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의 가장 위험한 연구주제 랭킹'이라고. 혹시 들어봤어요?"
남자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2위를 차지한 게 인공지능이었고, 1위가 '꿈'이었어요. 매일 잘 때 꾸는 꿈."
남자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내 말을 듣기만 했다.
"학자들 사이에서 '꿈의 수호자'라고 부르는 존재가 하나 있습니다. 내가 그쪽 고용하려는 이유도 이것 때문이구요."
이번에 남자는 콧방귀를 뀌었다. 난 가까스로 방을 뛰쳐나가고 싶은 충동을 참았다.
참자. 저학력자 근육덩어리와 대화하는 게 쉬울 줄 알았던 건 아니잖아.
"5공 때부터 꿈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거의 다 끝이 좋지 못했어요. 미치거나, 죽거나, 미쳐서 죽거나."
"어디 한 번 계속 해봐."
남자는 어린아이가 그린 그림을 보는 표정으로 내가 내민 서류를 넘겨보고 있었다. 내 연구 내용이 담긴 종이를 집는 손끝에서는 전혀 존중이 느껴지지 않았다.
"꿈의 수호자가 정확히 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하지만 꿈을 연구하던 학자들이 자살하거나, 사고를 맞이하는 일은 너무 흔하죠. 그거 말고 이걸 봐요."
이 멍청한 새끼. 네이처나 셀이 뭔지 알기나 할까?
남자가 내 연구논문을 지분거리는 것을 더 이상 볼 수 없어진 난 집어던지듯이 다른 종이뭉치를 건넸다. 남자는 펑하는 바람소리와 함께 테이블에 내려앉은 종이뭉치를 눈 하나 깜짝 않고 첫 페이지부터 넘겨보기 시작했다.
"나렌드라 아바르하잠신. 공유몽을 연구하던 저명한 뇌과학자에요. 공유몽이 뭐냐면, 서로 다른 사람들이 같은 꿈을 꾸는..."
"뭔지 알아."
싸가지 없는 새끼.
"대단한 학자였는데, 97년에 자살했어요."
"그렇군."
"바로 다음날 자기 연구결과를 가지고 기자회견을 갖기로 되어있었는데, 그런데도 자살했죠. 어느 언론사도 죽었다는 사실을 보도하지 않았어요."
남자는 그게 뭐 어쨌냐는 눈으로 날 쳐다봤다. 난 노골적으로 한숨을 쉬는 대신 인내심을 발휘했다.
"다음 장으로 넘겨봐요."
지금이라도 그냥 나갈까.
"엘렌
R. 가르니에. 뇌과학자로 약학, 생리학 분야에서 전설적인 업적을 세우신 분입니다. 이분의 마지막 연구가 꿈을 잊지 않도록
일시적으로 기억력을 보강해주는 약에 관한 것이었는데, 2003년에 본인이 만든 약 프로토타입을 복용했다가 뉴런의 절반이 불타서
죽었어요."
"허."
역시 그 어떤 존경심이나 존중도 돌아오지 않았다. 덕분에 남자의 코웃음이 점점 더 참기 힘들어지고 있었다.
"이 바닥에서 가르니에라고 하면 모르는 사람 없어요. 자기가 만든 약이 독약인 줄도 모를 정도로 멍청한 분은 절대 아니에요. 그리고 다음 장에는 슈라이버가 있어요. 일레나 슈라이버."
"이 사람도 대단한 학자였나?"
"그렇죠."
"꿈을 연구했고?"
"맞아요."
"그리고 죽었고?"
최근에.
난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이 사람은 어떻게 죽었지?"
"다른 사람의 꿈을 실시간으로 보게 해주는 장치를 개발하던 사람이었는데 마찬가지로 자살했어요."
"다른 사람의 꿈을 본다고?"
"네."
"그 기계, 작동했나?"
"공식적으로는 안했죠."
남자는 한 번 더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 난 조용히 맹세했다. 한 번만 더 이 무식한 용병새끼가 내가 열정을 바친 분야를 비웃으면 경호원이고 나발이고 다 집어치우고 이 한심한 사무실을 나가겠다고.
"이 뒤에 명단이 잔뜩 있는데, 다 죽은 사람들인가? 자살?"
"한 명 빼고 전부 자살했어요. 자살할 이유가 없는 사람들이 태반이죠. 가까운 시일 내에 누구를 만나기로 했다든가, 가족 친지에게 줄 선물을 샀다든가. 심지어 음식 배달 주문해놓고 그 사이에 죽은 사람도 있어요."
남자는 알만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짧게 얘기할게요."
내 인내심도 한계니까.
"꿈을 연구하는 사람들을 잡아죽이는 세력이 있습니다. 이유가 뭔지는 모르지만, 인간이 꿈에 관해서 일정 수준 이상 아는 걸 원치 않는 거죠. 그놈들을 학자들 사이에서 '꿈의 수호자'라고 불러요."
"당신도 꿈을 연구하나?"
"맞아요. 그리고 내 입으로 이런 말 하기도 그렇지만, 난 이 분야에서 상당한 권위자입니다."
왜냐면 나보다 더 많이 아는 사람들은 다 죽었거나, 죽기 싫어서 연구를 멈추고 은퇴했거든요. 하지만 너한테 이런 말까지 해줄 필요는 없겠죠, 오만한 새끼야.
"꿈의 수호자들이 날 주목하기 시작할 차례라는 겁니다. 날 죽지 않게 지켜줬으면 해요."
"언제까지?"
"돈 낼 수 있는 한 계속."
"좋아."
가격
협상이 시작되었다. 난 조건을 명확하게 밝혔다. 실력이 확실할 것, 입주와 24시간 보호가 가능할 것, 내 연구에 관심 가지지 말
것, 나를 보호하기 위해 죽을 수 있을 것. 남자는 해당 조건에 해당하는 경호원은 단 한 명이라고 밝혔다.
"뭐든 좋습니다. 두 명이나 고용할 돈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그래. 그럼 조금만 기다려. 짐 싸라고 해둘게."
계약서에 도장을 찍고, 송금을 마치자 그는 내게 경호원의 인적사항이 담긴 파일을 건네주었다. 프로필 사진이 붙어있어야 할 곳이 텅 비어있다는 것만 제외하면 파일은 제법 상세한 정보를 담고 있었다.
이름은 서해윤. 나이도 젊고, 체격도 무지막지하게 건장했다. 유명 대학의 체육학과를 졸업하고 직업군인으로 복무하다가 경호원이 된 인물이었다.
제법
만족스러운 내 경호원의 신상명세서를 읽고나니 남자는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여태까지 봤던 코웃음과 궤를 같이하는 야비한
얼굴이었다. 투명한 문으로 연결된 다른 방에서 누군가와 짧은 대화를 마친 뒤 남자는 다시 내게 이죽거렸다.
"그 꿈 수호자인지 꿈 방위대인지가 있고 없고는 중요하지 않아. 어쨌든 우린 계약을 맺은 거야. 나중에 딴소리 하지 말라고. 경호원이 일을 안하고 쉬었다거나, 애초에 고용할 필요가 없었느니 뭐니, 그런 거 다 사절이야."
그럼 그렇지. 내 얘기를 전혀 믿지 않고 있었구나. 그냥 호구 잡았다고 좋아하고 있는 거야.
"경호원이나 어서 소개해줘요. 좀 있으면 위험한 곳에 가야하니까."
"조금만 기다려."
그리고 몇 분이 흘렀다. 남자가 경호원들이 잔뜩 대기하고 있는 방으로 데려가주길 기다리다가 깨달은 것은 그에게 어느새 두꺼운 캐리어 손잡이가 들려있다는 것이었다.
"안 가요?"
"내가 묻고 싶은 말인데."
"아니, 경호원을 소개해줘야 가죠."
