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리니티와 밀레니엄 간에 정상회담이 이루어지고 있는 지금, 선생이 있는 게헨나 쪽 폐건물에서는 또 해주가 한창이었다. 그리고 이번 주인공은 급양부 소속 학생, 우시마키 주리였다.
"으븝! 으으읍! 으브브븝!"
소녀의 손에는 칼이 쥐어져 있고 선생의 손에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소녀의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선생을 맹렬히 노려보고 있고, 선생은 무미건조한 눈빛으로 소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주리, 진정해. 1분도 안 걸릴 거야. 그러니까 그 때까지는 조금 가만히 있..."
"으으으으!"
그 순간 주리의 고개가 돌려지면서 후우카를 맹렬히 노려보고 있었다. 눈매가 날카롭게 벼려진 주리의 얼굴을 보자 후우카는 움찔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그녀가 화난 모습은 급양부 부장인 그녀로서도 처음 보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내 그녀는 후우카의 옆에 있던 미식연구부에게도 증오 서린 눈빛을 쏘아내었다. 그리고 이즈미는 그런 주리의 모습을 보고 멋쩍게 웃었다.
"왠지 마음이 좀 찔리네.. 평소에 느껴보지 못한 감각이야."
"뭔가 못할 짓을 해버린 것만 같은 그런 기분이에요.."
이즈미와 아카리가 미안한 표정으로 이리 이야기하자, 후우카는 눈가를 살짝 찌푸리며 그녀들에게 물었다.
"뭐? 그럼 너희들 나 끌고 다닐 때는 죄책감 없었냐?"
"아니~ 뭐~ 음~ 지금 이거하고 그건 다르니까~ 그리고.. 그런 이야기하기엔 너무 우리들의 관계는 너무 멀리까지 오지 않았어?"
".....그건 또 그렇네."
납치의 형태로 미식연구부에 끌려가 우트나피쉬팀의 배까지 같이 타게 된 그녀들이었다. 서로 힘을 합쳐 동료로서 세상을 구한 시점에서 이미 그녀들의 관계는 단순히 납치하는 사람과 납치당하는 사람의 관계가 아니었다.
"생각해보면 주리를 속여서 너희들에게 납치를 하게 했으니 저런 반응은 당연하겠지..."
"으브으으으읍! 읍읍!"
선생을 위해서,그리고 결국 주리를 위해서 한 짓이지만 주리의 신뢰를 이용했다는 죄책감은 남아있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런 방식을 쓰지 않는다면 안전한 해주는 불가능하니 어쩔 수가 없었다.
"그래도 뭐 나중에는 뭐 이해하잖아. 쟤도 우리와 입장 바뀌었으면 똑같이 했을 거니 너무 죄책감 가지지 마."
그리고 이런 대화를 하는 동안 시간은 어느새 가버렸고, 여기 있는 모두가 그랬듯 주리에게도 안개가 걷히는 순간이 찾아왔다.
"으븝?"
찌푸려졌던 인상이 펴지며 당황스러운 듯 주변을 쳐다보는 주리, 곧바로 소녀들은 이게 무슨 상태인지 직감할 수 있었다.
"주리, 이제 정신 들어?"
후우카가 주리의 입에 붙여져 있던 테이프를 조심스레 떼내었고, 소녀는 눈을 깜빡거리면서 후우카를 바라보았다.
"어.. 선배?"
"이제 괜찮니, 주리?"
선생이 어느새 주리의 앞까지 다가오며 묻자, 주리는 더욱 어안이 벙벙해질 뿐이었다.
"어.. 이게.. 선생님? 어.. 어? 뭐지..? 저는.. 어.."
"돌아왔구나! 이제 빨리 풀자. 맨날 이런 식으로 묶어버리는 게 얼마나 미안한지..."
"으.... 에..?"
그렇게 또 한 명의 소녀가 뭐가 어떻게 흘러가는 지도 모른 채 저주에서 풀려나게 되었다.
***
그리고 같은 시각, 히마리는 트리니티를 설득하기 위한 이야기를 한창 진행하고 있었다.
