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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락과> 2-2. 사이키델리아 1965-68 (상)

수고양이무어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3.10.08 12:3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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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사이키델리아 1965-68


1964년 무렵, 시청각 예술의 세계는 여러 약물의 환각적 효과에 친숙해졌다. 1964년 MK 울트라의 졸업생 Ken Kesey는 “Magic Bus”를 타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샌프란시스코 인근) La Honda의 코뮌에서 살며 “Merry Pranksters”를 결성했는데, 산타 크루즈에 소재한 Ken Babbs의 서점에서 빛의 쇼와 함께 1965년 11월에 처음으로 (LSD로) “약물 체험acid tests”을 시작했다. 한편 티모시 리어리는 “The Psychedelic Experience”를 저술했다. 1965년 UC 버클리의 화학자 Owsley “Bear” Stanley가 LSD 결정 합성에 성공하자, 베이 에어리어에서 LSD를 대량으로 구할 수 있게 됐다. 1966년 양쪽 해안에서 “약물”은 훨씬 더 많은 이들에게 인기를 끌고 있었는데, 티모시 리어리는 LSD에 기반을 둔 종교인 League of Spiritual Development를 세웠고 벨벳 언더그라운드는 약물 남용을 대놓고 이야기하는 앨범을 냈으며, 샌프란시스코에서는 최초의 “사랑의 여름”을 보내며 사흘 간의 야외 “약물 체험”을 했다.1968년에서 1972년 사이 수천 개의 코뮌들이 전국에 생겨났는데, (1965년 콜로라도에 설립된) Drop City와 (1968년에 뉴멕시코 Taos 인근에 Steve Durkee가 설립한) Lama Foundation을 특기할 만하다. 물론 이 축제 분위기는 1970년 9월 지미 헨드릭스가 약물 과다 복용으로 사망하며 한풀 꺾였는데, 가히 한 시대의 끝을 알리는 사건이라고 할 만하다.


통합


1963년에서 1966년 사이 락 음악은 락앤롤의 본래 성격에서 세 차례 결정적인 변화를 겪었는데, 밥 딜런은 노골적인 사회정치적 메시지를 도입했고, 롤링 스톤스나 더 후 등의 1950년대 “비행 청소년” 이미지의 후예였던 영국 밴드들이 악기와 보컬의 대혼란에 빠져들었으며, 비치 보이스, 비틀즈, 버즈는 스튜디오 기술과 기괴한 편곡에 집중했다. 이 각각은 음악을 수단으로 삼는 세 다른 방식, 심오한 음유시인, 거리의 펑크, 그리고 소리의 조각가를 상징했다. 롤링 스톤스와 더 후는 영원하고 보편적인 젊음의 속성, 반항의 의인화였다. 비치 보이스와 비틀즈는 (베트남 전쟁, 시민권 운동, 핵무기 대량학살의 공포 등의) 시대적 상황에서 최대한 거리를 두려고 했다. 밥 딜런은 늘 그 시대에 집중했다. 딜런은 음악을 무기로, 롤링 스톤스와 더 후는 모욕으로 사용했던 반면, 비치 보이스와 비틀즈는 사상적 혼란에 대체로 무관심했다.


이 전혀 다른 세 가지 흐름이 통합되자 사이키델릭 음악의 위대한 시대가 열렸는데, 이는 당시 시대 정신을 반영하는 장르이자, 스튜디오 소리를 실험하며, 젊은이들의 좌절감을 구현하는 장르이기도 했다.


1966년의 통합은 마치 마약이 음유시인, 펑크, 소리의 조각가의 자연스러운 만남의 장소였던 것처럼 환각제에 의해 촉진되었다. 마약이 그 세대가 하나로 묶이도록 호출하는 역할을 맡은 건 그저 우연이었을 가능성이 높지만, 다른 이유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마약은 쉽게 구할 수 있었고, (전쟁, 부르주아의 삶, 규율, 탐욕, 조직화된 종교, 구식 도덕 가치 등의) 기성 제도가 대표하는 것들의 정반대 위치에 있었으니 말이다.


이 역사적인 통합을 구체화한 사건을 굳이 꼽자면, 1966년 5월 딜런의 더블 앨범(그 자체로 기존 형식에서 크게 벗어난) Blonde on Blonde가 나온 것을 꼽을 수 있을 테다(아이러니하게도 이 앨범은 1965년 10월에서 1966년 3월 사이, 내슈빌에서 녹음되었다). 그 전까지 락 음악가들은 3분짜리 멜로딕 팝 음악의 틀 안에서만 활동했었다. 그 앨범이 나온 후로, 이 Tin Pan Alley의 전통적인 음악 형식에 얽매여 있는 건 그저 주류 상업 음악 뿐이었다. 런던, 뉴욕, 로스앤젤레스에서 길고 자유로운 형식의 “노래”들이 담긴 앨범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Virgin Forest를 수록한 Fugs의 2집(1월에 녹음되고 3월에 발매됐으니, 사실 딜런을 제친 셈이다), 자파의 더블 앨범 Freak Out (3월에 녹음되고 6월에 발매됨), 롤링 스톤스의 Aftermath (3월에 로스앤젤레스에서 녹음),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The Velvet Underground & Nico (대부분 4, 5월에 녹음), 더 후의 A Quick One (가을에 녹음), 도어즈의 1집 (여름에 녹음), 러브의 Da Capo (여름에서 가을 사이에 녹음) 등등. 개중 몇몇은 딜런의 걸작과 동시에 녹음되고 있었으며, 팝송에서의 집단적인 변화를 예고했다.


