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시인사이드 갤러리

갤러리 이슈박스, 최근방문 갤러리

갤러리 본문 영역

다시쓰는리뷰 : 그냥 지나가는 인연은 아닌 인연

이응(119.204) 2020.02.08 14:14:21
조회 604 추천 0 댓글 2




5
그냥 지나가는 인연은 아닌 인연




“그냥 지나가는 인연은 아니었나 봅니다.”
“지나가는 중에 잠깐 부딪치나 봅니다.”


왜 잊을 수가 없었을까. 하얀 종이에 인쇄된 까만 이름들 중에 나에겐 왜 당신의 이름만 보인 걸까.


8개월의 시간이 흐르고 우르크 파병기간이 끝나가던 어느 날, 시진은 본진에서 한 통의 팩스를 받았어. 한국 해성병원에서 파견된다는 의료팀 명단이 바로 그것이었지. 무덤덤하게 글자들을 눈으로 훑어 내리다 네모난 표 가장 위에 적힌 이름에 시선이 가 닿는 순간, 지난 1년에 가까운 시간이 무색하게도 시진은 얼어붙었어.


열려 있는 창문 밖 병사들 소리도, 피부로 느껴지는 우르크의 숨 막히도록 뜨거운 열기도, 그의 주위를 왱왱 소리 내며 날아다니는 지독한 모기 소리도 전부 느껴지지 않았지.


팩스는 8개월 전 제대로 시작해보기도 전에 끝나버린 그의 연애의 상대방, 강모연이라는 여자가 또 그의 인생에 나타난다는 예고장이었어.


시진은 도저히 이 우연을 믿을 수가 없어. 아무리 해성그룹에서 이곳, 우르크 태양광발전소의 입찰권을 땄다고 하지만 발전소로 보낸다는 의료팀의 팀장이 어떻게 그와 8개월 전에 헤어진 여자일 수가 있는지……. 하필이면 지금, 하필이면 여기. 이 기막힌 우연의 일치를 시진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알 수가 없어.


어떻게 우르크 내에 하고 많은 대한민국 파병부대 중 그가 중대장으로 있는 모우루 중대가 그 팀의 경호 업무를 맡게 된 건지, 한 달 후면 끝날 그의 파병 중 마지막 한 달에 그녀의 파견이 겹칠 건 또 뭔지. 이건 신이 판을 짜준 거라고 밖에 말할 수 없을 만큼 정말 기가 막힌 일이야. 이걸 인연이라고 말해야 하는지, 헤어진 마당에 이게 악연이지 인연인가 싶기도 하고 시진은 미치도록 복잡해.


8개월 간 그는 내내 모연이 그리웠어. 시시때때로 그녀에 대한 생각을 했고 그녀와의 대화를 떠올렸어. 그녀에 대한 생각은 조건반사처럼 시진을 수시로 찾아왔어.


차 보닛 위에 올려진 생수병을 보면 단수된 욕실에서 머리 감았다고 귀여운 거짓말을 하며 눈 깜빡대던 모연이 생각났고, 삽질을 하다가 손이 다쳤을 땐 그의 이마에 난 상처를 보곤 또 삽질하다 다쳤냐고 묻던 모연을 생각했어. 나바지오 해변의 넋이 나가게 아름다운 풍광을 보고도 그는 이걸 모연에게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어. 시진은 8개월 간 모연의 곁에서 흘러가지 못하고 정체되어 있었지.


시간이 지나면 다 잊을 수 있을 거라고 믿고 떠나왔는데 그건 성공적이지 못했어. 무언가를 목표로 노력했을 때 대체적으로 그걸 이루어 내던 유시진은 강모연이라는 여자를 잊는 데에는 도무지 소질이 없었어.


명단 제일 위에 적힌 딱딱한 글씨에 대고 시진은 몇 번이고 물었어.


당신은 왜 조금도 흐려지지 않았을까. 내 진심은 당신을 잊고 싶지 않았던가?


헬기가 제 몸만큼 큰 메디큐브를 내려놓는 걸 멀찍이서 지켜보며 시진은 불편하다고 말해도 크게 틀렸다고는 할 수 없는 기분을 삼켰어.


시진은 자신보다도 더 복잡한 얼굴을 하고 선 대영을 마주보고 말했어. 지나가는 길에 부딪치는 것 뿐이라고.


