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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이날이면 생각나는 훈련소 동기가 있다

ㅇㅇ(164.67) 2020.06.25 02:18:46
조회 4978 추천 56 댓글 13

정말 더운 7월, 정말 더운 여름이었다. 아침에 의류대에 짐을 싸서 보내고, 철모에 총 한자루 들고 행군을 시작했다. 허리를 굽혀가며 힘들게 올라갔던 언덕길을 터덜터덜 걸어 내려갔고. 군사도로를 타고 산속으로 한참을 들어가다가 능선에 올라서 시루봉 정상을 찍고 아래 내려오기까지. 이제는 어느 정도 흐릿해진 기억이지만 그래도 순간순간 이런저런 기억은 남아있다.


안쪽이 미끌미끌하고 이상한 냄새가 나던 수통, 점심이랍시고 던져준 주먹밥 하나, 힘내라고 응원해 주던 해군체육복 입은 아저씨들, 주머니에 넣고 한참 걸으면서 개좆같은 모양이 된 카스타드...


애초에 물이 든 수통이 무거워서 물을 가득 채우지도 않았었는데, 날씨가 너무 더워 물이 부족했다. 그래도 어느 정도 배분은 잘 했는지 산에 내려와서 쉰다던 장소에 도달했을 때 마지막으로 두세모금 입에 머금을 정도의 물은 남아있었다. 그때는 등산로 입구에서 진해루까지가 얼마나 멀게 느껴질지 전혀 몰랐던 거지. 산에서는 그나마 그늘이라도 있지, 시내로 나오니까 한여름 오후에 해는 아직도 머리 위에 떠있고 그늘 하나 없는 길을 걸어야 했다. 군인답게고 지랄이고 진짜 너무 덥고 힘들어서 흐느적거리면서 걸었던 것 같다. 다들 너무 힘들어 보이니까 교관도 뭐라 하지도 않았고, 중간에 2리터짜리 생수 사서 소대마다 두개씩 주더라. 당연히 모자랐지 ㅅㅂ.


그러다가 앰뷸런스가 사이렌을 울리면서 몇 번 왔다갔다 하고 애들 몇이 쓰러졌다는 소리가 뒤에서부터 들려올 때, 나도 고민을 하기 시작한다. 내가 진해 지형을 아는 것도 아니고 얼마나 남았는지 감도 안 잡히는데 진짜 너무나 힘들었으니까. 나름 학교에서 운동도 하고, (반강제로) 아빠 따라서 등산도 하면서 체력적으로 부족하다는 느낌을 받은 적은 없던 나였지만, 더위와 수분 부족 그리고 얼마나 더 걸어야 하는지 알 수 없는 1분 1초가 너무나도 길었던 길 위에서 무의식적으로 발을 내디디며 고민했다. 나도 그냥 탈진해서 쓰러진 척하고 앰뷸런스를 타고 갈까 하는 생각. 낙오자 리스트에 올라서 일과 후 추가교육을 받는 힘겨움과 지금 내가 느끼는 고통 중 어느 게 더 힘들고 어느 게 더 나을지, 나름 잔머리를 굴렸다.


그러다 어느덧 바다가 보였다. 타지역에서 왔던 나에게 진해바다 = 진해루 = 도착지점 이었지만, 그래도 정문까지는 한참을 더 걸어가야 했고 어쨌든 무사히 교육사 입구에 도착했고, 입구에서 헌병들이 물을 뿌려줘서 더위를 식히며 안으로 들어갔다. 옷을 벗고 씻으면서 찬물을 맞으며 갑자기 갈증이 폭발해 그냥 위로 입을 벌리고 입안에 들어오는 수돗물을 마셨던 기억, 석식 후 또다시 갈증에 물을 마시려 했지만 식수가 모자라 그냥 수돗물을 다시 마셨던 기억도 있다. 분명 내 배는 물로 가득 차있는데, 머리에서는 아직도 물이 부족하다고 더 마시라고 명령하는듯한 느낌이 너무 이상하고 독특했다.


내 훈련소는 그렇게 끝났다. 힘겨운 행군을 다녀오고 나서는 그 어떤 교관도, 소대장도 쓴소리를 하지 않았고, 심지어 너무 긴장이 풀린 나머지 불침번을 쌩까고 그냥 잠을 자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초등학교 때 받아쓰기가 귀찮아 중도 포기했던 천주교 세례를 받았고, 수료식을 준비하며 우리 기수에서 처음 시도한다던 수료식 후 외출을 기다리면서 하릴없이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모두가 그렇게 편한 훈련소 마지막 며칠을 보낸 건 아니었다. 행군날 쓰러져 앰뷸런스에 실려갔던 동기들 대부분은 단순한 탈진으로 금방 일어났지만, 그렇지 못했던 친구가 하나 있었고 그는 끝까지 일어나지 못했다. 이 친구가 속했던 소대의 소대원들은 훈련소의 마지막을 헌병대 조사로 보냈고, 나는 한참 뒤에야 소대장들도 아마 이런 일 때문에 조사를 받으면서 우리를 그냥 방치해 뒀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누군가가 훈련 도중 쓰러지고 일어나지 못한 건 분명 큰일이긴 했지만, 나와는 동기라는 것 외에 전혀 접점이 없고 (교관이 말해줘서 알게 된) 심유봉이라는 이름 세 글자 외에는 그가 누구고 어떤 사람인지 전혀 몰랐기에 그 친구는 그렇게 내 기억에서 잊힌듯 했다.


몇 달 뒤 육상에서 인트라넷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던 중 기군단에 흘러들어가, 이런저런 사진과 자료 사이에서 훈육 계획을 담은 파워포인트를 찾아 열어봤다. 별 의미 없는 계획과 평가를 그럴듯하게 씨불여놨다는 생각이 들었고, 한장 한장 생각 없이 넘기다가 인원보고 특이사항에 적혀있는 기억 저편에 묻어뒀던 이름 세 글자. 유봉이는 해가 바뀐 뒤로도 여전히 기초군사교육단 소속 이등병이었고, 원인미상 의식불명으로 수도병원에 누워있었다. 나는 그렇게 야간당직을 설 때마다 가끔씩 그 친구가 어떻게 됐는지가 궁금해서 파워포인트를 찾아보았고, 그는 수도병원에서 단국대병원으로, 단국대병원에서 다시 수도병원으로 옮긴 뒤 전역심사위에 회부됐다고 했다. 그걸 마지막으로 짧고도 길었던 그의 군 생활도, 또 나의 군 생활도 끝이 났다.



내 입대일은 6월 25일이었다. 우리가 행군했던 그날이 7월 며칠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입대했던 6월 25일이 워낙 상징적이기에 매년 이날이 되면 몇 년 전 훈련소에서 보낸 몇 주 그리고 그 누구보다도 고생하며 힘들어했을 그 동기가 떠오른다. 지금은 어떨지 모르지만, 그 친구에게 기적 비슷한거라도 일어났으면 하고 매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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