었습니다.


9월에 마침내 통합이 이루어졌습니다. 슈트레제만의 상황 악화가 크게 작용했습니다. 말기에 접어든 병세가 악화되고 국민자유당 우익의 반대가 거세지자, 그는 더 늦기 전에 광범위한 자유주의 '중도 정당'이라는 비전을 달성하기 위해 국민자유당의 본회와 진보인민당을 통합함으로써 체면과 정치적 유산을 지키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불과 몇 주 후 그는 뇌졸중으로 쓰러졌고, 결국 신당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할 기회를 얻지 못했습니다. 새로 통합된 자유인민당의 첫 두 대표는 진보인민당 출신의 게오르그 고테인과 국민자유당 출신의 빌헬름 칼이 맡게 되었습니다.


예정된 몰락?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인민당의 창립은 독일 자유주의의 공식적이고 완전한 통합으로 이어지지 못했습니다. 반 슈트레제만파에 속한 수많은 국민자유당 내 우파는 이 합당이 불법이라고 비난했고, 이들은 찌꺼기만 남은 국민자유당을 자유인민당의 경쟁 정당으로서 계속해서 운영했습니다. 따라서 국민자유당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대부분의 실질적인 의회 영향력이 사라진 무의미한 군소 정당으로 전락했습니다. 완강한 반사회주의와 반진보적 보수자유주의라는 모호한 개념만을 추구한 탓에 보수당과 조국당의 부속물로 취급되었고, 잔존 국민자유당에서 산업계의 로비가 절대적인 지배력을 발휘하며 반대자들로부터 "국가 자본주의자"라는 조롱의 별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자유인민당 당규에 따르면 사회자유주의자와 국민자유주의자(초대는 각각 고테인과 칼이 그 역할을 맡았습니다.)가 지도부에 포함되어야 합니다. 1936년에 이르러 두 전직 지도자는 은퇴하거나 사망했고, 에리히 코흐와 율리우스 쿠르티우스가 당내 두 가지 주요 흐름인 사회자유주의 온건파빅 텐트 자유주의(슈트레제만파)를 이끌게 됩니다.


온건파는 나우만의 전통을 이어받아 과거 독일 자유주의 운동을 강력하게 만든 실용주의와 정치적 유연성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3월 개혁의 사회자유주의적 성과를 보호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이들은 결코 동질적인 집단이 아니며, 자유주의 노동조합 간부인 안톤 에르켈렌츠를 중심으로 한 온건 좌익 성향의 그룹과 베스트팔렌의 헤르만 회프커-아쇼프를 중심으로 프로이센에서 특히 강세를 보이고 있는 온건 우파 등 다양한 하위 진영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이러한 다양한 하위 그룹은 코흐와 그의 측근인 테오도어 호이스, 오토 누슈케 등 자유인민당 내 나우만파가 핵심으로 삼는 실용주의적 리더십이 없었더라면 통합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들은 필요할 경우 사민당은 물론 우파 성향의 정당과도 협력할 준비가 되어 있으며, 이를 통해 독일의 구성국 전역에는 성향은 이념적으로 다양할지라도 자유인민당이 참여하는 정부가 다수 존재합니다.


쿠르티우스의 빅텐트 자유당은 슈트레제만의 '온건 블록 정당' 원칙을 고수하며, '누구에게 투표할지 확신이 없는 모든 사람을 위한 정당, 정치 스펙트럼 전체와 협력하여 최대한의 유연성을 유지할 수 있는 합리적인 중도 현실정치 정당'을 비전으로 삼고 있습니다. 코흐의 파벌과 달리 슈트레제만파는 일반적으로 사민당의 주 비판 대상인 독점적 산업가들과의 관계로 인해 사민당과의 지나친 밀착을 꺼려합니다. 카를 프리드리히 폰 지멘스, 얄마르 샤흐트 등 독일 서부의 실용적인 금융 및 산업계 거물들은 잔존 국민자유당이나 조국당을 지지할 만큼 극우적이지 않기 때문에 이들을 지지합니다.


