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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 소설) 그대는 천진난만한 밤의 희망 10화

미끄럼밧줄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3.09.12 01:29:31
조회 2680 추천 30 댓글 19
														


드디어 이 스토리 안질리고 10화까지 써 왔다...

텀이 꽤 길었는데 현생이 좀 힘들어서 시간 내기가 좀 힘들었다...

그렇게 오늘 키보드 잡고 쓰다가 실시간으로 다음화 기다려주는 사람 보고 기뻐서 후딱 키보드 두드려봤다

두자릿수 될 때까지 재밌게 봐준 블붕이들 모두 고맙고 앞으로도 잘 부탁할게

이 스토리 제법 길어질 것 같으니까 이제 여기다가도 쓰면서 어디 개인 사이트에다가도 올려놔서 보기 편하게 만들어놔야겠다...

그럼 이번에도 재밌게 봐주고 개추랑 댓글 부탁하겠음

25





“열차 안에서는 세 사람이 같은 방을 써. 난 다른 방을 쓸테니까.”

“에에...나도 선생님이랑 같은 방 쓰고 싶은데!”

이런 반응이 나올 줄 알았다.

아무리 그래도 사람들이 드나드는 열차니만큼, 미카와 둘이서 같은 객실을 사용하면 말하기 껄끄러운 일이 생길수도 있고, 그렇다고 나기사와 세이아까지 끌어들여 같은 방을 쓰기도 곤란하다.

“미카 씨, 이 이상 선생님을 곤란하게 만들지 마세요.”

나기사가 투정부리는 미카의 한쪽 팔을 잡으며 그녀를 타일렀다.

“아침 식사는 1시간 쯤 있다가 식당칸에서 먹는걸로 하자. 다들 그 때 뭐 먹고싶은거 있으면 말하렴.”

그렇게 세 사람을 객실로 보내고, 나도 내 객실 문을 잠근 뒤 짐을 풀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그 사이에 열차가 출발한다는 안내방송이 들렸고, 그것은 이 도시와 영영 작별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였다.

갈아입을 옷, 지갑, 여권, 세면 도구, 호신용 물품 등, 빠진 물건은 보이지 않았다.

커튼을 열고 창문으로 바깥 풍경을 보았을 때는 도심지를 빠져나간지 이미 오래였고, 처음보는 숲 속 나무들의 풍경이 지나가고 있었다.

“후...이제야 속이 좀 후련하네.”

이걸로 내가 태어났던 무법지대와는 진정한 의미에서 작별이다.

바깥의 풍경을 바라보자, 그 사실을 실감하고 무의식적으로 속마음을 소리내어 중얼거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바로 그 순간,

“이거이거...직접 뵙는것은 간만이군요. 선생.”

뒤에서 변조음을 섞은듯한 일렁이는 목소리가 들려오자 순간적으로 소름이 돋았다.

품 속에서 권총을 꺼내들어 곧바로 눈 앞의 존재에게 겨누었다.

“...설령 백만년만에 본다고 해도, 반가울 일은 없을거라는걸 알고 있을텐데?”

“아, 이거 실례했습니다. 귀하를 본지 오랜 시간이 지났기에, 이 감격스러운 해후에 벅찬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그만...”

“그건 너 혼자만의 감상이겠지. ‘검은 양복’.”

검은 양복.

내가 키보토스에서 선생으로서 있던 시절, 자신들의 욕망의 실현을 위해 학생들을 수단으로 삼아 온갖 잔인한 짓을 벌이려 들었던 ‘게마트리아’라는 이름의 조직의 일원.

그는 그 중에서도 처음으로 나와 마주한 자였다.

마치 새까만 마네킹과도 같은 몸에, 파인듯한 얼굴에서 스멀스멀 연기가 올라오는 모습은 그것이 인간인지 이전에 생물이 맞는지 의심스러워질만큼 기괴하고 불길한 기운을 내뿜는 자.

그리고 새까만 몸에 더해 새까만 양복까지 입어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 자.

그렇기에 그가 ‘검은 양복’이라고 불리우는 것이겠지.

