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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종호「주체적 독자를 위하여」

아프락사스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08.04.29 10: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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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적 독자를 위하여




유종호             

출전 : 『시란 무엇인가』, 민음사, 1995


글자 한 자의 빠춤이나 더함이

전세계의 파멸을 의미할 수 있다.

- 『탈무드』


동양에 있어서도 서양에 있어서도 시는 인문적 전통의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리하여 오랫동안 인문교육의 대상이자 그 훈련의 방편이 되어왔다. 이것은 타당하고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인간을 언어동물로 정의한 헬레니즘의 인간 이해를 수긍하는 한 우리는 그 타당성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동양 전통에서 그리고 특히 조선조 이래 우리 전통에서 유력한 삶의 향도의 하나가 되어온 공자어록에는 <시를 공부하지 않고서는 말할 게 없다(不學詩면 無以言)> 『論語』「季氏篇」.란 대목이 보인다. 시를 배움이 곧 말배움임을 뜻하면서 시가 말의 모든 것을 갖추고 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시간적·공간적으로 아득하게 상거하고 있는 19세기 영국의 매슈 아널드가 <시는 인간의 가장 완벽한 발언>이라고 말했을 때 그의 취지는 공자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시를 알지 못하고서는 말을 안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시 300편을 두고 <생각에 사특함이 없다(思無邪)>라고 요약한 것은 너무나 유명한 일이지만 <온유하고 돈독함은 시가 가르치는 바(溫柔敦厚詩敎也)>라 한 것도 시의 도덕적 감화력을 시사한 것으로서 넓은 의미의 정서교육적 효용을 인정한 셈이다. 서양에 있어서도 문학이 인문교육의 중심이 된 것은 그 인간 형성력을 인정하였기 때문이다. 여기서의 도덕적 감화력이나 인간 형성력이 좁은 의미의 교육성이나 설교투와 거리가 먼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곧잘 고리타분한 도덕주의를 연상케 하는 공자가 다시 <관저(『시경』 첫번째 시편)는 즐거우면서도 음탕하지 아니하고 슬프면서도 과도히 애통하지 않다(子曰關雎樂而不淫哀而不傷)>고 말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게 시읽기가 즐거움과 연결되어 있음을 드러내고 있다. 시는 언어의 정수이기 때문에 시의 이해는 언어의 이해이며 나아가서 언어동물의 이해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시가 즐거움과 가르침을 동시에 준다는 점에서도 동서의 인문전통이 대체적인 합의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 또한 흥미 있다. 저쪽의 시가 문학의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이 사실이 변경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이에서 시가 널리 수용되고 향수되어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또 본래의 높이와 깊이에서 향수되는 성싶지도 않다. 시를 보는 안목이 인품의 반영이기도 했다는 것은 이제 아득한 옛일이 되어버렸다. 글자 한 자의 차이에서 세계가 명멸한다고 느꼈던 옛사람의 엄격성은 이제 우리의 것이 아니다. 도처에서 기율이 사라지고 뛰어난 것에 대한 경의가 사라지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밝고 높은 것이 여러 가지 이름으로 홀대되고, 안이하고 속된 것이 숭상되고 있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시적 감수성의 훈련과 세련이 엄밀한 의미에서의 고전(古典)을 통해서 이루어지지 않음도 중요한 요인이라고 생각한다. 시의 위엄을 보여주는 동양 고전과도 서양 고전과도 우리는 격리되어 있다. 한문과 격리된 우리 세대는 동양 시의 절창을 경험하지 못했으며 번역으로 훼손된 서양 고전에서 <시>는 증발해 버린 것이나 진배없다. 우리의 많지 않은 근대시의 유산마저도 옥석을 가리어 향수하는 일에 소홀하였다. 우리 교육현장의 문제점은 식자들의 공통적인 개탄 대상이 되어 있지만 문학교육의 현장도 예외는 아니다. <가르치는 사람이 우선 교육받아야 한다>는 급진주의의 명제는 문학교육의 분야에서도 절실하다. 좋은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을 가리는 분별의 안목은 비평의 덕목이며 그 도야는 문학교육의 핵심이 되어야 하지만 그 실제는 수상쩍기만 하다. 한편 향수능력과 무관하게 전개되는 발생학의 친착이 <연구>의 대종을 이루고 있으며 그것은 연구자의 실적 증명은 될지 모르지만 시의 향수와 이해에는 별다른 기여를 하지 못하고 있다. 시인이 많고 좋은 시도 많이 나오는 것이 사실이지만 시가 많다는 것은 시 앞에서 두려움과 외경을 느끼지 못하는 현상의 반영이라는 추측도 가능하다. 전통 앞에서 두려움을 느끼지 못하고서 시 전통에 기여하지는 못할 것이다.