국민자유당과 진보인민당이 하나의 당으로 통합되면서 자유주의자들은 빌헬름 마르크스 총리의 우익 연정의 파트너가 되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더욱 강력한 전선을 구축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확대된 영향력을 바탕으로 1931년 마르크스의 사임 이후 자유주의 외교관 요한 폰 베른슈토르프를 총리 후보로 내세워 밀어붙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자유주의의 부활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1934년 루반 호 위기 이후 베른슈토르프는 헤르베르트 폰 디르크젠으로 교체되었고, 자유주의 진영에서는 긴장이 빠르게 고조되었습니다. 1935년 봄, 자유인민당은 3월 연정에서 공식적으로 탈퇴했습니다. 야당으로 돌아온 독일 자유주의는 계속해서 어려움을 겪었고, 수년간의 집권 후 지지율은 정체되었으며, 많은 중산층이 포퓰리즘적인 신당 경제당이나 조국당에 투표할 가능성이 높아졌습니다. 점점 더 급진화되는 환경 속에서 전 세계적으로 자유주의의 쇠퇴는 독일에서도 일어났으며 미래는 불확실해 보입니다.


가톨릭: 미확정된 와일드카드?


이상주의의 대두와 추락


게임 시작 당시 독일에서 유일하게 가톨릭의 이익을 제대로 대변하는 의회였던 중앙당의 최근의 역사는 1916/17년 이전, 적어도 1910년부터 구 엘리트에 공개적으로 반대해 온 뷔르템베르크 주의 마티아스 에르츠베르거를 중심으로 한 젊은 세대의 진보적 의원들에 의해 옛날의 보수적인 지도부가 서서히 소외되면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에르츠베르거의 세력은 특히 독일의 진보적인 남서부 지역에 깊이 뿌리를 내렸으며, 전쟁 중 당의 국가의회 파벌을 장악했고 그 이후에도 지배적이었습니다.


에르츠베르거는 정당 간 위원회의 설립에 중심적인 역할을 했으며, 전쟁 말기 독일의 국내외 정책은 국가의회 다수 3당이 직접 결정한 것은 아니더라도 상당한 영향을 받았고, 1917년 7월의 유명한 국가의회 평화 결의안과 선거 개혁을 위한 잠정적인 시도 등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진보인민당과 마찬가지로 중앙당은 헤르틀링(1917~1918)과 브로크도르프(1918~1920) 내각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했으며, 루덴도르프 몰락과 3월 개혁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 후 중앙당의 고위 인사들은 전후 최초로 민주적으로 선출된 의회 내각인 총리 빌헬름 졸프 내각에서 중요한 장관직을 맡았습니다.


1920년은 가톨릭을 대변하는 이 정당에게 매우 성공적인 해였지만, 세속주의적 입장이 유명한 진보인민당과 사회민주당과의 지속적인 협력에 대한 에르츠베르거의 비전은 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전시 중 실용적인 고려에 따라 정당 간 위원회를 설립한 것도 문제였지만, 전쟁에서 승리한 후 가톨릭 신앙의 적으로 간주되는 이들과 노골적인 연합을 맺는 것은 훨씬 더 분열을 야기하는 일이었습니다. 특히 바이에른, 룩셈부르크, 알자스-로렌의 우파 가톨릭 신자들과 배타주의자들은 이 연합을 "이단과의 정치적 결혼"이라고 불렀지만, 에르츠베르거는 중앙당 계열 신문과 조직에 미친 막대한 영향력을 통해 당분간 이러한 우려를 진정시켰습니다.


 에르츠베르거는 전후 첫 몇 년 동안 독일 국가의회에서 중앙당의 원내대표나 당 대표가 된 적이 없었지만 '새로운' 중앙당을 이끄는 원동력이었습니다. 1920년 재무부 장관으로 임명된 것은 그의 경력에서 최고 정점이었지만, 아직 최고의 업적은 아니었습니다. 1922년 초 졸프가 사임한 후, 우파의 격렬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놀랍게도 그의 뒤를 이은 사람은 바로 에르츠베르거였습니다. 당시 에르츠베르거는 많은 보수주의자들이 새로운 의회 제도를 경멸했던 이유 그 자체였습니다. 지나친 야심가이자 이상주의자, 순진한 민주주의자, 그리고 그의 아이디어 중 일부는 거의 혁명적이었습니다. 논란이 많은 그의 세제 개혁 아이디어는 당내 연방주의 지지자들을 소외시켰고, 바이에른, 엘자스-로트링겐, 룩셈부르크의 중앙당 의원들이 자치를 선언하거나 일시적으로 당에서 탈퇴하도록 유도했으며, 전국적으로는 에르츠베르거의 진보파와 실레지아, 라인란트, 베스트팔렌의 농업 보수파 가톨릭 신자들 간의 내분이 확대될 위기에 처했습니다. 특히 초기에 에르츠베르거에 우호적이었던 신문들이 다시 보수적인 입장을 취하기 시작하면서 에르츠베르거의 당내 입지는 총리 임명 이후에도 안정적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를 무너뜨린 것은 당내 반대파가 아니라 에르츠베르거와 10년 넘게 팽팽한 라이벌 관계를 유지해 온 오랜 숙적이었습니다. 1900년대 초 식민지청에서 유망한 경력을 쌓았던 카를 헬페리히 전 부총리는 에르츠베르거가 쥐트베스트아프리카에서의 모호한 비리를 폭로하며 광범위한 식민지 개혁을 시작하고 1917년 에르츠베르거가 만든 정당 간 위원회의 압력으로 부총리 임기를 조기 종료한 인물이었습니다. 1922년 말 헬페리히는 에르츠베르거가 탈세, 부패, 전쟁 중 개인적 부를 축적했다는 내용의 비망록을 발표했고, 이후 에르츠베르거는 법정 소송에서 위증죄로 유죄 판결을 받아 1922년 12월 불명예스럽게 사임하며 굴욕적으로 패배했습니다. 이 결정은 분열된 중앙당을 혼란에 빠뜨렸고, 에르츠베르거 시대는 단숨에 막을 내렸습니다.


