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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민의 빚 청산이 일반인에게 자괴감을 준 까닭
CCBBLAB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8.12.07
조회 10602 추천 50 댓글 87
69억 8천 만원을 빚지다.지난 10년에 걸쳐 빚을 갚아왔던 이상민이 법원의 압류해제 통지를 받으면서, 화제가 되었다. SBS '미운우리새끼' 프로그램에서 이상민이 법원에 방문해 압류 해제 통지를 받는 모습이 공개된 것이다.JTBC 냉장고를 부탁해이상민의 빚 청산이 그동안 많은 사람의 관심을 모았다. 한때 대한민국 최고의 프로듀서로 손대는 것마다 대박을 쳤던 그가 엄청난 빚을 지게 된 것이다. 그 액수만 해도 ‘억’ 소리가 나온다. 무려 69억 8000만 원으로 도저히 회생할 수 없어 보였다.그의 빚이 한 사람이 갚기에는 너무나도 큰 액수였기 때문에, 왜 그가 빚을 지게 되었는지 여론에서 말이 많았다. 이상민은 이종격투기 시청과 식사가 동시에 가능한, 김미파이브라는 식당을 운영했었다. 하지만 일이 잘못되어 무려 130억 원대의 자금을 투자했으나, 69억이 넘는 빚이 그에게 돌아왔다.SBS 미운우리새끼처음 방송할 당시, 몸값이 300만 원 정도였다는 걸 고려하면, 지금은 얼마나 오른 것일까? 17년 5월에는 브랜드 평판 1위를 차지할 정도로 최근 방송계에서 영향력 있는 인물이 된 그는 현재 프로그램당(회당) 500만 원 이상을 받는 것으로 추정된다.그간 이상민은 막대한 채무로 인해 방송 출연료를 압류당해 왔다. 하지만 정신없이 여러 프로그램을 소화하다 보니, 대부분의 빚을 해결했다고 한다. 일반인이 69억이라는 돈을 상환할 수 있을까? 이는 불가능에 가깝다. 이것이 ‘연예인 걱정은 사치’라는 말이 나오는 이유이기도 하다.그렇다면 현실적으로 일반인이 69억 8000만 원을 갚는 데는 어느 정도의 시간이 걸릴까? 월 300을 버는 평범한 직장인이 집세와 보험료 등 고정 지출비를 빼고 100만 원씩 갚는다고 생각해보자. 그렇게 1년을 갚아 1200만 원을 갚았다. 69억 6800만 원이 남은 것이다.그렇다면 여기서, 3년을 더 일해 약 3500만 원을 갚았다. 빚은 69억 3300만 원이 남았다. 승진하고, 경력이 조금 쌓여 올해부터는 월 400만 원을 벌게 되었다. 이제부터는 매달 200만 원씩 빚을 갚기로 했다. 그렇게 또 5년이 지나, 68억 1300만 원이 남았다.총 9년이 지났고, 갚은 금액은 1억 6700만 원이다. 거의 10년을 갚았지만 68억이라는 돈이 남아있는 것이다. 지금처럼만 벌면, 평생 벌어도 갚을 수 없는 금액이다. 10년에 평균 2억씩 갚아나간다고 쳐도, 340년 정도가 더 걸린다.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까지 대대손손 갚아야 갚을 수 있는 돈인 것이다.비마케터69억이 아니라 6000만 원만 빚져도 삶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일반인 기준으로는 상상조차 가지 않는 금액인 것이다. 사람이 생업에 종사하는 기간 벌어들일 수 있는 돈을 생애소득이라고 한다. 한 사람의 생애소득은 약 10억 원에 근접하는데, 이 생애소득만으로 따져 보았을 때도 69억이라는 돈을 갚기 위해서는 7명의 사람과 210년이란 세월이 필요했다.우스갯소리로 상평통보부터 모아야 갚을 수 있는 금액이다. 괴리감이 안 느껴질 수 없는 금액인 것이다.글 CCBB 에디터 집토스시시비비랩
99% 직장인들이 최악이라고 평가하는 꼰대들의 공통점
CCBBLAB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8.12.07
조회 7680 추천 25 댓글 62
"요즘 것들은 노력이라는 걸 안 해요." 꼰대 특징 TOP10tvn 미생어딜 가나 꼰대는 존재한다. 커피 타오라는 말은 일상이고,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있으면 삿대질과 고함부터 친다. 세상에서 가장 자신이 바르고 잘났기 때문에, ”내 말이 곧 진리다.”라고 믿는 꼰대들 이런 꼰대들에게 공통점이 존재한다.보통 불만을 드러내거나, 문제점을 물어보았을 때 내세우는 근거이다. “다들 그렇게 생각해”, “너만 그런 거야” 자신의 생각이 곧 모두의 생각이라고 착각한다. 자신이 믿는 말이 아니면 그 외에 모든 말은 무시한다. 꼰대의 근거는 과거에 기초한다. 그 어떤 논리적, 과학적 근거 없이 과거에는 그랬다는 말을 자주 한다.대부분 자신이 간섭할 권리가 없는 문제에 오지랖을 부리는 경우가 많다. 내가 시키는 대로, 내가 옳다고 믿는 대로 행동하지 않으면 무조건 문제가 있는 사람이다. 그 사람의 도덕성을 깎아내린다.“다 너 잘되라고 하는 소리야”는 “나에게 맞춰야 네가 성공할 수 있어“라는 편협한 생각을 반영한 것이다.무엇이 옳다, 옳지 않다를 따질 때, 서열로 이를 결정한다. 자신보다 아래에 있는 직급의 사람들에게는 본인의 말이 무조건 옳다. 또한, 자신보다 서열이 낮은 사람에게 복종을 요구한다. 가뜩이나 서열도 낮은데 나이까지 어린 사람에게는 그 정도가 더욱 심하다.꼰대들은 자신보다 서열이 낮은 이에게는 모든 방면에서 내가 낫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 어떤 전문직 종사자들도 꼰대와 함께 있으면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 취미로 한 번 끄적여 본 것 역시 포함이다. 배드민턴 선수에게 ”내가 왕년에 배드민턴 좀 쳐봤는데 말이야...”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과 같다.팀에서 성과가 나면 무조건 본인이 낸 성과이다. 심지어 그 프로젝트를 보지 않았더라도 마찬가지이다. “내 조언 덕분이야”, “거봐 내가 뭐라 그랬어” 등 듣는 사람 처지에서는 황당하기 그지없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게 될 것 같냐며 소리치던 사람이 180도 바뀌었으니 말이다.“왕년에 내가 말이야!” 자기 자랑을 멈추지 않는다. 지식과 경험을 자랑하는 것을 좋아하고, 별로 대단하지 않은 일도 대단한 것처럼 포장해서 말한다. 이야기를 잘 듣다 보면, 대개는 오랜 과거의 이야기이다. 아무도 공감하지 못하는 이야기를 끊임없이 쏟아낸다.꼰대들이 아마 가장 많이 사용하는 도입부가 ‘요즘 애들’일 것이다. 항상 근거 없는 말을 달고 산다. 그렇기 때문에 반박하기도 힘들다. 듣지도 않을뿐더러 옳고 그름을 따지는 기준이 무조건 자기에게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옛날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요즘은 다르다.”라는 말을 시작으로 비판한다.세상에서 가장 성실한 사람은 본인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일을 가장 많이 하고, 제일 바쁜 사람이기 때문에, 남들이 쉬는 꼴은 절대 용납 못 한다. 휴가는 말할 것도 없고, 몸이 아파서 내는 병가조차 이해하지 못한다. “겨우 그 정도 갖고 그러는 거야? 나 때는 있잖아...” 다시 과거로 돌아가 자기 기준으로 사람을 판단하고 순식간에 사람을 엄살쟁이로 만든다.여성을 쉽게 무시하는 꼰대들이 있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회사에서 여성들에게 인기가 많다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딸이 있으면서도 여자라는 이유로 사람을 쉽게 보거나 무시하는 꼰대들이 있다.보통 지금의 꼰대들은 전에 있던 상사가 꼰대일 확률이 높다. 잘못된 조직 문화에 섞이면서 어겨 서는 안될 규율로 각인하고 강요하는 것이다. 자신 역시 조직에 섞이면서 강요를 받아 왔기 때문에 ‘당연히 그렇다.’라고 생각하고 꼰대 짓을 하는 경우가 많다.글 CCBB 에디터 집토스시시비비랩
생각없이 넣고 있었던 대형마트 카트 100원의 진실
CCBBLAB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8.12.07
조회 11481 추천 24 댓글 87
카트에는 왜 100원짜리만 넣어야할까?대형마트를 방문하기에 앞서 사람들이 100원짜리 동전을 먼저 찾는 일은 이제 일상이 되었다. 쇼핑카트를 이용해 편리하게 장을 보기 위해서는 100원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100원 동전을 넣어야지만 카트를 빼서 사용할 수 있으며 다 쓴 이후에도 마찬가지이다. 다시 카트를 집어넣어야지만 100원을 돌려받을 수 있다.그렇다면 이와 같은 ‘코인락 시스템’이 운영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처음부터 쇼핑카트를 이용하는데 100원이 필요했던 것은 아니다. 왜 ‘코인락 시스템’이 발명되었는지, 그리고 왜 하필 100원이 사용되었는지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자.skyedaily대형마트마다 소비자들의 쇼핑을 돕기 위해 많은 쇼핑카트를 구비해놓고 있다. 그런데 이 카트때문에 마트 측이 많은 손해를 감내하고 있다고 한다. 카트를 사용하기 위해 100원이 필요하기 이전에는 문제가 더욱 심각했다.쇼핑 카트를 마트 밖에까지 반출하여 이용하고 아무 곳에나 버리는 ‘어글리 소비자’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대로 집까지 가져가서 아파트 지하주차장에 방치하는 카트들이 넘쳐났다.사진출처 - chosun마트 한개 지점에서 매달 쇼핑카트 10대 가운데 1대가 분실되고 있다고 한다. 일년으로 치면 수백대가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카트가 엄청나게 사라지다 보니까 사용하는 소비자들 중에도 불편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마트 측의 손해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쇼핑 카트는 1대 당 17~20만원이나 하기 때문에 점포 당 카트로 인한 손실액만 연간 수천만원에 달한다.사진출처 - chosun실제로 카트를 매장 밖으로 가져나가 집까지 운반하는 것은 절도죄에 해당하지만 그 처벌은 쉽지 않기 때문에 이 문제를 해결하기가 더욱 어려운 것이다. 고객 눈치를 볼 수 밖에 없는 마트이므로 경찰에 신고하면 고객 방문횟수가 줄어들어 매출까지 영향을 받을까봐 적극적인 조치를 취할 수가 없다. 실제로 한 대형마트에서는 카트 외부 반출을 전면 금지했다가 주민들의 반발로 이를 철회하기도 하였다.사진 출처 - prettysjj동전 100원을 넣는다고 해서 카트 분실을 완전히 막을 수는 없었지만 이전과 비교했을 때 눈에 띄는 효과는 있었다. 코인락 시스템을 도입한 이 후에 카트회수율이 68%늘어났다고 집계되었다. 그래도 회수되지 않은 카트들은 카트수거반이 직접 아파트 지하주차장, 놀이터 등을 돌며 카트를 회수해온다고 한다.사진 출처 - inven완전한 해결책은 주지 못했지만 마트 입장에서는 나름 실효성을 거둔 셈이다. 뿐만 아니라 동전 100원을 이용한 코인락 시스템을 도입하면서 카트를 효율적으로 정리하는 부수적인 효과도 얻을 수 있었다. 동전을 통해 카트를 일렬로 묶어두고 있기 때문에 분실 우려가 줄어들었음은 물론이고 효율적으로 정리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그렇다면 왜 100원일까? 일각에서는 100원만으로는 보증금의 역할이 약하니까 500원으로 금액을 올리자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실제로 500원 보증금 제도를 도입한 마트고 있다고 한다. 100원이 금전적 가치가 낮은 것은 사실이다. 100원으로는 살 수 있는 물품도 없으니 충분히 카트를 다시 집어넣지 않고 끌고 갈 수도 있는 것이다.하지만 100원은 우리 주변에서 가장 흔히 사용하는 동전이다. 이미 50원, 10원은 거의 사용되고 있지 않으며 500원짜리도 흔히 들고 있지는 않다. 500원을 넣어 이용할 수 있는 셀프세차장에서도 지폐를 500원으로 교환하는 일이 잦다.그만큼 500원이 주머니 속에 있을 일이 없다는 의미가 된다. 그러나 100원은 다르다. 동전 저금함에 가장 많은 것이 100원이고 어디서든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것이 100원이다.마트란 곳은 어쨌든 소비자를 최우선으로 하는 공간이니만큼 코인락 시스템을 운영하더라도 고객들이 가장 편리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은 것이다.만약 지폐를 동전으로 교환하여 카트를 이용해야 한다면 카트 회수율은 올라가겠지만 그만큼 쇼핑 카트 이용률도 떨어질 것이 분명하다. 때문에 소비자들의 편의성을 충족시키는 선에서 카트 회수율을 높이기 위한 적정선이 100원이었던 것으로 보여진다.글 CCBB 에디터 집토스시시비비랩
6개월만에 월 매출 11억 돌파한 ‘온라인 천원샵’의 비결
CCBBLAB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8.12.07
조회 5541 추천 4 댓글 3
‘다이소’를 비롯한 오프라인 천원샵은 사람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그렇다면 온라인 쇼핑몰로 '천원샵'을 운영하는 것은 어떨까? 대부분의 소비자들은 가격이 싼 데는 다 이유가 있다고 생각해 저렴한 물품일수록 더욱 자기 눈으로 보고 직접 고르고 싶어한다. 때문에 온라인 천원샵은 실패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물건 값 자체도 싼데 배송료까지 있으면 어떻게 흑자를 낼 것인가'라는 비즈니스적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모두의 예상을 깨고 온라인 천원샵을 성공으로 이끈 CEO가 있다. "싼 게 항상 비지떡은 아니다" 라는 신조를 바탕으로 온라인 천원샵을 이끈 데이비드 염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자. '더 어니스트 컴퍼니'라는 아기용품 제조사의 부사장이었던 데이비드 염이 바로 온라인 천원샵, 'Hollar'를 성공시킨 장본인이다. 처음에는 적자로 출발한 사업이지만 6개월 뒤, 월 매출 11억을 달성하며 사람들의 기우를 뒤집었다. Hollar에서 가장 인기 있는 유니콘 동물 베개는 하루에 무려 1,000개나 팔렸다고 한다. "싼 게 항상 비지떡은 아니다" 라는 그의 신조를 지키듯 천원샵,Hollar는 싸고 형편없는 물건을 파는 곳이 아니다.  2천원 짜리 장난감이 질이 나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데이비드 염은 그의 회사 Hollar가 협약을 맺는 제조사를 고를 때 굉장히 신중하게 선택하여 이와 같은 선입견을 깨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한다.뿐만 아니라 Hollar에서는 유명 브랜드 제품을 판매하기도 하는데 레블론의 립글로스, 치리오스의 시리얼, 디즈니 배낭이 대표적이다. 문제는 간혹 브랜드 제품을 온라인에서 저렴하게 판매하면 그 물건들이 사기나 짝퉁으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다.이는 Hollar가 넘어야 할 벽으로 데이비드 염은 고객의 신뢰를 얻기 위해서도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Hollar에서 파는 매니큐어 브랜드 OPI의 상품도 정품이며 오레오 시리얼도 진짜 오레오 제품이다. 뷰티 코너에는 레블론부터 로레알까지 모두 정품만을 취급하고 있다. 심지어 Hollar에서 판매하고 있는 천 원짜리 임신 테스트기도 똑같이 FDA 승인을 받은 제대로 된 제품이라고 한다. 대부분의 브랜드 제품은 마감 세일 혹은 '핫딜'로 저렴하게 제공되고 있다.이 온라인 천원샵 사업은 데이비드 염이 오프라인 천원샵에서 얻은 영감 덕분에 시작되었다. 그는 이베이, 오뜨룩, 더 어니스트 컴퍼니와 같은 소매 회사에서 일해왔지만 정작 필요한 물건을 살 일이 있으면 반드시 다이소에서 쇼핑을 했다고 한다. 그가 직접 이용해보니 이보다 더 좋은 사업 아이템이 없었던 것이다. 더불어 온라인에는 오프라인 매장처럼 저렴하게 물건을 파는 곳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데이비드 염이다. 그런 사이트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대부분 배송이 심하게 느리거나 물건의 품질이 좋지 않다는 평을 듣고 있었다.그래서 그는 저렴하면서도 품질이 좋은 오프라인 천원샵을 운영해보자는 생각을 하게 된다.그렇게 2015년 초반, 데이비드 염은 그의 친구이자 더 어니스트 컴퍼니의 CEO인 브라이언 리와 팀을 이뤄 Hollar 사업의 청사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실제로 오프라인 천원샵에서 일을 했던 경력이 있는 사람 등 또 다른 세 명의 공동 창립자와 함께 그 해 11월 Hollar 앱과 온라인 스토어를 론칭한 데이비드 염이다. Hollar는 론칭 된 이후로 매달 성장세를 달리고 있다. 대부분의 주문은 온라인 사이트가 아닌 모바일 앱에서 이루어지며 주문의 80%는 캘리포니아와 뉴욕 외 지역에서 들어온다고 한다. Hollar의 주 고객층이 중부 지역의 젊은 엄마들로 데이비드 염은 "엄마들이 우리의 VIP가 될 줄 알았죠."라며 이 사실을 언급했다.회사의 이익 또한 생각해야 할 부분이므로 '최소 주문 금액 10달러 이상'이라는 제한도 두었다. 한화로 약 만천원정도 해당하는 금액이다. 이 정도 제한이 있어야 배송비가 더 나가서 배보다 배꼽이 더 커지는 경우를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25달러(약 2만8천원)이상을 주문하는 고객들에게는 무료 배송 서비스도 제공하고 있다. 보편적으로 천원샵은 싼 물건을 주로 취급하기 때문에 최소 주문 금액을 채우는 게 쉽지 않을 것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Hollar의 평균 주문 금액은 30달러가 넘는다. 3만 원도 넘는 금액이다. 여태껏 Hollar에서 가장 높았던 주문 금액은 무려 963달러로, 약 100만 원에 해당하는 금액이었고 구입 제품 개수는 300개였다고 한다.또한 Hollar에서는 부피가 너무 큰 상품은 되도록 판매하고 있지 않다. 22kg짜리 세탁 세제와 같은 무겁고 부피가 큰 제품이 배송이 어렵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우유, 바나나와 같이 쉽게 상할 수 있는 제품들도 판매를 금하고 있는 Holla이다. 데이비드 염은 보다 저렴하면서도 고품질의 상품을 소비자들에게 제공하기 위해 자체 제조사를 만들 계획을 계속해서 세우고 있다.글 CCBB 에디터 집토스시시비비랩
