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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먹지 않는 꿈

나이공책꿈(175.114) 2017.12.30 23:29:09
조회 161 추천 2 댓글 2

꿈은 평소와 다르지 않은 곳에서 눈을 떴다. 주인이 어떤 하루를 보내고 있을지 불 보듯 뻔했다. 꿈은 나이먹지도, 퇴색되지도 않았다. 무엇이든 될 수 있지만 스스로는 아무것도 될 수 없었다. 모든 꿈들이 그랬다. 어떤 모양을 하고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 결정하는 것은 물론이요 생사여탈권까지 쥐고 있는 것이 그들의 주인이었다. 그리고 많은 주인들은 꿈을 잘 길러 보듬기보다는 엄혹한 환경에 내팽개쳐 말려 죽이는 것을 선호했다. 그의 주인 또한 마찬가지였다.

꿈들끼리는 주인의 그런 자세를 삶의 경계를 걷는다.’라고 부르곤 했다. 삶에 오롯이 집중하지 않은 채 의미 없는 일에 발을 걸치기도 하고 거기에 정력을 쏟기도 하고, 여하튼 무가치한 시간을 들여 꿈의 군살을 불리는 모든 일이 거기에 들어갔다. 꿈은 어느새 탄력을 잃고 늘어진 뱃살과 점차 깊어지기 시작한 주름에서 눈길을 돌렸다. 친구들의 짓궂은 농과는 달리, 사실 뚜렷한 목표와 동기만 있다면 삶의 경계를 걸어도 큰 문제는 되지 않았다. 꿈은 한심하게 살던 동기 몇이 어느 날 환골탈태한 모습으로 나타나 으스대는 것을 본 적 있었다. 마지막으로 이야기를 나눈 게 기억나지 않았다. 어느 샌가 누구와도 연락을 하지 않게 되었다.

꿈은 창가로 다가가 손바닥보다 작게 펼쳐진 뙈기밭을 보았다. 상상의 텃밭이었다. 주인이 기르는 계획, 예측, 미래 따위가 난잡하게 서로를 얽은 채 자라나고 있었다. 엉성한 지지대는 바닥과 평행하게 쓰러져 있었고 가느다란 덩굴만 잔뜩 흙고랑을 기었다. 종아리, 기껏해야 발목까지 겨우 오는 높이가 전부였다. 바람이 불면 흙먼지가 날려 깊게 박히지 못한 뿌리를 드러냈다. 바싹 마른 땅은 흙덩이와 잡석이 굴러다니는 맹지로 변해버렸다. 가슴이 답답했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꿈은 거칠어진 숨을 죽이고 색색이는 폐부를 진정시켰다. 문득 하늘을 곁눈질했다.

기울어진 구름의 그림자가 창가에서 뻗쳐왔다. 눈을 뜬 지 얼마 안 되었지만 벌써 땅거미가 내리고 있었다. 꿈의 목덜미가 서늘해졌지만 익숙한 감각이었다. 이곳의 시간은 눈 깜짝할 새 흘러갔다. 제 주인을 원망하고 싶지는 않았다. 심한 말을 한다고 달라질 것이었으면 애초 여기까지 올 이유가 없었다. 꿈은 언제부터인가 위기감도 느끼지 않게 되었다. 결과를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도리어 매일 아침 점점 더 까닭모를 불안에 잠겨야만 했다. 주인의 정확한 의지를 끄집어내는 것은 망망대해에 손끝을 담가 해류를 읽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 되었다. 그래도 주인은 멈추지 않았다. 꿈에게는 그것이 새로운 일상이 되었다. 그래서 받아들였다.

이따금 변화의 물살, 파도라기에는 작고 약해 실내천의 여울쯤 될 법한 순간이 찾아오기도 했다. 주인이 직접 움직여 획득하기보다는 누군가의 관용으로 베풀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지만 꿈은 개의치 않았다. 중요한 것은 성질이 아니라 기회였다. 주인에게도 그런 믿음이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는 언제나 주인의 생각을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그것 또한 받아들였다. 미약하게 맥동하던 변화의 가능성을 떠나보내며, 꿈의 목덜미에는 서늘한 기운이 스몄다.

어느새 하늘은 연보랏빛의 망설임도 갈무리한 채, 완연한 어둠을 끌어내어 사방을 에웠다. 한때는 달도 별도 무성했지만 지금은 초점이 맞지 않는 렌즈처럼 희끄무레한 기운만 얼마 서려있을 뿐이었다. 꿈은 눈을 깜빡이며, 방금 막 기어 나온 이부자리 속으로 다시 몸을 집어넣었다. 그가 주인에 대해 유일하게 공감할 수 있던 것은 인생이 공책과 같다는 비유뿐이었다. 꿈은 자신 또한 그것과 같다고 생각했다.

아무것도 쓰이지 않은 공책은 무엇이든 될 수 있지만, 그것은 동시에 아무것도 아니라는 뜻 또한 된다. 끝까지 아무것도 쓰이지 않은 공책은 이미 사람의 손을 탄 쓰레기, 조금 더 깔끔하고 가벼운 쓰레기가 되어 버려질 뿐이다. 꿈은 잠을 청하며 제 주인에게 닿지 않을 말들을 여럿 흘려보냈다. 조금 있으면 또 다시 해가 떠오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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