대영은 부대원 중 유일하게 명단 속 이름의 정체를 알고 있는 사람이었어. 그가 다가와 이 일은 좋은 일이라고, 그 분은 그냥 지나쳐 가지 않을 모양이라고 말했지만 시진은 동의할 수 없었어. 아니 사실은, 친우의 말에 동의하고 싶어 하는 자신의 마음을 애써 외면했다는 것에 가깝겠지.


8개월은 누군가를 잊기에 턱없이 짧기만 했어. 휘하 장병들은 내무반에서 {강모연의 바디-첵}의 본방, 재방, 삼방을 계속 틀어대고, 기자들은 흔치 않은 수려한 피사체에 펜을 놓을 줄 몰랐어. 시진의 머릿속 짧은 기억에서도 모연이 튀어나와 돌아다니는데 하물며 주변에서마저도 자꾸만 상기시켰지.


인터넷에 뜨는 모연에 대한 기사엔 텍스트만이 아닌 사진과 영상이 항상 함께 실려 있었어. 카메라에 담지 않기엔 너무 아깝도록 아름다운지 어디든 그녀의 이야기가 수록되면 사진이 빠지질 않았지.


모연은 여전히 아름다웠어. 아니, 전보다 더 아름다워진 얼굴에 밝은 표정을 짓고 있었지. 하지만 어딘가 모르게 예전과 같아 보이지 않았어. 분명 사진 속 그녀는 처음 응급실에서 만났을 때 보여주었던 그토록 매섭던 얼굴에 비할 수 없을 만큼 보드랍고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시진의 눈엔 어째서인지 그 미소가 진짜 같아 보이지도, 사진 속 그녀가 행복해 보이지도 않았어.


시진은 그렇게 어떤 식으로든 그의 눈에 띄고 귀에 들리는 모연의 소식을 모른 척할 수가 없었어. 보이면 피하지 못하고 보고, 들리면 자리에 멈춰서 귀를 쫑긋거렸지. 잊고 싶지 않았던 건지 잊을 수가 없었던 건지 8개월은 그에겐 모연을 잊기에 너무도 모자란 시간이었어. 하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잖아.
아무리 그가 모연을 보고 싶어 했어도, 그래도……. 시진이 원한 건 이런 식은 아니었어. 그의 일 때문에 그를 차버린 그녀가 그가 일을 하는 군부대 한가운데로 이렇게 휙 날아오길 바란 건 정말 아니었다고.


* * *


모연은 절대 바란 적 없는 이 상황에 이를 갈았어. 졸지에 팔자에도 없던 해외출장을 나가게 생긴 이 빌어먹을 상황에 상사고 뭐고 이사장의 멱살을 잡고 흔들고 싶어서 손이 다 떨렸지. 사건의 발단은 그녀가 이사장의 눈에 띈 데서부터였어.


모연의 생활은 지난 8개월 동안 많이도 변했어. 8개월 전 술에 미쳐 최소한의 염치마저 팔아먹은 동기에게 어거지로 떠밀려 나갔던 방송 땜빵이 큰 호평을 받게 되면서 모연에게 그 자리가 돌아왔고 뒤이어 이곳저곳에서 그녀에게 러브콜을 보내왔어. 그녀의 이름을 내건 프로그램까지 편성됐지. 그러면서 모연은 병원보다 방송국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어.


수술용 슬리퍼보다 하이힐을 많이 신었고, 하늘색 수술복보다 분홍색 블라우스를 더 많이 입었어. 화장은커녕 머리나 감고 세수나 하면 다행이던 시절은 지나가고 전문가의 손에 얼굴과 머리칼을 맡기는 생활의 연속이었지. 흰 가운, 하늘색 수술복으로도 가려지지 않던 화려한 외모는 전문가의 손길과 카메라 마사지를 받으며 나날이 화사하게 피어났어.


한 번 갔다 돌아온 이사장이 자기 병원에 연예인 뺨치게 예쁘고 뇌까지 섹시한 미혼의 여의사가 있다는 걸 놓칠 리가 있나. 모연이 모처럼 짬이 나서 동료들과 정답게 앉아 이야기 나누던 매점으로 들이닥친 이사장이 그녀에게 냅다 데이트 신청을 하고 사라진 거야.