재벌가의 사모님들은 왜 미술관 관장이 많을까
CCBBLAB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8.12.07
조회 7819 추천 14 댓글 22
이코노미톡 뉴스현재 재벌가에서 운영하고 있는 미술관은 일반인에게 널리 알려진 곳만 30여 곳에 달한다. 그리고 미술관 관장 자리는 대부분 재벌가 사모님들이 차지하고 있다. 때문에 미술관 운영은 사모님들의 고상한 취미에 불과하다는 사회적 편견이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래서 오늘, 재벌가 사모님들이 왜 그토록 미술관 운영에 관심을 가지는지에 대해 알아볼까 한다.서울신문/연합뉴스대중들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재벌가 사모님의 미술관은 단연 삼성그룹 홍라희 여사가 이끄는 리움과 호암 미술관이다. 이외에도 SK 최태원 회장의 부인 노소영 씨가 관장으로 있는 아트센터 나비, 김석원 전 쌍용그룹 회장의 부인 박문순 씨가 관장을 맡고 있는 성곡미술관 등이 익히 알려진 재벌가의 미술관들이다.제이 폴 게티그렇다면 왜 대기업에서는 재벌가 사모님들을 앞세워 미술관이나 갤러리를 운영하는 것일까? 궁극적인 목적은 문화 사업으로 기업 이윤을 환원하기 위해서라고 알려져 있다. 이는 비단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대기업들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이다. 재벌들 중에는 취미생활로 미술품 수집을 하는 이들이 많이 있다. 대표적으로 금융 재벌이었던 제이 피 모건과 석유 재벌인 제이 폴 게티 등이 있는데 이들도 미술관을 지어 수집한 미술품을 사회에 환원했었다.heraldcorp삼성미술관 리움의 경우 이건희 회장과 홍라희 관장 소유의 국보 41점, 보물 107점 등을 전시할 수 있으니 위의 이야기와 일맥상통하는 부분이라 볼 수 있다. 일반인들의 문화 향유기회와 삶의 질적 향상을 도모할 수 있도록 돕기위해 미술관을 설립했다는 취지에 걸맞아 보인다. 하지만 문제는 대한민국 대중들이 대기업의 미술관 운영 목적을 이처럼 투명하다고 바라보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과연 사회환원이라는 순수한 목적만으로 미술관을 운영하는 것일까? 라는 부정적인 시선이 대부분이다.Samsung Museum of Art하지만 대기업들이 미술관을 운영함으로써 사회에 기여하는 긍정적인 면 역시 분명히 있다. 기업의 후원으로 작가들의 전시회, 작품 판매가 가능하며 재벌의 탄탄한 재정 덕에 미술계의 불황을 극복할 수 있다는 점은 확실히 재벌의 미술관 운영이 미술계 발전에 기여하는 바이다. 미술계를 위한 이와 같은 긍정적인 측면도 반드시 인정해줘야 할 부분이다. 만약 기업에서 미술관 운영 규모를 축소한다면 당장 타격을 입는 것은 미술계 작가들이다. 작가들의 활동 영역도 그만큼 줄어들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추적 60분대중들이 재벌가의 미술관 운영을 곱게 보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미술관이 비자금 조성 혹은 돈 세탁에 악용되고 있다는 인식이 강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리움 미술관이 삼성 비자금 조성에 깊숙이 개입되었던 사건으로 인해 세간이 들썩였던 적이 있다. 미술관이 상속의 수단, 재산의 은닉처로 탄로 난 전적이 있기 때문에 그들의 미술관 운영을 순수한 눈으로만 볼 수가 없는 것이다.뉴시스미술관을 운영하는 동안 미술관이 누리는 혜택들도 어마어마하다. 뮤지엄 프라이스라 하여 비영리 기관들은 기존 가격에 40-50%의 할인 금액으로 미술품을 구입할 수 있다고 한다. 이 할인 차액으로 비자금을 조성한다는 의혹이 짙다. 그뿐만 아니라 미술품 구입 관련 법이 제대로 제정되어 있지 않다는 점을 악용하여 대기업들이 미술관을 통해 오히려 부를 증축하고 있다는 견해도 있다.더불어 대기업의 미술관 사적 소유화는 사회 환원이라는 목적과 모순된다는 지적도 있다. 미술관의 검은 자금이 한창 이슈가 되어 재벌가 사모님들이 줄줄이 조사받았던 적이 있다. 논란이 생기자, 사모님들은 관장 자리를 내려놓았지만 세간의 관심이 줄어든 틈을 타서 대부분의 사모님들은 관장 자리로 복귀했다. 일반 회사라면 물의를 일으킨 직원을 복귀시킨다는 것은 거의 있을 수 없는 일이다.조선일보하지만 공석으로 유지되던 미술관 관장 자리는 다시금 원래의 주인을 찾아갔을 뿐이다. 성곡미술관 박문순 관장 역시 성곡미술관 전시회 후원금 등을 횡령한 혐의로 기소돼 징역 10월에 집행유예 2년 및 사회봉사 120시간을 선고받았지만 관장으로 다시 복귀했다. 이는 미술관의 기본인 공공성과 비영리성의 원칙을 무시한 것으로 지나치게 사적 소유화되어 있지 않냐는 지적을 받았다.여성동아미술관 운영이 사회 환원이라는 공적인 목적보다는 사모님들의 고상한 취미 쪽으로 집중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한때 재벌가 사모님들 사이에서 미술관 운영이 유행처럼 번지면서 재벌가의 경제적 성공을 확인하기 위한 자기만족적인 측면도 있었다고 평가되고 있다. 외국의 사례에도 재벌 총수 부인들이 미술관을 설립하고 운영하는데 관심을 가지는 경우가 종종 있었지만 위와 같은 이유 때문에 한국의 경우, 그 목적에 대해 더욱 궁금증을 낳고 있는 것이다.글 CCBB 에디터 집토스시시비비랩
결혼식에서도 정복입은 남자 “고2때부터 가슴 뛰게 만든 직업”
CCBBLAB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8.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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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방'이라는 말만 들어도 좋았던 고등학생이 22세의 소방관 되기까지임용 8년차 오영환 소방교 의무소방→산악구조대→오토바이구급대 "시민 안전 위해 국가직 전환돼야"2017년 5월 19일 배우 정우성이 하얀 가루를 뒤집어썼다. 불 끄는 데 쓰는 소화 분말을 상징하는 밀가루였다. "존경과 존중이 따라야하는 험한 직업에 정당한 처우를 하지 않는 사회는 합리적이지 않다"라는 말도 남겼다. 과거 루게릭병을 알리기 위한 '아이스 버킷 챌린지'를 본 딴 '소방관 GO 챌린지'다. 소방공무원의 국가직 전환과 독립 소방청 설립 등을 담은 '소방관 눈물 닦아주기 법안'을 알리기 위한 이벤트였다. 현재 소방공무원은 90% 이상이 지방직으로, 각 지역별 예산에 따라 인원과 장비가 다르다. 동일한 서비스를 하지 못한다는 의미다.  첫 번째 주자는 법안을 제정하고 이벤트를 제안한 이재정 더불어민주당 의원이었다. 챌린지에 나서기 전 이 의원을 인터뷰한 이는 서울 성북소방서에 근무하는 오영환(29) 소방교.2017년 5월 19일 서울 강남소방서에서 '소방관 GO 챌린지'를 한 배우 정우성이 하얀 소화 분말을 뒤집어썼다. 오른쪽 사진은 첫번째 주자인 이재정 더불어민주당 의원과 함께한 오영환 소방교의 모습. /배우 정우성 인스타그램 ·오영환씨 페이스북'소방관이 천직'이라는 그는 한국 소방 현실을 알리는 일에 적극 나선다. 동료들과 함께 2014년 소방방재청이 국민안전처로 아래로 들어가는 것을 반대하는 1위 시위를 했다. 2015년에는 소셜미디어(SNS)에 연재하던 글을 묶어 '어느 소방관의 기도'라는 책도 펴냈다. 2017년 5월 5일 정부는 국민안전처 기능 중 소방 업무를 떼 '소방청'으로 독립하기로 했다. 2014년 세월호 사고 이후 국민안전처에 흡수된 지 3년 만이다. "아직 소방공무원의 국가직 전환이라는 큰 과제가 남았다"라는 오씨를 만났다.오영환씨 /본인 제공, jobsN◇ 수상-산악-오토바이 등 다양한 직무 경험 '소방관이 되고 싶다' 생각한 건 고등학교 2학년때였다. TV에서 화재 현장에 출동한 소방관을 보고 감동을 받았다. '보통 사람들'을 위해 일하는 모습에 끌렸다고 한다. "우리 부모님 같은 평범한 사람의 터전을 지켜주는 직업이라 좋았습니다." 대학에 진학했다가 1년만에 관뒀다. 소방공무원이 되는데 학력 제한은 없기 때문이다. 생활비와 공무원 시험 준비 자금을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10개 넘게 했다. 한 소방시설점검 업체에서 1년간 일하며 예방 실무도 익혔다.2008년 의무소방대에 지원했다. 병역 의무를 군대 대신 소방서에서 수행한 것이다. 부산에서 근무한 오씨는 수상구조대원으로 물에 빠진 10세 소녀를 구했다. 누군가를 살린 첫 경험이었다. 전역을 앞두고 소방공무원 시험을 쳐 2010년 합격했다. 약 2개월간 소방학교에서 화재진압,구조,구급 현장활동에 관한 기본적인 교육을 받았다.왼쪽 사진은 의무소방대로 군복무 대체를 하던 시절 수상구조대에서 근무하던 모습. 가운데는 의무소방대 훈련 모습. 오른쪽은 소방공무원 합격 이후 첫 임지였던 광진소방서에서 일하던 모습. /본인 제공첫 근무지는 서울 광진소방서였다. 화재·추락·교통사고 등 다양한 현장에서 사람을 구하는 '구조대' 직무를 맡았다. 소방 업무는 화재 현장에서 불을 끄는 화재진압, 사람을 구출하는 구조, 응급처치를 하는 구급으로 나눠져 있다. 구조대는 특전사 등 특수부대 부사관으로 4년이상 근무한 자를 대상으로 특별채용을 실시한다. 오씨는 "사람 살리는 일을 하고 싶다"라며 구조대 근무를 강력하게 희망했다. 의무소방 경력과 수상구조대 시절 딴 자격증이 있어 가능했다.오영환씨가 산악구조대로 활동하던 때 /본인 제공2년 뒤 '산악구조대'가 생기자 자원했다. 로프 구조 등 전문적인 업무를 배우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등산과 클라이밍을 좋아했던터라 잘 맞았다. 등산로 입구에 있는 산악구조대는 구조 요청이 오면 출동해 산 속에 있는 환자를 구조한다. 이때 근무 경험은 보람있었지만, 마음 속에 상처를 남기기도 했다. "산에서 심정지나 낙상 등 심각한 부상을 입은 응급환자는 거의 살릴 수가 없었습니다. 우선 환자를 찾으러 올라가거나 병원으로 이동시킬 때 평지에서보다 시간이 많이 걸렸습니다." 암벽에서 추락사한 환자를 살리지 못해 한동안 트라우마가 생기기도 했다. 좌절하지 않았다. 구조 뿐 아니라 구급 업무에도 전문성을 갖추기로 다짐했다. 산에서 내려와 서울 성북소방서에서 구급대원이 됐다. 환자 응급처치,이송을 담당하는 구급대에서 약 1년 근무 후 오토바이 구급대에 지원했다.오토바이를 쓰면 자동차가 가득한 도로나 좁은 골목을 빠르게 지날 수 있어 화재나 사고 현장에 일찍 도착할 수 있다.서울 성북소방서 오토바이구급대에서 일하는 모습. /본인 제공업무 외 공부도 게을리하지 않는다. 소방공무원 전형으로 서울시립대 소방방재학과에 들어가 4년간 공부했다. 최근에는 응급구조사 교육과정도 이수했다. 소방관으로 일한 8년간 거의 매일 네다섯 번 이상 현장에 출동했다. 크고 작은 화재와 사고에서 사람을 살리기도 했지만, 죽은 사람도 숱하게 봤다. 숨만 붙어있는 사람을 병원으로 옮겼지만 살아나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절대 익숙해지지 않습니다. 무뎌지지도 않고요. 누군가의 희생은 극복의 대상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 상황에서 잘해내지 못한 걸 자책하면서 받아들일 수 밖에 없습니다."서울 성북소방서 소속 오토바이 구급대에서 활약하는 오영환씨 /국민안전처 유튜브◇ '불쌍하다'라는 말은 말아주길 소방관은 존경받는 직업 1위(아르바이트 포털 알바몬)이지만 업무 환경은 열악하다. 매년 6명이 사망하고 300여명이 부상을 당한다. 근무시간은 주당 56시간이다. 작업 과정에서 유독 가스 등을 흡입해 암 등 질병에 걸릴 확률이 높다. 소방관 10명 중 1명은 화재나 사고 현장에서 본 끔찍한 장면을 잊지 못하는 외상후스트레스장애가 있다. 평균 수명은 58.8세로 짧은 편이다. 오씨는 유서를 써 친구에게 맡겨뒀다. "무슨 일이 생기면 아내에게 전해주기로 했다"라며 "언제일지 모를 죽음의 순간에 인사를 꼭 하고 싶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소방관에 대해 "불쌍하다" "위험하다"라는 시선이 싫다고 했다. "위험해보일 수 있지만, 소방관들은 전문적인 기술과 노하우를 충분히 익히고 현장에 나갑니다. 동정보다는 전문적으로 업무를 할 수 있도록 응원해주시는 걸로 충분합니다."오영환씨의 아내는 클라이밍 선수 김자인씨다. 다양한 구조활동을 위해 클라이밍을 배우는 과정에서 지인의 소개로 만났다. 오씨는 결혼식에도 소방관 정복을 입을 정도로 직업에 대한 애정이 있다. /김자인씨 인스타그램◇ 국민 안전 위해 국가직 전환해야 소방관은 공무원이라 월급이 법에 정해져 있다. 8년차로 10호봉인 오씨의 연봉은 각종 수당을 포함해 3500만원 정도다. 3교대로 야간에 일하며 받는 야근 수당, 출동 횟수에 따라 나오는 간식비 2000~3000원, 출동 횟수와 관련 없이 매달 6만원씩 받는 위험수당을 합한 금액이다. 오씨는 "현재 지방직이 절대 다수인 소방공무원이 국가직으로 바뀌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소방관 처우 개선 때문이 아니다. 직렬에 따라 공무원 월급은 변하지 않는다. 대신 국가직 공무원이 되면 소방 예산이 전 지역 동일하게 배분된다. 전 국민이 동일한 소방 관련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 현재 지역별로 예산을 편성하기 때문에 재정자립도가 낮은 지역은 소방공무원 인원과 장비가 부족하다. 예산이 부족한 대다수의 시·도는 2명이 나가게 된다. 응급환자에게 전문 구급처치를 해야하는 인원이 부족하다. 화재진압차량에 탑승할 인원도 차이난다. 방화복 등 개인 안전장비와 소방헬기 등 보유장비 수에도 큰 차이가 있다.왼쪽 사진은 2014년 1인 시위를 하는 모습. 세월호 사고 이후 소방방재청이 국민안전처에 통합될 때 전국 소방관들이 돌아가며 1인 시위를 했다. 소방공무원은 대부분 지방직으로, 각 지방자치단체 예산에 따라 인원과 장비 등이 다르다. 이 때문에 전 국민이 동일한 서비스를 받지 못하고 있다. 소방공무원의 봉급은 법에 정해져 있다. 예를 들어 2년간 군대를 다녀와 신규 임용돼 3호봉 소방사로 시작하는 경우 월 163만원 가량을 받는다. 수당 등을 합치면 연봉 2000만~2500만원 가량이다. /오영환씨 본인제공(사진 촬영 김명진), 공무원 봉급표◇ 화재·사고 대비해 시민이 꼭 지켜야할 일 현장에서 활동하면서 겪은 일을 바탕으로 시민들이 꼭 지켜야 할 일을 알려줬다. ① 불법주차(X). 좁은 골목에 불법 주차나 이중 주차를 하면 소방·구급차가 진입하지 못해 대응이 느려진다. ② 카시트(O). 앞좌석과 뒷좌석 상관없이 아이를 품에 안고 타는 것은 절대 안된다. 사고가 나면 아이가 튕겨져 나간 모습을 수없이 봤다. 어린 아이는 카시트에 앉히고, 안전벨트를 반드시 해줘야 한다. ③ 방화문 닫고 옥상문 개방. 방화문은 옆집이나 아랫집에 화재가 났을 때 연기를 막기 위한 장치다. 물건 등을 쌓아둘 공간으로 활용해서는 절대 안된다. 연기를 피해 대피할 수 있도록 옥상문도 열어둬야 한다. ④ 소화기·감지기(O). 최근 소화기와 감지기 설치를 의무화했다. 인근 소방서에 전화해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 소방공무원 되는 방법 소방공무원은 만 18세 이상 40세 이하면 지원할 수 있다. 소방·구급차를 운전해야 하기 때문에 제1종 운전면허 중 대형면허 또는 보통면허 자격증을 갖고 있어야 한다. 업무 특성상 다른 공무원에 비해 시력·체격·혈압 등 신체 조건도 까다롭다. 일반적으로 가장 많이 시험치는 화재진압(공채) 분야는 필수 과목인 국어·영어·한국사와 소방학개론·소방관계법규 등 선택 과목 2개를 본다. 응급구조·구급(특채) 분야는 소방이나 응급구조학 관련 전공자나 의무소방, 특수부대 등 경력자를 대상으로 실시한다. 분야별로 국어·소방학개론·소방관계법규·생활영어 등 3과목을 친다. 악력, 배근력, 윗몸일으키기 등을 보는 체력시험도 중요하다. 시험 일정 등 자세한 내용은 지방자치단체 인터넷원서 접수센터(local.gosi.go.kr/klid/main/main.do)에서 확인할 수 있다.  오영환 소방교는 "화재진압, 구급, 구조 등 하고 싶은 분야를 정하는 게 좋다"라며 "실무에 필요한 체력이나 운전 능력 등을 쌓는 게 도움된다"라고 말했다. 글 CCBB 에디터 감혜림시시비비랩