음유시인, 펑크, 소리의 조각가의 역사적 통합에 접목된 락 음악의 전환은 “프리 재즈” 붐과 맞물렸다. 락앤롤은 블루스와 컨트리가 합류하는 지점에서 태어났지만, 1966년 이후 블루스와 컨트리/포크는 그저 훨씬 더 복잡한 레시피 속의 많은 재료 중 하나로 남게 되었다. 벨벳 언더그라운드, 제퍼슨 에어플레인, 그레이트풀 데드, 핑크 플로이드의 기나긴 “애시드” 잼은 더 이상 리듬앤블루스와 큰 상관이 없는 느슨한 음악적 인프라에 의존하고 있었다(컨트리는 언급도 마라). 반면 이는 당시 사이키델릭 락 음악가들이 들리던 로프트나 클럽에서 흘러나왔기도 하고, 빠르게 반문화의 두 번째 큰 기둥이 되기도 한(참고로 첫 번째는 시민권과 평화주의 운동이다) 재즈 음악의 형식과 매우 유사했기도 하다. 기본적으로 프리 재즈의 간접적 영향은 사이키델릭 시기의 락 음악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으며, 음악적 혁명을 촉진하고 락을 블루스라는 기반에서 해방시켰다. 1966년 이전까지 락은 로커들이 인정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블루스 전통의 일부였던 반면, 그 이후로는 인정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재즈 전통의 일부가 되었다.


샌프란시스코와 히피들


서프 음악과 그리니치 운동의 시기에 음악적으로 한창 시들해졌던 샌프란시스코는 1965년, 갑자기 미국에서 가장 활기찬 도시 중 하나가 되었다. “비트 세대”의 시인들이 그 노스 비치 지역으로 들어왔다. Jack Spicer, Robin Blaser, Robert Duncan 등의 다른 시인들도 버클리에서 나왔다. Robert Duncan과 Robert Creeley는 존 케이지가 Buckminster Fuller나 Robert Rauschenberg와 어울렸던 노스캐롤라이나의 실험적인 Black Mountain College에서 수업을 했고, 그 정신을 베이 에어리어로 전파했다. 1957년 Black Mountain College가 문을 닫은 뒤에도 버클리가 그 정신을 유지했다. 이 시인들은 주로 구전 공연으로 유명했다. 그들의 활동과 영향은 1964-65년에 정점을 찍었다. 1964년 6월 Lew Welch, Gary Snyder, Philip Whalen을 포함하는 시인들이 Longshoremen’s Hall에서 “Freeway reading” 공연을 했다. 대부분의 시 낭독회는 커피하우스에서 열렸는데, 특히 1962년 말 Bob Stubbs가 하이트-애쉬베리 지역에 처음 연 Blue Unicorn이 대표적이다. 1965년 7월 UC 버클리는 24일 간 시 컨퍼런스를 개최했다. 그 해에 Joe Dunn의 White Rabbit Press, Oyes Press, Four Seasons Foundation 등의 지역 출판사들은 지역 시인의 시집들을 냈고, David Hazelton의 Synapse, David Sandberg의 Or, Gino Clay의 Wild Dog 같은 등사기 잡지들이 늘어났다. 1964년 Len Fulton은 소규모 문학 잡지 카탈로그 Dust Books를, 1966년 Clifford Burke는 Hollow Orange 잡지를 발간했다. 1964년 3월에 Sheraton-Palace Hotel에서 시작한 시민권 운동의 거대한 시위 물결은 몇 개월 후 농성과 행진이 Country Joe McDonald 같은 이의 지원을 받던 UC 버클리에서 Mario Savio가 시작한 “자유 발언 운동”으로 이어졌다. 자유 발언 운동에서부터 비롯된 자유 대학Free University이 1965년, 샌프란시스코 주립대학의 트레일러에서 운영되기 시작했다. 몇 년 내로 전국에 수십 개의 자유 대학이 더 생겨났다.


흥분이 가득했다. 하이트-애쉬베리는 비트족을 대체하는 새로운 종류의 보헤미아의 본거지(뉴욕 그리니치 빌리지, LA의 Sunset Strip, 보스턴의 Cambridge Square, 그리고 샌프란시스코의 노스 비치)가 되고 있었다. 이 “비트족Beatnik”이라는 말은 1958년 4월에 칼럼니스트 Herb Caen이 San Francisco Chronicle에서 만든 말이었다. 1965년 9월에는 또 다른 칼럼니스트 Michael Fallon이 “보헤미아의 새로운 안식처”라는 제목의 기사를 내며 하이트-애쉬베리의 새로운 비트족들을 위한 새로운 말, “히피”를 만들었다.