세대의 충돌


에르츠베르거의 정계 은퇴는 우파가 오랫동안 고대하던 깔끔한 결말이었습니다. 특히 라인란트 출신의 온건 보수 엘리트들이 다시 전권을 장악하면서 당을 다시 우파 방향으로 이끌었습니다. 당내 연방주의자들과의 완전한 화해가 이루어졌고, 3월 연정이 형성되며 중앙당이 주도하는 중산층 블록이라는 당의 비전이 현실화되었습니다.


20년대 중후반 중앙당의 가장 영향력 있는 지도자는 마지막 '중앙당의 거물' 빌헬름 마르크스로, 자연스럽게 당의 지도부로 성장하여 거의 만장일치로 선출된 당 대표였습니다. 그러나 30년대에 들어서면서 이러한 자연적 승계 개념은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1928년 65세의 나이로 총리에 임명된 마르크스는 이미 여러 가지 가벼운 질병을 앓고 있었으며, 이는 이후 몇 년 동안 서서히 악화되었습니다. 1931년 그가 총리와 당 대표직 모두를 갑작스럽게 사임하자 전임 의장들이 모두 재임 중 사망한 상황에서 당은 당황했고, 중앙당은 또 다른 리더십 위기에 빠졌습니다.


마르크스가 사임하게 된 또 다른 결정적인 요인은 그와 그의 당이 멀어졌다는 느낌 때문이었습니다. 20년대 들어 당내에서 강력한 파벌이 등장했고, 이들은 서서히 기존 라인란트 계열의 지도부에 도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전통주의자인 마르크스는 종파주의와 국가에 대한 이타적 봉사, 당에 대한 자명한 충성이라는 오래된 가톨릭의 이상에 너무 깊이 젖어 있었기 때문에 국가의회 내 다양한 신흥 파벌의 현대적인 노선을 따르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그는 왜 많은 동료들이 더 이상 정부에서 자신의 의무를 다했다는 의식에 만족하지 않고 자신의 특정 이익을 더 강력하게 대변하기를 원했는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고삐를 잡기 위해 그림자에서 나타나기 시작한 그룹으로는 누가 있을까요?


막을 수 없는 힘: 기독교 노동조합원들


1923년 이후 중앙당이 사민당을 꽤 쉽게 버릴 수 있었던 주요한 이유는 기독교 중심의 사회 복지 의제를 가진 잘 확립된 노동조합으로 이는 정당이 성공적으로 안정적인 유권자 층을 얻은 비법이었습니다. 도시, 특히 루르와 라인란트의 가톨릭 다수 지역에서 기독교 노동조합은 때때로는 사민당 노조보다 더 많기도 했습니다. 현재는 특히 세 명의 정치인들이 노동조합을 대변합니다. 아담 슈터거발트 (독일의 기독교 노동조합 운동의 지도자), 하인리히 브라운스 (독일 가톨릭 인민 협회의 지도자) 그리고 요하네스 기스베르츠 (가톨릭 노동 사회의 저명한 대표, 1925년 바우어-기스베르츠 개혁의 아버지)입니다. 에르츠베르거의 진보주의자들이 쇠퇴하고 새롭게 입헌화된 제국에서 사회 정치적인 현안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노동조합 조직은 그 어느 때보다 더 중요해졌습니다.