“71㎏ 뚱뚱해서 모델 안돼” 소리에 5년만에 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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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피팅 모델이 말하는 '편견에 맞서 싸운다는 것77사이즈 '플러스사이즈 모델' 염윤혜氏편견 극복하고 개성있는 모델로 데뷔나를 사랑해야만 할 수 있는 일누가 뭐라 하든 자신의 꿈을 꿋꿋이 지켜가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멋진 일 중 하나다. 가장 힘든 일이기도 하다. 염윤혜(22)씨는 여성의류 쇼핑몰 ‘제이스타일’의 전속모델이다. 키 168㎝에 몸무게는 71㎏. 허리는 32인치다. 77사이즈를 입는다. 일반적인 쇼핑몰 모델과는 많이 다른 프로필이다. 체격이 큰 ‘플러스사이즈 모델’이기 때문이다.플러스사이즈모델 염윤혜씨와 염씨의 프로필고등학교 때 처음 모델이 되고 싶다고 했을 때, 가족과 친구들은 뜯어말렸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결국 모두가 틀렸다는 사실을 증명해 보였다.  염씨는 다른 모델들처럼 미니스커트, 비키니 수영복, 밀착 원피스를 입고 카메라 앞에서 다양한 포즈를 취한다. 모델 일을 시작한지 이제 3개월. 틈만 나면 자세와 표정 연습을 한다. 아직은 카메라 앞이 낯설다. “턱을 어떤 각도로 내려야 하는지, 어떻게 서 있어야 각선미가 극대화 되는지 늘 연구하고, 운동하고, 공부해요. 부족한 게 많아요.”플러스사이즈모델 염윤혜씨 /제이스타일 화면 캡처◇170:1 경쟁률 뚫고 ‘플러스사이즈 모델’로 염씨는 제이스타일 주최로 2017년 5월 열린 ‘2017 플러스사이즈 모델 콘테스트’ 우승자. 이 콘테스트에는 키 160㎝, 77사이즈 이상인 여성만 참가할 수 있다. 2016년에 이어 올해 두 번째로 열렸다. 170명이 지원했다. 서류심사와 면접, 카메라 테스트를 거쳐서 콘테스트 무대에 오를 8명을 추렸다. 8명은 자신이 고른 옷으로 입고 런웨이를 걷고, 오디션 프로그램 ‘프로듀스 101’의 주제가 ‘픽미(pick me)’를 불렀다.  우승자는 면접부터 콘테스트까지 2개월여간 참가자들을 지켜본 제이스타일 심사위원들이 항목 별로 점수를 매겨 선정한다. 제이스타일 장선애 팀장은 “염윤혜씨가 옷을 고르는 센스, 화장 기술, 성실성 등에서 고루 높은 점수를 받았다”고 말했다.  우승자는 1년간 제이스타일 전속모델로 활동한다. 염씨는 2017년 6월부터 출근했다. 근무 시간은 오전 10시~오후 5시. 주 4일 근무다. 쇼핑몰에서 판매하는 옷을 입고 촬영을 한다. 쇼핑몰 의상을 직접 골라 입고, 셀카를 찍어 소셜미디어 계정에 올린 후 고객들과 댓글로 소통하는 일도 한다.플러스사이즈 모델로 활동중인 염윤혜씨 /제이스타일 제공“외국의 10대 소녀가 보낸 메시지가 기억에 남아요. ‘자기는 뚱뚱한 여학생인데, 학교를 가면 항상 따돌림 당한다, 심지어 돼지라고 놀린다. 상처 많이 받았다. 너를 보면서 자신감을 가져보려고 한다. 널 보면서 희망이 생겼고, 그래서 매일 웃는 얼굴로 학교에 갈 거다. 난 나를 소중하게 생각할거다’라는 내용이었죠. 이렇게 마음을 전해준다는 것 자체가 너무 감동이었어요. 제가 하는 일에 책임감을 갖고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수가 꿈이었던 소녀경기도 파주에서 나고 자랐다. 초등학교 입학 전, 부모님 이혼으로 아버지와 살았다. 아버지는 일 때문에 새벽에 나가서 밤 늦게 들어왔다. 할아버지, 할머니 밑에서 컸다. 형제도 없고, 집에만 있다 보니 TV가 유일한 친구였다. 아이돌 그룹의 화려한 공연을 보며 가수를 꿈꿨다. 중학생 때는 댄스동아리를 직접 만들어 춤 연습을 했다. 초등학생 때부터 중학생 때까지 대형 연예기획사 오디션을 여러 번 봤다. 하지만 모두 낙방이었다.jobsN과 인터뷰중(오른쪽)인 염윤혜씨 /jobsN“노래와 춤을 아주 못하는 수준은 아니지만, 남들을 놀라게 할 정도의 실력은 솔직히 아니었어요. 집에서 학원 보내줄 형편도 안됐고요. 실력이 부족한 줄 알면서도 막연히 가수가 돼서 무대에 서고 싶었던 것 같아요. 지금 생각해보면 ‘연예인’이 되고 싶었던 것 같아요.”  고등학생이 돼서도 가수가 되고 싶다는 꿈을 버리지 못했다. 방과 후, 매일 4~5시간씩 아르바이트 해서 번 돈으로 댄스 학원을 다녔다. 집에서는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기술을 배우든지 공부를 하라”고 했다. 고집을 부렸지만, 미래가 불투명했다.  ◇남들보다 조금 통통하다는 이유로 염씨는 어려서부터 쭉 ‘통통’한 편이었다. 초등학교 5~6학년때쯤 친구들이 '돼지'라고 놀리니 ‘내가 남들보다 덩치가 크구나’ 생각했다. 외모에 대한 자신감은 없었지만, 가수나 연예인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말을 할 때마다 돌아온 건 비아냥과 멸시였다.플러스사이즈 모델 염윤혜씨 /제이스타일 제공“초등학교 6학년때 반에서 장래희망을 말하는 시간이 있었어요. 제 차례가 됐을 때, ‘가수가 되고 싶다’고 했더니 같은 반 남자애가 박장대소하며 ‘너 같은 돼지가 가수가 된다고? 네가 가수 되면 내 손에 장을 지지겠다’고 말했어요. 그 친구는 장난으로 한 말이었지만 어린 나이에 상처가 됐죠.” 마른 친구랑 같이 다니면 사람들이 몸매를 비교하며 흉보는 말을 자주 들었다. ‘코끼리 다리 같다’, ‘뚱뚱한 사람들은 게으르다’와 같은 말을 다 들리게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내가 무슨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왜 이런 취급을 받아야 하나’하는 생각에 눈물이 났다.     학창시절 수 차례 다이어트를 시도했지만 실패를 거듭했다. “가수를 꿈꾸면서도 실력만 갖추면 외모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을 해왔던 터라, 왜 죽어라 살을 빼야 하는지 납득이 안 갔어요. 제가 건강을 걱정해야 할 만큼 비만인 것도 아니었고요.”일본 촬영에서의 염윤혜씨◇고교 졸업 후에도 계속된 방황2014년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방황을 끝내지 못했다. 가수나 연예인 말고는 하고 싶은 일이 없었다. 하지만 뚜렷한 출구를 찾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집안 등쌀에 못 이겨 피부관리사 자격증을 땄다. 잠시 피부과에서 일했다. 원하던 일을 제대로 도전해보지 못했다는 미련이 계속 남았다. 일에 집중할 수 없었다. 결국 1년 후 사표를 냈다.   기회는 우연히 찾아왔다. 사표를 낸 후에도 갈피를 못 잡고 방황하던 중 평소 자주 가던 쇼핑몰에서 모델을 뽑는다는 소식을 들은 것. 국내에서 보기 드문 ‘플러스사이즈 모델’이었다. “이거다 싶었어요. 여기에 제 모든 것을 쏟아 붓자고 생각했죠. 콘테스트에 지원한 이후, 전형이 진행되는 두 달여간 최선을 다했어요. 워킹, 안무 트레이닝 시간이 끝난 후에도 남아서 몇 시간씩 계속 연습했어요. 무대에 오를 수 있고, 카메라 앞에 설 수 있다는 설렘이 컸어요. 오래 전부터 꿈꿔온 일이었으니까요.”플러스사이즈 모델 염윤혜씨(회색 옷)와 배교현씨◇나를 사랑한다는 것플러스사이즈 모델이기 때문에 77사이즈 밑으로 내려가선 안 된다. 살이 더 찌는 것도 안 된다. 적절한 운동을 통한 관리가 필수다.  “유튜브 영상이나 책을 보면서 운동을 꾸준히 하고 있어요. 복근 운동, 팔뚝 살 빼는 운동 등에 중점을 둡니다. 플러스사이즈 모델이라고 해도 들어갈 데는 들어가고, 나올 데 나오는 게 중요합니다.” 염씨는 모델이 되면서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깨달았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남의 시선에서 조금은 자유로워지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플러스사이즈 모델 염윤혜씨(사진 모두 오른쪽)“저는 지금의 제 모습이 좋아요. 말랐는데 색깔 없고, 느낌 없는 것보다 조금 뚱뚱하지만 색깔 있고 매력을 가진 저 자신이 훨씬 좋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사랑해주는 사람은 주변에 항상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사람들과의 관계에 집중하는 것만으로도 인생은 충분히 행복할 수 있습니다.”글 CCBB 에디터 김지섭시시비비랩
탈모 남성 전문 미용사 ‘머리카락 잘랐는데 오히려 풍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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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 고객만 받기 위해 미용실 간판도 안 달아SNS 홍보로 와이프들 공략해 ‘남편 단골’ 유지전국 투어 강의 열면 30분 만에 티켓 매진 ‘윙~’ 미용실 내에 드라이어 소리가 요란하다. 젊은 여성 미용사가 바지런히 돌아다니며 고객들을 상대한다. 그런데 좀 이상하다. 보통 미용실과 다를 바 없는데, 고객은 모두 남성들이고 여성이라고는 헤어 디자이너와 그녀의 보조 스텝 둘뿐이다.  흔히 스트레스를 받거나 기분전환이 필요할 때 여성이 미용실을 찾는다고 한다. 하지만 이곳에 여성 손님은 단 한 명도 없다. 오로지 남성들을 위한 ‘남성 전용 미용실’이기 때문이다.  헤어 디자이너 이미영(32·여)씨는 업계에서 ‘디자이너 L’로 통한다. ‘미용계 연예인’ ‘반쪽짜리 미용사’ ‘연 매출 6억 미용사’ 등 그녀를 설명하는 수식어도 많다. 이씨를 만나 남성 전용 미용실을 차리게 된 이유와 비전에 대해 들어봤다.  ◇ “남성 고객들이 미용실에서 소외받는 모습 보는 게 안타까웠다” 대구가 고향인 이미영씨는 고등학생 때부터 미용사가 되겠다는 꿈을 꿨다. 하지만 부모님의 반대에 부딪혔다. 등 떠밀리다시피 해서 고향에 있는 한 대학에 입학해 섬유공학을 전공했다. 미분과 적분이 등장하는 수업 시간을 견딜 수가 없었다. 결국 1학기만 다니고 부모님 몰래 자퇴했다. “성인이 되니까 그땐 부모님이 져 주시더라고요.” 이씨는 뷰티 관련 학과에 진학해 진짜 꿈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경력 11년 차 미용사 이미영씨는 남성 전문 헤어 디자이너다./이미영씨 제공-서울에는 언제 올라왔나 “23살에 상경했다. 미용 기술을 배우면서 여성보다는 남성 헤어를 다루는 게 더 잘 맞는다는 걸 깨달았다. 당시에  ‘BOOO’이라는 남성 전문 미용실이 있어서 거기에 취업했다. 부푼 마음을 가지고 시작했지만 3개월 만에 그만뒀다. 서비스나 헤어스타일 측면에서 비전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더 전문적인 기술을 배우고 싶어서 무작정 서울로 올라왔다. 찾고 찾아서 서울에서도 남성만 전문으로 하는 미용실로 들어갔다.” -미용 업계에서는 남성 고객을 기피하는 경향이 있다던데  “기본적으로 남성 고객보다 여성 고객을 상대할 때 매출이 3배 높다. 업계에선 전체 고객 수 중 남성 고객은 30퍼센트 미만이라고 본다. 긴 헤어보다는 짧은 헤어를 다루는 게 기술적으로 훨씬 힘들다. 여성 헤어스타일 중에서도 쇼트커트를 가장 고난도 기술로 여긴다. 모든 머리카락을 한 올도 빠뜨리지 않고 다 건드려야 하기 때문이다. ‘조각’을 하나 만드는 작업이라고 봐야 한다. 여성 고객과 남성 고객이 있으면 당연히 여성 고객을 받는 게 일반적이다. 그래서 오해려 남들이 많이 하지 않는 쪽 전문가가 되고 싶었다.  일을 시작하면서 남성분들은 펌을 하든 커트를 하든 미용실에 와 앉아 있는 것 자체를 어색해 한다는 것을 알았다. 미용실에 오면 앞 머리카락을 다 까고 있어야 하지 않나. 여성 고객들은 그때 행복감을 느낀다. 남성 고객들은 민망하니까 고개를 숙이고 있거나 휴대전화를 보고 있는 경우가 태반이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게 안타까워서 남성만을 위한 미용실을 차리고 싶었다. 남성 고객만 받다 보니 ‘반쪽짜리 미용사’냐는 얘기도 들었지만 어디서든 저는 당당하다. 직접 미용실을 연 지 1년8개월인데 하루 평균 20명의 고객을 상대했다. 그 기간만 따져도 1만명이 넘는 남성들의 머리를 자른 것이다. 현재 개인 매출로 월 5000만원을 찍고 있다. 남성 고객만 받아도 성공할 수 있다는 걸 더 많이 알리고 싶다.”          -남성 탈모 고객 헤어스타일링으로 더 주목받고 있는데이미영씨는 남성 탈모 고객 헤어스타일링 제안으로 더 주목받았다./이미영씨 제공“남성 고객을 전문으로 하는 미용사도 적지만, 탈모 고객을 상대로 헤어스타일링을 제안하는 디자이너는 거의 없다. 남성 탈모 인구가 점점 늘고 있는데 그 고충을 덜어드리고 싶었다. 그래서 개발한 기술이 ‘모류(毛流)’의 방향을 바꿔주는 펌이다. 뿌리를 꺾어주는 파마를 해서 머리카락이 자라나는 방향을 바꿔주고, 탈모가 진행 중인 부분을 덮는 방식이다. 옆 머리마저 아예 없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펌으로 좋아질 수 있다.고객은 20대부터 60대까지 다양하다. 탈모 전문 헤어 디자이너가 거의 없다 보니 손님들은 전국구에서 모여든다. 미국에서 저희 미용실 정보를 듣고 점찍어 두었다가 한국 들어왔을 때 찾는 분들도 있었다.” ◇ ‘미용계 연예인’으로 불리는 화려함 뒤에는 백조 같은 발버둥 있어 이미영씨는 미용 업계에서 ‘연예인’으로 통한다. 미용사 지망생들에게는 ‘아이돌’ 수준이다. 비결은 적극적인 SNS 홍보다. 이씨는 하루 2시간씩 쪽잠을 자며 ‘1일 1게시글’을 올린 덕분이라고 설명했다.  -홍보를 위해서 SNS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던데 “디자이너 일을 처음 시작했을 때 하루 고객 한 명 받을까 말까할 정도로 고객이 없었다. 아무것도 안 하고 퇴근하는 경우도 있다는 소리다. 그때부터 홍보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블로그를 활용해서 1일 1게시글을 올리겠다고 다짐했다. 하루 일과를 마치면 집에 돌아가 노트북 앞에 앉아 블로그 관리를 했다. 지금은 대표로 있으니까 출근 시간이 좀 여유롭지만 다른 미용실에서 일할 때는 오전 7시까지 출근해야 했다. 3년 동안 2시간 쪽잠을 자가며 SNS 홍보를 이어갔다.  콘텐츠 갯수뿐만 아니라 퀄리티도 중요하다. 게시물 한 개를 작성하기 위해 7-8시간이 걸린 적도 많다. 탈모 시술 ‘비포&애프터’ 사진을 올렸더니, 부분 가발을 사용한 게 아니냐는 의심을 받았다. 