1965년 여름 샌프란시스코 밴드 Charlatans[역주: 당연하지만 매드체스터의 그 샬라탄즈 아님]는 팬들과 함께 버지니아 시티(네바다)의 Red Dog Saloon을 인수하고 새로운 종류의 관객들을 위한 새로운 종류의 음악을 연주하자는 생각을 떠올렸다. 1965년 7월 Big Daddy로 잘 알려진 (본명 Tom Donahue) 디스크 자키가 Mothers Club을 열었고, 8월에는 또 다른 클럽 Matrix가 제퍼슨 에어플레인의 공연과 함께 문을 열었다. Red Dog Saloon에서 한 해를 보낸 두 팬(Alton Kelley, Luria Castell)은 샌프란시스코 Pine Street의 집으로 돌아왔는데, 다른 두 친구와 공유하던 이 집은 그 네 사람이 떠돌이 개를 입양하기를 좋아했기 때문에 “Dog House”로 통하곤 했다. Luria Castell, Ellen Harmon, Alton Kelley는 Long Shoreman’s Hall에서 파티를 열기로 결심하고 자기들을 Family Dog 공동체라 불렀다. 1965년 10월에 열린 최초의 댄스 콘서트 “A Tribute to Dr. Strange”에는 제퍼슨 에어플레인, Great Society, Charlatans를 초청했다. 이후 두 번은 더 개최했는데, 11월의 세 번째 댄스 콘서트에는 로스앤젤레스 출신 밴드, 마더스 오브 인벤션(자파의 밴드)이 출연했다. 이 “축제”의 성공 이후 샌프란시스코의 새로운 밴드들을 위한 공연장이 곳곳에 생겨났다. 12월에는 San Francisco Mime Troupe의 영업 지배인 Bill Graham이 마임단 공연으로 Fillmore Auditorium을 열었다. 샌프란시스코 남부의 반도 역시 음악씬을 키우고 있었는데, Jorma Kaukonen과 Jerry Garcia가 거기에서 자라났고 Grace Slick은 동쪽 해안의 대학으로 옮겨가기 전까지 팔로 알토의 사립 여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1965년 12월 Kesey의 세 번째 약물 체험이 팔로 알토의 Big Beat 나이트클럽에서 열렸는데, 거기에는 Jerry Garcia의 밴드 Warlocks와 Stewert Brand의 “America Needs Indians” 슬라이드 쇼가 있었다. 며칠 후 Warlocks는 산호세에서 열린 또 다른 약물 체험에 그레이트풀 데드로 이름을 바꿔 출연했는데, 컨트리, 블루스, 재즈에 어렴풋이 기반을 둔 기나긴 기악 잼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1965년, (1960년 12월부터 Encore Theatre에서 매주 일요일 늦은 밤마다 무료 “11th Hour Mime Show”를 열던) San Francisco Mime Troupe의 창립자 Ron Davis는 에세이 “게릴라 극장Guerrilla Theatre”을 냈으며, Ben Jacopetti는 Berkeley Experimental Arts Foundation의 멀티미디어 공연을 위해 Open Theater를 개설했다. 1966년 1월, Steward Brand는 Ken Kesey의 “약물 체험”, Jacopetti의 Open Theater, USCO, (Ramon Sender가 신디사이저를 연주하던) Tape Music Center, 그리고 (그레이트풀 데드, 재니스 조플린 밴드 같은) 락 밴드를 한데 모아 Longshoreman’s Hall에서 “Trips Festival”을 주최했다.


그 주역은 Chet Helms라는 대학 중퇴생으로, 1963년에 친구인 재니스 조플린과 보수적인 텍사스에서 히치하이킹으로 여기에 온 그는 Family Dog이 첫 댄스 콘서트를 개최하는 걸 도운 뒤 Family Dog를 인계받았다. Page Street에 있던 집의 지하실을 잼 할 곳이 필요한 밴드에게 빌려주기도 했다. 1966년 4월 Helms는 인근의 Avalon Ballroom에서 Blues Project, Great Society와 함께 자기만의 주간 이벤트를 시작했다(이는 Family Dog Production 이름으로 청구되었다). 재니스 조플린의 밴드 Big Brother and the Holding Company는 6월에 거기서 데뷔했다. Avalon의 Helms와 Fillmore의 Graham은 도시의 언더그라운드 실력자들을 놓고 경쟁하곤 했는데, 보통 Avalon이 더 우위를 거두는 편이었다. Fillmore의 콘서트 포스터는 1965년, 반전 시위 포스터 “Are We Next?”를 만든 Wes Wilson이 제작했다. Wilson은 락 음악 포스터를 순수 미술로 탈바꿈 시켰다.


1966년 7월 두 작가, Peter Coyote (태어난 이름 Peter Cohon)과 Peter Berg (1963년에 “게릴라 극장”이라는 말을 만듦)는 San Francisco Mime Troupe를 떠나 Diggers라고 하는 새로운 무정부주의적 즉흥 그룹을 만들었다. Diggers는 아방가르드 극단을 넘어 최초의 히피 코뮌이 되었다. 그들은 하이트-애쉬베리 지역을 “살아 있는 극장”으로 만들었다. 히피들에게 정치적 프로그램을 주고 가난과 비폭력에 대한 거의 독단적인 신념을 불어넣었다. 1967년에는 (처음에는 Haight 거리에, 다음에는 Cole & Carl 거리 모퉁이에) 무료 가게를 열었는데, 자원 의사들이 해주는 무료 진료소(몇 주 후 UC 샌프란시스코 의사 David Smith가 시작하는 Haight Ashbury Free Medical Clinic의 전신)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레이트풀 데드는 언제나, 그 누구보다도, Diggers의 단호한 진정성을 지켜나갔다.


1966년 9월 Allen Cohen가 비트 시인 Michael Bowen은 San Francisco Oracle을 창간해 히피와 동양 종교 사이의 유사성을 널리 알렸다. 두 번째 호에 수록된 Bruce Conner의 센터폴드centerfold[역주: 잡지 가운데에 접혀서 들어가는 큰 페이지]는 만다라 유행을 일으켰다.


하이트-애쉬베리는 밥 딜런이 주창한 평화주의 사상을 구현했지만, 정치적 입장은 훨씬 덜했다. 비록 딜런이 주장한 것의 직접적 결과물을 삶의 철학(“사랑과 평화”와 약물)으로 삼고 있었다지만, 불교 철학과도 상당히 가까웠다. 히피들은 행진보다는 축하를 위해 모였고, 항의보다는 기뻐하기 위해 모였다. 영적인 경험이 정치적 경험보다 중요했다. 이는 음악이 (궁극적으로 폭력적인) 반항 행위였던 락앤롤 시대에서 극적으로 변했다는 것을 상징한다.


1966년 10월 캘리포니아 주에서 LSD가 금지되었다. San Francisco Oracle은 Golden Gate Park에서 “Love Pageant Rally”를 그 달 6일에 계획해 그 집회 날짜가 “666”이라고 읽히게끔 했다(10월 6일, ‘66년). 이 집회에는 그레이트풀 데드와 재니스 조플린의 무료 음악이 더해져 사실상 야외 콘서트나 다름 없었다.


