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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글 모음] 명나라 군대 2

333111222 2007.01.07 15:3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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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의 군제 변천   명사(明史)에는 병지(兵志) 4편이 있는데, 이것을 읽고 군제와 관련된 부분만 나름대로 정리한 겁니다. 위소제(衛所制) 명의 기본적인 군제로 1개 군(郡)을 소(所), 여러 군을 합쳐 1개 위(衛)로 편성합니다. 위의 병력 규모는 5천 6백 명, 천호소가 1천 1백 2십 명, 백호소가 1백 2십명입니다. 이들을 모두 합쳐 5개의 군(軍)으로 나누고, 5군도독부가 이를 통제합니다. 이 5개의 군은 각각의 군마다 이른바 지금의 수도권 부대에 해당하는 위와 각 지방의 위로 크게 구분합니다. 지방의 위는 다시 각 성(省)의 도사(都司)에게 예속됩니다. 이 5군과 달리 황제의 친위대인 상12위(上十二衛)가 따로 있으며, 유명한 금의위(錦衣衛)도 이 12개의 위에 속합니다. 홍무제 때 통계에 의하면 전국의 도사가 17개, 유수사(留守司) 1개, 위가 329개, 수어(守禦)천호소가 65개라고 합니다. 삼대영(三大營) 이름 그대로 5군(五軍), 삼천(三千), 신기(神機)라는 3개의 주요부대를 말하는 것인데, 이들이 중앙상비군의 핵심입니다. (5군은 앞의 5군도독부와는 다른 것입니다.) 원래 홍무제때 48개의 위가 남경에 있었고, 이를 영락제가 다시 72개로 늘렸으며, 이것을 보병과 기병에 따라 중군(中軍), 좌액(掖), 우액, 좌초(硝), 우초의 다섯으로 나눈 것이 5군입니다. 중도(中都), 산동(山東), 하남(河南), 대령(大寧) 지역의 병사들이 해마다 번을 나눠서 담당합니다. 삼천영은 변방지역에서 항복한 장정 삼천명을 가지고 기병부대를 만든데서 유래합니다. 신기영은 남쪽의 교지(交?)지역을 정벌하면서 얻은 화기운용법을 가지고 만든 화기부대입니다. 또한 5군은 진법, 삼천은 순찰, 신기는 화기를 훈련하는데 각자 다른 영의 훈련을 감독하기도 합니다. 단영제(團營制) 이것은 정통제가 지휘하던 50만 대군이 토목보의 변으로 전멸하자 병부상서 우겸(于謙)이 북경의 방어를 위해 도입한 제도입니다, 우겸은 북경에 남아있던 삼대영의 병사를 시험해서 10만 명을 선발해 10개의 영으로 편성합니다. 즉, 보병, 기병, 화기의 세가지 병과를 10개의 영에 분산 배치 시킨겁니다. 각 영에는 도독 1명, 호두관 1명, 도지휘 2명, 파총 10명, 영대 1백 명, 관대 2백 명을 두었습니다. 또한 삼대영의 도독중 1명을 총병관으로 임명하고, 내신(內臣 환관)이 감독하며, 병부상서나 도어사 1명이 제독을 맡도록 합니다. 또한 선발하고 남은 병사들을 원래 소속된 삼대영으로 돌려보내자 사람들은 그 영들을 '노인들의 집'(老家)으로 불렀다고 합니다. 즉 기존 삼대영은 쓸모없는 병사들만 남았다는 뜻이죠. 이들을 북경의 아홉 성문에 배치하고 우겸도 덕승문(德勝門)의 병력을 직접 지휘해서 결국 북경의 수비는 성공합니다. 그러나 잡혀갔다가 돌아와 상황으로 물러난 정통제가 경태제가 죽고 나서 다시 복위하면서 우겸을 죽이고 단영제도 폐지됩니다. (나중에 정통제는 우겸을 죽인 것을 후회합니다.) 다음에 성화제가 즉위해서 재건과 폐지를 반복하는데, 또다시 4무(武), 4용(勇), 4위(威)의 12영을 만들어 12명의 후(侯)가 지휘하고 각각 도지휘가 보좌하며, 역시 환관이 감독, 훈신(勳臣)이 제독을 맡습니다. 선발하고 남은 병력은 각종 공역(供役)을 시킵니다. 병력의 규모는 7만 5천여 명. 그러나 이때 실질적으로는 환관인 왕직(汪直)이 제독이 되어 군대를 모두 장악합니다. 일찌기 영락제가 자신이 신임하던 환관에게 군대를 감독하도록 한 것이 드디어 환관이 권력을 장악하는 폐단을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이어서 홍치제가 즉위하자 도어사 마문승이 제독에 임명됩니다. 그는 성화제 말기부터 군대가 공사에 동원된 것을 그만두게 청하지만 허락되지 않습니다. 또한 각 영마다 보, 기병 2천명을 선발해 돌발사태에 대비하고, 5일간 훈련하는 옛 제도를 복구시키자는 그의 건의는 채택됩니다. 양관청제(兩官廳制) 자잘한 것을 건너뛰어서 드디어 무종(武宗)의 묘호를 받은 정덕제가 즉위합니다. 당시 통계로는 12영의 쓸만한 군사가 6만 5백여 명, 노약자가 2만 5천여 명이었습니다. 당시에 환관 장영(張永)이 경군(京軍)을 지휘해서 반란사건을 처리하면서 다시 환관들이 군대를 장악합니다. 그때 마침 도적떼가 생기자 변방지휘관인 강빈(江彬)등이 기회로 여기고 변방의 기병으로 4위(衛)의 부대를 편성해 북경에 두게 합니다. 이들의 이름을 외4가(外四家)라고 부릅니다. 이때 기존의 12위와 새로 창설한 4위의 선발한 병력을 서관청(西官廳)에서, 정덕 원년에 소(所)에서 선발한 관군(官軍)을 동관청(東官廳)에서 훈련시키는 이른바 양관청(兩官廳) 제를 도입합니다. 이때부터 과거 삼대영처럼 12영이 다시 '늙은이의 집'으로 불립니다. 이때에도 병사를 각종 공사에 동원하는 폐단이 심해서 경영(京營)의 기반이 계속 무너집니다. 당시 급사중(給事中) 왕양좌(王良佐)가 명령을 받고 군적(軍籍)을 조사하니 장부상의 기록은 38만 명이지만, 실제는 14만여 명, 그 중에 쓸만한 병력은 2만여 명에 불과합니다. 다시 건너뛰어 세종 가정제가 즉위합니다. 이때 병력의 정원은 10만 7천 여명이지만, 실제로는 그 절반도 미치지 못합니다. 그러자 병부상서 이승훈(李承勳)의 건의로 병부와 상의해서 노약자를 제외시키고 장정으로 대체해서 12만 명을 다 채우게 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공사는 점점 많아지는데다가, 관리들이 뇌물을 받고 소위 빽 있는 사람 대신에 가난하고 약한 사람을 대신 채워넣습니다. 갑자기 변방에서 경고가 전해지자 각 영을 점검하니 겨우 기병 3만을 뽑아 이를 다시 동,서관청으로 부릅니다. 가정 29년에 알탄(명사에는 엄답(俺答))이 침공하자 병부상서가 각 영을 점검하니 불과 5,6만 명에 불과하고, 이들을 이끌고 가는 도중에 전부 도망가 버려서 결국 병부상서가 처형당합니다. 결국 여러 신하들의 건의로 12영, 양관청제 모두 폐지하고 다시 삼대영 체제로 바꾸고, 다만 삼천영은 신추(神樞)영으로 이름을 바꿉니다. 병력은 5군이 6만여명, 신추와 신기영이 각각 4만 명인데 이 4만명은 북경 인근의 여러 성(省)에서 추가로 모집한 병력을 합한 것입니다. 오군은 대장 한 사람 부장 2명, 좌,우,전,후의 참장(參將) 4명, 유격(游擊) 4명으로 구성되고, 신추, 신기 2영은 각각 부장 2명, 좌격(佐擊) 6명이 지휘합니다. 그 외에도 북경주변의 각 위를 삼대영에 배속시킵니다. 그 후에도 숭정제까지 여러 잡다한 것들이 바뀌지만 별로 중요한 것은 없어서 이만 줄일까 합니다. ...... 명사(明史)를 시간이 있을때마다 부족한 한문 실력으로 대충 훝었는데, 해석이 틀린 것도 많지 않을까 싶습니다. 