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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공장의 '코르돈[산업통제위원회]'
여기 모인 노동자들이
공장 점거와 조직 문제를 논하고 있다.
이 회의에서는 간부들과
일반 노동자들 사이의 갈등이 잘 나타난다.
간부 :
총노련에서는 노동자들이 장악한
공장들을 살피기 위한
위원회를 구성했습니다.
위원회는 산업개발원이나 경제부 등
유관기관과 협조를 통해
현재의 문제점을 연구할 것입니다.
한가지 확실히 해둘 것이 있습니다.
지금 많은 공장들이 점거 아래 있습니다.
산티아고에만도 그 수가 상당한데
여러가지 사정으로 그 모두를
국유화 할 수는 없습니다.
더욱이 총노련에서 공정 점거 사안을 제기한 건
쿠데타와 같은 위기 상황에서
파시스트들의 책동을 막자는 뜻이었습니다.
그렇다고 무작정 모든 공장들을
국유화하겠다는 게 아니었습니다.
또한 여러가지 문제점이 있습니다.
자금난에 빠진 공장들을 국가가 다 떠맡으면
그 부담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는 안됩니다.
따라서 여러 동료 노동자들과
해당 공장들의 문제를 함께 논하고자 합니다.
노동자1 :
총노련이 빨리 결정하기를 바라오.
장단점이 있겠지만 총노련이
노동자들 가슴에 대못 박는 일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소.
간부 :
고려해야 할 다른 문제점도 있습니다.
스위스 자본의 회사 같은 경우입니다.
이 문제는 국제 관계가 걸린 일입니다.
국제 관계와 노동자 관계가
무슨 관계냐고 하시겠죠?
아주 밀접합니다.
스위스 정부는 '파리클럽'의 주 회원국으로서
칠레의 대외채무를 논의하고 재협상하는 국가입니다.
동지들도 아시다시피 현 정부가
구리산업을 국유화하자 양키들이 불매전술로 나왔습니다.
외환보유고도 없는 나라에서
이제 신용거래도 못하게 된 겁니다.
이런 문제를 파리 클럽에서 다루기 때문에
칠레에서 이런 사안은 아주 신중해야 합니다.
노동자2 :
국제 관계를 논하려고
이 자리에 있는 게 아니오.
우리 이해가 걸린
공장 국유화 문제를 논해야지
이 일에 타협 따윈 없소.
노동자3 :
자꾸 무슨 국제 관계를 이야기 하는데
일반 노동자는 알아 듣지도 못해요.
국내 문제 같은 걸 가지고
알기 쉬운 말로 설명을 해야지
노동자들이 총노련에 등 돌리게 할 거요?
간부 :
그 대답도 하죠.
이제 칠레 국내 문제를
이야기하겠습니니다.
지금 동지들도 아시다시피
이 정부 들어 우리 노동자 계급이
힘을 좀 얻었다고는 하지만
권력을 다 차지한 건 아닙니다.
반동 세력은 물리력을 갖긴
경찰과 군이 노동자와 대치하도록 꾀합니다.
이미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노동자들이 정부나 사법당국의
지시에 따르지 않을 경우
결국 군경과 맞서게 됩니다.
그 때 우익이 나서서 정부를 비난합니다.
기강도 권위도 없는 정부라고
저들이 노리던 대통령 탄핵을
우리는 겨우 넘겼습니다.
노동자4 :
하지만 문제는 아주 명확해요.
정부가 노동자들의 조직을 요청했어요.
공장 지구에서, 모든 전선에서
조직하라고 했어요.
그래소 조직했어요.
지역에서 전위를 세우고
노조에서 전위를 세우고
공장 지구에서 조직을 이뤄냈어요.
그런데 여전히 옛날 타령을 하고 있어요.
때가 아니다...
입법부와 사법부가 아직 건재하다...
상향식으로 밑바닥에서부터
조직하라고 해서 그대로 했어요.
그런데 대통령은 여전히
어떤 식의 행동은 삼가라고 해요.
그럼 왜 조직을 했어요?
뭐가 겁나요?
우리 노동자들과 인민들이
다 들고 일어나 총파업을 하는 거에요.