주체적 독자의 소멸


작품에 대한 안목도 사람의 가치관이 대체로 그렇듯이 명시적 혹은 묵시적 암시와 영향의 소산이다. 이 점 교과서나 사화집(詞華集)의 영향력은 압도적이다. 교사나 비평가의 영향이 여기에 곁들일 것임은 너무나 명백하다. 비평가의 영향력은 작품에 대한 한 시대 취향이나 안목을 얼마만큼 변경시켰는가에 의해서 가늠된다. 가령 엘리엇 같은 이는 20세기 초반에 영시 독자들의 안목과 취향을 결정적으로 변경시킨 것으로 인정되고 있다. 그는 시인이자 비평가로서 그 일을 담당했다고 할 수 있다. 문학교육이 하는 일의 하나는 적정한 향수능력과 감식력의 배양이다. 그리고 그것은 궁극적으로는 주체적으로 취사선택할 수 있으며 또 필요에 따라서는 스스로의 취사선택에 대해서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의 개발이기도 하다.

우리 문학교육의 실패는 주체적 판단능력을 가진 주체적 독자의 부재에서 현저하게 드러난다. 특히 시의 경우 좋아하는 작품, 그 가운데서 가장 당기는 대목을 들게 하면 판단 주체의 참모습은 드러나게 마련이다. 대개의 경우 널리 인용되거나 영향력 있는 비평가가 지목한 작품을 드는 것이 보통이다. 정답과 오답을 사선지 선택형으로 훈련받은 사람들의 서글픈 생태이겠지만 <정답>이 무엇일까를 궁리하는 흔적은 많아도 순박하게 자기 감수성의 동향을 술회하는 경우는 드물다. 자신없이 암시와 시사를 찾으려 든다. 자신의 감수성은 뒷전으로 돌려놓고 대세와 풍문과 눈치에 의존하려 든다.

게다가 자신없는 감수성이 사로잡혀 있는 시에 대한 미신이 허다하다. 쉬운 시와 어려운 시가 있고 어려운 시가 깊이 있으며 따라서 괜찮은 시라는 생각도 널리 퍼져 있다. 쉬운 동요나 동시에도 괜찮은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이 있고 그것을 아는 것이야말로 작품의 이해라는 생각은 못하는 것이다 시가 어떤 <사상>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며 서정시에 과도한 요구를 하는 것도 문제이다. 깊은 사상을 가지고 있는 시가 많이 있고 그리하여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명시들이 수두룩하다. 그러나 산문으로 번역되는 <사상>과 무관하게 울림 좋은 명시도 많은 것이다. 두보의 「춘망(春望)」이나 워즈워스의 「수선화」 혹은 서정주의 「풀리는 한강가에서」에 어떤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생각은 우리가 흔히 <사상>이라는 경칭으로 부르는 묵직한 생각의 덩어리는 아니다. 20행의 서정시에서 3막짜리 비극에서와 같은 사상적 충격을 요구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무리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시를 시로서 대하자는 것은 노래를 노래로 대하자는 것처럼 온당한 일이다. 그것이 싫다면 그만이다. 그러나 시나 노래는 옛날부터 있어온 인류의 낙이요 소홀치 않은 발명품이다. 레비 스트로스는 <음악이 인간의 수수께끼>라는 취지의 말을 하고 있지만 음악의 기초의 하나는 노래요 노래말이다. 주체적 독자가 되기 위해서는 시에 관한 잡다한 미신과 풍문을 떨쳐버리고 될수록 많은 그리고 괜찮은 작품을 대해 보고 그 앞에서 겸손해지는 것이 필요하다. 그때 우리는 세상에서 얘기하는 어려운 시가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또 언뜻 쉬워 보이는 작품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많은 독시 경험을 통해서 좋은 시와 그렇지 못한 시, 혹은 시 아닌 시를 구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많이 읽는 것이 우선 첩경이다. 그리고 물론 괜찮은 시를 접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시를 읽자

문과 대학생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한 적이 있다. 작품을 나누어 주고 우선 뜻을 묻고 이어서 간단한 논평을 가하게 한 것이다. 작자 이름을 가렸고 일부러 해금시인의 작품을 선택하였다. 중·고등학교 시절에 접했을 가능성을 배제하여 작품과의 첫 만남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중의 하나가 동시 흐름의 정지용 작품이다.

