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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사산 조 시대

베이린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2.05.03 01:5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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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원과 흥망성쇠
파르티아의 수 많은 지방 영주 가운데 한 사람인 파박(PAPAK)의 아들 아르 다시르 1세(ARDASHIRI. 224~241)의 조상은 사산(SAN)으로 알려져 결국 그가 세운 왕조의 이름이 되었다. 당시 파르티아는 두 형제 볼로가세스 5세 (VOLOGASES v. 207-222)와 아르타바너스 5세(213 경~224)에 의해 분할 통치되고 있 었다. 전자는 크테시폰을 중심으로 현재의 이라크를 기반으로 삼았고 후자는 수사를 수부로 현재의 후지스탄을 다스리면서 서로 우위를 다투고 있었다. 이 기회를 이용하여 파르스(Fars) 주의 영주 아르다시르는 224년 종주국 국왕 아르타바너스 5세를 호르미즈다간(Hormiz-dagan) 평야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살해한 후 권좌에 올랐다. 227년 아르다시르는 동부 지역으로 진출하여 여러 부족들을 차례로 정복하 였다. 그는 자신을 '이란족의 왕중왕'이라 칭하고, 티그리스 강변의 고대 셀루키아를 재건하여 베 아르다시르(veh-Ardashir, 아르다시르의 착함)'라는 이름으로 바꾼 후 크테시폰과 쌍벽을 이루게 하여 그의 위세를 떨쳐 보였다. 그는 또한 많은 도시를 신설 또는 재건하여 자신의 이름을 넣어 도시의 이름으로 삼았다. 예컨데 아르다시르의 영광(Ardashir Khvarreh) 등이다. 그의 아들 샤푸르 1세(SHAHPUR 241-272)는 영역을 더욱 넓혔다. 여러 번 로마군과 싸웠는데 244년 유우프라테스 강변에서 로마 황제 고르디안 3세 (GORDIAN, 238-244)를 죽였고 256년 시리아의 에데사에서 황제 발라리안 (VALERIAN 253-260)을 포로로 잡을 정도로 샤푸르 1세는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그래서 그는 '이란족과 비이란 족의 왕중왕'이란 칭호를 사용했으며, 이 칭호 는 사산조 말기까지 지속되었다. 사산조의 영역은 파르티아 때보다 훨씬 광대했는데, 이것은 그 행정력이 효율적이었고 군사력이 막강했음을 뜻한다. 중앙아시아 쪽의 동북부 국경 지역에서 아르다시르 1세와 샤푸르 1세는 쿠산 왕조의 서부 지역을 정복하였다. 이후 사산 왕조의 외교 정책은 변방의 방어와 영토 확장에 목적을 두고 추진되었다. 파르티아조 치하에서 중요한 지방의 총독은 세습적이어서 자치적이지나 반독립적이었다. 그러나 사산조는 이러한 세습적인 지방 총독제도를 폐지하고 그 대신 주로 왕족 가운데서 총독을 임면했다. 따라서, 왕위 계승자는 보통 가장 큰 주의 총독직을 맡게 되었다. 예를 들면 옛날의 쿠산제귀 (Kushanshahr) 또는 아르메니아와 같은 큰 주의 총독직은 왕위계승자가 차지했다. 작은 주의 총독 칭호는 샤(Shah 왕)였고 또 큰 주의 그것은 큰 샤(Brog Shah)였다. 그 결과 중앙 집권적 요소가 매우 강화되었다. 더구나 샤한샤 개인에게보다는 왕실에 대한 충성심이 강조되어서 왕실의 집단 지도체계와 유사하게 되었다. 따라서 왕실에 속하지 않는 사람이 왕권에 도전하기는 위로 어려웠다. 유일한 예외는 바흐람 6세 추빈(BAHRAM VI CHUBIN, 580-581)이었다. 샤푸르 1세의 두 아들 호르미즈드 1세(Hormizd I 272~3)와 바흐람 1세(Baime 273~6)의 통치는 매우 짧았고 특별히 알려진 역사적 사건도 없다. 그러나 그의 손자 바흐람 2세(276-93)의 통치 때 로마제국과의 전쟁이 일어났다. 사산 조 시대 로마와의 분쟁이 가장 첨예하였던 곳은 아르메니아 지역이었다. 