열전 중에 장거정이나 척계광 등은 대충 보았는데, 장거정은 환관인 풍보와 결탁한 것으로 나오더군요. 그의 사후에 만력제가 벼슬을 깎아내린 것도 바로 이 풍보와 연관된 것이 문제가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척계광이 몽골족에 맞서 북방경비를 담당한 부대를 훈련시킬 당시 지역특성에 맞는 소규모로 구성된 비슷한 단위부대를 창설했으며 동시에 만리장성을 보강하고 강화하는 공사도 진행했다. 척계광은 마차에 대포를 탑재해서 방어를 겸비한 이동요새로 만들어  북부초원의 기병들이 활동하는 지역에서  효과적으로 운용한적이 있는 또다른 장수 유대유가 발명한 전술도 자신의 부대에 도입한다.               척계광이 지휘하는 10만 군대는 대부분 강철 갑주와 투구로 무장했으며, 크게 4개 부대로 나누어졌다. 1) 전투용 마차부대 2) 보급용 물자를 담당한 마차부대 3) 보병부대 4)기병부대           -------------------------------------------------------------------------------------------------------------------------------- 전투용 마차부대와 보급담당 마차부대는 모두 중포와 소형포로 무장했다.(당시 중국인들은 포르투갈제 후장포를 본따서 만든 대포를 사용했다.) 전투용 마차부대와 보급 마차부대에는 화기를 지니지 않은 '특공대"가 포함되었으며 이들은 마차를 커다란 이동 방벽처럼 사용했다. 특공대는 8명으로 구성된다. A) 장도와 (일본 왜구들이 사용하던 노다치를 본따서 만들어진 1.95미터길이의 대형 양손검) 조총으로 무장한 병사 4명 B) 등패와 만곡도를 휴대한 병사 2명 (전투마차 부대에 소속된 병사는 화전을 휴대했으며, 보급부대 소속의 병사는 조총을 휴대했다.) C) 당파와 함께 '화전"으로 무장한 병사 2명 (로켓 추진식 화살을 사용한다.) -------------------------------------------------------------------------------------------------------------------------------- 적과 마주치게 되면 마차들은 직사각형 대열로 진형을 갖추고 모든 각개병사들은 마차를 방호벽으로 삼아 몸을 숨긴 후 전투를 시작한다. 먼저 원거리에 있는 몽골족에게 대포와 조총을 발사하고 그다음 화전을 쏘아댄 후 특공대는 발사무기의 엄호를 받으면서 마차 방벽밖으로 나와서 대열을 갖춘 후 장도와 만곡도, 등패와 함께 당파를 사용해서 근접 백병전을 벌인다. 보병부대의 경우 조총수와 "근접 백병전용 부대"가 동일하게 편성된 2개 부대로 나누어진다.(척계광은 근접전 전문병사들을  살수 -殺手 - 라고 불렀다.) 각 단위부대의 병력은 보통 10명으로 구성된다. 조총수는 모두 장도를 부무장으로 휴대했으며, 살수들의 무장은 아래와 같이 나누어진다. 1) 만곡도와 등패 2) 낭선(부무장으로 한손용 만곡도를 휴대) 3) 당파 (부무장으로 "화전'을 휴대) 4) 장창(부무장으로 활과 화살을 휴대) 5) 미늘창 - 강철로 된 작은 양날이 붙어있는 무거운 창(부무장으로 합성궁과 화살을 휴대) -------------------------------------------------------------------------------------------------------------------------------- 기병대는 3개 부대로 나누어진다; 좌익, 중간, 우익. 좌익과 우익의 예하 단위부대는 아래와 같은 무기를 갖춘 병사 10명씩으로 구성되어 있다. 1) 장도(조총도 휴대함) 2) 위쪽에 총신을 올려놓은 도끼 - 원나라부터 명나라 초기까지 사용된 화기로 총을 쏘고나면 병사는 도끼를 사용해 백병전을 벌일 수 있다.   3) 당파(화전도 휴대) 4) 미늘창(합성궁과 화살을 휴대) -------------------------------------------------------------------------------------------------------------------------------- 중앙을 담당한 기병대는 대부분 경기병으로 구성되었으며 이에 적합한 장비로 무장했다. 중앙부대는 대대급 전투력을 갖춘 3개 중대로 포함되었으며 그 중 1개 중대는(역시 최소 단위부대 병력은 10명이었다.)아래와 같은 무기들로 무장했다. 1) 장도를 휴대한 병사 8명 (부무장으로 조총 휴대) 2) 당파를 휴대한 병사 2명 (부무장으로 화전을 휴대) -------------------------------------------------------------------------------------------------------------------------------- 나머지 2개 중대는 아래와 같이 무장했다. 1) 한손으로 쓰는 만곡도로 무장한 병사 4명 (부무장으로 합성궁과 화살 휴대) 2) 적 기마병을 끌어내릴 수 있도록 창날 양쪽에 갈고리가 달린 창으로 무장한 병사 4명 (부무장으로 합성궁과 화살 휴대) 3) 당파로 무장한 병사 2명 (부무장으로 화전을 휴대) 1. 우왕좌왕하는 원정군 15세기, 명 제국과의 교역은 막대한 부를 낳았기 때문에, 몽골 고원의 패자인 오이라트 부(몽골 부족 중의 하나)의 에센은 명에 교역을 확대해 줄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정통(正統) 14년(1449년) 여름, 무역 교섭이 결렬되자 에센은 지배하에 있는 몽골 각 부족의 병마를 동원하였고, 4개의 경로를 통하여 남하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대하여 명은 서녕후 송영(宋瑛)을 대동병마총독으로 임명하고, 증원군으로서 평향백 진회(陳懷), 부마도위 정원(井源)이 이끄는 3만 명의 병력을 대동(大同, 산서성 대동시)으로, 도독 왕귀(王貴), 오극근(吳克勤)이 이끄는 1만 5천명의 병력을 선부(宣府)로 파견하였다. 침공을 알리는 보고가 잇따르자, 명의 최고 실력자였던 사례태감(환관) 왕진(王振)은 정통제(正統帝, 朱祁鎭)에게 친정을 행할 것을 건의하였다. 병부상서 광야(鄺埜), 이부상서 왕직(王直) 등은 위험이 큰 친정을 중지할 것을 강하게 간언하였지만, 황제는 왕진의 의견에 따라 친정을 행할 것을 결정하였다. 친정을 위하여 50만 명이라고 일컬어지는 대군이 편성되었다. 왕진은 대군으로 위협하면 싸우는 일 없이 에센을 제압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에센 자신이 이끄는 오이라트의 주력은 대동을 목표로 하고 있었고, 그 선봉대는 묘아장(猫兒庄)에서 참장 오호(吳浩)를 패사시켰다. 패전 소식을 들은 서녕후 송영은, 무진백 주 면(朱冕), 참장 석향(石享)과 함께 양화구(陽和口, 산서성 양고북)에서 에센의 군대와 맞서 싸웠다. 7월 15일, 명군은 군대를 감독하는 태감 곽경(郭敬)의 잘못된 지휘로 인해 대패하여, 송영, 주면은 전사하고 전 군이 거의 전멸하였다. 양화에서의 대패 소식을 듣고서도 왕진은 친정을 강행하였고, 7월 16일에 다수의 대신 및 차관 급의 고위 관료들을 포함하는 대군이 북경을 출발하였다. 종군하고 있던 병부상서 광야, 호부상서 왕좌(王左)는 원정을 중단할 것을 거듭 요청하였지만, 왕진은 이들의 의견을 듣지 않은 채 이들을 처벌하였다. 