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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산 즐텍스 시민으로서 이번 서울모터쇼를 맞아 기념으로

올드보이 2005.05.07 20:3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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쌔우는 "오토바이의 역사" 대략 자동차의 역사와 비슷하구려. 자동차는 1885년 독일 벤츠와 다이물러가 발명해 20세기들어 실용화되었는데 이것도 비슷한 시기에. 하긴 바퀴 두개 달린거나 네개 달린거나. 이번 모타쇼.........진짜 사람 엄청 많이 왔더구랴. 주차장 자동차들이 진짜 모타쇼..............지평선끝까지 늘어서 있으니. 사실 쭉빵쇼라고 해야 더 정확하려나. 레이싱걸들................. 내일 폐막하니 관심있음 오시옿. 우리 동네에..............푸헤헤........... 오토바이하면 떠오르는게 2차대전때 전차부댈 선도하는 오토바이 부대랑 최근 폭주족들............최근이라지만 쌍팔년도 시절부터 쥐알들이었으니. 일본에도 한때 미국 흉내내 폭주족들이 유행했는데...............웃기오. 미국처럼 땅도 안 넓으면서 무슨 괴상망측한 차림하고 폭주족 마피아들....... 최근 일본에선 사라진 모양이지만. 어쨌든 본햏의 서양 발명품 시리즌 끝도 없이 계속............뭐 한두가지야 말이쥐. ========================================================== 초기의 바이크는 동력원이 증기? 19세기 유럽과 미국 내에서는 증기 바이크를 만들고자 하는 여려가지 시도가 있었다. 하지만 그 시도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움직임을 쉽게 하기 위해 엔진과 증기시스템의 부피와 무게를 줄이고자 하는 노력들이 있어왔다. 그러나 실질적인 문제는 어떤 증기 시스템이 빠른 속도를 낼 수 있을 것 인가였다. 10내지 15마일마다 보일러 탱크에 물을 부어야 하는 것도 쉽지 않았고 매번 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비축하는 물을 운반하는 것도 문제였다. 경량의 증기 차를 만드는데 가장 많은 노력을 기울인 사람은 아마도 그 유명한 디온 백작일 것이다. 그는 초기의 페트롤(벤젠) 엔진 차를 처음 접했을 때 거기에서 미래를 보았던 것이다. 그후 계속되는 그의 성공은 증기와 함께 해왔다고 보면 된다. 증기는 내부 연소엔진인데 이 엔진은 상당한 기간동인 스스로 발전 정제되어갔다. 초기의 가스 엔진은 압축 스트로크가 아니었기에 거의 무용지물이었다. I.T.N(아이티엔) 레오니어의 1860년의 성공적인 엔진은 절반의 스트로크에서 가스와 공기를 끌어들이고 나서 점화가 된 후 이어서 팽창된다. 그 엔진은 더블 액팅이었다. 배출은 피스톤의 양 사이드에서 이루어졌다. 유도, 압축, 팽창, 그리고 배출의 4스트로크 사이클은 1862년 프랑스 철도 기술자 알폰스 베아우 데 로체스가 제안하고 1876년 독일의 니콜라스 오토 (데우츠 가스 엔진 작업장)가 최초로 시도해서 특허를 받았다. 최초의 모터 싸이클 아인스퍼 그리고 9년후 오토의 동료인 고티브 데임러와 파울 메이비치가 액체연료를 사용하는 바퀴 두개의 4스트로크 엔진을 시험했다. 그들은 이를 '아인스퍼'라 불렀다. 