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보안법의 존재로 인해 그 자세한 내용을 언급하기 어려운 주체철학에서 언급하는 주체는 과연 주체철학만의 독자적 개념인가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대개 주체철학에 대해서는 "그저 관념론에 불과하다", 또는 "주의주의다"라는 평가가 오가고 있으며, 철학의 근본문제에 대한 견해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와 질적으로 전혀 다른 주장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이상 마르크스-레닌주의라고 할 수 없다는 분석도 존재합니다. 아쉽게도 이 나라에서 주체철학의 주요 개념에 대한 논리적, 역사적 분석과 종합은 찾아볼 수 없으며, 대부분 매우 지엽적인 문구 몇 구절만을 추가하여 옹호하거나 비난하는 게 전부입니다.
저 또한 주체철학에 대해 여기서 직접적으로 언급하기는 힘들기 때문에, 주체철학의 직접적 내용을 들추면서 주체에 대해 논하기보단, 마르크스주의에서 주체가 어떠한 의미로 쓰이는지만, 아주 간단하게만 논하고자 합니다.
주체란 쉽게 말하자면 자기 운동하며 제 규정을 자신의 형식 명료화의 수단, 즉 질료적 수동물로 전화하는 규정 또는 체계를 말합니다. 주체는 또한 가현운동의 주체로서, 본질이기도 합니다. 주체는 엄밀하게 말하자면 본질로서 자기 운동의 주체이고, 바로 그렇기에 자기 운동의 추동력으로서 다양한 존재규정을 산출해냅니다. 이를 가현운동이라고 하는데, 여기서 본질의 추동력이 되는 대상이자 본질의 대립물을 가상(假象, Schein)이라고 합니다. 주체는 한편으로 타성적이 될 대상의 조건을 전제하는 자기 활동으로서의 체계이기도 합니다.
본래 마르크스나 엥겔스가 사용한 의미에서의 주체(Subjekt)라는 것은 헤겔의 주체 개념을 창조적으로 계승한 것입니다. 앞선 내용도 거의 모두 헤겔이 정립한 것입니다. 그런데 "Subjekt"라는 독어 원어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주체라는 단어는 주관이라는 단어와 같습니다. 따라서 어떠한 것이 주관이냐, 또는 주체냐라는 것은 문장의 맥락에 따라 구분해야 하는데,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저서에서 그 구분은 헤겔에서의 그 구분보다는 쉬운 편입니다. 헤겔의 경우 주체는 절대자이고, 또 본질이며, 능동적 실체인 탓에, 그리고 그것이 인간의 인식주관과 존재론적 차원에서 완전히 일치를 이루는 개념인 탓에, 주관과 주체를 맥락에 따라 구분하기 매우 어렵습니다. 반면 마르크스의 경우는 《요강》이나 《자본》에서 "Subjekt"를 의식 없는 사물에도 붙이기 때문에 구분이 쉽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자본이 인식주관이라고 할 때의 그 의미로서 ‘주관’이 있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분명히 자본에 대해서도 "Subjekt"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즉, 여기서는 주관이 아니라 주체라고 번역해야 하는 것입니다.
주체는 정립하는 활동 일반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개별의 두 계기가 보편과 특수이고, 개별의 정립자는 보편인데, 이 보편의 계기로서 상위의 보편, 즉 여기서 논한 보편이 개별이 되게 하는 이것의 계기로서의 보편 역시 언급된 보편의 정립자가 됩니다. 헤겔은 보편-특수-개별 개념의 전개를 통해 지고의 형식규정이자 지고의 보편자로서 절대이념을 말하는데, 헤겔 체계에서 개념의 전개는 수많은 존재 범주의 이행과 본질 범주의 반성이 변증법적 운동을 통해 연관을 이루어 나가며 진행됩니다. 사실 《논리의 학》의 체계는 주체―신, 절대정신, 절대이념, 절대자, 순수지―의 복귀 과정의 일반적 체계이기도 합니다. 주체라는 개념을 더 확실하게 알기 위해서는 헤겔이 《논리의 학》에서 구성한 쌍범주 간 매개연관(특히 본질과 가상, 보편-특수-개별, 절대자 등과 같은 범주들)의 내용을 알아야 하지만, 이것까지 설명하면 너무 길어지므로 생략하겠습니다.
