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해가 불꽃처럼 떠올랐다. 동녘에는 마치 큰불이라도 난 듯 시커먼 구름이 나지막하게 걸려 있었다. 검은 구름 아래로부터 시뻘건 불길을 내뿜으며 태양이 맑은 하늘로떠올랐다. 톨 브란디르의 정상은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프로도는 동쪽으로 고개를 돌려 하늘을 찌를 듯 솟은 섬을 바라보았다. 섬 기슭은 급경사를 이루고 있었다. 가파른절벽 위로 나무들이 비스듬히 뿌리를 내리고 있는 비탈이 있었고 다시 그 위로는 접근이 불가능한 회색 암벽이 보였으며 정상에는 거대한 바위첨탑이 있었다. 그 주위로 많은 새들이 선회하고 있었으나 그 외에 다른 짐승은 보이지 않았다.
프로도는 곧 일어나 저편으로 걸어갔다. 다른 이들은 모두 그를 보지 않으려고 억지로고개를 돌리고 있었지만 보로미르만은 프로도가 아몬 헨 기슭으로 사라질 때까지 예의 주시하는 눈길을 던지고 있었으며 샘이 이 모습을 눈여겨보았다.처음에는 시름없이 숲속을 헤매던 프로도는 자신의 발길이 저절로 산비탈 위로 향하고있음을 깨달았다. 그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 거의 폐허가 되다시피한 작은 산길로 접어들었다. 경사가 급한 곳에는 돌계단이 놓여 있었지만 이젠 모두 닳고 갈라져 버려 틈새로 나무뿌리가 박혀 있기도 했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한참 올라간 그는 풀밭에 이르렀다. 풀밭가에는 마가목나무가 둘러서 있었고 한가운데는 넓고 평평한 바위가있었다. 산중턱의 그 작은 풀밭은 동쪽으로 훤히 트여 있어서 이른 아침 햇살이 가득히 비치고 있었다. 프로도는 걸음을 멈추고 발 아래로 저 멀리 강과 톨 브란디르를 바라보았다. 그 전인미답의 섬과 그가 서 있는 곳 사이의 거대한 하늘을 새들이 선회하고 있었다. 라우로스 폭포 소리가 묵직한 방향과 함께 우렁차게 들려왔다.
그는 바위에 앉아 두 손으로 턱을 괴고 동쪽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빌보가 샤이어를 떠난 후 일어났던 모든 일들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고 갠달프가 말한 것들도 하나하나 떠오르기 시작했다. 시간을 계속 흘렀지만 그는 여전히 아무런 결론도 내리지 못했다.
갑자기 그는 깊은 생각에서 깨어났다. 누군가가 등뒤에서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듯한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그는 벌떡 일어나 뒤를 돌아보았다. 놀랍게도 그것은 보로미르였다. 그는 다정한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그는 호비트의 어깨 위에 다정하게 손을 얹었다. 하지만 프로도는 그의 손이 흥분을 억제하느라 마구 떨리는 것을 느꼈다. 그는 재빨리 옆으로 비켜나서 경계의 눈초리로 그 사나이를 쳐다보았다. 키가 거의 두 배가 되고 힘에 있어서는 상대도 안 될 거인이었다.
"왜 나를 그렇게 싫어하지? 나는 도둑도 사기꾼도 아닌 진실한 사람이야. 당신의 반지가 필요하다고 솔직하게 털어놓지 않았는가. 내 말은 그것을 가지겠다는 게 아니라 내계획을 조금만 도와 달라는 것이야. 잠깐만 빌려주게!"
"안 됩니다! 절대 안 됩니다! 회의에서는 내게 반지를 맡겼습니다."
"만일 우리가 적에게 무릎꿇고 만다면 그건 바로 우리들의 어리석음 때문이야! 도저히못 참겠군! 바보 같으니라고! 멍청한 고집쟁이! 일부러 사지에 뛰어들어 우리까지 죽이려 하다니! 만일 누군가가 그 반지의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다면 그건 하플링이 아니라 바로 뉴메노르의 인간이야! 다만 운좋게도 네 손에 들어갔을 뿐이라고. 그건 내것일 수도 있어. 내것이야! 이리 내놔!"
프로도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재빨리 바위 반대쪽으로 가서 그와 마주섰다. 보로미르는 좀더 부드러운 소리로 말했다.
