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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창작] 은하영웅전설 :: 마술사의 시대 - 37

gagyeung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3.11.26 19: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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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다나카 요시키의 SF 소설 은하영웅전설의 팬픽입니다.

* 다양한 설정들이 추가로 더 해졌고, 은영전의 수치등의 오류/개인적인 아쉬움에 따른 수치 일부가 변경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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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력 487년 당시, 라인하르트는 황궁 노이에 상수시의 정문에서 북쪽으로 3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림베르크 슈트라세 한구석의 가정집 2층에 세를 들어 살고 있었다. 이 집의 소유자는 쿨리히라는 대령의 미망인으로, 똑같이 미망인인 여동생과 둘이 1층에 살았다. 2층에는 라인하르트와 키르히아이스의 개인 침실, 공동 거실과 욕실이 있었다.

여러모로 은하제국의 우주함대를 호령할 수 있는 우주함대 사령장관 대리이자 제국 원수가 지내기에는 지나치게 소박하고 평범한 곳이라고 할 수 있었다. 물론 라인하르트에게도 공무를 처리하고, 휴식을 청할 수 있는 전용 관사가 제공되었다. 허나, 미망인이라고는 하나 두 사람 모두 예순이 넘어버린 이 하숙집의 편안함에 만족한 라인하르트는 굳이 자신의 거처를 관사로 옮길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기껏해야 사령장관 대리로 등극한 이후로 하숙집으로 대려오기엔 뭣한 인물들을 대하기 위해서 관사를 사용할 뿐이다. 자신이 원수부로 초청한 청년 제독들과의 만남도 중요한 일이 아니라면 하숙집을 통한다. 보다 중요한 일을 처리하기 위해선 하숙집이나, 관사를 사용하기 보단 직접 원수부에 위치한 자신의 단독 집무실로 출두하면 그만이라는 금발의 미청년의 지론 덕분이었다.

우주함대 사령장관 대리이자 제국 원수라는 미묘한 지위에서 지내는 것도 어느샌가 익숙해진 어느 날이었다. 그 날은 8월도 중순으로 접어들 무렵이었으며, 그의 원수부에 소속된 코르넬리우스 루츠 중장이 직접 함대를 지휘하여 카스트로프 동란을 제압하기 위해 출정한지 3일째 되는 날이었다. 그 날 라인하르트에게는 편지 한 통이 도착했다. 제국 정부의 수장이자 국무성의 늙은 매라고 명성과 악명이 모두 높은 리히텐라데 후작이 보낸 것으로, 사령장관 대리와 독대하여 긴밀히 논할 일이 있다는 내용이었다. 국무상서와 우주함대 사령장관 대리의 독대라는 부분을 강조한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밀실 정치에 근접한 사안이라는걸 쉽게 예측할 수 있었다.

리히텐라데 후작은 비서도, 부관도 대동하지 않은채로 만날 것을 제안했다. 즉 이번 만남에서도 자신의 심복이자 친우 키르히아이스가 끼어들 여지는 없을 것이다. 바로 그 점이 라인하르트의 심기를 다소 불편하게 만들었으나, 생각보다 미묘한 것이라 금방 떨쳐냈다.

" 다녀오실 겁니까, 라인하르트 님? "

" 리히텐라데 후작은 상당히 낯을 가리시는 모양이군. 얼마나 낯을 가리시길래 직속 부관마저도 떨어뜨려놓고 국무성으로 직접 출두하라고 하는걸까? 다소 흥미롭군. "

" 저를 비롯한 국무성의 보좌관들에게도 공개할 수 없는 중요한 사안을 논하고자 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

" 저쪽이 뭔갈 단단히 착각했거나, 아니면 그동안 나와 너에게 한번 주는것도 경계한 태도를 수정할 필요가 생긴거겠지. 그게 뭘까, 키르히아이스? "

키르히아이스는 잠시 고민했다. 그러나 키르히아이스의 대답이 아니더라도 이미 라인하르트는 자신이 결론을 내린지 오래였다. 편지를 처음 읽어내려간 그 순간부터 확신에 가까운 결론을 내린 것이다.