오빠가 가시고 난 방안에
숯불이 박꽃처럼 새워간다

산모루 돌아가는 차, 목이 쉬여
이밤사 말고 비가 오시랴나?

망토 자락을 여미며 여미며
검은 유리만 내여다 보시겠지!

오빠가 가시고 나신 방안에
時計소리 서마 서마 무서워

----「무서운 時計」 전문

어린 소녀가 화자로 되어 있는 동시 흐름의 단시이다. <새워간다>는 우선 <새우다>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한숨도 자지 않고 온 밤을 밝힌다는 뜻이 될 것이다. 그런데 박꽃은 희다. 숯불이 하얗게 밤을 새운다는 것은 시각(時刻)으로 보아 이치에 맞지 않는다. 그렇다면 <새워간다>는 불이 사그라져 재가 된다는 것을 뜻하는 <사위다>의 변형일 것이다. <사위어가다>가 <새워가다>로 된 것일 터이다. 여기서 맞춤법상으로 잘못 쓰인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숯불이 박꽃처럼 사위어간다>고 하는 쪽이 나으란 법도 없다. <밤을 밝힌다>는 뜻으로 읽건 <사그라져 재가 된다>는 뜻으로 읽건 혹은 두 뜻의 복합으로 읽건 둘째 줄을 박꽃과 연결시켜서 생각한 응답은 극히 적었다.

<산모루 돌아가는 차>는 기차일 것이다. 산모루는 산마루 혹은 멧등이랄 수도 있겠고 산모퉁이를 뜻할 수 있을 것이다. 문맥으로 보아 산모퉁이로 읽는 것이 무난할 것이다. <목이 쉬여>는 기적소리가 여느 때와는 달리 들리고 있음을 시사한다. <목이 쉰다>의 원뜻은 말할 것도 없이 목소리가 밝지 못하고 거칠어진 것을 뜻한다. 이 대목은 4행째의 <이밤사 말고 비가 오시랴나?>와 연결시킬 때 그 뜻이 분명해진다. 비 오기 전 저기압이 되면 기적 소리가 더 가깝게 들린다. 평소엔 들리지 않던 기적 소리가 들리는 경우도 있다. <이밤사>의 <사>는 김동리의 「찔레꽃」 첫머리에 나오는 <올해사 말고 보리 풍년은 유달리도 들었다>는 대목의 <사>와 같은 것이다(1940년대 후반에 시어로서 유행했던 이 조사의 구사를 근대시에서 최초로 시도한 것이 아마도 정지용이리라는 것을 필자는 지적한 적이 있다).

어깨 위로 둘러 걸쳐 입도록 한 소매 없는 외투인 <망토>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이 작품의 제작시기가 1920년대 혹은 1930년대일 것이라는 추측도 가능할 것이다. 신파의 등장인물이 입었던 외투이다. 드러내놓지 않은 오빠에 대한 동기간의 정이 잘 드러나 있다. 마지막 줄 <時計소리 서마 서마 무서워>의 <서마 서마>는 아마도 정지용 자신이 만들어낸 조어가 아닌가 생각된다. 「종달새」라는, 역시 동시 흐름의 작품에서 그는 종달새 소리를, <지리 지리 지리리>란 의성어로 표현한 적이 있다.

삼동내----얼었다 나온 나를
종달새 지리 지리 지리리……

왜 저리 놀려 대누.

어머니없이 자란 나를

종달새 지리 지리 지리리……

왜 저리 놀려 대누

해바른 봄날 한종일 두고
모래톱에서 나흘로 놀자.