"이리 오게, 친구. 이리 와! 그 짐을 벗어 버리는 게 어때? 그러면 의심도 공포도 사라질 걸세. 모든 책임을 내게 떠넘겨. 내가 너무 힘이 세서 빼앗겼다고 해도 좋아. 사실 하플링 너보다야 내가 힘이 셀 테니까."
그는 소리를 지르며 갑자기 바위를 뛰어넘어 프로도에게 덤벼들었다. 잘생긴 호남형인 그의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졌고 눈에서는 불꽃이 일었다.
프로도는 몇 걸음 몸을 피해 다시 바위 반대편으로 갔다. 그가 취할 수 있는 방법은 단 한 가지였다. 부르르 몸을 떨며 그는 줄에서 반지를 빼내 재빨리 손가락에 끼었다.
보로미르가 다시 덤벼드는 순간이었다. 그는 놀란 눈으로 숨을 헐떡이며 잠시 사방을둘러보았다. 그리고 여기저기 바위와 나무 사이를 미친 듯이 뛰어다니며 프로도를 찾았다. 그는 마구 소리를 질렀다.
"이 사기꾼 같은 놈! 잡히기만 해봐라! 이젠 네 속셈을 알겠어. 반지를 사우론에게 바치고 우리 모두를 팔아넘길 셈이지? 네 놈은 지금까지 우리에게서 도망칠 기회만 노리고 있었던 거야. 너희 하플링놈들은 전부 지옥에나 가라!"
그 순간 그는 돌부리에 걸려 얼굴을 땅에 처박고 넘어졌다. 호비트에게 내린 저주가 그 자신에게 씐 듯 그는 한참을 죽은 듯 엎드려 있다가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일어나서 손으로 눈물을 닦으며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내가 뭐라고 했지? 내가 어떻게 했어? 프로도! 프로도! 돌아와! 내가 귀신에 홀렸던
모양이야. 돌아와!"
아무 대답이 없었다. 프로도는 이미 그의 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이미 그는 멀리 떨어진 곳에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산꼭대기를 향해 오르고 있었다. 미친 듯 덤벼들던 보로미르의 흉포한 얼굴과 이글거리던 눈빛을 생각하며 그는 공포와 슬픔에 몸을 떨었다.
얼마 후 홀로 아몬 헨 정상에 이른 그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걸음을 멈췄다. 안개 사이로 넓고 평탄한 원형의 땅이 나타났다. 바닥에는 단단한 판석이 깔려 있고 사방으로는 총안이 있는 흉벽이 폐허가 된 채 둘러싸고 있었다. 그리고 한가운데는 네 개의 돌기둥 위에 계단을 걸어 올라가 앉을 수 있는 의자가 마련돼 있었다. 그는 계단을 올라가 마치 길잃은 아이가 산속 왕의 옥좌에 오르는 듯한 느낌으로 그 퇴락한 의자에 앉았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온통 어둠으로 둘러싸인 안개나라에 온 느낌이 들었다. 반지가 여전히 그의 손가락에 끼여 있었다. 잠시 후 안개의 벽이 여기저기뚫리면서 많은 환상이 나타났다. 까마득하게 멀리 보이는 환상이었지만 모두 바로 눈앞 책상 위에 놓여 있는 듯 선명했다. 소리는 들리지 않고 다만 생생하게 영상들만 환하게 빛났다. 바깥세상은 조그맣게 줄어들어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가 앉은 자리는뉴메노르인들의 눈의 산, 아몬 헨 정상에 있는 눈의 보좌였다. 멀리 동쪽으로는 미지의 넓은 대지가 펼쳐져 있었다. 이름조차 알 수 없는 평원과 원시림이었다. 북쪽으로는 안두인 대하가 리본처럼 뻗어 있었고 안개산맥이 갈라진 이빨처럼 들쑥날쑥 대지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서쪽으로는 로한의 광대한 초원이 보였고 이센가드의 첨탑 오탕크가 검은 칼날처럼 솟아 있었다. 남쪽으로는 바로 발 밑에서 안두인 대하가 쓰러질듯 비틀거리며 라우로스 폭포 아래로 곤두박질치고 있었고 물거품이 하얗게 피어오르며 은은한 무지개가 피어올랐다. 그리고 그는 하류의 거대한 삼각주 에디르 안두인을 보았다. 수많은 바다새들이 햇빛 속에 흰 무리를 지으며 선회하고 있었고 그 아래로 은초록빛 바다가 끝없는 파도 속에 넘실거렸다.