" 정치 암투겠지. 그것도 아주 고약한 것이겠고. "

" 리히텐라데 후작이 각하의 힘이 필요하다고 판단할 정도라면 하나뿐인거 같군요. "

" 아 맞아, 너도 알아차린 모양이지 키르히아이스? "

" 황제는 아무래도 살 날이 그렇게 많이 남진 못했을겁니다. 후작의 입장에서는 하루 빨리 제위계승자가 자신에게 유리하게 책봉되기를 바라고 있겠죠. "

라인하르트의 표정은 마치 재밌는 장난을 고안해낸 소년처럼 천진했으며 약간의 흥분감에 지배되는듯까지 했다. 허나, 그런 모습도 잠시. 조각된 듯한 아름다운 미모를 자랑하는 청년의 얼굴은 곧 차갑게 얼어붙었으며 목소리 역시 차디찬 바람처럼 날카로움을 더 했다.

" 골덴바움.... 그 천번 저주받아 마땅할 혈통의 후손을 위해서 잠시라도 노력하는건 사양이지만..... 이 역시 누님과 우리의 목적을 위해서야. 날 도와주겠어, 키르히아이스? "

붉은 머리의 키다리 청년은 라인하르트의 모습을 바라보며 10년이 흐른 세월의 맹세의 순간을 다시금 되새겼다. 그 날, 은하제국 유년학교에 세워진 은하제국의 시조 루돌프 폰 골덴바움의 동상 앞에서 그들은 감히 은하제국을 넘어 은하 그 전체를 함께 손에 넣기로 약속했었다. 약속은 곧 맹세로 변모했으며, 수많은 역경을 해쳐나가는 동력이 되었다. 이 사람은 대체 무슨 일을 할려는 것인가? 라는 의문은 곧 이 사람은 이제 어떤 성공을 거두게 될 것인가? 라는 기대로 변했다. 키르히아이스에게 있어서 지난 10년은 그런 세월이었다.

그런 붉은 머리 청년에게 대답은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 물론입니다, 라인하르트님. "

하늘을 호령하는 독수리도 한쌍의 날개가 펼쳐져야지만 그 하늘을 날 수 있다. 라인하르트와 키르히아이스가 마치 그런 존재라고 키르히아이스는 스스로 생각했다. 어찌 두 날개가 다른 생각을 하고 반목해서야 드높은 하늘로 날아오를 수 있을까.

자신은 라인하르트의 야망을 이루는 것을 지켜보는 것으로 족하다. 그 이상의 행운을 지금 당장 바라지는 않는다. 그의 야망이 행복하던 그 시절로 돌아갈 첫 단추라면....

" 그럼 슬슬 준비해야겠군. "

잠시 과거의 감정과 기억에 빠져있던 키르히아이스의 정신을 라인하르트의 목소리가 일깨워주었다. 어느샌가 자리에서 일어난 라인하르트는 생기와 야망으로 반짝이는 두 눈동자로 키르히아이스를 바라보며 자신 있게 웃어보이고 있었다.

" 노쇠했다고 한들, 매는 매라지. 그런 매의 악수요청을 받았으니 이 악수를 얼마나 비싸게 팔아치워야 할지 준비해야겠어. "

루돌프가 해낸 일이라면 자신이라고 못할게 없다고 외치던 금발의 소년은 이제 정말로 자신의 맹세와 야망을 손수 이뤄낼수도 있는 자리에 청년의 나이가 되어 오르게 되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키르히아이스에게 있어선 그 어떤 강대한 철창과 억압도 라인하르트 폰 로엔그람이라는 자를 막아세울 수 없어보였다. 하지만 점점 과거의 소년이 흐릿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불행히도 당시의 키르히아이스는 눈치채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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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무상서와 라인하르트가 만나기로 한 당일, 평소보다 이른 시간대에 우주함대 사령본부를 떠난 라인하르트는 키르히아이스가 모는 랜드카에 타고 리히텐라데 후작의 저택으로 들어섰다. 사소한 변동이 있던 덕분이었다. 본래 제국 국무성 건물내 비밀공간에서 만남을 가지기로 했으나, 국무상서가 돌연 장소를 바꾸어 그의 저택으로 직접 방문하게 된 것이었다. 도착하자마자 곧장 스스로 차 문을 열고 내린 라인하르트는 운전석의 차창으로 다가섰다.

