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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펌/스압)참을 수 없는 타르코프스키의 찌질함모바일에서 작성

ㅇㅇ(175.223) 2020.04.05 00:22:36
조회 575 추천 0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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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s://m.blog.naver.com/jaques1623/220884190895


『잠입자』의 주인공은 세피아 톤의 화면 속에서 “아무도 믿지 않아.”라며 흐느낀다. 흐느끼는 잠입자는 곧 믿음 없는 시대를 살아가는 타르코프스키 자신이다. 그것은 끊임없이 구원의 문제에 천착하는 정교(正敎)적인 흐느낌이며, 지극히 러시아적인 흐느낌이다. 타르코프스키의 장편 영화들은 구원의 문제와 연관되며, 그에게 구원이란 개인적인 내면에 위치한 믿음의 문제로 환원되는 경향이 있다. 그는 분열된 세계를 예술의 장을 통해 개인의 내면 속에서 미적으로 화해시키는 기획을 제시하지만, 전반적으로 타르코프스키의 원대한 기획은 상영관의 불이 켜지고 관객이 현실로 돌아오는 순간 붕괴할 수밖에 없는 허망한 종교에 지나지 않는다.


초기작 『이반의 어린 시절』은 타르코프스키의 영화 중 상대적으로 서사와 사건이 가장 직접적이고 명백한 방식으로 드러나는 작품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자신 바깥의 세계와 관계 맺는 방식보다 그의 내면에 집착하는 타르코프스키의 특징은 이미 이 영화에서도 관찰될 수 있다.


나치에 의해 이웃과 어머니가 학살당한 소년 이반은 수용소에서 탈출한 뒤 자원하여 독일군에 잠입하기로 결심한다. 욕망과 현실의 괴리 속에서, 이반은 타르코프스키의 인물로서는 특이하게도 실재하는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스토리 상 실천에 나서는 인물이다. 이러한 유형의 인물은 타르코프스키의 경력이 진행됨에 따라 갈수록 영화 속에서 지워졌다가 후기작에서 부분적으로 재등장한다.


흥미롭게도 『이반의 어린 시절』은 전쟁을 배경으로 한 영화이면서도 전투의 장면을 스크린 위에 펼쳐놓지 않는다. 영화의 대부분을 구성하는 장면들 또한 이반이 독일군을 상대로 작전을 펼치는 내용이 아니다. 무엇을 보여줄 것인지에 대한 판단만큼이나 무엇을 보여주지 않을 것인지에 대한 판단도 적극적인 의사의 표현이다. 독일군으로 표상되는, 세계가 인간에게 가하는 억압 일반에 대한 현실적인 저항의 장면은 스크린으로부터 거세된다.


행동 대신 영화를 채우는 것은 꿈과 환상을 통해 드러나는 이반의 내면 심리이다. 나비, 우물, 어머니, 이제는 사라져버린 고향 마을에서의 생활이 등장하는 이반의 꿈은 세 차례에 걸쳐 삽입되며 그가 돌아가기를 소망하는 과거를 드러낸다. 타르코프스키는 저항하는 인간 이반보다 과거를 희구하는 인간 이반을 그려내는 일에 집중한다. 이로써 직접적으로 전시되지 않지만 스토리 상으로나마 저항을 선택하는 이반조차 영화 내에서만은 타르코프스키적인 인간으로 변모한다.


『이반의 어린 시절』은 꿈에서 나타난 장면들을 반복하고 변주하는 환상으로써 막을 내린다. 이 장면은 앞의 장면들과 달리 꿈이 아닌 환상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것인데, 왜냐하면 꿈이라도 꿀 수 있는 살아 있는 인간 이반은 더 이상 존재조차 하지 않기 때문이다. 결말에 앞서 관객은 스크린에 등장한 서류를 통해 간접적인 방식으로 이반의 죽음을 알게 된다. 그 내용이 아무리 정감 어린 것이라 한들, 살아 있는 자의 것이 아니며 현실에 속한 것이 아닌 환상은 이반에게도 관객에게도 헛되다. 『이반의 어린 시절』이 제시하는 구원은 지상에 발 붙인 저항이 아닌 피안의 환상 속에 있으며, 마지막 암전 직전 등장하는 죽은 나무와 같은 것이다.