그가 이 공간에 나타나자, 방 안은 불을 킨 상태였음에도 마치 칠흑같은 어둠에 머무르고 있는 듯 했다.

실제로 그렇게 어둠속에 잠긴것은 아니겠지만, 그가 내뿜는 분위기로 하여금 이곳이 어둠 속이라고 착각하게 만든다.

“개인적인 용무가 있어, 꽤 먼 곳까지 나왔습니다만...이런 곳에 계셨을 줄은 몰랐습니다.”

“계속 네 할 말만 하는데, 난 너랑 나눌 이야기 없어. 당장 내 방에서 나가.”

슬며시 권총의 격철을 젖혔고, 작지만 분명하게 쇳소리가 들렸다.

이제 내가 방아쇠를 당기기만 하면 이 자의 머리통은 산산조각난다.

“이런이런, 화내지 말아주십시오...그저 몇 마디 이야기를 해드리러 온 것일 뿐이니, 너무 감정적으로 행동하시지 않아도 괜찮습니다...선생.”

그가 양 손을 들어올려 저항할 수단이 없음을 보이며 살며시 뒤로 물러선다.

“내가 이 방아쇠를 당길지 안당길지는, 전적으로 내가 정한다.”

“물론, 그렇습니다. 귀하의 선택은 오로지 귀하의 의지대로...그 전제조건으로, 이야기를 계속해도 되겠습니까?”

내가 권총을 겨눈 채 그를 문 앞까지 몰아세운 뒤, 쿵 하는 작은 소리가 들렸다.

복도가 보이는 유리도 커튼이 쳐 있어 밖은 보이지 않는다.

혹여나 지금, 세 사람이 이 곳에 오지 않길 바랄 뿐이다.

“제가 알기로, 이 열차는 키보토스로 곧바로 이어지는 곳까지 향하는 열차로 알고 있습니다만...선생은 지금 이 시기에 키보토스로 가시려는 겁니까?”

“...무슨 헛소리야.”

이 자의 말투는 마치 내가 지금 키보토스로 향해서는 곤란하다는 듯한 모양새다.

이 녀석들은 또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거냐.

“크크큭...그렇게 무서운 표정 지으실 필요 없습니다, 선생. 방아쇠를 당겨버리실까봐 미리 말씀드리는겁니다만, 저희 게마트리아는 선생이 떠난 후 지금까지 별다른 활동을 진행하지 않은 채 휴식기를 보내왔습니다."

“말은 번지르르하게 하면서, 몇 년동안 묵혀놓은 흉계를 터트리려는건 아니고? 나나 학생들을 갖고 놀 생각이라면...그 쯤 해두는게 좋아.”

“이것만큼은 분명히 약속 드리지요. 저희 게마트리아가 그 날 선생이 키보토스에서 떠난 이후 지금까지 활동을 중지해왔다는 방금의 표현에 거짓은 없으며, 그 부분에 관하여 함구한 진실도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럼 계속 휴가나 보낼 것이지, 무슨 목적으로 내게 말을 거는거지?”

“키보토스에 가시려는 거라면, 다음 역에서 바로 내리시길 권유드리러 왔습니다.”

“머리통에 한 발 박아줬으면 한다는 말을 번거롭게 빙빙 꼬아서 말하는군.”

“들어주시지요, 선생. 아시지 않습니까? 키보토스의 존망이 걸렸던 전대미문의 재앙이 덮쳐왔던 그 날을.”

전대미문의 재앙.

나는 이 자가 무엇을 말하는지 알고 있다.

“...‘색채’가 다시 키보토스에 다가오고 있기라도 한다는건가?”

색채.

나는 그 존재를 정의할 마땅한 단어가 생각나지 않는다.

솔직히 말해서 그것을 존재라고 정의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말할 수 있는것은, 그저 온 세상을 돌아다니며 자신들(자아를 가지고 있는건지도 불명확하지만, 우선 그렇게 정의한다)의 손아귀에 닿는 모든 이들의 본질을 한없이 자신들의 ‘색채’로 덧씌우려 하는 바이러스와도 같은 개념.