" 아무래도 빨리 끝날거 같은 느낌은 들지 않아. 미안하지만 좀 기다리고 있어. "

" 전 괜찮으니 신경쓰지 마시고 천천히 다녀오시죠. "

고개를 끄덕이고 몸을 곧장 저택의 현관으로 돌린 라인하르트는 표정과 자세를 다잡고 누구 하나 흉내 낼 수 없는 유려한 발걸음으로 현관을 향했다. 형식적인 확인만을 거친 그는 저택 안으로 안내 받았다. 저택의 안은 샹들리에와 여러 고급 조명들의 빛이 밝게 비추고 있었다. 그가 몇번 기회가 되어 방문했던 귀족 저택과 크게 다를 것은 없었다. 다른 귀족들에 비해서 아주 약간 덜 화려할뿐. 후작의 거처도 만만치 않게 사치스러웠다.

천장의 샹들리에부터 저택 곳곳을 장식하는 귀중품에 이르기까지 값이 나가지 않는 것이 없었다. 제국의 앞길을 걱정한다고 자부하는 만큼이나, 그 이상으로 자신의 지위와 권력, 그리고 재산을 사랑하는 리히텐라데 후작의 모습을 쉬이 지켜볼 수 있었다. 후작의 이익과 명분 그리고 이상이 아주 멋들여지게 조화된 귀족의 전형적인 모습이라고 라인하르트는 스스로 생각했다. 이익과 명분, 이상이라는 서로 쉽게 융합되기 어려워보이는 세 요소들이 격렬한 화학반응을 일으켜 결과물을 만들어낸다면 지금의 리히텐라데 후작과도 같은 모습을 보여주지 않겠는가.

허나, 리히텐라데가 라인하르트의 강대한 무력을 필요로 하듯. 지금은 라인하르트도 리히텐라데의 궁정내 네트워크과 영향력 그리고 국정에 관한 권한을 필요로 했다. 상대방을 최대한 활용함으로서 지위와 권력을 확립해야하는 것은 지금의 리히텐라데에게만 해당되는 말은 아니었다. 아직 라인하르트는 스스로 완전히 자각하지는 못했으나, 리히텐라데 만큼이나 이익과 명분 그리고 이상의 절묘한 조화로서 행동하는 것은 금발의 미청년에게도 별반 다를 것 없었다. 그가 이를 스스로 자각하는 것은 보다 머나먼 세월의 일이다.

저택의 주인이 만남을 허하기 전까지 잠시 시간을 죽이던 그는 곧 집사장의 안내를 받아서 저택의 가장 구석진 방에 도달했다. 미리 사전에 준비해둔 방에서 리히텐라데는 이미 자리를 잡고 라인하르트를 기다리고 있었다. 형식적이면서 가벼운 인삿말이 서로 오가고 곧 라인하르트도 리히텐라데의 맞은 편에 착석했다. 방 안의 조명이 기이하고 불길한 인상으로 초로의 노인과 한창의 청년을 비추었다.

" 갑작스러운 만남이거니와, 길게 끌어 좋을 것이 없음으로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겠소. "

국무상서는 약간의 망설임을 거치고 먼저 입을 열었다. 라인하르트는 그저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 했다.