행정수반인 대통령에게 당장
결정하라고 하는 거에요.
어떻게 싸울 것인가?
우파와 싸울 계획이 뭔가?
필요하면 국민투표를 하는 거에요.
우파에서도 요구하잖아요.
상향식 조직을 이룬 우리가
이곳 란까구아에서부터 싹 휩쓸거에요.
우리는 지역과 공장 지구,
노조에서 조직을 이뤘어요.
그런데 총노련에서는 계속
잠자코 있으라고만 해요.
어쩌구저쩌구 이유를 대면서
퀸 엘리자베스 것이니 안된다,
스위스 것이니 안된다,
아주 일을 만들어요.
진짜 이젠 신물나요.
이런 게 관료주의지!
우리 내부의 관료주의와의 싸움이에요.
우리 진영 안에, 각 노조 안에,
총노련 같은 상급단체 안에
여전히 관료주의가 있어요. 언제까지?
이걸 알고 싶어요.
민중의 힘을 신뢰하는 지를
총노련은 노동자들을 믿지 않나요?
금요일 아옌데 동지 앞을 행진하면서
지지 구호를 외친 사람들을?
대통령은 노동자 조직을 믿고 있나요?
의원 나리들은 믿고 있나요?
탁상공론만 하면서.
또 상원 의원들은?
대의를 위해 싸우지도 못하고,
노동자들에게 해주는 일도 없이,
우파 의원들 앞에서
찍소리도 못하고, 정말 신물나요!
그래서 우리가 오늘밤 여기 나와 있어요.
정부가 최대한의 공장을 수용하게 하려고
우파한테는 쓸모 없는 것들이나 줘버려요.
부담에 겨워 정부가 못하면
우파들이 할 거고 노동자들은 싸울 거에요.
시장에 나가보고 암시장 돌아가는 걸 봐요.
그런데도 가만히 있으라고?
언제까지? 아주 신물나요.
간부 :
현 계급구도에서 군부의 위상이
어딘지 모르십니까, 동지들?
장교들의 다수가 쿠데타에
찬성하는 걸 모르십니까?
보십시오, 동지들.
권력은 잘 짜여진 조직으로만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조직은 탄탄합니다.
하지만 반동 실세들과 맞상대 하려면
무게가 더 실려야 합니다.
그래서 총노련에서 방위위원회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방위위원회가 뭐냐고요?
생산 공장을 방위하고
전투를 방위하는 위원회입니다.
자세한 말씀은 다 못 드리겟지만
우리는 실수를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노동자들은 모든 전선에서
전투 태세를 갖춰야 합니다.
지금 총노련이 이 투쟁의
한가운데 있습니다.
이견은 있을 수 있습니다, 동지들.
하지만 중앙 조직과 어긋나는 방향으로
나가려는 경향이 생길 때
문제가 야기됩니다.
거기서 문제가 비롯됩니다.
동지들의 여러 가지 말씀 잘 들었고
악의가 없다는 건 알지만
문제를 토의하는 데
좀 더 심사숙고 해야 합니다.
근거 없는 전단지처럼
조직의 뭐가 어떻고
대표의 뭐가 어떻고
헐뜯어서는 안 됩니다.
모두 함께 이뤄낸 조직이니
모두에게 어느 정도 책임이 있습니다.
동지들에게는 문제를 해결할
조직이 있습니다.
해결책을 강구하고 합의를 보기 위해
지금 우리가 이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만은 잊지 맙시다.
우리에게는 아옌데 동지가
주도하는 정부가 있으며
그 지도력에 따라야 할 것입니다.
이 정부는 노동자들의 조직체이며
또한 지도력을 발휘하는
계급정당의 조직체입니다.
위의 논쟁에서 볼 수 있듯이
'어떻게 싸울 것인가'를 놓고
서로 의견이 갈리는 것을 볼 수 있다.
민중을 믿고 강하게 나가달라는 주장과
답답하더라도 정부를 믿어달라는 주장.
솔직히 말해서 이들 주장 모두가
나름의 근거와 맹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랬기에 이들의 논쟁은
치열할 수밖에 없었고
결론도 쉽사리 나오지 않았다.