"여기 있잖아."
뭐?
"장난하는 거죠?"
남자는 아무 표정 없는 얼굴로 날 빤히 쳐다봤다.
그래, 장난이 아니라 진지하구나.
"허... 다른 경호원 없어요?"
"지금 파견 가능한 건 나뿐이야."
내가 이런 영세업체를, 그것도 한 사람이 고객상담, 인력조달, 실제 업무를 모두 담당해야 하는 삼류 업체를 고용하려 했다니. 경호업체를 추천해준 연구동료를 찾아가 뺨이라도 후려치고 싶었다.
"가야할 곳 있다고 하지 않았나?"
있다, 이 새끼야.
"따라와요."
시간이 없으니 이 망할 경호원 문제는 나중에 해결해야 한다. 지금은 남자의 말마따나 가야할 곳이 있다.
=+=+=
"180만원 나왔습니다. 185만원 있으십니까? 185만원?"
제발 아무도 입찰하지 않게 해달라는 내 기도는 먹혔고, 기계는 180만원에 내 소유가 되었다.
"'면형시냅스작용관측기'는 180만원에 낙찰되었습니다."
경매장에서 시간을 보내는 내내, 경호원으로 고용된 남자는 지루한 표정이었다.
"다 끝났어요. 기계만 차에 싣고 가면 돼요."
대금을
지불하러 경매장 뒷편으로 이동할 때와 헐값 중의 헐값에 낙찰받은 기계를 트렁크로 옮길 때 모두 남자는 침묵했다. 딱히 주변을
경계하려는 노력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그저 이 모든 지루한 일들이 어서 끝났으면 하는 얼굴로 날 게으르게 쫓아다니기만 했다.
경호원이랍시고 날 따라온 근육덩어리와 얼굴을 붉힐 일을 만들지 않기 위해 난 최선을 다했다. 내 노력은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서서히 닳기 시작했다.
"뭐가 문제입니까?"
"뭐가?"
"돈도 지불했고, 계약도 체결됐습니다. 당신 입으로 그랬잖아요. 그러면 최소한 진지한 태도로 업무에 임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당신, 경호원이라구요. 그런 식으로 일해서 누가 당신한테 목숨을 맡깁니까?"
"아직 살아있잖아. 그쪽이야말로 뭐가 문제지?"
하, 말을 말자.
고용한지 몇 시간 되지 않았지만, 그동안 이 못마땅한 경호원이 제공한 서비스는 딱 두 가지였다. 경호원보다는 구경꾼 같은 태도로 내 뒤를 마지못해 따라다닌 것과 집으로 가는 동안 차를 운전한 것.
이럴 거면 내가 대리운전 기사를 고용했지, 대리기사 200번 고용할 돈으로 경호원을 부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는 꼬락서니를 보니 돈을 돌려달래도 당연히 돌려주진 않을 것 같고, 별 수 없다. 이번 달만 참자.
지하주차장에 도착해 아파트 엘리베이터를 탈 때서야 어색하게 끊겼던 대화가 이어졌다.
"근데 이건 무슨 기계지?"
"알 거 없습니다."
"어디서 본 것 같은데."
꼴에 기억력은 좋네.
지금 내 품에 고이 안겨서 집으로 가는 중인 기계는 일레나 슈라이버 교수의 작품이었다. 이른바 '꿈 렌즈', 더 정확히는 '면형시냅스작용관측기'. 자고 있는 사람의 꿈을 들여다보게 해주는 장치다.
"어디에 쓰는 물건이길래 그렇게 아득바득 낙찰받으려고 했던 건데?"
"신경 끄시죠."
여태 무관심으로 일관하던 남자는 호기심이 도진 것인지 짜증나고도 집요하게 질문을 툭툭 던졌다. '내 연구에 관심 가지지 말 것'이라는 계약 조건을 상기시키고서야 남자는 입을 다물었다.
"여기가 당신이 지낼 곳이에요."
"두번째로 큰 방이라더니. 정말로 작진 않군."
남자는
제법 흡족한 듯 콧노래를 부르며 캐리어에서 짐을 풀기 시작했다. 그 속 터지는 모습을 계속 보고 있을 생각이 없던 난 연구실로
향했다. 꿈 렌즈를 책상에 고이 올려놓고 서랍을 뒤진 끝에 사용법이 적힌 낡은 종이까지 찾아내고 나니 어느새 남자가 연구실 문
앞에 서있었다.
"나가요."
"들어가지도 않았어."
문을 닫으려하니 남자가 솥뚜껑만한 손으로 손잡이를 낚아챘다.
"여긴 무슨... 실험실 같은 곳인가?"
아. 그냥 위약금 주고 지금 당장 내쫓을까.
"제일 넓은 방인 것 같은데 이걸 실험실로 쓰고 있네."
"구경 다 했으면 손 좀 치워요."
"경호의 효율성을 위해서 집안 구조를 파악해야 돼."
이제 와서 일을 하시겠다고?
"여기가 실험실, 제일 큰 방이고, 내가 있는 방이 두번째로 큰 방이지. 대충 보니까 화장실 두 개에, 다른 침실 하나는 책으로 꽉 차있고, 나머지가 세탁실이랑 창고, 베란다던데, 당신은 어디서 자?"
업무 핑계를 대니 무시할 수도 없어 그를 드레스룸으로 안내했다. 남자가 지낼 방 바로 옆이었다. 급하게 주문한 간이 침대에 담요와 베개가 비좁은 드레스룸을 반쯤 채운 꼴을 보고 남자는 다시 그 짜증나는 코웃음을 쳤다.
"나름 괜찮은 집인데 잘 데가 여기뿐이야?"
"그쪽이 지낼 방이 원래 내 침실이었어요."
그리고 놀랍게도 남자는 입을 다물었다.
"여기가 집에서 가장 안쪽에 있는 공간이라 안전하기도 하고, 경호원을 들여야하는데 창고 같은 곳에서 자라고 할 순 없으니, 내가 여기서 자야죠."
내가 고용할 경호원이라는 게 이런 커다랗기만 한 머저리일 줄 알았다면 절대 내 침실을 내주지 않았을 거다.
"집안 어디든 돌아다녀도 돼요. 단, 내 연구실에는 절대 들어오지 마요."
한동안 남자는 내 말을 충실히 지켰다. 내가 꿈 렌즈를 손보고 그것을 여러 번 가동시키는 동안 남자는 단 한 번도 연구실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집안을 돌아다니고, TV를 보며 시간을 보내고, 내 서재에서 책을 읽기도 했다. 끼니를 때울 유일한 수단인 배달음식이 도착하면
나가서 받는 것도 그의 일이었고, 음식 포장지 덕분에 잔뜩 쌓인 쓰레기를 분리수거 날짜에 맞춰 밖에 버리고 오는 것도 그의 일이
되었다.
나는 차츰, 내 경호원의 수염 자란 거뭇한 얼굴을 아침에 보거나, 그가 편한 반바지 차림으로 거실 소파에
드러누워 TV를 보는 꼴을 목격하고도 놀라지 않게 되었다. 경호원이 아니라 집안에 들여놓은 밥버러지처럼 구는 행실에 속으로 짜증을
내는 일도 사라져갔다.
"밥 먹어. 몇 시간째 안에만 틀어박혀 있잖아."
"이제 그만 자. 지금이 몇 시인지는 알아?"
"쓰레기 버리고 올테니까 무슨 일 있으면 바로 호출벨 눌러."
연구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무뚝뚝한 말투 덕에 그의 존재는 어느 순간부터 너무나 익숙했다.
그렇게 몇 주가 흘렀다.
남자는 결국 내 연구실에 들어오고야 말았다.
"이건 뭐지?"