이러한 의성음은 그의 발명이자 창작이다. <서마 서마>가 설마 시계 소리의 의성음은 아닐 것이다. 어린 소녀의 얼마쯤 두렵고 외로운 심정을 나타내는 말일 것이다. 낮설거나 어색한 것과 연관된 <서먹서먹하다>란 말을 유추적으로 변형시킨 것일 거라는 추측도 가능하다. 신상이나 집안에 변화가 일어났을 때 일상의 낯익은 것이 갑자기 낮설어지면서 불안이나 고독감을 더해준다는 것은 우리들 공통의 유년 기억의 하나일 것이다. 평소 심상하게 들리던 시계 소리 같은 것도 갑자기 낯설게 들리는 것이다. 심상하던 것이 생소해지면서 어떤 두려움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작품의 소재 처리를 제대로 파악한 반응은 없다시피 했다. 오늘의 청소년이 자연과 격리된 생활을 함으로써 횐 박꽃을 알지 못하며 저기압 때 소리가 멀리까지 간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경험의 특수성과 연관되는 사안일 것이다 또 숯불이 사위어 횐 빛이 된다는 것을 알지 못하며 소음공해의 소용돌이 속에서 시계소리가 일으키는 미묘한 마음결의 변화에 무연한 생활환경과도 관련되는 문제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뿐일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문과 대학생조차 우리의 문학작품과 격리되어 있다는 사정과도 관련될 것이다. 마음속의 알 수 없는 설렘이 사랑이요 그리움임을 알게 되는 것은 대개 문학경험을 통해서이다. 아니 문학경험을 통해 이 세상에 사랑과 그리움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것을 스스로 마련해 내는 것이라고 말할 수조차 있다. 문학경험은 현실경험을 앞당기게 하는 것이다. 자연이나 전원경험과 격리된 청소년도 문학경험을 통해 사위어진 숯불이나 박꽃의 횐 빛쯤은 넉넉히 알 수 있을 것이다.

횐 옷자락 아슴아슴
사라지는 저녁답
썩은 초가 지붕에
하얗게 일어서
가난한 살림살이
자근자근 속삭이며
박꽃 아가씨야
박꽃 아가씨야
짧은 저녁답을
말 없이 울자

----「박꽃」 전문

많지 않은 한글 근대시의 전부를 읽는다 하더라도 4주일밖에 걸리지 않을 정도로 우라의 문학유산은 양쪽으로 빈약하다(순한문으로 된 것은 별도이다). 그런데 근대시의 고전의 하나인 『청록집ꡕ조차 문과 대학생이 접한 경우가 희소하다. 이것이 우리들의 문학교육의 현실이다. 중·고등학교에서는 물론 대학 수준에서도 그러하다. 교과서에 수록된 옛 시조 몇십 편과 현대시 몇십 편을 감흥도 없이 읽는 것으로 시교육은 끝나버린다. ꡔ청록집ꡕ을 통해 위에 인용한 박목월의 「박꽃」만 읽었어도 그 꽃의 횐 빛쯤은 알아두었을 것이다(옛적에 시가 기억술의 한 방편으로 활용되었다는 것을 상기해 보는 것이 유익하다).

아주 쉽다고 가볍게 보는 제 나라 동시조차 변변히 해독하지 못하는 터전에서 조금 복잡한 시를 이해하지 못하리라는 것은 자명하다. 또 그러한 독서능력마저 갖추지 못한 터수에 문화배경도 다르고 말도 생소한 외국시를 배우고 엘리엇이나 보들레르에 관한 기말논문을 써내는 것은 자기기만의 극치이다. 그 우스꽝스러운 자기기만에 대한 통렬한 자의식을 거친 문학적 각성이 전반적인 수준에서 일어나지 않는 한 외국문학 교육도 예외적인 소수를 제외한다면 공허한 노력으로 그쳐버리고 말 것이다.

「무서운 시계」의 이해가 문맥의 기본적 이해로 완결되는 것은 아니다. <여미며 여미며><서마 서마>와 같은 되풀이의 음률적 효과, 군더더기 없이 압축된 간결성, 2행과 3·4행, 그리고 마지막 행의 비유나 착상의 창의성도 감득해야 한다. 모두 우리 시에서 처음으로 시도된 사소하고 조그만 대로 시인의 발명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오빠 간 뒤의 화자 심경에 대한 정서적 공감이 필요하다. 빼어난 명시(名詩)라 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아무나 쓸 수 있는 범상한 시도 아닌 것이다. 우리나라 동시의 일반적 수준을 고려할 때 뛰어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쉬운 것 같으면서도 범상하지 않은 예로서 오장환의 「붉은 산」을 읽어 보기로 하자.

가도 가도 붉은 산이다.
가도 가도 고향뿐이다.
이따금 솔나무 숲이 있으나
그것은
내 나이같이 어리구나
가도 가도 붉은 산이다.
가도 가도 고향뿐이다.