타르코프스키가 두 번째로 연출한 영화 『안드레이 루블료프』는 마땅한 주목을 요하는 작품이다. 중세 러시아의 실존 인물이자 이콘 화가인 안드레이 루블료프는 예술가이다.관련된 역사적 기록이 부실한 예술가의 전기를 허구적으로 구성한 『안드레이 루블료프』는 예술가 타르코프스키가 예술가 루블료프에 자신의 관점을 투영한 작품이며, 이는 필연적으로 예술에 관한 예술 작품, 메타예술로서의 성격을 지닐 수밖에 없다.


영화는 루블료프가 살아갔던 시대, 러시아인들이 타타르의 멍에라고 부르는 시대를 배경으로 삼는다. 주인공 루블료프는 모스크바로 가는 길에서 억압과 유혈의 수라도 속을 걸어간다. 이러한 현실 앞에 예술이란 무엇이며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 루블료프는 고뇌하고, 소녀를 강간하려는 타타르인의 폭력에 맞서 살인이라는 또다른 폭력을 저지른다.


직후 그는 수도원에 들어가 침묵하고 절필하기를 택한다. 루블료프의 선택에는 타르코프스키의 성향이 진하게 드러난다. 수도원에서는 어떤 폭력도 행해지지 않지만 그것은 오직 벽으로써 현실과 단절하고 침묵을 지킴으로써 유지되는, 수도원에 들어갈 수 있는 이들만을 위한 평화다. 눈을 닫고 입을 닫고 개인의 내면으로 침잠하는, 루블료프와 타르코프스키만을 위한 평화다. 그는 구원을 희망하지만 구원의 방법론으로 자신의 손에 피를 묻히기는커녕 말 한 마디 꺼낼 생각이 없다. 실질적인 변화를 이끌어내지도 못하는 이콘조차 그리지 않는 루블료프의 은둔 생활은 그가 자신의 한계를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점을 드러낸다. 그는 오직 자신의 예술과 세계 사이의 간극을 알고 있는 까닭에 부끄러운 침묵을 이어나간다.



이러한 루블료프와 타르코프스키의 태도에 반문하는 것은 또다른 이콘 화가 키릴이다. 그는 루블료프에게 왜 그림을 그리지 않느냐고, 재능을 지닌 채 그대로 무덤 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것이냐고 묻는다. 키릴도 관객도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은 이미 알고 있다. 『안드레이 루블료프』와 예술의 문제는 두 번째 질문으로, 그래서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수렴된다. 가능한 선택지로는 두 개가 있어 보인다. 그것은 수도원을 둘러싼 벽을 뛰쳐나가 현실 속으로 향하는 일과 계속해서 부끄러운 침묵을 암묵적으로 자기 전시하는 일 사이에서의 선택이다.


문제적인 대목은 타르코프스키가 두 대답 모두를 거부한 채 자신의 한계를 영화적 수법을 통해 얼렁뚱땅 봉합하고 있다는 것이다. 9개의 장으로 구성된 『안드레이 루블료프』의 마지막 장에서, 보리스카라는 소년은 종을 주조하는 임무를 떠맡게 된다. 주조 기술자는 그의 아버지이지 보리스카가 아니며, 보리스카는 종을 만드는 법을 모른다. 그러나 기적적이게도 종은 완성되고, 루블료프는 삼위일체의 이콘을 완성한다. 이콘을 배경으로 장엄한 성가가 울려퍼진다. 세계의 분열이 미적 화해를 맞이한다.


루블료프는 종이 완성되었기에 다시 이콘을 그릴 수 있다. 영화 내에서 두 사건은 인과의 관계를 가진다. 종의 제작이 영화 내에서 가능한 것은 보리스카의 지휘에 따라 노동하는 사람들이 지닌 믿음의 결과물이다. 주조 기술을 알지 못하는 일개 소년의 지휘 하에 종이 제작되는 일이 실제로 가능할 리 없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만약 이런 일이 현실에 있었더라면, 지극히 자연스럽게도 종은 완성을 보지 못한 채 깨져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오직 자기가 연출한 영화 속에서만 발휘될 수 있는 감독으로서의 권력을 휘두름으로써, 타르코프스키는 현실적 설명력을 결격한 궤변을 통해 자신의 예술 작품이 가진 정당성을 관객들에게 억지로 웅변하고 있다.


