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시인사이드 갤러리

갤러리 이슈박스, 최근방문 갤러리

갤러리 본문 영역

조선의 간지 연산군(1)

지랄 2006.12.09 18:06:31
조회 426 추천 0 댓글 0


연산군이 책읽기를 싫어한다? 여자만 밝혔다..솔직히 이것은 거짓말이야 조선왕중 여자 안밝힌 왕은 없었고.. 연산만큼 머리 좋은 임금도 없었지 열세살에  세자빈(世子嬪)을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젊은 궁녀들을  하루도 유인하지 않는 날이  없더 니, 열여섯살이 되었을 때에는  곽린(郭璘)의 딸이 미모였던 까닭에  그를 양원(良媛)이라하여 세자궁에 맞아들이기까지 했다 무오사화 연산군이 등극하던 해 삼월 십육일의 일이었다. 성종이 승하한지도 어느덧 삼개월이 흘러 연산군은 선릉(宣陵)에 써서 올릴 지문(誌文)을  읽어 보고 있었다. 지문을 얼마간 읽어 내려가다 보니 마침 그  지문속에 판봉상시사(判奉常寺事) 윤기무(尹起畝)라는 이름이 나오고  또 폐비에 관한  사실이 나왔다. 자기의 생모 윤씨가 궁중에서 쫓겨나게 된 것은 필경  사헌부(司憲府)나 사간원(司諫院)이나 홍문관(弘文館)의 유생들이 소위 칠거지악(七去之惡)이니 뭐니하는 유학의 이론으로 임금께 자꾸만  상소(上疏)질을하여 마침내는 부왕도 어쩔 수 없이 폐비시킨 것이 아닐까  하고 제멋대로 짐작을 했다.  이렇게 생각하자, 연산군은 유생들이 죽이고 싶도록 미워졌다. "이 씹새끼들... 어디 두고 보자.' 그때 유학자들은 대개  김종직(金宗直)이란 사람의 제자로,  대과(大科)에 급제하여 벼슬이 대간(大諫)에 이른 사람들이 많았다.  성종 때에 폐비 윤씨를 옹호한 사람도 그들이었고, 연산군을 가르친 이도 모두 유학자들이었다. 김종직은 조선 유학계(儒學界)의 사표(師表)로 비록 야인(野人)으로  있을 때에도 그의 일거일동은 당시 정치계에 큰 영향을 주어, 선왕 성종은 그를 일부러 서울로 불러 올려서 형조판서(刑曹判書)의 벼슬을 시킨  일까지 있었다. 유학자들은 공자(孔子)의 가르침을 따른다하여 모든 것을 중국에 의뢰하고 중국을 모방하기에 힘썼다.  특히 부모에게 효도하고 임금에게 충성을  다한다는 것이 그들의 중심 사상이었다. 만약 임금이 유학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일이 있을 때에는 죽음에  이를 지라도 기어이 그 일을 중지시키도록 하여야만 충성을 다하는  것이요, 임금이 듣지 않는다고 그만두어서는 충성이 아니라고 믿었다. 이때에 유자광(柳子光)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일찍이  세조대왕(世祖大王) 시절에 이시애(李施愛)를 정벌함으로써 강순(康純), 남이(南怡) 등 장수와 함께 나라에 혁혁한 공적을 남긴 사람이었다. 허나 후에 강순과 남이는 원훈(元勳)이 되고 유자광은  차훈(次勳)이 되었다. 유자광은 그 점에 불만을 품었다. 그때 사회제도는 첩의 아들 즉 서자(庶子)는 아무리 하늘에 올라가 별을  따는 재주가 있더라도 행세할  수가 없었다. 유자광은 바로 유규(柳規)라는 사람의 첩(妾)의 아들이었던 까닭에 차훈에라도 들게 된 것은 세조대왕이 그의 공이 크다하여 특별히 호의를 베푼 것이었다. 유자광은 은근히 남이를 시기하였다. 