뻔뻔하게도 그는 내 감정 잔뜩 담긴 눈초리에도 불구하고 밖으로 나가기는커녕, 재미있는 것을 찾은 어린아이처럼 연구실 책상에 올려놓은 물건을 만지작거렸다.
"내려놔요."
"뭔데?"
"당신 몸값보다 비싼 거라구요. 내려놔요."
"내 몸값?"
남자는 한 쪽 눈썹을 추켜올리더니 씩 웃었다.
"당신 목숨보다 비싸단 말이지. 그럼 내려놔야지, 뭐."
뭔 개소리야. 네 통장에 송금한 이번 달 고용료보다 비싸다는 거지.
"근데, 진짜 이거 뭐야? 되게 특이하게 생겼는데."
"......"
"이것저것 달린 걸 보니까 마사지기인가?"
결국 난 그 뚝심에 질려서 남자의 손에 들려있던 장치가 무엇인지 설명하고야 말았다. 모든 것이 바뀌는 순간이었다.
"공유몽 중계기에요."
"공유몽? 여러 사람이 같이 꾸는 꿈 말하는 거잖아. 그걸 중계한다고?"
"여러 사람들의 뇌를 중계해서 하나의 꿈을 꾸게 해주는 물건이죠. 이제 나가요."
"진짜 그게 가능해?"
"가능이고 나발이고 나가라니까!"
겨우 남자를 내보냈지만, 이후 그는 간혹 연구실에 들어와 공유몽 중계기를 비롯한 장치들을 지긋이 바라보곤 했다. 그 꼴을 발견하고 연구실에서 내쫓으려 하면 남자는 밥그릇 뺏긴 개 꼴로 날 보곤 했다.
"심심하다고."
"여기 놀러왔어요? 당신 돈 받고 일하는 중이잖아요."
"의뢰인이 집 안에만 박혀있는데 무슨 일을 하라고. 위험할 일이 전혀 없잖아."
그래. 네가 월급 루팡을 한다고 고백을 하다못해 악다구니를 쓰는구나.
괘씸해진
난 남자를 보다 쓸모있는 일에 투입하기로 했다. 마침 그가 가장 크게 관심을 보이는 물건인 공유몽 중계기가 제대로 작동하는지
알아야 할 필요도 있었다. 꿈 렌즈와 마찬가지로 경매에서 헐값에 산 물건인 공유몽 중계기는 보존 상태는 제법 양호하지만, 구매한
이후로 한 번도 작동시킨 적이 없었다. 꿈 렌즈와 달리 작동이력이 있는 물건이기에 안전에 대한 걱정은 없었다.
"이리 와요."
기대를 품고 씨익 올라가는 입꼬리가 얄미우면서도 퍽 귀여웠다.
그렇게 궁금했나.
"써보게 해줄 테니까 여기 앉아요."
"나 혼자 써도 다른 사람이랑 꿈을 공유할 수 있어?"
"당연히 그렇게는 안되죠. 내가 같이 쓸 거에요."
"나랑 꿈을 공유하겠다고?"
"대신, 다시는 내 연구실에 들어오지 말아요."
"흠, 좋아."
중계기에 연결된 패드를 덕지덕지 관자놀이에 붙인 남자를 거실 러그 위에 앉혔다. 장치가 면형 시냅스를 추적하기 쉽도록 그에게 조영제를 먹이고 나도 똑같이 한 후, 우리는 나란히 두꺼우면서도 포근한 러그에 누웠다.
"기분이 좀 이상한데. 이거 제대로 작동하는 거 맞지?"
"입 다물고 눈 감아요. 잠들어야 하니까."
그게 의식이 사라지기 전 내가 마지막으로 뱉은 말이었다.
함께 꾸는 꿈은 짧게 끝났다. 그와 나는 3시간여만에 다시 포근한 러그 위에서 깨어났다.
세 시간의 잠. 돈을 받은 전문 경호원과 생명의 위협을 받는 의뢰인이 철 모르는 어린애들처럼 무방비 상태로 흘려보낸 시간이었다.
무사히 깨어났으니 됐지.
"이게... 내가 지금 뭘 겪은 거지? 이런 게 진짜 가능했네."
"그러게요."
"'그러게요'가 뭐야. 당신은 이미 알고 있었을 거 아냐."
"이론적으로 가능하다는 건 알았죠. 근데 실제로 써본 건 처음이에요."
"그럼 만약에 기계가 오작동이라도 일으켰으면 우리 둘 다 나란히 식물인간이 되어서 꿈 속에 영원히 갇혀있었을 수도 있는 건가?"
"이게 무슨 인셉션인줄 알아요? 그냥 한숨 푹 자고 일어났겠죠."
"그래도 혹시..."
아, 비과학자들이란.
난 스스로를 책망하는 대신 그와 함께 꾼 꿈에서 있었던 일들을 하나 둘씩 회상했다. 공유몽은 일반적인 꿈과 달리 파고들수록 더 많은 부분을 기억할 수 있다던데, 그게 사실인지 알아볼 시간이다.
일단...
"됐고. 그 괴물 말인데요. 그... 이름이 기억 안 나네. 아무튼 그런 걸 내가 상상했을 리가 없어요."
"어렸을 때 영화에서 본 놈이야. 그땐 그렇게 무서울 수가 없었는데."
꿈 속에서 그와 내가 살던 집 마당에 묶여있던 동물은 머리 아홉 개 달린 도마뱀이었다. 남자가 아홉 쌍의 땡그란 눈을 한 도마뱀을 보고 겁에 질려있는 동안 내가 녀석의 머리 아홉 개에 일일이 목줄을 달아주었던 것이 기억났다.
"그런 걸 무서워하는 줄은 몰랐네요. 주먹으로 다 때려잡을 것처럼 생겨서는."
"난 동물 질색이야. 그러는 당신이야말로 그 호텔 대체 뭐였어?"
"카르타헤나에 있는 리조트요."
"어디에 있는 리조트? 당신이 그런 데도 가?"
"딱 한 번 가본 적 있어요. 학회가 거기서 열리는 바람에."
"오, 학자 양반들은 그런 호텔에서 모이는 거였구만. 이거 원. 내가 알던 것보다 훨씬 퇴폐적인 집단이었잖아."
"그... 연회장만 진짜로 있는 곳이고 나머지는... 내 상상이었던 것 같아요."
남자는 특별히 퉁퉁한 쥐를 발견한 고양이처럼 음흉하게 미소지었다.
"이런 순진한 얼굴을 하고서 그렇게 음탕한 상상을 하고 있었나?"
"입 다물어요."
"싫어. 물어볼 게 아주 많거든."
남자의 질문은 꿈의 내용으로부터 공유몽 자체에 관한 것으로 옮겨갔다. 다소 흥분한 것처럼 보이기까지 하는 남자의 호기심을 잠재우기 위해 나도 처음으로 그를 위한 긴 설명을 시작헀다.
"인간이
자는 동안 뇌가 필요없는 기억을 정리하는 작업. 학계에 따르면 이게 바로 꿈의 정체에요. 근데 아바르하잠신 박사가 이 공유몽
중계기를 발명하고나니, 거의 정설로 여겨지던 주장이 위협받기 시작했죠. 꿈이 정말로 쓸데없는 기억을 삭제하는 과정에 불과하다면
어떻게 서로 다른 경험을 하며 살아온 두 사람이 같은 꿈을 꿀 수 있겠어요? 그래서 아바르하잠신 박사는 꿈이 사실 기억 삭제보다는
훨씬 복잡한 것이라고 추정했어요."
"그 훨씬 복잡한 게 뭔지도 알아냈어?"
"그러기 전에 자살했어요. 처음 만났을 때 얘기했잖아요."
"그랬었지. 아깝네."
"이제 다시는 내 연구실에 들어오지 마요."
"까칠하긴."
그리고 며칠이 흘렀다.