한때 그러한 색채가 모종의 이유로 키보토스에 가지를 뻗으려 들었고, 나는 그곳에서 ‘그 존재’를 마주했다.

프레나파테스.

학생들을 구하지 못하고 파멸을 맞은 채, 색채에 물들어버린 또 하나의 나의 모습을.

“...그렇다고 해도, 그 때 색채를 불러낸것도 너희들이 원흉 아니였나? 이번에도 같은 경우가 아니라고 어떻게 믿지?”

“말씀 드렸지 않습니까. ‘게마트리아는 귀하가 키보토스를 떠난 후 활동을 중지한 상태였다’고...하지만 저희 게마트리아가 각자의 방식으로 관측한 결과, 그 때 색채가 키보토스에 손을 뻗었던 그 날과 유사한 전조현상을 몇가지 확인했습니다. 그러한 위기상황이 또 다시 일어났기에, 게마트리아도 다시 활동을 시작하려는 것이지요. 그 과정에서 필요한 정보를 찾기 위해 다양한 외국을 방문하던 와중, 이렇게 귀하를 우연스럽게 만나게 된 것이랍니다.”

머리속에서 수 없이 많은 질문들이 떠오르는 와중에, 눈에 띄는 문장 하나를 우선시하여 짚어보자면, ‘지금 이 자가 거짓을 말할 확률이 얼마나 되는가’이다.

이들의 행동은 항상 나를 불쾌하게 해 왔다.

학생들을 자신들의 욕망을 위해 수단으로써 얼마든지 이용하려 든 자들.

잠시나마 선생으로서 학생들을 지키는 입장으로서 있어온 내게 그들의 행동은 더할나위 없는 분노를 불러오게 만들었다.

그들의 손아귀에 얼마나 많은 학생들이 소중한 것을 잃고, 상처받고, 또 목숨을 잃을 뻔 하였는가.

하지만 얄궃게도, 처음 색채가 키보토스에 왔던 그 때, 작전의 결정적인 전환점이 된 ‘우트나피쉬팀의 배’에 대한 정보를 이 자에게서 접한것 또한 사실이다.

이 자의 이야기가 진실인지, 거짓인지...아직은 알 수 없다.

“...난 어차피 이 열차가 키보토스에 도착하기 전에 내릴거야. 네 녀석이 경고하러 찾아올 필요도 없었다는 이야기다.”

그저 지금의 내가 해야할 일은 그러한 최악의 가능성을 염두해 둔 채, 스스로가 최우선시해야 될 바를 마음속에 새겨둘 뿐.

“...알겠습니다. 긴 시간동안 귀하를 붙잡아 둔 실례, 뭐라 사죄드릴 말씀이 없군요. 그럼 가시는 여행길. 모쪼록 살펴가시길...”

그 자는 서양식 귀족의 인사라도 흉내내는 듯한 포즈를 취하고서, 마치 벽 속으로 스며들듯이 사라졌고, 그제서야 객실의 전등빛이 방 안을 밝게 비추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선 채로 꿈이라도 꾼 기분이다.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을 지독한 악몽을.

이마와 등 뒤로 쏟아지는 식은땀을 이제서야 자각한다.

권총의 안전장치를 다시 걸어두고 격철을 풀어두었다.

그 순간 문 앞에서 노크소리가 들렸다.

너무 놀라서 순간 손에 쥔 권총을 떨어트릴 뻔했다.

다시 권총을 품 안에 넣어두고 커튼을 열고 문 앞에 선 사람을 확인했다.

“선생님, 식당칸에 오시지 않으셔서 와 봤습니다만, 혹시 무슨 일 있으신가요?”

나기사가 당황한 기색을 보이며 문 앞에 서 있었다.

문득 손목시계를 확인해보자, 이미 약속한 시간으로부터 10분 정도의 시간이 지나있었다.

“아, 아무것도 아냐...잠깐 짐 속에서 안보이는 물건이 있어서 그만...내가 너무 오래 기다리게 했지?”