강순은 나이도 많고 군사에  대한 경험도 많은 소위 원로(元老)격인 만큼  원훈이 되더라도 나무랄 점이  없지만, 남이로 말하면 자기보다도 나이도 어리고 재주도 부족한데, 또는 이번 싸움에 자기의 활약으로 남이의 이름이 드러났는데 지위가 자기보다 위요, 상을 받는데도 자기보다 몇 갑절이나 더 많이 탔다는 것이었다. 더구나 남이가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승격하여 그 흥청대는 꼴을 유자광으로서는 눈이 아파 볼 수가  없었다.  유자광은 어디까지나 남이가 그렇게 된 것은 재주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의 문벌(門閥)이 좋아 출세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남이는 태종대왕(太宗大王)의 외손자요, 세조대왕을 도와 혁명에 공을  세운 권남(權擥)의 사위인 것이다. 당시의 사회제도로 남이에게는  유자광과 같은 서자(庶子)쯤은 사람으로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남이를 사랑하고 아껴주던 세조대왕이 돌아가고 예종(睿宗)이 임금이 되었다.  예종은 남이가 태종대왕의 외손자로 대궐 안에서 모두 떠받치는 사람이지마는 공주와 연애 사건이  있은 후로는 남이를 몹시  괘심하게 생각했다. 하루는 남이 장군이 대궐 안에서 숙직을 하는데 그날 밤  혜성(彗星)이 나타났다.  사람들은 모두 이것이 불길한 징조가 아닌가 하고 걱정을 하고있는데, 남이는 그것은 [除舊布新之象] 즉  옛 것을 없이 하고 새로운  일이 나타날 기상아라고 말했다.  옆방에서 이 말을 들은 유자광은 예종에게 달려 나아가 이번 혜성을 보고 남이가 한 말은 역모를 경영하는 사람의 말이라고 모함을 했다. 그렇지 않아도 남이를 좋게 여기지 않던 예종은 곧 남이를  잡아다가 극형을 내려 죽여버리니, 남이는 순전히 유자광의 고자질로 인하여  죽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세상 사람들은 유자광이 임금에게 고자질한 것이 나쁘다고 소인(小人)이라고 했다. 김종직도 유자광을 "치사한 새끼"라고 욕했다. 하루는 김종직이  함양군수(咸陽郡守)로 있을 때 동헌(東軒) 누마루에 유자광의 시(詩)가  현판에 걸려 있는 것을 보고, 내가 있는 동헌마루에 유자광이 같은 소인의  시를 걸 어둘 수 없다하여 그 현판을 당장에 떼어내려 불을 질러버린 일이 있었다. 나중에 그런 사실을 풍문으로 들은  유자광은 내심 크게 분개했으나  감히 김종직에게는 어찌할 도리가 없어서 속으로만 "흥, 어디 두고 보자!" 하고 앙심을 먹고 앙갚음의 기회가 오기만 기다렸다. 이때 김종직이가 가장 사랑하면 제자 김일손(金馹孫)이란 사람이  사관(史官)으로 있었다. 사관(史官)이란 곧 역사를 기록하는 사람, 즉  그날 그날 대궐에서 일어난 일이나 각 지방에서 일어난 일을 기록하는 벼슬을 말함인데, 지금 우리가 조선실록(朝鮮實錄)이니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니 하는, 그러한 종류의 역사책들이다.  따라서 사관들이 기록하는 사초(史草)는 어디까지나 사실 그대로 써야 하며, 또한 다른 사람이 이것을 함부로  볼 수 없고 임금도 자기 시대의 사초를 볼 수 없게 되어 있다. 성종이 승하하고 신왕 연산군이 들어 앉은지 얼마 아니하여 김일손은 사관을 사직하고 이극돈(李克墩)이란 사람이 성종 실록을 편찬할  사국당상(史局堂上)이 되었다. 