"여러분, 우리는 다른 편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저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지는 잘 알지만, 저를 믿어주셔야 합니다."
"............."
하지만 화면 너머로 보이는 소녀들의 표정은 전혀 밝지 않았다. 일심동체라도 된 듯 모두가 하나같이 히마리를 째려보았다.
"자리를 바꿔 생각하더라도 저 역시 여러분들과 같은 반응이었겠죠. 하지만 그래도 저를 믿어주셔야 합니다. 그래야만 이 괴현상을 해결할 수 있고, 또 종국에는 선생님을 구할 수 있단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그 사람의 위치를 묻는 겁니까? 그걸 알려주는 게 당신에게 신뢰를 주는 행동이고?"
"그렇습니다."
히마리는 또 안에서 증오가 차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증오에 대한 적응이라도 됐는지 아직 증오가 크게 올라오지 않은 것잉지 몰라도, 증오가 표정에 드러나지 않은 채 최대한 정중한 태도를 고수하며 그녀들과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히마리 씨, 트리니티가 만만하십니까?"
"....네?"
하지만 그런 히마리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돌아오는 건 차가운 대답과 나기사의 증오 어린 시선이었다.
"히마리 씨의 말대로라면 우리가 '선생'을 숨겨주고 있다는 건데, 지금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지는 알고 있습니까? 이런 모욕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군요."
하지만 이미 선행학습을 끝마친 히마리였다. 두 번씩이나 반복되는 상황을 겪은 그녀는 이런 태도에 당황하지 않고 계속해서 태연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나기사 씨, 서로 정보를 다 알고 있는 상황에서 연기는 무의미합니다. 아니, 오히려 여러분들과 선생님에게 해를 가할 뿐입니다."
"히마리 씨. 자신의 말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게 될 지 생각을 해보셨습니까? 당신은 지금 트리니티에 선전포고를 가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나기사는 꾀꼬리가 울린 이상 선생이 어딨냐고 물어보는 건 당연지사의 일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히마리가 "그 범죄자 당장 이리 내놔라!"라고 말하지 않고 선생과 같은 편이라고 말한 건 뜻밖이긴 하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히마리를 믿는 건 그녀 입장에서 말이 안 되는 행동이었다.
'유도심문일 뿐이다. 절대로 꼬투리조차 주면 안 돼.'
그리고 나기사는 목소리를 더욱 날카롭게 갈며 말했다.
"지금이라도 그 말을 철회하신다면 받아들이겠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겠다면 지금 이 대화를 공론화할 수도 있습니다."
트리니티가 어떤 학교인가. 키보토스 내에서 가장 강력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받는 학교다. 극단적으로 말해 모든 학교가 연합해서 총공격을 해도 어느 정도 싸움이 성립이 되는 학교다. 그리고 지금 그 학교의 대표격 인물이이렇게 말하고 있다.
"더 이상의 모욕은 용납치 않겠습니다. 알겠습니까?"
나기사는 의심을 힘으로 찍어누르는 방식을 선택했다. 만약 여기서 더 의심을 하겠다면 밀레니엄이고 뭐고 찍어누르겠다는 초강경책. 이러면 설령 상대가 어떤 사람일지라도 움츠러들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히마리는 물러서지 않았다.
"지금 저는 여러분들을 떠보려는 것도 겁박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여러분들은 이 대화를 오해하고 있습니다."
히마리는 이미 모든 정보를 알고 있다. 그러니 나기사의 지금 모든 말들이 거짓말과 허장성세라는 건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이 대화를 공론화할 수 없다는 건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 역시 그러지 않기를 원하고 있고요."
"..........."
두 번의 실패를 반면교사 삼아 히마리는 한 층 더 섬세하게 접근하고 있었다.
"제가 현재 저주에 걸려있는 상태라는 건 제가 가장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성까지 전부 내버리진 않았습니다. '선생님'에 대한 기억이 무언가 잘못되어 있다는 건 알고 있고, 그래서 학생들이 맹목적인 증오를 쏟아내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나는 너희들의 편이라는 걸 납득시키기 위해 소녀는 증오를 억누르면서 침착하게, 차분한 얼굴로 이야기를 계속 이어갔다.