그러나 사방 어디를 보아도 그의 눈에 들어오는 것은 전운이었다. 안개산맥은 꿈틀거리는 개미탑처럼 수천 개의 구멍 속에서 오르크들이 튀어나왔고 머크우드의 숲 속에서는 요정과 인간과 사나운 짐승들의 필사의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베오른인들의 땅은 화염이 충천했고 모리아는 구름에 덮여 있었으며 로리엔의 숲가에는 연기가 피어올랐다.
로한의 초원에서는 기사들이 말을 달리고 있었고 이센가드에서는 늑대들이 쏟아져 나왔다. 하라드의 항구에서는 전함들이 출항했으며 동쪽에서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이동하고 있었다. 칼과 창을 든 무사들과 말을 탄 궁수들, 그리고 지휘관들을 태운 수레와짐을 실은 마차들이 계속 뒤를 이었다. 암흑의 군주 휘하의 모든 세력이 출동한 것이었다. 그는 남쪽으로 고개를 돌려 다시 미나스 티리스를 바라보았다. 까마득하게 멀리있었지만 아름다운 도시였다. 흰 성벽과 수많은 첨탑들이 산 속에 아름답고 당당하게서 있었고 성벽 위 흉장에는 창검이 번쩍이고 포탑 위는 빛나는 깃발로 가득 찼다. 그의 가슴에 희망이 용솟음쳤다. 그러나 미나스 티리스를 대적하는 또 다른 성채가 있었다. 더 거대하고 더 견고한 요새였다. 그의 눈길은 자기도 모르게 동쪽으로 끌리고 있었다. 폐허가 된 오스킬리아스의 다리와 기분나쁜 웃음을 짓고 있는 미나스 모르굴의 입구, 그리고 유령 같은 산맥을 지나 그의 눈은 모르도르의 공포의 계곡 고르고로스를 향하고 있었다. 그곳은 햇빛 속에서도 어둠에 뒤덮여 있었고 연기 속으로 불꽃이 이글거렸다. 운명의 산도 불타오르며 화염이 충천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시선도 고정되고 말았다. 난공불락의 견고한 위용을 자랑하는 검은 성벽과 흉장, 철의 산, 철의 관문, 철석같이 견고한 첨탑을 보았다. 바랏 두르, 사우론의 요새였다. 희망의 불꽃은 다시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그는 갑자기 그 눈을 느꼈다. 암흑의 탑 속에 잠자지 않는 눈이 있었다. 그것이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대단히 무시무시하고 강력한 염력이었다. 마치 손가락으로 가리키듯 그것은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를 꼼짝도못하게 하고 내 정확한 위치를 찾아내겠지. 그 눈은 아몬 로를 점령하고 다시 톨 브란디르 너머를 살피기 시작했다. 프로도는 의자에서 뛰어내려 주저앉으며 회색모자로 머리를 감쌌다.
그는 스스로의 비명소리를 듣고 있었다. 안 돼! 안 돼! 다른 소리도 들렸다. 정말 제가, 제가 그쪽으로 오라고요? 그는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전혀 반대쪽에서 또 다른 생각이 갑자기 떠올랐다. 빼! 반지를 빼! 바보야, 빼! 반지를 빼란 말이야!
마음속에서 두 힘이 싸우고 있었다. 잠시 동안 그는 양쪽의 예리한 칼끝 사이 한가운데서 몸을 뒤틀며 고통스러워했다. 갑자기 그는 자기 자신의 존재를 다시 깨달았다.
그 목소리도 아니고 눈동자도 아닌 자유로운 선택권을 가진 자신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 선택의 순간도 이젠 마지막이었다. 그는 손가락에서 반지를 빼냈다. 그 높은 의자 밑에서 밝은 햇살을 받으며 그는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의 머리 위에 팔처럼 드리워졌던 어둠의 그림자가 지나갔다. 그림자는 아몬 헨을 놓치고 서쪽에서 서성이다가 사라져 버렸다. 다시 하늘은 맑아지고 푸르름을 되찾았으며 새들이 가지마다 노래부르고 있었다.