그래서 시술 과정을 일일이 찍어 올렸다. 그 밑에는 세세한 설명을 달며 제가 직접 디자인한 헤어스타일이라는 것을 증명했다. 대체로 다른 디자이너들은 연예인 사진을 캡처해서 게시물 작성했는데, 저는 그렇게 정성을 보이니까 반응이 오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SNS 홍보가 잘 되면서 업계에선 저를 ‘연예인’이라고 불렀다. SNS 게시글만 보면 제 삶이 굉장히 화려해 보이겠지만, 그걸 이뤄내기 위해 백조처럼 발버둥 친 결과물이다. 미용인들은 서로 업무 환경을 꿰고 있다 보니 블로그 관리하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잘 안다. 지금 일하고 있는 보조 스텝들 대부분도 SNS 게시글을 보고 저를 알게 되어 입사 지원을 한 친구들이다.”이미영씨는 SNS 홍보를 적극적으로 한 것이 성공의 비결이라고 말한다./이미영씨 인스타그램 캡처-SNS에 홍보하면 남성 고객들이 보긴 하나“남성분들이 직접 SNS 글을 보고 찾아오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래서 ‘와이프, 여자친구, 딸’들을 공략했다. 실제로 그분들이 자신의 남편, 남자친구, 아버지를 데리고 왔다. 지금은 블로그 시대가 지나서 인스타그램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는데, 일기 형식으로 사진과 글을 남긴다. 여자들끼리 모여 수다를 떨 듯 글은 가볍게 쓰고 사진 자료를 많이 올린다. 게시물을 보면서 ‘우리 남편 머리도 저렇게 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끔 하는 게 전략이다. 저희 미용실은 간판이 없다. 간판을 걸면 지나가던 여성 고객들이 ‘미용실이네’ 하고 들어오시기 때문이다. 이번에 슬로건도 하나 만들었는데 ‘여성에겐 쏘리(sorry)’다. 그만큼 철저히 남성들을 위한 공간으로 만들고 싶다. SNS 홍보 덕분에 남성 고객 모집이 가능했고, 현재 100% 예약제로 미용실을 운영하고 있다.” ◇ 전국 투어 강연 열면 30분 만에 200석 매진 이미영씨는 지난해 휴무를 쪼개 전국 투어 미용 강연을 다녔다. 서울을 비롯해서 부산, 대전, 제주 등 9개 도시를 방문했다. 미용제품 회사가 주최하고 이씨를 메인 강사로 초빙하는 형태다. 1인당 5만원짜리 티켓을 구매해야 참여할 수 있다. 티켓 가격이 꽤 나가는데도 200석이 항상 30분 만에 매진됐다.이미영씨는 지난해 전국 9개 도시를 돌며 남성 헤어스타일링 강연을 했다./이미영씨 제공-강연에서 가장 강조하는 게 뭔가 “전국 투어 강연에서는 실질적인 스타일링 기술도 알려주고 마인드 교육도 한다. 그중 자신을 ‘브랜딩’하는 것을 가장 강조한다. 마케팅과 브랜딩은 큰 차이가 있다. 마케팅은 물건을 파는 것이다. 저는 미용사 지망생들이 마케팅에 주력하지 않길 바란다. 자신의 헤어 기술을 고객에게 파는 차원을 넘어 내 가치를 올리는 것, 즉 ‘브랜딩’에 집중했으면 좋겠다.남성 전문 미용사인 만큼 이미영씨는 남성들의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 레이싱·복싱·헬스를 꾸준히 했다. 2016년 4월에는 머슬마니아 대회에도 출전했다./이미영씨 제공저희 미용실이 남성 고객만 모시다 보니 그들의 문화를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 일부러 레이싱이나 복싱을 배웠다. 남성들의 문화를 여자의 몸으로 경험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열심히 노력한 결과 지난해 4월에는 머슬마니아 대회에도 참여했다. 비록 수상은 못했지만 그 덕분에 남성 고객들과 헬스나 근육을 주제로 자연스럽게 소통하게 됐다.” -‘200두 프로젝트’라는 걸 진행하던데 “일단 제자로 들어오면 일반인 200분의 머리를 자르고 나서야 입봉 시험을 치르게 한다. 200명을 모집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개인 인맥으로 10-20명까지는 채우더라. 나머지 180명의 지원자는 제 SNS 계정을 통해 신청받는다. 1400명이 지원을 한 적도 있다. 지원자는 공짜로 머리를 잘라서 좋고, 스텝들은 입봉 시험 자격 조건을 채울 수 있어서 좋다. 제자들을 가르칠 땐 호랑이 선생님처럼 혹독하게 대하는 편이다. 디자이너 입봉하기 전 조금이라도 더 프로의 맛을 보고 시작하게 만드는 게 제 목표다.”이미영씨가 운영하는 미용실에서 디자이너 입봉을 하기 위해서는 일반인 200명의 머리를 잘라야 한다. 일명 '200두 프로젝트'다./이미영씨 제공-직원들이 휴가를 마음대로 써도 된다는 건 무슨 말인가 “직원들 복리후생을 위해 생각해 낸 것이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휴가 일정, 일수를 다 결정할 수 있게 했다. 대부분 2-3주 휴가를 쓴다. 일반적으로 미용실은 주 6일 근무를 한다. 이번에 역삼동으로 가게를 이전하면서 주 5일 근무를 시작했다. 자유가 있는 상태에서 근무하는 것과 자유가 없는 상태에서 근무하는 건 질적으로 큰 차이가 나더라. 오히려 직원들이 휴가 기간을 메우기 위해 예약을 더 받으려고 노력한다. 미용 업계가 노동 환경이 열악한 걸로 유명한데 그런 선입견을 깨고 싶다. 더군다나 남성 전문 미용 분야는 이제 막 삽을 뜨기 시작했다. 더 많은 지망생들이 이 블루오션에서 기회를 잡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글 CCBB 에디터 박가영시시비비랩
8년전 황산테러 피해여성, 아픔 딛고 찾은 직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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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겪은 적 없는 분이 어찌 저희 심정을 온전히 이해하겠습니까.”황산 테러로 신체 25% 화상상담심리 공부 범죄피해자 상담사로남은 생 피해자 돕는 데 쓰길 원해“겪은 적 없는 분이 어찌 저희 심정을 온전히 이해하겠습니까.”한국범죄피해자지원센터(KCVC·이하 센터)에서 일하는 직원이 가장 많이 듣는 말이다. 피해자 대부분은 센터 직원이 자신의 고통을 이해할 리 없다 생각한다. 그래서 직원이 마음을 다해 건네는 위로마저 겉치레 동정으로 여기는 이도 적잖다. 하지만 상담직원 박선영(35)씨는 예외다. 오히려 피해자들이 그를 위로하는 말을 건낼 때도 많다. 상담 기술이 남다르거나 말솜씨가 탁월해서가 아니다. 박씨 또한 마음, 얼굴, 몸에 지우지 못할 상처가 뚜렷이 남은, 강력범죄 피해자기 때문이다.박선영씨 제공◇괴로웠던 시간2009년 6월 8일 오전 6시쯤, 경기 성남시 한 주택가 골목 사이에서 나타난 괴한이 출근 중이던 박씨 얼굴 오른쪽에 공업용 황산 800mL를 끼얹었다. 계획 테러였다. 박씨는 2년 전 다니던 IT 회사를 그만두며 밀린 임금을 달라는 소송을 하고 있었다. 회사 대표가 앙심을 품고 직원을 시켜 상처를 입힌 것이다. 박얼굴과 두피, 팔 등 신체 표면 25%에 3도 화상을 입었다. 피부 이식을 스무 번 넘게 받았지만, 흉터를 모두 지울 순 없었다. 녹아내린 오른쪽 귀도 다시 찾지 못했다.거울에 비친 얼굴이 낯설었다. 눈꺼풀이 굳어 밤에도 눈을 감을 수 없었다. 잠들려면 젖은 솜을 눈가에 덮어 빛을 가려야만 했다. 피부가 당겨 목을 젖힐 수도 없었다. 이듬해 대법원이 테러를 지시한 대표에게 15년 형을 선고했지만, 위로가 될 순 없었다.당시 박선영씨 사건 관련 기사.병원 가는 날 외엔 문지방을 넘지 않았다. 그렇게 2년을 보냈다. 수술을 거듭 받아 눈꺼풀은 닫을 수 있었다. 그래도 여전히 잠들긴 어려웠다. 누군가가 공격해 오는 악몽에 매일 밤 시달렸다. 타인이 말을 걸어올 때마다 두려움, 분노, 공포, 적대감, 슬픔이 북받치며 울음이 터졌다. 가족도 예외는 아니었다. 기르던 강아지 외엔, 누구도 편히 마주할 수 없었다 한다. ◇다시 일어서다 어느 날 병원에서 돌아오던 중, 막 닫히려던 엘리베이터에 누군가가 뛰쳐 들어왔다. 평범한 시민이었다. 하지만 황산을 뿌렸던 남자가 떠올라, 온몸이 얼어붙어 한동안 웅크린 채로 엘리베이터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다 문득 서러움이 솟았다. “우리에 갇힌 짐승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영문 모른 채 사냥꾼에게 붙들려 와, 사람 손목만 어른거려도 숨이 가빠오는, 그런 짐승이요. 억울했어요. 나는 잘못한 게 없는데, 왜 세상을 겁내며 살아야 하는지.” 죄 없이 죄인처럼 살기 싫었다. 용기를 내 한국범죄피해자센터를 찾았다. 그간 쭉 상담 권유를 받았지만, 낯선 이를 만나고 싶지 않아 피하던 곳이었다. 폭발하는 감정을 제어하지 못해 힘겨워하는 박씨에게, 상담사는 영화를 권했다. “슬플 때면 비극을 보고 울며 통곡하며 고인 감정을 한껏 비워내고, 공포가 밀려올 때면 무서운 영화를 보며 개운하게 털어 버리라 했어요. 마음을 괴롭히는 감정이 찌꺼기조차 남지 않게, 차오를 때마다 밀어내라는 거죠.” 감정이 고일 때마다 영화를 보고 쏟아내길 반복했다. 어느덧 눈물 없이 가족을 보고, 통곡 없이 사람을 마주할 수 있게 됐다.  ◇피해자에서 상담자로 편히 거울을 볼 수 있게 됐을 즈음 대학에 편입했다. 전공했던 컴퓨터와는 전혀 무관한, 상담심리 분야였다. “다시 태어났다 치고, 가장 하고 싶은 게 뭘까 고민해 봤어요. 그때 떠오른 게 어릴 적 꿈이었던 경찰이었어요. 경찰은 어렵겠지만, 상담심리를 배우면 범죄 피해자 분들의 상처를 어루만져줄 수 있지 않을까 싶었죠.” 대학을 마치고, 2013년 8월 센터 공채에 응시해 합격했다. 박씨가 상담을 받고 마음을 추스렸던 바로 그곳이었다. 박씨는 올해 전화와 대면을 통틀어 상담 1500건 정도를 처리했다. 같은 기간 박씨가 일하는 센터 중앙지점(서울중앙지방검찰청 소재) 접수 범죄 피해자 상담 요청 건수는 2000건 이상이었다. 박씨가 넷 중 셋 정도는 맡은 셈이다. “범죄 피해자 티가 확연히 나다 보니, 유달리 제겐 쉽게 마음을 열어 주시는 피해자 분들이 많았어요. 되려 그분들이 저를 위로해주시는 때도 잦았고요.” 상담심리 전공으로 석사 과정을 밟느라 잠시 일을 그만두기도 했지만, 지난해 4월 복직한 이후로는 다시 쭉 상담 업무를 해오고 있다.박선영씨 제공◇아픔은 극복하는 게 아니다 세수할 때면 손끝에 닿는 얼굴 오른편 피부가 까슬하다. 아직도 웃음 지을 때면 입술 오른쪽이 살짝 당겨온다. 팔에 남은 화상 자국 때문에, 한여름 날에도 토시를 껴야 한다. 그럼에도 박씨는 지금 삶이 사고 전보다 낫다 말한다. “음악을 좋아해서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 피아노를 하다가, 그만두고 돈벌이 되는 쪽으로 전공을 틀었어요. 하지만 사고를 당하고 난 뒤 되려 어릴 적 꿈을 향해 다가갈 기회를 얻었어요. 많은 것을 잃었지만 얻은 것 또한 적지 않아요.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요.” 물론 고통을 다 극복해낸 건 아니라 한다. “일상생활을 멀쩡히 하니 아픔을 완전히 이겨냈다 여기는 분도 있는데, 사실 그렇진 않아요. 누구건 범죄 피해 고통을 100% 잊을 순 없어요. 다만 가슴 한편에 묻어 두고, 애써 모른 척하며 지낼 뿐이죠.”  그래서 다른 범죄 피해자에게도 극복하라고 하지 않는다. “그저 아픈 기억을 뒤로하고 나아가시는 분들께 잘하고 있다며 응원을 보낼 뿐, 이겨내야죠 극복해야죠 이런 말은 절대 하지 않아요. 그럴 수 없다는 걸, 누구보다도 제가 가장 잘 아는 걸요.”  대신 범죄에 육신과 영혼이 패여 상처가 남았더라도, 마음먹기 따라 앞으로 삶은 오히려 예전보다 나아질 수도 있다 강조한다. “평범히 살았으면 몰랐을, 인간의 아름다운 면을 보았어요. 성형외과 원장님이 무료 치료를 해 주겠다며 나섰던 것이라던가, 옛날에 다녔던 직장에서 성금을 모아주고 일자리까지 제의했던 일 등등이요. 세상이 따뜻하고 살 만한 곳임을 깨닫게 된 것만으로도, 제 인생이 사고 전보다 한층 더 발전했다 볼 수 있지 않을까요.”◇그대는 언제나 아름다운 사람 박씨는 살아 있는 동안엔 범죄 피해자 돕기를 멈추지 않을 거라 한다. “센터에서 쭉 일할 계획이지만, 다른 길을 걸어도 쭉 범죄 피해자를 도을 생각입니다. 내가 나쁘고 죄진 사람이라 범죄에 노출된 게 아니고, 내가 이상한 사람이고 미쳐버렸기 때문에 범죄를 당하고서 감정 제어가 안 되는 게 아님을 알려 주고 싶어요.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지만, 혼자 힘으로 깨닫긴 어렵거든요. 그들이 여전히 아름다운 사람이라는 걸, 그리고 인생이 끝나기는커녕 앞으로 생애가 훨씬 나아질 수도 있음을, 먼저 겪은 이로서 말해 주고 싶어요.”☞한국범죄피해자지원센터범죄피해자보호법에 근거한 사단법인으로, 살인·성폭력·방화·절도 등 강력 범죄 피해자를 돕는다. 2003년 대구 지하철 참사 피해자들을 돕기 위해 경북 김천에서 처음으로 문을 열었고, 현재 전국 58곳에서 지부를 운영하고 있다. 상담 전화는 1577-1295.글 CCBB 에디터 폴리시시비비랩
해외에서 더 유명..호나우지뉴가 싸인 받아간 레전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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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레·호나우지뉴가 인정한 '축구공의 신(神)'1989년 '헤딩'으로 세계기네스북 기록세계프리스타일축구연맹 우희용 회장"40년 가까이 축구공만 갖고 놀았다" 1988년 서울올림픽 소련과 브라질의 결승전. 하프타임을 알리는 휘슬이 두번 울리고 선수들이 경기장을 나갔다. 그때 축구공을 든 마르고 작은 남자가 경기장으로 들어오더니 축구공을 이용해 묘기를 선보이기 시작했다. 예정 없던 공연이어서 관계자들이 막으려 했지만 관중석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전세계 방송 카메라도 그를 찍기 시작했다. 그는 다음해 5시간 6분 30초 동안 공을 한번도 떨어트리지 않고 헤딩해 기네스 기록을 세웠다.‘프리스타일축구의 신(神)’ 우희용(53)씨는 한국보다 해외에서 더 유명하다. 2004년 세계프리스타일축구연맹(IFFA·International Freestyle Football Association)을 만들었다. 축구황제 펠레는 그를 ‘아트사커의 신’이라 불렀다. 우씨는 “프리스타일축구는 ‘묘기’가 아니라 손을 뺀 모든 신체 부위를 이용해 축구공을 다루는 스포츠"라고 했다. 호나우지뉴도 사인을 받는다는 우씨에게 프리스타일 축구 이야기를 들었다.세계프리스타일축구 우희용 회장. /jobsN◇프리스타일축구 전설의 시작 "어릴 적 꿈이 축구선수였지만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장남이었던 그가 운동을 하겠다니 부모님이 반대했다. 운도 따라주진 않았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재단이 바뀌면서 축구부가 없어졌어요. 같이 훈련하던 친구들은 다른 학교로 갔는데 저를 받아주는 학교가 없었습니다."우희용씨 제공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개인 훈련에 매진했다. 170cm, 작은 키란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점프 연습을 했다. 문제는 지나치게 열심히 했다는 것이다. "너무 무리해서 성장뼈와 근육에 손상이 갔습니다." 선수로서 사형선고였다. 방황했다. 집을 나와 야구방망이 제조 공장·석유배달·식당 접시닦이·술집 주방보조 일을 하다가 입대했다. “중대장님 덕을 많이 봤습니다. 제가 공을 갖고 연습하는 걸 보고 체육부장을 맡겼어요. 훈련하고 남은 시간 공으로 기술을 연습했습니다. '이걸 잘하면 먹고 살 수도 있겠구나' 싶었습니다.”(왼쪽부터) 1990년 독일 현지 언론에 난 기사. 1991년 독일 '엔징거'와 계약을 맺고 불법체류자 신분에서 벗어나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우희용씨 제공(왼쪽부터) 1991년 독일 슈투트가르트시의 일간지에 '한국에서 온 우희용이 독일 축구에 충격을 던져주고 있다'는 내용으로 대서특필 됐다. 1992년 유럽 축구 전문지 킥커스에 '유럽 전체 머리의 달인'으로 선정되었다는 기사.1986년 제대 후 본격적으로 연습을 시작했다. 외환은행 용역회사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아침 6시에 출근해서 2시간 동안 운동하고 샤워한 뒤 일을 시작했습니다. 점심때도 연습을 했습니다. 6시 퇴근하면 3~4시간 동안 연습했구요. 그렇게 3년 반 일했습니다.” 이런 노력 끝에 결국 기네스북에 이름을 올렸다.기네스북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1990년 이탈리아로 떠났다. 길거리 공연을 하며 하루 벌어먹고 살았다. 단속 나온 경찰이 그의 공연에 반해 손뼉 치고 환호하다 그냥 돌아갈 만큼 인기가 좋았다.6개월 만에 독일에 건너가 단숨에 유명인이 됐다. 독일 현지 언론에서 그를 대서특필했다. 1993년에는 독일 유명 스포츠 프로그램에 출연해 윔블던 우승자 미하엘 슈트(Michiel Stich)와 공을 주고받는 경기를 하며 명성을 얻었다. 미국, 영국에서도 공연했다. 연맹을 만든 2000년대 중반에는 공연을 한번 하면 8000유로, 1만유로(약 1400만원)를 받을 정도로 인기를 누렸다.우희용씨가 공연할 때마다 현지 언론이 주목했다. /우희용씨 제공◇스포츠로 인정받기 충분히 프리스타일축구그는 여러 축구스타들과 광고를 찍고 홍보대사로 활동하며 무수히 많은 일화를 만들었다. 축구황제 펠레는 그를 ‘아트사커의 신’이라 불렀다. 2003년 당시 세계 최고의 축구 선수였던 호나우지뉴는 나이키 광고를 함께 찍을 때 우씨에게 사인을 요청했다. 2009년 퍼거슨 감독이 ‘가수 비를 아느냐’고 묻는 한국 기자에게 ‘미스터 우를 아느냐’고 되물었다는 일화 역시 유명하다. 호나우지뉴, 웨인 루니 등 세계적인 축구선수와도 친밀하게 지냈다.2002년 말 나이키 광고 촬영 현장에서 호나우지뉴가 우씨에게 사인을 받고 있다. /우희용씨 제공그가 체계를 잡은 프리스타일은 이후 계속 발전해 나갔다. 세계대회도 생겼다. 음료회사 레드불은 2008년부터 1~2년마다 프리스타일축구 대회 '레드불 스트리트 스타일'을 연다. 우씨가 1회 대회 심사위원장을 맡았다. 우씨는 그때 한국에서 세계 대회를 연다는 목표를 세웠다. 그리고 내년 한국에서 대회가 열린다. 우씨는 한국에서 열릴 세계 대회를 직접 기획했다. “30개국에서 선수를 초청했습니다. 초청선수가 아니더라도 원한다면 누구나 참가할 수 있습니다. 예선전을 거쳐 16명이 파이널에 진출할 예정입니다. 대회 윤곽은 어느 정도 잡혀있고 11월부터 본격적으로 홍보를 시작합니다.”이젠 그의 후배들도 많다. 전권·권혁부·김병준·임재훈·한인석 등이 아카데미를 운영하거나 활발히 공연하고 있다. /jobsN한국에서 세계 대회가 열려도 그의 꿈은 끝이 아니다. 그는 이미 다음 목표를 잡았다. “프리스타일축구가 올림픽 종목으로 채택될 날을 꿈꿉니다. 또 기회가 된다면 북한에도 전수하고 싶습니다.”글 CCBB 에디터 욘두시시비비랩