"그리고 이 저주가 지금 벌어지고 있는 헤일로 발광 현상하고도 연관이 있죠. 예상컨대, 이는 전에 일어났던 색채의 침공과 버금가는 위협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나코 씨, 그렇지 않습니까?"
".....맞는 말이죠. 지금 벌어지고 있는 상황은 어디까지 여파가 갈 지 두려울 정도니까요."
말을 않고 있던 그녀의 입이 열렸다. 그렇다면 이는 신뢰를 얻은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렇기에 '선생'을 빨리 포획한 다음에 해결 방안을 찾아야 되는 거죠. 히마리 씨처럼 우리가 선생의 행방을 알고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그녀들은 전혀 가드를 내리지 않고 있었다. 아니, 내릴 수 없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것이다.
'어쩌면 지금 신뢰를 줄 수도 있겠지만.. 꾀꼬리가 밀레니엄 쪽에서 울린 이상, 이건 함부로 믿어줄 수 있는 문제가 아니야.'
그 '밀레니엄'에서 울린 꾀꼬리고, 여기엔 '아케보시 히마리'가 관련되어 있을 확률이 굉장히 높았다.
'아마 모든 정보를 게임개발부에게서 얻어냈을 거다. 그리고.. 저 화면으로 보이는 건 분명히 아비도스.'
만약 밀레니엄이 아니었다면, 히마리가 아니었다면, 꾀꼬리가 울리지 않았더라면 지금 여기서 "아, 당신은 확실히 뭔가 다르군요."라고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3박자가 겹친 이상 그녀는 믿음을 줄 대상이 아닌 의심의 대상일 뿐이었다.
'...왠지 나기사 씨가 이해되는 기분까지 들 지경이야.'
지금 하나코의 눈에 비치는 히마리의 모습은 먹음직스러운 먹이를 미끼로 던져두고 거대한 짐승이 낚이기를 기다리고 있는 사냥꾼이었다. 배에서의 인연도 있었기에 그녀는 그리 생각하기 싫었지만 도저히 그럴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여러분, 저는 지금 이 대화를 이어가는 게 너무나 힘듭니다. 여러분과 달리 저는 해주가 되지 않은 상태여서, 지금도 계속해서 마음 속에서는 증오가 끊임없이 올라오고 있단 말이죠? 표정관리도 제대로 안 되니까 정말로 힘들어요, 이거."
히마리는 가슴도 머리도 점차 뜨거워지고 있었다. 게임개발부와 대화할 때도 그랬고 아비도스 대책위원회와 대화할 때도 그랬다. 선생과 관련해 이성적인 대화를 시도하려 하면 늘 저주는 이를 방해했다.
'슬슬 위험해. 이거 잘못하면 또 헛소리가 튀어나올 거 같아.'
하지만 같은 실수는 반복하지 않는다. 분노를 조절하지 못해 쉽게 갈 수 있는 일을 어렵게 만들었다. 그렇기에 소녀는 절대로 같은 실수를 반복할 수 없었다.
"이 상태라면 지금 저는 그다지 도움이 못 될 것같습니다. 뭐.. 코사카 와카모 씨나 미소노 미카 씨는 어떻게든 버텼다곤 하지만, 저는 그 정도로 정신력이 강하진 못해서요."
순간 언급된 미카의 이름에 모두가 흠칫했다. 하지만 미카는 크게 당황하지 않은 채 곧바로 생긋 웃으며 말했다.
"저기, 무슨 말을 하는 걸까나~?"
"당신은 선생님에게 무작정 증오를 품지 않은 한 명이라고 들었습니다."
이 시점에서 여기 있는 전원은, 스마트폰 화면에 나오는 저 백발의 소녀가 전부 파악하고 있다는 사실에 마음 속으로 경악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연기를 멈춰도 된다는 뜻은 아니었다. 상대방이 알아챈 것과 자신이 인정하는 건 다른 문제니까.
"아하~☆ 그게 무슨 말일까? 혹시 시비를 터는 거야?"
"아뇨, 진심으로 대단하다 생각하고 있습니다."