로마황제 카루스(Carus 282~283 재위)는 여러번의 성공적인 전투 끝에 심지어 수도 크테시폰까지 쳐들어 갔으나 283년의 평화 조약에서 아르메니아와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양도받은 후 물러갔다. 이 조약은 장기간 지속되지 않았다. 사산조는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사카족이 침입하였으므로 이 조약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으나 그 위험이 사라진 다시 서쪽의 실지를 회복하였다. 바흐람 2세의 사후(2933)계승 문제로 내분이 일어나 비록 샤푸르 1세의 막내 아들 나르세스(NARSES, 293~302)가 승리하여 즉위했지만, 아르메니아는 296년 에 로마의 수중에 떨어져 40년간 이 상태가 지속되었다. 나르세스의 사후 그의 아들 호르미즈드 2세(302~9)가 뒤를 이었으나 곧 내란에 시달렸다. 이 내란은 샤푸르 2세의 즉위시까지 지속되었다. 샤프르 2세(309-379)는 어린나이에 권좌에 올랐다. 그의 재위기간은 70년에 달했지만 초기 30년은 어머니의 섭정 아래 있었다. 그는 변경의 아랍부족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는 사실 왜 알려진 것이 별로 없다. 아르메니아 실지 회복 노력은 빈번히 실패로 돌아갔으나,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사후(361) 티그리스 강변과 아르메니아 지역은 이란의 영토가 되었다. 아르메니아도 이 시기에 그리스도교가 지배적이 되고 로마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인 후 그리스도교화 되었으므로 이후 이란과 로마-비잔티움 사이의 분쟁은 종교분쟁으로까지 변모했다. 그리스도교도는 1세기와 2세기 중에 로마의 박해를 피하여 이란에 피난 하였으므로 사산조는 이들에게 동정적이었으나 그 이후는 그렇지 못하였다. 샤푸르 2세도 처음에는 그리스도교도를 미워하지 않았으나 339년부터 그의 임종시까지 그들을 핍박하였다. 샤푸르 2세의 사후 약. 20년간의 혼란기(아르다시르 2세, 샤푸르 3세, 바흐람 4세)가 지난 후 야즈다지르드 1세(399-420)가 왕위에 올랐다. 그는 그리스도교에 대해 관용 정책을 떴는데, 이 때문에 귀족들의 원성을 샀다. 또 그의 사후(420) 아들 바흐람 5세(420~438)의 계승에 어려움이 있었으나 아랍 부족국가인 히라 (Hirah) 왕족 알 문디르(AL-MUNDHIR)의 도움을 받아 그는 왕위에 올랐다. 그는 동부 헵탈리트(Hephthalite: Huns 라고도 부름: 동양사의 흉노족 Cam. Vol. 3 PP. 146-8)족의 침 입으로 비잔틴(일명 동로마)제국과의 전쟁(421-422)에서 실패하자 제국과 100년간 의 평화 조약을 맺고 그리스도교도에게 신앙의 자유를 허용했다. 얼마 후 헵탈리트 족은 다시 침입하여 사산조를 괴롭혔다. 샤한샤 피루즈(FIRUZ 457-484) 는 그들과의 전쟁에 참패하여 전사했으며, 그의 가족과 보물도 그들에게 떨어졌다. 그의 동생 발라쉬(BALASH, 484~488)가 즉위하여 방어에 골몰했으나 무능하여 폐위 당했다. 후계자로 피루즈의 아들 카바드 1세(KAVADH I. 488-496 & 499-531)가 즉위했으나 귀족들의 세력을 꺾어 놓으려다 실패하여 폐위 당했다. 그는 헵탈리트족에게 도망하여 3년 뒤에 그들의 도움으로 다시 왕위를 회복 했다. 그는 새로운 종교운동을 일으킨 마즈닥(MAZDAK)을 응호하여 정통 조로아스터교를 박해했다. 그러나 그의 아들 호스로우 1세(KHOSROW 531-579)는 정통 조로아스터교를 재정립하였으며, 과세제도의 신설과 토지세의 개혁 등 을 이루어 사산조의 명망 있는 통치자가 되었다. 그는 누쉬르완(Nashirwan, 불멸의 영혼 소지자) 이름으로 더 알려졌다. 토지세도 현물 납부제를 폐기하고 현금으로 대체했는데 이 정책은 후에 아랍무슬림 정권도 그 골격을 계승했다. 밀과 보리밭은 약 6880m² 당 연간 1디르함, 같은 넓이와 기간에 포도밭은 8디르함, 자주개자리발은 7 디르함, 논은 5-6 디르함, 또 대추야자 나무는 4-6그루마다 1디르함, 올리브는 6그루마다 1디르함 등으로 확정했다. 