대화는커녕 전체 회의에서나 보던 낯설디 낯선 사람이었지만 제가 먼저 만나자 했으니 어련히 알아서 할까 싶어 따라왔더니, 돈만 많았지 본데없이 무례한 남자가 그녀를 데려온 곳은 호텔룸이었어.


“밥 올 동안 강교수가 먼저 씻을래요? 아님, 내가 먼저……?”


이런 미친……. 자신을 아주 쉽게 본 이사장을 모연은 도무지 용서할 수가 없었어. 그녀를 앞에 세워두고 단추를 푸는 개자식의 면상을 가방으로 한 대 대차게 후려치고 나왔더니 그 밴댕이 찌질한 놈이 해외파견을 보낸다는 거야.


빌어먹을 권력이 뭔지……. 간판스타 어쩌고 띄워주는 척, 권유를 빙자한 강압으로 이사장은 해외파견 명단의 가장 첫 번째에 그녀의 이름을 적어 넣게 했어. 이사장에게는 그저 제가 차인 일에 대한 찌질한 화풀이에 불과한 일이 모연에게는 해일처럼 몰려온 거야.


그깟 한 달. 기사에 낼 사진 몇 장 찍어오면 이미지에도 좋을 거고 이렇게 된 거 그냥 가자 싶었지만 그래도 저 호색한의 뜻대로 이리저리 끌려 다닐 수밖에 없다는 현실이 모연은 참 서글퍼. 그녀의 성공은 정말 저기 위에 있는 분들한텐 한순간에 없는 일로 만들 수 있을 만큼 보잘 것 없었던 거야. 정말 어처구니없게도…….


하지만 위에 있는 분들이 손가락 하나로 휘둘러 대는 자리여도 그 자리를 차지하고 난 후는 그 전과는 완전히 달랐어. 그 방송 땜빵 한 번에 정말 많은 것이 달라졌지.


더 이상 모연은 그녀의 논문이 아닌 논문을 쓰느라 밤을 새우지도 않았고, 실력은 없고 배경만 있는 동기의 실수를 수습하느라 진을 빼지도 않았어. 이제는 이리저리 뺀들거리는 선배들을 대신해서 당직을 서지도 콜을 받지도 않지. 지금 와서는 병원 안의 누구도 그녀를 함부로 무시하지 못할 만큼 모연은 자신의 자리를 만들었어.


비록 그 자리가 모연이 원하고, 그게 맞는 길이라고 생각했던 정도(正道)를 걸어 얻어낸 것은 아니지만 그녀는 이제 꿈 많던 소녀가 아니야. 모연이 원하는 건 절대 그녀의 실력과 노력만으로는 얻어낼 수 없는 자리였어. 그걸 깨닫는 데에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린 거야. 방송 대본을 울면서 외우던 그 밤에 그녀의 이상은 갈라지고, 그녀의 유명세에 따라온 특진병동 특채교수자리에 그녀의 꿈은 완전히 부서졌어.


마음 속 어딘가에서 이건 아니지 않으냐고, 네가 원한 게 정말 이런 거였냐고 외치는 소리가 목이 쉬도록 그녀를 불러도 결코 모연은 뒤돌아보지 않았어. 토사구팽은 이제까지 당한 걸로 충분하니까.


이제 모연은 일반 외래 환자들의 진료를 보지 않아. 그녀는 새롭게 열린 해성병원의 특진병동을 총괄하는 교수가 됐고, 화려한 화장을 하고 명품 옷을 입고 이 시대의 부르주아 환자들을 만나게 됐어. 환자 진료를 보면서 왜 하이힐을 신고 메이크업을 해야 하는지 모연 자신도 여전히 이해 못하고, 하고 싶지도 않지만 어쩔 수 없어. VIP들이 원하는 의사는 TV에 나오는 재기 넘치고 아름다운 강모연 교수지, 화장기 없는 맨 얼굴에 감지 못한 머리를 하나로 질끈 묶고 병원을 뛰어 다니는 흉부외과 강선생이 아니니까.


강선생이 아닌 강모연 교수의 휴대폰은 조용해. 더 이상 데스크에선 시도 때도 없이 응급콜을 울리며 그녀를 찾지 않으니까. 덕분에 이젠 응급수술 때문에 아닌 밤중에 불려나오지도 않고 밥을 먹는 건지 마시는 건지 알 수도 없게 식사를 하지도 않아. 참 인생 살만해졌지. 돈 잘 벌고 남들 쉴 때 쉴 수 있으니까.