종종 세게 최초의 모터사이클이라 불리는 '아인스퍼'는 그 명성이 엔진으로만 알려진 경향이 있는데 사실 '아인스퍼'는 상당히 잘 고안된 것이며 그 당시에 꽤 실용적인 차량이었다. 데임러의 엔진은 놀라우리만치 적응을 잘했다. 270cc는 가볍고, 캐스트 알미늄 크랭크 케이스 안에 둘러싸인 플라이휠, 냉각 팬이 부착된 주철 실린더와 실린더 헤드로 일체 완비된 엔진이었다. 인렛 밸브는 자동적으로 열렸고 반면에 배출 밸브는 플라이휠 중 한 개의 페이스 내 캠트랙으로 부터 작동되었다. 벤젠(페트롤)연료는 캬브레이터안의 벤젠표면위로 공기를 통과시키면서 증발되었다. 발명자는 전기 점화에 대해 반신반의 하면서 벤젠연료 버너에 의해 외부로부터 열을 받은 플래티늄의 핫튜브를 사용했다. 그 엔진은 800rpm이라는 그때당시의 엄청난 속력을 냈고 1/2마력을 발산했다. 디온과 버튼의 싱글 실린더 엔진이 인기를 누렸다. 1885년 자동 엔진용으로 만들었던 유로페는 독일의 칼 벤츠와 영국의 에드워드 버틀러의 삼륜자동차(페트롤 엔진)와 같은 때에 출연했다. 이둘 중 버틀러의 삼륜자동차가 좀더 정교하게 개발되었다. 그러나 1896년에 이르러서야 철회되었던 억압적인 영국의 교통법규로 인해 상업적으로는 출하되지는 못했다. 버틀러의 엔진은 회전식 밸브와 일종의 초기 자석 발전기(실은 자석 발전기라기보다 정전기가 발생할 때의 에너지를 이용했다), 그리고 표면 증발이라기 보다 스프레이 캬브레이터로 맞취졌다. 데 디온,버튼회사의 알버트 데 디온백작과 그의 파트너 죠지 버튼도 어느 누구 못지 않게 초기 모터 싸이클에 대해 심도 깊은 활동을 했다. 1890년대 그들은 이륜보다는 페트롤(벤젠)의 삼륜 자동차에 집중했었다. 그러나 그들의 싱글 실린더 엔진은 이륜과 삼륜 둘다에게 적합했다. 1897년 디온과 버튼은 희망자 모두에게 이 엔진을 판매했다. 에에 따라 많은 실험가들이 엔진을 복제할 수 있게 되었고 --그 가운데 점차 발전의 형태를 띠어갔다-- 그 중 베라네르 형제들이 복제한 엔진이 성공적인 인기를 누렸다. 결과적으로 데 디온엔진이 복제된 것이다. --사람들이 알고 있건 알고 있지 않건 간에-- 그리고 전세계적으로 자격증을 소지한 사람들이 엔진을 제조하였다. 초창기 형태의 데 디온엔진은 보어 X 스트로크, 배기량이 70mm X 70mm 270cc였으나 곧 86mm X 86mm 500cc로 향상되었다. 이 데 디온의 뛰어난 시장공략으로 이것들이 1903년 영국의 새로 형성된 오토 사이클 클럽에서 선택된 것은 아주 의미있는 일이다. 이때 데 디온은 경쟁할 수 있는 표준 용량이 된 것이다. 그래서 후에 오늘날까지 500cc 모터레이스 GP경기가 있게 된 기틀이 되었다. 배터리와 코일점화 시스템은 점차 자석발전기로 바꿔갔고... 이엔진은 전적으로 전통적인 공냉식이며 자동 인넷 밸브, 표면 캬브레이터, 그리고 배터리와 코일 점화방식이다.그러나 정확한 공학과 그 시대의 다른 모든 엔진들과 비교해 판단하는 벤치 마크속에 새로운 기준이 새워졌다. 말할 필요도 없이 곧이어 많은 경쟁자들이 나타났는데 그 중 벨기에의 미네르바와 프랑스의 클레멘트가 가장 유명했다. 또한 발명가들은 기본적인 개념을 토대로 빠르게 향상해 나갔다. 1898년 초 영국에서 컨벤트리의 퍼시 릴레이(나중에 유명한 차 제작사가 된다)가 기계적으로 작동되는 인렛밸브를 만들었으며 또 오버랩 밸브 타이밍을 개발했다. 추진력에 이용되었던 스프레이 캬브레이터 중 최고는 1903년 영국 Amac이다. 사람들이 선호하지 않았던 배터리와 코일점화 시스템은 점차적으로 마그네트(자석발전기)로 바뀌어갔고 이 스스템은 영국의 프레드릭 심스와 스튜가르트의 로버트 보쉬의 합작으로 완성되었다. 