이극돈이 사국당상이 되어 선왕 때의  사초를 읽어 보니, 그 사초  중에는 놀랍게도 이극돈 자신의 불미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는 대목이 있었다.  그 내용인즉 일찍이 이극돈이가 전라감사(全羅監司)로 있을 때에 정희왕후(貞喜王后) 즉 세조대왕비 윤씨가  세상을 떠났을 때 전국민이  경조(敬吊)의 뜻을 표하여야 할 터인데도 불구하고 특히 이극돈은  지방장관으로서 관기(官妓)를 불러 연락(宴樂)을 한 것은 풍교(風敎)에 매우  어그러지는 일이라는 내용이었다. 이극돈은 그 사초를 보고 크게 놀랐다. 만약 그 기록을 그대로  둔다면 오명(汚名)을 천추에 남기게 될 것이므로, 이극돈은 곧  김일손을 찾아가서, 사초에서 자기에 관한 대목을 좀 고쳐 줄 수 없는가 하고  간청하였다. 그 러나 강직한 김일손은 이극돈을 책망하여 "그대도 사관이 아닌가?  사관은 사실  그대로 쓰는 것이 직책이 아닌가?   그대가 사관이 아니라면 혹 그렇게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사관으로서 어떻게 한 번 사초에 씌어진 것을 고치라고 하는가?" 하고 단단히 타일렀다.   이극돈은 그의 위엄있는 말에 기가 질려 아무 말도 못하고 그 자리를 물러났으나 내심으로는 크게 분개하여 언제든지 김일손에게 복수를  하고야 말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이극돈은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본 결과 유자광이 김일손 등에게  깊은 원한을 품고 있음을 알고 마침내 유자광을 찾아갔다.  유자광도 일찍이 김종직에게 모욕을 당한 일이 있는지라  그의 제자인 김일손에게 평소의  원한을 풀어 볼 생각에서 이극돈과 함께 그들에게 복수할 방도를 강구했다. 유자광은 이극돈에게 "김일손 등에게 복수할 방도를 세우자면 내가 그 사초를 한 번 읽어봐야겠소." 하고 말했다. 원래 사초는 임금도 마음대로 못보는 것이다.  그런데 이극돈은  김일손에게 복수할 생각에만 눈이 어두어 유자광에게 사초를 보여 주었다. 유자광이 그 사초를 읽어본즉  세종대왕(世宗大王)에 대한 기록에서  세조(世祖)를 비방하는 대목이 많았다.  즉 세조가 한 번은 자기 아들 덕종(德宗)의 후궁(後宮)인 권씨를 불렀으나 권씨가 그 명령을 듣지  않았다는 것 이라든지, 또 후전곡(後殿曲)이라는 슬픈 노래를 듣고 세상일을 근심한 것이라든지, 황보인(皇甫仁), 김종서(金宗瑞)가 죽은 것을 사절(死節) 즉 절개를 위하여 죽었다든가, 또는 성종 때 일에 세종대왕의 여덟째 아들인 영응대군(永應大君) 부인 송씨(宋氏)가 군장사(窘長寺)에 가서 설법을  듣다가 시비(侍婢)들이 깊이 잠든 틈을 타서 학조(學祖)라는 중과 정을 통했다는 등등의 기록이 그것이다. 유자광은 이것을 보고 노기를 띠어 이대로 있을 수 없다하여 곧 노사신(盧思愼), 윤필상(尹弼商), 한치형(韓致亨) 등 중신들을 찾아 보고 "당신들은 세조대왕에게 사랑을 받은  중신들인 만큼 이러한 일이  있다는 것을 알고도 묵과 할 수 있을 것인가?" 하고 충동질을 했다. 이 말을 들은 중신들은 이것을 임금께 알린다면 당장 큰 사건이 벌어질 것을 뻔히 짐작하면서도 그러나 한편 알고도 잠자코 있으면 지정불고죄(知情不告罪)라는 중대한 죄과를 범하게 되는 것이므로 할 수 없이 임금께 고발하게 되었다. 