28일 원정군은 선부를 지나 양화에 도달하였다. 그 곳에서 왕진 이하의 장병들이 본 것은, 명군의 시체가 들판을 가득 뒤덮고 있는 광경이었다. 적군이 얼마나 무시무시한지를 알고서 겁에 질린 왕진은, 장성을 넘지 않은 채 서쪽으로 이동하여 대동으로 들어간 뒤, 북경으로 귀환하기로 결정하였다. 철수 경로에 대한 최초의 안은 적에게 추격당하기 전에 가능한 한 빨리 철수하기 위해, 울주(蔚州)에서 자형관(紫荊關)을 경유하여 북경으로 들어간다는 것이었다. 왕진의 고향이 울주였으므로, 왕진은 황제를 자택으로 불러들여 자신의 권세를 과시하기 위해 처음에는 이 안에 찬성하였다. 하지만 고향의 한 해 수확이 대군의 행군에 의해 짓밟힐 것을 두려워한 왕진은, 철수 경로를 선부에서 거용관(居庸關)을 경유하여 북경으로 돌아간다는 것으로 변경하고 말았다. 2. 토목보의 변 8월 10일에 명군이 선부에 도착할 무렵, 에센의 군대는 명군의 후미를 쫓아가기 시작하였다. 이에 대해 명에서는 몽골 출신의 용장인 공순백 오극충(吳克忠), 도독 오극근(吳克勤) 형제를 파견하여 후위 부대로 삼았다. 오씨 형제는 분전하였지만, 에센의 군대를 격퇴하지 못한 채 전사하고 말았다. 게다가 기병 5만 명을 이끌고 후위 부대를 증원하러 가고 있었던 성국공 주용(朱勇), 영순백 설수(薛綬, 몽골 출신의 용장)의 군대는, 주용이 무모하게도 경솔히 진격하였기 때문에, 에센이 요아령(鷂兒嶺)에 배치시켜 둔 복병의 공격을 받아 전멸하고 말았다. 14일, 황제 일행은 토목보(土木堡, 하북성 회래 서북쪽 약 10Km 지점)로 들어갔다. 주력을 회래성(懷來城)에 배치하여 오이라트의 진격을 차단한다는 것이 명의 작전이었지만, 왕진은 치중(輜重) 천여 대가 아직 도착하지 않은 점을 이유로 들어 토목보에 머무르면서 치중을 기다리기로 결정하였다. 광야는 황제 일행을 안전한 거용관으로 먼저 보내는 안을 주장하였지만, 왕진은 「썩은 유학자가 어찌 군대의 일을 말하는가! 두 번 다시 허튼 소리를 하는 자는 사형에 처할 것이다!」라고 노성을 지르면서, 토목보 주둔을 강행하였다. 토목보에 군대를 주둔시킨 것은 완전한 실수였다. 명군은 그 곳에서 오이라트 군에 의해 느슨하게 포위당하고 말았다. 게다가 토목보에는 대군을 먹일 수 있을 만큼의 물이 없어서 우물을 6m 가까이 팠는데도 물이 나오지 않았고, 남쪽으로 8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강은 이미 오이라트에 의해 제압되어, 명군은 갈증으로 고생하게 되었다. 15일, 에센은 사자를 파견하여 강화를 요청하였다. 명에서는 즉시 강화를 허가한다는 답서를 사자에게 주었다. 화평이 성립된 것으로 오해한 왕진은 전진 명령을 내렸지만 갈증과 피로에 지친 군대를 통제할 수 없게 되었고, 대군은 대열을 흐트러뜨린 채 물을 찾아 이동하기 시작하였다. 채 2Km도 가지 못하였을 때 몽골 기병들이 나타나서 「갑옷을 벗고 무기를 버리는 자는 죽이지 않는다」라고 외치며 사방에서 습격을 가하였다. 명군은 조직적인 저항을 할 수 없었고, 저항하는 자는 화살에 맞아 고슴도치처럼 되어 죽었다. 황제는 친정군을 이끌고 포위망을 돌파하고자 하였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였고, 말에서 내려 혼자 땅바닥 위에 앉은 채 포로가 되고 말았다. 왕진은 「썩은 유학자」만큼의 군사적인 식견도 없다는 점을 증명하고서 혼란 중에 죽게 되었다. 명군의 장병의 사상자는 수십 만 명에 달하였고, 고위 관료로서 사망한 자는 영국공 장보(張輔)를 필두로 하여 50명 이상에 달하였으며, 50만 대군은 소멸해 버렸다. 명군의 패인은 군사적인 재능이 없는 왕진이 총지휘를 맡아서 잘못된 작전 행동을 반복하였다는 점에 있었다. 당시 황제를 수행하고 있던 고위 관료 중의 한 명인 영국공 장보는, 비록 고령이었지만 당시 최고의 명장으로서 누구나 인정하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장보는 예전부터 왕진에게 복종하지 않았고, 왕진은 그에게 지휘를 맡기는 건 고사하고 작전에도 전혀 참가시켜 주지 않았다. 또 하나의 패인은, 명군이 화기를 비밀 병기로 간주하여 병사들에게 화기 훈련을 충분히 시키지 않았다는 점에 있었다. 토목보에서는 화기가 효과적으로 사용되지 않았고, 대량의 대포, 총, 화전(火箭)이 제대로 쓰이지도 않은 채 버려졌던 것이다. 3. 북경의 혼란 토목보에서의 패배 소식이 전해지자 북경의 명 정부는 커다란 충격을 받았고, 오이라트의 대대적인 침공을 두려워한 나머지 남경으로의 천도를 주장하는 자까지 나왔다. 이 때 「남천(南遷, 남경으로의 천도)을 말하는 자는 목을 벨 것이다. 경사(京師, 북경)는 천하의 근본이니 한 번 옮기게 되면 대사를 그르치게 된다」라고 말하면서 북경을 사수할 것을 강하게 주장한 이가, 바로 병부시랑(국방차관) 우겸(于謙)이었다. 감국 성왕(郕王), 황태후, 그리고 신하들 중 최고위인 이부상서 왕직이 사수에 찬성하였고, 이들은 일치하여 북경 방위의 총지휘를 우겸에게 맡기기로 하였다. 역사에 만약(if)이란 금물이지만, 토목보 전투 직후 북경에는 10만 명을 밑도는 장병들밖에 남아 있지 않았고, 이때야말로 에센에게 있어서는 북경 침략의 최대의 호기였다. 하지만 에센은 북경이 아닌 변경의 요충지로 향하였고, 황제를 이용하여 그 곳들에 무혈 입성하고자 시도하였다. 하지만 그 곳을 지키는 장수들은 성문을 열지 않았고, 성문을 연 요충지는 없었다. 에센은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였고, 우겸은 북경 방비를 재조직하기 위한 시간을 얻었던 것이다. 4. 북경 방위 체제의 재건 병부상서(국방대신)로 승진한 우겸은 우선 최대의 과제인 군대, 즉 경영(京營, 북경 주둔군)의 재건에 착수하였다. 북경·남경·하남의 비조군(備操軍), 산동과 남방 연안의 대(對) 왜구군, 강북 및 북경 각 부의 운량군(運糧軍, 군량 운송 부대) 등을 북경으로 집결시키고 훈련을 실시하였다. 등무칠(鄧茂七) 토벌에 임하고 있던 영양후 진무(陣懋)가 이끄는 군대도 불러들였다. 북경의 병력은 10만 명을 밑돌고 있었지만, 재건된 병력은 20만 명을 넘었다. 재건된 대군을 재무장시키는 데에는 많은 양의 무기가 필요하였다. 무기 생산을 관할하는 공부(工部)에서 증산에 임하는 한편, 남경에 저장되어 있던 무기의 3분의 2를 북경으로 보내도록 하였으며, 토목보 부근에 버려져 있던 무기를 회수하도록 하였다. 토목보에서 회수된 무기만 하더라도 투구 9,000개, 갑옷 5,000벌, 신창(神槍, 화창[火槍], 화염방사기) 11,000정, 신총(神銃, 화총[火銃]) 2만 정, 신전(神箭, 화전, 로켓 화살) 44만 개, 화포 800문에 달하였던 것이다. 기병에 대한 명군의 비장의 수단은 화기였고, 우겸은 북경에 대량의 화기를 긁어모아 두었다. 대군을 유지하기 위한 군량 확보도 필요하였다. 통주(通州)에는 경영에서 1년간 쓸 군량이 비축되어 있었기에, 이것을 북경으로 운송하도록 하였다. 토목의 변에서 다수의 고위 장수들과 관료들이 전사하여 지휘관이 부족한 상태였기에, 우겸은 도독 석향을 발탁하여 무청백으로 임명하여 경영의 지휘를 맡게 하는 등, 유능한 인물들을 다수 발탁하였다. 그 외에도 면직되어 있다거나 투옥되어 감금 중에 있는 장군들을 사면하여 재기용하기까지 하였다. 