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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팔꽃과 새

운영자 2022.07.11 10:38:17
조회 107 추천 0 댓글 0

한여름 아침 이슬을 머금은 보랏빛의 나팔꽃을 보면 가슴이 시리다. 마음속까지 물들게 하는 아련한 보랏빛이 나를 유년시절로 데리고 가기 때문이다. 작은 일본식 목조 이층집의 손바닥만한 마당 한귀퉁이에 아버지는 해마다 나팔꽃을 심었다. 여름 새벽이 되면 빨강과 보라의 나팔꽃이 어렸던 나의 영혼에 깊이 새겨졌던 것 같다. 그 아련한 보랏빛은 칠십 고개를 넘긴 지금도 그대로 생생하게 살아있다.

보랏빛 나팔꽃을 보면 나는 새가 연상된다. 아버지는 삼십대부터 새에 미쳐 사는 사람이었다. 처음에는 식구들 눈치를 보면서 잉꼬부부 한 쌍을 가지고 들어와 입주시켰다. 잉꼬부부가 입주한 후 갑자기 새들의 가족이 좁은 우리 집으로 떼를 지어 쳐들어왔다. 십자매 부부가 오더니 문조부부, 카나리아 부부, 호금조 부부등 여러 종류의 새 가족들이 우리 집을 점령했다. 집이 숲속같이 새들의 노래소리로 가득 찼다. 높은 소리로 멀리 퍼져나갔다가 낮은 소리로 되돌아오는 카나리아의 노래 소리가 아름다웠다. 공짜로 밥을 얻어가 미안해 그렇게 노래를 부르는 것 같기도 했다. 그들의 팬이 된 아버지의 정성은 끔찍했다. 비싼 좁쌀을 사다 먹였다. 알을 잘 나으라고 칼슘섭취를 위해 갑오징어 뼈를 구해다 먹이기도 했다. 싱싱한 야채를 먹이기 위해 가을이면 배추를 사다가 신문지로 꽁꽁 쌌다가 겨우리면 풀어먹였다. 냉장고가 없던 시절 새들 야채의 보존법이었다. 새들의 세계도 냉정한 면이 있었다. 한번은 알에서 갓 깨어난 잉꼬 새끼가 에미에게서 내 팽개쳐진 채 바닥에서 버둥거리고 있는 걸 봤다. 한쪽 다리뼈가 구부러져 있었다. 장애가 있으면 버리는 것 같았다. 아버지와 나는 새빨간 살 밖에 없는 불쌍한 잉꼬새끼를 살리려고 고심했다. 새끼를 살릴 영양식을 만들었다. 계란 노른자에 좁쌀 으깬 것을 비벼 면봉에 묻혀 입가에 대 주었다. 잉꼬 새끼는 눈을 감은 채 정신없이 그걸 받아먹었다. 부드러운 솜으로 요를 만들어 따뜻한 아랫목에 놓아 주고 같이 잤다.

어느새 잉꼬새끼의 빨간 몸에서 연두색 털이 돋아나오기 시작했다. 이윽고 날개가 생겼다. 잉꼬 새끼는 푸드득 거리면서 조금씩 날기 시작했다. 작은 방의 공중을 한바퀴 도는 연습비행을 끝내고는 내 머리 위에 날아와 앉았다. 다시 한번 비행을 하고는 나의 어깨에 와서 착륙하고 나와 눈을 마주치기도 했다. 잉꼬 새끼가 당당한 성인이 됐다. 아버지는 짝을 지어 새들의 아파트인 새장 하나에 부부를 입주시켜 주었다. 성격상 말이 없는 아버지는 회사에 나가 밥을 버는 시간을 빼고는 새들과 함께 지냈다. 새들이 사는 아파트 하나하나를 관리하면서 새들 부부의 아픔과 즐거움을 세심하게 살폈다. 아예 어떤 때는 영혼이 새들의 세계로 넘어간 것 같기도 했다. 밖에서 아무리 문을 두들겨도 새들의 세상에 간 아버지의 귀에는 그 소리가 들리지 않는지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내가 키운 장애를 가진 새가 수많은 자손을 낳은 고조할아버지쯤 되어 일가를 이루고 있었다. 나는 가끔 좁은 방의 벽에 가득 차 있는 새장을 볼 때 감옥의 철창이 떠올랐다. 새들이 태어나면서부터 징역을 살고있는 것 같았다. 감옥 안에서 태어나서 그곳에서 자라고 죽어갔다.

새장 안이 그들의 일생이고 세상이었다. 가끔 실수로 먹이를 주고 나서 새장 문이 열린 채로 있는 경우가 있었다. 그 문 밖으로 나가 푸른 하늘로 비상하려는 집념을 가진 새를 본 기억이 없다. 그들 본래의 고향이 철사로 만든 새장이 아니라 숲인 것을 잊어버린 것 같았다. 매일 주는 먹이를 받아먹으면서 자기가 난다는 것을 망각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어쩌다 문을 빠져나가 총알같이 날아가는 새도 있었다. 그 새는 원초적인 자유를 얻은 것이다. 그런 새를 보면 생존할 수 있을지 걱정이었다. 십리를 날아가서 콩알 한쪽을 얻어먹고 다시 십리를 날아가 좁쌀 몇알을 찾아 먹을 수 있을까. 날개에 힘이 빠지면 편하게 밥을 얻어먹던 새장이 그리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었다. 세상에 나가 스스로 살 능력이 없는 새들을 석방시킬 수도 없었다. 조금만 경비가 소홀해도 귀신같이 그걸 알고 쥐들이 쳐들어 와 새들을 잔인하게 먹어 치우기도 했다. 아버지는 퇴직 후 변두리 도로가에 작은 새 가게를 열었다. 아버지와 나는 가게의 이름을 ‘파랑새집’이라고 했다. 아버지는 세상을 떠나기까지 노년을 새들과 함께 지냈다. 아버지의 임종이 하루쯤 남았을 때였다.

“아버지 새들은 어떻게 할까요?”

내가 물었다.

“잘 돌보겠다는 사람에게 그냥 줘”

아버지의 영혼은 어쩌면 지금도 그 새들이 인사하는 숲속을 거닐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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