연산군 사년 칠월 초하룻날 노사신, 윤필상, 한치형, 유자광  등은 차비문(差備門)으로 나아가 임금께 비밀한  일을 여쭙겠다고 청했다.  중신들이 임금에게 비밀한 일을 여쭈러 왔다는 소식을 듣고  도승지(都承旨) 신수근(愼守勤)이가 부랴부랴 마중을 나왔다. "대감들께서 어떻게 이렇게 함께 오셨습니까?" 도승지 신수근이가 묻자 유자광이 얼른 신수근의 귀에 입을 갖다대고 뭐라고 한동안 소곤거렸다. 도승지  신수근은 처음에는 건성으로 듣고  있다가 나중에는 연신 신이 나서 고개를 끄덕였다. 유자광이 속삭이는  내용은 이미 짐작할 수 있었다.  김일손을 비롯하여 선비들을 없애버리자는  유자광의 말에 신수근이가 신이 나서 고개를 끄덕이는데는 까닭이 있었다.   그 까닭은 이러하다. 도승지 신수근은 연산군의 비(妃) 신씨(愼氏)의 원척(遠戚)이었다.  그가 도승지로 임명될 때에 대간(臺諫)들은 만일 신수근이가 도승지가  되면 외척(外戚)이 권세를 휘두를 우려가 있다하여 그를 극력 반대했었다.   이런 관계로 신수근도 유신(儒臣)들인 대간들에게 앙심을 먹고 있었던 것이다. 신수근이 유자광의 속삭임을 듣고 앞장 서서 중신들을 곧 대궐  안으로 인도했다. 연산군은 유자광이가 늘어놓은 말을 듣고 노기가 충전했다. 그렇지 않아도 미웁기 짝이 없던 유생들이다. 가뜩이나 미웁던 판에,  사초에 세조대왕에게 대한 추문까지 기록하였다니 연산군의 노여움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연산군은 곧 의금부 경력(義禁府經歷) 홍사호(洪士灝), 도사(都師) 신극성(愼克成) 등을 경상도 청도(淸道)로 보내 김일손을 붙들어  오도록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칠월 십일일에는 김일손의 사초를 모두 대궐  안으로 가져오라고 분부를 내렸다. 이때 이극돈은 그것을 전부 드린다면 다음날 사관들이 역사적 사실을 바른 대로 쓸 사람이 없을 것이라하여 김일손이가 쓴 사초 중에서  왕실에 관계되는 부분만을 골라 대궐로 들여보냈다. 김일손이 억울하게도 큰칼을 쓰고 서울로 끌려 올라오자, 연산군은 김일손을 친히 국문(鞠問)할 생각으로 그를 수문당(修文堂) 앞으로  끌어내게 하였는데, 그 자리에는 노사신, 윤필상, 한치형, 유자광, 신수근  등과 주서(注書) 이희순(李希舜) 이외에는 아무도 참석하지 못하게 하였다. 뜰 아래 큰 칼을 쓰고 엎드려 있는 김일손을 보고 연산군은 큰  소리로 호령을 했다. "네가 성종대왕의 실록을 기록할 때에 어찌하여 세조 때의  일까지 기록하였는지 바른 대로 그 이유를 말하렸다!" 김일손은 이극돈이란 놈이 사초를 보고서 임금께 고자질을 한 것이라 깨달았다. 김일손은 고개를 들고 말했다. "역사를 기록할 때에 전왕(前王)의  사실도 기입하는 것은 옛날부터  있는 일입니다." 임금은 더욱 노기를 띠어 "그러면 세조대왕께서 예종의 후궁 권씨를 귀여워하고 사랑하였기  때문에 불러보려고 했으나 권씨가 듣지 않았다는 일은 네가 꾸며 가지고 세조대왕을 헐뜯으려고 한 것이 아니더냐?" 연산군의 국문에는 점점 살기가 감돌았다.  김일손은 "아니옵니다.  그것은 소신이 지어서 한 것이 아니라 권부인의 조카뻘  되는 허경(許磬)이란 사람한테서 들은 것입니다." 하고 대답했다. 연산군은 점점 대노하여 곧 허경이란 자를 붙들어다가 물어보았다. 