Michael Bowen은 1967년 1월에 다시 Golden Gate Park에서 더 거대한 집회(“Human Be-in”이나 “Gathering of the Tribes”라고 부른)를 조직하기로 했다. 이를 최초의 락 페스티벌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을 테다. 연사로는 앨런 긴즈버그(막대한 “옴” 만트라를 주도하는), Gary Snyder, Lawrence Ferlinghetti 같은 시인이나, 최초의 불교 베스트셀러 “The Way of Zen” (1957)을 쓴 Alan Watts, Jerry Rubin 같은 지역 행동가, 그리고 샌프란시스코에 오는 걸로는 처음인, 티모시 리어리까지 있었다. 티모시는 1963년 하버드에서 퇴출된 이후 억만장자 Peggy Hitchcock의 돈을 받아 Millbrook에 새 연구소를 설립한 인물로, 유명한 모토 “Turn on, tune in, drop out”로 사람들의 혼을 빼놓았고, 하버드에서나 Millbrook에서나 그의 동료였던 Richard Alpert 역시 티모시와 함께했다. 이 두 사람은 Ralph Metzner와 함께 “The Psychedelic Experience” (1964)라는, LSD와 신비주의 사이의 공통점을 널리 알린 책을 저술했다. 하지만 진짜 쇼는 바로 군중이었다. 그곳의 군중이 온 (서구) 세계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1967년 5월 Tom Donahue는 FM 라디오 방송국 KMPX에서 자신의 프로그램을 시작했는데, 탑40 곡이 아니라 언더그라운드, 대안적, 프로그레시브 음악, 그리고 특히 긴 음악에 주로 시간을 할애했다.


1967년 6월 마마스 앤 파파스의 John Phillips와 그 프로듀서 Lou Adler는 Monterey International Pop Festival을 주최했는데, John Philips는 이를 위해 Scott McKenzie가 부를 곡, San Francisco - Be Sure to Wear Some Flowers in Your Hair를 써줬다. Diggers는 매스컴의 관심에 전혀 기뻐하지 않았고, 10월에 “Death of the Hippies” 행진/장례식을 열었다.


히피 현상은 단 한 번도 지도자가 없었음에도 전국에 (그리고 전세계에) 퍼져나간 대중 운동이라는 점에서 독특하다. 메시아 없는 메시아 운동과도 같았다. 사실, 샌프란시스코의 히피들은 이 현상을 퍼뜨리기 위해 아무 노력도 들이지 않았다. 샌프란시스코의 정신을 퍼뜨리기 위해 고용된 홍보 담당자도, 전문적인 사업 계획도 없었다. 그럼에도 이는 평화, 사랑(“섹스”가 더 정확하지만), 약물, 그리고 락앤롤이라는 네 기둥을 중심으로 들불처럼 미국 전역, 나아가 서유럽까지 번졌다. (Los Angeles Free Press, East Village Other, Berkeley Barb, San Francisco Oracle, 디트로이트의 Fifth Estate, 시카고의 Seed, 영국 International Times 등) 대안 언론의 도움이 있기는 했지만, 지하 운동을 촉발하기보다는 단지 기록하는 데에 그쳤다.


히피들의 음악은 대부분 포크 락의 발전된 형태였다. 이는 “애시드 락”이라고 이름 붙여졌는데, 기본적으로 이 음악이 LSD 파티에서 배경음악으로서, LSD의 “환각trip” 효과를 최대한 가깝게 반영할 수 있는 배경음악으로서 제공되었기 때문이다. 이 음악은 여러모로 락 버전의 추상화(잭슨 폴록), 프리 재즈(오넷 콜먼), 그리고 비트 시(앨런 긴즈버그)였다. 이 현상은 형식이 “곧” 내용인 느슨한 구조와 수 세기 동안 내려져온 미적 가치를 무시하는 태도를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었다. 음악에서 이는 즉흥 연주가 작곡만큼 (또는, 심지어 작곡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했다. 애시드 락의 주요 발명품은, 물론 재즈와 블루스 음악가들이 예전부터 해오곤 했던, “잼”이었다. 다만 약간 다른 맥락에서 잼을 했는데, 뛰어난 기교의 연주를 덜 강조하고 멜로디를 더 강조했던 것이다. 가장 눈에 띄는 차이점은 (음악가들의 인종을 제쳐두자면) 일렉트릭 기타의 주도적인 역할이었다. 더 미묘한 차이점은 블루스의 열정적이고 고통스러운 정신이 초월적이고 선불교스러운 정신으로 대체되었다는 점이다. 애시드 락의 원형은 사실 시카고에서 백인 블루스 연주자 Paul Butterfield (1)에 의해 녹음된 East-West (1966)로, 이는 아프리카계 미국과 인도의 즉흥 연주를 융합시킨 긴 곡이다. 악기의 측면에서 보면 애시드 락은 여전히 리듬앤블루스의 후예에 가까웠지만, 보컬의 측면에서는 포크와 컨트리 음악의 후예에 가까웠다. 그 멜로디와 화음은 주로 백인 전통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었다. 1966년은 잼의 해로, Fugs의 Virgin Forest, Paul Butterfield의 East-West, Seeds의 Up In Her Room, 롤링 스톤스의 Going Home, 밥 딜런의 Sad Eyed Lady Of The Lowlands 등이 나왔다. 이후 몇 년 간 락 음악가들은 점점 더 복잡하고 긴 작품들을 녹음하기 시작했다.