급하게 편한 복장을 갖춰입고, 객실 문을 확실하게 잠궈놓은 뒤 나왔다.


“선생님! 왔구나!!”

식당칸 문을 열고 들어가자, 미카가 달려들어 내 팔을 끌어안았다.

“늦어서 미안해. 잠깐 일이 좀 있어서...”

“저번에 봤을때도 그랬습니다만, 열차의 특수한 환경 때문일까요...대부분의 음식들이 너무 무미건조하다는 느낌이였습니다. 자극적인 조미료로 그런 건조함을 떼우려고 하는 것 같달까요.”

“세이아 짱 입맛이 너무 까다로운게 아니고?”

“당신 입맛이 너무 싼 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무작정 달고 짠 것만 먹어댔다간 살이 뒤룩뒤룩 쪄버릴겁니다.”

“세이아 짱, 열차에서 뛰어내리는 액션영화 찍고싶은거면 돌려 말하지 말아줬으면 좋겠어★!”

“두 사람 다, 제발 부탁이니 한 순간이라도 평화롭게 계셔주실 수는 없는건가요...”

나기사가 이마를 짚으며 표정을 찡그린다.


적당히 빵과 음료수를 먹은 뒤, 세 사람을 객실로 돌려보내고 홀로 객실에서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던 와중, 또 다시 노크소리가 들렸다.

“누구세요?”

“선생님, 나야.”

문 너머에서 들려온 것은 미카의 목소리였다.

“무슨 일이니? 셋이 낮잠 잔다고 하지 않았어?”

이야기한 시간으로부터 30분은 지났으니, 세 사람이 제때 들어갔다면 지금쯤 나기사와 세이아는 방 안에서 곯아떨어졌을것이다.

지난 몇 일간 피곤한 일들이 잔뜩 있었다. 긴장이 풀린 뒤에 몸도 마음도 갑자기 확 지쳐버리는것도 무리는 아닐것이다.

“그게...어떻게든 자려고 했는데 잠이 안와서...잠깐만 선생님 방에 같이 있어도 될까?”

순간 당혹감을 감추지 못할 뻔 했다.

이런 상황이 생길까봐 방을 나눈거였는데, 결국 그녀가 먼저 내게 다가와버리고 말았다.

예전이였다면 어떤 구실을 대서라도 그녀를 밀어냈을 것이다.

“...들어오렴.”

하지만 지금의 나는, 어쩔 수 없다는듯 웃어넘기며 그녀를 맞아들였다.

“꽤 많은 일이 있었는데, 피곤하지 않아?”

서로 마주앉은 뒤,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으응, 피곤하지 않달까...오히려 긴장돼서 잠이 안 오는것 같아...”

미카는 나를 잠시 바라보더니, 얼굴을 붉히고 어쩔 줄 몰라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게 있잖아, 선생님이 내 집에 온다는 사실을 실감하니까, 이걸...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는데...갑자기 부끄러워졌다고 해야 할까...지금 생각하니까 나, 평소엔 방도 꽤 많이 어지럽혀놓고, 제 때 안버린 쓰레기라던가, 어질러놓은 빨래들같은게 떠올라서...”

거기까지 말한 그녀는 고개를 숙인채,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려버렸다.

요컨데, 혼자 지내는 동안 방의 위생상태를 신경쓰지 못했고, 그걸 내게 보여버리게 되는게 창피하다는걸까.

순간적으로 피식 하고 웃어버렸다.

비웃음보다는, 자취를 시작한다는 점에서 어찌보면 필연적으로 겪는 과정을 두고 이렇게까지 고민하는 그녀의 모습에서, 내 옛 모습이 생각났기 때문인 것 같다.

“왜 그래 선생님, 내 고민이 그렇게 한심해보여?”

미카가 서운하다는 듯 볼을 부풀리며 내게 물었다.

“아냐,아냐...그렇게 생각했다면 미안해. 그냥, 미카가 그렇게 고민하는 모습을 보니까...내가 처음 집을 가졌을 때가 생각나서 그래.”

그녀는 잘 모르겠다는 듯 어리둥절한 얼굴이다.