시를 읽을 때 사사로운 개인적 경험에 근거한 연상이나 기억에 의지하여 과도한 반응을 보이는 것이 온당한 태도라 할 수는 없다. 문맥 속에서의 언어조직에 충실을 도모하는 것이 기본적으로 요구되는 태도이다. 그러나 독자도 사회역사적 맥락 속에서 형성되고 조건지어진 존재이지 진공 속의 자동기계는 아니다. 그러한 한에 있어서 그의 과거 경험도 시에 대한 반응에 있어 일정한 작용을 하게 마련이다. 위에 인용한 시는 조국의 산야를 온통 붉은 산으로 체험했던 세대에게 각별한 호소력을 지니게 마련이다. 단조한 대로 한 시기의 우리 산야에 대한 충실한 그림이 되어주고 있다. 고향은 붉은 산 투성이의 황량함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어디를 가나 고향의 모습이 연속될 뿐 변화가 없다. <가도 가도 고향뿐이다>란 구절이 나타내고 있는 것은 이렇게 조국 산천이 고향풍경의 연속이요 되풀이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의 지적이다. 이따금 보이는 소나무숲이 아주 어린 유목(幼木)이거나 왜소한 나무로 이루어진 것에 대해서 화자는 안타까운 마음을 금치 못한다. 그 안타까움이 <내 나이같이 어리구나>와 같은 진하지 않은 한탄조로 뛰어나온다.

붉은 산 일색의 산하가 안겨주던 황량한 절망감을 체험하지 못한 젊은 세대에게는 별 감흥이 없는 소품쯤으로 여겨질 것이리라. 그러나 가령 김동인의 단편 「붉은 산」을 읽어본 독자라면 이 소품이 한 시절 우리 산하의 참모습이었다며 화자의 한심해하는 어조를 감득했을 것이다. 이러한 산하를 등지고 많은 동포들이 만주로 이주해 갔으며 또 이러한 터전에서 1950년의 전쟁이 진행되었다는 사실에 무심하지 못할 것이다. 설문응답자의 다수가 <가도 가도 고향뿐이다>란 시행을 앞의 시행과 연결시켜 설명하지를 못하고 있었다. 아마 너무 쉬운 시여서 <정답>찾기가 더 어려웠던 것인지도 모른다. 시의 해석이 하나로 귀결될 수는 없는 것이지만 설득력 있는 의미연관을 제시한 경우는 극히 희소하였다. 그 다음 제시한 작품은 역시 해금시편이면서 상대적으로 복잡한 구조를 지닌 것이었다.

꼼꼼하게 읽자


옮겨다 심은 종려나무 밑에
비뚜루 선 장명등,
카페 프란스에 가자.

이놈은 루바쉬카
또 한놈은 보헤미안 넥타이
삐쩍 마른 놈이 앞장을 섰다.

밤비는 뱀눈처럼 가는데
페이브멘트에 흐늙이는 불빛
카페 프란스에 가자.

이 놈의 머리는 비뚜른 능금
또 한놈의 심장은 벌레먹은 장미
제비처럼 젖은 놈이 뛰어 간다.

「오오 패로(鸚鵡) 서방! 굿 이브닝!」
「굿 이브닝」(이 친구 어떠하시오?)

鬱金香 아가씨는 이 밤에도
更結 커튼 밑에서 조시는구려!

나는 子爵의 아들도 아무것도 아니란다.
남달리 손이 희여서 술프구나!

나는 나라도 집도 없단다
大理石 테이블에 닿는 내 뺨이 슬프구나!

오오, 異國種강아지야
내발을 빨어다오
내발을 빨어다오

----「카페 프란스」 전문

시를 이해함에 있어 작품이 내포하고 있는 인유(引喩)의 요소를 감득하는 것은 극히 중요하다. 선행 작품에 빚지고 있지 않은 작품이란 없다시피 하기 때문이다. 최근 상호텍스트성 혹은 다가적(多價的) 언술이란 이름으로 변주 확대되어 토의되고 있는 것의 핵심은 이 인유의 문제이다. 인용부호 없이 인용되어 중첩된 울림을 갖는 인유는 그것이 간결하고 짤막할 때 쉽게 인지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작자의 의식 여부와 관계없이 인유는 선행 작품과의 대조를 통해서 작품에 밀도를 더해주고 고도의 암시성을 부여한다.

반드시 인유가 아니더라도 특정 의상이나 동작이 겉보기와 달리 고도의 암시성을 획득하는 수가 있다. 시작품을 꼼꼼히 읽는다는 것은 이러한 고도의 암시성에 민감해지고 충실해진다는 것을 뜻한다. 또 옛 작품인 경우엔 당대에 대한 시사를 읽어내는 것도 특별히 중요하다. 1926년에 발표되어 당시의 젊은이들에게 애송되었던 「카페 프란스」는 시대에 대한 참조를 요구하는 작품이다. 서양 쪽 외래어가 빈번히 나오는데 얼마쯤 이례적이며 정지용의 초기 작품임을 시사한다. 서정시의 화자가 반드시 시인 자신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작품의 무대가 일본이고 작품이 시인의 일본 경험에 기초하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같은 무렵 시인은 「鴨川」 등 일본 교토를 무대로 한 시를 쓰고 있다. 실제 당시 교토에 <프란스>란 이름의 카폐가 있었다고 말하는 일본인이 있다.