마르크스는 자기에 대한 일체성 확립의 주체인 자본의 활동을 다음과 같이 《요강》에서 언급합니다:
"자본은 적극적인 주체, 즉 과정의 주체로서의 자신으로부터 출발하면서 자신에 대하여 자기 증대되는 가치로서 관계한다. 즉 자본은 잉여가치에 대하여 자신에 의해서 정립되고 근거지워진 것으로서, 생산 원천으로서의 자본이 생산물로서의 자기 자신과, 생산하는 가치로서의 자본이 생산된 가치로서의 자기 자신과 관계한다. [...] 자본이 새로 생산된 가치로서의 이윤을 전제된 것으로서 자기 증식되는 가치와 구별하고, 이윤을 증식의 척도로 정립한 다음에 자본은 이러한 분리를 다시 지양하고 이윤을 자본으로서의 자신과의 일체성 속에서 정립하는데, 이제 이 자본은 이윤만큼 증대되어 동일한 과정을 더 큰 규모로 새롭게 시작한다. 자신의 순환을 그림으로써 자본은 순환의 주체로 확대되고, 그리하여 확장되는 순환, 즉 나선을 그린다." (K. 마르크스, 김호균 역 (2000),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제3권, pp. 12-13.)
여기서 자본은 생산자본, 상품자본, 화폐자본 순으로 형태변환하며, 스스로를 증식하는 주체로 언급됩니다. 여기서 이윤은 자본 운동의 산출물로 되며, 자본은 이윤을 제 자신의 일체성으로 포섭하여 그것으로 더 큰 화폐자본(G')으로 불려나갑니다.
주체는 소외의 계기이기도 합니다. 위에서 언급하였다시피 주체는 제 규정을 자기 운동의 추동력으로 삼는데, 여기서 그 규정들을 타성태로 됩니다. 타성태로 된 규정이 곧 소외된 규정입니다. 이에 대하여 마르크스는 《요강》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합니다:
"노동 생산력의 증가는 보다 많은 생산물을 창출하기 위해서 보다 적은 직접적인 노동을 필요로 한다. 요컨대 사회적 부가 갈수록 노동 자체에 의해 창출된 노동 조건을로 표현된다는 것, 자본의 관점에서 보면 사회적 활동의 한 계기―대상화된 노동―가 다른 계기인 주체적 노동, 즉 살아 있는 노동의 거대한 신체가 되는 방식이 아니라, 살아 있는 노동에 대하여 노동의 객체적 조건들이 그것들의 범위 자체에 의해서 표현된다는 것, 그것이 갈수록 거대한 자립성을 띠게 되고 사회적 부가 거대한 분량의 낯설고 지배적인 노동 권력으로 마주 서는 것으로 표현된다는 것 이외에 다른 뜻이 있을 수 없다. 여기서 강조점은 대상화됨(Vergegenstandlichtsein)이 아니라 소외됨, 외화됨, 양도됨 ― 노동자가 아니라 인격화된 생산 조건, 즉 자본에 속하는 것, 사회적 노동 자체를 자체의 계기들 중 하나로 마주 서게 한 거대한 대상화된 권력에 속하는 것이라는 데에 있다."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제3권, p. 124.)
자본은 첫 번째 인용문에서 언급되어진 대로 주체적 운동을 하며, 이 주체로서 자본은 자신의 존재 양식을 확립하는 과정에서 질료적 수동물을 흡수―노동착취를 통해, 즉 생산과정을 통해―하고 그것을 제 자신의 일체성을 이루는 타성적 규정으로 전화시킵니다. 당연히 여기에는 인간의 고유한 속성으로서 노동도 포함됩니다. 그런데 노동은 인간의 유적 본질입니다. 따라서 인간의 본질은 가현운동의 대상으로 전락하며, 그것은 자본, 즉 ‘낯설고 지배적인 노동 권력’의 자기 운동의 내적 추동 수단이 됩니다. 여기서 산 노동은 그저 살아 있는 소외된 노동(entfremdete Arbeit)에 불과한 것이 됩니다.
자본의 몸집이 비대해질수록, 그것을 마주하는 노동은 더욱 그것에 얽매이게 되고 인간은 더더욱 소외의 구렁텅이로 빠지게 됩니다. 이는 자본의 규모가 비대해질수록 절대적, 상대적 빈곤 및 이로 인한 자본주의 하 인간의 특수한 존재 양식이 인간 그 스스로를 배신하는 수많은 과정―실업, 인간 관계의 비속화, 기행, 환경 파괴 등―을 통해 드러납니다. 대부 기능을 갖춘 자본으로의 잉여가치 전유, 즉 이자 낳는 자본 역시 주체로서 자본의 한 표현방식입니다.
동시에 자본은 그 내적 모순으로 인해 주기적인 공황을 야기합니다. 다시 말하여, 자본은 자신이 쌓아놓은 그 스스로의 권위를 자기 운동을 통해 떨어뜨리는 것인데, 이 추락은 자본의 자기 증식의 내용상 필연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인간의 주체적인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의 실재적 가능성이 됩니다. 《자본》 제3권 제48장에서 노동하는 인간이 자본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게 되는 과정이 매우 간단하게 언급되는데, 바로 이것이 주체의 확립으로 나아가는 과정 일반인 것입니다.
인간 주체성의 확립은 곧 인간 자유의 실현이기도 한데,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모든 투쟁은 인간 주체성의 확립 과정입니다.