우겸은 당면 과제였던 북경 방위를 강화하기 위해, 도독 손당(孫鏜), 위영(衛穎), 장월(張軏), 장의(張儀), 뇌통(雷通)을 북경의 성문을 지키는 요충지에 포진시켰다. 좌부도어사 양선(楊善), 급사중 왕(王)이 이들 각 부대를 지원하였고, 성 밖의 주민들은 성 안으로 피난시켰다. 북경의 수비를 단단히 할 뿐만 아니라, 우겸은 변경 방위망의 재건에도 나섰다. 대동은 곽등(郭登)을 총병관으로 삼아 군의 재건과 방위에 임하게 하였고, 선부는 양홍(楊洪)을 창평백으로 삼아 방위에 임하게 하였다. 북경의 침공 경로상에 위치하고 있는 거용관에는 병부원외랑 나통(羅通)을, 자형관에는 우부도어사 손상(孫祥)을 파견하여 방위의 강화에 임하게 하였다. 군을 재건하는 한편, 우겸은 다른 중신들과 도모하여 감국 주기옥(朱祁鈺)을 황제(경종[景宗] 경태제[景泰帝])로 옹립함으로써 인심의 안정을 꾀하였다. 여기에는 또 하나의 효과도 있었다. 에센은 황제를 북경으로 보낸다는 것을 침략의 대의명분으로 삼고, 황제의 이름을 빌려 명의 방위 거점을 항복시킬 뿐만 아니라, 외교 교섭에서 비장의 수단으로 사용하고자 하고 있었다. 하지만 새로운 황제의 즉위에 의해 정통제는 상황(上皇, 전 황제)이 되었기에, 그 가치가 크게 저하되었던 것이다. 5. 명군의 포진 10월에 에센은 오이라트에 항복한 태감(환관) 희영(喜寧)의 계책에 따라, 북경 진격의 의지를 굳혔다. 에센은 전군 약 20만 명을 셋으로 나누어, 2만 명을 고북구(古北口)로, 5만 명을 거용관으로 보냈으며, 스스로는 나머지 주력을 이끌고 자형관으로 향하였다(오이라트 군의 총 병력에 대하여는 사료에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지 않다. 본고는 「중국고대전쟁전례선편」 제 3권 237쪽의 설을 따른다). 대동으로부터의 보고에 의해 오이라트의 침입을 알게 된 우겸은, 이에 맞서 싸우기 위해 22만 명의 장병들을 이끌고 북경의 9개의 성문 밖에 포진하였다. 부대 배치는 다음과 같다. 덕승문(德勝門) : 병부상서 우겸, 무청백 석향, 부총병 범광(范廣), 무흥(武興) 등 안정문(安定門) : 도독 도근(陶瑾) 동직문(同直門) : 광녕백 유안(劉安) 조양문(朝陽門) : 무진백 주영(朱瑛) 서직문(西直門) : 도독 유취(劉聚) 부성문(阜成門) : 진원후 고흥조(顧興祖) 정양문(正陽門) : 도지휘 이단(李端) 숭문문(崇文門) : 도독 유득신(劉得新) 선무문(宣武門) : 도지휘 양절(楊節) 그 외에 창의문(彰義門)에는 우첨도어사 왕횡(王竑)이 이끄는 도독 모복수(毛福壽), 고례(高禮)의 군대가 포진하였고, 북경성 안은 도독첨사 왕통(王通), 좌부도어사 양선, 병료급사중 정신(程信) 등이 지키고 있었다. 우겸은 성문을 닫아 장병들의 퇴로를 끊은 뒤, 전군을 사지에 두었다. 하지만 우겸은 안전한 성 안에 남아 있었던 것이 아니라, 스스로 진두에 서서 지휘를 맡았다. 그리고 「진(陣)에 임하여서 장교가 군대를 등지고 먼저 달아나거든 그 장교의 목을 베어라! 군대가 장교를 등지고 먼저 달아나거든 뒤따라오는 부대가 그들의 목을 베어라!」라는 엄명을 내렸다. 이로 인해 장병들은 필사의 각오를 다졌고 사기가 높아졌다. 뿐만 아니라 선부의 양홍을 필두로 하여 요동의 총병관, 산동, 산서, 하남, 섬서의 각 순무들에게 원군을 보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 시기의 북경성은 오늘날의 북경의 성 안에 해당되는 부분이다. 당시 북경성의 남쪽에는 금의 중도성(中都城)의 성벽이나 문이 남아 있어서 남쪽 외성(外城)의 역할을 하고 있었고, 창의문이라는 것도 중도성의 성문이었다. 사료에는 「토산(土山)」이라는 표현이 보이지만, 이것은 고유의 지명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이제 막 매몰되려고 하는 대도성(大都城) 혹은 중도성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된다. 6.북경 전투 자형관을 비롯한 명의 저항 거점을 돌파한 오이라트의 주력은, 10월 11일에 북경 교외에 출현하여 서직문에서 덕승문에 걸쳐 포진하였고, 상황을 덕승문 밖에 두었다. 창의문 북쪽에서 최초의 전초전이 벌어졌다. 우첨도어사 왕횡의 지휘 아래에 있는 도독 모복수, 고례가 오이라트의 선봉과 접촉하여 이들을 격파하고 수백 명을 죽임으로써, 북경 전투의 최초의 교전은 명의 승리로 끝났다. 에센은 상황을 이용하여 우겸, 석향, 왕직 등 명의 수뇌부를 꾀어내어 붙잡으려고 하였지만, 우겸 등은 이에 응하지 않았다. 13일은 화기에 불리한 비바람이 강하게 몰아치는 날이었다. 에센은 악천후를 틈타 공격을 개시하고자 하였고, 정찰 기병들을 풀어서 수비의 약점을 찾도록 하였다. 우겸은 덕승문 밖의 빈 집들에 복병들을 배치하였고, 기병들을 풀어 오이라트의 정찰대를 도발하여 자신의 함정으로 유인하도록 하였다. 유인책에 말려든 에센은 1만 명의 기병을 파견하여 덕승문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였다. 그 곳의 빈 집들 안에 숨어 있던 복병들이 출격하였고, 신기영(神機營, 화기를 전문으로 하는 포병대)은 화기 사격을 개시하였다. 지붕 아래에서 비바람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었던 화기는 예전과 다름없는 위력을 발휘하였다. 오이라트 군이 이러한 반격에 기가 꺾여 있을 때, 범광이 이끄는 기병이 돌격하여 오이라트 군을 격파하였다. 이 전투에서 화기는 악천후에도 아랑곳없이 커다란 위력을 발휘하였고, 에센의 동생 우량타하이 등의 간부들을 포격으로 쓰러뜨리는 커다란 전과를 올렸던 것이다. 덕승문에서 패퇴한 에센은, 서직문으로 공격의 예봉을 돌렸다. 그 곳에 포진하고 있던 도독 손당은 분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병력에서 앞서는 적군에게 포위되어 버렸고, 성 안으로 퇴각하고자 하였다. 서쪽 성벽을 수비하고 있던 급사중 정신은 문을 열어주지 않았고, 성벽 위에서 오이라트 군에 대하여 화전과 포격을 퍼부어 성 밖의 명군을 지원하였다. 그 때 남쪽으로부터 모복수, 고례가 이끄는 지원군이 도착하였고, 뒤이어 북쪽으로부터 석향이 파견한 지원군이 도착하여 전투에 가담하였다. 형제는 역전되어 오이라트군은 패퇴하였다. 14일, 에센은 남서쪽의 창의문을 공격 목표로 삼았다. 창의문 부근의 수비에 관해 우겸은 모복수 등에게 명하여 기병의 행동을 방해하기 위해 길에 바리케이드를 설치하도록 하였고, 요소요소에 화기를 배치해 두도록 하였다. 우겸은 부총병 무흥, 도독 왕경(王敬) 등을 파견하여 창의문 밖에 두어 오이라트 군에 맞서 싸우게 하였다. 명군은 서반(序盤), 신총을 효과적으로 사용하여 우위에 서 있었지만, 군의 감독을 맡아야 할 태감 약 100명이 전공을 탐내어 무모한 돌격을 감행하여 진이 혼란스러워졌고, 무흥이 화살에 맞아 전사하는 등 형세가 역전되었다. 오이라트 군은 퇴각하는 명군을 토성(土城, 금의 중도성의 성벽)으로 몰아갔다. 그 근처에 사는 주민들이 이것을 보고, 지붕 위에서 오이라트 병사들에게 돌이나 벽돌 등을 던지면서 명군을 도와주었다. 