제퍼슨 에어플레인 (25)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락 밴드 중 하나였다. 단지 히피 시대의 정신과 소리를 그 누구보다도 잘 구현한 데에서 그치지 않고, 노래(Grace Slick), 화음(Paul Kantner, Marty Balin), 베이스 연주(Jack Casady), 기타 대위법(Jorma Kaukonen) 그리고 드럼(Spencer Dryden)을 락 음악에서 재정의한 어마어마한 재능을 가진 멤버들을 데리고 있었다. Somebody To LoveWhite Rabbit 같은 초창기 싱글들은 사이키델릭 락을 음악 장르로 정착시키는 데에 기여했다. 그들의 음악은 상당히 자전적이었으며, 그들의 경력은 사실상 그들 세대에 대한 다큐멘터리처럼 보인다. Surrealistic Pillow (1966년 11월- 1967년 2월)은 히피 세대를 위한 선언문이었다. 사이키델릭 시대의 가장 뛰어난 예술적 성취 중 하나인 After Bathing At Baxter’s (1967년 6월 - 1967년 11월)는 노래 형식과 팝 편곡의 관습을 깬 앨범이었다. Crown Of Creation (1968년 6월 - 1968년 9월)에서 변형된 포크-팝-재즈-락 자장가와 발라드로 잠시 우회한 이후, 그들의 최고 걸작인 Volunteers (1969년 4월 - 1969년 11월)는 (음악과 도덕, 양쪽 측면에서) 뿌릴 돌아가려는 퇴보적 경향과 강경 정치로 나아가려는 진취적 경향을 융합시켰다. Paul Kantner의 SF, 정치적 콘셉트 앨범 Blows Against The Empire (1970년 ?월 - 1970년 11월)는 코뮌의 이상에 대한 향수와 우주 시대에 대한 유토피아적 찬사였다. Paul Kantner와 Grace Slick이 크레딧으로 올라가 있는 Sunfighter (1971년 ?월 - 1971년 11월)는 노래 형식과 (“생태학적” 개념으로서의) 자연으로의 어른스럽고 엄숙한 귀환이었다. 두 사람의 2집, Baron Von Tollbooth & The Chrome Nun (1972년 12월 - 1973년 5월)은 제퍼슨 에어플레인의 축가스러운 배음을 독자적인 미학으로 변형시켰다. 그들의 “마케팅 매력”은 그들이 새로운 삶의 방식을 대표했으면서(물론, 실천하기도 하며) 동시에 음악적으로는, 다른 애시드 락 밴드들이 노래 지향적 형식에 도전했던 것과는 달리 거의 그러지 않았다는 점일 테다. 제퍼슨 에어플레인은 그들이 여전히 팝 음악의 세계에서 살았고, 포크와 블루스의 뿌리가 여전히 눈에 띄었고, 여전히 멜로디가 무게 중심으로서 기능하고 있었기에, 제도권에게 부분적으로 용인되었다.


나머지 이들은 위의 저 모든 것들에 반대했다. 많은 이들에게 역사상 “가장” 뛰어난 락 밴드로 손꼽히는 그레이트풀 데드 (23)는 샌프란시스코 히피 문명의 기념비이자, 일반적으로, 1960년대 사이키델릭 문명의 기념비이기도 했다. 그들의 최고 발명품은 재즈 즉흥 연주를 락 버전으로 바꾼 긴, 자유 형태의 그룹 잼이었다.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불만을 표출하는 재즈의 잼과는 달리, 그레이트풀 데드의 잼은 LSD “환각”을 위한 배경음악이었다. 하지만 이는 곧 제도권으로부터의 탈출, 예술적 자유와 대안적 삶의 형태라는 사상 전체를 대표하게 된다. 약쟁이와 부적응자라는 이미지와는 대조적으로, 그레이트풀 데드는 유럽 아방가르드의 무조 작곡이나 프리 재즈의 즉흥 연주 및 다른 문화권의 리듬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역사상 가장 박식한 그룹 중 하나였다. 그들은 기타 피드백과 변박자를 락 버전의 실내악 악기로 변형시켰다. Jerry Garcia의 무한하게 상승하고 하강하는 음계는 락에서 시도된 가장 거대한 시도 중 하나이다. 그레이트풀 데드는 음반을 많이 팔아본 적이 없는데, 그들이 선호하는 형식은 음반보다는 라이브 공연이었다. 사실상 “대중 음악”을 재정의한 셈인데, 라이브 공연은 자본주의의 규칙을 피해 오락에서 사업 계획을 제거했다. 그들의 녹음된 걸작, Anthem Of The Sun (1968년 3월 - 1968년 7월), Aoxomoxoa (1969년 3월 - 1969년 6월), Live Dead (1969년 3월 - 1969년 11월)는 그 예술을 근사할 뿐이다. Anthem Of The Sun은 스튜디오에서 온갖 이펙트와 기술로 다듬어졌다. 밴드는 척 베리가 아니라 카를하인츠 슈톡하우젠, 존 케이지, Morton Subotnick에게서 영감을 얻었다. 데드에게 블루스와 컨트리의 뿌리는 환각제에 걸맞게 끔찍하게 변형되어 곡 구조와 전개를 붕괴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각 작품은 아메바스러운 소리의 잔치가 되었는데, 드럼은 LSD 환각의 박자를 재현하기 위해 강박적인 박자로 두들기고, 전자 악기는 악몽과 황홀을 넘나드는 사운드스케이프를 그려나가며, 우울한 키보드는 지하 묘지에 갇힌 유령처럼 신비롭게 신음했으며, 기타는 마음을 뚫고 그들의 꿈을 하늘로 풀어놨으며, 목소리는 소용돌이 위로 고요히 부유했다. 편곡은 하프시코드, 트럼펫, 첼레스타 등을 조금씩 조금씩 넣은 것으로 넘쳐났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불협화음과 퍼커션의 정글로 인해 불안한 느낌이 더 강했다. 더 긴 즉흥 연주들은 취한 약쟁이들을 위한 실내악 음악처럼 들렸다. (그 공은 스펙터의 “월 오브 사운드”를 극단적으로 밀어붙인 버전으로 서로 다른 공연들을 오버더빙해서 “다차원적” 느낌을 만든 프로듀서 Dave Hassinger에게 돌려야 한다). 리듬과 멜로디는 순전히 악세서리가 되었다. Aoxomoxoa에서는 전통적인 곡 형태로 돌아오며 손상을 일부 복구했다. Live Dead에서는 반면, Garcia의 기타가 주도하는 하나의 거대한 “환각”이 담긴 긴 곡 Feedback이나, 데드의 마지막 잼이자 애시드 락의 스완송이었던 Dark Star로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동시에 그들의 자유 형식 잼은 미국 전통에 깊이 뿌리를 둔 철학에서 탄생한 것이기도 했다. 그들은 개인적이고 자유주의적인 개척자의 문화와 공동체적이고 영적인 퀘이커의 문화의 경계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무리 제도권에서 외면당했대도, 그레이트풀 데드는 당시 그 어떤 음악가보다도 미국의 정수를 가장 잘 표현했고, 아마 그것이 그들의 음악이 미국의 젊은이들의 영혼에 큰 울림을 준 이유일지도 모른다. 그레이트풀 데드가 버즈, 밥 딜런과 함께 Workingman’s Dead (1970년 2월 - 1970년 6월)과 Jerry Garcia 솔로 앨범 Garcia (1971년 7월 - 1972년 1월)로 컨트리 락의 흐름을 주도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밴드는 그들의 성숙기를 히피의 하위문화 어법을 (히피 코뮌 뿐 아니라) 온 행성의 모든 곳에 다 닿을 수 있는 보편적인 언어로 바꾸기 위해 노력하며 보냈다. 그리고 Weather Report Suite (1975), Blues For Allah (1975), Shakedown Street (1978), Althea (1979) 같은 곡에서 환각 작용을 일상의 현실에서부터의 카타르시스적 탈출과 도시의 신경증으로부터의 자유로 해석한 일종의 지적인 무자크muzak[역주: 상점, 식당, 공항 같은 곳에서 배경으로 깔리는 음악]로 만드는 데에 성공했다. 실제로 이들의 예술은 정신이 환각제의 환영과 산업 노이로제로 변형되었을 때 사이의 관계에 대한 심리학적 연구였다.