전반부의 어조에는 까불이 장난기가 엿보인다. 15행 근처에서 어조의 변화가 일어나고 17행에서부터 슬픔의 감정이 앞으로 드러난다. 굳이 정의해 보자면 장난기가 완전히 배제되지 않은 비애감이 지배한다고 할 수 있다. 도입부에는 카페 프란스의 간결한 묘사가 보인다. 장명등이란 밤새 켜두는 등을 가리킨다(본래 우리 쪽에서는 처마 끝이나 마당 기둥에 매달아두었다). 이어서 카페로 가는 세 사람을 보여준다. <이놈>이 입은 루바쉬카는 블라우스 비슷한 러시아 남자의 상의이다. 역시 1920년대에 발표된 일본시인 나카노 시게하루(中野重治)의 「동경제국대학생」이란 시에 <안경/하오리/루바쉬카/단추 직경이 한치나 되는 외투가 있다>는 대목이 보인다. 사회주의 사상이 풍미하기 시작한 이 시절에 루바쉬카가 학생들 사이에서 유행한 것으로 보인다. <보헤미안 넥타이><삐쩍 마른 몸> 등 동행 청년들이 모두 가벼운 차림인 양 보인다.

불빛에 비치는 밤비를 <밤비는 뱀눈처럼 가는데>라고 한 것은 이미지스트로서의 일면을 지닌 정지용의 면목을 드러내고 있다. 당시로서는 참신한 직유라고 해야 할 것이다. <흐늙이는 불빛>의 <흐늙이는>은 다소 모호하나 <흐느적거리다>의 뜻인 <흐늑거리다>라면 가볍게 흔들린다는 뜻으로 읽어야 할 것 같다. 거기에 <흐느끼다>의 뜻이 첨가되어 있다고 보면 될 것이다. <비뚜른 능금><벌레먹은 장미><제비처럼 젖은 몸>은 서두에 나온 세 사람에게 각각 연결되는 이미지이다. 나라 잃은 젊은이들의 자조적인 자화상으로 읽으면 더욱 그럴싸해 보인다. <벌레먹은 장미>가 윌리엄 블레이크의 「병든 장미」를 딛고 서 있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정지용은 블레이크의 번역시 5편을 남겨놓고 있기도 하다.

오 장미여, 그대는 병들었도다!
밤중에 나는
보이지 않는 벌레가
울부짖는 폭풍 속에서
새빨간 기쁨
그대의 침상을 찾아냈도다
그리하여 어두운 몰래 사랑이
그대의 생명을 망치는도다

<병든 장미>라 하지 않고 <벌레먹은 장미>라고 한 것에도 우리 말에 충실하려고 한 시인의 지향이 엿보인다. <벌레먹은 장미>의 심장을 지닌 청년이 사랑을 않는 이라는 시사가 있든 없든 세 청년이 씩씩하고 늠름한 젊은이들이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제13행은 카페 초입께에 있는 앵무새에게 건네는 인사말이요 14행은 앵무새 쪽의 응답이다. 튤립이란 별명의 카페 아가씨가 졸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프란스는 손님이 끓는 곳은 못 되는 것 같다. 세 사람이 이곳 단골인지는 모르나 특별히 환영받는 처지도 아닌 것 같다. 이 언저리에서부터 어조가 변화하기 시작한다(그것이 튤립 아가씨든 누구든 반갑게 맞이하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과 관련되는 것인지 아닌지는 분명치 않다). <나는 자작의 아들도 아무것도 아니란다>고 화자는 독백한다. 명문가의 후예도 부잣집 아들도 아니라고 중얼거리는 것이다.

혹종의 내재적 분석은 여기서 중끝히 읽기의 끝내기를 할 것이다. 그러나 더 깊이 친착할 필요가 있다. 문학은 사회를 반영한다는 막연한 일반론은 어줍잖은 순환론으로 떨어지기 쉽다. 서정시에 기계적으로 적용하여 별 소득 없이 끝나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러나 텍스트의 문맥에 대한 충실은 텍스트를 낳은 사회적 맥락에 대한 고려를 당연히 요구한다.