이 때 왕이 모복수, 고례 등의 군대를 이끌고 전장이 나타나면서 전세는 다시금 역전되었고, 오이라트 군은 격퇴되었다. 연전연패란 에센에게는 예상 밖의 것이었다. 에센의 최대의 오산은, 약체였을 터인 명군이 병력, 사기, 지휘, 화력 등 모든 면에서 우수하였다는 점이다. 이 무렵 거용관을 노렸던 오이라트 군은, 화기의 위력과 나통의 교묘한 지휘로 인해 7일간의 전투에서 격퇴된 상태였다. 게다가 선부에서 출격한 창평백 양홍이 이끄는 2만 명의 군대를 필두로 하여, 각지에서 지원군이 북경을 향하여 접근하고 있었다. 기세가 오른 명의 주력과의 결전을 피하고 명의 지원군에 의해 퇴로가 끊어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 에센은 북경으로부터 철수하는 수밖에 없었다. 15일 밤, 에센은 상황과 함께 몽골 고원으로 도주하였다. 첩자들로부터 이러한 움직임을 알게 된 우겸은, 그날 밤 오이라트 진영을 향하여 포병대를 집중시켰다. 지금까지 명군은 상황이 다칠까봐 두려워 감히 적진을 겨누지는 못하고 있었다. 적진을 때리는 명군의 집중 포화는 맹렬하였고, 1만여 명의 오이라트 병사들을 쓰러뜨렸다. 명군이 북경 전투에서 사용한 대포의 수는 토목보에서 회수된 것만 하더라도 800문을 헤아렸고, 원래 북경에 배치되어 있던 것과 남경으로부터 수송된 것을 고려한다면 최소한 1,000문 이상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리하여 5일간에 걸친 북경 전투는 명의 승리로 끝났다. 명군의 승리의 원인은 토목보 전투와는 대조적이어서, 우수하고 용감한 사령관의 지휘를 받았고, 단기간에 잘 훈련되었으며, 대량의 화기를 효과적으로 운용하였다는 점에 있었다. - 「역사군상 그래픽 전사 시리즈 전략·전술·병기 사전 7권 : 중국 중세·근대편」(東京: 學習硏究社, 1999) 116~121쪽의 내용을 인용·번역하였습니다. 게시물의 상업적 이용 및 무단 이동은 사양합니다. by 문제청년 | 2005-07-19 11:13 | 역사/전쟁사 게시판 | 관련글 만주어 인명·지명을 가타카나로 음사한 것의 경우 번역이 부정확할 수가 있습니다. 독자 여러분들의 양해를 부탁드리며 정정할 곳이 있을 경우 알려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1. 누르하치의 건국 명 제국의 요동진에 인접한 지역에는, 일찍이 12세기에 금을 건국하였던 여직(女直, 여진[女眞] - 이후 여진으로 통일[옮긴이 註])족이 거주하고 있었다. 그 중의 하나인 건주여진(요동 부근)의 누르하치는, 1583년(23세)에 거병한 이래 싸우면 반드시 이기는 용병의 천재였다. 건주여진을 통일하고, 다른 모든 부의 여진족을 항복시켜 휘하에 포함시킨 누르하치는, 1616년에 「열국(列國)을 자애롭게 다스리도록 하늘로부터 위임을 받은 스레 겡기옌 칸(영명한[英名汗])」에 즉위하고서 대외적으로 금(金, 후금[後金])을 칭하는 여진족 국가의 성립을 선언하였다. 후금과 명의 관계는 교역 문제와 국경 문제 때문에 악화일로를 걷고 있었다. 1618년 4월 누르하치는 명의 지금까지의 도의를 벗어난 행위들을 하늘에 고발하고(칠대악[七大惡]), 요동의 만리장성을 넘어 명의 무순(撫順)을 공격하였다. 수비대장인 이영방(李永芳)은 항복하였고, 요동총병관 장승음(張承蔭)이 이끄는 구원군은 대패하였다. 양국의 장기간의 전쟁이 시작된 것이었다. 2. 후금의 팔기 제도 후금의 통치 제도이자 군대 동원 제도는 「팔기(八旗)」라고 불리었다. 이것은 수렵민의 사회 제도에 기원을 둔 것으로서, 인민을 8개의 구사(固山, 기[旗])라고 불리는 집단으로 나누어 통치하고, 8개의 군단으로 편성하는 것이었다. 팔기는 깃발의 색깔에 따라 정황(正黃), 정홍(正紅), 양홍(鑲紅), 정남(正藍) (이상 좌익), 양황(鑲黃), 정백(正白), 양백(鑲白), 양남(鑲藍) (이상 우익)으로 나뉘어져 있었다(‘양[鑲]’은 깃발의 테두리를 가리킨다). 팔기 제도의 최소 단위는 니루(牛彔, 좌익)라고 하며, 각 니루로부터 명목상 최대 300명의 갑사(甲士)를 동원할 수 있었다. 니루 다섯에 잘란 하나를 두고, 잘란 다섯을 모아서 구사 하나가 두어지는 식이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대로 되지는 않아서, 각 구사 휘하의 니루의 수가 반드시 25개였던 것은 아니었다. 니루에는 지도자로서 니루 어전(牛彔額眞)이, 잘란에는 잘란 어전(甲喇額眞)이, 구사에는 구사 어전(固山額眞)이 두어져 있었다. 이들은 행정의 장이면서 동시에 군대의 장교이기도 하였다. 또한 각 구사는 누르하치와 그의 아들, 손자, 조카인 버일러(貝勒, 기왕[旗王])에게 속해 있었고, 버일러는 구사 하나의 병력을 지휘할 뿐만 아니라, 누르하치 군의 부사령관으로서 분견대를 지휘할 때도 있었다. 얼마만큼의 군대를 동원할 것인가는, 각 니루로부터 몇 명의 갑사들을 동원하는가에 달려 있었다. 명목상의 상한선은 300명이었지만, 실제로는 건국 초기에는 각 니루로부터 50명의 갑사가 동원되는 경우가 많았고, 훗날 심양(瀋陽)·요양(遼陽) 전투 이후에는 100명의 갑사를 동원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 외에 구사의 버일러는 구사 휘하의 니루로부터 선발된 바야라 병(兵)이라고 불리는 100여 명의 정예 병사들을 친위대로서 보유하고 있었다. 사르후(薩爾滸) 전투에 얼마만큼의 병사들이 동원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고 1만 명에서 6만 명에 이르기까지 제법 편차가 있지만, 이 전역(戰役)에는 후금의 존망이 걸려 있었던 것만큼, 최대한의 동원이 이루어졌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하나의 니루로부터 동원된 병사들의 수는, 동고로(路)에 배치된 500명의 병사들을 세 명의 니루 어전이 지휘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볼 때, 100명 전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전투가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에, 후금이 동원한 병력은 약 2만 몇 천 명에 달하였을 것이다. 이 시기에 후금군은 아직 화기를 장비하고 있지 않았고, 냉병기(冷兵器)를 주 무기로 장비하고 있었다. 주력인 갑사는 중장기병으로 병사들은 갑옷을 착용하였고(마갑은 없었음), 활과 화살을 반드시 장비하였으며, 긴 무기로서 큰 칼과 창을, 짧은 무기로서 단검을 장비하고 있었다. 후금군이 장기로 하는 전술은 기병에 의한 포위 전술과, 화살을 연사하면서 기병 돌격을 실시하는 것이었지만, 누르하치는 명군이 사용하는 화기에 대한 대책으로서 중무장을 한 병사들을 말에서 내리게 한 뒤 도보 전투 공병으로서 이용한다는 전술을 고안해 두었다. 3. 명의 누르하치 토벌 작전 명은 임진왜란 당시 조선 지원군을 지휘하였던 양호(楊鎬)를 병부시랑 겸 요동경략으로 기용하여 대 후금 전쟁의 총 지휘를 맡도록 하였다. 누르하치를 토벌하기 위해, 양호는 요동이나 조선에서의 작전 경험이 있는 두송(杜松), 유정(劉綎), 이여백(李如柏), 관병충(官秉忠), 시국주(柴國柱) 등과 같은 노련한 장수들을 기용하였다. 