초기 샌프란시스코 밴드들은 자기를 완전히 잘못 이해하는 음반 산업에 대처해야 했다. 대기업들은 히피 현상을 팔아먹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지만, 정작 히피들이 연주하는 괴상한 음악은 꺼려했다. 프로듀서들은 그 원래의 소리를 파괴하고 잼을 “정상화”시키기 위해 (다른 말로 하면, 애시드 락을 “비틀즈-화” 하기 위해) 고용되었다.


기존에는 세상의 음악 씬들이 어떤 스타일(이를테면, 머지비트, 리듬앤블루스, 서프 뮤직 등)을 중심으로 돌아갔다면, 샌프란시스코 베이는 모든 것이 허용되는 곳이었다. 사실, 유일하게 허용되지 않은 것은 남의 소리를 베끼는 거였다. 독창성은 필수였던 반면, 재능은 선택 사항이었다.


Charlatans가 1967년에 녹음한 앨범 The Charlatans (1966년 ?월/1967년 ?월 - 1977년 ?월)은 10년 간 발매되지 않았지만 그 곡들은 1966년 후반에서 1967년 초반 사이에 한정판 싱글 시리즈로 나왔다.


Kaleidoscope (11)은 컨트리, 재즈, 케이즌cajun, 중동, 인도, 플라멩코, 집시, 북미 음악을 가장 모험적으로 융합시켜 Side Trips (1967년 ?월 - 1967년 6월), A Beacon From Mars(1967년 ?월 - 1968년 ?월)를 냈으며, 후자에서는 (아마 역사상 최고의 라가 락 작품일) Taxim이 포함되어 있다.


Mike Bloomfield의 Electric Flag는 일렉트로닉, 소음, 사이키델리아, 컨트리, 래그타임, 블루스가 기괴하게 섞인 Trip (1967년 5월 - 1967년 ?월)으로 데뷔했다.


Moby Grape (2)는 딜런 지지자들인 Mike Bloomfield, Al Kooper를 데리고 만든 Grape Jam (1968년 1월/2월 - 1968년 4월)이나 Alexander Spence의 솔로 앨범 Oar (1968년 12월 - 1969년 5월)에서 애시드 잼의 태평하고 마법 같은 정신을 구현했다.


애시드 락 씬의 최고 잼 밴드 중 하나인 Quicksilver (1)는 샌프란시스코의 애시드 락과 북서부의 개러지, 시카고의 리듬앤블루스를 연결했는데, 특히 블루스를 시작점으로 잡지만 내면의 자신을 지향하는 대담한 범汎-양식적인 대전시를 보여주는 긴 곡들을 담은 Happy Trails (1968년 11월 - 1969년 3월)가 그렇다.


Mad River (2)는 Mad River (?년 ?월 - 1968년 ?월), Paradise Bar And Grill (?년 ?월 - 1969년 ?월)에서 블루스의 영향을 보여준다.


한편 Blue Cheer (1)는 너무 맹렬히 블루스 락을 연주했다. Vincebus Eruptum (1967년 ?월 - 1968년 1월)은 온 “히피” 사상에 도전하는 (귀가 먹먹해질 정도의 기타, 베이스 증폭으로) 무시무시한 소리를 보여주는데, 이는 스토너 락을 25년이나 앞선 음악이었다.