그외의 다른 재배물과 주인없는 대추야자의 수확은 면세조치했다. 또 20-50세의 남자는 인두세를 납부토록 했는데 그 면제자는 귀족, 관료, 군인, 성직자 및 왕실 종사자 등이었다. 납세 등급도 자산과 소득에 따라 연간 4-12디르함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또 그는 군대의 조직도 개혁하여 강력한 군대로 만들었다. 낮은 급의 귀족들이 군대의 골간을 이루었는데 그들은 아무런 대가없이 복무했으며 그 장비도 자비 부담이었으나 개혁후 정기적 급여를 받았고 또 그 장비의 구입비용도 지원받았다. 더구나 기병대를 강화했으며 전쟁포로들을 활용하여 군인으로 만들었다. 그 이전의 보병들은 불만에 찬 농민들의 자제 로 충원되었기에 기회가 닿는데로 도주했다. 군사령관인 이란 세파바드(Iran Spahbad)직은 페지되었다. 모든 군대는 왕의 휘하에 들어갔다. 그 휘하에 네사 람의 동(호라산, 사카스탄, 키르만), 서(이라크, 비잔딘 제국과의 국경), 남(파르스, 수사) 및 북(메디아, 아제르바이잔)지역 사령관을 두어 통솔했다. 군기와 군률은 엄격하였다. 비 잔틴 제국의 유스티니안(JUSTINIAN)황제와도 자웅을 겨루었고 또 헵탈리트족 의 침입도 여러번 격퇴하는 등 공적을 세워 그의 위력은 흑해에까지 다다랐 다. 투르크 족은 560년경 이란 동부지역에서 출현하여 중근동으로 진출하기 시 작했으나 아직 사산조의 영역에 심각한 위협은 되지 않았다. 호스로우 1세로 부터 왕위를 물려받은 호르미즈드 4세(HORMIZD IV. 579-590 재위)는 비잔틴 제국 과의 평화 협상에 실패하였지만, 그리스도교 신자에게 관용정책을 꼈다. 이 정책은 바흐람 추빈(BAHRAM CHUBIN)장군이 획책한 음모로 인하여 결국 조로아스터교도들의 반란을 야기시켰다. 장군은 호로미즈드 4세의 아들 호스로우 2세를 옹립하여 아버지를 처형시켰다. 그후 곧 장군이 왕위에 오르려 시도하니 호스로우 2세는 비잔틴 제국으로 도피하였다. 그는 비잔틴 황제 마우리스 (MAURICE 582-602)의 도움을 받아 591년 바흐람 추빈을 물리치고 크테시폰에서 다시 왕위에 올라 통치기간(501~628) 동안에 번영을 누렸다. 마우리스 황제가 암살되자(602) 비잔틴 제국과 다시 전쟁이 시작되었다. 후스로우 2세의 군대는 안티오크(611), 다마스커스(613), 예루살렘(614), 이집트(619) 등을 차례로 정복하였 다. 610년 왕위에 오른 비잔틴 제국의 해라클리우스는 보복 공격을 시작하여 627년에는 티그리스 강 유역까지 진출하였다. 이 후 후스로우 2세는 자신의 아들 카바드 2세(일명 SHIRUYE)에게 살해되었고 (628), 카바드도 얼마 후 사망하자 한 동안 혼란했으나 호스라우 2세의 손자인 야즈다지르드 3세(YAZDAJIRD Ⅲ)가 왕위에 올랐다(633). 비잔틴 제국과 이란 사이의 장기간에 걸친 전쟁으로 인해 사산조의 국력은 쇠퇴하여있는 가운데 이슬람화된 신흥 아랍족의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였다. 유프라테스 강변의 카디시야 전투(637)에서 사산조의 최고 지휘관 루스탐이 전사했으며, 야즈다지르드 3세도 651년에 메르브 근처에서 암살되었는데, 이 와 함께 이슬람 이전의 이란역사는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아랍무슬림들은 조로아스터교에 관용을 베풀었지만 이 종교는 제국의 몰락과 함께 점차 쇠퇴일로를 걸었다. 이후 조로아스터교는 이란에서 점차 사라졌으며, 현재 이란의 야즈드 및 인도의 뭄바이(Mumbai 옛이름 봄페이) 등지에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2) 종교와 문화