그러나 예정된 10만 명의 병력은 예산 부족으로 인하여, 그 해 겨울이 되어서야 겨우 집결할 수 있었다. 양호는 전력을 보강하기 위해 조선과 여허(南關, 누르하치에 적대적인 여진 부족)에 원군을 요청하였다. 조선에 대해서는 화승총 부대가, 여허에 대해서는 기병 전력이 기대되었다. 군대가 모이자 양호는 요동총독 왕가수(汪可受), 요동순무 주영춘(周永春), 순안어사 진왕정(陳王庭)과 작전을 검토하였다. 그 결과 결정된 작전은, 47만 명이라고 일컬어지는 전군을 4개 집단으로 나누어 반원형의 4개 경로로 진격하여, 누르하치의 근거지인 허투알라를 포위하는 식으로 공격한다는 것이었다. 이 전투에 참가하는 명군은 8만 8천 명, 조선군은 1만 3천 명, 여허군은 2천 명으로서, 총 병력은 예정된 10만 명에 달하였다. 각 군의 부서에 대해서는 아래와 같다(명군의 병력은 추정치임). ① 좌측 북로군 사령관은 개원총병관 마림(馬林), 감군(監軍)은 개원병비첨사 반종안(潘宗顔)이었다. 좌측 북로군은 개원로의 요동병을 주력으로 하는 약 2만 명의 병력에, 여허의 지원군 2천 명을 더한 것이었다. 전군은 3개 부대로 나뉘어져서 제 1진은 마림이, 제 2진은 반종안이, 여허군을 포함하는 제 3진은 유격 두영징(竇永澄)이 지휘하였다. 주력인 좌측 중로군과 사르후 부근에서 합류할 예정이었다. ② 좌측 중로군 사령관은 산해관총병관 두송, 감군은 광녕병비사 장전(張銓)이었다. 좌측 중로군은 산해관이나 보정 등 계진(薊鎭)의 각 부대와, 조몽린(趙夢麟)이 이끌고 온 고원(固原), 감주(甘州), 섬서(陝西)의 지원군 등 약 3만 명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주력은 두송과 보정총병관 왕선(王宣), 원임총병관 조몽린이 지휘하였고, 제 2진은 유격 공염수(龔念遂), 이희필(李希泌)이 지휘하였다. 이 부대가 전군의 주력으로서, 무순을 출발하여 사르후를 경유한 뒤 허투알라로 향할 예정이었다. ③ 우측 중로군 사령관은 요동총병관 이여백, 감군은 요동병비참의 염명태(閻鳴泰)였다. 우측 중로군은 요동진의 약 2만 5천 명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부총병 하세현(賀世賢)이 부장이었다. 이 부대는 청하(淸河)로부터 아골관(鴉鶻關)을 나선 뒤 후란로(路)를 거쳐 허투알라로 향할 예정이었다. ④ 우측 남로군 사령관은 총병관 유정, 감군은 해개병비부사 강응건(康應乾)이었다. 우측 남로군은 산동(山東), 절강(浙江)의 지원군과 관전(寬奠), 진강(鎭江), 애양(靉陽) 등의 요동병으로 이루어진 약 1만 3천 명의 병력에, 조선의 지원군 1만 3천 명을 더한 것이었다. 주력은 유정, 강응건이 지휘하는 명군이었고, 여기에 조선의 도원수 강홍립(姜弘立)이 지휘하고 명의 유격 교일기(喬一琦)가 감독하는 조선군이 뒤를 이었다. 이 부대는 관전에 집결한 뒤 동고로를 따라 진격하여 허투알라로 향할 예정이었다. 그 외에 원임총병관 관병충이 요양에, 총병관 이광영(李光榮)이 광녕(廣寧)에 예비 병력으로서 주둔하고 있었고, 양호는 심양에 머무르면서 총지휘를 맡았다. 명측의 움직임에 대하여, 누르하치는 점령하고 있던 성곽과 요새를 포기한 채 명군의 주 침공 경로상에 있는 사르후와 자이피안 산 정상에 성을 쌓기 시작하여 방비를 강화하였다. 누르하치의 의도는 내선(內線)의 이점을 살리는 각개격파였고, 항복한 명의 장수인 이영방은 명군이 복수의 경로를 취할 경우, 병력을 집중시켜 그 중 하나의 경로만을 두들기면 된다고 누르하치에게 진언하였다. 4. 사르후 전투 침공 예정일은 2월 21일이었지만, 폭설로 인하여 출발을 연기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주력을 지휘하는 두송은 전공을 탐낸 나머지, 다른 부대와 연계하지 않고 먼저 행동을 개시하였다. 두송은 북쪽 변방에서 공적을 세운 장군으로서, 용맹하기는 하였지만 문관의 통제를 듣지 않는다는 결점이 있었다. 3월 1일 두송의 부대가 접근하자, 후금의 축성 부대는 자이피안 산에서 철수하였다. 두송은 물이 불어난 혼하(渾河)를 건널 수 없는 차영(車營)을 후방에 남겨둔 채, 차가운 강을 건너 사르후 산을 점령하고 1만여 명의 병력을 배치하였다. 그 자신은 주력을 이끌고 후금군을 추격하여, 다시 한 번 혼하를 건너 자이피안 산을 공격하였다. 후금의 호위 부대는 저항하면서 후방의 키린하다로 후퇴하였다. 8시경, 명군이 침공해 왔다는 보고를 받은 누르하치는 허투알라에 집결한 주력에 출격을 명하였다. 후금군은 다이샨의 정홍·양홍기를 선두로 하여 속속 팔기의 각 부대가 출발하였다. 저녁 무렵 누르하치가 사르후와 키린하다를 내려다볼 수 있는 구레에 도착하였다. 먼저 도착한 다이샨과 버일러, 그리고 중신들은 키린하다를 구원한다는 작전을 세웠고, 키린하다에 증원 부대로서 기병 1천 명을 파견한 상태였다. 그들의 작전을 들은 누르하치는 사르후의 명군을 격파하면 다른 명군도 동요할 것이라고 보았고, 야음을 이용하여 사르후를 공격한다고 결정하였다. 사르후 공격 부대는 좌익의 4기에 우익의 2기(양황, 양남)를 더한 것이었고, 정백과 양백의 2기는 자이피안의 명군을 감시하였다. 6기의 장병들은 밤이 되어 어두워진 것을 틈타, 사르후 산을 습격하였다. 사르후의 명군은 예상치 못한 급습을 받은 데다 시계가 저하된 시간대에 습격을 받았기에, 화기의 위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 채 근접전에 말려들어 괴멸되고 말았다. 사르후의 명군을 격파한 뒤, 사르후를 공격하였던 6기와 감시를 맡았던 2기, 그리고 키린하다의 부대가 세 방향에서 두송의 부대를 합동 공격하였다. 세 방향에서 기병의 습격을 받은 두송의 부대는 혼하를 두 번이나 건너면서 전투를 수행하였기 때문에 피로한 상태였고, 어스름한 어둠 중에는 역시 화기도 제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였기에 괴멸되어 버리고 말았으며, 두송, 왕선, 조몽린 등 간부들도 전사하였다. 5. 샹갼하다 전투 두송의 부대가 괴멸되었을 무렵, 마림의 부대는 샹갼하다로 진출해 있었다. 마림은 명장 마방(馬芳)의 아들로서 요동총병관을 맡은 경험이 있었지만, 시나 글씨에 뛰어난 문인으로서 알려진 장군이었다. 반종안은 마림이 겁쟁이이기 때문에 다른 장군으로 교체해야 한다고 양호에게 건의하고 있었다. 마림의 용병술은 신중하고 견실하였기에 이 점이 반종안에게는 다른 맹장들에게 비교해 보았을 때 겁쟁이라고 비쳤던 것이었겠지만, 마림에게 불안한 점이 있다고 한다면 강적과 맞선 경험이 없다는 점이었다. 2일 북로군의 접근을 알게 된 후금군에서는, 다이샨이 300명을 이끌고 먼저 출발하였다. 마림은 두송의 부대가 괴멸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자 전날 밤의 숙영지까지 후퇴하였다. 그 곳에서 3중의 참호를 파고 호 밖에는 대포를 배치하였으며, 그 외곽에 밀집 대형의 기병을 배치하여 사방 어디로부터의 습격에 대해서도 대응할 수 있는 엄중한 진형을 펼쳤다. 이와 같이 엄중한 포진을 본 다이샨은 누르하치에게 지원군을 계속 요청하였다. 제 2부대를 지휘하는 반종안은 1.6Km 정도 떨어진 피에훈 산에 진형을 펼쳤다. 