Steppenwolf는 이 시끄럽고 빠른 애시드 락의 가장 강렬한 축가 두 곡을 발표했는데, 하나는 이후 한 장르를 대표하게 될 “헤비 메탈”이라는 표현을 쓴 Born To Be Wild (1968)이고 다른 하나는 Magic Carpet Ride (1968)이다.


이 스펙트럼의 반대편에는 Fifty Foot Hose (1)가 있는데, 1960년대 가장 실험적인 밴드 중 하나인 그들은 최초로 전자음을 도입하고 락과 아방가르드를 연결한 이들 중 하나였으며, 불협화음적이고 혼돈 가득한 소리를 내는 묵시록적 “넋이 나간freak-out[역주: 환각 상태에 가까운 종류의]” 잼(Fantasy)으로 애시드 락의 평온한 분위기에 도전하는 Cauldron (1967년 ?월 - 1967년 12월)을 냈다.


이 밴드들이 녹음 스튜디오에 도달할 적에는 1967년 여름의 두 유명한 사건, (형식을 합법화한) Monterey festival과 (소리를 합법화한) 비틀즈의 Sgt Pepper 덕에 애시드 락의 황금기가 이미 끝나 있었다. 그 여름에 “대안”은 “주류”가 되었다. 애시드 락의 반-상업적 정신이라는 건 모순된 말이 되었다. 이듬해, 히피 밴드들은 컨트리 락을 수용하고 전통적인 노래 형식으로 돌아갔다. 그 해 여름 미국 전역의 젊은이들이 몰려 들었다. “사랑의 여름”이라는 용어를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비록 누군가는 진짜 “사랑의 여름”이 한 해 일찍, 대부분의 언론이 모르는 사이에 일어났었다고 주장할 수 있겠지만 말이다).


히피 운동이 갑자기 사그라진 데에는 사회정치적인 이유도 있었다. 히피들은 지식인 계층을 진정으로 대변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들은 베트남 전쟁에 끌려가는 걸 두려워하고 핵 무기 없는 세상을 꿈꾸던 평균적인 중산층 남자를 대변했다. 좌파 지식인들은 우선순위가 좀 달라서, 체제를 바꾸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도시 게릴라가 필요하다는 점에 동의했다. 히피들은 반문화의 한 측면에 불과했다. 1968년 시류가 바뀌었고, 폭력적인 시위가 평화로운 것들보다 더 인기를 끌게 되었다. 평화 운동은 다른 차원의 혁명가들에게 납치되었고, 그 배경음악(애시드 락)은 시대착오적인 것이 되었다.


뉴욕과 새로운 보헤미아


그 전성기 시절에조차도 사이키델릭 락이 샌프란시스코에만 있지는 않았다. 벨벳 언더그라운드 (210) 같은 밴드들은 샌프란시스코 밴드들과 거의, 혹은 전혀 비슷한 점이 없었다. 그들은 (목가적이고, 몽환적이고, 이상향적인) LSD 문화보다는 (더 불길하고, 신경증적이고, 허무주의적인) “헤로인” 문화를 대변했다. 1963년에 쓰인 비전통적인 성행위 취재 서적에서 이름을 따온 벨벳 언더그라운드는 도시의 어두운 곳의 좁은 골목을 뒤지고, 도시 아이들의 무의식을 뒤지며, 기존 락앤롤 정신의 야만적인 부산물인 정서적 찌꺼기를 찾아냈다. 환각적 경험을 소리로 재현해내는 것은 그저 부분적인 목표였다. 그들의 진정한 목표는 지식인들 사이에 퍼져 있던 퇴폐적이고 불만스러우며 냉소적인 분위기에 대한 기록이었다. (시와 영화를 전공한) 보컬 루리드, (아방가르드 작곡가 라 몬테 영과 연주한) 베이스 및 비올라 연주자 존 케일, 양성적인 드럼 연주자 Moe Tucker와 독일 배우 Christa “니코” Paeffgen은 히피가 아니라 앤디 워홀의 멀티미디어 쇼 “The Exploding Plastic Inevitable”에서 연주하는 등(1965년) 아방가르드 운동을 알고 있는 엘리트 음악가들이었다. 이들은 (샌프란시스코의 낙관적인 흐름과 반대로) 사이키델릭 음악의 “비관적인” 흐름의 시초가 되었다. 벨벳 언더그라운드는 아마 락의 역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밴드로 남을 것이다. 다른 무엇보다도 그들은 10년 뒤 “펑크”라고 불릴 음악 제작 정신(독립적이고, 허무주의적이고, 전복적인)의 시초가 되었다. 지금의 락 음악은 벨벳 언더그라운드가 녹음 스튜디오에 들어간 날 태어난 셈이다. 1966년 봄에 녹음된 The Velvet Underground And Nico (1966년 4월/11월 - 1967년 3월)에는 (주로 루 리드, 존 케일이 만들고 니코가 부른) 수많은 인상적인 걸작들이 있다. 읊자면, 차갑고 유령 같으며 가을 느낌이 나는 Femme Fatale, All Tomorrow’s Parties, Black Angel’s Death Song이나, 타악적 성격이 강한 부기 곡 Waiting For My Man, 절정에 달하는 혼돈으로 가득한 Heroin, 불협화음적인 부족 음악 European Son, 퇴폐적인 비장함으로 가득한 인도 라가 Venus In Furs 등. 이들은 독일 표현주의와 프랑스 실존주의의 어둡고 억압적인 분위기에 깊게 잠겨 있었지만, 각각의 곡이 일종의 성적 페티쉬이자 카타르시스를 이르키는 사도마조히즘적 분출로 작용하며 극적인 리비도를 내뱉고 있었다. 이들의 음악의 선례를 찾기란 정말 어려운데, 왜냐면 이 야만인들은 클래식 가곡, 라 몬테 영의 미니멀리즘에 익숙한 반면 락앤롤과 팝에서는 극히 미세한 차용을 했기 때문이다. 약간 덜 인상적인 White Light White Heat (1967년 9월 - 1967년 11월)에는 베토벤의 교향곡이나 존 콜트레인의 형이상학적 즉흥 연주와 겨룰 만한 궁극적이고, 결정적인 락 음악의 걸작으로 남을 만한 서사시 Sister Ray가 수록되어 있다. Live (1969년 10월/11월 - 1974년 9월) 앨범에는 Sister Ray의 방식을 따르는 몇 개의 통제되지 않은 잼들이 들어 있으며, Velvet Underground (1968년 11월/12월 - 1969년 3월)의 부드러운 발라드나 Sweet Jane (1970)은 이후 글램 락에 영향을 끼칠 퇴폐적인 팝송의 기초를 세웠다. 마약 중독과 일탈적인 섹스를 찬양함으로서 벨벳 언더그라운드는 완전히 새로운 범주의 쾌락주의 의식을 드러냈다. 그들의 앨범은 지옥과 천국의 경계가 흐려진 단테스러운 시각을 불러왔다. 그들의 곡은 장송곡과 승리의 찬가를 섞어놓은 방식에서도 독특했는데, 끔찍하면서 동시에 매혹적이었다. 기호학적으로 말하면 이 곡들은 현실을 소리로 축약하는 “기호”로 구성되어 있었다. 대도시는 끝없이 진동하는 소음으로 축소되었고, 일상은 무의식적인 섬망으로 축약되었으며, 공적이든 사적이든 모든 것들이 순수한 프로이트식 리비도로 흐려졌다.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초현실주의는 마약과 도착적인 판타지에 끊임 없이 사로잡힌 마음에 의해 변형되었다. 동시에 그들의 음악은 더 나은 세상이 나올 것이라는 환상을 가리는 예언적인 혼돈이었다. 그들의 음악은 깊게 영락할 때조차도 늘 장엄했다.