파르티아 시대에는 조로아스터교의 절대신 아후라 마즈다와 이란의 전통적인 신들의 결합이 이루어진 것이 그 종교적 특징인데 반하여 사산조 시대에 는 불과 빛의 숭배 의식과 아후라 마즈다에 대한 경배 의식이 강조되었다. 더구나 사산조의 창시자 아르다시르의 선조들은 이스타흐르(Istakhr, 페르세폴리스의 이란명)의 조로아스터교 사원을 돌보고 있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국가와 교회의 관계도 밀접했고 상호 보완적이 되었다. 조로아스터교는 사산조 시대에 체계적인 종교로 발전하였다. 최고 승려(Mobedan mobed, 승려중의 승려)는 왕에 의해 임명되었는데 종교 관할권뿐만 아니라 왕위 계승자의 선정과 국사에도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특히 승려들은 읽고 쓰기에 능통하였고 또 아베스타를 비롯한 종교서적의 해설에 절대적 권위를 행사하였다. 게다가 그들은 행정관청에서 문서를 작성하는 서기와 같은 비종교적 업무도 수행했다. 사산 조는 중앙집권적 체제와 국교를 확립하였는데 이것은 파르티아조의 지방분 권적 봉건제와 신들의 결합과 같은 절충식 종교와는 대조를 이루었다. 이 정책은 국가적 단합을 목표로 시행되었으나 봉건적 분권요소와 종교의 절충적 성격은 실생활에 잔존했다.
선과 빛의 신 오르미즈드(OHRMIZD 즉 아후라 마즈다)와 악과 어둠의 상징 아흐리만(AHRIMAN)의 대결이라는 이원론(二元論)의 구도를 교의로 삼고 선한 신령과 천사는 모두 전지 전능한 아후라 마즈다의 지휘를 받았다. 또, 여기에다 사산 조의 근거지인 파르스 지역의 관행도 종교의례 속에 상당히 스며들어 간 것 같다. 그래서 태양신 미트라도 조로아스터교와 결합된 것이다. 신학도 발전되어 선의 신 오르미즈드와 악마 아리만도 무한한 시간(Zurvan) 에서 나온 것으로 생각하여 종래의 이원적(二元的) 개념을 수정하려는 주르반 종파가 나타나 한동안 지배적 교의로 위세를 누렸으나 호스로우 1세 (KHUSROW, 531~579 재위)가 이를 이단으로 선언하여 다시 정통 조로아스터교로 돌아갔다. 사산조의 조로아스터교는 제도화의 과정과는 별도로 의례의 정교 화와 교리의 순수성을 도모하면서 발전했다. 즉 인간 양심상 옳고 그름을 확히 하는 결의론(決既為, casuistry)적인 체제를 더욱 완전하게 또 더욱 정교하게 다듬어 가서 결국 인간이 부딪치는 모든 일을 허락된 것과 금지된 것으로 구분했다. 이 기준의 어김은 곧 죄가 됨으로 각자는 엄격히 준수할 의무가 있었다. 죄를 짓는 경우 속죄함이 당연시 되었다. 조로아스터교가 이런식으로 발전하자 정통성이 강조되어 승려들의 훈계에 신자들은 순종하게 되었 다. 따라서 비정통적 또는 이단적 의례는 국가에 대한 반역이고 진정한 신에 대한 모독으로 간주되어 관용성은 점차 퇴색되고 그 대신 벌칙만 난무해졌 다. 그리스도교는 3세기 중반 이후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강변의 아람어 사용 공동체에서 추종자가 많았다. 로마 제국에 그리스도교가 공인되기 전에는 사 산조는 그리스도교를 관용했으나 마니교나 영지주의 (Gnosticism)에 대해서는 적 대적 태도를 취했다. 그러나 로마의 콘스탄틴 황제 (CONSTANTINE 306-337)가 점차 그리스도교를 공인한 후 이란에서는 그 입장이 급변했다. 특히 339년 이후 그리스도교도들은 샤푸르 2세와 그의 후계자들로부터 심한 박해를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란의 그리스도교도는 사산 왕조가 멸망한 후에도 오랜 기간 남아 있었다. 사산조 시대에는 조로아스터교의 달력도 확립되었다. 즉 1년은 365일인데 한달은 30일씩 12달로 총 360일이고 나머지 5일은 윤일이었다. 각 달의 이름은 오늘날까지 남아 이란달력에 그대로 사용되고 있는데 주로 조로아스터교의 주요 천사나 신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다. 예를들면 정월은 Farvardin 인데 인간의 보호 천사 Farvashi 에서, 7월은 Mehr 인데 빛의 신 Mithra에서 유래 된 것이다. 해마다 많은 명절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 지금까지 남아있는 중요 한 명절은 이란의 설날인 노우루즈(Nouruz, 춘분일)이다. 이 설날은 오늘날도 이란의 최대 명절인데 축제기간이 13일간이나 지속되지만 당시에는 6일간이었 다. 그외에도 이란력 7월(mehr) 16일은 서양력 10월 6일 경에 상용하는데 빛의 신 미트라의 축제일인 동시에 수확에 대한 감사의 날이기도 하다. 또한 불의 발견에 대한 감사의 축제일이 있었다. 이 날을 사다크(Sadak)라 불렀는데 현대 페르시아어에서는 사데(Sade)라고 하며 노우루즈 보다 50일 전에 맞이한다. 