다음 작품인 『솔라리스』는 SF의 외피를 입고 있지만 엄밀한 의미에서의 장르 영화라고 말하기 힘들 듯하다. 『솔라리스』의 서사는 외계 행성의 탐사라고 할 수 있으되 그것의 주제가 필연적으로는 외계 행성의 탐사와 연관되지 않기 때문이다. 롱테이크로 악명 높은 타르코프스키는 지구에서의 기나긴 시퀸스들과 대조적으로 우주 비행 장면을 상대적으로 짧게 처리하며, 그나마 이 장면에서 강조되는 것은 우주라는 물질 세계의 묘사보다는 빛을 마주한 어둠 속에서 흔들리는 캘빈의 눈빛이다. 또한 행성 솔라리스의 생각하는 바다는 그것을 바라보는 이의 내면에 잠들어 있던 기억을 현실화한다. 정작 원작의 소설가는 썩 반기지 않았던 영화 『솔라리스』의 SF라는 외피는 타르코프스키가 평생 동안 다뤄온 개인적 내면과 기억의 문제, 그리고 자신만의 구원 전략을 다시 한 번 스크린에 늘어놓기 위한 도구적 장치일 따름이다.


행성 솔라리스는 의식이 물질의 반영인 것이 아니라 역으로 의식이 물질로 나타나는 전도된 타르코프스키적 세계이다. 타르코프스키는 자신이 마련한 무대에 현실의 사건으로 괴로워하는 인간을 밀어넣는다. 캘빈은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아내 하리의 독극물 자살에 원인을 제공했으며, 여전히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다. 그는 개인적인 구원을 필요로 하는 인간이다. 기억이 물질화되는 솔라리스의 우주 정거장에 도착한 캘빈 앞에 하리가 실제로 나타난다. 먼저 그는 하리를 우주선에 태워 우주 저 먼 곳으로 날려보내 본다. 실체 없는 기억과 죄책감에 맞서싸우는 난망함은 육체를 가지고 새롭게 나타난 아내를 비교적 손쉽게 눈 앞에서 사라지게 하는 일로 치환된다.


하지만 캘빈의 내적 갈등은 해결되지 않고 또 한 명의 하리가 등장한다. 이번에 나타난 하리는 자신이 하리가 아니라 말하며 실재했던 캘빈의 아내와 동일한 방식으로 자살하려고 한다. 캘빈도 자기가 지닌 죄책감의 해결은 기억이 물질화된 아내를 없애버리는 일을 통해 성취될 수 없다는 점을 알고 있다. 솔라리스에서 탄생한 하리는 캘빈의 내면에 있는 것이 현실화된 것일 수밖에 없기에, 자신이 하리가 아니라고 말하는 하리는 캘빈 또한 본인이 품고 있는 죄책감의 정체가 이미 죽은 실제 하리의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기보다는 자신을 상대로 한 자신 내면의 싸움이라는 점을 인지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르코프스키는 자신의 등장인물에게 현실을 직시하는 대신 심리적인 기만을 해결책으로서 수행하도록 만든다. 캘빈은 자기 내면의 편린에 지나지 않는, 하리가 아닌 하리에게 사랑을 고백한다. 심지어 그는 그녀를 위해 지구라는 현실로의 귀환을 포기하는 일까지 고민하게 된다. 자신으로부터 나온 것에 지나지 않는 관념이 실존하는 인간을 잠식한다.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솔라리스를 견디지 못하고 자살한 기바리안과 달리, 존재가 의식에 투항함으로써 캘빈은 지구로의 귀환을 결심하게 된다.


이때 캘빈의 결심은 굳건한 현실의 대지 위로 귀환하겠다는 세속적인 결단으로 해석될 수 없는 것이다. 캘빈이 돌아오겠다는 마음을 먹은 후 카메라는 다시 영화 초반의 공간을 비추는 듯이 보인다. 캘빈의 아버지가 있는 집이다. 아버지가 걸어나오고, 캘빈은 돌아온 탕자의 그림을 연상시키는 자세로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어 그 품에 안긴다. 순간 카메라가 상승해 관객은 이 장면이 여전히 지구가 아닌 솔라리스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임을 알게 된다. 캘빈의 내면으로부터 만들어진 아버지가 상징하는 바는 무엇인가? 그는 절대적인 믿음의 대상, 종교적 의미에서의 아버지이다. 캘빈은 지구로 귀환할 것이지만, 타르코프스키가 주목하는 지점은 주체적 인간의 물리적인 현실로의 복귀가 아니다. 『솔라리스』의 결말은 차안 아닌 피안에 자신을 온전히 내려놓고 머리 속의 관념 앞에 무릎을 꿇을 때 구원이 가능하다는 뉘앙스를 타르코프스키가 애당초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는 것을 드러낸다.