프로도는 벌떡 일어났다. 말할 수 없는 피로가 그를 엄습했다. 그러나 그의 의지는 확고했고 마음은 훨씬 가벼워졌다. 그는 큰 소리로 혼자 중얼거렸다.
"난 이제 임무를 수행해야겠어. 한 가지 분명한 건 반지의 마력이 벌써 우리들 사이에서 영향력을 발휘했다는 점이야. 더 많은 해를 끼치기 전에 반지는 떠나야 해. 난 혼자 떠나야 하는 거야. 믿을 수 없는 동지가 벌써 생겼지. 더구나 믿을 수 있는 친구들은 내가 너무 사랑하는 이들이니 또한 같이 가선 안 돼. 불쌍한 샘, 메리, 피핀! 스트라이더 역시 마찬가지지. 그의 마음은 미나스 티리스를 향하고 있어. 보로미르가 이제악의 손아귀에 빠져들었으니 그는 그곳에 정말 필요한 인물이야. 나는 혼자 가야 해.지금 즉시!"
"같이 가요, 프로도씨! 같이요!"
샘은 소리를 지르며 강둑에서 물로 뛰어들어 달아나는 배의 고물을 향해 손을 뻗쳤다.그러나 바로 일 미터 앞에서 놓치고 말았다. 비명을 지르며 물을 첨벙거리던 샘은 얼굴을 아래로 떨구며 깊고 빠른 물살에 휩쓸려들었다. 꼬르륵 소리를 내며 그는 물 속에 잠겨 들었고 강물이 그의 곱슬머리를 완전히 덮어 버렸다.빈 배에서 당황해 어쩔 줄 모르는 비명소리가 터져나왔다. 노가 빙글빙글 돌더니 배가방향을 돌렸다. 샘이 죽을 둥 살 둥 모르고 텀벙거리며 물 위로 올라왔을 때 프로도는 겨우 그의 머리를 움켜잡을 수 있었다. 그의 둥근 갈색 눈동자에 공포의 그림자가 가득했다.
"샘, 올라와! 자, 내 손을 잡아!"
"살려 줘요, 프로도씨! 물 먹었어요. 손이 안 보인다고요."
"여기 있어. 손을 너무 꼭 잡지 마. 널 죽이진 않을 테니까. 허둥대지 말고 물을 발로차도록 해봐. 잘못하면 배까지 뒤집힌단 말이야. 자, 여기 뱃전을 붙잡아. 노를 쓸 수 있어야지."
노를 몇 번 저어 프로도는 배를 강변에 다시 댈 수 있었고 샘은 물에 빠진 생쥐처럼 강변으로 기어올라왔다. 프로도는 반지를 빼고 다시 강변으로 내려섰다.
"이 세상에서 제일 큰 사고뭉치가 바로 너야, 샘!"
그러자 샘은 덜덜 떨며 말했다.
"아니, 프로도씨, 너무 심해요. 말도 안 돼요. 우리 모두를 버려두고 혼자 가시다니요. 제 짐작이 틀렸더라면 지금쯤 어떻게 되었겠어요?"
"무사히 가고 있겠지."
"무사해요? 저 같은 조수도 없이 혼자 말입니까? 차라리 저를 죽이고 가지 어떻게 그냥 가실 수가 있어요?"
"나하고 같이 가면 그게 바로 죽는 길이야, 샘. 내가 널 꼭 죽음으로 몰고 가야겠어?"
"그래도 뒤에 남아 있는 것보다는 나아요."
"난 지금 모르도르로 가는 거야."
"잘 알아요. 물론 그쪽으로 가실 줄 알았어요. 저도 같이 가겠어요."
"자, 샘! 제발 나를 방해하지 마! 다른 일행들이 곧 나타날 텐데. 또 이야기하고 다투다 보면 용기도 다시 사라질 거도 기회도 없어져. 지금 가야 해. 그 수밖에 없어."
"물론이지요. 하지만 혼자는 안 됩니다. 저를 태워 주시지 않으면 아무 데도 가실 수 없어요. 정 우기신다면 배마다 구멍을 내버리겠어요."
프로도는 어이가 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갑자기 가슴이 뭉클해지고 용기가 생겼다.
"한 척은 남겨 둬. 우리가 써야 할 테니까. 하지만 넌 아무 장비도, 식량도 없이 이렇게 갈 거야?"