" 정식으로 사령장관이 되어주셔야겠소. "

" 사령장관이라. 허나, 국무상서께선 제가 장관 대리에 막 올랐을 적에 정식 사령장관 임명에 다소 부정적인 입장이 아니셨는지요? "

라인하르트는 점짓 놀라는 척을 해보였다. 허나, 이는 어디까지나 연기의 영역이었으며 진심으로 흘러나오는 것은 아니었다. 리히텐라데 역시 지금 라인하르트의 행동과 말 하나하나에 큰 의미를 두진 않았다.

" 꽤 오래 심사숙고해봤으나, 경이 가장 적합한 자라는게 군무상서를 비롯한 내각 각료들과 통수본부총장의 뜻이오. 아직 내정 사안이긴 하나, 곧 황제 폐하의 허가가 떨어질 것이오. "

이 또한 제국을 위한 일이라고 리히텐라데는 스스로 다독였다. 비록 눈 앞에 있는 청년의 야망이 비단 우주함대 사령장관에서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건 본능에 가까운 감각으로 느끼고 있었으나,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라인하르트는 리히텐라데의 말을 그저 듣고만 있었으나, 리히텐라데의 말 하나하나에 집중하고 있었다. 국새와 조칙을 관장하며 강대한 세력을 지닌 외척들이 제국을 사유화하도록 지켜보지 않을 늙은 매는 아직 진짜 본론을 시작조차 안했다. 라인하르트에게 건내진 정식 사령장관의 지위는 그 본론을 위한 미끼일 뿐이었다.

사령장관의 지위를 하사 받을 예정을 확실시 한 후 라인하르트는 형식뿐인 감사를 올렸다. 이후 리히텐라데는 충분한 간격을 두고서 진정으로 눈 앞의 청년과 논할 본론으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 황제 폐하께선 아직 후계에 대해서 입장을 결정하지 않으셨으나, 적손이신 에르빈 요제프 전하께서 제위를 이어받으실 것은 분명하오. 아니 그 외의 선택지는 상상조차 할 수 없소. 허나 나에겐 그분을 두 강대한 귀족 수괴로부터 지켜낼 힘이 모자라구려. "

황실을 지킬 경비견으로 임명하기엔 제어하기 쉽다고 할 순 없다. 오히려 위험한 인물이다. 하지만 강하다는 점에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이는 숙고 끝에, 그와 손을 잡기로 처음 결정한 순간으로부터 시간이 약간 흐른 지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이제 눈 앞의 인물을 자신이 얼마나 효과적으로 다룰 수 있느냐가 자신과 제국의 미래를 결정지을 것이다.

" 경께서 제국의 군인이자, 황제 폐하께서 소유하신 우주함대의 대리인으로서 황실의 유일무이하신 계승자이신 황손 전하를 지키는데 있어서 힘을 보태어주시오. 나 역시 그대가 필요한 것이 있다면 아낌 없이 힘을 보탤 수 있도록 하겠소. "

" 허나, 아직 폐하께서는 제위를 계승할 분을 정하지 못한 것으로 압니다. 신하된 도리로서 폐하의 의중을 함부로 해석하는게 옳은 일 일지요? "

라인하르트는 의식의 물밑에서 흐르는 모멸감이 혹시라 들어나지 않기 위해서 적지 않은 정신력을 소모해야했다. 골덴바움의 은하제국과 그 체제에 충성하는 충신따위 그에게는 알바가 아니었다. 그런 시대에 뒤쳐진 칭호따위 눈 앞의 늙은 권신이나 실컷 누릴 허상이었다. 허나, 지금은 눈 앞의 권신이 바라는대로 연기할 필요는 있었다. 양자가 필요로 하는 동맹을 한순간의 감정으로 깨어서야 온 우주를 손에 넣겠다는 친우와의 약속을 지킬 수 있겠는가. 지금은 저 늙은 권신이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순간을 잠시동안이라도 누릴 수 있도록 해야한다.