왜 하필이면 <자작의 아들>인가? 우리는 그 의미를 새겨볼 필요가 있다. 조선총독부가 설치된 직후인 1910년 10월 7일 일본 정부는 조선인 77명에게 작위를 수여하였다(최고위 공작(公爵)은 배제되고 후작(候爵) 7명, 백작(伯爵) 3명, 자작 22명, 남작(男爵) 45명인바 작위와 별도로 2만 5천 원에서 50만 4천 원의 <합방은사금>이 지급되었다. 이완용은 백작이었으며 유길준 남작 등 8명은 작위를 거절 내지는 반납하였다). 이른바 합방에 협조했거나 필요하다고 생각한 인사에게 귀족의 지위와 함께 불로소득의 소비생활을 보장해 준 것이다. 이들 및 이들의 2세들이 현해탄 이쪽저쪽에서 유탕(遊蕩)생활에 탐닉하였고 특히 가난한 유학생들의 노여움을 샀으리라는 것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자작의 아들>이란 이런 조선인 난봉꾼들을 가리킨다(조선인 유학생이 일본 귀족의 아들과 자기를 비교해 본다는 것은 심리적으로 개연성이 적다). 공작이나 백작이 아니고 자작이란 하위 작위가 나오는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요즘 같으면 재벌의 아들 혹은 장군의 아들이라고 해야 할 터이다.

손을 의식한다는 것은 생활인으로서의 무력감을 자성하거나 재확인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횐 손은 <창백한 인텔리>의 그것으로 흔히 시가에 보이는 것이다. 김팔봉의 「백수의 탄식」도 그 한 사례라 할 것이다.

카페 의자에 걸터 앉아서
희고 흰 팔을 뽐내어가며
보나로드!라고 떠들고 있는
60년 전의 노서아 청년이 눈앞에 있다……

cafe chair Revolutionist,
너희들의 손이 너무도 희구나!

(중략)

너희들은 <白手>----

가고자 하는 농민들에게는
되지도 못한 <미각>이라고는
조금도 조금도 없다는 말이다.

cafe chair Revolutionist,
너희들의 손이 너무 희고나!

아아! 60년전의 옛날
노서아 청년의 <백수의 탄식>은
미각을 죽이고서 내려가 서고자 하던
전력을 다하던 전력을 다하던 탄식이었다.

아무것도 가진 바 없는 것을 뜻하는 <백수(白手)>가 흰 손의 뜻으로 쓰여 다의성(多義性)을 곁들이고 있는 것이 「백수의 탄식」의 묘미이다. 또 흰 손을 자탄하고 있는 「카폐 프란스」와 <너희들은 백수!>라고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 「백수의 탄식」은 정지용과 한때의 격정적 프로 문학인이었던 김팔봉의 입장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어쨌거나 루바쉬카를 걸친 창백한 인텔리는 한때 지식인들 사이에서 널리 읽혔던 19세기 러시아 소설 속에 되풀이 출몰하던 <잉여인간>의 계보를 떠올리게 한다(투르게네프의 루딘을 비롯해서 체호프의 작중인물에 이르기까지 그 모습은 다양하지만 김팔봉의 작품은 특히 「처녀지」의 네주다노프를 상기시킨다). <비뚜른 능금>의 머리를 얹고 있는 시의 화자가 사회 속에서 설 자리와 제자리를 갖지 못하는 <잉여인간>과 자신을 동일시한다는 것은 당연하고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비뚜른 능금> 청년이 <벌레먹은 장미> 청년과 함께 정상적이지 못한 불우 청년임은 말할 것도 없다. 이어서 계속되는 <나는 나라도 집도 없단다>는 문맥 속에서 너무나 자연스럽게 나오는 탄식이 된다.
사람 사이의 공감이나 대화가 두절되거나 여의치 못할 때 사람들은 동물에게 호소하여 슬픔이나 두려움을 초월하려 한다. 자식의 죽음이라는 기막힘을 하소연할 상대를 찾지 못한 마부가 말에게 호소하는, 가령 체호프의 「비탄」을 우리는 기억한다. 폭풍우 휘몰아치는 밤, 방 안의 개가 개이기를 그치는 투르게네프의 산문시 「개」는 인간 고독이 동물과의 교감을 완성하는 고전적 사례라 할 수 있다.