“저번에 일러 준 종목은 좀 사뒀나? 요새 차트 보는 재미가 있던데.”
“덕분에 감사합니다. 심장 약은 드시던 대로 처방해 드릴게요.”


모연의 진료를 받는 어느 기업의 회장은 그녀에게 곧잘 주식 동향과 투자할만한 종목을 넌지시 언질 해주곤 했어. 덕분에 그녀는 좀 더 여유로워졌지. 엄연히 존재하는 유전자 검사기관 두고 병원에서 친자확인검사를 하는 값을 회장은 그런 식으로 치렀어.


모연의 일은 열두 시간을 수술실에서 보내며 다리 퉁퉁 붓던 예전보다 훨씬 간단해졌지만 이상하게도 그녀는 그때보다 금방 피곤하고, 속은 급체라도 한 사람처럼 언제나 더부룩하고 답답해. 숙직실에서 잠자고 눈곱 뗄 새도 없이 일하던 그 때보다 왜 더 힘들고 지치는 건지 모연은 잘 알고 있지만 애써 모른 척하며 살아.


집보다도 익숙할 만큼 오랜 시간을 머무르던 병원에 있는 시간이 짧아질수록 점점 더 모연은 어디로 가야할지 방향을 잃어가는 것 같아.
미아가 된 기분이야.


* * *


모연은 정해진 그녀의 스케줄을 모두 마치고 나서도 그녀 몫의 일이 없는 일반병동에 종종 들렀어.


“이게 누구신가? 일반 병동에선 볼 수 없다는 특진병동 강모연 교수 아니신가!”


모연은 명품 원피스에 높은 하이힐을 신고 남들이 그녀를 다 알아보는 샌드위치 집에서 간식을 사다가 정든 병원 식구들에게 돌렸어. 8개월 전만 해도 엄마보다 자주 보던 병원 사람들이었는데, 이제는 직접 찾아와야만 잠깐이나마 그들과 얼굴을 보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되었지.


오랜만에 본 상현은 모연을 보고 잘됐다고, 이렇게라도 네가 인정받아서 다행이라고 축하해주었고 그래서 모연에게 그는 언제나 고마운 사람이지만 그와는 다른 시선으로 그녀를 보는 병원 사람들도 많아.


교수되려고 발버둥 치더니 결국엔 너도 어쩔 수 없는 인간이지, 하며 그녀를 뒤에서 손가락질하는 사람들이 더 많다는 걸 모연도 잘 알고 있어. 그 중 가장 못되게 구는 나쁜년 김은지가 오늘도 그녀의 속을 박박 긁어놨지.


“좋~댄다. 창피한 줄도 모르고. 꼴에 어디 가서 의사라고 하고 다니겠지.”
“난 그냥 니가 뺏어간 명패 하나 다시 가진 것뿐이야. 그러니까 나한테 신경 끄고 일이나 해.”


김은지는 그 꼴이 8개월 전까지만 해도 자기가 하고 다니던 꼴이었다는 건 그새 다 잊어 버렸는지 모연을 비아냥댔어. 모연은 능력은 없고 욕심만 많은 동기의 유치하고 추악한 열등감과 시기심을 콱 눌러주었지만 그 말이 모두 틀린 건 아니라는 걸 알아. 의사는 수술실에 있어야 의사라는 그 말은 그 골빈년이 했어도 맞는 말이라 모연은 가슴이 송곳에 찔리듯 따끔거리고 씁쓸해. 더 이상 자신의 손은 메스를 들 일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모연은 빈손을 어쩌질 못하고 주머니에 찔러 넣었어.


그녀를 응원해주는 사람과 시기하는 사람 모두를 뒤로 하고 올라온 병원 옥상. H자 그려진 옥상 중앙에 서서 어둑어둑한 주위를 둘러보는데 모연은 문득 또 그 남자의 생각을 해. 이 옥상에 그녀를 두고 훌쩍 헬기 타고 날아갔던 남자 유시진. 그가 모연의 생각 속에 또 등장했어.