이 녀석 설마...내가 처음부터 자기관리가 철저한 완벽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온걸까.

“꿈을 포기한 뒤로 뒷세계에서 정신없이 살아가다가, 어느새 내 집을 살 돈을 마련했었거든, 처음으로 나만의 공간이 생겨서 그랬었는지...그 때 나는 집안 살림 하나하나 제대로 할 수 있는 구석이 없었지.”

“대체 어땠길래?”

“말도 마...요리는 할 줄 몰라서 인스턴트 식품만 먹었지, 화장실은 물때가 잔뜩 껴서 구석부터 곰팡이가 피어올랐지, 환기는 안해서 집은 먼지 구덩이, 빨래도 엉망진창, 부엌에는 바퀴벌레...지금 생각해도 발디딜 틈 없는 곳이였어.”

“우와...그런 엄청난 시절을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네...”

미카는 그런 나의 모습이 지금과 비교하기 힘들다는 듯 당혹스러운 표정을 보였다.

“너도 나이 먹어봐, ‘그 땐 그랬지...’하면서 피식하고 넘기게 된다니까.”

등을 의자에 기대며 팔을 쫙 뻗고 기지개를 피면서 말했다.

“미카, 너무 그렇게 조급할 필요 없어. 처음부터 그렇게 완벽하게 자기관리를 해낼 수 있는 사람은 없거든. 각자 다르겠지만 부족한 부분을 갖고 있고, 그걸 고쳐나가기 위해서 노력한 결과 번듯해보이는 한 명의 어른이 되는거지.”

“하긴...나기 짱도 어른스러워 보이려고 하지만, 은근 덤벙대는 구석이 남아있고 말이야...”

문득 세이아가 해줬던 말이 떠오른다.

그렇게 매사 어리광만 부리고 싶어했던 미카가 내가 떠난 이후 쌓아왔을 노력은, 분명히 그녀의 마음가짐이 성장하지 않았다면 이룰 수 없었을 성과다.

그저 아직 그 노력이 그녀 스스로가 만족할만큼 쌓이지 못했기에, 이렇게 초조해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

중요한건 어느 위치에 도달했을 때, 그 위치에 도달했다는 사실에 자만하지 않고 한걸음 더 나아가고자 하는 향상심을 유지하는 것.

“뭐, 나도 지금은 제법 일하고 다니면서도 집안을 꽤 깔끔하게 유지할 능력이 생겼지만! 미카한테는 아직 배워야될 집안일 기술이 많을 뿐이라는거야.”

“...하아...”

갑자기 미카의 텐션이 확 낮이졌고,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왜 갑자기 그렇게 한숨을 다 쉬고 그래?”

“조금 걱정이 됐거든, 내가 아직 세상물정을 몰라서 그런걸까, 여기까지 오는 과정에서 벌써 너무 힘들다는 생각을 몇 번이나 했는지 몰라. 머리에 안 들어오는 내용을 어떻게든 쑤셔넣어보려고 밤 새도록 공부하고, 휴일에 놀러가고 싶었던 것까지 참아가면서...산지 사흘도 안됐던 문제집들이 통째로 없어진 적도 있다?”

그 말에 내 표정도 굳어버렸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알 수 있었을 것이다.

내가 떠난 뒤, 그녀가 미래를 준비해나가는 과정에서 그동안 이어져 왔던 그녀를 향한 따돌림이 지속됐으리라는것을.

“잠 자고 싶었던 것까지 참아가면서 공부하고, 합격자 발표날엔 기숙사 방에서 나기 짱이랑 세이아 짱까지 시간을 내줬어. 두 사람이 같이 있어준게 너무 고마웠는데, 그 때 갑자기 머리속에서 ‘떨어졌으면 어쩌지?’ 하는 불안감이 확 하고 떠올랐거든...그러자마자 잘 풀었다고 생각했던 시험 문제들도 엉뚱하게 푼것처럼 머리속이 뒤죽박죽 엉켜버려서, 그 순간 ‘합격하고 싶다’는 마음을 ‘불합격한걸까’라는 불안감이 덮어버렸어...”