샤푸르 1세의 치하에서 마니교라는 새로운 종교가 나타났다. 창시자 마니 (2167-274?)는 파르티아 왕족의 후손이며 그의 모어는 아람어(Aramaic)였다. 그 교리는 영지주의 (Gnosticism)의 사상과 철학에서 강한 영향을 받았다. 또한, 마니는 스스로 예수의 사도 가운데 한 사람인 요한의 복음을 전파하는 보혜사 (Paraclete)라고 자처했다. 그는 요한복음의 영지주의적 해석을 통하여 조로아스 터교와 그리스도교의 사상을 함께 결합하려 애썼다. 또한 그는 불교로부터도 환생의 개념도 도입하였다. 이러한 마니의 가르침은 샤푸르 1세의 지원을 받아 이란과 그 이웃나라에까지 널리 전파되었으나. 그의 아들 바흐람 1세 (273-276)의 탄압 정책으로 마니는 처형되었고, 신자들은 박해를 받았다. 그 후 마니교는 호라산 지역과 사산제국의 동부 및 중앙 아시아에서 명맥을 유지 하였다. 카바드 1세(Kavadh I, 제 1차 488~496, 제 2차 499~531 재위)의 통치기간중에 마즈닥 (Mazdak)이라는 사람이 나타나 부자나 권력자도 다 같이 맨손으로 태어났는데 어떤이의 살림은 너무나 풍요롭고 또 다른이의 그것은 딱할 정도로 그 차이가 심하고 불공평하다고 설파했다. 그 원인은 여성과 재산의 사유에 있고 이 사유에서 부러움, 탐욕 및 욕구가 발동하여 노여움과 중오로 발전하여 결국 사도(邪道)에 빠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여성과 재산의 공유를 주장했다고 한다. 그러나 현존하는 사료는 대부분이 마즈닥에게 적대적인 측에서 나왔으므로 여성의 공유는 다소 과장된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 견해이다. 단지 마즈닥교는 이족결혼(異族結婚, exogamous)을 통하여 엄격한 혈족체제를 타파하려는 욕구를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본다. 마즈닥교의 중용성은 사산조 사회에 미친 그 영향뿐만 아니라 이슬람의 이란정복 후에도 상당한 기간 지속되었기 때문이다(Bausani, 1962:635)
사산조 예술의 가장 뛰어난 작품은 석회석 절벽 위에 새겨진 거대한 부조물이다. 그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것이 페르세폴리스 근처에 있는 낙쉐 로스탐(Naqsh-e Rostam)과 낙쉐 라잡(Nagsh-e Rajab) 등이며 지금까지 남아있다. 그 외에도 이와 유사한 유적이 비샤푸르(Bishapur)에 있는데 이 고대 도시는 파르스 주의 카제룬(Kazerun)북쪽에 있다. 이 부조물들의 모습을 통해 사산조 통치 자의 모습도 살펴볼 수 있다. 현존하는 건축물로는 호스로우 2세(590-628)가 크데시폰에 세운 거대한 궁전이다. 이 궁전의 일부는 잔존하고 있는데 구운 벽돌로 돔 형식의 천장을 만드는 사산조의 전형적인 건축물의 진수를 보여 주 고 있다. 그 외에도 시라즈 남쪽의 피루자바드(Firuzabad)와 그 동남쪽의 사르베스탄(Sarvestan)에도 아르다시르 1세의 궁전이 보존되어 있는데 그 방들의 천장은 대체로 돔과 홍예인데 이것은 사산조 시대의 건축물의 특징이다. 사산조 시대에는 문학이 발달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이 왕조가 문학보다 종교 우선정책을 추진한 데서 비롯된다. 하지만 이 시대에는 파르티아조 시 대와는 대조적으로 그리스어와 그 문학은 거의 사라졌다. 그러나 외국종교의 영향과 더불어 외국 문학도 들어와 중대(中代) 페르시아어의 한 형태인 파흘라비 어(Pahlavi)로 번역되었다. 그러나 파흘라비어로 쓰여진 문헌 가운데 현존 하고 있는 것이 드물다. 현존하고 있는 것도 사산조의 말기나 그후에 편찬된 것이지만 그 내용만은 이 왕조에 관한 것이다. 그 이유는 역사의 기록에 대한 관심이 사산조 말기나 그 이후에 나타났기 때문이다. 이 시대의 가장 뛰 어난 번역 작품은 후스로우 1세 때 완성된 '칼릴라와 딤네'인데, 인도의 전설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 밖에도 헬레니즘의 낭만주의 문학도 소개되었다.

(3) 국가구조와 사회생활