총 7편의 장편이 포함되어 있는 타르코프스키의 필모그래피에서 4번째 장편 『거울』은 정가운데에 위치하며 다른 작품들을 이해하는 실마리를 제공한다. 『이반의 어린 시절』의 소박한 꿈으로부터 출발해 『안드레이 루블료프』에 등장하는 보리스카의 기적을 거쳐 『솔라리스』의 종교적이고 초월적인 결말에까지 상승했던 타르코프스키는, 마치 거울에 비쳐 반사된 상처럼 『거울』 이후 뻔뻔할 정도로 자신만만했던 태도에서 점차 하강한다. 비록 그가 기존에 견지해왔던 관점을 완전히 버리지는 않지만, 『잠입자』와 『노스탤지어』에는 자신의 마음대로 되지 않는 현실에 대하여 비관적인 감상이 섞여 있다. 그리고 『노스탤지어』와 『희생』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의 가능성이 나타난다.


『거울』은 명백한 인과적 연쇄로서의 서사로 이어진다기보다는 각 장면이 의식의 흐름처럼 느슨한 매개의 계기들로 연결되며 개인적인 기억들 속을 탐색하는 영화이다. 영화는 알렉세이의 현재와 과거의 개인사가 교차하며 진행된다. 개인사 사이로 스페인 내전과 소련의 성층권 비행을 다루는 다큐멘터리 필름이 삽입되기도 하고, 40년대 군사훈련과 연관된 장면이 지나가는 등 역사적인 사건들이 직간접적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거울』에 통일성을 부여하는 대목은 영화의 초반에 등장한다. 푸슈킨이 차아다예프에게 보낸 편지가 낭송된다. 그 내용은 비록 지금의 러시아가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지만, 그의 조국을 바꾸거나 다른 역사를 선택하지는 않으리라는 것이다. 이러한 구성으로부터 타르코프스키의 역사의식이 도출될 수 있으며, 이는 그의 다른 작품들을 해석할 때에도 적용될 수 있다.


타르코프스키는 역사적 조건 속의 인간을 카메라에 담는 대신 개인적인 것 속으로 역사를 침투시킨다. 개인이 역사적인 것이 아니라 역사가 곧 개인적이다. 『거울』에 편입된 역사적 사건들은 역사적 논리의 순서에 따라 등장하지 않고 비논리적인 계기들, 예를 들어 알렉세이가 느끼는 어머니와 아내의 유사함과 같이 부유하는 심리의 움직임에 합치되는 경우에 한해 개인적인 회상의 일부분으로서 영화 내에 끼워진다. 마지막 장면은 거대한 석조 건축물 속에 들어 있는 알렉세이와 고향집을 비춘다. 이는 현실에 있을 수 없는 알렉세이 내면의 풍경이다. 자신을 역사화하길 거부하고 역사를 자기화한 타르코프스키는 『거울』 식의 역사가 아닌 다른 역사를 선택할 수 없다. 그에게 다른 역사란 자신의 내면을 벗어난 비존재일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개인의 주관 바깥에 위치한 객관적 실재를 무시하는 타르코프스키의 역사의식은 차라리 반(反)역사의식이라 할 종류의 것이며, 이것은 그가 표출하는 내면의 문제에 대한 일관된 집요함의 토대로서 기능한다.


『잠입자』에서 타르코프스키는 『노스탤지어』에서도 반복될 페시미즘의 그림자를 드리우기 시작한다. 이는 그가 『노스탤지어』 촬영 이후로 소련을 떠나 이탈리아로 망명한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공식적으로 관념론을 배격하는 소련이라는 공간이 타르코프스키를 언제까지나 용납할 수 있었을 리 없으며, 타르코프스키 본인 또한 『잠입자』를 제작하며 자신에게 주어진 한계를 본격적으로 절감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영화 속 잠입자는 ‘구역’ 안으로 사람들을 안내한다. ‘구역’은 언제나 변화하며 갖가지 함정을 숨기고 있지만, ‘방’에 들어가는 일에 성공한다면 들어온 이의 소원을 들어준다. 잠입자는 ‘방’으로 작가와 교수를 안내하며 구역의 위험을 경고하고, 그의 경고를 온전히 수용하지 않는 그들과 충돌을 빚는다. ‘방’을 앞에 두고 교수가 이곳을 폭파하기 위해 왔다는 것이 밝혀지자, 잠입자는 그를 막기 위해 몸싸움을 벌인다. 그리고 잠입자는 울먹이며 자신이 ‘구역’의 바깥에서는 삶의 가치를 찾을 수 없는 쓰레기라고 고백한다. 교수가 지적하듯이 그는 ‘구역’의 내부에서만큼은 사람들의 목숨을 쥐고 흔들며 신이라도 된 듯한 행색을 할 수 있으며, 어떤 의미에서든간에 그런 자신의 행동으로부터 보람을 느낀다. 그렇기에 그는 ‘방’이 악용될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구역’을 포기하지 못한다.