처음엔 저전압 시스템이었다가 1902년에 회전식 전기자(電機子)의 고전압 시스템으로 저환되었다. (보쉬의 개발에 따라 고압 마그네토스는 사실상 독일 독점이 되었다. 이는 결국 1914년 세계 1차 대전발발에 있어 실제적인 어려움을 낳았다) 모토라도 - 1490cc 380rpm 그리고 2마력 초기 모터싸이클 개발은 실용적인 사람들 그전 엔지니어들보다 타고난 재능을 지닌 뛰어난 대장장이들의 직관력에서 벗어나자 아주 진보된 듯 보였다. 디자인이 상당히 진보화되긴 했지만 1894년 디자인된 힐데브란드와 울프멀러의 모터라드는 실패였다. 그러나 몇 년 후 코로넬 홀덴에 의해 디자인된 4실린더 모터 사이클은 인상적인 것이었다. 이 두 바이크는 뒷축에 곧바로 크랭크 액셀을 연결시켜 작동이 되었는데 이는 자연스럽게 엔진스피드와 플라이 휠 효과를 제한했다. 사실 모토라드는 1490cc 못지 않은 용량과 약 380rpm에 2마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대략 25mph 엔진의 스피드이다. 그러나 베르너 형제는 크기나 무게, 그리고 복잡함을 좀 거북스럽게 여겼다. 디자인은 획기적이었지만 판매는 부진했던 500cc 싱글 실린더 SV엔진 당시 다른 기술자들은 모터 사이클을 보고 나서 자신들이 좀더 좋은 것을 만들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일례로 1908년 제임스 사리클사의 TWB 배져리가 엔지니어 PL 레나우프에게 의뢰한 디자인은 그해 런던 모터 사이클쇼에서 대단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이차는 (Safty James)차선에 튜블러 샷시를 했고 센터 허브 스티어링, 스터브 엑셀 옆에 있는 쉽게 분리할 수 있는 바퀴, 그리고 안쪽이 확장된 앞, 뒤 브레이크를 가지고 있었다. 또한 이차는 제임스 자신이 만든 500cc 싱글 실린더 SV엔진과 엔진 풀리 클러치를 단 밸트 드라이브 구동방식의 차였는데 이차는 터무니없이 경쟁에 밀려 허물어져 버렸다. 그래서 제임스 회사는 전통적인 디자인으로 차의 모양을 급선회했다. 2가지 모델로 만들었는데 680cc 공냉식 4사이클의 윌킨슨 TAC와 나중에 나온 850cc 수냉식 TMC 모델 또한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1910년부터 12년까지 이차들은 상당히 진보적이고 화려한 설계를 제시했으나 판매는 이와 별개였다. 스코트의 파격적인 디자인은 최초로 킥스타터를 장치한 것. 이들의 디자인은 진보적인 것처럼 보였으나 실은 그렇지 않았다. 알프레드  스코트의 1909년 2스트로크 트윈은 스코트의 TT가 1912년, 1913년 성공을 거둔 후 시장성은 있었지만 그것이 그리 크지는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볼 때 궁금한 것은 스코트가 도대체 왜 팔렸나 하는 것이다. 시실 스코트는 그때까지만해도 잘 알려지지 않았던 2스트로크 엔진이었을 뿐만 아니라 트윈이었고 부분적으로 (곧 이어 전체적으로) 수냉식이었기 때문이었다. 3분할 된 스트레이트 튜브 프레임, 그리고 새들 튜브를 가지고 있는 실린더 리컬 퓨엘 탱크가 1909년 일반적인 모터사이클에 비해 꽤 이상해 보였던 것은 틀림없다. 라이더들은 클러치를 요구했다. 