섭외1순위 이 아역배우는 커서 '쓰리잡'을 갖게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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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년 인생 중 30년을 배우로 산 남자아역배우 출신 연기자 정태우 라디오 DJ, 교수로도 활동 중서른다섯의 정태우는 30년을 배우로 살았다. 1988년 영화 '똘똘이 소강시'에서 주인공인 '똘똘이'역을 맡으며 데뷔했다. 어렸지만 어른 못지않은 풍부한 감성을 보여줬다. 덕분에 늘 섭외 1순위 '아역배우'였다. 성인이 된 후에도 드라마와 영화, 뮤지컬 무대에서 활동했다. 어느덧 30대 중반이 된 그는 라디오 DJ와 교수라는 직함도 갖고 있다. 잡스엔(jobsN)이 그를 만나 배우의 인생에 대해 들었다.-촬영장에 처음 들어서던 날을 기억하는지"어렴풋하게는 나요. '텔레비전에 내가 나왔으면 정말 좋겠네' 노래 가사처럼 TV에 나오고 싶었거든요. 부모님을 졸라서 오디션을 봤죠. 당시 PD 님들이 좀 엄해서 무서웠다 정도의 기억만 남아있습니다."-데뷔했을 때 부모님 반응은"아버지가 고등학교 선생님이셨어요. 연예인 하겠다고 하는 저를 말리셨죠. 처음 일 시작하면서 고생했으면 뜯어 말리셨을 텐데 저는 아역 때부터 캐스팅이 곧잘 됐어요. 드라마를 보다가 제가 나오면 흡족해하셨죠. 서서히 받아들이신 것 같아요."-어려서부터 직업을 가졌다는 게 행운인 것 같다."배우가 된 걸 한 번도 후회해 본 적은 없어요. 가능한 오래 하고 싶은 일입니다. 다른 직업은 상상도 안 해봤습니다. 초등학교 때 장래희망 칸 1번은 늘 배우였죠. 30대에 달라진 것은 가장이 됐다는 점입니다. 배역을 선택할 때 아빠 정태우, 남편 정태우도 고려해야 하죠."아들 하준 군과 함께 /정태우 제공◇'임금 전문' 배우에서 '사이코패스' 연쇄 살인마까지…단정하고 바른 이미지의 그는 사극에 여러 번 캐스팅됐다. 조선시대 단종 역할을 10대에 세 번 맡았다. "슬픈 운명의 단종을 더는 안 하겠다"는 그를 감독들이 삼고초려해 모셨다. -같은 역을 세 번이나 맡았다"같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받았던 대본과 연출자 의도는 다 달랐습니다. 1994년 KBS'한명회' 속 단종은 삼촌에게 죽임을 당하는 나약한 세자였다면 1998년 KBS'왕과 비'에 선 왕비와의 사랑을 통해 운명에 맞섰습니다. 배우가 배역을 맡는 건 신입사원이 입사해 첫 출근을 하는 기분과 비슷하지 않을까요. 30년 경력이지만 현장에 갈 때면 늘 설레고 긴장됩니다."tvN 드라마 '크리미널 마인드'에서 해리성 장애(다중인격)를 앓는 연쇄살인범 역을 맡았다. 시시각각 인격이 변하는 연쇄 살인마의 잔혹한 모습에 시청자 게시판이 "내가 아는 정태우 맞냐"라는 글로 덮였다.1994년 kbs '한명회' 단종 역의 정태우(왼)· 2017년 tvN '크리미널 마인드'의 서른다섯 살 정태우(오)/각각 kbs · tvN 캡처-연기 변신으로 화제가 됐다."나이 먹으면서 역할도 달라지는 게 좋습니다. 서른 살 넘은 지금 어린 왕을 연기할 순 없죠. 연쇄살인범을 연기할 때 매 순간 눈빛, 목소리와 걸음걸이 등을 다르게 표현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예민한 캐릭터라 체중도 감량했고요."-연예인들은 돈을 많이 벌지 않나"일부를 제외하고는 많이 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내가 육아휴직을 끝내고 승무원으로 복직했어요. 두 아이를 기르는 평범한 맞벌이 가정이죠. 생활비를 걱정하고 가계에 보탬이 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지 고민합니다. 안정적인 직업이 아니니까요."가족과 함께한 화보 촬영 /정태우 제공◇맞벌이하는 정태우 부부···학생들에게 평범한 일상의 중요성 가르쳐'크리미널 마인드' 연쇄살인범으로 특별출연 당시 뮤지컬 '위대한 캣츠비' 주연으로도 열연하고 있었다. 체중감량과 동시에 체력 보충을 해야 한다는 고충이 따랐다. 세한 대 뮤지컬학과 교수이기도 한 그는 학생들에게 "꼭 배우로 성공하는 것에만 집착하지 말라"고 가르친다. '스타'라는 화려한 조명에 가려진 수많은 무명 배우들도 기억하라는 의미다.-학생들에게 어떤 조언을 하나"화려한 모습이 좋아 보인다면 다시 생각해보라 합니다. 2017년 4월 아프리카 토고 봉사활동을 다녀왔는데 그곳 아이들 꿈이 전부 선생님, 아니면 의사더라고요. 볼 수 있는 직업이 그것뿐이어서요. 보다 다양한 직업을 알려주고, 실패한 사람들의 이야기도 들려주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2017년 4월 아들과 아프리카 토고 봉사활동을 떠난 모습 /기아대책 제공-동생도 배우로 데뷔하지 않았나"그만큼 매력적인 직업이니까요. 배우를 한다고 했을 때 주위 만류를 듣지 않고 데뷔하는 사람은 없어요. 그래도 하겠다면 잘 할 수 있도록 도와줘야죠. '아이돌 마스터. KR'이라는 드라마로 데뷔해 함께 특별 출연해 촬영도 함께했습니다. 요즘엔 저보다 바쁜 것 같아요. 힘들겠지만 본인이 즐거운 일을 하면 좋겠습니다." 육아 예능 '오마이베이비'에 함께 출연한 아들 하린 군도 귀여운 외모 덕에 시청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는 현재 심야 라디오 DJ로도 활약 중이다. 정 씨는 "아이들에게 잠들기 전 책 읽어주는 마음으로 방송한다"라고 말했다. EBS 북 카페 정일생 CP는 "오랜 시간 쌓인 내공으로 뮤지컬, 연극, 드라마 등 다양한  범주를 넘나드는 배우 정태우가 라디오 드라마에 어울린다 생각했다"라고 말했다. 인생 거의 전부 배우였던 그는 어떤 배우가 되고 싶을까? "최근 라디오에서 박제동 화백을 인용해 말한 적이 있어요. '우주를 그릴 수 있냐고 물어본다면 당신을 그리겠다'. 인간은 신비한 존재인 것 같아요. 이 신비하고도 위대한 존재를 담아낼 수 있는 배우가 꿈입니다."글 CCBB 에디터 김지아시시비비랩
내려놓은 ‘정신줄’…오히려 그게 약이 된 스타 약대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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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업 스트레스에 정신줄 놓았다가 스타 된 약대생인터넷 스타 고퇴경씨페이스북 팔로워 113만, 유튜브 구독자 93만약사시험 합격했지만 앞으로도 영상 제작 예정지난 2014년 대구광역시. 약학을 공부하던 한 청년이 있었다. 그는 어릴 적부터 약사를 꿈꿨다. 하지만 좋아서 하는 공부라도 스트레스는 쌓이기 마련이다. 돈도 시간도 없는 학생 신세였는지라, 달리 스트레스 풀 방법도 딱히 없어 자취방에서 음악을 틀고 춤을 추며 하루하루를 버텼다. 혹시 남들도 그 모습을 보면 속이 좀 풀릴까 싶어, 영상을 찍어 유튜브에 올리기도 했다.그러던 어느 날, 유튜브에 올린 춤 동영상에 갑자기 댓글이 붙기 시작했다. 한 주 만에 조회수 60만을 찍고, 두 주 만에 100만을 돌파했다. 영상이 알려지며 입소문을 탄 덕인지 SNS 구독자와 팔로워 수도 매일 가파르게 치솟았다. 만든 지 1년이 되도록 100여명 안팎이던 유튜브 구독자 수가, 단숨에 만 단위를 뚫고 넘어가 버렸다.전설의 시작이 된 2015년 10월 22일 동영상./유튜브 채널 '퇴경아 약먹자'평범한 약대생이던 고퇴경(27)씨는 그렇게 인터넷 스타로 다시 태어났다. 고씨 페이스북은 팔로워가 약 113만 명에 달한다. 유튜브 채널 '퇴경아 약먹자' 구독자 수는 93만여명이다. 유튜버 랭킹 사이트 랭큐(RankQ)에 따르면, 고씨 유튜브 순위는 구독자수 기준 국내 29위다.◇과묵한 퇴경씨-원래부터 인터넷 스타가 될 뜻을 품고 있었는지요?아닙니다. 원래는 약사 가운을 입는 것만이 꿈이었습니다. 공부가 너무 힘들 때 좀 웃어보려고 친구들과 정신줄 놓고 찍던 건데, 일이 커져 버렸습니다. 유튜브 채널도 본디 저희끼리 놀려고 만든 거라 딱히 홍보도 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어느 날 자고 일어나니 뜬금없이 유명해져 있더군요.-약사 자격증을 얻고도 영상을 계속 찍으시는 이유는요?저도 영상 찍기에 재미가 붙어버려서요. 많이 부족한 콘텐츠인데도 아껴주시는 분이 많으니, 기대에 부응하고 싶기도 하고요.-약사 코앞까지 간 아들이 돌연 엔터테이너가 됐는데, 부모님께선 별말씀 없으신지요?오히려 기뻐하세요. 제가 워낙 말이 없고 과묵해서 걱정이 많았는데, 영상 찍고선 많이 활달해지고 사회성이 좋아진 듯해 마음이 놓인다 하시더군요.과묵한 고퇴경씨가 영상을 제작하고 있다./유튜브 채널 '퇴경아 약먹자'◇1인 미디어-영상에 쓰는 노래, 선곡 기준은 있나요?요즘 유행하는 걸로 고릅니다. 사람들이 다 알만한 노래로요. 그래서 K-POP을 많이 택하죠.-춤은 연습해서 추시는 건가요?아이디어 구상은 오래 깊이 하는데, 실제 연습은 그리 많지 않아요. 필요할 때마다 조금씩 하는 정도입니다.-옷이나 가발 등 소품은 어떻게 장만하셨나요?처음엔 있는 것만 썼습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컨셉 따라 의상을 장만해 보니, 영상 퀄리티도 좋아지고 재미있어지길래요. 지금은 소품 마련에 돈을 아끼지 않고 있습니다.-영상 편집은 직접 하시나요?유튜브 영상으로 편집법을 독학해, 직접 하고 있습니다. 영상 찍는데 관련된 모든 업무는 제 손으로 합니다. 1인 미디어인 셈이죠. 다만 광고 섭외나 행사 참여, 일정 조율 등 콘텐츠 만드는 일 빼고 나머지는 소속사인 '비디오빌리지'에서 맡아 주고 있습니다. 저는 영상 만들기에 집중하고요.◇광고계 라이징 스타-인기 덕에 광고도 찍으셨다면서요.넥슨, 롯데주류, 배달의민족, 롯데카드, 동부증권 등 10여 군데 정도 출연했습니다. -그렇다면 돈을 꽤 버셨을 것 같은데요.사실 영상에서 다루는 곡 중 저작권이 있는 것은 저 대신 저작권자에게 수입이 갑니다. 게다가 소품비 지출도 있고 해서 실제 버는 돈은 그리 많지 않아요. 개업한 약사 분들과 거의 비슷하게 버는 정도입니다.블락비 박경과 함께 찍은 사진./고퇴경씨 페이스북-그래도 다양한 체험을 할 수 있어서 좋으실 것 같아요.그렇죠. 바로 약사가 됐다면 못할 경험을 하고 있으니까요. 연예인도 만나보고, 가수와 함께 뮤직비디오도 찍어보고요. 세계 각국에서 팬 레터도 받고 있으니까요. 제 SNS를 찾는 분 중 40% 정도는 외국인이에요.한 외국인 여성이 보낸 사진 팬레터./고퇴경씨 페이스북-곁다리 질문인데, '고퇴경'이 본명인지 궁금해하는 분들이 많습니다.네, 본명입니다. 할아버지께서 지어주셨습니다. '퇴'가 항렬자는 아니라 저만 쓰는데, 이름에 넣어주신 사연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Just do it고씨는 제66회 약사시험에 합격해 2015년 3월 약사 면허증을 받았다. 하지만 지금은 약국에서 일하지 않고 있다. 대신 자신이 출연하는 영상 콘텐츠를 종일 만든다. 아이디어가 고갈되고 흥미를 잃을 때까지는, 이 일을 쭉 해보고 싶어서라 한다. 물론 약사의 길을 포기한 건 아니다. 실제로 그는 일반인에게 약 관련 상식을 알려주는 콘텐츠 또한 꾸준히 만들어 올리고 있다.유튜브 페이지 '퇴경아 약먹자'그는 갈 길을 고민 중인 젊은이와 취업 준비생에게,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건 모두 해보길 권했다. "전 약사 말고 다른 꿈도 없었고, 약사 일이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을 줄 알았어요. 그런데 정말 우연히 영상을 찍었다가, 제 적성은 생각지도 못했던 곳에 있었다는 걸 알게 됐어요."고퇴경씨 페이스북"틈날 때마다 할 수 있는 건 몽땅 도전해 보세요. 정말 엉뚱한 분야에서 본인조차 몰랐던 재능이 드러날지도 모르니까요. 전 저보다 재밌는 영상 잘 만들 수 있는 분도 많을 거라 생각해요. 시도해 보지 않아, 그 잠재력을 본인조차 모르고 있을 뿐이죠."글 CCBB 에디터 폴리시시비비랩