허경은 김일손에게 그런 사실을 말한 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임금의 표정이 너무나 험악한 것을 보고 "소신은 그런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아마 김일손 대감이 정신이상이  생겨서 그런 소리를 하나봅니다." 하고 부인하면서 모든 죄를 김일손에게 씌여버렸다. 임금이 직접 여러 사람을 불러 며칠 동안 계속 심문하는 동안 하루는 유자광이 소매 속에서 책한 권을 꺼내어 연산군에게 보이면서 "이 책을 좀 보옵소서. 이 책은 김종직의 글이온데 이 책 하나만 가지고도 그들이 넉넉히 세조대왕을 조롱하여 불충(不忠)한 뜻을 품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고 말했다. 연산군이 받아보니 그것은 조의제(吊義帝)라고 쓴 글이었다. "조의제?  조의제란 말이 무슨 뜻이오?" 연산군이 유자광에게 물었다. "조의제라 하옵는 것은 옛날 한(漢)나라의 의제(義帝)가 항우(項羽)의  손에 시살(弑殺)된 것을 조상한다는 뜻으로, 김종직이가 그런 글을  쓰게 된 본뜻은 세조대왕을 항우에게 비유하고 의제는 단종(端宗)에 비하여 세조대왕께서 단종을 죽이시온 것을 직접 쓸 수가 없으니까 그렇게 돌려서 쓴 글이옵니다.  한 번 친히 읽어 보옵소서." 이 말을 듣자 연산군은 살기등등한 기세로 "읽어볼 필요도 없겠소.  이제 김종직, 김일손 등의 죄상이 분명히 드러났으니 그놈들을 어찌했으면 좋겠소?" 하고 좌우에 시립하고 있는 중신들을 돌아보며 물었다. 유자광은 연산군이 노한 기회를 이용하여 평소 원수처럼 여기던 김일손 등 유학자들을 일망타진할 생각에서 "김종직이나 김일손 등의 죄악은 무릇 신자(臣子)된 사람으로서는  불공대천지수(不共戴天之讐)로 여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이 무리들을 조사하여 모조리 없애버려야만 조정이  깨끗해질 것입니다.  만일 그렇게 안한다면 나머지 무리들이 암암리에 다시 일어나 화란(禍亂)을  일으킬 우려가 있습니다." 하고 임금에게 주장했다. 실로 무서운 주장이었다. 김종직과 김일손의 무리라면 삼사(三司)의  대간(臺諫)들을 비롯하여 조정 요직에 허다히 있다. 그들을 모조리  잡아 없애자는 것이니 그 자리에 참석했던 중신들은 모두가 놀랐다. 그러나 누구 하나 이의(異議)를 주장하는 사람은 없었다. 곧 임금의 명령이 내렸다. 세조대왕으로 말하면 국가 위급한 때를 당하여 간신들이  내란을 일으키려고 한 것을 미연에 방지하려고 역도逆徒)들을 박멸하고 종사(宗社)를 안정시켜 자손이 계승하여 오늘날에 이르렀는데, 김종직과 그  문도(門徒)들이 성덕(聖德)을 비방하고 김일손으로 하여금 사초에 무서(誣書)케  하였으니 그 죄는 대역(大逆)이라하여 부관참시(剖棺斬屍)의 형벌을 내렸다.  즉 부관참시란 그때 김종직이가 몇 해 전에 죽었기 때문에 무덤을 파서 그 시체가 들어 있는 관(棺)을 깨치고 시체의 허리를 베는 형벌이니  그것은 인생으로서 최대의 극형인 것이다. 칠월 이십육일에는 김일손  등의 죄를  정하였는데, 김일손,  권오복(權五福), 권경유(權景裕)는 대역죄로  능지처참(陵遲處斬)에 처하고,  이목(李穆), 허경 등은 참형에 처하고, 그 나머지 김종직의 제자, 친구 등은 형장 (刑杖)을 때려 먼 지방으로 귀양을 보냈다. 이로써 유학을 숭상하던 사람으로서 이번 혹화(酷禍)를 면한  사람은 별로 없을 정도였다. 이것을 무오사화(戊午士禍)라 한다 솔직히 무오사화는 연산군이 기획 감독한 작품이었다.. 서출,군부 출신의 유자광은 걍 들러리