최초로 스타터를 달았던 스코트의 모양은 파격적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엔진이 출발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매력적인 두 개의 저기아로(사실 확장 클러치와 함께 중간축에 두 개의 스프로켓을 드라이빙한 두 개의 분리된 주요 체인으로 인해)그 기계는 빛을 발하지 못했다. 스코트는 킥스타트가 분리된 것 외엔 새로운게 없었다. 1904년부터 1909년사이 커다란 V트윈 삼륜차가 인기를 누렸던 때에 P & M 은 이러한 기어를 오랬동안 제공해왔다. 그코트가 그와 같은 모델을 만들었던 시기에 라이더들이 요구했던 것은 프리엔진이나 클러치였다. 1909년 리어허브에 멀티 플레이트 클러치를 장착했을 때 이는 트라이엄프사의 주요 판매포인트였다. 1907년에는 스프링 프론트 포크가 인기를 누리기 시작했다. 1903년 이래로 쿠아드란트가 그러한 프런트 포크를 생산해냈는데도 또다시 많은 독점적인 제품들이 나왔다. 그리고 렉스가 1906년 애래 이것들을 표준화 시켰다. 지금 보면 위험하기 짝이 없는 초기 오토바이 초기제품들은 현대인들의 눈에 위험하게 보일수도 있다. 실제로도 그랬다. 또다시 1909년 스코트가 텔레스코픽 액션을 취했던 다른 차보다 휠씬 좋은 디자인을 선보였다. 1906년 처음 등장해 유명해진 코일 스프링(영국 바이크 시장에서 거의 표준화되었고 계속 수정되었다)에 의해 조절되는 평행레버 액션과 유명한 드루이드 프론트 포크가 30년이상 한 패션으로 정착되었다. 스프링 프레임은 초창기 발명가들에게 주된 관심거리였다. 뭐 특별한 장점은 없었지만. 그런데  신기하게도 뱃, 재네트 그리고 한참뒤에 나온 에드먼드 같이 확실히 성공을 한 제품들은 실제로 스프링 프레임이 아니고 스프링 서브 프레임이었다. 새들과 풋레스트는 도로에서 오는 충격을 받지 않게 되어있었다. 밤에는 탈수 없는 오토바이 라이트가 문제였다. 어떤 경우라도 밤에 모터싸이클을 타는 사람들이 없었다. 그리고 라이트가 부착된 모터사이클은 거의 팔리지도 않았다. 처음에는 라이트에 사이클 오일램프가 사용되었다가 곧 스터디어 버전이 반들어졌다. 그러나 초창기에는 아세틸렌 가스 라이트가 유용됐었고 곧 표준화 되었다. 물론 지저분했고 상당히 주의가 필요했겠지만 상대적으로 싸고 쓸 만했다. 프론트 브레이크는 위험하다? 알프레드 스코트 같은 꼼꼼한 기술자조차도 브레이크는 프론트의 사이클 타입 스티어링보다 더 나은 것을 찾지 못했다. 그리고 드럼 안쪽의 슈베어링이 리어 체인 스프로켓 안에 있었다. 앞브레이크는 어느 경우에도 단지 몸을 피하는 것밖에 안되었다. 그것들이 페인트와 프론트 림 플래인딩을 손상시켰고 또한 프론트 프레미크가 위험하다는 생각 때문에 처음엔 사용되지 않았다. 이런 잘못된 믿음은 한동안 계속되었다. 1960년대 말 영국의 국제 여론조사에 따르면 모터사이클의 40%이상이 프론트 브레이크를 한번도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 다른 관심사는 기어를 바꾸는 것 기어를 바꾸는 것이 그 시대 발명가들에게 유리한 분야였다. 조정할 수 있는 풀리는 초기에 개발된 것이고 일반적으로 독점적인 아이템으로 팔렸다. 그러나 만족할 만한 것은 아니었다. 초기 라이더들은 그래서 밸트를 2개씩 가지고 다녔다. --고비율을 주기 위해 죄여진 풀리 플랜지를 가지고 레벨에 사용했다. 울퉁불퉁한 언덕을 올라갈 때 플리 플랜지는 따로 죄여지고 고정된 밸트보다 약간 짧아진다. 한번은 유명한 제니스 그라두어와 러지 멀티시스템이 이 아이디어를 확장했었다. 이는 드라이빙 풀리를 기계적으로 통제했다.