결국 좌익 정파들은
많은 논의를 했었지만
노동자의 무장이나 혹은
공장 점거에 관한 건에서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했다.
그런 상황에서도 아옌데 정부는
우파 세력과의 합의를 멈추지 않았다.
가톨릭 교회가 화해를 종용하자
기독교민주당 지도부는 아옌데를 만났고
합의 가능성 또한 커져갔다.
이에 심기가 불편해진 극우파는
아옌데 정부와 친했던 해군제독
아르투로 아라야 페테르스를 암살했다.
그는 해군에 있어서 해군 장교들과
정부를 이어주는 역할을 해준 인물이었다.
극우파들은 이렇게까지 해가면서
아옌데 정부를 무너뜨리려고 했었다.
친정부 군인 카를로스 프라츠에 의하면
이 암살은 군인들의 쿠데타 음모가
노출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부르주아지들의 어용 파업도 가세했다.
화물업주들은 트럭을 모는 걸 막았다.
수천여 대의 트럭과 버스가 멈춰섰다.
미국 CIA는 파업자들에게 일당 4달러씩
총 수백만 달러를 지원해줬다.
상황은 예전 구리파업 때와
매우 비슷하게 흘러갔다.
우파 세력은 파업을 지지했으며
반정부 언론이 정부를 공격하면서
정쟁 또한 심각해져 갔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아옌데 정부의 합의 움직임도
교착 상태에 빠져버렸다.
기독교민주당은 정부에게
수용 불가능한 조건만 강요했다.
심지어 미국에서 훈련받은
파시즘 성향의 테러리스트들이
칠레 전역에서 수백여 차례의
폭탄 테러를 자행함으로써
치안공백 상태에까지 치달았다.
결국 아옌데 정권은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군인들을 각료로 등용하는
방식을 택했다.
'민군내각'이 출범한 것이었다.
여기에는 친정부파였던
프라츠 장군은 물론이고
(아직까지는) 헌정파로 여겨졌던
아우구수트 피노체트도
포함되어 있었다.
잠시 논란이 있었지만
인민연합 내부의 정당들은
일단은 아옌데 정부의
민군내각 결정을 수용했다.
하지만 이는 성급한 결단이었다...
파업으로 인해 물품이 부족해지고
경제위기가 밀어닥쳤지만
칠레 인민들은 늘 그랬듯이
노동 계급의 단결과 투쟁을 통하여
파업을 극복하고자 했다.
아옌데 정부와 지지자들 그리고 노동자들은
수송 가능한 물품들을 직접 배송하고
각 지구의 위원회와 연락하여
'인민상회'를 구성하고 직송된 제품들을
원가로 시민들에게 판매하였다.
이런 '직접공급' 형태는
많은 칠레 시민들에게 도움을 줬고
공장 지구에서는 공장 노동자들이
앞장서서 가게와 상인들을 통제하고
스스로 치안을 지켜나갔다.
여기에 더불어, 정부를 지지하는
화물차들도 수송대를 조직했다.
주민들은 가구마다 공급하는 방식도
고안해냈는데 이를 소위
'인민의 장바구니'라 불렀다.
앞에서도 누누히 이야기했던 것이지만
이런 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노동자들이 어용 파업의 실체를 알았고
자신들이 직접 나서는 것만이
인민의 정부를 지킨다고 믿어서였다.
당시의 노동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노동자들이 파업하는 게 아니에요. 운수업자들 소행이지. 노동자들한테 파업할 트럭이라도 있나? 몇 대씩 가진 자들이 파업하지. 언제까지 이 쓰잘데 없는 짓을 계속 할련지..." "이 파업은 분명히 정치공세에요. 우리 인민들만 손해보는 짓이에요. 이렇게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하잖아요. 트럭들만 일에 복귀하면 이렇게 줄 설 일이 없어요."
"노동자들이 거리로 나섰소. 나가서 노동자답게 싸웠소. 일터를 지키고 생산을 계속하면서 맨손으로 물품들을 날랐지.
그래서 식량이 떨어지지 않은 거요. 노동자들이 대통령과 정부에게 뭔가를 보여준 거지."
|
이런 상황을 지켜보던
한 원로 사회주의자는
이렇게 말했다.