중앙당의 노동운동 계열은 그러나 더 광범위한 범위에서 보면 꽤 우경화된 것으로 비치기도 합니다. 이는 노동자 계층 사이에서 기독교적인 영향력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사회주의적인 경쟁 노조와의 분명한 차별화가 필요하다는 믿음에서 기인한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종파간의 구분 개념은 노동조합들 내에서 주요한 역할을 합니다. 슈터거발트는 애국적인, 기독교적인, 군주주의적인 중산층과 노동자 계층의 이익을 위해 당파적인 방벽 역할을 하고 동시에 부활하는 좌파를 약화시킬 수 있는 통합된 기독교 중산층 블록 정당운동을 지지합니다. 교파간 연합에 따른 "기독교 인민당"의 창당을 주장하면서, 그는 그 정당의 본질에 대해 1900년대 초의 "중앙당 논쟁" (중앙당이 "본진을 떠나" 개신교 유권자들에게까지 확장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당 내부 갈등) 의 오래된 논쟁을 재개했습니다. 명목상으로는 과거에 증명사례를 바탕으로 기독교 노동조합원들이 정치적인 좌파와의 협력도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고 했지만, 보수당 같은 보수 정당들과의 긴밀한 협력은 슈터거발트의 전반적인 비전의 중요한 부분입니다. 슈터거발트와 그의 동료들은 매우 유연하고 적응력이 뛰어나다는 점은 그들의 특별히 더 강력한 점입니다.


반동주의의 요새: 연방주의-농본주의 전선


독일의 모든 정당들 중에서 중앙당은 아마도 가장 분권적인 정당이며, 이는 종전 후에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의회제를 도입하여 연방 국가들의 영향력을 약화시킨 3월 개혁에 대한 당내의 광범위한 반대와 당시 에르츠베르거의 진보파의 우세는 1920년 핵심 정당인 바이에른 인민당, 엘자스-로트링겐 인민당, 룩셈부르크 우파당특정 주의 지구당이 분리되는 결과를 낳았으며 이들은 모두 베를린의 지도부로부터 자치권을 선언했습니다. 에르츠베르거의 사임 이후 베를린, 스트라스부르크, 룩셈부르크, 뮌헨 간의 관계는 개선되었지만, 그들의 자치권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비록 바이에른 인민당, 엘자스-로트링겐 인민당, 룩셈부르크 우파당은 국가의회 내에서는 중앙당과 담당 구역만 다른 동일 파벌에 속하지만, 지역 차원에서는 "중앙당"이라는 용어는 사용되지 않고, 베를린의 지도부는 그들의 일에 간섭할 능력이 없습니다.


세 자치 지역 지부는 주의 권리 보존에 대한 강경한 입장과 특정 주의 이익 옹호 그리고 자유주의자들과 사민주의자들에 대한 매우 회의적인 태도로 유명합니다. 바이에른 인민당은 바이에른 예외주의에 편승하여 베를린으로부터의 침입에 대해 헌법상 보장된 성배와 같은 특권을 지키고 있는 반면, 엘자스-로트링겐과 룩셈부르크는 국경선에 접해있어 지역주의적 쇼비니즘과 정치적 가톨릭의 온상이며, 프랑스공포증에 의해 촉발된 반유대주의와 반사회주의적 코포라티즘이라는 위험한 흐름은 코뮌-독일 국경을 따라 꽤 오랫동안 증가하고 있습니다.


중앙당 우파의 또 다른 방벽은 당의 자치적인 지부를 구성하지는 않지만 프로이센에 있습니다. 이 방벽은 거대하고 매우 다양한 인물로 구성된 중앙당의 프로이센 지부 내에서 소수만을 구성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수십 년 동안 상 슐레지엔, 베스트팔렌, 라인 출신의 가톨릭 농업인들과 기업인들의 확고한 통제 하에 있었습니다.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시골에서 그들은 수십 년 동안 불공평한 프로이센 식 3계급 투표제로부터 이익을 얻었으며, 프로이센 중앙당의 지도자들은 1918년의 투표권 개혁을 끝까지 격렬하게 반대했습니다. 개혁가 지망생들과 경쟁하고 기존의 지도자 대부분은 서서히 사망하기 시작하면서, 엘베 강 동부의 프로이센 농본주의의 패권은 상당히 흔들리게 되었습니다. 게임을 시작할 때 이 파벌의 주요 대표는 의심스러운 베스트팔렌 사람, 프로이센 내무장관 프란츠 폰 파펜입니다. 그는 정치적 스펙트럼에서는 더 우파적인 정치인들과 유사한 코포라티즘적 신념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가 정치적으로 비동맹적인 온건파라고 주장한다.