지난 8개월 간 시진은 많이도 모연의 생각 속을 방문했어. 그와 함께 보려고 했던 영화가 흥행하는 바람에 그 영화가 천만이 될 때까지 기사가 매일같이 쏟아졌고, 그걸 볼 때마다 모연은 자신을 바람맞혔던 남자를 떠올렸어.


분홍색 생수병을 볼 때마다 생수로 머리 감고 그와 밥 먹던 게 생각이 났고. 집 앞 카페를 지날 때마다 그와 이별하며 했던 대화를 떠올렸어. 정말 잠깐 만난 남잔데 왜 이렇게 계속해서 생각하는지 모연 자신도 답답한 일이었지만 떠오르는데 어떡하겠어.


시진과 헤어질 때 하던 대화 하나하나를 모두 기억하는 모연은 현재 자신의 모습이 썩 만족스럽지 않아. 매끄러운 옥상 바닥에 흐리게 비치는 자신의 모습이 꼭 빛바래서 칙칙해진 동상같이 느껴져. 이미 잿빛이 되어버린,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빛바래는 자신을 그녀는 매일 보고 있어. 이렇게 바래지다가 완전히 검어져 버릴까봐 모연은 더 무서워.


“요새는 섹시할 틈이 없네…….”


이렇게 된 후에야 든 생각이지만 모연은 시진과 그때 헤어진 게 정말 잘한 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이미 순수(純粹)를 너무 많이 잃어버렸으니까.
그때 헤어져서 자신의 현재를 보여주지 않아도 된다는 것에 모연은 진심으로 안도했어. 지금도 어딘가에서 자신이 믿는 선을 위해 열심일 시진과, 이제는 순수를 모두 잃어버린 자신은 어울리지 않으니까.


그래서 모연은 시진에게 기억될 자신의 마지막 모습이 빛을 잃지 않았던 때였던 것이나마 다행으로 여겼어. 곧 있으면 빛바랜 채 그와 재회해야만 한다는 것도 모르고.




“방송에 얼굴도 알렸겠다, VIP들 인맥도 생겼겠다, 내 병원을 개업해야 한다면 바로 지금이 아닐까요? 일정 끝내고 돌아가는 대로 댁 면전에 사표 집어던져줄 테니까 딱 기다리세요! 아셨어요?”


우르크의 뜨거운 햇살을 스카프로 가리고 서서 의료팀들과 함께 수송기를 기다리던 모연은 이 뙤약볕에 그녀를 세워놓고 짜증만 불러일으키는 이사장에게 대차게 일갈하고 전화를 끊어버렸어. 이제 잔금만 치르면 모연은 그녀의 이름값에 걸맞은 개인병원을 개업하고 이 빌어먹을 변태 씨밤ㅂ, 아니 바밤바가 이사장으로 있는 병원을 그만둘 수 있게 됐으니 눈치 볼 것 없이 막 질러댔지. 그녀와 이사장 사이의 사랑과 전쟁 뺨치는 염문설로 말이 많은 병원사람들 사이에 전말은 이렇다 확 까발리고 입을 막고 싶은 마음도 있었어.


그런 모연 앞으로 굉음을 내며 착륙한 수송기에서 내려선 게 바로 시진이었어. 모연은 바람결에 스카프도 놓쳐버리고 저 멀리 다가오는 군인들을 보다가 그들 사이에서 생각지도 못한 얼굴을 발견하고는 경악했어.


“어? 저 군인아저씨 그때 그…….”
“맞는 거 같은데?”


시진이었어. 8개월 전 그를 본 적이 있는 자애와 민지는 물론 모연 또한 당연히 그를 알아볼 수가 있었어. 그녀를 보았음에도 조금도 놀란 기색 없는 그가 군홧발로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어.


모연이 충격에 빠져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그가 다가오는 걸 바라보고 섰는데, 선글라스 너머로 그녀와 눈을 맞추는가 싶었던 시진은 점점 가까워지다 그대로 확 그녀를 스쳐 지나가 버렸어. 망연해진 모연이 그대로 그 자리에 서서 왠지 모를 섭섭함을 견뎌내며 시진의 말소리를 듣는데 그녀에게로 그가 다가왔어.


시진은 모연이 미처 줍지 못한 스카프를 건네고선 말없이 그녀를 바라만 봤어. 아무 말도 없이, 아무 인사도 없이 그냥 계속…….