"휠체어 타고 있다고 해서 내가 봐줄 거 같아? 땅바닥을 기어다니게 해줄까?"
칭찬에도 불구하고 돌아오는 건 강도 높은 협박. 연기라는 걸 알고 있음에도 히마리는 절로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이었다.
'왜 자꾸 나를 휠체어에서 떨어트리려 하는 거지..?'
호시노와 놀라울 정도로 똑같은 반응에 히마리는 분홍머리는 원래 다 이런가 생각까지 들고 있었다.
"그건 사양하겠습니다. 그리고 제발 다들 가면 좀 벗어주시면 안 될까요? 몇 번이고 말하지만, 만약 선생님에 대해 알아내려고 했다면 이런 식으로는 안 합니다. 저는 순전히 도움을 얻기 위해서 여러분께 묻는 거고요."
"글쎄~ 그냥 나기 짱이나 나한테 시비 거는 걸로밖에 안 보이는 데 말이지~☆? 내가 무식해서 그런가~?"
"아닙니다. 제가 바라는 건 저에게 걸린 저주를 푸는 것일 뿐이죠. 그리고.. 그걸 위해선 선생님이 필요합니다."
"밀레니엄에 한 번 들렀다 와야 하나~?"
"..........."
히마리는 답답했다. 감정에도 호소해보고 논리적으로도 설득해보려 하지만 좀처럼 먹히지 않았다. 물론 아주 성과가 없는 건 아니었다. 그녀들의 마음 속에서는 조금씩 히마리를 믿어도 되는 지에 대한 고민이 생겨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동시에 소녀들은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간악한 백사가 혀를 낼름거리며 우리를 속이려 든다. 마지막까지 의심해야 돼.'
그녀는 머리가 좋았다. 그렇기에 그것이 걸림돌이 되고 있었다. 머리가 좋기에 자신들을 충분히 증오마저도 억누르며 자신을 속여넘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히마리와의 대화는 좀처럼 진전이 없었다.
'제발 그냥 좀 믿어주라! 바보처럼 굴어도 되잖아!'
비명을 지르고 싶은 히마리였지만, 진짜로 악을 질렀다간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기에 할 수 없다. 대체 어떻게 해야 이들은 믿어줄 것인가, 히마리는 머리를 굴리고 또 굴렸다.
"응, 뭔가 잘 안 풀리나 보네."
"?"
그리고 그 때, 갑자기 화면 너머로 익숙한 늑대의 얼굴이 들어왔다.
"아니 왜 갑자기 들어오시는 거에요?"
"보니까 너 혼자만으로 설득 힘든 거 같아서 내가 도와주러 온 거 뿐이야, 응."
"어....."
히후미가 조금 당황스러워하며 시로코를 쳐다보자, 그녀는 손을 흔들며 답했다.
"안녕, 대장. 내 말 좀 잠시 들어줄 수 있겠어?"
"어.. 네?"
히후미가 뭐라 말할 새도 없이, 시로코의 다음 말이 이어졌다.
"이 녀석 말을 믿어주는 게 어떨까 싶은데."
"네?"
이렇게 두 학교의 정상회담은 아비도스의 참여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기 시작했다. 한편..
"으에에에에엥!!! 갈래! 갈 거야!!!"
"안 돼! 아무리 떼를 써도 소용 없어."
"싫어! 왜 안 된다는 거야!! 페로로 페스티벌 가고 싶단 말이야!!"
만마전의 사무실에서는 귀여운 동생이 언니한테 현재진행형으로 땡깡을 피우고 있었다.
-후기-
150화를 넘기면 간단하게 한 회차를 외전으로 써 보려고 하는데 어떠십니까?
마음에 드는 거 하나 골라주세요!
댓글 영역
획득법
① NFT 발행
작성한 게시물을 NFT로 발행하면 일주일 동안 사용할 수 있습니다. (최초 1회)
② NFT 구매
다른 이용자의 NFT를 구매하면 한 달 동안 사용할 수 있습니다. (구매 시마다 갱신)
사용법
디시콘에서지갑연결시 바로 사용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