남자와
함께 공유몽을 꾼 것을 후회하는 것과 별개로, 난 그와 차츰 가까워졌다. 무의식을 공유하는 행위는 두 사람의 관계를 이어주는데
대화보다 훨씬 효과적이었다. 처음 경험한 공유몽의 상대가 내 게으른 경호원이라는 것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싶진 않았지만, 함께 꾼
꿈은 한동안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내 첫 공유몽은 상대의 귀찮은 호기심을 잠재우기 위해 개에게 뼈다귀를 내어주는 것처럼
베푼 행위, 그 이상이었다.
"이리와. 앉아서 TV 좀 봐."
"잠깐 물 좀 마시려고 나온 거에요."
"나온 김에 좀 쉬어."
"......"
"하루 종일 연구실에만 틀어박혀있다가 혈전 같은 거라도 생겨서 죽어버리면 경호원 고용한 돈이 아까울걸. 어서 이리와."
"...그럴게요."
그도 변했고, 나도 변했다. 예전이라면 커다란 손이 내 손목을 잡고 부드럽게 거실 소파로 잡아 끄는 것에 질색했겠지만, 지금의 나는 저항하지 않았다. 고작 세 시간 남짓의 공유몽은 내 삶에 여파를 제대로 남겼다.
"오늘은 밖에 나가보는 게 어때?"
"바빠요."
"네 피부 얼마나 창백한지 알아? 햇빛 한 번 못 본 좀비 같아."
"......"
"내가 지켜줄게. 걱정 말고 밖에 나가자."
남자가
처음부터 내 의뢰를 진지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꿈의 수호자라니. 꿈을 연구하는 과학자만 죽이는 정체불명의
세력이라니. 내가 이 바닥을 오랫동안 겪지 않았다면 나도 내 이야기를 듣고 터무니없다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남자는 내
경호원이다. 내 이야기를 진지하게 듣고 날 보호할 태세를 갖춰야 했다. 그럼에도 그는 날 목숨이 날아갈 위기에 처한 의뢰인으로
대하는 대신, 챙겨줘야 할 친구처럼 여기고 있었다.
어이없게도 그것이 싫지 않았다.
난 그의 제안을 정면으로 거절하는 대신 다른 것을 제안했다.
"심심해서 그래요?"
"그런 것도 있고. 근데 네가 너무 하얘. 신선한 공기도 쐬어줘야 건강하게 연구도 하지."
"앉아서 기다려요."
그가 나갈 채비를 마치기 전에 난 공유몽 중계기를 다시 꺼내왔다. 남자는 허를 찔렸다는 듯 코웃음을 치긴 했지만, 그것은 예전처럼 조소를 담고 있지 않았다. 그는 이해한다는 듯 외투를 벗고 거실 러그 위에 앉았다.
"잘 자. 저편에서 보자."
저편에서 보자니. 무슨 영화 주인공 같다.
그리고 대략 네 시간 뒤에 깨어났을 때는 창밖으로 노을이 지고있었다.
중계기를
정리하기 위해 부산을 떠는 내 손목을 남자가 움켜쥐었다. 그는 날 다시 러그 위로 잡아끌었다. 그는 아주 자연스럽게 날 품에
안았다. 이런식으로 남자와 내 몸이 포개어지는 것이 처음이거늘, 그 느낌은 전혀 낯설지 않았다. 내 온몸을 감싼 억센 근육이
발하는 온기는 이상하리만치 포근했다.
"그 갈대밭. 어디였어?"
"학창시절에 제주도로 수학여행 가서 본 거에요."
"제주도? 달이 세 개 떠있던데."
"그건 당연히 상상이었겠죠."
"무슨 영화를 봐야 그런 상상을 하지?"
"상상에 이유가 필요해요?"
"그럼 그 상판 반반한 놈도 상상이었나? 당신한테 꼬리 엄청 치던데, 그런 놈을 이유 없이 상상하기도 하나?"
"그게 중요해요? 당신 때문에 그 사람이랑 손 한 번 못 잡아봤잖아요."
"그게 왜 내 탓이야? 당신 상상력이 조금만 더 뛰어났으면 손 잡는 것에서 더 나아가서 다른 것도 잡았겠지."
곧 내 공세가 시작되려던 찰나였다. 난 그에게 절대 내가 상상했을 리가 없는 것들, 말하는 공룡들과 날아다니는 자동차에 대해 묻고 싶었다.
그는 민첩하게 선수를 쳐 내 기회를 빼앗았다.
"그런 의미에서, 당신이 나한테 입으로 해줬던 거."
선수를 쳤을 뿐만 아니라 아예 내 입을 다물리게 했다. 희미했던 꿈 속의 기억이 되살아나고, 얼굴이 화끈거리기 시작했다.
"그것도 그냥 상상이었어? 아니면 경험에서 나온 거야?"
"가서 폐휴지 비우고 와요. 오늘 분리수거 날이니까."
"잘하던데."
"......"
난 그의 가슴팍을 있는 힘껏 주먹으로 쳤다. 남자는 옅은 웃음을 덧붙이고는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그가 금방 다녀오겠다면서 집을 나가고 난 뒤 난 생각에 빠져들었다.
내가 미쳤지.
공유몽은 자각몽이 아니었다. 그와 함께 꾼 꿈 속에서는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도 없었고, 그게 허상임을 인지할 수도 없었다. 남자와 나의 관계도 현실과는 전혀 달랐다. 난 학자가 아니었고, 그도 경호원이 아니었다.
깨어나서
돌이켜보면 아무리 터무니없고 이해할 수 없는 것도 꿈 속에서는 진리고, 상식이고, 현실이다. 그러니 꿈 속에서 정말 터무니없는
짓을 하는 것도 어쩌면 예정되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난 무슨 생각으로 그에게 먼저 공유몽을 제안했을까? 첫번째 공유몽 이후로 그와
이상하게 가까워진 것이 화근이었는지도.
그 이후로 난 공유몽 중계기를 다시는 연구실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남자는 중계기를 다시 쓰기를 보채는 대신 더 미묘한 전략을 택했다. 마지막으로 꾼 공유몽이 거듭 대화 주제에 올랐다.
"왜 운전하는 걸 무서워해?"
"무서워하지 않아요."
"꿈에서는 무서워했잖아."
"꿈에서는 면허증이 없었나보죠."
"원래 그렇게 용감해?"
"그건 또 갑자기 무슨 말이에요?"
"마지막에는 날 태우고 날아줬잖아."
"...그래서 우리 죽었어요. 기억나요?"
"당연히."
그와 내가 꾼 공유몽의 끝은 기묘하게도 죽음이었다. 두 번 다.
남자는
며칠 동안이나 끈질기게 그 죽음을 물고 늘어졌다. 내가 그를 위해 꿈 속에서 무엇을 했는지, 우리의 마지막 비행이 무엇을 위한
것이었는지, 차창 밖으로 지나던 별들의 보라빛 물결과 내가 총을 쏘던 모습, 구름 위에서 세 개의 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우리의
마지막 비행이 벌어지는 동안 내가 먼저 그에게 키스했다는 사실 등을 하나하나 감상하듯 말했다.
아니, 내 면전에 대고
반쯤 잊고 있던 사실들을 문질러댔다고 해야 하나. 가물가물하던 것들이 남자의 말을 통해 되살아났다. 꿈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만났는지, 그가 날 위해 뭘 했는지, 그가 떨어지는 모습을 내가 지켜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는지까지.
"꿈 속에서는 네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다는 게 너무 신기해."
"그 말 똑같이 돌려줄 수 있어요. 꿈 속에서처럼 점잖기만 하면..."