그 날 아침, 혼하를 건너지 않았던 좌측 중로군의 공염수, 이희필이 이끄는 차영과 기병 등 약 2천 명의 부대가 와훔에 주둔하고 있었다. 주력은 마림의 부대와 맞서게 한 누르하치는, 홍타이지(정백기)와 함께 1천 명이 채 되지 않는 병력을 이끌고 이 부대를 급습하였다. 명군은 참호를 파고 전차와 화기를 배치하여 수비를 단단히 한 상태였다. 누르하치는 병사들의 절반을 말에서 내리게 한 뒤 공병으로서 투입하여 전차의 방어선을 돌파하도록 하였고, 그 뒤를 이어 기병으로 습격하여 중로군을 완전히 괴멸시켰다. 다이샨으로부터의 급보를 받은 누르하치는 병력을 뒤에 남겨둔 채 소수의 호위병만을 이끌고 곧바로 달려왔다. 누르하치는 명군의 진형을 관찰한 뒤, 근처의 산을 점령하여 위에서부터 아래로 공격하도록 하였다. 누르하치의 의도를 알아챈 마림이 병사들을 그 산으로 이동시키면서 양군이 격돌하기 시작되었다. 누르하치는 화기에 맞서기 위하여 좌익의 2기를 말에서 내리도록 하였지만, 명군의 움직임이 빨랐기에 다이샨은 말에 올라탄 채 명군에 대하여 돌격을 감행하였고, 전투는 격렬한 혼전의 양상을 띠게 되었다. 승패를 판가름한 것은 증원군이었다. 후금군의 경우 6기가 대열을 정비할 틈도 없이 전장에 도착하는 자부터 속속 전장에 투입된 것에 반해, 명군의 경우 지원군이 없었고 피에훈 산의 명군은 그저 방관하고 있을 뿐이었다. 명군은 후금군의 공격을 견뎌내지 못한 채 패주하였고, 극심한 추격을 받았다. 마림은 탈출할 수 있었지만, 유격 마암(麻岩) 등 다수의 장수와 병사들이 쓰러졌다. 반종안은 용기는 있었지만 장수로서의 자질이 없었고, 교전 중의 마림군을 구원하려고 하지 않았다. 게다가 산 속에 포진하고 있었기 때문에, 참호를 파지 않은 채 단지 전차를 늘어세운 방어진만을 펼친 상태였다. 누르하치는 병력을 재집결시킨 뒤 피에훈 산을 공격하였다. 누르하치는 화기에 맞서기 위하여 병사들의 절반을 말에서 내리게 하여 먼저 나아가게 하고, 말을 탄 병사들이 그 뒤를 잇도록 하였다. 전차 뒤에서 사격을 퍼붓던 명군에 대하여 말에서 내린 병사들이 돌입하여 전차를 제거하였고, 그 곳으로 기병들이 돌입하여 반종안의 부대를 섬멸하였다. 여허의 지원군은 중고성(中固城)까지 진출한 상태였지만, 이 패전 소식을 듣고서 철수하고 말았다. 6. 아부다리·후챠 전투 북로군에 대하여 승리를 거둔 누르하치가 병력을 재집결시키고 있을 무렵, 명군이 동고·후란로를 따라 진격중이라는 보고가 도달하였다. 누르하치는 전군을 허투알라로 철수시킨 뒤 다음 목표를 남로군으로 잡았고, 우측 중로군에 대응하기 위해 허투알라에 4천 명의 정예 병력을 배치하였다. 좌측군의 괴멸을 알게 된 양호는 우측의 양군에 대하여 퇴각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남로군을 이끌고 있던 유정에게는 명령이 도달하지 못하였다. 유정은 임진왜란이나 사천(四川) 지역의 반란 진압에서 활약한 인물로서, 무게가 120근(약 72Kg)에 달하는 큰 칼을 말 위에서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었기 때문에 「유대도(劉大刀)」라는 별칭을 가진 맹장이었다. 유정이 평소에 구사하는 전술은 부대에 녹각목(鹿角木)을 보유하도록 한 뒤 순간적으로 녹각목을 늘어세워 적의 습격을 저지하고, 이렇게 하여 벌어둔 시간에 배치한 화기를 사용하여 적의 전위 부대를 격파한 뒤 기병으로 역습을 가한다는 것으로서, 그는 화기의 운용에 뛰어난 장수이기도 하였다. 남로군의 이동 경로는 다른 부대와 비교할 때 길었고, 유정은 신중한 인물이었으며, 조선군의 보급이 제대로 이어지지 않았다는 점도 있었기에, 행군 속도는 빠르지 않았다. 유정의 부대는 마을을 불태우며 전진하였고, 2일에는 동고로에서 토보 등이 이끄는 후금의 경계 부대 500명과 교전하여 이들을 격파하였다. 이 승리를 거둔 뒤, 두송이 허투알라로 앞서가고 있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두송이 전공을 독차지하지 않을까 하고 유정은 초조해 했고, 4일 녹각목을 버린 채 포위 공격 장비를 중심으로 한 부대를 이끌고 먼저 나아갔다. 강응건의 부대, 강홍립의 조선군이 그 뒤를 이었다. 그 무렵 다르한 히야(정황기)가 이끄는 후금군의 선발대가 토보의 패잔병을 흡수한 뒤, 와르카시 숲에 매복하고서 유정의 부대가 지나가도록 내버려두었다. 유정의 부대는 10시경 다이샨이 이끄는 후금의 주력과 만났고, 유정은 조금 후퇴한 뒤 아부다리 언덕 위에 포진하고서 다른 부대가 도착하는 것을 기다렸다. 다이샨은 홍타이지(정백기)에게 우익의 지휘를 맡긴 뒤 언덕과 이어지는 산 위로부터 아부다리를 공격하도록 하였고, 자기 자신은 좌익을 이끌고 서쪽으로부터 진격하였으며, 후방으로부터는 다르한 히야의 복병이 습격을 가해 왔다. 명군은 삼면으로부터의 돌격을 견뎌내지 못한 채 전멸하였고, 유정은 전사하였다. 유정의 부대가 전멸하였을 무렵, 강응건의 부대는 조선군과 함께 후챠 들판에 주둔하고 있었다. 이것을 알게 된 다이샨은 잠시 휴식을 취한 뒤, 홍타이지를 선두로 하여 후챠로 나아갔고 강응건의 부대와 대치하였다. 강응건의 부대는 명군과 조선군의 혼성 부대로서, 장창(낭선[狼筅])과 화기가 층을 이룬 채 포진하고 있었다. 명군의 화기 사격이 시작되었을 무렵 갑자기 거센 바람이 불었고, 화약 연기가 명군에게 불어 닥쳤다. 이것을 호기로 삼은 후금의 기병들이 화살을 연발하면서 돌격하여 명군의 전열을 무너뜨렸고, 강응건은 수백 기를 이끌고 달아났다. 누르하치는 아민(양남기)과 다르한 히야(정황기)로 하여금 교일기가 감독하는 조선군을 공격하도록 하였다. 그 광경을 조선측의 사료 『책중일록(柵中日錄)』에서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연기 속에서 적(후금)의 기병의 대군이 들이닥쳤고, 양 날개로 갈라져서 멀리서부터 포위해 들어오면서 좌영(左營)을 습격하고자 하였다. 강홍립은 우영(右營)으로 하여금 구원하도록 하면서 좌영과 함께 진을 펼쳤다. 간신히 대열을 정비할 수 있었지만, 적의 기병이 빠르게 돌격을 감행하여, 그 기세가 마치 비바람이 몰아치는 것과 같았다. 대포와 총을 한 번은 사격할 수 있었지만, 다음 탄환을 장전하기도 전에 적의 기병이 진 안으로 들어왔고 순식간에 좌·우영 모두 전멸당하고 말았다」 좌영의 장수인 선천군수 김응하(金應河)는 선전한 뒤 전사하였고, 우영의 장수 순천군수 이일원(李一元), 교일기는 조선군의 중영으로 달아났다. 중영의 5천 명밖에 남지 않게 된 강홍립은 부원수 김경서(金景瑞)와 협의한 뒤 누르하치에게 투항하였다. 절망한 교일기는 절벽에서 몸을 던져 자살하였고, 우측 남로군도 소멸되었다. 7. 사르후 전투의 결과 양호가 내린 퇴각 명령은 이여백에게는 도달하였다. 부장 하세현은 남로군을 구원하자고 주장하였지만, 이여백은 퇴각할 것을 결정하였다. 이여백의 부대는 후금의 초계 부대 20명을 보고 도주하는 등 동요하고 있었지만, 가까스로 온전히 귀환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이 명군의 4개 부대 중 3개 부대가 누르하치의 내선을 이용한 교묘한 작전 지휘로 인해 각개격파당하고 말았다. 후금의 전과는 명이 공식 발표한 것만 하더라도 잃은 장수들의 수가 314명, 병사들이 약 45,870명, 말이 약 28,400필, 무기의 손실은 헤아릴 수조차 없었으며, 살아남은 조선군은 부대 전체가 후금에 투항하였다. 