* * *


모우루 중대에 도착한 모연은 즐겁게 떠드는 의료팀들 사이에서 이리저리 둘러보았어. 어느 틈엔가 사라진 시진은 그녀의 시야 닿는 곳 어디에도 보이질 않았어. 결국엔 그를 찾는 데 실패하곤 모연은 풀이 죽어선 열심히 땅만 바라보며 주의사항을 듣는 둥 마는 둥 서 있기만 했어. 만약 자신이 찾던 그 남자가 건물 안쪽에 비켜서서 창밖으로 그녀를 내내 지켜보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면 그리 실망하진 않았을 테지.


뜨거운 햇볕에 손차양으로 이마를 가리고 서있는 모연의 모습에 시진은 또 다시 예전 일을 떠올리고 있었어. 모연의 집에서 마주앉아 밥을 먹을 때 그녀가 했던 말을.


-나 수술실에 있을 때 얼마나 섹시한데요. 이렇게만 보이는 데도 엄청 예뻐요. 하여튼.


그런 말 하나하나가 시진에게서 잊힐 줄 모르더니 결국엔 모연은 다시금 그의 앞에 나타났어. 파견 명단을 받고 나서부터 공항에 도착하기까지 며칠을 고민했지만 어떤 얼굴로 모연을 보아야 하는지 시진은 결국 답을 내지 못했어.


모연의 모습은 저 멀리서부터 보였어. 스카프를 잡으러 뛰어나오던 그녀가 문득 고개를 들고 그를 발견하더니 그대로 굳어버렸었지. 혼비백산한 얼굴에 당황한 눈빛, 굳어가는 그녀의 입매가 멀리서도 또렷했어. 절대 좋은 얼굴이라곤 할 수 없는 그녀의 표정에 그는 모든 용기를 잃어버리고 만 거야.


둘 중 누구도 의도하지 않은 재회에 당황한 건 모연 혼자가 아니었어. 다시 만나리라는 걸 미리 알고 있었을 뿐이지 그 당혹감은 시진도 다르지 않았어. 어떻게 보면 미리 알고 있었던 만큼 시진은 복잡다단한 시간을 보냈지. 그리고 그는 여전히 정답도 용기도 낼 수가 없었어.


모연을 다시 보게 된 소감은 명료하지가 않았어. 살아오며 이보다 복잡한 감정을 시진은 장담컨데 겪어본 적이 없었어. 8개월을 잊지도 그렇다고 사랑하지도 못했던 사람을 다시 만나게 된 마음이 어떻게 단 한 가지의 감정일 수가 있겠어.


마음 한 구석은 기뻤어. 또 한 편으로는 불편했지. 하지만 그 불편함은 불쾌감이 아닌 어쩔 줄 모르겠는 황망함이었어. 멀쩡해 보이는 겉모습에 가려진 남자의 속마음은 내내 허둥지둥 거리만 했어.


서로가 싫어서 헤어진 건 아니지만 분명한 이유가 있는 헤어짐이었고 여전히 그 이유는 강처럼 두 사람 사이를 유유히 가로지르고 있었지. 그 강을 건널 배 한 척, 나무다리는 여전히 없기에 시진의 용기는 온전해지기 전에 자꾸만 바스라졌어.


그의 마음을 알고 있는 사람은 대영이 유일했어. 모연과의 시간이 너무도 짧았던 탓에 대영 외의 누구도 두 사람의 사이를 알고 있는 사람이 없었지. 그나마 대영이 있어서 제 일 남에게 미룰 줄 모르는 시진도 의료팀 인솔을 그에게 맡겨두고 도망칠 수 있었던 거야.


명주를 피해 도망 다닌 지 어언 수년인 대영은 그의 상관의 마음을 모르지 않아. 복잡하겠지. 그렇다고 절대 싫지는 못할 거고, 그렇다고 마음껏 기뻐할 수도 없을 거야. 그와 명주처럼 오랜 시간을 사랑한 것이 아니어도 함부로 이 여자 저 여자 만나면서 마음 주는 남자가 아닌 만큼 시작된 마음을 없었던 것처럼 도로 깨끗하게 접을 수 없었을 테지.