추천 비추천

0

고정닉 0

0

원본 첨부파일 1

댓글 영역

전체 댓글 0
등록순정렬 기준선택
본문 보기

하단 갤러리 리스트 영역

왼쪽 컨텐츠 영역

갤러리 리스트 영역

갤러리 리스트
번호 제목 글쓴이 작성일 조회 추천
설문 힘들게 성공한 만큼 절대 논란 안 만들 것 같은 스타는? 운영자 24/06/10 - -
이슈 [디시人터뷰] 웃는 모습이 예쁜 누나, 아나운서 김나정 운영자 24/06/11 - -
86741 조선의 전성기 [15] ㅇㅇㅇ 06.12.12 943 0
86739 100년전쟁 지금같았다면 무슨 무기 가지구 싸웠을까? [4] 바람돌이 06.12.12 527 0
86732 미친 영국인? [3] 1 06.12.12 509 0
86731 분단책임은 남쪽에.. [3] 시파르타 06.12.12 254 0
86729 청과 준가르의 전쟁 3 왜 싸우게 되었나? [6] aafffffddd 06.12.12 758 0
86727 근현대사갤 분리신청좀 해야겠다... [7] 96 06.12.12 350 0
86726 구소련, 극비문서 한국에 넘겨.. 시파르타 06.12.12 330 0
86725 6.25당시 보도연맹, 양민학살 책임을 국군이 져야한다? [49] 전사모 06.12.12 608 0
86721 왕을죽인환관-최만생. [2] 루후나하 06.12.12 402 0
86719 민비가 잘한게 있나요? [4] 너는 누구냐? 06.12.12 451 0
86716 미국이나 러시아가 19세기 일본을 식민지화하지 않은이유는?? [46] 당신의 해피메이커 06.12.12 1098 0
86715 고대영국역사 간단정리 [5] ㅇㄹㄷ 06.12.12 471 0
86714 고구려땅 내놓으라고 쳐들어온 거란 [3] 지랄 06.12.12 556 0
86711 근 현대사 교과서 [9] 토르끼 06.12.12 351 0
86710 항우를 망하게 한 사나이 용저(?) [9] 스펀지송 06.12.12 649 0
86709 형들나 백제에대해 질문있어 [4] 써브백뻔 06.12.12 267 0
86701 형들ㅇ ㅣ것좀 필독해줘 유럽식민지사에 통달한 형들부탁 [55] 시계맨 06.12.12 579 0
86694 옛날 사람들이 과연 요즘사람보다 평균수명이 짧았을까"? [12] 5 06.12.11 617 0
86693 중국이 아메리카를 발견했다? [15] 1421 06.12.11 583 0
86692 시계기술의 발달 -4 [3] 시계맨 06.12.11 360 0
86691 여왕폐하의 즉위부터 현재까지 칼라 짤막영상 [6] 대영제국 06.12.11 419 0
86688 초나라 항우와 한나라 유방의 초한지 [3] 나ㅣ러 06.12.11 421 0
86687 오늘의역사 12월 11일 [2] 56 06.12.11 179 0
86686 주몽 작가놈 역사 제대로 왜곡하네. [3] 마광팔 06.12.11 847 0
86685 ~~~~~과거 시험이오~~ 다들 답하시오~(18금) [6] 06.12.11 376 0
86683 고고학과 다니는 사람들 봐봐염 [2] 123 06.12.11 252 0
86682 횽들, 묘청의 서경천도 운동에 대해서 질문 좀 할게. [5] 갤갤갤 06.12.11 337 0
86679 시계 기술의 발달 항해술의 발달 -3 [14] 시계맨 06.12.11 395 0
86678 야 너네 중에 일본사극 카가 100만석 본사람있냐? [6] 양념통닭 06.12.11 491 0
86677 급질문!!!!!!1 중국,일본,한국 등 19세기 이전 그림들 볼 수 있는 싸이트???/ [3] ㅁㅁㅁㅁㅁㅁ 06.12.11 322 0
86676 아시아에서 미국을 몰아냈으면 한다. [7] 중국 06.12.11 355 0
86673 15세기 대항해시대 출발의 근원 -2 [5] 시계맨 06.12.11 345 0
86670 15세기후반 대항해시대의 출발의 근원지 [3] 시계맨 06.12.11 326 0
86669 한국인들 정서는 공산주의가 맞아. ㅋㅋ 06.12.11 262 0
86667 한국은 좌익이고 우익이고 다 쓰레기.. [5] ㅋㅋ 06.12.11 238 0
86664 [잡담] 왠지 후삼국 시대의 갑옷은 멋져보였을거란 생각이 드는 사람? [6] 조선의곰객 06.12.11 607 0
86663 한국우익들은 참 이상한게 [11] 06.12.11 462 0
86660 조선시대 갑옷 [5] ㅇㄴㅇㄴ 06.12.11 566 0
86659 난 우리나라 사극이 이렇게 나왔으면 좋겠어. [18] 흐물흐물 06.12.11 685 0
86656 황제의 국가 고려? [3] 지랄 06.12.11 530 0
86653 아,진짜 사극의 소재는!!현재 사극들 진짜 쓰레기!! [2] 신기군사주무 06.12.11 379 0
86652 무덤속의 임경업 장군이 거품물고 쓰러질 그림 [4] ssg 06.12.11 698 1
86651 윤관의 9성의 위치는 확실히 어디에? [6] ssg 06.12.11 376 0
86650 다시 중국으로… 화교들 일자리 찾아 귀향 [6] 김민규 06.12.11 313 0
86649 역갤러 고수에게 부탁할께 있어-마가렛 대처에 대해 자세한 글좀 써줘 [1] -ㅅ- 06.12.11 174 0
86645 태왕사신기 까보자. [19] 미스트 06.12.11 709 0
86638 자비로운 황제 호해 [11] 지쟈쓰 06.12.11 618 0
86637 [v펌] 제갈량의 칠종칠금은 있었는가? [5] aafffffddd 06.12.11 511 0
86635 역사드라마 제대로 찍은거 봤냐? [8] 머병시나 06.12.11 415 0
86632 8.15 해방뒤 좌파들 말이야... [21] 카잠 06.12.11 363 0
갤러리 내부 검색
제목+내용게시물 정렬 옵션

오른쪽 컨텐츠 영역

실시간 베스트

1/8

뉴스

디시미디어

디시이슈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