난 퍼뜩 내가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남자는 실실 웃기만 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꿈 렌즈를 가동시키는 데 성공했다. 슈라이버 교수의 연구 기록을 다 외울 기세로 뒤져가며 장치의 손상된
부분을 손보고, 새 부품을 주문하는 데 내 남은 재산의 절반쯤을 쏟아부은 끝에 일어난 일이었다. 꿈 렌즈, 면형시냅스작용관측기는
당장이라도 사용 가능한 상태로 연구실 책상에서 고고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나 좀 도와줘요."
"뭐가 필요한데?"
"자면서 꿈만 꾸면 돼요."
"한 번 더 하자고?"
남자는
기대에 들떠서 연구실에 들어왔다가 공유몽 중계기 대신 꿈 렌즈를 보고 잔뜩 실망했다. 그럼에도 그는 수면 의자에 앉아서
관자놀이와 뒤통수에 패드를 붙인 채 자는 것에 동의했다. 그가 대가로 제시한 조건은 들어주기 전혀 어렵지 않은 것이었다.
곧 뇌파기기가 그의 숙면을 알려왔다. 꿈이 없는 수면의 단계를 지나 곧 꿈이 시작될 것이었다. 난 그가 무엇을 꿀지 내심 궁금해하며 꿈 렌즈의 검은 스크린을 주시했다.
그리고
실망했다. 꿈 렌즈의 스크린은 밝아진 뒤로, 줄곧 옛날 TV처럼 타닥거리는 소리와 함께 하얀 화면만을 내보냈다. 아무것도 없는,
도화지 같은 하얀 화면을. 그가 얼마나 생생한 상상력을 지니고 있는지 잘 아는 나로서는, 그가 꾸는 꿈이 백색 무(無)의 세상일
리가 없다는 데에 내 손목도 걸 수 있었다.
실망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의 꿈이 시작된지 고작 20분만에 꿈
렌즈에 삽입한 디스크가 가득 찼다는 경고가 나왔다. 이어서 녹화가 중단된다는 메시지가 나오고 그 이후로도 꿈렌즈는 장작 타는
소리를 내며 백색 화면과 암전을 반복했다. 그가 깨어날 때까지.
"어때? 내 꿈 잘 봤어?"
"아뇨. 실패에요."
처음 만났을 때의 남자였다면 그는 내 실패를 비웃으며 실컷 이죽거렸을 것이다. 나와 함께 지낸 시일이 꽤 지난 지금의 그는 아무 말 없이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의 꿈을 녹화하기 위해 꿈 렌즈에 삽입했던 디스크는 정말로 그 큰 용량이 꽉 차있었다. 단 하나의 영상 파일이 512테라바이트짜리 디스크를 떡하니 채우고 있는 꼴을 보니 한숨만 나왔다.
슈라이버 교수님. 대체 뭘 만드신 거지.
꿈 렌즈로 녹화한 영상은 일반적인 영상 재생 프로그램으로는 열어볼 수조차 없었다. 내가 기껏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디스크를 꿈 렌즈에 다시 넣어 하얗게 빛나는 스크린을 거듭 보는 것뿐이었다.
그냥 실패할 수는 없었다. 성공하지 못했다면 실마리라도 잡아야 했다. 그 모든 희생을 겪고서 난 그냥 실패자로 남을 수 없었다. 나는 다시 연구실에 앉아 밤을 새기 시작했다.
몇
시간이라도 자라는 남자의 친절한 제안은 내 절박함에 묵살되었다. 그는 몇 번 날 연구실에서 끌어내려다 포기했다. 아니.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았어야 했는데. 시간이 밤인지 낮인지도 모르고 꿈 렌즈의 타닥거리는 하얀 화면만 들여다보던 난, 어느 순간 내
방 침대에서 깨어났다. 삐걱거리는 간이침대가 있는 드레스룸이 아니라 내가 남자에게 준 원래 내 침실이었다.
그는 내가 깨어나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안 무거웠어요?"
"워낙 말라서. 고마우면 다른 데 가지 말고 계속 쉬고 있어."
난 피식 웃고 말았다. 그게 신호라도 되는 듯 그 또한 입꼬리를 살며시 올렸다.
"신기한 거 보여줄까?"
"뭔데요?"
"저기 봐."
실없는
농담을 기대했던 나에게 남자는 집안 곳곳에 교묘하게 설치된 모션디텍터와 CCTV들을 보여주었다. 각 방에 설치된 모션디텍터의
감지상황과 CCTV 화면은 실시간으로 남자의 태블릿PC 화면에 나타나고 있었다. 그에게서 기대하지 않았던 경호원다운 면모에 새삼
사람이 다시 보였다.
"나 자고 있는 동안 가져온 거에요?"
"아니. 첫날에 다 설치했지."
"첫날? 잠깐만요, 내 연구실에도 감시카메라 있어요?"
"너한테 들킬까봐 아직 CCTV까지는 설치 못했어. 그보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그는
내 연구실에 설치된 모션디텍터의 활동 내역을 보여주었다. 주변의 움직임을 감지하는 물건이니, 사람이 아무도 없거나 자고 있는
공간에서는 모션디텍터가 활동하지 않아야 정상이었다. 그런데 지난 며칠, 내 연구실의 모션디텍터는 매분 매초마다 움직임을 감지했다고
기록하고 있었다. 그것도 엄청난 양의 움직임을. 초당 서로 다른 30가지의 움직임이 보고되어 기나긴 목록을 만들고 있었다.
"고양이 조련, 자동차 운전, 성인 남성 간의 대화, 조깅, 날아가는 비둘기, 식사... 이게 다 뭐죠?"
"내가 묻고 싶은 거야. 당신 혼자 있던 방에서 이런 게 왜 보고되었느냐는 거지."
고양이와 자동차는 커녕, 연구실에는 분명 나뿐이었다.
"고장난 거 아니에요?"
"그래서 일단 다른 방에 있는 물건이랑 바꿔놨어. 그랬더니 이번에는 그놈이 당신 연구실에서 총격전이랑 난교파티가 동시에 벌어지고 있다고 보고하던데. 그 연구실에 뭔가 있어."
"총싸움이랑... 뭐요?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난 유령이나 귀신은 믿지 않는다. 무언가가 날 죽이려고 한다면 그건 내가 초자연적인 존재와 원수졌기 때문이 아니라, 꿈을 연구하는 과학자라서다.
"당신을 이리 데려오고 나서 내가 혼자 거기 있어봤는데 말이야. 의심할만한 게 딱 하나 있어."
남자의 말과 동시에 나도 그 의심할만한 것이 뭔지 바로 알아챘다.
"꿈 렌즈."
"맞아. 그 물건 스크린을 가리니까 모션디텍터가 움직임을 보고하는 것도 바로 멈췄어."
머릿속에서 오만가지 가능성이 떠올랐다. 당장 연구실에 가야했다. 불행히도 난 침대에서 채 뛰쳐나오기도 전에 그에게 손목을 잡혔다.
"너 또 가서 책상에 엎어져 자기 전에 나랑 먼저 할 거 있지 않냐?"
"뭐가요. 이거 놔요."
내 경호원은 날 힘으로 제압하다시피 하여 침대에 눕혔다. 아니, 힘으로 제압하다시피 한 게 아니라 정말로 힘으로 제압했다. 매트리스에 뒤통수를 붙인 내게 그는 어느새 챙겨온 것인지 공유몽 중계기를 들이밀었다.
"그 이상한 기계에 내 꿈 담아주는 대가로 이거 한 번 더 하기로 했잖아."
"하... 지금 그게 중요해요?"
"나한테는 중요하거든."
한바탕 남자의 두꺼운 팔을 두드려대고 단단한 가슴팍에 몇 번 주먹을 박은 끝에 난 그를 내 힘으로 떼어낼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으으, 제기랄."
"앙탈 부리지 말고 기분 좋게 같이 자자고."
"지금 본인이 하는 말이 어떻게 들리는지 알기는 해요? 어으, 제기랄! 무식하게 힘은 세서!"