대영은 시진이 자신의 마음을 결정하는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거란 것도 알고 있어. 그리고 그 마음이 ‘그 의사분’과 멀어지는 쪽은 결코 아닐 거란 것도 알지. 대영은 누구보다 믿을 수 있는 전우, 친우가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 만나 행복해지기를, 자신처럼 도망만 다니며 괴로워하지는 않기를 마음 속 깊이 바라고 있어.



모연은 그 언젠가 시진의 옆에 서 있던, 여전히 명주 애인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부사관이라는 그분이 하시는 말씀을 영혼 없이 들었어. 덕분에 뭘 주의해야 하는지도 사실 잘 모르는 상태로 짐을 풀고 부대를 돌아다녔지.


모래색 군복, 모래색 막사, 모래색 땅. 여기저기 모래색으로만 가득한 중대를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신발 속에 들어간 돌조각을 빼내느라 모연은 멈추어 섰어. 그리고 이제껏 안 그런 척 내내 찾아다니던 그 사람을 발견했지. 주변 풍경과 완전히 녹아든 모래색 군복을 입은 남자가 군용지프에서 택배 상자를 꺼내들고 서 있었어.


하지만 부득부득 상자만 쳐다보던 남자는 불과 몇 미터 떨어진 그녀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건물 안쪽으로 사라져버렸어.


“……못 본 거야, 못 본 척하는 거야.”


아까 결국 인사를 나누진 못했어도 스카프도 주워줘 놓고 이건 웬 냉기인지 모연은 섭섭했어.


아무리 우리가 얼굴 마주치기 불편한 사이라지만 이건 해도 해도 너무 한 거 아니야?


서로가 경호팀장이고 의료팀장인 이상, 앞으로 보름은 두 사람은 얼굴을 안 볼 수가 없는 사이인데 이런 상태로 그 긴 시간을 어떻게 보내나 모연은 답답해.


모연을 피해 막사로 들어온 시진은 그제야 고개를 들고 거울에 비친 그녀를 보았어. 선글라스도 스카프도 없는 지금, 모연에게 다가갈 용기는 순수하게 시진 혼자 힘으로 내야만했어. 하지만 여전히 그의 보잘 것 없는 용기는 모연 앞에만 서면 바스스 흩어져 버렸고 그는 결국 숨어버렸지. 이런 스스로가 답답하지만 찬 여자와 차인 남자 사이에 어떤 말을 해야 하는지, 어떤 말은 해도 좋은지 그는 알지 못해. 아직도 그는 마음이 한참 남았는데 어떻게 하면 적당한 인사 건네며 아무렇지 않게 대할 수 있는 건지 도무지 모르겠어.


시진은 자기 자신이 이렇게 한심할 수가 없어.