1960년대의 음악에 진정으로 혁명을 일으켰다고 할 수 있는 밴드는 둘이다. 핑크 플로이드와 벨벳 언더그라운드. 그들은 공통점이 있었는데, 핑크 플로이드는 시각 예술에서 유래해 재즈(마일즈 데이비스)와 전자 음악(슈톡하우젠)의 영향을 받았으며, 벨벳 언더그라운드는 (앤디 워홀의) 아트 쇼의 일부로 태어났으며 프리 재즈와 전자 음악(라 몬테 영)의 영향을 받았다. 이 교차점은 그 세대의 창의성에 크나큰 영향을 미쳤다.


뉴욕의 나머지 대표들은 벨벳 언더그라운드에 비교하면 흐릿하다. Blues Magoos (1)는 최초의 사이키델릭 앨범 중 하나인 Psychedelic Lollipop (1966년 ?월 - 1966년 11월)을 냈고 Mystic Tide는 최초의 사이키델릭 축가들, 특히 Frustration (1966)과 Psychedelic Journey (1966)을 냈다.


사이키델릭 락은 곧 다른 장르들처럼 정형화된다. 극히 소수만이 그 신조에서 벗어나는 모험을 감행했으며 무명으로 죽었다. 예를 들어 Devil’s Anvil (1)은 Hard Rock From the Middle East (?년 ?월 - 1967년 ?월)로 불멸의 명성을 얻은 독특한 중동 애시드 락을 연주했다.


Tom Rapp의 Pearls Before Swine (11)은 1960년대에 사이키델릭 포크에 도전한 가장 위대한 밴드 중 하나였을 테다. 두 걸작, One Nation Underground (1967년 5월 - 1967년 ?월)과 특히 Balaklava (1968년 ?월 - 1968년 ?월)는 분류를 거부하는 분위기적인 곡들의 모자이크로, 달리의 초현실주의 속 환각 상태를 불러일으키며, 풍부하게 편곡되었고, 클래식과 재즈 음악의 영향을 받았다. 이 앨범들은 오르간, 하모늄, 피아노, 하프, 비브라폰, 잉글리시 호른, 클라리넷, 첼레스타, 밴조, 시타르, 플루트 등으로 구성된 진정한 “실내악 합주단”에 의해 연주되었다.


뉴욕의 예술 환경의 전형적인 다른 예시는 Cromagnon (1)으로, 당시 가장 급진적이고 미래적이며 소름 돋는 앨범 중 하나인 Orgasm (1969년 ?월 - 1969년 ?월)을 발매했다.


Joseph Byrd의 United States Of America (11)가 발매한 유일한 앨범 United States Of America (1967년 12월 - 1968년 3월)에서는 기괴하고 다방면에 걸친 편곡이 두드러지게 보이는데, 이는 가까스로 “곡”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음향 실험의 잡탕이다. 그 시기의 가장 중요한 앨범인 이는 (피아노나 오르간이 아니라) 전 영역대의 키보드가 대부분의 사운드스케이프를 채우는 최초의 앨범 중 하나이기도 하다. 삼십 년 뒤에 되살아날 컷 업 기법, 분위기 있는 재즈 발라드, 미래적인 라운지 음악의 힌트들이 보이기도 한다. Byrd의 초현실적인 뮤직 홀은 Fugs의 정치적 극장의 정반대편에 선다. 이런 음악을 더 정확하게 정의하는 건 Byrd의 솔로 앨범의 이름, 미국식 형이상학적 서커스American Metaphysical Circus (1968년 ?월 - 1969년 ?월)일 테다.



*


상당히 길어서 반으로 분할...

아무래도 사이키델릭 시대에는 할 말이 많을 수밖에 없기도 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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