사산조의 사회는 직능별로는 성직자(astavan), 전사(arteshtaran), 관료(dipiran) 및 평민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평민은 또한 농민(vashtrashan)과 수공인(hutukshan)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현상은 고대 아리안족과 아케메니아조 시대의 사회와 유사하다. 유일한 차이점은 관료층이 추가된 점이다. 본래 아리안족 사회에는 관료층이 없었고 또 그 명칭으로 보아 메소포타미아에서 유래한 것이 분명하다. 고대 수메르어로 dip-/dup-는 '새기다' 또는 '글쓰다'의 뜻이다. 지배층을 신분별로 분류해 보면 통치자총(shahrdaran), 명문귀족 (vaspuhran), 거족(vuzurgan) 및 자유인(azadan)이 있었다. 통치자층에는 왕족, 각주 의 제후, 변경주의 태수(marzban)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큰 주의 총독은 왕실의 지친(至親)가운데서 발탁되었기에 그 칭호조차 샤(shah, 왕)이었다. 그래서 사산조의 통치권자는 그들과 구분하기 위해 샤한샤 (shahan-shah, 왕중왕)라 불렸다. 명문귀족(vaspuhran)에는 사산조의 건국에 공헌이 많은 7대 명문귀족(Karen 가문, Aspahbad 가문 등)의 수장과 그 구성원을 비롯한 대 지주계층이었다. 그들 가운데 일부는 세습적 직위도 가지고 있었다. 거족 (vaspuhran)은 정부의 고위관료(에: 대신 및 부서의 우두머리)들로 이루어진 반면에 자유인은 지방의 호족 출신이었다. 그들은 주로 지방의 행정관서에서 요직을 차지했다. 그들 가운데는 데커난(dehqanan, 농촌의 소유주)도 포함되어 있었다. 중앙정부에서 주권자인 왕 다음의 인물은 재상(vuzurg framadar, 대사령관)이었는데 그는 종종 천명의 우두머리 (hazarpat)로도 알려졌다. 그의 권력은 왕권의 보좌역 을 맡는데 있다. 토지세의 수납업무는 재무대신(vastryoshbad, 농민의 우두머리 또는 hutukshbad, 수공업 우두머리)이 관장했다. 국가의 세입은 주로 토지세(kharag, 여기서 아람이의 kharaj 가 유레)에서 충당되었다. 토지세는 토지의 비옥도에 따라 수확량의 1/6에서 1/3정도까지 책정되었다. 때때로 그 절반까지에도 이르렀다고 한다. 인두세(gezit, 여기서 아람어의 jizya 유래)는 주로 수공인에게 부과되었다. 그외의 세입원으로는 임시세, 특별 헌납(ayen) 및 관세등이 있었다. 산업과 상업활동 및 통상로 등은 파르티아조 시대와 별반의 차이는 없었 다. 이란은 여전히 한편으로는 중앙아시아와 중국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리스와 로마제국 사이에 위치한 교차로 역을 맡고 있었다. 따라서 이란은 주변의 강국으로부터 넓은 영토를 방어하는데는 강력한 군대가 필요했다. 사산조 의 창설자 아르다시르가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칭호는 성주(城主, argabad)였다. 그러나 실질적 지휘자는 이란군 사령관(eran-spahbad)였는데 그는 국방 대신역 도 맡고 있었고 또 강화조약도 맺었다. 근위군도 별도로 있었다. 해군은 주로 페르시아만의 아랍인으로 충원되었으나, 별로 중시되지 않았다. 사산조는 고도로 중앙집권화 되었기 때문에 행정관료(dipir)들의 역할은 매우 중요했다. 그들의 우두머리는 행정대신(eran dipirbad)였는데 그는 법률, 우편 및 재정에 능통한 보좌관의 도움을 받아 업무를 수행했다. 사산조에서는 태수(marzban)가 예날의 주총독(satrap)을 대신했는데 특히 변경의 태수가 요직으로 평가되었다. 전쟁의 승패에 따라 주의 수도 가감되었다. 새로운 지역을 정복했을 때 왕은 필요에 따라 태수를 임명 파견했다. 주는 다시 지구(istan) 로 나뉘어졌고 이것은 구역 또는 마을로 세분되어 있었다.


이란사/ 김정위 편저 (2001)