살아서 돌아온 병력은 약 42,360명이었다고 한다. 명과 후금의 최초의 결전은 후금의 대승리로 끝났다. - 「역사군상 그래픽 전사 시리즈 전략·전술·병기 사전 7권 : 중국 중세·근대편」(東京: 學習硏究社, 1999) 122~127쪽의 내용을 인용·번역하였습니다. 게시물의 상업적 이용 및 무단 이동은 사양합니다 by 문제청년 | 2005-07-20 22:30 | 역사/전쟁사 게시판 강홍립의 조선군을 지휘하는 남로군 사령관 유정은 1619년 3월 2일 동고로에서 토보의 후금군 500명을 격파하고 주변의 부락들을 파괴하면서 진격하였습니다. 1619년 3월 4일 오전 10시, 유정의 남로군이 주변의 여진부락을 약탈하고 있었습니다. 다이샨의 후금군은 약탈로 대오가 흐트러진 유정의 명군을 기습 하였습니다. 유정은 명군을 조금 후퇴시키고 아부다리 언덕에서 포진하여 후속부대와 합류하고자 하였습니다. 이에 다이샨은 아부다리 언덕과 이어지는 산 위에서 명군을 공격하였고 홍타이지의 후금군이 우측에서, 와르카시 숲에 매복해있었던 다르한 히야의 후금군이 후방에서 유정의 군대를 압박하였습니다. 이 전투에서 유정의 군대는 궤멸되었고, 강응건의 후속부대도 다이샨과 홍타이지의 후금군에게 격파 되었습니다. 강응건의 후속부대를 격파한 후금군은 강홍립의 조선군을 향해 진격 하였습니다. 패배한 남로군 사령관 유정은 스스로 화약더미 속에 들어가서 불을 지르고 자폭 하였습니다. 1619년 3월 4일 오전 11시,부차에서 신중하게 진군하던 강홍립의 조선군은 전방에서 울려퍼지는 포격 소리를 들었습니다. 강홍립은 군대를 좌영,중영,우영으로 나누고 대오를 정렬하게 하였습니다. 강홍립은 중영의 군대를 이끌고 행군로의 좌측 언덕에 포진하게 하고, 우영은 남쪽에,좌영은 중영 앞 언덕에 포진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부차의 벌판에 머물던 좌영의 조선군이 언덕에 포진하기 전에 3만의 후금군이 기습 공격을 가하였습니다. 강홍립은 우영의 조선군을 좌영의 조선군 증원에 투입시켰습니다. 이무렵에 강홍립은 명군 장수 교일기와 우승은을 통해 전방의 명군이 무너졌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한편 좌영의 조선군은 몰려오는 후금군을 향해 총포를 발사하였고 이에 후금군의 1차 공격 부대가 무너졌습니다. 조선군의 사격이 멈추자 후금의 2차 공격부대가 조선군을 향해 돌격 하였습니다. 조선군은 총포를 장전하고 후금군을 향해 발사하려고 했으나, 때마침 불어오는 모래바람으로 인하여 총포를 발사하지 못했습니다. 불어오는 바람과 함께 후금군의 기병들이 좌영에 진입하여 조선군을 무너뜨렸습니다. 좌영의 조선군 3천여명은 후금군의 돌격에 거의 몰살 당했습니다. 좌영의 조선군을 격파한 후금군은 좌영을 지원하러 오는 우영의 조선군을 공격하였고 우영의 조선군도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우영장 이일원은 간신히 중영으로 도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좌영장 김응하는 후금군과 사투를 벌였습니다. 김응하는 버드나무 밑에서 후금의 병졸들을 무수히 찌르고 베었습니다. 후금군이 쏜 화살이 김응하의 왼팔에 박혀도 김응하는 오른팔 만으로 후금군과 싸웠습니다. 김응하는 칼이 부러질 때까지 싸우다가 뒤에서 날아온 투창에 맞고 전사 하였습니다. 후금군은 김응하가 의지했던 버드나무를 장군버들 이라 칭하며 김응하를 존경 하였습니다. 이날 조선군은 좌영과 우영이 무너지고 좌영장 선천군수 김응하, 운산군수 이계종, 영유현령 이유길,오직 등 9000여명이 전사 하였습니다. 좌영과 우영의 조선군을 무너뜨린 후금군은 중영의 조선군을 포위 하였으나 공격하지 않았습니다. 그날 밤,중영의 조선군 지휘관들은 항복에 대한 논의를 벌였습니다. 후금군의 포위망을 뚫자는 의견이 제시 되었으나 무시 되었고, 항전하자고 외치는 병졸도 있었으나 역시 무시 당했습니다. 결국 조선군 부사령관 김경서가 후금군 장수의 방에 항복문제를 논의하며  그날 밤을 같은 방에서 지내고, 후금군 사령관들이 안전 보장을 약속하자 조선군은 항복하기로 결심 하였습니다. 1619년 3월 5일 강홍립의 조선군은 후금에 투항 하였고, 강홍립은 후금의 수도 흥경노성에 가서 누르하치에게 정식으로 항복하여 조선은 후금과 싸우려는 생각이 없음을 전했습니다. 그 시각, 이여백의 서남로군은 요동 경략 양호의 철군 명령을 접수하고 퇴각하던 도중에 후금군 기병 20여명을 발견하여 황급히 도주하다가 대열이 무너지고 병사들이 서로 짓밟혀 1000여명의 병력을 잃고 전장에서 빠져나갔습니다. 이로써 명나라의 후금 정벌전은 대참패로 끝이 났습니다. 1619년 3월 1일부터 3월 5일에 걸쳐 전개된 전투는 후세에 <살이호 전투>라고 불리며, 명군은 5일간의 전투에서 314명의 장수와 45870명의 병졸, 28400필의 군마와 셀수 없이 많은 양의 군수물자를 손실 하였습니다. 부차전투에서 항복한 수천의 조선군인들 중 손바닥에 윤기가 있는 사람들(양반 출신)은 모두 살해 되었고,신체가 건장한 사람들은 후금군에 편입 되었으며, 나머지 사람들은 둔전에 배치되어 군량미 조달에 동원 되었습니다. 그들 중 중간급 장수들 일부만이 조선에 송환 되었고 1400~2000 여명이 탈주의 형식으로 조선에 되돌아 올 수 있었습니다 태그저장 | 취소 강희대제(sunho1007) 역사는 미래와 현재를 이어주는 매개체다    당시 조선 측 기록마다 전사자수가 최소3000 최대 9000임 6-7000으로 보는 게 한명기교수 등 학계의 다수라고 들었소 13000중 그정도니 최하로 잡아도 전군 붕괴군요 전사가 3000임 부상은 6000은 될테니 명군45000여 조선군 6-7000 손실에 비해 청군은 1500손실 사르후 전역은 정말 청의 팔기군이 얼마나 강한지 보여주죠 125.131.8.45 2006/11/17 x .    4일에 명 나라 장수들이 먼저 행군하고 아군의 3영이 뒤따라 나아가니, 도로는 평탄하나 산골이 연이어 뻗어서, 복병이 있을까 염려하려, 영졸(營卒)들이 각각 거마작(拒馬柞)을 메고 앞으로 겨우 수십 리를 가서 부거지(富車地) 노성(奴城)에서 60여 리의 거리에 있다.에 도착하니 대포 소리 세 번이 연달아 들렸다. 이에 홍립이 말을 빨리 달려 길 왼편 언덕에 올라 보니, 회오리 바람이 갑자기 일고, 연기와 먼지가 하늘을 덮기 때문에 곧 좌영은 맞은 편 높은 산봉우리에 진을 치고, 중영은 원수가 올라간 언덕에 진을 치고, 우영은 남쪽 변두리 한 언덕에 진을 치도록 명하였다. 좌영은 이미 벌판에 진을 쳤었으나 적의 기병이 벌써 가까이 있어 이동하기 어려운 형편이었다. 이때 근처 부락 백여 집에 명 나라 군사들이 125.131.8.45 2006/11/17 x   나라 군사들이 불을 질러 연기가 바람이 따라 와서 진영 위에 덮었다. 잠시 후에 진 상공(陳相公)ㆍ우 수비(于守備)ㆍ교 유격(喬遊擊)이 필마단기로 와서 말하기를, “명 나라 군사가 모두 함몰되었고 제독도 전사하였다.” 하였다. 대개 유정이 새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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