큰 시험의 결과를 두고 긴장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 시험에 스스로가 걸었던 마음이 간절할수록, 그만큼 이뤄내지 못했을 경우의 실망감도 깊어질테고, 그런 가능성을 생각하는 것만으로 결과가 나오기 전부터 불안감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때 결과는 어땠어?”

지금 그녀는 어떤 기분으로 내게 이 이야기를 해 주는 것일까.

우리 둘 사이에 술이 놓여져 있는것은 아니지만, 나의 눈에 지금의 그녀는 마치 술을 취할만큼 들이킨 후, 스스로의 인생에 쌓여왔던 고충을 털어놓는 취중진담을 하는것과도 같아보였다.

“물론 합격했지. 합격이라는 두 글자를 보고 난 계속 굳어있었는데, 나기 짱이랑 세이아 짱이 엄청 놀라면서...또 기뻐하기도 하면서 나한테 축하한다는 말을 계속 해 줬지. ‘내가 합격했어?’, ‘나 이제 ‘선생님’이 될 준비를 할 수 있어?’라는 생각이 드니까 있지...나 그 자리에서 주저앉아버렸어. 그 다음엔 창피하게 엉엉 울어버렸지 뭐야.”

내 상상력이 풍부한걸까.

아니면 그녀가 상황을 꽤 자세하게 이야기 해 준 덕분일까.

복받쳐오르는 기쁨을 어찌하지 못하고 터져나오는 눈물로 표현해버렸을 미카,

그런 모습에 순간적으로 당황해버렸을 나기사와 세이아의 모습이 머리속에 선명하게 그려진다.

“잘 했네, 누군가에게 노력을 강요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노력해서 결실을 맺은 미카는 정말 대단한 일을 해낸거야.”

말을 잇지 못하는 그녀를 껴안아 주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자 마치 꽃들로 가득한 정원을 지나는 듯한 향기가 올라왔다.

“...그런데 있지, 가끔은 너무 힘들어.”

목이 메인 듯 그녀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스스로가 선택한 일이니까, 선생님을 다시 만났을 때 당당한 내가 되고 싶으니까, 한 번 마음먹은 일을 이뤄내고 싶으니까, 공부도 열심히 했고, 누군가 내 물건을 훔치더라도 묵묵히 견디고, 졸업하고 나서도 나기 짱이랑 세이아 짱이랑 다른 대학에, 키보토스 밖에서 아는 사람 하나 없이 생활하는 것도 받아들이고,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도 잔뜩 쌓이는 과제도 해 왔어.”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 이런...

마음속 응어리를 털어놓는 순간, 그동안 그녀에게 쌓여온 감정이 터져버려 울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렇게 직접 눈 앞에서 눈물흘리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는것은, 언제라도 내 마음속을 쓰라리게 만든다.

“‘울면 안 돼’, ‘이제와서 또 어린애처럼 못한다고 포기하면 안 돼’, ‘이제 어른이니까 힘든 것도 참고 견뎌야 해’, ‘혼자 일어설 수 있어야 해’...대학에 합격하기 전부터 힘들때마다 그런 생각들을 잔뜩 하면서 버텨왔어.”

쏟아지는 눈물을 어떻게든 닦아내려 노력하는 미카였으나, 마음을 억누르려는 그녀의 노력이 무색하게도 그럴수록 눈물은 댐이 터진듯 흘러내렸다.

“그런데...그런데 있지? 너무 힘들더라고...따돌림 당하거나, 소중한 사람과의 관계가 망가지거나, 노력했던 무언가가 실패한 것도 아닌데...그저 나기 짱과 세이아 짱, 코하루 짱, 사오리, 모두와 떨어져서 혼자 지내게 되니까...함께하던 사람들로부터 내가 떨어져나왔다는 사실을 자각할 때마다, 너무 외로워졌어. 혼자가 된다는건 일상의 고충을 털어놓는것 뿐 아니라, 좋은 일이 생겼을 때 같이 기뻐해줄 사람도 없는거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너무 쓸쓸해졌어.”