팔씨름 하다 부러진 팔…철심 12개 박고 우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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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BFF KOREA 챔피언십 디바 피트니스 부문 그랑프리 하서빈대회 앞두고 부상 팔에 철심 12개 박고도WBFF KOREA 그랑프리2017년 5월 27일 WBFF 코리아 챔피언십, 군살 없는 탄탄한 몸매를 가진 몸짱 미녀가 무대에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그녀의 팔에 길게 자리잡은 흉터가 눈에 띕니다. WBFF KOREA 챔피언십 디바 피트니스 부문에 출전해 1등, 단숨에 그랑프리까지 차지한 하서빈입니다. 대회를 앞두고 팔이 부러져 12개의 철심을 박았다는데요. 건강한 몸으로도 하기 힘든 웨이트 트레이닝, 그녀를 움직이게 한 원동력은 무엇인지 궁금했습니다./ 하서빈씨 인스타그램◇ WBFF 코리아 대회가 한달 정도 남은 시점 큰 부상 당해- 팔에 지금도 꽤 큰 흉터가 있다.“ 이유가 황당해서 숨기려 했는데 이젠 숨기지 않으려고요. 대충 얼버무려 답했더니 기사가 이상하게 나가기도 했어요. ‘칼 맞았냐’라는 소리를 들었을 때는 좀 황당했어요. 2016년 8월쯤 시합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어요. 남자 트레이너와 팔씨름을 했습니다 . 그러다 팔이 부러졌어요. 다이어트를 오래 하게 되면 골밀도가 낮아져요. 반면 상대적으로 운동은 열심히 해서 근육밀도는 매우 높은 상태였어요. 한마디로 제 근육이 약해진 팔뼈를 부러뜨린 셈이죠.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네요. 뼈가 사선으로 부러져서 가로로 철심을 12개 박는 대수술을 하고 2주동안 입원했어요. 상처가 이상하고 징그러운 느낌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굳이 흉터 레이저를 받거나 타투를 받고 싶지는 않아요.”WBFF PRO로 영국대회 출전한 하서빈 / 하씨 제공- 대회를 앞두고 힘들지 않았나?“ 절망했습니다. 전치 11주 진단을 받았는데, 대회가 얼마 남지 않은 시점이였어요. 수술 끝나자마자 바득바득 우겨서 대회를 준비했습니다. 한팔로만 운동하면 양쪽 밸런스가 맞지않아 아예 상체운동을 포기했습니다. 대신 하체 운동에 9시간씩 투자했어요. 슬럼프가 올때마다 그 때의 기억으로 마음을 다잡습니다.”◇ 평범한 직장인에서 피트니스 선수로 - 어떻게 운동을 시작했나?“고향이 부산이예요. 20대 초반에는 부산 신세계 백화점 명품관에서 판매 사원으로 근무했습니다. 일하면서 받은 스트레스 때문에 건강이 안 좋아졌습니다. 건강도 되찾을 겸 취미로 헬스클럽에서 운동을 시작했어요. 처음엔 회사 다니면서 작은 대회들에 나갔었어요. 그러다 2014년부터 본격적으로 전문 선수로 활동했습니다.”- WBFF는 어떤 대회인가?“‘WBFF’는 ‘World Beauty Fitness and Fashion’이라는 대회입니다. 기존대회와 다른점은 몸의 완성도 뿐만 아니라  패션과 표정, 화려한 퍼포먼스까지 점수를 매긴다는 거예요.”◇하서빈 선수만의 운동 및 식사 팁- 자신만의 특별한 운동방법이 있다면?“ 같은 부위를 이용하는 다른 운동을 쉬지 않고 번갈아 하는 것이 저만의 특별한 운동방법입니다. 예를 들어, 세 가지 힙 운동이 있다면 한 가지만 하는 것이 아니라 세 가지를 쉬지 않고 잇달아 합니다. 지금도 다친 팔 때문에 상체운동은 제한이 있어요. 대회마다 원하는 방식이 다르지만, 보통 하체를 부각시키기 위해 하체를 위주로 운동합니다.- 하체 운동은 어떻게 진행하나?“ 주 3회 정도 하체운동을 합니다. 하체 앞쪽보다는 뒤쪽을 중심으로 운동합니다. 힙운동은 매일합니다. 무게보다 자극을 느끼는 것이 중요합니다.  ”- 하서빈 선수만의 식단은?“ 닭가슴살을 주로 갈아먹고 가끔 흰살생선도 먹습니다. 탄수화물은 단호박과 감자, 고구마등으로 섭취합니다. 대회 전 근육을 최대한 돋보이기 하기 위해 물을 거의 먹지 않습니다. 이때는 채소도 수분이 적은 아스파라거스를 먹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다이어트에 실패하는데, 운동을 계속하는 원동력은 무엇인가?“제 신조가 '하면 된다', ‘자신을 이기자’ 입니다. 보통 운동을 시작하기도 전에 운동 방법, 일지, 관련 글을 찾다가 시간을 허비하는데요. 그 시간에 헬스클럽에 가서 바로 운동하라고 합니다. 운동을 시작하면 몸이 변화하는 게 바로 보입니다. 그 성취감을 맛보면 끊을 수 없을 거예요.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자극을 느끼는게 가장 중요합니다.” 글 CCBB 에디터 장채린시시비비랩
미국인들 사이에서 난리난 과자처럼 먹는 한국 음식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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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인들이 팝콘, 감자칩 대신 찾는 ‘이것’‘김 과자’로 미국 시장 판로 개척뉴프런티어푸드 이신형 대표연 100억 규모···팝콘, 감자칩 대신 찾는다 미국인들은 보통 감자칩과 팝콘을 간식으로 먹는다. 최근 감자칩과 팝콘이 차지하고 있는 ‘과자의 왕좌’에 도전하는 식품이 있다. 그 주인공은 바로 국산 ‘김’이다.김 스낵은 미국의 어린이들도 즐기는 간식이다 /Ocean's halo 인스타그램 캡처김을 포함한 국내 수산물 수출량은 23억3000만 달러(2조4700억원·2017년 해양수산부 자료). 참치에 이어 2번째로 많이 수출하는 수산물이 바로 ‘김’이다. 미국은 이제 일본(1억1300만 달러·약 1207억5180만원), 중국(8700만 달러·약 930억300만원)에 이어 3번째로 한국산 김을 많이 수입하는 나라다. 밥에 김을 곁들여 먹는 아시아와는 달리 미국은 김을 과자처럼 먹는다. 저칼로리의 미네랄·비타민이 풍부한 ‘건강식품’으로 높은 가격에 팔린다.미국 ‘김 과자 열풍’을 이끈 이가 바로 이신형(46) 뉴프런티어푸드 대표다. 이 대표는 2012년 미국에 김을 과자처럼 만든 ‘오션스헤일로(Ocean’s Halo)’를 출시했다. 미국 전역 월마트 매장 4000여 곳에 납품한다. 코스트코, 홀푸드, 세이프웨이, 아마존 등 미국 내 주요 식품 매장을 합치면 오션스 헤일로를 판매하는 매장이  9000여곳에 이른다. 미국 내 주요 일본 레스토랑에 조미김을 납품하기도 한다. 뉴프론티어푸드는 김을 연간 100억원 이상 미국에 수출한다."감자칩을 많이 먹던 아들에게 김을 간식으로 준 것에서 창업 아이디어를 얻었다"는 이신형 뉴프런티어푸드 대표(오)와 아들 이션(Sean Rhee)군(왼) /jobsN◇페이스북 등 다니던 대학 동기들과 의기투합이 대표는 미국 유학파다. 중학교까지 한국에서 학교를 다니다 고등학생 때 미국으로 떠났다. 미국 대학병원에서 근무하는 아버지를 따라나선 것. 세계적인 사업가를 꿈꾸며 조지타운(Georgetown University)에서 경제학을 전공했다. 1996년 졸업해 한국에 돌아와 한국P&G, LG, 한미약품 등의 해외 마케팅 부서에서 일했다. “회사의 결정과 제 나름의 판단이 다를 때, 결국 조직의 의사를 따랐지만 스스로에게 계속 질문할 수밖에 없었죠. 내심 의사결정자를 부러워했던 것 같아요. 특히 설득하는 상황에서 그랬습니다. 결국 대표 한 사람의 결정에 모든 것이 끝나거든요. 친구들에게 고충을 털어놓았던 것도 그 지점이었습니다” 회사생활에 열정을 잃어가던 15년 차 직장인이었던 그는 “우연히 창업에 뛰어들었다”고 한다. 창업 배경에는 대학 동기들이 있었다. 미국인 동기 세명과 의기투합해 뭉칠 수 있었다. 동료들은 미국 IT기업의 사내 변호사, 페이스북 홍보팀, 뱅크오브아메리카(Bank Of America)의 뱅커(Banker)로 안정적인 직장에 다니고 있었다.맨 왼쪽에 서 있는 이신형 대표 그의 대학 동기이자 창업 동료들은 페이스북 홍보매니저·뱅크오브아메리카의 금융맨·변호사다. /이신형 제공“다들 ‘이만하면 잘 살고 있지’하는 생각이었어요. 결혼해서 아이도 낳았고 직장도 나무랄 데 없었죠. 맥주 한 잔 하면서 ‘우리가 지금까지 부모님과 가족들이 기대했던 역할을 착실하기만 했던 것 아니냐’는 말에 모두가 공감했습니다. 지금 뭔가를 해보지 않으면 계속 하던대로 직장에 다니는 수밖에 없다는 생각에 창업을 결심했죠” 창업 아이템은 ‘김’이었다. 이신형 대표의 큰 아들에게 얻은 아이디어였다. 그의 아내는 감자칩을 많이 먹는 아이에게 간식으로 김을 구워줬다. 큰아들이 학교에 김을 가져가자 미국인 친구들에게 반응이 좋았다는 이야기가 떠올랐다. ‘미국인들의 입맛에 맞는 간식 김을 만들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창업의 원칙은 다음과 같았다. ‘직장은 계속 다닐 것, 1년 내 사업에 성과가 없거나 누군가 고통스러워질 경우 당장 그만둘 것’이었다. 초기 투자금은 4명이 공동출자해 모은 4000만원이 전부였다. 스타벅스에서도 팔 수 있는 프리미엄 김스낵을 만들자는 목표를 세웠다.◇스타벅스 출신 식품 개발자 스카우트해 ‘성공’현지인의 입맛을 잘 알고 있는 식품 개발자가 합류하면서 사업은 급물살을 탔다. 이 대표는 스타벅스 본사에서 프라푸치노 개발 경력이 있는 푸드 사이언티스트(Food Scientist)를 스카우트했다. 6개월이 지나자 외국인들의 입맛에도 맞는 김 스낵 레시피가 나왔다. 이후 6개월간 사업자 등록, 원재료 공급 계약, 제조공장 확보 등의 과정을 거쳐 한 입에 먹을 수 있는 바삭한 비스킷 형태의 김 과자 ‘오션스헤일로(Ocean’s Halo)’를 출시했다.시중에 판매중인 '오션스헤일로'의 김 제품 /공식 홈페이지양질의 김 원재료를 공급받는 것은 순조롭지 않았다. 이 대표는 다른 김 생산국에 비해 맛과 영양이 월등히 뛰어난 한국 김을 쓰고 싶었다. 국내 주요 김 제조업체 20곳을 추렸다. 연락을 돌렸지만 다들 “미국에 김을 팔아보겠다”는 이 대표의 제안을 거절했다. 단 한 사람, ‘광천김’ 김재유(46) 대표에게 “한번 만나보자”는 답변이 왔다. 이신형 대표는 즉시 충남 홍성으로 찾아갔다. 김재유 대표는 계약을 성사할 수 있었던 이유로 “큰 포부를 갖고 시장 현실을 정직하게 말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대표는 리스크를 최소화하며 사업을 이어갔다. 광천김의 비공식적 첫 거래량은 테스트용 김원초 100kg에 불과했다. 김스낵 공장을 따로 신설한 것도 아니었다. 기존에 조미김을 제조하던 국내 김 공장과 계약을 맺어 제품 생산라인을 확충했다. 첫 주문량은 2000만~3000만원어치로 20피트 규격 컨테이너 물량이 전부였다. 그는 2013년에 직장을 그만둔다. 대학 동기 창업자들은 각자의 전문성을 살렸다. 변호사는 계약서를 작성하고, 은행원은 재무 설계를 맡았다. 브랜드 매니저 이신형 대표와 홍보담당자는 제품 유통과 홍보에 매진했다. 그는 제품 유통에 성공하기 위해 직접 발품을 팔았다. 실리콘밸리에 위치한 지역 식품매장에 영업을 뛴 것이다. 대형마트 바이어를 몇 차례씩 찾아가 만나기도 했다. 미국 내 주요 식품박람회 (Expo East, Expo West, Fancy Food Show 등)에도 출품했다. 적은 초기 투자금액으로 유튜브 크리에이터와 인플루언서 마케팅을 적극 활용했다.한 유튜버가 간식 김을 시식하고 있다 /유튜브 캡처◇2018년 매출 200억 목표…유럽ㆍ아프리카 등 공략2018년 뉴프런티어푸드의 매출 목표는 약 200억원이다. 미국 시장을 넘어서 영국ㆍ스페인ㆍ프랑스ㆍ아프리카 등으로 유통망을 확장 중이다. 아몬드, 코코넛, 초콜릿, 바비큐 맛의 김 스낵류뿐만 아니라 ‘건강식품 마니아’들을 타게팅 한 ‘글루텐 프리(Gluten-Free) 해초 소스’ 등도 출시했다. 직장을 그만두고 어린 시절의 꿈을 완성해나가는 그에게 창업가를 꿈꾸는 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을 묻자 이렇게 답했다. “회사생활이냐 창업이냐는 중요하지 않아요. 먼저 스스로에게 자신이 추구하는 행복이 무엇인지 물어봐야 합니다. 행복은 이것을 면밀히 분석해 성취하는 과정에 있다고 생각해요. 저는 회사생활을 15년 하다 늦게 창업에 뛰어들었습니다. 영업 실무와 비즈니스 과정을 잘 알고 있었죠. 하지만 일찍 시작한다면 그만큼 자신만의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을 겁니다. 사회 초년생 시절 한 CEO에게 들은 말을 지금도 줄곧 새깁니다. ‘I am no better than others, and no one is better than me(나는 그 누구보다 대단하지 않고, 그 누구도 나보다 대단하지 않다)’” 글 CCBB 에디터 시시비비랩 김지아
‘과장급 남직원’ 뽑는데 지원한 23세 여성, 지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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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장급 남자 직원' 공고 보고 지원→최연소 여성 임원으로풀무원 최연소 여성 임원 윤명랑외면받던 풀무원 냉동사업부 일으켜 일과 가정의 양립은 제도와 배려가 만들어 3월 8일은 ‘세계 여성의 날’입니다. 한국 노동시장은 여성이 일하기 좋은 구조는 아닙니다. 영국 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2월 발표한 '유리 천장 지수'에서 한국은 29개국 중 6년째 꼴찌를 기록했습니다. 여성가족부가 2016년 500대 기업 여성 임원 수를 조사한 결과를 보면, 여성 임원은 406명으로 전체 임원 중 2.7%였습니다. 여성 임원이 한 명도 없는 기업 비율은 67.2%였습니다. 이런 가운데 최연소 여성 임원 자리에 올라 주목받는 사람이 있습니다. 풀무원식품 마케팅본부 윤명랑(40) 상무는 2017년 1월 1일 풀무원 최연소 여성 임원으로 승진했다. 냉동식품·가정간편식 마케팅 담당, 브랜드 관리실 등을 거친 올해 18년차 베테랑이다. .그는 2001년 ‘과장급 남자 마케팅 직원을 뽑는다’는 공고를 보고 지원했다. 당시에는 채용 공고에 성별을 명시하는 회사가 많았다. “당연히 지원자는 모두 남자였고, 면접 때는 ‘왜 지원했냐’는 질문을 받았죠. 면접에서 저도 회사에 대해 궁금한 점을 물었어요. 당시 유일하게 ‘바른 먹거리’를 강조하는 풀무원에 관심이 많아 제품을 주의 깊게 봤습니다. 그런데 생칼국수 제품이 2인분에 350g, 4인분은 700g이 아닌 600g이었어요. 이유를 물었습니다. 알고보니 중량 표기는 담당 직원의 실수였어요.” 면접관의 허를 찌르는 질문으로 과장을 뽑던 채용 과정에서 사원급으로 추가 합격했다.그는 ‘냉동 만두는 질 낮은 재료로만 만든다’는 편견을 깨고 만두 고급화 문을 열었다. 최근에는 여성들이 좋아하는 착즙주스 ‘아임리얼’과 탄산수 ‘스파클링 아일랜드’ 마케팅을 총괄하고 있다. ‘아임리얼’은 10년째 착즙주스 시장점유율(65%) 1위를 차지하고 있다.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을 맞아 서울 수서동 풀무원 본사에서 윤 상무를 만났다. 그가 최연소 여성 임원으로 승진할 수 있던 비결, 일과 가정을 양립하는 방법을 알아봤다.풀무원식품 마케팅본부 윤명랑 상무. /풀무원 제공, 촬영 이현석 사진작가◇사원의 패기로 밀어붙인 고급 만두 대중화 윤 상무는 입사하자마자 ‘냉동 만두’ 기획·마케팅을 맡았다. 풀무원은 냉동 만두의 좋지 않은 이미지를 바꾸기 위해 고심하고 있었다. 윤 상무는 6개월에 걸친 소비자 조사 결과 소비자가 ‘좋은 재료로 만든 만두라면 더 지불할 용의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는 ‘생고기 생야채’를 콘셉트로 ‘고급 만두’를 기획했다. 원재료비가 기존에 비해 5배 이상 높았다. “‘말도 안된다’는 평이 대부분이었죠. 공장에서도 ‘냉동 재료가 아니면 손이 많이가 불가능하다’고 했어요. 그때는 사원의 패기랄까, 소비자 조사 자료를 근거로 밀어붙였습니다. ‘신상품위원회’라는 사장단 회의에서 아이디어를 발표했더니 ‘한번 해보자’는 의견을 얻었어요.” 2002년 4월에 출시한 풀무원 물만두는 반응이 좋았다. 기존에 월 2억~3억 원에 불과하던 월매출이  20억원으로 올랐다. 2004년 ‘쓰레기 만두 파동’ 때는 쓰레기 만두와는 전혀 상관없는 풀무원도 타격을 입었다. ‘만두’에 대한 소비자 신뢰는 바닥에 떨어졌다. 윤 상무는 이때를 기회로 보았다. 신뢰도를 회복하기 위해 생산 과정을 소비자에게 공개하기로 했다. 소비자가 공장 견학을 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생고기, 생야채를 다루는 게 엄청난 비밀 같아 보이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공장 가보면 직원 50~60명이 직접 채소 씻어서 닦고 계세요. 또 부추는 재배 특성상 밑단을 자르면 다시 나는데, 다시 자란 부위는 안쓰고 중간 부위만 쓴다든지 굉장히 신경을 많이 씁니다.”이후로도 그는 냉동밥, 냉동 핫도그 등을 담당하며 냉동식품에 대한 편견을 깼다. 풀무원은 이전에 없던 냉동사업부를 만들어 적극 투자하기 시작했다. 지금도 ‘바른 먹거리’라는 가치를 구체화하는 데 집중한다. “기획하는 제품이 바른 먹거리인지, 바른 먹거리임을 소비자에게 어떻게 전달할 것인지가 가장 중요합니다. 소비자에게 신뢰받는 제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매출이나 이익보다 중요한 필수 조건이에요. ”풀무원 제공, 촬영 이현석 사진작가◇일과 가정 제대로 분리, 제도가 뒷받침해줘야 윤 상무는 2012년 결혼해 출산·육아휴직을 합쳐 10개월 동안 휴직했다. 4살짜리 아들이 있다.일과 가정을 양립하려면 둘을 ‘분리’해야 한다. “하루는 집에서 저녁때 일을 한 적이 있습니다. 아이가 ‘엄마가 집에서도 일하는 거 싫다’고 하더라구요. 그 어린아이도 다 알아요. 일하는 시간, 아이와 함께하는 시간은 제대로 구별해야 합니다. 일을 제대로 마무리 못했다는 찜찜함이 있으면 애한테 집중할 수 없어요. 그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일과 가정의 양립이 엄마의 각오와 마음으로 가능한 일은 아니다. "일과 육아를 둘 다 하기로 마음먹어도 회사 제도나 분위기가 받쳐주지 않으면 불가능합니다. 저희 회사에서는 일과 가정을 양립할 수 있는 분위기였습니다.”윤 상무가 입사했을 때만 해도 풀무원도 남자 직원이 많은 ‘남초 회사’였다. 협력업체 직원들이 윤 상무를 ‘미스 윤’이라 부를 때도 있었다. 하지만 풀무원은 다른 회사보다 일찍 일과 가정 양립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고 ‘가족친화기업’을 만들기 위해 제도를 정비했다. 풀무원은 전체 직원 5977명 중 여성은 3268명(54.68%)이다. 또 전체 임원 106명 중 여성은 15명(14.15%)이다. 풀무원은 2020년까지 여성 임원 비율 30%를 목표로 세웠다. 인사 제도에서 성차별적 요건을 찾아 보완하고 있다.직원들이 출산과 육아에 대한 고민을 덜 수 있도록 지원한다. 14주 이내 또는 34주 이후 임신한 여성 직원은 하루 2시간 단축 근무를 할 수 있다. 근로기준법에서 ‘12주 이내 또는 36주 이후’로 명시한 것보다 앞뒤로 2주씩 연장한 것이다. 임금 삭감도, 승인 절차도 없다. 오전 8시부터 10시 사이 출근시간을 조정하는 ‘유연근무제’도 자리 잡은지 오래다. 남자 직원도 태아검진을 사유로 한 휴가는 승인 없이 쓸 수 있다.  윤 상무는 아들과 함께 출근한다. 아들은 사내 어린이집에 맡긴다. 사내 어린이집은 오전 7시 30분부터저녁 7시 30분까지 운영한다. “아이가 가까운 곳에 있어서 안심하고 일에 더 집중할 수 있습니다. 아이들이 먹는 음식도 회사에서 담당합니다. 소풍 때 도시락 쌀 필요도 없어요. 부득이하게 야근을 해야 하면 사무실에 아들을 데려와서 일할 때도 있어요.”자녀를 둔 직원을 지원하는 제도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자료. /풀무원 제공◇‘특혜’ 아닌 ‘배려’ 필요워킹맘에 대한 배려를 ‘역차별’이라 보는 시선도 있다. “'특혜'와는 구별해야 할 것 같습니다. 워킹맘으로 살아가려면 일정 기간 동안 배려가 필요합니다. 가령 임신기, 출산 후 아이가 보살핌이 필요하는 기간이에요. 이때 제도가 받쳐줘야 하고 기회 보장도 필요해요. 이 시기를 지나면 워킹맘이 충분히 역할을 발휘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제도가 잘 갖춰진다 해도 ‘눈치 주는’ 문화라면 일과 가정 양립이 힘들다. 여성 혼자 뭐든지 완벽히 해내는 ‘슈퍼우먼’에 대한 환상도 버려야 한다. “아이 한명을 키우기 위해 사돈의 8촌까지 동원해야 한다’는 말이 있는데 사실이에요. 몸을 추스를 땐 친정어머니, 시어머니가 아이를 봐주셨어요. 남편과 제가 사내 부부라 1박 2일 워크숍 때는 남동생이 시간을 냈습니다. 팀원들은 아이를 키우는 직원 스케줄에 맞춰줘요. 사무실에 아이를 데려와도 꺼려 하지 않습니다. 배려를 번거롭고 귀찮게 생각했다면 여기까지 오기 힘들었을 겁니다. 다들 출산과 육아가 힘들다는 점을 이해하고 받아들여줬기 때문에 가능했다 생각합니다." 글 CCBB 에디터 욘두시시비비랩