방 안에는 우리 둘---개와 나. 밖에서는 사나운 폭풍이 무섭게 울부짖고 있다.
개는 내 앞에 앉아서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고 있다.
나도 개를 바라보고 있다.
개는 무슨 말인가를 나에게 하고 싶어하는 눈치다. 개는 벙어리라 말을 모른다. 자기자신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나는 개의 심정을 이해한다.
나는 알고 있다---지금 이 순간, 개도 나도 똑같은 감정에 젖어 있다는 것을, 우리 둘 사이에는 어떠한 간격도 없다는 것을. 우리 둘은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 똑같이 전율에 떠는 불꽃이 자마다의 가슴 속에 불타며 빛나고 있다.
이윽고 죽음이 다가와서 이 불길을 향해 그 싸늘한 넓은 날개를 퍼득거리리라……
그렇게 되면 누가 알랴, 우리 저마다의 가슴속에 어떤 불길이 타고 있었던가를?
그렇다 지금 눈길을 교환하고 있는 것은 동물도 아니고 인간도 아니다……
서로 응시하고 있는 것은 동일한 한 쌍의 눈.
동물과 인간, 이 두 쌍의 어느 눈에도 동일한 생명이 서로를 의지하며 겁먹은 듯 다가서고 있는 것이다.

(김학수 옮김)

<이국종 강아지>에게 구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은 분명하다. 여기서 나라와 집과 가진 것 없는 식민지 출신 청년의 비애감은 절제된 채 완결을 보게 된다. 이 작품이 당대에 큰 호소력을 발휘하여 인구에 회자되고 정지용의 시인적 위치를 확고히 하는데 크게 기여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 작품의 시적 성취도는 거의 비슷한 시기에 씌어진 김팔봉의 「백수의 탄식」과 비교해 본다면 자명해진다.

요즘의 독자들이 정지용 당대의 독자들보다 이 시에 대해서 냉담함은 요즘 젊은이의 책임도 실수도 아니다. 풍화작용 70년을 견디어내지 못한다면 그것은 시의 책임이요 불찰이다. 그러나 시 독자들이 이행해야 할 최소한의 정독에도 인색하다는 것은 독자들의 불찰이요 무성의이다. 주체적 독자를 길러내지 못하는 문학교육의 전면적 실패가 배경이 되어 있음은 말할 것도 없다.

현대시가 어렵다는 불평이 많다. 이러한 불평의 발설자는 대체로 독시경험이 적은 사람들이다. <현대시가 어렵다>는 말 자체도 남의 흥내를 내어 말해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풍문과 소문에 놀아나며 지적 태만에 대한 자각증상이 없는 몰주체적 독자들의 트집이요 원망이요 자기변명이다. 이들은 대개 쉬운 동요나 동시에도 감식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그들이 알고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어려운 시와 쉬운 시가 있는 것은 아니다. 모든 시는 쉽다면 쉽고 어렵다면 어렵다. 「카페 프란스」는 난해시로 분류될 시가 결코 아니다. 그러나 그 이해는 소홀치 않은 독시경험을 요구한다. 쉬운 시와 어려운 시가 있다 하기보다도 좋은 시와 좋지 않은 시가 있다고 하는 편이 옳다. 경험이 중요하다고 하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지만 문학 이해에 있어서도 작품경험의 중요성은 막중하다.

문학작품도 피라미드와 같다. 선행 작품을 디디고 후대 작품이 올라서는 것이다. 높은 쪽의 벽돌일수록 수많은 아래쪽 벽돌을 디디고 서 있듯이 뒤에 온 작품일수록 의존하고 있는 선행 작품이 많은 법이다. 그 기초를 이루고 있는 것이 이른바 고전이라고 말할 수 있다.

대충대충 마무리짓고 건성으로 넘어가는 것이 우리 쪽의 부족한 점이다. 상품 제조에서부터 작품읽기에 이르기까지 널리 퍼져 있는 고쳐야 할 관행이다. 말에 대한 엄밀성은 언어동물인 인간이 가꾸어야 할 첫번째 기율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글자 한 자의 빠춤이나 더함이 전세계의 파멸을 의미할 수 있다>는 것은 『탈무드』에 보이는 말이다. 유태인의 지적 성취의 기초를 보는 듯한 감이 들지만 어쨌거나 시의 경우엔 신통히 들어맞는 금언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언어에 대한 엄격성은 자연 앞에서의 경건함과 마찬가지로 인간 품성의 도야와도 연관된다. 두려움을 모르는 방자한 사람들이 말을 함부로 쓰는 것이다. 말과 글은 사람이다. 그리고 시를 읽는 것은 말과 글과 사람을 아는 길이다. 단 하나의 길은 아니지만 하나의 중요하고 매력 있는 길인 것만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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