그녀는 자신의 꿈을 위해서, 스스로가 형성해온 모든 인간관계로부터 멀어졌다.

그 누구도 자신을 모르는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친구를 사귈 수도 있는 일이겠지.

하지만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가 정말로 기존의 인간관계를 대신할 수 있을만큼 진실된 관계를 맺었다고 한들, 그녀는 새로운 인간관계로 스스로의 마음속에서 기존의 것을 대신하지 못 할 것이다.

‘가장 소중한 것’이 존재한다 해서, ‘다른 소중한 것’을 밀어낼 수 없었기 때문이리라.

“나도 알아, sns로 연락하면 된다는거. 근데 혼자있는 시간이 길어지니까, 다들 목소리도 듣고싶고, 얼굴도 보고싶어지더라...하지만 알고 있었지, 다들 각자의 삶을 살고 있으니 바빠서 시간을 내기 어렵다는거. 나도 마찬가지였고...”

“그 외로움이 쌓이고 쌓여서, 앞으로 어떻게 해야할지 모를것 같은 때도 있었겠지.”

내가 입을 열자, 그녀는 눈물을 닦아내던것을 멈추고 나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눈물 섞인 그녀의 눈동자가, 반사된 빛으로 하여금 보석처럼 빛나게 하였다.

“미카, 혼자 있을 때 외로움을 느끼는 걸 자책할 필요는 없어. 사람에게 있어 그건 어찌보면 당연한거야. 힘들 때 참는것도 한계가 있지...그런 일은 스스로가 한계를 정해두고 그걸 넘었다 싶으면 주변에 문제를 끼치지 않는 선에서 해소하면 돼.”

나의 얼굴이 비치는 그녀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다시 한번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선생님이...내가 해주고 싶은 말은, 미카는 그 힘든 시간을 잘 버텨와줬고 그걸 해낸 미카가 정말 대견하지만! 쉴 틈 없이 달리다가 지쳤을 때는, 억지로 더 뛰다가 넘어지기 전에 가끔은 스스로 뜀박질을 멈추고 앉아서 쉴 필요가 있단거야.”

아직 한마디, 그녀에게 내가 더 해주고 싶은 말은.

“그동안 정말 고생 많았어 미카. 이제 미카도 정말 어른이구나.”

나의 이 한마디를, 그녀는 간절히 바랐던 것일까.

그랬을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지금 그녀가, 내 품에 안긴채 모든것을 잊은채 목놓아 울고있는 것이겠지.


미카를 품에 안고 달래준지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이제 조금 진정됐어?”

“응...고마워 선생님. 그런데 말은 어른이라고 해놓고, 지금 이 모습은 내가 영락없는 어린애 같잖아.”

그녀는 다시 어린애 취급을 받는게 좋은 듯 싫은 듯 복잡한 감정인지, 살짝 볼을 부풀린채로 있었다.

“너도 나이 먹어봐. 제자들이 아무리 나이먹고 잘 컸어도, 선생이란 사람은 처음 제자들을 봤던 그 때를 잊을 수가 없는 법이거든.”

“그럼, 그동안 봤던 어린애같은 모습 말고, 더 많은 어른스러운 모습을 보여주면 되는거네? 우리 집에서!”

그게 그런 논리로 이어지는걸까.

똑똑한듯 하면서도, 생각의 흐름이 제멋대로 엉뚱한 곳으로 향하는것도 그녀의 버릇이였지.

“뭐, 너무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열심히 해봐. 도착하면 집청소부터 하고, 그 다음은 내 일자리부터 알아보자.”

“퇴근하면 꼭 내 말동무도 해줘야 돼? 그 동안 혼자 지내느라 너무 외로웠다구!”

“그래. 부족한 몸입니다만, 아무쪼록 잘 부탁 드립니다.”

매일같이 특별한 일을 겪었다고 할 것도 없었지만, 도착하기까지의 과정중 첫 날은,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다.

그리고 시간은 흘러, 우리들이 내려야 하는 기차역에 도착하는 날까지 다다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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