후안 카세레스(직접공급위원회 위원장) :
"정부 대처라는 게 운용을 어떻게 해내냐지. 어떤 정부라도 다 마찬가지일거요. 때로는 정부가 줄타기도 해야지. 이건 정부의 잘못은 아니라고 봐요. 내가 1932년부터 마르크스-사회주의자로 있으며 사회주의자로서 싸워 와서 알지. 그로브 동지가 한가지 실수를 했어. 인민들이 무장을 요구했을 때 그걸 거부한 거요. 물론 통제불능의 학살 행위를 꺼려서겠지만 그럼 이젠 어떻게 되겠느냐? 지금도 여전히 제대로 된 전위를 이루기에는 멀었어요. 그 전위가 없어요. 방위위원회가 있다지만, 전위를 담당하고 지역과 부문을 총괄하는 결집체가 빠졌어요. 스페인 내전처럼 되지는 말아야 할텐데... 분파행동 때문이었지. 무정부 조합주의파가 어떻고, 사회주의파가 어떻고 그러다 프랑코의 파시즘에 정권을 내줬지."
|
이 분의 말은 안타깝게도
귀신같이 들어맞고야 말았다.
아옌데 정부와 인민연합
그리고 좌익 세력과 노동자 계급
이들은 충분히 힘이 있었다.
허나 이들은 이끌 혁명적 전위가 부족했다.
조직들이 탄탄했다지만 그 조직들이
하나의 단일 정당 혹은 조직으로
충분히 이어지지는 못했었다.
'인민연합'이라는 선거연합으로 묶였다지만
앞에서의 논쟁에서 볼 수 있듯이
각자의 의견 차이를 좁히지 못했으며
아옌데 정부도 그 힘을 어떻게 쓸 것인가를
두고 갈팡질팡하는 모습을 보였었다.
게다가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쿠데타나 내전이 발생할 시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단이 딱히 없었다.
이런 좌익 내부의 한계도 향후
아옌데 정부의 좌절에 영향을 끼쳤다.
쿠데타 한 달 전이 되자
야당은 공공연하게
정부를 부정했고
결별을 선언하여
군부 개입을 유도했다.
군 장성의 부인들이 참여한
우익들의 시위가 친정부파 군인이었던
프라츠 장군의 저택 앞에서 열렸고
결국 프라츠 장군은
사임을 택하고 말았다.
다른 친정부파 군인들도
각료 자리에서 물러났고
군총사령관에 헌정파로 알려진
아우구스트 피노체트가
임명되기에 이른다.
이제 반정부 세력은 대놓고
아옌데 대통령의 사임을 요구했다.
우익, 기득권층, 미국의 합동 공격으로
3년 동안 지속된 경제 전쟁은
중간계급을 등 돌리게 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럼에도 정부 지지자들과
노동 계급, 좌익 세력은
80만의 군중을 모아
대통령궁으로 행진하며
아옌데 대통령을 옹호했다.
수십만의 군중 앞에서
아옌데 대통령은
민주주의로 정국을 해결하겠다며
국민투표를 제의했고
그 날짜를 9월 11일로 정했다.
군중들은 환호하며 외쳤다.
"아옌데, 아옌데!"
"아옌데, 민중이 지킨다!"
"이제 나가 싸우자!"
"인민, 각성, 무장!"
보기 드문 대형 정치집회였지만
안타깝게도 수십만의 군중은
그저 비무장한 사람들에 불과했다.
물론 군부는 예정된 국민투표를
무사히 치룰 생각이 없었다.
국민투표가 예정된 9월 11일
아우구스트 피노체트가 이끄는
일단의 쿠데타군이 전방위에 걸쳐
헌정파 군인들을 무력화 시키고
아옌데 대통령에게 사임을 요구했다.
아옌데 대통령은 이를 거부했고
마지막까지 대통령궁에 남아서
헌정을 지킬 것을 결의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의지를
라디오를 통해 인민에게 알렸다.