공산주의 사회에서 인간은 외적 합목적성의 타성태가 되지 않고 그 스스로가 상대적으로 자기 운동하는 주체가 됩니다.
이제 주체철학의 내용으로 돌아가봅시다. 이제는 여러 포털의 검색만으로도 확인할 수 있는 주체철학의 핵심 개념으로서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은, 실은 주체적 인간의 본질적 속성으로 됩니다. 제 추측이지만, 여기서 ‘속성’이라고 하는 것은 흔히 언급되는 단순 추상적인 종차로서 분류물은 아닐 것입니다. 만약 인간의 본질을 따지는 것에서 추상적인, 형이상학적인 종차 분류로 만족하는 것으로 끝낸다면 그것은 변증법적 방법론에 기초하였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여기서 세 본질적 속성은 우리에게 형식규정 일반으로서의 의미로 더 와닿기는 하지만, 그 내용규정을 보자면 서로가 연관을 이루고 있어야 합니다. 자주성이란 외적 합목적성의 타성태로 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의식성은 바로 필연성을 인식하는 인식주관의 능동적 측면, 즉 목적의식성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창조성이란 주체적 인간이 자기의 존재 양식을 확립함에서 질료적 수동물―자연 대상, 더 나아가 노동도구를 포함하는 생산물 등―을 상대적 자기 운동의 추동 수단으로 삼으며, 대상을 능동적으로 개변함을 의미합니다. 세 규정은 서로가 서로를 제약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다면 주체철학의 핵심 개념은 인민의 능동성이 최고 발현되는 사회라는 조건으로부터 기인하는, 인간의 존재 양식과 필연적 연관을 이루는 규정 일반을 나열한 것이기도 합니다.
주체철학의 구성물인 여러 가지 지도자에 대한 이론은 제국주의 시대에서 인간 주체를 확립하기 위한 전술·전략적 체계라고 봐야 한다고 전 생각합니다. 물론 이에 대한 가장 간단하면서도 유력한 비판은, 그러한 전술·전략적 체계가 목적의 전치를 이루는, 자기모순적인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이러한 비판 역시 일정 그 타당성이 있다고는 생각하지만, 주체철학의 위 구성물에 대한 자세한 내용이 이 나라에서 충분히 소개되지는 않았다는 점에서 이러한 비판의 유효성이 엄밀성의 차원에서 설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은 회의적입니다.
제가 이 글을 통해 전하고자 하는 것은 사회주의 운동에서, 또는 일부 국가에서 이데올로기적 중핵으로 놓는 ‘주체’라는 개념이 어느날 갑자기 생겨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변증법적 의미에서의 주체는 헤겔부터 시작하여 마르크스와 엥겔스에 의해 계승되었고, 레닌의 문헌에서도 마르크스의 그것과 동일한 맥락에서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1970년대 말 이후의 사회주의권에서 인간학의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주체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기도 하였습니다. 일례로, N. I. 키야슈헨코는 미적 활동에서 인간 주체성을 미적 대상의 창조 능력과 결부시켜 설명합니다. 동독의 경우는 1960년대 때부터 벌써 G. 슈틸러에 의해 주체 이론이 시도되기도 하였습니다. 주체철학 역시 이러한 연구의 분지적 흐름으로서 나타난 체계가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끝으로 주체 개념의 위태로움에 대해 설명하고자 합니다. 지금까지 평탄하게 써내려왔지만 실은 주체라는 것이 과연 어떻게 성립할 수 있는지에 관한 철학적 논쟁은 수없이 많습니다. 모든 것은 자기 규정을 확보한 동일자이고, 그것은 소외된 제 규정도 마찬가지일진데, 이 동일자 중에서 주체를 택하는 것은 그저 자의에 불과하다는 입장이 대륙철학에서는 아직도 주류를 잇고 있습니다. 소위 언급되는 포스트모더니즘 역시 헤겔 비판을 수행하여 주체가 불가능함을 말하고 있으며, 그 내용에 대한 반박이 쉬운 것은 확실히 아닙니다. 포스트모던적 사조에 속하는 이데올로그들에 의하면 주체적 규정력이란 건 허상입니다. 즉 ‘주체’로 상정된 것은 난립되는 규정 속에서 흩어질 수밖에 없는 것에 불과하며 전체적으로 보면 그것 역시 무한한 차이 속에서 찰나멸하는 그러한 존재에 불과한 것(대표적으로 들뢰즈가 《차이와 반복》에서 언급한 바로 그것)이라는 겁니다. 포스트모던적 사조에 의하면 마르크스에 의해 구상된 자본이라는 것 역시 흩어져 가는, 그리고 또 이미 흩어져 있는 그러한 규정에 불과한 것이 됩니다. 결국 주체에 대한 포스트모던적 사조의 견해를 확고히 반박하지 않는 한, 주체의 해체라는 시대 속에서 헤매야 하는 운명에 놓여져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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