농본-연방주의 전선은 결코 노동조합과 같은 단결되고 강력한 이익 집단은 아니지만, 그들은 철도든, 조세권이든, 농업 보호주의든, 그들의 오래된 특권을 끝까지 지키려고 노력할 것이며, 베를린의 탐욕스러운 정당 정치인들이 구성국들의 이익을 해치지 못하는 새로운 진정한 분권주의 질서라는 그들의 비전을 계속 발전시킬 것입니다.


에르츠베르거의 꿈: 진보적 가톨릭주의


중앙당의 진보파는 1910년대 후반에서 1920년대 초에 걸쳐 전성기를 맞았지만 1922년 말 에르츠베르거가 사임한 후 깊은 곳으로 추락했고 아직도 그 지도력은 결코 회복되지 못했습니다. 에르츠베르거는 몇 년 동안 은거하다가 결국 자신의 정치 활동을 재개했지만, 아직 양지에는 나타나지 않고 바덴 출신의 그의 동료 요제프 비르트를 진보 진영의 두드러지는 발언자로 만들었습니다. 진보파는 정치적 좌익와 협력하고자 하는 의지, 기독교 가치에 기반한 '사회적 인민 국가' 개념, 의회 민주주의에 대한 무조건적인 지지 등 그들의 많은 사상이 기원한 독일의 자유주의적 남서부 지역에서 아직도 잘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들의 진보적인 성향에 따라 최근 몇 년간 특히 노동조합과 우파들에 의해 선전된 비전이 통합된 기독교 인민당이라는 개념에 대해 진보파는 잠재적으로 회의적입니다. 이미 전쟁이 일어나기 전 에르츠베르거와 그의 피후견인 비르트는 앞서 언급한 중앙당 논쟁에서 매우 모호한 역할을 했으며, 때로는 헤르만 로렌이나 한스 게오르크 폰 오페스도르프와 같은 극단주의 강경파를 공개적으로 지지했습니다. 보수적인 개신교 유권자 층에게까지 당을 확대하면 당연히 당 내의 진보파가 손해를 입을 수 있다는 우려가 특히 크게 작용했습니다. 이러한 모호성은 요제프 쇼퍼 칼 울리츠카와 같이 진보파에 오랫동안 존재해 온 고위 성직자들의 존재에 기인한 것도 있습니다.


가톨릭 정체성 위기


다시 1931년으로 가봅시다. 사실상 모든 파벌이 경쟁을 벌인 결과, 구파인 라인란트 온건파의 패권은 마르크스의 사임으로 막을 내릴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상황은 예상과 다르게 흘러갔습니다.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라인란트의 의원, 국가의회 내 원내 부의장이자 여러 부대표 중 한 명인 테오도르 폰 게라르가 위기상황에 중앙당의 다양한 진영들 간의 내분을 방지한다는 명목으로, 전당대회에서 적절한 민주적 투표 없이 "일시적으로" 대표 대행으로 선출된 것입니다.


당연히 거의 인기가 없는 대표를 일방적으로 선출한다는 결정은 마르크스의 사임을 통해 당권을 잡기를 바랐던 모든 진영에 많은 실망을 안겨주었습니다. 게라르는 당 내부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의 정치적 라이벌들을 어느 정도 흔들어줄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따라서 그는 전술적인 선택, 즉 그들이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명목상으로만 강력한 지위에 그들을 배치하는 전략을 채택했습니다. 스터거발트는 국가의회 원내대표로, 진보적인 노동조합원 요제프 요스가 부대표로 선출되었고, 하인리히 브뤼닝과 비르트와 같은 몇몇 우파와 진보파는 제국과 프로이센의 여러 관련성이 부족한 장관직에 그들을 억지로 지명하는 것으로 당분간 정치적으로 무력화되었습니다.


1936년이 밝아오고 4월의 국가의회 선거가 다가오는 지금, 게라르의 조치는 비록 매우 불안정한 기반 위에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잘 유지되고 있습니다. 당의 상황은 5년 전보다 훨씬 더 심각해 보이고, 경쟁하는 다양한 파벌들은 여전히 당의 지도권에 대한 그들의 도전을 포기하지 않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슈터거발트가 될 것이 뻔하다고 생각하며 "중앙당의 이카루스" 슈터거발트는 이미 자신이 당연히 게라르의 후계자이자 진짜배기 국민의 대표자라고 자칭하기 시작했지만, 그가 쿠르트 폰 슐라이허의 방대한 인맥망과 관련되어있다는 의문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10년간의 집권 후 중앙당의 미래가 불투명하고, 디르크젠 내각이 대단히 인기가 없는 상황에서, 지도부의 교체가 일어날 것이라는 점은 확실합니다. 문제는 일어날지 안 일어날지가 아니라 언제 일어날지, 그리고 누가 승리할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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