이어지는 글 : 다시 봐서 반가워요

수정 전 : 그냥 지나가는 인연은 아닌 인연



추천 비추천

0

고정닉 0

0

댓글 영역

전체 댓글 0
등록순정렬 기준선택
본문 보기

하단 갤러리 리스트 영역

왼쪽 컨텐츠 영역

갤러리 리스트 영역

갤러리 리스트
번호 제목 글쓴이 작성일 조회 추천
설문 주위 눈치 안 보고(어쩌면 눈치 없이) MZ식 '직설 화법' 날릴 것 같은 스타는? 운영자 24/04/29 - -
382504 다시쓰는리뷰 : 타협할 수 없는 가치 [2] 이응(119.204) 20.02.11 468 1
382503 [4] ㅁㅈㅁㅍㄹ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02.11 339 0
382502 다시쓰는리뷰 : 나바지오의 전설 [2] 이응(119.204) 20.02.10 386 0
382501 다시쓰는리뷰 : 다시 봐서 반가워요 [2] 이응(119.204) 20.02.09 464 1
다시쓰는리뷰 : 그냥 지나가는 인연은 아닌 인연 [2] 이응(119.204) 20.02.08 604 0
382499 6회 헬리콥터에서 내리는 부분부터는 진짜 명장면 ㅇㅇ(39.7) 20.02.08 292 0
382498 ㅌㅁㄴㅌㅁㄴ [3] ㅇㅅㅇ(39.7) 20.02.08 292 0
382496 다시쓰는리뷰 : 당신을 놓쳐야만 하는 이유 [1] 이응(119.204) 20.02.07 357 2
382495 다시쓰는리뷰 : 기다리는 일 [4] 이응(119.204) 20.02.06 523 0
382494 다시쓰는리뷰 : Who Are You? [4] 이응(119.204) 20.02.05 479 0
382493 다시쓰는리뷰 : 금빛 화살 [5] 이응(119.204) 20.02.04 719 0
382492 ㅋㅋㅋㅋㅋㅋㅋㅋㅋ [2] ㅁㅈㅁㅍㄹ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02.03 299 0
382491 에헤라디야 [6] 대갈오징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02.03 439 0
382490 다시쓰는 리뷰 : 지독한 예행연습 [8] 이응(119.204) 20.02.03 736 2
382487 음...휴덕하다 돌아와thㅓ [13] 이응(119.204) 20.02.03 557 0
382486 ㅃ.ㅎㄷ에 가이드가 [4] ㅇㅅㅇ(175.223) 20.02.02 374 0
382485 포하!!!!! [6] 대갈오징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01.24 358 0
382484 쵸코파이에 도청장치 들었던거 난 이제 봤네 ㅇㅇ(210.217) 20.01.21 329 0
382483 ㅌㅁㄴ [7] ㅁㅈㅁㅍㄹ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01.19 282 0
382482 ㅌㅁㄴ [7] 하우펑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01.18 304 0
382481 ㅌㅁㄴㅌㅁㄴㅌㅁㄴ [8] 대갈오징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01.17 261 0
382480 신고한다고 컴갤로긴함ㅋㅋㅋ [6] 백수3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01.15 364 0
382479 나는 흙수저라 놀려도 된다 ㅇㅇ(39.117) 20.01.14 249 0
382478 포하! [7] ㅍㄹㄹ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01.10 389 0
382477 ㅌㄴㅇ [6] ㅇㅇㅅㅌ(223.38) 20.01.08 298 0
382476 태양의 후예 lp 있는사람? 음돌이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01.08 358 0
382475 ㅌㅁㄴ [7] ㄷㄱㅇㅈ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01.08 321 0
382474 벌써 2020이라니 [9] 단결포로리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01.05 411 0
382473 ㅃ. 포롤들아!! 새해 복 많이 받아!! [9] ㄷㄱㅇㅈ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01.04 417 0
382472 ㅃ. 내가 오늘 버스 타고 가다가 급 생각났어 [5] ㅇㅅㅇ(110.70) 20.01.03 551 1
382471 추가할 수 있을까? [8] 대갈오징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01.01 576 0
382470 ㅇㅇ [7] 대갈오징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01.01 337 0
382469 이따 [4] 대갈오징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9.12.31 332 0
382468 올 한해도 수고해따 [6] ㅇㅅㅇ(110.70) 19.12.31 409 1
382467 어후 [3] 대갈오징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9.12.31 277 0
382466 마지막!! [7] ㅁㅈㅁㅍㄹ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9.12.31 354 0
382465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5] ㅁㅈㅁㅍㄹ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9.12.27 352 1
382464 멜크멜크 [4] ㅇㅅㅇ(175.223) 19.12.26 359 0
382462 포롤들아!!!!!!!! [6] 대갈오징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9.12.25 423 0
382461 메리크리스마스 [5] ㅇㅇ(122.34) 19.12.25 356 0
382460 몇 년만에 정주행 달렸는데 ㅇㅇ(221.157) 19.12.23 436 0
382459 태양의 후예 ost 명반 딱지 붙었었구나 [6] ㅇㅇ(110.70) 19.12.19 717 0
382458 ㅁㄴㅁㄴㅌㅁㄴ [4] 대갈오징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9.12.19 337 0
382456 ㅌㅍㅌㄴ [5] 토깽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9.12.15 408 0
382455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8] ㅁㅈㅁㅍㄹ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9.12.08 442 0
382454 짝짝짝 [3] ㅇㅅㅇ(114.207) 19.12.07 436 0
382453 그럼 살려요 [5] 대갈오징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9.12.05 495 0
382452 시강아 내 시강아 [4] 대갈오징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9.12.05 595 1
382451 오늘따라 더 보고 싶은 [4] 대갈오징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9.12.05 511 0
382450 나도 [5] 대갈오징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9.12.05 354 0
갤러리 내부 검색
제목+내용게시물 정렬 옵션

오른쪽 컨텐츠 영역

실시간 베스트

1/8

뉴스

디시미디어

디시이슈

1/2