"힘 센 거 좋아하잖아."
결국 그와 나란히 침대에 누워 관자놀이에 패드를 붙이는 것으로 상황은 마무리 되었다.
한숨
더 잔다고 생각해야지. 눈 깜짝할 새에 끝날 거니까. 그 뒤에는 꿈 렌즈에서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건지 살펴볼 거야. 대체 왜
모션디텍터가 꿈 렌즈의 화면에서 온갖 움직임들을 감지했는지 알아볼 거야. 그 하얀 화면이 대체 뭘 감추고 있는지 알아낼 거야.
그게
내가 세 번째 공유몽에 임하는 마음이었다. 그리고 우리의 세 번째 꿈은 시작만큼이나 끝도 단순했어야 했다. 함께 꾸는 꿈의
끝에는 개운함과, 아른거리는 몽환의 기억 파편들과, 가소로운 농담거리로 몇 번 쓰이곤 희미해질 추억만이 있어야 했다. 대신 나는
눈물을 흘리며 깨어났다.
"왜 울어?"
나도 모른다. 기억이 나지 않으니까.
"그러는 그쪽은요?"
바로 옆에 누운 남자의 똑같이 눈물진 얼굴을 보자마자 난 그의 손을 잡았다. 분명 조금 전까지 꾸던 꿈이건만, 내용은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남자의 온기를 확인해야 한다는 충동이 내 본능마냥 심장을 조였다.
"다행이다."
뭐가
다행인지는 알 수 없었다. 우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마와 관자놀이에 붙어 걸리적거리는 것들을 떼어내자마자 내가 한 것은
남자의 가슴에 얼굴을 묻는 일이었다. 그의 억세고 두꺼운 팔이 날 절대 놓아주지 않을 것처럼 껴안았을 때 난 이 멍청한
근육덩어리가 내 피부에 묻히는 온기를 만끽하고 있었다. 그가 쓰는 남성용 스킨 향과 옅게 말라붙은 땀에서 나는 살냄새가 이곳이
세상에서 가장 안전하다는 확신을 주었다. 난 이 멍청한 얼간이와 절대 떨어질 수 없었다.
"바보."
"미안."
짜증이
밀려와서 난 남자를 비난했다. 그리고 그만큼 으스러지도록 그를 껴안았다. 남자는 내 정수리에 대고 연신 사과를 중얼거렸지만,
그도 이유를 모른다는 것은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었다. 난 다시 잠들 때까지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
"채소 수확, 운전, 돌풍에 날아가는 구조물, 도서관을 정리하는 사서, 우체부. 이게 다 뭐냐고."
나와
남자는 며칠 동안이나 꿈 렌즈의 화면을 주시했다. 장작 가득 찬 벽난로마냥 타닥거리는 소리가 이젠 너무나 귀에 익숙했다. 아무
것도 없는 백색 도화지 같은 배경으로부터 모션디텍터들은 잘도 움직임을 읽어냈다. 처음에는 꿈 렌즈의 액정에 이상이 생긴 게
아닐까싶어 전원을 차단하고 모션디텍터를 들이밀기도 했다. 요망한 장치는 화면이 꺼져있음을 안다는 듯, 어떤 것도 감지하지 않았다.
"그냥 막다른 길인지도 몰라."
"막다른 길인지도 모르는 게 아니라, 딱 그거에요."
"그럼 이제 그만 포기하는 건 어때?"
나와 남자의 눈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뭘 포기해요?"
"전부. 너 지나치게 몰두하고 있어."
지난 몇 주간 남자와 가까워지지 않았다면 아마 그에게 소리라도 버럭 내질렀을 것이다. 저 뺀질뺀질한 기생 오라비 같은 얼굴 아래에 있는 친절함과 섬세함을 겪은 이상, 그러기는 힘들었다.
"절대 그렇게는 못해요."
"그, 꿈 지킴이랬나? 걔네가 죽이는 것도 꿈에 관해서 연구하는 사람들이라고 하지 않았어? 뇌과학이면 한창 뜨고 있는 분야인데 꿈 말고 다른 쪽으로 가는 건 어때?"
아, 이 멍청이.
"언제부터 내 진로를 그렇게 진지하게 고민했어요?"
"네가 나 대신에 히드라에 목줄을 달았을 때부터."
간발의 차로 정신병 있냐는 소리가 입으로 쏙 들어갔다. 그는 처음 꿨던 공유몽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머리 아홉 달린 도마뱀. 내가 길들여서 마당에 묶어놓았던, 이제는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충직한 하수인.
"심심하면 나가서 놀아요."
"나 진지해."
"나는 별로 진지하지 않은 것 같아 보여요?"
"넌
어딜 가든 성공할 거야. 왜 하고많은 연구분야 중 하필 꿈에 매달리는 건데? 쥐도 새도 모르게 다른 과학자들처럼 자살당할까봐
무서워서 나 고용한 거잖아. 그렇게 무섭고, 이제는 답까지 안보이는 문제를 뭐하러 계속 붙들고 있어?"
"입 다물어요."
"싫어. 너가 밖에도 안 나가고 사람 구실 못 하면서 사는 이유가..."
내가 요구한 단 한가지를 남자는 들어주지 않았다. 덕분에 내 입에서는 고성이 터져나왔다.
"아무것도 모르면 닥쳐!"
그리고 놀랍게도 방금 전까지 내가 연구를 그만둬야 하는 이유를 수백 개는 늘어놓을 것처럼 보이던 그가 뚱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네가 뭘 안다고! 사람 구실을 못 한다고? 사람 구실을 하려면 오히려 계속해야 돼! 내가 안 무서워서 이러고 있는 줄 알아?"
"......"
"난 약속한 게 있어요. 절대 어길 수 없는 약속. 그리고 그것 때문이 아니더라도, 이제와서 내가 그만두면 여태까지 죽은 사람들의 희생이 전부 아무 의미 없는 일이 되어버려요."
"......"
"당신이 할 일은 날 계약기간 동안 살려두는 겁니다. 조건 기억하죠?"
말을 마치자마자 뭔가 아주 중요한 것을 잊고 있다는 묘한 불안감이 내 등을 찔렀다.
"내 연구에 간섭하지 말기로 했잖아요."
남자는 잠시 날 지켜보다가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난 계약 때문이 아니더라도 널 살려둘 거야. 계약 때문에 하는 게 아니니 조건도 따르지 않을 거고."
"무슨 소리 하는 거에요. 돈도 받았으면서..."
아. 이거였구나. 잊고 있던 게.
오늘이 며칠이더라?
남자가 몇 번이나 분리수거 날짜에 맞춰 쓰레기를 버리고 왔는지 기억을 더듬었다. 그와 나의 경호원 고용 계약은 못해도 이미 삼 주 전에 끝났을 것이다. 그는 진작에 나를 떠났어야 했다.
내 얼굴에 떠오른 깨달음을 알아챘는지 그는 한숨을 길게 내쉬곤 내 옆에 앉았다.
"왜? 왜... 안 갔어요?"
"서운하네. 너도 나만큼이나 이젠 계약 같은 것에 관심 없는 줄 알았는데."
힘줄투성이인
커다란 손이 내 머리를 조심스레 그의 넓은 어깨로 인도했다. 난 어린아이처럼 고분고분 그의 뼈대에 기댔다. 아주 오랫동안 알아온
것 같은 온기가 머리칼을 부드럽게 가르는 그의 손가락을 타고 천천히 스며들었다. 그가 다시 질문했을 때 난 덤덤하게 대답할 수
있을 정도로 마음이 가라앉아 있었다.
"약속했다는 게 뭔지 혹시 말해줄 수 있어?"
"교수님하고 약속을 했어요. 그 분 다음에는 제가 물려받기로."
"......"