노래방 사장님이 몰래 사용하고 있었던 시간조작의 비밀
CCBBLAB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8.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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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방 갈 때 타이머를 켜야 하는 이유한국은 외국에 비해서 소소하게 즐길 거리들이 참 많습니다. 노래방 시설이 바로 그중 하나인데요. 실제로 외국인들도 한국 노래방을 가면 신세계를 경험하게 된다고도 합니다. 저렴한 가격에 비해 시설이 좋은 편이죠. 요즘 학생들은 동전 노래방을 더 애용하긴 하지만 제가 학생 때는 하교 후 친구들과 식후 카페 대신 노래방을 자주 갔습니다한 시간에 5천 원을 내고 손님이 없으면 1시간 서비스를 더 받기도 했죠. 남자분들의 경우 여자친구를 위해 노래 연습을 많이 했었는데요. 임재범 고해를 1시간 내내 부르는 친구도 있었습니다. (저도 가끔...) 왜 그리 그 노래가 멋있던지 ㅎㅎㅎ그런데 서비스가 없는 날이면 무척 아쉬웠습니다. 게다가 시간이 평소보다 빨리 흘러간 것처럼 느껴져 뭔가 찝찝한 기분도 들었죠. 그땐 순수했으니 그저 1분 남았을 때 마지막 곡을 틀어서 나름 꼼수를 부리며 2분 정도는 이득을 본다고 생각했죠(시간이 끝나고 재생된 곡이 끝나지 않는 기계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우리가 모르고 있었던 노래방 기계의 꼼수가 숨어있었습니다. 그럼 쫌생이 사장님들 비리를 들춰보겠습니다. 진실은 하나! 범인은 바로 시간 삭제입니다.1. 노래방에서 1시간은 60분이 아니다.노래방은 대게 1시간을 단위로 금액을 지불하는 시스템입니다. 노래를 신나게 부르며 탬버린도 흔들고 스탭 좀 밟다 보면 즐거움에 시간이 더 빠르게 가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런데 그 느낌적인 느낌보다 실제로 더 빨리 가는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실제로 타이머를 켜고 들어간다면 몇몇 노래방에서는 분통을 터트리게 되는 경우를 접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바로 노래방 기계에는 시간을 삭제하는 기능이 숨어 있기 때문입니다.  사장님들은 손님이 많을 경우 이 기능을 자주 애용한다고 하는데요. 눈치 못 채도록 야금야금 빼간다고 하네요.2. 3분 30초의 기술시간을 지우는 요령도 있습니다. 노래방 사장님들이 대게 30초 주기로 지운다고 하는데요. 그 이유가 노래를 부를 때 시간을 애매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노래 한 곡당 보통 3분~4분 정도이기 때문이죠. 그리고 이 작업을 3분 30초마다 하면 손님들이 눈치채는 일이 거의 없다고 합니다. 손님이 많은 곳일 경우 정말 1시간이 순삭되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3. 서비스를 받아도 본전서비스 잘 주는 노래방은 무조건 또 가게 됩니다. 그런데 어쩌면 그 노래방이 내 시간을 빼다가 준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네요. 말 그래도 밑장 빼기하는 건데요. 이러한 꼼수는 손님들이 술을 먹거나, 또는 5차, 6차 끝내고 술에 떡이 되어있을 경우 더욱 심해져서 1시간이 30분이 되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글 CCBB 에디터 스마트인컴시시비비랩
회장님보다 많이 벌어가는 한국 최고의 월급쟁이들
CCBBLAB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8.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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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총수보다 많은 돈 벌어가는 월급쟁이?전년 대비 2.7% 증가하여 직장인들의 평균 연봉이 드디어 3000만원을 넘어섰다. 연봉 인상을 꿈꾸는 직장인들에게는 더 없이 기쁜 소식이다. 하지만 상위 1%의 급여가 하위 30%가 받는 급여 총액과 비슷하다는 통계는 조금 맥이 빠지는 이야기이다. 이 때문에 많은 직장인들이 기업의 임원이 되기를 꿈꾼다.출처 - 시사저널 sisapress총 급여액이 1억원이 넘는 직장인들은 전체 연말정산 근로자 중 2.9%만을 차지하는데 이들 대부분이 임원진이기 때문이다. ‘억대연봉’의 주인공들 중에는 심지어 재벌총수보다 많은 돈을 벌어가는 이도 존재한다고 한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은 연봉을 받는 이들에는 과연 누구있을까?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올해 상반기 재계에서 연봉 1위에 오른 재벌 총수는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이다. 그는 상반기에만 대한항공 등 4개 계열사로부터 58억 2천만원의 보수를 받았다고 전해진다. 작년 한 해 가장 많은 보수를 가져간 총수는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으로 152억원 이상을 벌었다고 한다.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회장2016년에는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이 80억 900만원을 받아 총수 경영인 중 연봉 1위 자리를 차지했었다. 이처럼 엄청난 돈을 벌어들이는 재벌 오너들이지만 이보다도 많은 연봉을 받는 직장인들이 있다. 한국 최고의 연봉을 자랑하는 월급쟁이들을 소개해보겠다.1. 권오현몇년 째 ‘국내 최고 연봉 월급쟁이 자리’를 놓치지 않고 있는 권오현 삼성전자 종합기술원 회장이다. 지난해에는 무려 240억원이 넘는 보수를 받으며 국내 그 어떤 재벌 총수보다도 많은 돈을 벌어갔다. 이는 그가 역대 최대 실적을 거두어 삼성전자를 반도체 기업 세계 1위의 자리에 앉힌 공로가 인정되어 받은 금액이다.출처 - bizwatch2017년에 그가 받은 보수는 총 243억 8,100만원으로 급여 18억4,000만원에 상여금 77억 1,900만원과 특별상여금 148억 2,100만원이 합쳐진 금액이다. 하루에 6,680만원을 번 셈으로 월급으로 책정하면 한 달에 20억 3,175만원의 급여를 받은 것이다. 2017년에는 어떤 재벌 오너도 권오현 회장보다 많은 연봉을 가져가지 못했다. 2017년에 가장 많은 연봉을 받았던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도 152억원에 그쳤기 때문이다.2016년에도 연봉 66억 9,800만원을 기록하면서 연봉왕의 자리에 올랐던 권오현 회장이다. 그는 2015년부터 4년째 연속으로 직장인 중 연봉 1위의 자리를 차지하며 ‘연봉왕 신화’를 기록했다.2. 신종균, 윤부근지난해 연봉 상위 1,2,3위는 모두 삼성전자 임원 차지였다. 연봉 2위를 차지했던 신종균 인력개발담당 부회장은 급여 16억 7,000만원에 상여금 66억 2,400만원을 합쳐 총 84억 2,700만원을 수령했으며 연봉 3위의 윤부근 CR담당 부회장은 76억 6,900만원의 연봉을 기록했다. 올해는 대표이사직에서 물러났음에도 신종균 부회장은 26억3800만원을 윤부근 부회장은 26억6100만원을 수령하였다고 한다. 지난해에, 오너 일가인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연봉 8억 7,100만원만을 받아 삼성전자 임직원의 연봉이 더욱 화제가 되었다. 물론 지난해 약 10개월간 수감되어 두 달치 급여만이 지급된 것이긴 하지만 그 차이가 매우 놀라웠기 때문이다. 현재 올해 2월 집행유예로 풀려난 뒤에도 무보수 원칙을 지키고 있는 이재용 부회장이다.3. 조상진, 한상범, 차석용조성진 LG전자 부회장삼성전자 전문 경영인들이 연봉에서 초강세를 보이고 있기는 하나 LG그룹 전문 경영인들도 상당히 많은 연봉을 받고 있다. 그 중에서 차석용 LG생활건강 부회장이 32억 4,400만원으로 LG의 전문경영인 중 가장 많은 연봉을 받았다고 알려졌다. 그리고 조성진 LG전자 부회장이 25억 2,500만원, 한상범 LG디스플레이 부회장이 23억 1,400만원으로 그 뒤를 이었다.차석용 LG생활건강 부회장올해 상반기는 그 순위가 조금 바껴 조성진 LG전자 부회장이 가장 많은 연봉인 22억 8600만원을 받았다. 다음으로 한상범 LG디스플레이 부회장이 20억 5800만원을 받아 2위를 차지했으며 작년에 가장 많은 연봉을 받았던 차석용 LG생활건강 부회장이 20억 5500만원으로 연봉 3위에 올랐다.글 CCBB 에디터 집토스시시비비랩
20대와는 다르다, 30대부터는 달라져야 하는 돈버는 자세
CCBBLAB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8.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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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에는 실수를 해도 무마할 수 있는 기회가 많은 편이다. 하지만 30대부터는 사정이 다르다.출처: 드라마 '단짠오피스'적어도 이때부터는 돈에 관련된 무모한 마음가짐은 바로잡아야 할 때이다. 사실 대부분이 어떤 삶이 우리의 통장을 가득 채우는지 알고 있다. 하지만 20대에는 비어가는 통장 잔고에 죄책감을 느끼더라도 끊임없이 소모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지만 당신이 30대, 40대 그리고 계속되는 미래까지 20대의 잔고를 가지고 싶지않다면, 지금 30대가 알아둬야할 마음가짐 11가지에 대해 알아두도록 하자.20대의 가장 큰 실수는 자신의 재정상태에 관심이 없는 부분이다. 또는 확인하기에 무서운 재정상태인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우선 은행 계좌를 확인이 첫 번째 순서이다. 잔고 보기가 두려워도 한 번은 부딪혀야 하는 법! 그다음 자신의 신용 평가와 그에 관련된 사항을 파악하고 직장에서 제공하는 경제적 혜택도 체크하자. 이 세 가지 모두 파악이 되었다면 이제 새롭게 출발할 수 있다. 설령 당신이 파산을 했더라도 자신의 상황을 인정하는 것이 새 출발의 첫걸음이다.최근 결혼 트렌드가 30대 초반인 경우가 많다. 하지만 결혼식은 사랑이 아닌 돈으로 하는 것이다. 슬프지만 현실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30대 초반이라면 결혼비용을 직접 감당하는 것이 쉽지 않은 편이다.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결혼을 하는 경우 대부분 다툼이 발생하게 된다. 심지어 결혼으로 빚더미에 앉을 수도 있는 게 요즘 현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당신이 준비될 때까지 옆에 있어주는 사람과 결혼하는 편이 모든 면에서 행복한 선택이 될 것이다. 공인 재무 기획사 마이클 이건은 결혼은 물론, 약혼 전에, 배우자와 돈과 관련된 깊은 이야기를 꼭 해보길 추천한다. “어릴수록 충동적으로 행동하기 마련이죠. 자동차 구매, 휴가, 심지어 맞지 않는 짝과의 결혼까지도 충분히 충동적인 결정으로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사실, 생각보다 큰일인데도 말이죠. 만약 결혼 생각이 있다면 배우자의 경제관념이 당신과 비슷한 편이 좋을 겁니다.” 이 말을 새겨 두도록 하자.집을 살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무리해서 안정을 찾겠다고 집을 사는 경우가 있다. 이에 대해 CFP이자 재정 기획 회사 Beyond your hammock의 설립자인 에릭 로버지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자신의 집을 가지려고 모든 돈을 쏟아 붓는 사람들을 많이 보아왔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집만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집은 산다고 끝이 아닙니다. 구입할 때는 보이지 않던 숨은 비용이 있죠. 유지 보수비와 세금 그리고 이자와 같은 비용이 지속적으로 당신의 잔고를 위협할 겁니다. 그러니 집 하나에 몽땅 올인하는 일은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심지어 좋은 투자 기회와 집 중에서 집을 사는 건 더더욱 현명한 일이 아니다. 집값이란 오르는 것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고, 인플레이션 등 여러 요소를 고려하면, 집을 소유하는 건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로버지는 "집은 필요해서 사는 것이지, 투자가 아닙니다.” 라고 충고했다.단지 투자를 시작하기 위해서 재정 전문가가 될 필요도 없고, 있어 보이는 경제 용어를 꼭 사용할 필요도 없다. 또한 가족한테 많은 유산을 물려받아야 가능한 것도 아니다. 가장 쉬운 장기 계획으로는 은퇴 시기에 맞춘 펀드나 적금 등으로 투자하는 것이다. 이 경우 안정적으로 많은 돈은 비축할 수 있다. 특히! 이자에 이자가 붙는 복리의 힘을 꽤 쏠쏠하기 때문이다.재정 전문 블로거 렌 펜조는 "준비가 철저하게 되지 않은 상태에서 아이를 가지는 것만큼 누군가에게 큰 재정적인 부담을 지우는 일은 없을 겁니다,"라고 했다. 아이 하나 키우려면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하는데, 단지 먹이고 입히는 것 외에도 대학 등록금, 사교육비가 추가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아이가 유학이나 예체능을 선택하면 추가 비용이 더 발생한다. 무엇보다도 질병이나 사고 등 예상치 못한 상황을 대비할 능력도 있어야 한다. 