구하기 어려운 책이라 선물하기 전에 관심있는 파트만 옮겨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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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9 공지 주한 이란 대사관의 이란 역사 개관 [2] 샤한샤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9.03.13 890 10
1 공지 이갤러리는 뭐하는데나? [3] 안토니아꼬레아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8.08.06 1169 12
155 공지 나는 관대하다! 페르시아 갤러리입니다. [1] 키루스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9.01.08 938 8
1350 공지 새 왕중왕 취임사겸 갤러리 운영 기조 [9] 예루살렘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9.05.08 787 12
5078 정보 이란게이들 이란어방 들어와라 ㅇㅇ(118.221) 04.30 6 0
5077 정보 UCLA 푸르다부드 재단 사이트에 강의 많음 [1] 레드앤옐로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3.20 43 0
5076 일반 이갤에 여성분들도 계실텐데 일베용어는 지향하면 안될까? [1] 페갤러(223.38) 02.03 93 0
5074 호메이니 마이너 갤러리에 오신 것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1] 淸太宗皇太極.. ■x■x(121.167) 01.01 56 2
5072 워워 진정해라 튀르크 게이야 ㅇㅇ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3.11.20 89 2
5069 일반 프란츠 요제프 1세와 만난 무자파르 앗 딘 샤 ㅇㅇ(118.41) 23.10.17 47 0
5068 일반 햄이다 햄 개추박아라 ㅇㅇ(118.41) 23.10.13 51 1
5067 일반 헐 이갤 아직도 있었네 [1] 레드앤옐로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3.10.10 98 0
5064 일반 "비슈타스파와 조로아스터: 숨겨진 연결고리를 찾아서" [2] 책사풍후미나모토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3.09.06 87 0
5063 벌써 멸망시키었던 페르시아 갤러리입니다 [1] 淸太宗皇太極.. ■x■x(121.167) 23.08.07 100 2
5062 일반 이란 여자 ㅗㅜㅑ [1] ㅇㅇ(39.7) 23.07.17 202 5
5061 일반 설레 노 모버락 [2] ㅇㅇ(38.240) 23.03.21 138 1
5060 일반 오스트리아갤에서 왔는데 여기 왜 정전임 ㅇㅇ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3.03.11 108 0
5059 일반 형들 이런거 뭐냐 [1] ㅇㅇ(121.150) 23.01.31 136 1
5058 일반 예전 이란 페르시아 시어파 꿈을 꿨던 썰 淸太宗皇太極.. ■x■x(121.167) 23.01.01 150 0
5057 일반 asddds ㅇㅇ(115.86) 22.12.31 66 0
5056 일반 asd ㅇㅇ(115.86) 22.12.31 70 0
5055 일반 페르시아가 웨일스 이겼다 ㅇㅇ(125.248) 22.11.25 89 0
5053 일반 ashem vohu ㅇㅇ(221.167) 22.10.05 101 0
5052 일반 요즘은 이란 페르시아 시어파뿐만 아닌 배화교가 꿀리더만 淸太宗皇太極.. ■x■x(121.167) 22.08.07 167 2
5051 일반 주딱마저 운지해버렸노 [1] ØØ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2.07.23 205 1
일반 사산 조 시대 베이린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2.05.03 313 0
5049 일반 바하이교와 동학 o o(210.105) 22.04.20 163 0
5048 일반 아니 씨발 게임을 어케 만들었길래 효과 처리를 ㅈ같이 하냐 [1] ㅇㅇ(121.137) 22.03.09 260 0