"뭘 물려받기로 했는지는 안 물어봐요? 말할 준비 하고 있었는데."
"설명 할 필요도 없지. 네가 밥도 안 챙기고 몰두하는 게 뭔지 떡 하니 보이는데."
남자는 꿈 렌즈를 가리켰다.
"일레나 슈라이버. 이거 만든 사람 이름. 맞지?"
"맞아요."
"너랑 개인적으로 아는 사이일 거라곤 생각도 못 했어."
"독일에서 유학할 때 지도교수님이었어요."
"......"
"월세집 주인이기도 했고, 주말마다 본인 집에 불러다 앉혀놓고 제대로 된 끼니도 먹게 해주셨어요."
"......"
"일주일에 20유로만 쓰면서 버텨야 할 때도 있었는데, 교수님이 아니라 다른 사람 밑에서 박사 학위 따려고 했으면 굶어죽었을 거에요."
"네 은인이라고 할 수 있는 건가?"
"그렇죠."
"그리고 죽었고?"
"......"
남자는
대답을 채근하는 대신 날 더욱 꽉 끌어안았다. 그는 한동안 내 과거를 캐물었다. 젊고 바보같았던 대학시절, 독일에서 유학하던
나날, 하나 둘씩 사라져가는 학계의 거성들을 보며 불안감에 떨었던 일, 슈라이버 교수님이 미친 사람처럼 꿈 렌즈의 개발에
몰두하다가 말도 안되는 유언장만 남긴 채 세상을 등진 사건, 도망치듯이 한국으로 돌아와 다른 죽은 학자들이 남긴 것을 수집하기
시작한 계기까지.
그는 내가 궁금해서 견딜 수 없는 것처럼 아주 작은 사항마저도 물고 늘어졌다. 그 모습은, 마치
나라는 넓은 모래밭에서 자신이 모르는 부분을 파내기 위해 앞발을 놀리는 개처럼 열렬하기도 했고, 단서를 아주 조금씩만 던지는
추리소설을 읽다가 넌덜머리가 난 소년처럼 짓궂기도 했다. 그러다가 날 놀릴 수 있는 부분을 발견하면 그는 장난기와 걱정이 반반
차오른 시선으로 날 쿡쿡 찔러댔다.
"이렇게 차갑고, 단호하고, 순진하게 생긴 주제에 안쪽에 이렇게 말랑말랑한 구석도 있을 줄 누가 알았겠어."
"손 치워요."
"싫어."
"아프단 말이에요."
"아픈 것도 좋아하면서."
"......"
"넌 연기를 너무 잘해서 탈이야. 겁에 질렸을 때는 스스로 무서운 존재가 되려고 하고, 지쳤을 때는 다른 사람들을 피곤하게 할 것처럼 굴어. 널 알기 전이었다면 아직도 네가 돈이나 명예를 노린다고 생각했을 거야."
마치
지금은 날 안다는 것 같네. 웃기는 말이었다. 그와 내가 함께 한 것이라고는 꿈을 공유하는 일 몇 번이 전부였다. 그런데도 더
웃기는 것은, 나도 남자를 잘 아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이다. 이 게으르고 커다랗고 단단하기만 한 주제에 친절한 남자가 사실
가벼운 목적보다는 굳은 사명을 가지고 움직인다는 사실을 왜인지 나는 어렴풋이, 그러나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이만큼 했으면 네 교수님한테 할 도리는 다 한 것 같아. 이제 너 스스로를 챙겼으면 좋겠어."
"내가 연구를 멈추면 당신이 이 집에 있어야 할 이유도 없어져요."
"또 못된 소리. 마음에도 없는 말 자꾸 할래?"
"......"
"네가
경매장에서 사지 않았으면 저 기계는 고물상에나 굴러들어갔을 거야. 그것만으로도 넌 그 교수한테 할만큼 했어. 그리고 꿈 같이
꾸게 해주는 기계. 그것도 제대로 작동한다는 거 우리가 확인했잖아. 네가 학계에 빚을 지거나 한 건 없어."
"세상에
알리지 못하면 아무 의미 없어요. 내가 나서서 논문이라도 쓰지 않는 이상 슈라이버 교수님은 멍청한 연구나 하다가 빚더미에 앉아서
자살한 괴짜 과학자고, 아바르하잠신 교수도 소설에나 나올 일에 몰두하다가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죽은 바보로 남을 거에요.
영원히."
설득이 먹혔는지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바탕 분풀이 끝에 긴장이 풀려 축 늘어진 내 몸을 남자는
단단한 팔로 안아들어 거실로 데려갔다. 저물어 가는 햇살이 들어와 작을 노을이 들어찬 공간에서 그는 커다란 손으로 내 머리칼을
연신 쓰다듬었다. 우는 아이를 달래듯이.
"꿈 속에서는 네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다고 말한 적이 있었지."
그랬었다. 나도 남자에게 같은 말을 하려고 한 적이 있었다.
"근데 생각해보니, 꿈 속의 너랑 현실의 너는 그리 다르지 않은 것 않아."
"......"
"나는 어때?"
난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이내 그래봐야 별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당신은... 제법 점잖은 것 같아요."
그의 남자다운 입술이 예쁘게 살짝 위로 말려올라갔다. 여러 세계를 넘나들며 내가 셀 수도 없을 정도로 자주 키스했던 그 입술이. 그래서 난 입을 맞추지 말아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난 그에게 달려들었다.
=+=+=
"Ein Geist ist ein wunderschönes Fraktal. Ich habe keine Angst vor dem Tod."
"무슨 말이야?"
"'정신은 아름다운 프랙탈이다. 난 죽음이 두렵지 않아.' 교수님이 자주 하시던 말씀이에요."
"정신이 뭐?"
"프랙탈이요."
"그게 뭐야?"
"자기유사성을 갖는 패턴을 말해요."
"알아듣기 쉽게 말해줘."
난 말로 설명하는 대신 그의 태블릿을 빼앗아서 프랙탈의 고전적이고도 완벽한 예시를 검색했다.
"여기, 이 그림 좀 봐요."
남자는 전혀 흥미롭지 않다는 듯 그림을 대강 훑어보다가 태블릿을 다시 내게 넘겼다.
"이게 뭐야?"
"시에르핀스키 삼각형이라는 거에요. 프랙탈의 완벽한 예시죠. 정삼각형 안에 정삼각형이 무한히 반복되는 거 보여요? 계속 확대해도 끝없이 이 구조가 이어져요."
"이게 인간의 정신이라고?"
"비유적으로 하신 말씀이겠죠. 아무튼 슈라이버 교수님께서 입버릇처럼 달고 다니던 말이에요."
"사람의 정신이 어떻게 세모일 수가 있지? 그리고 정신이 세모라서 죽음이 무섭지 않다고?"
세모. 삼각형도 아니고 세모인가.
"말이 그렇다는 거죠. 세모 모양 정신을 가진 사람은 없어요. 그리고 세모가 아니라 프랙탈이에요. 여기 나온 건 프랙탈의 한 예시인 거고."
"몰라. 너무 어려운 얘기야."
그는
없던 흥미마저 완전히 잃고 다시 소파에 누워 내 머리칼을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난 바닥에 앉아 소파에 등을 기대고 앉아있었고,
그런 내 앞에는 여전히 미약한 소음을 내며 하얀 화면만 띄우고 있는 꿈 렌즈가 거실 테이블에 놓여있었다. 기계는 방을 바꾸면
혹시라도 다른 결과가 발생하지 않을까 하는 미신적인 믿음 때문에 거실로 옮겨졌다. 그러나 여전히 그 하얗기만 한 화면을 스캔 중인
모션디텍터는 당장이라도 폭발할 기세로 수십 수백개의 움직임을 잡아내고 있었다.