그러자 샘은 신이 나서 외쳤다.
"잠깐만요, 제 물건을 가져오겠어요. 준비가 다 되어 있지요. 오늘 떠날 줄 알았거든요."
그는 야영지로 달려가 프로도가 동료들의 짐을 실은 배에서 물건을 꺼낼 때 쌓아 놓은더미에서 자기 짐을 꺼내고 여분으로 담요 한 장과 식량을 좀더 챙긴 다음 달려왔다.
"이래서 내 계획이 산산조각이 나버렸군. 널 떼놓고 가기가 이렇게 힘들 줄 알았겠어.하지만 샘, 난 기뻐. 얼마나 기쁜지 말로 다하지 못할 정도야. 이제 가세! 우린 원래부터 같이 다니게 되어 있나 봐. 우리가 떠나가면 남은 이들은 안전한 길을 찾을 수 있을 거야. 스트라이더가 잘 인도하겠지. 그들을 다시 만날 수는 없겠지."
"아마 그럴 거예요. 십중팔구는요."
이렇게 해서 프로도와 샘은 그들의 마지막 여행을 시작했다. 프로도가 노를 저어 강변에서 멀어지자 강물은 그들을 곧 톨 브란디르의 험상궂은 절벽 오른쪽으로 몰고 빠른 속도로 달려갔다. 라우로스 폭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샘의 도움이 있긴 했지만 섬 남쪽 끝에서 물살을 가로질러 강 건너 동쪽 강변까지 배를 몰고 가는 일은 매우 힘들었다.
마침내 그들은 아몬 로 남쪽 경사지에 도착했다. 거기서 경사가 완만한 강변을 발견해 배를 그 위로 끌어올리고 커다란 바위 위에 가능한 한 보이지 않게 잘 숨겼다. 그리고 양 어깨에 짐을 지고 에민 뮐의 회색언덕을 넘어가는 길을 찾아 어둠의 대지로 드디어 발을 들여놓았다.
온 신경을 곤두세워 눈앞의 사물들을 살피는 동안에도 그의 예민한 귀는 대하 서쪽의 풀숲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바짝 긴장했다. 그 소리 중에 오르크의 거친 비명소리가 섞여 있음을 알고 오싹했던 것이다. 그때 갑자기 깊은 뿔나팔소리가 웅장하게 쏟아지는 폭포소리를 제압하고 계곡 전체를 뒤흔들었다.
"보로미르의 뿔나팔이다! 위급하구나!"
그는 튀듯이 계단을 뛰어내려갔다.
"아! 오늘은 악연이 뻗쳐 하는 일마다 모두 어긋나는구나. 샘은 또 어디 있는 거야?"
아래로 내려가자 오르크 소리는 한결 약해졌고 대신 뿔나팔소리는 더욱더 처절하게 울려퍼졌다.
그런데 오르크들의 비명소리가 한차례 휩쓸고 지나간 뒤, 갑자기 뿔나팔소리도 뚝 그쳤다. 아라곤은 사력을 다해 더 급히 비탈길을 뛰어내려갔다. 언덕 기슭에 도달하기도 전에 오르크 소리는 이미 한풀 꺾여 잦아들었다. 그가 왼쪽으로 돌아 소리나는 쪽을 향해 달려가자 그 비명소리는 뒤로 물러났고, 마침내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번쩍이는 칼을 뽑아 들며 나무들을 헤치고 엘렌딜을 외치며 앞으로 내달렸다.
그는 파스 갈렌에서 일 마일 정도 떨어진 거리의, 호수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작은 숲속 빈터에서 보로미르를 발견했다. 보로미르는 꼭 휴식을 취하고 있는 사람처럼 커다란 나무에 등을 기대고 누워 있었다. 그러나 그는 곧 보로미르의 몸 여기저기에 검은 깃의 화살이 숱하게 꽂혀 있는 것을 보았다. 보로미르는 칼을 손에 쥐고 있었으나, 그칼은 손잡이가 부러져 있었고 그 옆에 두 동강 난 뿔나팔이 놓여 있었다. 죽어 나자빠진 오르크들의 시체가 그 주위에 널려 있었다.
아라곤은 그 곁에 무릎을 꿇고 않았다. 보로미르는 힘겹게 눈을 뜨고 말을 하려고 입술을 달싹거렸다. 마침내 천천히 흐릿한 말소리가 새어나왔다.