그리고 제니스의 경우 사실 자동적으로 확장되고 축소되었다. 모터 사이클의 휠베이스는 밸트를 팽팽하게 유지시켜 주었다.러지 멀티의 리어풀리 플렌지는 엔진풀리의 이것들과 함게 조화를 이루면서 안팎으로 이동하였다. 아주 단순한 두 개의 스피드 에피사이클릭 기어--명백히 NSU--가 초기에 나타났다. 그리고 나서 리어 퍼브쪽으로 옮겨졌다. 그러한 3개의 스피드 암스트롱 허브가 1911 주니어 TT 이후 강하게 나타났다. 주니어 TT는 최초로 아일랜드의 맨섬에 마운틴 서킷을 오픈했고 그해 시니어 경주에서 1,2,3위를 차지한 인디언들이 중간축 기어박스를 사용했다. 그리고 그것은 매운 인생적이었다. 그러한 기어박스의 발전은 급속히 이루어졌고 그 기어박스는 트라이엄프 회사의 걸작인 레이트 베테랑(1914년부터 1918년 사이의 전쟁기간 동안 쓰였던 550cc 모델 H)에 장착된후 수퍼브 스터메이 아처 기어박스와 클러치에 사용되는 등 광범위하게 쓰였다. 사이드 밸브 엔진이 명성을 떨쳤다. 그긴간동은 사이드 밸브엔진은 절대적인 명성을 떨쳤다. OHV(오버 해드 벨브)형태가 레이싱용으로 가끔 등장했었지만 큰 위세를 떨치지는 못했다. 전반적으로 밸브의 이론적인 장점은 실제보다 뚜렸했다. 밸브가 끊기는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OHV형태에 대한 불신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 레이싱 피스톤을 강철로 아주 정성을 들였다 하더라도 피스톤은 주철이 주종을 이뤘다. 볼과 롤러 베어링이 일상화되었으나 (특히 레이스에서) 형광체의 청동 부시가 여전히 널리 사용되었다. 이것들은 거의 오일을 크랭크 케이스 안으로 전달하는 단순한 수작용 펌프에 의존하고 있다. 1903년 설립된 중요한 두 개 회사인 JAP와 프리시즌은 영국이 관여하기 전까지는 엔진부분에서 우위를 점해왔다.그 후 두회사는 1910년까지 엔진을 제작하지 않았지만 그들의 제품은 급속도로 명성을 얻었다.  볼보 햄프튼의 스티븐 형제가 350cc AJS모터사이클을 만들어내 그것이 정착하기 전에는 다양한 엔진이 만들어졌다. 반면에 오랫동안 잊혀져 있던 달톤과 와이드. 블럼펠드 그리고 다른 여러 사람들이 이 시장에서 경쟁을 했었다. 제네바의 모토사코세에서 수입된 엔진인 MAG도 오랫동안 우위를 지켰었다. '롱 스트로크'엔진은 사람들 사이에 인식이 잘못되는 바람에 널리 사랑받지 못했다. 그 시대가 끝나갈 즘 작은 용량의 V트윈이 인기를 얻었다. 그리고 경쟁력도 있었다. 완벽에 가깝게 재등장한 250cc 경량 --250cc-- 종류는 1914년 전까지는 거의 볼 수 없었다. 1900년에는 발붙일 곳을 찾느라 무던히도 애를 썼던 모터라이스트 바이시클이라는 연약한 기계가 더 튼튼해지고 강력한 모터사이클이 되어 나타났다. 이 기계는 당시 언론에 의해 "거의 완벽에 가깝다."라는 찬사를 받았을 정도였는데 이런 칭찬은 비웃음을 불러 일으켰으나 14년 내지 15년을 돌아본다면 그 비웃음에 대해 사과를 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일 것이다. 모터 사이클은 참으로 오랫동안 이어져 왔다. 그리고 완벽을 향한 끊임없는 노력들도 심도 깊게 이루어지고 있다. 내용출처 : http://infocom.chonan.ac.kr/~kinkin/datas/his_1.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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