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노트는 분명 훨씬 더 나은 세상을 훨씬 더 빨리 만들어낼 수 있는 도구였다. 엘, 니아, 멜로 따위가 자신의 능력을 입증해보이겠다고 키라를 잡으려 한 것은 인류에 대한 죄악이다.

작중 라이토는 데스노트를 이용해 악인을 처단하지만 그 악인의 수준이 매우 "하향"되어 다뤄지고 있다고 본다. 기껏해야 나오는 게 연쇄살인마. 현실에서는 연쇄살인도 분명 죄질이 악한 축에 속하지만 현실에서는 그보다 더한 범죄자가 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캐릭터의 밸런스를 위해서인지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멕시코의 마약 카르텔. 이들은 오직 마약을 팔아 엄청난 부를 누리기 위해 살인을 서슴치 않는다. 아프리카의 수많은 독재자들. 이들은 서양에서 지원해주는 원조금을 국가 경제 발전을 위해 사용하기는 커녕 자신들의 독재 유지와 사치스러운 생활을 위해 사용한다. 이들로 인해 피해를 받는 인간의 숫자는 연쇄살인마가 살해하는 인간의 수로는 비빌 수가 없다. 억에 달하는 인구가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이다.

자력구제의 금지 원칙이라는 것이 있다. 개인들이 자신의 힘으로 권리를 찾기 위해 남에게 위해를 가하는 행동은 원칙적으로 금지시키는 개념인데, 그 이유는 누구나 자력구제를 한다고 하면 힘 있는 자들만이 모든 것을 차지할 수 있다는 "확대적용의 논리"를 적용해서 도출되는 것이다. 하지만 데스노트에 대해서는 자력구제의 금지 원칙이 적용될 필요가 없다. 데스노트를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뿐이다. 더구나 그 데스노트를 독점하고 있는 라이토는 비록 판단의 오류가 있을 수 있지만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닌 처단되지 않는 범죄자가 없는 세상을 만듦으로써 선한 의지로 살아가는 인간들이 피해를 보지 않게 함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그런데 단지 현재 법질서를 유린한다고 키라를 잡는다? 키라보다 세상을 더 평화롭게 만들 능력도 없는 인간들이 괜한 부심을 부리고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현실의 사법부도 그 본질은 인간이 인간을 심판하는 것이다. 단지 사회질서를 위해, 많은 학습과 훈련을 한 인간에게 법적 지위와 권한을 보장하고 그의 판단에 대해 무조건적인 신뢰를 준 것에 불과하지 않다. 우리나라에서 보도되는 것만 봐도 어떻게 저런 판결이 나올 수가 있지? 하고 의문을 갖게 하는 것들이 많지 않은가? 작품과는 별개로 지금의 사법질서가 과연 최선인가에 대한 고민이 멈춰서는 안된다.

범죄자를 인지하지만 행정력이 부족해서 또는 무고한 민간인들과 범죄자를 현장에서 구분할 방법이 없어서 범죄자를 잡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위에서 예시를 든 멕시코의 마약 카르텔은 그 규모가 너무 커 멕시코 경찰이 그들을 처단할 능력 자체가 부재하다. 아프리카의 독재자들은 국제적으로 인정받은 국가의 정치인들이기 때문에 함부로 다른 나라가 내정간섭을 할 수가 없다.

하지만 키라는 모든 것을 아주 쉽게 해낼 수 있다. 엘, 멜로, 니아가 저들을 처단할 수 있을까? 키라의 심판이 설령 잘못된 정보로 인해 가끔 틀릴 수는 있어도(그것도 라이토의 천재적인 두뇌를 생각한다면 아주 드문 일이 될 것이다. 그리고 고등학생 때와는 달리 라이토도 나이가 들면서 수많은 사건들을 접해 보면서 함부로 처단할 수 없는 일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고 심판에 더 신중해질 것이다), 수 억명의 고통을 덜어줄 수 있다면 키라와 데스노트의 존재 의미는 충분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