이때 ‘구역’은 타르코프스키의 예술 세계에 대한 은유요, 뻔히 보이는 길을 두고 참을 수 없이 느리게 먼 길을 돌아가며 자신의 세계로 사람들을 안내하는 잠입자는 타르코프스키의 분신이다. 영화 속에서 타르코프스키는 한낱 코흘리개가 종을 주조하게 하고 외계 행성에서 절대적인 아버지 앞에 인간이 무릎 꿇게 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오로지 영화라는 ‘구역’ 안에서만 가능하다. 이것이 타르코프스키의 한계다. 타르코프스키는 개인의 심리적 차원에서 구원을 설파하는 자신의 모습에 일정 부분 도취되어 있고 그러한 메시지를 담은 영화를 창작하며 보람을 느끼지만, 영화가 끝나는 순간 그의 설교는 무력해진다. 현실을 사는 인간은 독일군에 맞서 싸우거나 독일군의 흉탄에 쓰러질 뿐이다. 그리고 ‘방’의 위험성과 마찬가지로, 내면으로만 침잠하는 그의 영화는 분명 위험한 이데올로기로 작동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차마 견디기 어려운 타르코프스키의 찌질함이 폭발하는 장면은 잠입자와 교수와 작가가 ‘구역’을 빠져나온 이후에 펼쳐진다. ‘방’ 앞에서 눈물을 짜내며 자신의 찌질함을 고해하고 전시한 주제에, 집에 돌아온 타르코프스키-잠입자는 위에서 인용한 바와 같이 “아무도 믿지 않아.”라고 한탄한다. 궁극적으로 문제는 자신이 아니라 자신을 믿어주지 않는 남들에게 있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한계를 인지하면서도 그것을 탈피하는 대신 면피를 시도하고 있다. 점입가경으로, 감독 타르코프스키는 연이어 잠입자의 딸로 하여금 염력을 발휘하게 한다. 결국 ‘방’은 폭파되지 못했고 또 영화 내에서 연출된 기적이 벌어지고 말았다. 타르코프스키-잠입자는 ‘구역’의 밖에서마저 자신의 말이 옳다고 끝끝내 우기고 싶었던 모양이다.


『노스탤지어』, 즉 향수라는 제목은 소련에서 쫓겨나게 될 타르코프스키의 미래를 예언하고 있는 것 같다. 향수는 지금 여기의 시공간에 자신이 속하지 못함을 느낄 때 촉발되며, 이러한 그리움의 정서는 『노스탤지어』에서 두드러지는 근원적인 물과 불의 이미지를 통해 강화된다.


18세기에 이탈리아라는 타지에 왔던 러시아인 소스노프스키의 전기를 쓰기 위해 이탈리아에 온 안드레이는 러시아에 대한 향수를 느낀다. 이방인으로서의 감각에 젖은 그에게 유제니아와의 사랑은 안중에 없다. 그리고 그는 마을 사람들이 광인으로 간주하는 도메니코와 공감한다. 이미 쓴 바와 같이 향수란 곧 소속되지 못함에 대한 인지로부터 촉발되기 때문이다. 도메니코는 세계를 구원하기 위해 두 곳에서 불꽃이 치솟아야 한다고 말한다. 기존의 작품들에서 타르코프스키가 다루었던 개인의 구원 문제는 이제 세계의 구원에 관한 문제로 확장된다. 연후 안드레이는 도메니코가 광장에서 연설을 하고 있다는 유제니아의 연락을 받는다. 가족을 감금한 전적이 있는 미치광이 도메니코의 연설은 난해한 언어로 객석을 향해 살포된다. 도메니코는 긴 시간 이어진 연설 끝에 분신하고, 안드레이는 도메니코의 뜻을 받들어 초를 켜고 온천장을 건넌다.