"난...... 프로도한테서 반, 반지를 빼앗으려 했소. 미안합니다. 죄 값을 치르고 있는거요."
그의 눈길은 한바탕 격전을 치르고 쓰러진 적들에게 멎었다. 줄잡아 스무 명은 됨직했다.
"오르크들이 하플링들을 잡아갔소. 그렇지만 아직 죽이진 않았을 겁니다. 놈들은 그들을 생포해 갔으니까요."
말을 멈추고 그는 지친 듯 다시 눈을 감았다. 잠시 후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잘...... 있어요, 아라곤. 나...... 는 실패...... 했소."
아라곤은 가슴을 훑어내리는 듯한 슬픔을 참아내느라 애쓰며 그의 손을 힘주어 잡고 이마에 입을 맞췄다.
"아니오. 그대는 이긴 거요. 아직까지 그대만큼 용감하게 싸워 승리를 거둔 자는 거의없었소. 마음을 편히 갖는 거요. 미나스 티리스는 결코 무너지지 않을 겁니다."
보로미르의 얼굴에 언뜻 미소가 떠오르는 것 같았다.
"하플링들은 어느 쪽으로 갔소? 프로도도 거기 함께 있었소?"
그러나 보로미르는 더 이상 말이 없었다.
"아, 곤도르 영주의 후계자가 이렇게 쓰러져 버리다니...... 참혹한 종말이로군! 이제 우리 원정대도 완전히 무너진 거야. 실패한 건 오히려 나야. 갠달프가 나를 믿은 건 정말 큰 실수였어.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 보로미르도 내가 미나스 티리스로 가길 원하고 또 나도 그렇게 하고 싶은데 도대체 반지와 반지의 사자는 어디갔단 말인가? 무슨 수로 그들을 찾아서 대열을 다시 정비한단 말인가?"
그는 보로미르를 잡은 손을 놓지 않고 몸부림치며 울었다. 레골라스와 김리가 그를 발견한 건 바로 그때였다. 그들은 사냥꾼처럼 조심스럽게 살금살금 기어서 비탈길을 올라왔다. 김리는 손에 도끼를 움켜쥐고 있었고 레골라스는 화살이 다 떨어져 긴 칼로 방어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막 빈터로 들어선 그들은 뜻밖의 광경에 멈칫했다. 순식간에 사태를 파악한 그들은 잠시 숙연하게 머리를 숙였다.
레골라스가 아라곤에게 다가가면서 비통한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아, 우린 숲 속에서 많은 오르크놈들을 박살냈지만 차라리 여기서 함께 싸웠더라면 이런 불행이 닥치지 않았을 것을...... 뿔나팔소리가 나기에 있는 힘을 다해 달려왔는데 너무 늦어 버렸군. 당신은 어디 다친 데는 없습니까?
"보로미르가 죽었다네. 나도 방금 여기 왔기에 다치지는 않았어. 내가 언덕 위에서 헤매고 있는 동안 그는 호비트들을 보호하다 쓰러졌네."
"그를 라우로스 폭포로 옮겨 안두인 강에 떠내려 보내세. 적어도 곤도르의 강은 그 어떤 사악한 놈도 감히 그의 유골을 욕되게 하지 못하도록 돌봐 줄 걸세."
그들은 보로미르를 보트 한가운데로 조심스럽게 옮겼다. 그들은 잿빛 두건과 요정의 옷을 보로미르의 머리 밑에 받쳐 주고 검게 윤이 나는 그의 긴 머리를 곱게 빗겨 양 어깨 위로 가지런히 정돈해 두었다. 그의 허리 근처에선 황금빛 혁대가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들은 그 곁에 투구를 놓아 두고 무릎 위엔 쪼개진 뿔나팔과 칼의 손잡이, 파편들 그리고 발치에는 적들의 칼을 모아 놓았다.
그런 다음 뱃머리를 옆에 있는 또 한 척의 보트의 꼬리에 잡아매고는 배를 물가로 끌어냈다. 그들은 강변을 따라 힘없이노를 저었다. 배는 급류를 따라 파스 갈렌의 푸른 초지를 지나갔다. 톨 브란디르의 가파른 비탈이 붉게 빛나고 있었다. 벌써 한낮도 한참 기울어 가고 있었다. 남쪽에선 황금빛 안개가 피어올랐다가 아물거리며 사라졌다. 세차게 우르릉거리는 폭포소리가 바람 한 점 없는 대기를 흔들었다.