"공군기들이 라디오 포르탈레스와 코포라시온의 송신탑을 폭격하고 있습니다. 이 상황에서 제가 노동자들께 남길 말은 절대 굴복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 역사의 전환점에서 인민들의 충정에 목숨으로 보답하겠습니다. 역사는 우리 것이고 민중이 이뤄낸 것입니다. 칠레 만세! 인민 만세! 노동자 만세!"
|
군부의 최후통첩마저 거부한
아옌데 대통령은 경호원들에게
원한다면 떠날 것을 종용했고
소수의 사람들과 대통령궁에서
쿠데타군의 폭격에 응전했다.
아옌데 대통령은 쿠데타군에 맞서
3시간 넘게 버텨냈지만
결국 오후 2시 15분
자신의 총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피노체트는 그렇게 권력을 잡았다.
권력을 잡은 이들은 자신들이 거사해서
마르크시즘 정권을 타도했다고 자찬하며
곧 전국적인 민중 세력 탄압에 앞장섰다.
일부에서는 결사적으로 항전했지만
역부족이었고 야만적으로 진압당했다.
이렇게 칠레 전투는 아옌데 정부의 몰락으로
그리고 우익 쿠데타의 야만적 행위로 인해
그대로 종결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쿠데타로 인해
민중 세력은 새로운 투쟁에 나서게 됐다.
그렇기에 칠레 전투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고
새로운 투쟁들로 인해
여전히 민중의 역사는
현재 진행형인 것이다.
그리고 흘러나오는
아옌데 대통령의 유고...
"저들이 우리를 굴복시킬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범죄와 무력으로는 결코 사회의 진보를 멈추게 할 수 없습니다. 역사는 우리의 것이며 인민들에 의해 이뤄지는 것입니다. 언젠가는 인민들이 역사의 큰 길을 활짝 열고 모두가 자유롭게 거닐며 더 나은 사회를 건설하는 그 날이 반드시 올 것입니다.
(살바도르 아옌데, 1973년 9월 11일)
|
[칠레전투 2부 끝]
[뱀발]
1. 당시 칠레 군부에 대한 이야기를 집고 넘어가야겠다.
칠레 군부는 분명히 아옌데 정부를 비롯한 좌익 세력에게 대체로 적대적인 자세를 보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헌정을 지키기 위해 군의 중립을 지향한 군인들이 없는 건 아니었다.
[카를로스 프라츠(Carlos Prats, 1915-1974)]
대표적인 인물이 카를로스 프라츠이다.
카를로스 프라츠는 대표적인 헌정파 장군으로 아옌데 정권에 협조적이었고
아옌데 정권 아래에서 칠레 육군사령관을 역임했었다.
아옌데 정권 말기의 민군내각에서 장관직을 맡기도 했었지만
우익 세력과 군부 내 쿠데타 세력의 압력으로 사퇴하고 말았다.
피노체트의 쿠데타 이후에는 아르헨티나로 망명을 갔으나
망명 1년 후인 1974년 '콘도르 작전(남미 독재정부들의 반정부 인사 납치/살해를 목적으로 결탁한 탄압활동)'의
주요 목표물이 되어 자신의 승용차 안에서 폭탄 테러로 아내와 함께 암살당했다.
이후 2014년 칠레 법원은 프라츠 장군의 유가족에게 6억 칠레 페소를 보상한다는 판결을 내렸다.
2. 피노체트의 쿠데타로 인해 아옌데의 꿈은 좌절됐다.
하지만 그는 칠레 민중의 가슴 속에 여전히 살아남아 있다.
2008년 칠레 국영방송이 '위대한 칠레인'을 조사하는 설문조사에서
아옌데 대통령은 가뿐하게 1위를 차지했다.
3. 피노체트의 쿠데타 당시 군인들은 인민연합을 비롯한 좌익 세력에게 광범위하고도 무자비한 탄압을 가했다.
쿠데타 이후 일주일의 기간 동안 무려 3만여 명이 학살당했다.
수도 산티아고의 국립경기장에서는 수백여 명의 사람들이 잡혀가 고문당하고 살해당했다.
[빅토르 하라(Victor Jara, 1932~1973)]
이 때 살해당한 사람들 중에는 칠레의 유명 민중가수 빅토르 하라(Victor Jara)도 있었다.