"맹수를 조련하는 사육사, 가동 중인 크림 주입기, 남편과 아내. 이런 게 지금 여기에 있대요. 여기, 이 거실에. 미치겠네."
난 태블릿에 뜨는 모션디텍터의 경보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내 눈에 보이는 것은 타닥거리는 멍청한 꿈 렌즈의 하얀 화면과 그 옆에 놓인 물티슈 팩, 그리고 바닥에 굴러다니는 다 쓴 콘돔 박스뿐이었다.
"다 맞는 말 같은데, 크림 주입기라는 게 가동 중인 부분만 빼고. 슬슬 가동해볼까?"
"으으, 저리 가요."
난 남자의 음흉한 손길을 거세게 쳐냈다.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아야, 역시 맹수라서 그런지 손이 맵네."
"말 똑바로 해요. 맹수는 무슨."
"포악하고, 앙칼지고, 사람 몸에 이빨 자국이나 남기고. 맹수 맞잖아."
"길에 지나가는 사람 잡고 물어보라구요. 나랑 당신 중에 누구를 맹수라고 하겠어요?"
"담비랑 여우도 우리나라에서는 맹수인 거 알지?"
곧
대화는 몸싸움으로 번졌다. 난 승산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최대한 저항했다. 포악하고 앙칼지다는 표현을 쓴 사람에게 고분고분
잡혀줄 마음이 없었다. 소파에서 내려와 나와 함께 러그 위에서 뒹굴기 시작한 남자는, 조금만 힘을 줘도 옴짝달싹 못하게 제압할 수
있으면서 내게 거듭 몸을 비틀 여지를 주었다. 먹잇감을 가지고 노는 맹수들이나 할 법한 짓이었다.
이래놓고 나한테 맹수라고 하다니.
"저리 가요!"
"싫어."
그는
내 옆구리를 커다란 손가락으로 주무르며 간지럽게 했다. 내가 몸을 비틀며 도망치려 해도 그는 집요했다. 우리의 갈 곳 잃은
다리가 테이블에 부딪혀 위에 있는 것들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둥근 기둥처럼 생긴 모션디텍터가 쓰러져 데굴데굴 구른 끝에 거실 벽에
닿았고, 꿈 렌즈를 제어하는 키패드도 테이블이 몇 번 쿵쿵거리며 들뜬 끝에 러그에 떨어졌다.
"아! 멈춰요! 진짜!"
"싫어. 항복한다고 말해."
"아니, 키패드 떨어졌다고!"
"그런 거 신경 쓸 때가 아닐텐데."
"아! 비싼 거라고! 무선이란 말이야!"
그의 웃는 얼굴은 참 잘생겼지만, 지금 이 순간 난 손만 자유로웠다면 그의 볼에 주먹을 날렸을 것이었다.
"그럼 항복한다고 말해."
"이 변태야!"
그의
손가락은 더욱 간질거리는 부위로 파고들었다. 난 뭍에 올라온 생선처럼 퍼덕이며 바닥에 떨어진 키패드를 쥐려는 동시에 그의 억센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을 쳤다. 그러나 내 노력은 역효과를 일으켰다. 우리의 얽힌 몸이 싸움을 벌인 끝에 키패드가 남자의
날개뼈 밑으로 들어가버렸다.
"야! 이 미친놈아! 얼른 놔!"
"미친놈? 점점 나쁜 말만 하네."
남자는 생글생글 웃으며 내 옆구리를 잔뜩 간지럽힌 뒤에야 날 놓아주었다. 풀려나자마자 내가 한 일은 남자의 두꺼운 가슴근육을 있는 힘껏 밀어서 그 밑에 깔린 키패드를 구하는 것이었다. 다행히 키패드는 망가지지 않고 무사했다.
저 두꺼운 흉통에 깔리고도 멀쩡하다니. 비싼 걸로 사길 잘했네.
"아, 진짜 이거 부서졌으면 어쩔 뻔했..."
내
말은 다 나오지 못했다. 그의 시선도 그것에 고정되어 있었다. 우리는 한참 동안 할 말을 잃고 그것을 바라보았다. 꿈 렌즈는
불타는 땔감처럼 타닥거리는 소음을 내지 않았다. 항상 하얗기만 하던 스크린에서 무언가가 재생되고 있었다.
누군가의
시선으로 보여지는 세계 안에서는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내가 아는 전쟁과는 아주 달랐다. 보병들의 곁에는 커다란 사족보행 로봇이
자리잡고 기관포를 쏴대고 있었고, 멀리서 날아오는 포탄이 공중에서 보이지 않는 벽에 부딪힌 것처럼 폭발하기도 했다.
SF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장면이 아주 빠르게 재생되고 있었다.
"뭘 한 거야?"
먼저 정신을 차리고 입을 연 것은 그였다. 평소와 유일하게 다른 점은 꿈 렌즈를 제어하는 키패드였다. 남자의 몸에 깔렸던 분명 키패드는 눌렸을 것이다. 그리고 눌린 게 설마...
난 키패드의 '-'키를 누른 채로 손을 멈췄다. 수 초에 걸쳐 화면이 점차 느려지더니 자연스럽다고 할만한 속도가 되었다.
모든
퍼즐이 맞춰졌다. 꿈 렌즈는 제대로 기능하는 물건이었다. 꿈 렌즈의 스크린에 하얀 화면만 잡혔던 것은 영상의 재생 속도가 너무나
빨라서였다. 빨간 빛과 파란 빛을 한 곳에 비추면 보라색 빛이 나오듯이 모든 색깔의 빛을 하나로 합치면 하얀색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한 건데?"
거듭 설명을 요구하는 남자에게 난 입술에 검지손가락을 올려보였다. 그리고 키패드를 계속 조작하며 원래 영상이 몇 배속이었는지 계산하기 시작했다. 결과를 구하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표기상
1초가 실제로 담고 있는 게 대략 141.3815시간 분량이니까... 20분 24초짜리 영상이 담고 있는 건 173,051시간.
19년 9개월 5일쯤 되는 분량이네요. 현실에서 20분 자면 꿈 속에서는 20년이 흘러요. 우리가 여태까지 봤던 게 대략
51만배속 영상이었던 거죠. 정확히는 508,973배속이요. 미친... 이래서 모션디텍터가 잡아낸 장면들이 서로 아무 연관이 없는
것처럼 보였던 거에요. 몇 주, 몇 달을 사이에 두고 서로 다른 일을 잡아내서 보여주는 거니까. 내가 여름에 입었던 티셔츠하고 올
겨울에 쓴 털모자가 아무 관련이 없는 것처럼요."
우린 길게 이어진 침묵 속에서 방금 발견한 것의 의미를 곱씹었다.
진지한
생각은 꿈 렌즈의 화면에 내 얼굴이 잡혔을 때 끝났다. 꿈 렌즈는 남자의 시점에서 보이는 것들을 담고 있었고, 그 안에서 내
얼굴은 진짜 나와 아주 많이 달라보였다. 난 과학자가 아닌 군인이었고 한 쪽 눈썹에는 칼날 같은 것이 긁고 지나간 흉터가
나있었다. 남자의 손가락은 그 흉터를 애틋하게 어루만지곤 했다.
"공유몽도 아니고, 혼자 꾸는 꿈에서까지 내 생각을 했어요?"
"항상 하는 거라 습관이 됐나보네."
"하."
남자의
꿈은 그와 내가 하객 한 명 없는 반쯤 무너진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릴 때 끝났다. 세 시간 자는 동안 꾼 꿈을 녹화할 때
저장장치가 20분만에 꽉 차버렸으니, 저 세계에서 남자와 나의 삶은 이 이후로 훨씬 더 길게 이어졌을 것이다.
"이 뒤에 어땠는지 혹시 기억나요?"
"음. 잘은 기억 안 나는데,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을 거야."
그와 내가 영원히 행복하게 사는 모습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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