그러니 가족을 꾸리기 전에 정말로 준비가 됐는지, 특히 재정상황이 아이 양육에 충분한지 심사숙고를 해야 한다.아마 카드 한도나 대출 한도가 두 배, 세 배, 혹은 네 배까지도 늘어나는 때가 있을 것이다. 자신의 사회적 지위가 상승했다고 생각해 자축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어머 신용 등급이 좋아지셨군요!'라는 말은 그만큼 소비도 많이 했다는 뜻이라는 것을 알아두자. 한도가 늘어났다는 건, 열심히 돈을 벌고 쓰고 무엇보다 카드 대금을 잘 납부했다는 뜻이다. 그러니 감당 못할 일을 벌이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라이프스타일 인플레이션이라는 개념에 대해 알고 있어야 한다. 당신의 신용 등급과 한도가 높은 건, 당신의 소비 역량과 별개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스스로 한도를 조절하는 것이 중요하다. 누구도 미래를 예상할 수는 없지만, 나이가 들면서 몸이 예전 같지 않을 것이라는 것 정도는 안다. 한 연구에 따르면, 나이를 먹을수록 근육량은 감소하고 지방은 증가됨을 확인했다. 이는 몸이 소비하는 칼로리의 양이 줄어, 음식을 굳이 많이 섭취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제는 하루 삼시 세끼가 건강의 법칙이 아니다. 간단한 식사 계획이 건강도 지켜줄뿐더러 재정에도 도움을 준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건 재정이 아니라 10대, 20대 때처럼 많이 먹는 습관을 버리는 것이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더라도 건강을 먼저 지켜야 재정도 지킬 수 있다. 젊은 사람들은 건강에 대해서 자신한 나머지 관련된 준비를 미루곤 한다. 하지만 건강 문제로 발생하는 비용은 나이가 들수록 늘어나기 때문에 자신의 몸을 관리하지 않는 부분에 대해 뼈저리게 후회하게 된다. 또한 관리만큼이나 가장 중요한 건 최악의 상황에 대비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은 국민건강보험에 들어 있지만 만약을 대비해서 건강 관련 저축을 해놓는 것이 좋다.직업 전문가들이 언급하기 좋아하는 구절인데요. 이런 말이 있다. ‘지금 직업에 어울리는 옷을 입는 것이 아니라, 갖고 싶은 직업에 어울리게 입어라.’ 어떤 말일까? 이미 꿈의 직장에 들어갔다 하더라도 자신에게 투자하는 것을 소홀히 하면 안 된다. 우선 가능하면 쪼리는 집에 두고, 당신이 책임감 있고 준비된 사람임을 보여주도록 옷에 투자하는 경우도 필요하다. 더 많은 연봉을 받을 수 있는 사람으로 보이게 하는 것이다. 마음가짐을 자신의 옷차림으로 표현해 나가는 것이다.낙관주의는 나쁘지 않다. 하지만 돈에 대해서 지나친 낙관주의는 위험한 상태다. 사람들은 40대가 되면 지금 보다 훨씬 더 돈을 잘 벌 것이라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현재 시점에서의 소비를 정당화하기 위한 자기 합리화다. 공인 재무 기획사 마이클 이건은 “저축이 먼저입니다. 은퇴 후 자금을 위한 저축을 먼저 하시고 거기에서 남은 돈으로 소비하세요. 보통 사람들은 그 반대로 ‘지금 나는 이걸 사야겠어. 이것도, 이것도. 그리고 남은 돈은 저금을 할 거야.’라고 하죠. 하지만 미래에 먼저 투자하고 나서 현재를 살도록 하세요."구직 시장이 풍족하지는 않지만, 다니기 힘든 직장을 꾸역꾸역 다니며 스트레스를 꾹 참고 일만 해서는 안된다. 때로는 ‘No!’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하고, 심지어 일을 그만둘 자신감도 있어야 한다. 세계 최대 금융가인 월스트리트에서 높은 수입을 올렸던 한 여성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그녀는 하루 14시간 일을 하면서 많은 돈을 벌었다. 그러나 그동안 살도 찌고, 몸은 피로에 찌들었다. 그녀는 소모되었고 삶이 비참하다고 느꼈다. 그리고 이후 직업을 바꾸었다. “저는 지금 비영리 단체의 자산 매니저로 일하고 있습니다. 몇 달 안됐어요. 저는 요즘 제 삶이 풍요롭다고 느껴요. 저는 웃고 더 건강한 식생활을 하며 제 호흡을 찾았어요. 이제는 제 미래에 대해 긍정적인 생각을 하죠” 그리고 “이직하면서 연봉은 30% 줄어들었습니다. 그러나 삶을 위한 희생이라며 박수받을 생각은 없습니다. 이건 희생이 아니니까요.” 물론 급여도 중요하다 하지만 자신의 삶이 비참해진다면 아무런 쓸모가 없다는 것이다.글 CCBB 에디터 집토스시시비비랩
“벡터맨 없애버려” 벡터맨 괴롭히던 메두사 반전 근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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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사로 변신한 악녀메두사 박미경에서 한의사 박미경으로한의사 되기 위해 한의대 재입학 국민 한의사 되는 것이 꿈"벡터맨 타이거, 백터맨 이글, 백터맨 베어, 우리가 간다~ 벡터맨!"1990년대 인기 어린이 프로그램 '지구용사 벡터맨'은 벡터맨 용사가 메두사의 사탄제국으로부터 지구를 지키는 이야기다. 20대 중후반은 어린 시절 검은색, 초록색, 빨간색 시계를 차고 메두사를 무찌르는 상상을 하며 자랐다.벡터맨은 배우들의 스타 등용문으로도 알려져 있다. 벡터맨 1기 이글 기태영, 2기 이글 김성수와 레디아 공주역을 맡았던 엄지원은 활발한 배우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하지만 이들을 괴롭히던 악당 메두사는 벡터맨을 끝으로 TV에서 사라졌다.이후 15년 만에 그녀가 다시 TV에 얼굴을 비쳤다. TV조선 내 몸 플러스, MBC 기분 좋은 날 등 건강 정보 프로그램에 출연 중인 주인공은 한의사 박미경(40)씨. 그녀를 알아본 누리꾼들은 ‘갓(god)두사 누나’ ‘미모는 여전하다’는 반응이다. 그녀는 벡터맨이 끝나고 연기 활동을 그만뒀다. 이후 한의학 공부를 시작했다. 지금은 한의사로서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다.박미경 한의사 / 박씨 제공◇쎄씨 전속모델 발탁 후 연기의 길로박미경 씨는 1996년, 연세대학교 신문방송학과에 입학했다. PD를 꿈꿨다. 대학교 2학년 무렵 잡지에서 쎄씨 전속모델 모집 공고를 봤다. 아르바이트할 겸 지원했다. 결과는 합격이었다. 학교를 휴학하고 모델 활동을 시작했다.잡지에 실린 그녀의 사진을 보고 한 기획사에서 연락이 왔다. 배우를 해 볼 생각이 없냐고 물었다. 새로운 경험을 해보고 싶었다. 제안을 수락했다. 모델에서 연기자로 활동 영역을 넓혔다."당시 신인 배우들은 뮤직비디오-단막극-리포터 순으로 활동했어요. 저도 마찬가지였죠. 캔의 천생연, 앤썸의 언제나 네 곁에 등 뮤직비디오로 데뷔 후 MBC 베스트 극장, SBS 좋은친구들 단막극에 출연했어요. 호기심천국 리포터도 했습니다. 계속 오디션도 보러 다녔어요. '지구용사 벡터맨' 오디션을 봤는데 감독님이 ‘너는 꼭 악역을 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벡터맨 괴롭히는 메두사로 열연보통 배우는 악역을 피한다. 큰 역할이 아닐뿐더러 이미지가 안 좋아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신인이라고 다를 바 없다. 박씨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좋은 친구에 함께 출연했던 정웅인씨가 ‘배우에게 작은 배역은 없다’고 했던 것이 떠올랐다. 1999년, 지구용사 벡터맨 2기 악당들의 대장 메두사역을 맡았다.메두사를 연기했던 박씨 / 방송화면 캡처연기는 어렵지 않았다. 모든 일을 즐기는 성격이라 힘든 줄도 몰랐다. 그렇게 1999년 8월부터 11월까지 메두사로 활동했다. 벡터맨이 끝나고 주말드라마 주·조연 출연제의를 많이 받았다. 하지만 모두 거절했다. "덜컥 겁이 났습니다. 제안을 받아들이면 앞으로 쭉 연기자로 살아야 할 것 같았습니다. 활동을 돌아보니 저는 끼도 없었고, 끼와 재능의 전쟁터 같은 곳에서 버틸 자신이 없었습니다. 학교로 돌아가기로 했습니다."◇졸업 후 한의대 재입학복학 후 연기 생활을 통해 방송국과 PD에 대한 환상이 사라졌다. PD의 꿈은 접었다. 휴학과 복학을 반복하며 2001년 가을에 졸업했다. 다시 진로를 결정해야 했다. 끊임없이 마인드맵을 그리면서 하고 싶은 일을 찾았다."저는 초·중학생 시절 허약했어요. 가만히 있다가 코피를 쏟는 일은 허다했고 아파서 학교에 못 간 적도 많았죠. 병원에 가도 왜 아픈지 몰랐습니다. 그런데 한약을 먹으면 나았어요. 제가 어디가 아픈지, 왜 양약이 아닌 한약을 먹어야 낫는지 알고 싶었습니다."한의학을 알아봤다. 정교하게 연결된 인체는 마치 소우주 같았다. 흥미를 느꼈다. 또, 한의학을 배우면 어린 시절 어디가 아팠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2002년, 한의대를 가기 위해 재수학원에 등록했다. 오랜만에 수험생으로 돌아가서 그런지 공부가 재밌었다. 2003년, 수능을 치렀고 상지대학교 한의대에 합격했다.◇국민 한의사 되는 것이 꿈입학하고 보니 일반 대학교보다 공부해야 할 것이 많았고, 시험도 많았다. 하지만 적성에 맞아 즐겁게 공부했다. 방학 때 한자 공부를 위해 서당에 가기도 했다. 시험 기간엔 동기들과 서로 침을 놔주며 혈 자리를 익혔다. 그렇게 6년 동안 한의학을 공부했다. 한의사로 활동하기 위해서는 한의대 졸업 후 한의사 국가시험을 치르고, 한의사 면허증을 취득해야 한다. "수능보다 힘들었습니다. 긴장했죠. 외울 것도 많았습니다. 오전 9시부터 밤 10시까지 매일 공부했는데도 암기한 것들이 머리에서 다시 튕겨 나갔어요. 그때마다 동기에게 도움을 받았습니다. 파트를 나눠서 요약정리를 하고 그 내용을 공유했습니다. 두뇌 활동을 촉진하는 혈자리에 서로 침도 놔주며 공부했어요. 2009년, 시험에 합격했습니다."방송에 출연 중인 박미경 한의사 / 박씨 제공·박씨 인스타그램 캡처졸업 후 4년간 한의원에서 일했다. 한방 진료과장과 진료원장을 차례로 맡으면서 경험을 쌓았다. 2014년, 서울 대치동에 한의원을 차렸다. 아토피 등 알레르기, 자가면역질환 치료를 중점으로 하고 있다. 박미경씨는 "연기는 좋은 경험이었고 지금은 국민 한의사가 되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한의학을 준비하는 후배들에게 조언도 잊지 않았다."요즘 안정적인 삶을 위해 전문직인 한의사를 준비하는 친구들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오직 편안한 밥벌이로만 생각하고 시작하면 과정이 힘들고 어려울 것입니다. 끊임없이 공부해야 하는 직업이기 때문이죠. 저도 아직까지 공부하고 있어요. 정말 한의학에 관심이 있고, 한의학의 가능성을 보고 준비한다면 흥미로운 직업입니다. 무엇보다 환자에 대한 책임감은 필수입니다."글 CCBB 에디터 하늘시시비비랩
"학교를 안갔어" 외치던 량현량하, 요즘 뭐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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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는 안갔어도 사회경험은 제대로 했죠13살에 10억 벌던 쌍둥이 꼬마가수성인땐 피씨방 아르바이트·제약회사 인턴평창 올림픽 성화봉송 행사 무대 선보일 예정그들은 13살에 10억원을 벌었다. CF에 출연하면 1억원 정도는 거뜬했다. 어린 나이에 큰 성공을 거뒀지만 모은 돈은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제대 후 대다수 한국 청년들이 경험하는 피씨방 고깃집 알바도 했다. 회사서 인턴 생활도 했다. 이들이 다시 엔터테인먼트 업계로 돌아왔다. 눈에 띄지는 않지만 착실히 활동하고 있다. 2018년 열리는 동계올림픽 성화봉송 행사 무대에 선다.2000년 열세살 량현 량하 형제 / 량하 인스타그램 캡처13살에 데뷰해 활약했던 쌍둥이 댄스 가수 ‘량현·량하’(30) 이야기다. 90년대말 2000년대초 전성기 시절 그들은 한해 8~9개의 광고를 찍었다. 갑작스런 성공만큼 빠르게 슬럼프가 찾아왔다. 어린나이에 많은 돈을 벌었던 두 형제는 혼란스러운 10대 시절을 보냈다. 학업과 방송활동을 병행하던 두 사람은 스무살에 동반입대한 후 연예 활동에 공백기를 갖는다. “군대에서 외국어 공부, 봉사활동 등 다양한 진로계획을 세우는 또래들을 보며 자극받았어요. 연예인 삶만이 전부가 아니라고 깨달았죠. 다른 또래들처럼 ‘사회를 좀더 겪어보자’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야 나중에 대중앞에 섰을 때 떳떳할 것 같았어요”전역 후, ‘남들에게 떠밀려 방송하지 말자’ 결심한 두 형제는 각자 해보고 싶었던 분야에 뛰어든다. 일란성 쌍둥이지만 전혀 다른 성격의 그들은 관심 있는 분야도 제각각이었다. ‘진지한 스타일의 학구파’라는 량현은 제약회사 인턴으로 근무하며 1년간 직장생활도 했다. 그들은 피씨방·고깃집 아르바이트 등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았다.왼쪽이 량현 오른쪽이 량하 /jobsN-알아보는 사람도 많았을텐데“그럴땐 그냥 ‘닮은 사람이에요’하고 넘어가요. 저희 흔하게 생겼거든요. 방송활동을 자주 한게 아니니까 평상시에도 연예인 행세할 필요가 없지 않나요. 다만 ‘허튼 짓 해선 안된다’고 생각하고 항상 주의합니다. 안무 창작에 영감을 얻으러 클럽에 자주 갔어도 실수한적은 없어요”-춤을 계속 춰온건지“연습은 계속 했어요. 대한민국 최고 비보이 팀 원에이크루(One-A Crew), 리버스크루(Rivers Crew)가 연합한 ‘커요·KERR-YO(Korean b-boy Everybody dance with Ryanghyun Ryangha-YO)’라는 그룹과 함께 1년 이상 해왔죠. 이번에 ‘커요’가 2018 평창 동계올림픽 성화봉송 행사 무대를 꾸미기로 했어요. 다시 한번 춤으로 대한민국을 넘어 전세계를 놀래키고 싶어요.”성화봉송 릴레이는 올림픽 개막 100일 전부터 7500명의 봉송 주자들이 성화봉송을 들고 전국 2018km를 달리는 이벤트다. 달리기만 하는게 아니고 다양한 축제와 볼거리도 있다. 두 형제의 비보이(B-Boy) 팀 ‘커요’는 지역축하행사 무대를 꾸민다. 성화봉송 릴레이 첫날인 11월 1일 송도달빛축제공원을 시작으로 전국구에서 총 20회 공연한다. 그들은 얼마 남지 않은 공연을 위해 맹연습에 돌입했다. 음악만 나오면 한몸처럼 춤을 추던 량현·량하 형제였다. 무대 위를 날던 열세살 소년들은 아니지만 타고난 흥과 끼는 여전하다. ‘비보이’ 댄스에 량현량하의 애정과 사명감은 남다르다.“비보이 퍼포먼스 팀을 보면 책임감을 느껴요. 학원을 운영하거나 해외에서 활동하지 않는 한 댄서 대부분이 투잡(two job)을 뛰며 어렵게 꿈을 이어가고 있거든요. 예전처럼 비보이 댄서들을 행사에서 찾아주지 않아요. 10년 이상 활동하는 전문 프로들도 계속 행사료를 낮춰가며 무대에 섭니다.” 비보이 행사료는 무명 걸그룹 출연료보다도 낮다. 비인기 종목이기 때문이다. 전문 프로팀의 경우 서울 지역은 150~200만원 정도다. 5~10인 정도 인원으로 구성한 팀에서 명수대로 수익을 나눈다. 수입이 낮은편인데도 병원비 지출은 높다. 부상이 잦기 때문이다. 무릎이나 발목쪽 관절은 ‘좀 나았다 싶으면’ 다시 다친다.“비보잉이 서커스같을 때가 있어요. 물구나무 서기도 하고 머리로 땅을 짚고 빙글빙글 돌기도 하죠. 춤의 끝이라고 생각해요. 자기 스스로 틀을 깨지 못하면 기술만 갖고는 절대 할 수 없는 장르입니다.”량현량하 형제는 서른살 ‘비보이’다. 40대, 50대에도 춤을 출 것 같다는 그들은 “대한민국에 ‘비보잉 붐’을 일으키고 싶다”고 한다. 꼭 방송이 아니더라도 다양한 방법으로 춤을 알린다. 량하는 중고등학교 체험학습이나 성인 문화행사에서 강연도 한다. 주제는 역시 ‘비보이 댄스’다. “협업능력과 창의력을 기르는데 좋은 춤입니다. 다같이 안무를 짜고 그걸 함께 보고 토론하며 동작을 만드는 춤이거든요. 어릴 때부터 치열한 경쟁을 하는 요즘 세대들에게 꼭 필요한 예술활동이라 생각해요. 앞으로도 다양한 방식으로 스트릿 댄스의 매력을 알리고 싶습니다. 그 시작을 2018 평창 올림픽 성화봉송 무대로 할수 있어 기쁩니다. 개막 전까지 전국에서 약 20번 행사가 열립니다. 멋진 퍼포먼스를 선보일 예정이니 지켜봐주세요.”글 CCBB 에디터 김지아시시비비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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