인민연합의 선거용 노래로 사용되기도 한 <승리하리라(Venceremos)>를 작곡해 부르기도 한 그는
쿠데타를 일으킨 피노체트에게는 눈엣가시 같은 사람이었다.
하라는 국립경기장으로 연행된 뒤에도 노래를 부르면서 저항했는데
이에 군인들은 그의 손가락을 분질러버리고 그를 잔혹하게 살해했다.
4. 피노체트의 쿠데타는 당대에 큰 충격으로 다가왔고
이 사건은 얼마 지나지 않아 프랑스에서 영화화 되기도 했다.
제목은 <산티아고에 비가 내린다(Il Pleut Sur Santiago)>(1975) 로
칠레에서 망명한 감독 헬비오 소토가 감독했다.
영화 제목은 쿠데타 당시 시작을 알리는 방송 코드에서 따온 것이라 한다.
5. 피노체트의 쿠데타는 미국이 조종한 것이었을까?
이전에도 미국은 아옌데 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하여
CIA과 국무성 등 국가기관까지 동원해가면서
몰래 여러가지 뒷공작을 해오고 있었다.
우익, 야당, 파쇼 세력에게 금전적인 후원을 아끼지 않았고,
아옌데 정부에 대한 경제 제재를 시행했으며
부르주아지의 어용 파업에도 뒷돈을 대줬다.
미국은 자신들이 피노체트의 쿠데타를
조종하지는 않았다고 부정했다.
하지만 기밀문서들이 점차 공개되면서
미국이 조종했을 가능성은 점점
높아지고 있다.
(필자는 개인적인 생각으로 미국이 조종했다고 생각한다.)
6.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이 쿠데타 당시 쓰고 있던 안경의 잔해]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이 대통령궁에서 결사항전할 당시 그가 자살했는지 아니면
쿠데타군에 의해서 살해되었는지 논란이 일기도 했었다.
일단 쿠데타군은 아옌데 대통령이 자살했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아옌데 대통령을 자기네들이 죽여놓고는
자살했다면서 거짓말 치는 게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했었다.
실제로 피노체트 정권은 아옌데의 시신을 공개하는 것을 거부했었다.
그리하여 쿠데타 이후 나온 영화 <산티아고에 비가 내린다>에서는
아옌데 대통령이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한 것으로 그렸다.
허나 2011년 칠레 사법부는 아옌데가 자살한 것으로 최종 결론을 내렸다.
7. 아옌데가 죽고 피노체트가 권력을 장악하면서, 칠레의 사회주의 정책은 전면 폐지되었다.
피노체트는 아옌데 정권이 사회주의로 국가의 경제를 망쳐놨다면서 자본주의로 돌아갈 것을 천명했다.
그리고는 미국의 시카고 경제학파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밀턴 프리드먼을 비롯한 시카고 학파들은 자신들의 통화주의 정책을
실시할 수 있음에 기뻐서 최고의 사람들을 피노체트에게 대주었다.
덕분에 피노체트는 경제 부문에 있어서는 꽤나 재미를 봤고
그리하여 지금도 피노체트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있는 지경이다.
우리나라로 따지면 '박정희' 같은 위치에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집권 당시의 공포 정치와 독재로 인하여
칠레의 좌익 세력과 민주운동 세력은 그를 정말로 싫어한다.
8. 피노체트 독재정권은 1973년부터 1990년까지 이어졌다.
그동안 공식적으로 3천여 명이 넘는 사람들이 살해당했다.
하지만 계속된 민주화운동으로 피노체트는 결국 물러났다.
허나 그는 역사의 심판을 피하고자 온갖 정치적 술수를 부렸으며
사임 이후에는 영국으로 달아나 버렸다.
1998년 영국에서 체포되었으나 건강을 이유로 2000년 석방됐고
칠레로 귀국하기는 했으나 가택 연금 됐다.
그럼에도 그는 종국엔 처벌받지 않고 2006년 천수를 누리다 뒈졌다죽었다.
죽는 날까지 피노체트는 변명하며 자신의 죄를 뉘우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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