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의 악마와 계약을 했다.

내가 체인소 악마의 심장을 구해주고 총의 악마, 엄밀히 말하자면 미국은 내게 안전한 도피처를 제공해준다.

그런 계약이었다.

공안과 소비에트의 눈을 피할 수 있는 따뜻한 지역이라니.

어디 밀림에 처박히는 게 아니라면 꿈도 꿀 수 없는 생활이었다.

그러니 망설일 이유는 없었을 텐데.

"일을 그만두고······ 나와 함께 도망치지 않을래? 내가 덴지 군을 행복하게 해줄게. 평생 지켜줄게."

"······."

"부탁이야."

굳이 이런 말을 할 필요가 있었을까.

남자라는 건 단순한 생물이라 몸만 내주면 알아서 웃통을 벗어던지고 정신없이 허리를 흔들어제낄 텐데.

그때 끌어안는 척을 하며 가슴팍에 손톱을 쑤셔넣고 꾸욱······ 심장을 거머쥐면 되는 쉬운 일이었다.

"멀리 도망친다니, 어디로?"

"지안한테 부탁하면 절대로 공안한테 들키지 않을 수 있는 장소가 있거든. 거기라면, 지금은 무리여도 언젠가 함께 학교에 갈 수 있을 거야."

"레제가 왜 그런 짓을······."

"그야 난 덴지 군을 좋아하니까."

그런데 나는 왜 이렇게 빙 돌아가고 있는 걸까.

왜 굳이 번거운 방법을 택한 걸까.

멀리 데려가지 않아도 이런 강아지같은 아이의 심장을 뺏을 방법 따윈 무궁무진할 텐데.

"왜 그렇게 고민해? 덴지 군은 내가 싫어?"

"좋아!"

흠칫하고 어깨가 떨렸다.

좋아? 좋으면 왜 고민을 하는 건데.

따라오란 말야.

더이상 귀찮게 굴지 말고.

이렇게 귀여운 아이가 네가 좋다는데 무슨 생각을 그렇게 오래 하는 거냐고.

"하지만······ 최근에 일하는 걸 인정받기 시작해서······ 감시가 없어도 멀리 갈 수 있게 됐고······ 요즘······ 즐거워지기 시작했거든."

아. 이 아이는 나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구나.

입으로는 좋다고 말하지만 그건 사춘기 소년이 동네 아리따운 누나에게 품는 어리숙한 사랑과 별반 다를 게 없었구나.

그래도 뭐, 아쉬울 건 없다.

나도 진심이 아니었으니까.

방금 한 고백 따위, 전부 마음에도 없는 소리였으니까.

나도 덴지 군같은 건 좋아하지 않는다고······.

"여기서 일을 계속하면서 레제랑 만나는 건 안되나?"

"그렇구나, 알았어."

낮은 지능.

초등생보다도 못한 학업 수준.

그리고 얄팍한 인간관계와 경험.

실패할 수가 없는 조건이었다.

좋다고 들이대는데 거절할 이유 따윈 하나 뿐이지.

"덴지 군. 나 말고 좋아하는 사람이 있지?"

정곡이었다.

덴지 군은 당혹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움찔하고 놀랐다.

선수를 쳐놓은 사람이 있었구나.

누구겠어. 마키마겠지.

그 년이 나보다······ 더 좋은 거구나.

나쁜 새끼.

"뭐? 읍······."

그대로 덴지 군의 볼을 잡고 입술을 맞췄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덴지 군과 내 최후의 키스.

"으음······ 음······."

그제서야 눈치챘다.

나, 덴지 군을 무지 좋아했구나.

지금까지 덴지 군을 속인다는 변명을 하며 나 자신을 속이고 있었구나.

이 바보같은 강아지에게 한번 더 기회를 주고 싶어서······

그래서 이런 귀찮은 방법을 쓴 거였는데.

그런데 너는 나보다 그 괴물같은 년이 더 좋단 말이지.

"으윽?! 윽! 레제! 혀······!"

어쩔 수 없잖아.

그 빨간머리 년이 덴지 군을 가지는 꼴은 절대 못 봐.

그러니까 죽어줘, 덴지 군.

지배의 손길 아래에서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것보다는 내 손에 죽는 게 낫잖아.

"으흑······ 윽······."

혀는 잘려서 입에서 피가 줄줄 새고, 손목은 떨어져나가고······.

덴지 군이 고통에 차 신음하는 모습은 정말이지 보기 괴로웠다.

눈에 초점을 잃은 덴지 군과 입술을 다시 한번 포개었다.

타액에 섞인 뜨거운 피가 울컥울컥하고 입술을 타고 들어와 아릿하고도 씁쓸한 맛을 냈다.

"아프지? 미안?"

미안해. 정말 미안해.

그치만 이렇게 되게 만든 건 덴지 군이었잖아.

나를 따라만 와줬어도, 나랑 도망만 쳤어도 이런 일 없었잖아.

"덴지 군의 심장, 받아갈게."

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