5047 일반 여긴 조로아스터교 신자 없음? [1] ㅇㅇ(221.167) 22.03.01 271 0
5046 일반 이란친구들한테 택배 보내본분 있나요? 질문좀요 ㅇㅇ(112.170) 22.02.18 204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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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41 일반 사산왕조는 죽었다 [2] 무아위야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2.01.13 365 7
5037 정보 폭풍과 천둥, 불꽃 aftergduo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1.12.24 182 1
5036 정보 이란어군 언어들의 '눈(雪)' [1] aftergduo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1.12.23 329 3
5035 정보 조로아스터교의 대(大) 기도문 aftergduo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1.12.23 207 0
5034 일반 지금의 이란 어케 생각함 [3] ㅇㅇ(211.201) 21.12.22 384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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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30 싱글벙글 페르시안 고양이...jpg Hunyadi_Janos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1.10.28 289 10
5029 일반 이 영상 나오는 곡 이름들 좀 알랴줄수잇슴? 망령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1.10.14 173 0
5028 일반 이번달 말에 고대 페르시아어 수업 들음 [2] 레드앤옐로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1.10.09 463 1
5024 일반 윾갤ㅡ패독갤 역대 주딱 목록 좀 알려줘 [1] ㅇㅇ(223.62) 21.09.02 249 0
5023 일반 사산조 기병 ㅇㅇ(118.235) 21.08.21 247 3
5022 일반 생각보다 쿠샨이 토하라랑 연관이 있네 [2] aftergduo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1.08.20 297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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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20 정보 아람어의 페르시아어 차용어 aftergduo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1.08.10 238 0
5019 정보 중세 이란어의 아람주의.txt aftergduo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1.08.09 253 4
5018 2021년 동경올림픽 한국 MBC방송서도 인증한 이란 짤.JPG 淸太宗皇太極.. ■x■x(121.167) 21.08.07 411 7
5017 일반 사람을 필멸자로 부르는 언어 aftergduo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1.08.03 248 2
5016 일반 페르시아어 인터넷 정보량 무려 5위 ㄷㄷㄷ [1] ㅇㅇ(211.194) 21.08.01 360 2
5015 일반 여기 왜 이란 금메달 얘기 없냐 ㅇㅇ(211.194) 21.07.30 168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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