그들은 비통한 심정으로 시신을 실은 보트를 띄워 보냈다. 보로미르는 미끄러져 가는 배 위에 평화로운 표정으로 누워 있었다. 그들이 노를 저어 자신들이 탄 배의 방향을 가눌 동안 강물은 보로미르를 데려갔다. 그를 태운 배는 그들 곁을 떠돌다가 천천히 멀어져서 황금빛 노을을 배경으로 검은 점으로 작아지더니 이내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라우로스는 여전히 깊은 탄식을 토해 내고 있었다. 대하는 보로미르를 영원히 데려가 버린 것이다. 이젠 미나스 티리스에선 아침이면 백색탑 근처를 산책하던 그를 다시는 볼 수 없으리라. 그러나 후일 곤도르에선 그 요정의 배가 별이 빛나는 밤에 거품이 일렁이는 폭포를 타넘고 오스길리아스와 안두인 강 어귀들을 지나 그를 대하까지 실어다 주었다고 오랫동안 전해졌다.
그는 잠시 말없이 서 있었다. 한참을 망설이더니 무겁게 입을 열었다.
"나는 오르크들을 쫓겠네. 마음 같아선 모르도르까지 프로도와 함께 가고 싶지만 만일지금 우리가 그를 따라간다면 프로로 잡혀간 호비트들은 고통을 당하다 죽어 갈 것이분명해. 이제 반지의 사자와 내 운명은 갈림길에 서 있다는 것이 분명해. 이제 반지의 사자와 내 운명은 갈림길에 서 있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네. 원정대는 이제 소임을 다했어. 남은 우리는 힘이 남아 있는 한 동지들을 저버릴 순 없네. 자, 이제 돌아가는거야. 당장 급하지 않은 건 미련없이 훌훌 털어 버리고. 밤낮없이 길을 재촉해야 해."
그들은 타고 온 보트를 끌어올려 나무에 묶어 둔 다음 필요없는 물건들은 놓아 두고 파스 갈렌을 떠났다. 보로미르가 쓰러졌던 빈터로 다시 돌아왔을 때는 막 오후의 햇살이 넘어가고 있던 참이었다. 거기서 그들은 별 어려움 없이 오르크들의 자취를 찾을 수 있었다.
레골라스가 말했다.
"이렇게 요란스럽게 행적을 남기는 놈들도 별로 없지. 놈들은 길가는 데 방해가 되지 않더라도 목숨이 붙어 있는 모든 생물을 닥치는 대로 베고 쓰러뜨리는 악랄한 놈들이니까. 그러나 그놈들은 그렇게 대단한 속도로 길을 가면서도 지치지도 않아. 나중에 우린 잡초조차 다 뽑혀나간 휑뎅그렁하니 빈 땅에서 놈들을 찾아 헤매게 될지도 몰라."
김리가 말했다.
"자, 놈들을 쫓아야지. 우리 난쟁이들은 걸음이 빨라. 그리고 쉽게 지치지도 않지. 그러나 이번에는 꽤 힘든 상대를 만났군. 놈들은 벌써 여길 지나간 지 한참이나 됐어."
아라곤이 말했다.
"그래. 지금 우리에겐 난쟁이의 안내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때지. 어쨌든 추격을 시작하세. 놈들을 잡을 가능성이 있든 없든 우린 적들을 쫓아야 해. 만약 우리가 전속력으로 쫓아간다면 놈들도 별수 없을 거야. 우린 요정, 난쟁이 그리고 인간의 삼족의 역사에 불가사의로 남을 추격을 개시할 걸세. 삼인의 추격자여, 앞으로!"
그는 한 마리 표범처럼 날렵하게 뛰쳐나갔다. 그는 나무를 헤치며 나는 듯이 앞으로 내달렸다. 결정은 더 이상 망설일 것도 번복할 것도 아니었다. 그는 지칠 줄 모르는 재빠른 동작으로 일행을 인솔해 갔다. 그들은 호수 근처의 숲을 지나 가파른 비탈을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비탈은 이미 해가 떨어진 노을을 배경으로 붉게 윤곽을 드러내고 있었다. 땅거미가 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잿빛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리며 어둠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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