물론 한순간의 부주의로 혐오를 들어내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은 리히텐라데쪽도 마찬가지였다. 폐하의 은혜를 입고도 겸손할 줄 모르는 애송이가 이젠 충신의 모습을 연기하는 모습을 보려니 보통 역겨운 것이 아니었다. 저런 자의 손이라도 잡아야 강대한 반대자들로부터 황실을 지켜나갈 수 있다는 현실이 애석할 따름이었다. 브라운슈바이크와 리텐하임과 같은 위험분자들이 급선무일뿐 그들이 정리된다면 눈 앞의 라인하르트와도 같은 고위험분자도 함께 정리해야할 것이다. 그 순간이 다가오기 전까진 국무상서로서 저 자의 천재적인 재능을 이용하면 그만이다. 그를 위해선 저 위험한 청년에게 잠시동안 은하제국의 가장 강한 무력을 맡겨야한다.

두 사람 모두 표정으로 들어나지 않았으나, 그 속내는 어둡기 그지 없었다. 속내뿐만이 아니라, 그동안 서로를 어찌 생각했는지를 돌이켜 본다면 그들이 이렇게 마주앉아 미래의 구상을 위하여 이야기를 주고 받는 것 자체가 흥미로운 일이었다. 리히텐라데는 국무상서로서 지내오는 기간내내 라인하르트를 의심하고 황제의 지나친 편애를 우려했으며, 라인하르트는 제국 정부를 장악하고도 관습과 선례에 의존하는 리히텐라데를 비꼬고 무시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브라운슈바이크와 리텐하임이 이끄는 강대한 문벌귀족 세력이라는 강대한 적이 그들의 단결을 가능하게 했다. 그 사실 앞에서는 기나긴 과거도, 찰나의 감정도 동맹의 장애물이 될 순 없다.

" 물론 신하된 도리로서 감히 폐하의 뜻을 예측하고자 하는 것은 비할 데 없는 불경이긴 하오. 허나.... "

리히텐라데는 곧 저택의 집사를 시켜 적포도주 두 잔을 가져오라 지시했다. 두 사람 앞에 은쟁반과 함께 내어진 와인잔을 리히텐라데가 들어올렸다. 기이하고 불길한 조명빛을 받은 적포도주는 와인잔 안에서 영롱한 붉은 빛을 과시했다.

" 국가의 내외적으로 불안과 위기가 닥치고 있소. 신하된 도리로서 이를 그저 방관하는 것 역시 비할 데 없는 불경이오. 제국의 신하로서 필요하다면 불경을 범해서라도 이에 맞서는 것 또한 필요한 것이오. 영민하신 경이 이를 모를린 없을테지. "

리히텐라데의 목소리에는 미묘하게 힘이 실렸다. 라인하르트는 굳게 침묵하다가 곧 호응하듯 적포도주를 들어올렸다. 순간적인 힘이 지나쳤던 탓인지 잔 속에 적포도주는 출렁거리다 못해 몇방울이 잔 바깥으로 약간 흘러내렸다.

곧 잔이 가볍게 맞부딪혔다. 경쾌하고 청명한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것도 없이 적포도주를 입 안으로 털어넣었으며 곧 각자 잔을 내려놓았다.

"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저 역시 충신된 도리로서 앞으로 사령장관으로서 제 몫을 다해야겠습니다. 다만, 그 전에 요청하고자 하는 것이 있습니다. "

" 요청하고 싶은거라. 그게 무엇인가? "

라인하르트는 자신이 원하는 바를 거침 없이 리히텐라데에게 전했다. 제국 재상 대리이자 국무상서 이전부터 꽤 오래 제국의 관료로 몸 담은 그에게도 있어서 꽤나 의아한 종류의 요구였다. 리히텐라데는 다소 의아한 얼굴과 함께 커다란 헛바람소리를 내며 그저 라인하르트를 바라보았으며 곧 근본적인 물음을 전했다. 대체 어째서?