안드레이와 도메니코도 물론 타르코프스키의 분신이다. 특기할 점이 있다면, 홀로 초를 들고 물을 건너는 안드레이의 개인적 구도(求道)에 더불어 마침내 타르코프스키가 도메니코를 통해 광장이라는 사회적 공간으로 나가길 결심했다는 것이다. 더 이상 개인의 심리 내에서 구원을 득하려는 욕심은 드러나지 않으며, 구원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인물이 등장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자폐적인 의식을 버리지 못했다. 광장에 모여 도메니코의 말을 듣는 사람들은 기이할 정도로 한 방향을 바라보고 미동도 하지 않은 채 그를 경청하며, 심지어 그가 몸에 기름을 끼얹는 순간까지도 별다른 움직임이 없을 정도이다. 이 연출이 뜻하는 바는 어쨌든 세계의 구원을 위하여 영화 내에서 감독의 권력을 동원해서라도 사람들이 자신의 메시지를 주위 깊게 듣고 믿게 해야만 한다는 것 아니겠는가. 타르코프스키는 현실에 속하지 않은 이방인의 사유를 하며 실재할 수 없는 시공간에 대한 노스탤지어를 품은 인간이기에, 역으로 더욱더 사람들의 인정을 갈망한다.


『희생』은 타르코프스키의 유작으로 예상 가능하듯이 구원의 문제에 관한 영화이며, 타르코프스키가 긴 인생 역정 끝에 자신의 첫 장편 『이반의 어린 시절』에서 죽어 있던 나무에게로 돌아와 새로운 움이 트게 함으로써 마지막 희망을 선보이는 작품이다. 알렉산더는 실어증에 걸린 아들과 죽은 묘목을 심고 물을 주며 죽은 나무가 살아날 수 있다고 믿는 인물이다. 아들의 생일,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난다. 알렉산더는 세상이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다면 자신이 모든 것을 희생하겠다고 기도를 올린다. 그때 그는 그가 가정부 마리아와 동침한다면 그 기도가 이루어질 것이라는 전갈을 받게 된다. 마리아는 그와 동침하기를 처음에는 거절하지만, 알렉산더가 자신의 머리에 총구를 겨눔으로써 스스로 희생 제단에 올라서자 그를 받아들인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세상에는 구원이 찾아오고, 아들은 말문이 트여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라는 요한 복음의 첫 구절을 말하게 된다.


타르코프스키의 고질적인 한계는 『희생』에서도 명백하다. 타르코프스키의 희생은 여전히 사회적 변화의 촉매제가 아니라 개인적 결단으로서만 행해지며, 결단은 죽은 나무가 살아나는 일과 같은 기적에 대한 믿음을 통해서만 내려진다. 또한 그는 세계의 제1동인으로 현실적인 운동이 아닌 관념적인 “말씀”을 비정하고 있다. 이는 위에서 살펴본 그의 성향 전반과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희생』은 타르코프스키의 모든 작품들 중에서 가장 발전된 인식을 드러내는 수작이기도 하다. 더 이상 타르코프스키에 있어 구원은 개인의 심리 속에서 미적으로 성취되지 않는다. 그는 타인의 불신으로 책임을 돌리지도 않으며, 숭고한 자기 희생을 통해 구원을 이룩한다. 타르코프스키는 이제야 겨우 영원에서 지상으로, 심리에서 세상으로 발을 내딛기 시작했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명이 충분치 못했다.


타르코프스키의 작품들은 찌질한 동시에 음험한 유혹을 내포하고 있다. 그의 작품만 보더라도 그는 분명 개인적으로는 선량한 정교도인이자 러시아인이었을 것이지만, 선한 의도가 반드시 선한 결과를 낳는 것은 아니다. 실재하는 억압 아래 찢겨진 현실을 스크린 속에서 봉합하려는 시도는 예술가에게 매력적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위험하다. 특히 타르코프스키와 같이 탁월한 예술가의 손에 내맡겨졌을 때 더욱 위험하다. 러시아 정교의 아름다움은 찬란하지만 그것이 설파하는 믿음은 수백 년간 제정 러시아의 착취를 은폐해 왔다. 지금의 러시아에서도 러시아 정교회와 푸틴 정권의 밀월은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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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요약: '타르코프스키와 그의 작품은 비현실적이고 현실도피에 지나지 않으며 현실을 왜곡시키고 있다는 것과 자기자랑과 허세로 가득 찬 인물이다'(댓글인데 글쓴이가 본문을 잘 읽었다고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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