" 현재의 우주함대에는 능력 있는 중장급 이상의 지휘관이 상당히 부족하다고 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뿐입니다. 유능한 지휘관을 놓치고 싶지 않다는 마음과 능력이 있는 자가 아깝게 진흙 속으로 버려지는걸 영 보고 싶지가 않아서 말입니다. "

" 허나, 그는 패장이요. 그대도 알다시피 제국내에서 역적들에게 패한 자를 다시 등용한 경우는 없소. "

" 패했다고 내치면 그 누가 사령관으로서, 지휘관으로서 남을 수 있겠습니까. 한번의 패배는 한번의 승리로 만회하면 되는 법. 그마저도 부족하다면 두번의 승리로 되갚으면 그만입니다. 그 티아매트 회전에서 애쉬비에게 패했다던 슈타이어마르크 제독과 치텐 원수도 이후 제국 함대를 다시 이끌 기회를 받았다지요. "

" 크흠.... "

건방지기만 한줄 알았더니 꽤나 달변가였다. 약한 한숨을 내쉰 직후 리히텐라데는 생각해보겠다는 말만을 돌려주었다. 지금 곧장 결정하기에는 이것저것 고려할게 적지 않았다. 라인하르트도 확답을 바란건 딱히 아니었기에 더이상 고집을 부리진 않았다. 그의 말대로 동맹과의 전투에서라면 모를까, 제국내에서 벌어진 반란에서 패하거나 큰 피해를 입은 지휘관이 다시 군문으로 돌아온 경우는 없었으므로.

이후 그들의 만남은 끝을 맺었다. 라인하르트는 방에서 곧장 돌아서 나갔으며, 머뭇거림도 없이 키르히아이스가 기다리고 있을 주차장으로 향했다. 필요에 의한 방문이었던 만큼 그 목적이 완수된 이상 그가 이 저택에 머무를 필요는 더이상 없었다. 그는 어떠한 미련과 망설임도 없이 곧장 랜드카를 타고 림베르크 슈트라세의 하숙집으로 돌아갔다.

이렇게 암묵적인 약속에 따라서 라인하르트 폰 로엔그람 백작은 이후 황제에게 직접 청한 리히텐라데에 의하여 정식으로 제국 우주함대 사령장관의 자리에 올랐다. 리히텐라데의 정부 세력이 지닌 치명적인 약점이던 실전 무력을 담당하는 군부의 지지가 미약하던 문제가 이렇게 단번에 해소된 것이다. 또한, 로엔그람 백작과 리히텐라데 후작이 암묵적인 연합 전선을 맺었다는 소식은 브라운슈바이크 공작과 리텐하임 후작의 심복들에 의해서 두 귀족수뇌들에게도 곧장 전달되었다. 그들은 제일 먼저 경악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들을 비웃었다. 서로를 멸시하고 이용할 생각뿐인 사자와 매의 동맹이 강고해봤자 얼마나 강고하겠는가. 결국 문벌 귀족들이 가진 강대한 권세 앞에선 바람 앞의 등불과도 같은 존재일 것이다.

귀족들이 리히텐라데와 라인하르트의 동맹을 비웃는 사이. 리히텐라데가 사령장관 임명건과 동시에 황제에게 청한 사안 역시 칙령이라는 이름으로 이뤄졌다. 이 인사에 있어서 리히텐라데 후작은 여전히 의구심을 품긴 했으나 곧 생각을 고쳐먹었다. 군부에서 꼭 라인하르트에게만 의존할 필요는 없다. 어찌되었건 칙령은 리히텐라데의 청원으로 내려진 것이니 라인하르트 원수부외 군부 장성에게도 은혜를 배풀어두는것도 나쁘지 않다고 여긴 것이다.

달력이 8월을 완전히 지나 9월로 향하는 사이, 흉보로 뒤흔들린 은하제국에도 점차 선선한 변화의 바람이 불어닥쳤다. 그리고 그 바람이 제국 역사상 최악의 혼란으로 이어질 전조의 시작이라는것을 시위 예견할 수 있었던건 그 누구도 없었다. 라인하르트 폰 로엔그람도, 클라우스 폰 리히텐라데도, 브라운슈바이크와 리텐하임마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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